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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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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남부 알타이 파지릭 계곡에는 2500년 전 무덤이 남아 있다. 이 계곡의 무덤은 여러 기가 있는데, 그 가운데 미라의 존재로 가장 잘 알려진 2호와 5호 무덤은 이미 포스팅했다. 이 무덤은 루덴코라는 러시아 학자가 1947~1948년에 걸쳐서 발굴한 것이다.

 

그런데 2호 바로 옆에 있는 1호는 18년 정도 먼저 발굴되었고, 그랴즈노프라는 사람이 발굴했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최초로 발굴된 무덤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까지 ‘스키타이 문화’의 중심축이 흑해북안에 치우쳐 있었으나, 이를 시베리아로 관심을 갖게 하게 한 발굴이었다. 매우 중요한 발굴이었다고 생각된다.

 

 

2500년 전 시베리아 남부 알타이의 무덤은 소형도 있지만 대형 고분은 무덤구덩이를 크게 파고 통나무로 된 무덤방을 만들고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고, 통나무로 무덤구덩이를 덮고 흙과 돌로 무덤구덩이를 채우고 가장 위에는 돌로 마무리 하는 구조이다.

 

1호무덤도 마찬가지인데, 외관에서 드러난 무덤의 직경은 47m이고 높이는 2.2 m이다(그림 1).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7.2×7.2m, 깊이는 4m가량이다. 가장 상부에 돌을 드러내고 그 아래에는 무덤구덩이를 파낸 흙을 다시 채운 흙이 상부의 돌 아래부터 무덤구덩이 까지 채워졌다(그림 2). 그 아래에는 낙엽송 300개를 채워서 무덤을 덮고 있었다(그림 3).

 

그림 1. 파지릭 1호분의 평면도

 

그림 2. 파지릭 1호분의 단면도 (남북방향)

 

그림 3. 파지릭 1호분의 경관(1), 파지릭 1호분의 무덤 내부(2) 중 무덤을 덮고 있는 낙엽송의 존재

 

 

무덤구덩이는 정확하게 네모꼴이지만 가장 바닥에 설치된 무덤방은 사다리꼴에 가까운데, 무덤방 덮개를 기준으로 긴 변의 길이는 4.87m, 짧은 변의 길이는 3.35m이고, 깊이는 1.4m가량이다(그림 4). 무덤방 덮개의 가장 상부는 매우 두터운 3개의 통나무가 덮개와는 반대방향으로 놓인 것이 확인되었다. 무덤방은 무덤구덩이의 남쪽벽에 붙여서 설치되었다. 2중으로 바닥에서는 통나무로 된 관(2.6×1.2m)이 확인되었다(그림 5). 무덤방 사이에는 돌로 채워졌다(그림 3, 그림6) 북쪽에는 말이 10마리 부장되었다. 말을 부장한 곳에도 통나무로 덮은 채 였다.

 

 

그림 4.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천장

 

그림 5.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내부

 

 

그림 6. 파지릭 1호분의 무덤 단면도(동서방향)

 

 

그림 4에는 도굴구덩이가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림 6과 7에는 천장에 도굴로 무덤천장을 절단한 흔적이 선명하다. 도굴구덩이로 인해서 무덤내부에는 원뿔모양으로 얼음이 차 있었다(그림 6, 그림 8-2).

 

그림 7. 파지릭 1호분의 무덤구덩이 내부 천장

 

 

 

그림 8.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내부 상태, 1-관이 놓인 남쪽벽, 2- 그 반대편, 무덤방은 1차와 2차무덤방이 있었다. 도굴로 인해서 북쪽 내벽은 크게 구멍이 나 있었고, 외벽은 하나의 통나무만 잘려 진 상태였다.

 

 

상부에 통나무 300개를 지지하기 위해서 무덤방 바깥에 북쪽과 남쪽에 이를 지지하기 위해서 수직으로 각각 3개씩 나무를 세워놓았다(그림4, 그림 5). 무덤의 단면에서도 확인된다(그림 3. 그림 6)

 

흥미로운 점은 무덤방의 평면형태이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파지릭 2호분도 모를 줄여서 정확하게 네모꼴이 아니었다. 평면형태가 직각사다리꼴에 가까웠다. 왜 그랬을까?

 

 

 

참고문헌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남부의 파지릭 5호분에서는 펠트로 제작된 대형 캐노피가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양모를 짠 카펫도 출토되었다. 200×185cm 이다(그림 1).

 

 가장 내부에는 긴네모꼴 안에 십자형 도형 24개(가로 4, 세로 6개)가 표현되었다(그림 2). 십자형 도형으로 보이지만, 연꽃봉우리가 4잎으로 도식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 연꽃 봉우리 모양은 동물문양장식을 표현한 뒤에 다시 보인다.

 이 연꽃봉우리 밖에는 그리핀이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는 뒤로 젖히고, 날개 및 꼬리가 위로 올라가게 한 것이다. 그리핀 다음에는 큰 뿔이 달린 사슴(혹은 순록) 이 표현되었다. 그 다음에는 말탄 전사가 표현되었는데, 각 면에 7개씩 49개가 표현되었다. 말은 목을 구부리게 표현되었고, 머리에는 깃털을 장식하고, 코리는 활로 묶여 있다. 무늬가 있는 안장 덮개가 표현되었다. 가장 마지막에는 다시 그리핀 모양을 반복해서 그리고 있다. 이 카펫에는 3종류의 동물이 등장한다.

 

그림 1. 파지릭 5호 출토, 카펫

 

그림 2. 파지릭 5호 출토 카펫의 세부(그림 1과 동일)

 

고대 이란의 표현된다고 한다.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그리핀은 독수리의 머리와 목에 갈기를 표현하는 것이 인기가 있었는데, 그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 카펫에 표현된 그리핀은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제이말, 1979).

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이란에서는 안장이 없어서 유라시아 유목민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말 장식, 전사의 모습과 의복, 목을 구부린 말의 표현등은 아무다리야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 봉헌 판에 있는 유목민의 인물 이미지와 유사하다(제이말 1979).

 

이 유물은 양모의 털로 씨실과 날씰을 교차해서 짠 것이다. 그런데 실을 만드는 털 가운데는 아주 소량으로 죽은 양의 털을 이용한 흔적을 코노노프(루덴코 1968)가 확인했고 후에 미콜라이축(1999)도 다시 확인했다.

 

이 유물에 대해서 그랴즈노프와 루덴코는 알타이에서 제작되었다고 생각했다(루덴코 1961). 온갖 종류를 다 응용하는 고대 이 지역의 전통은 유목민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알타이 유목민의 기술로 제작될 수 없었고, 이란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아르타모프(1973)도 있었다.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는 아마도 그 당시 세상 문화의 중심이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참고문헌

아르타모프 1973Артамонов М.И.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М.: Искусство, 1973. 279 с.(아르타모프 1973, 사카족의 부(富)

제이말 1979 Зеймаль Е.В.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Л.: Искусство, 1979. С. 39, 44, 51-52, 64.(제이말 1973, 아무다르 유적: 전시회도록)

미콜라이축 1999 Миколайчук Е.А. Исследование физико-химического состояния ворсового шерстяного ковра из пятого Пазырыкского кургана // Реставрационный сб. СПб.: АО «Славия», 1999. Вып. 2. С. 13-17. (미콜라이축 1999, 파지릭 유적의 5호에서 출토된 카펫의 화학적 분석

루덴코 1961, Руденко С.И. Искусство Алтая и Передней Азии (середина I тыс. до н.э.). М.: Издат. фирма РАН «Восточная литература», 1961. 66 с.(루덴코 1961, 알타이와 근동의 예술)

루덴코 1968 Руденко С.И. Древнейшие в мире художественные ковры и ткани. М.: Искусство, 1968. 121 с.(루덴코 1968, 고대 예술적인 양탄자와 직조물)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남부의 알타이 산맥 중에서 해발 1500m가량 되는 파지릭계곡에는 2500년 전 에 만들어진 공동묘지가 있다. 크고 작은 무덤이 있는데, 지상에 무덤을 덮은 돌이 남겨져서 쉽게 눈에 띈다. 지상으로 올라온 부분을 봉분이라고 하는데, 봉분이 있는 무덤을 러시아에서는 ‘쿠르간()이라고 부른다. 파지릭계곡에는 5개의 대형 쿠르간이 있고, 소형 쿠르간도 존재한다. 1호 무덤은 1929년에 그랴즈노프가 발굴했고, 2~5호는 루덴코가 1947~1949년까지 발굴했다.

 

특히 파지릭 5호분은 남녀미라와 함께 4륜의 바퀴가 있는 마차가 확인되어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무덤구덩이에는 통나무로 만들어진 무덤방이 2중으로 설치되었고 통나무관이 1개 존재했다. 남성과 여성을 함께 묻었다. 파지릭 2호는 도굴이 심해서 남녀 미라가 관 밖에서 확인되었지만, 관은 1개만 확인되어서 같은 방법으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파지릭 5호분에 묻힌 남녀는 55~60세 가량의 남성과 40대의 여성으로 몽골로이드이다. 남녀모두 미라처리된 것이다. 미라 처리는 뼈와 피부만 남기고 인간을 인간형상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복잡한 처리과정을 거치고 피부에 일종의 송진과 기름을 발라서 보존처리했다. 5호의 미라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지 않다. 2호에서는 남성에게 문신이 새겨져 있다. 남성은 키가 175~176cm가량이었다.

파지릭 5호분의 미라처리에 사용된 송진은 열대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에서 채취된 것이었다. 미라는 온몸에 절개면이 아주 많았는데, 지방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미라처리에서 가장 관건은 근육과 지방은 제거하면서 관절은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관절이 유지되어야 골격이 흐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파지릭 5호분에서는 말도 9마리나 확인된다. 무덤방의 바깥공간에 차례대로 부장되었다. 가장 나중에 들어간 말을 제외하고는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 외에도 굴레, 안장 등으로 장식되었다. 특히 가장 나중에 들어간 말은 가장 옵션이 좋은 말이었는데, 머리장식까지 있었다. 마차의 선두를 이끌었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나중에 들어간 말은 아무것도 착장되지 않았다.

 

말의 머리장식은 같은 시점에 만들어진 알타이에서도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3 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말의 옵션이다.

 

말을 부리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인 재갈과 재갈멈치는 고삐로 연결된다. 그러나 기능적인 것과는 약간은 거리가 있지만 말의 얼굴에는 굴레가 씌워지는데, 대부분 동물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말의 이마와 콧잔등 뿐만 아니라 귀 아래와 귀에서 입으로 연결되는 부위에는 사슴, 맹수 등이 전신, 두상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맹수는 독수리와 합체 되어서 이 세상에는 없는 동물이다. 그리핀이라고 부른다.

파지릭 5호분에는 굴레장식 뿐만 아니라 안장 및 안장덮개가 출토된다. 특히 가장 나중에 들어간 머리장식이 있던 1호 말은 안장덮개로 중국산 실크가 출토되었다.

 

뿐만 아니라 펠트로 제작된 대형 벽걸이 캐노피가 확인되는데, 남녀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남녀의 얼굴형태가 다르고, 남성은 알타이에서 확인되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지만, 말과 관련된 도구와 고리트(활과 화살을 함께 담는 통)는 알타이 식이다.

마차는 4개의 바퀴가 있는데, 살이 있는 바퀴이다. 마차에는 차양덮개가 있었으며 꼭대기에는 새모양의 펠트로 만든 인형 4마리가 붙어있었다. 백조의 모습이지만, 날개는 독수리이다.

특히 화려한 1호말, 마차, 대형 벽걸이 캐노피에서 확인되는 외래적인 요소(페르시아적인 요소)들 덕분에 파지릭 고분은 특히 5호분은 러시아학계에서는 당대의 가장 높은 사람들의 무덤으로 생각한다.

 

페르시아적인 요소는 안장의 덮개 중 일부인 고들개에 표현된 그리핀이 사자머리 그리핀이 확인되는데,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 왕조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적 요소와 그리스적인 요소는 흑해북안의 스키타이 무덤에서 자주 확인되는 특징인데, 이곳 알타이에서도 엿볼 수 있다.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인간과 말이 상주하는 무덤은 여러 곳에서 확인되는데 이름해서 파지릭 문화라고 한다. 파지릭 유적에서 유래되었다. 파지릭 문화는 스키타이 문화의 일원이다. 스키타이 문화는 흑해북쪽부터 시베리아 남부지역까지 동물문양을 상징으로 공동체를 이루었다. 좀 더 넓게는 중국의 황하상류 지역인 오르도스 및 만주의 일부인 요서지역까지 그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실제로 유적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동물문양장식이 확인된다. 그쪽에서 수입한 것이든, 이미테이션 했던 어쨌든 접촉이 있었다.

 

이제까지 저의 블로그를 계속 읽으신 분은 다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직업에서 오는 노파심에서 정리해보았다(선생님들은 잔소리를 많이 한다). 아직도 파지릭 유적에는 더 소개해야 할 무덤이 남아 있고(파지릭 1호분), 파지릭 유적 보다 백여년 빠른 바샤다르 유적과 약 삼백 년 정도 더 빠른 아르잔 1유적도 소개해 드려야 한다. 그리고 하도 많이 빽빽거렸던 했던 흑해 북쪽의 유적도 소개하고 싶은데,,.

 

앞으로는 좀 속도감 있게 진행할 것이다(스키타이 문화의 유물 중 파지릭 유적과 흑해북안,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컬렉션 등은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구경하실 수 있다. 꼭 가보시기 바란다. 워낙 크고 화려한 박물관이라서 그림만 보다 오실수 있으나 고고학방은 지하에 있다. 고고학 유물이 싫으면 다빈치 그림 부터 근현대 화가의 그림까지 그리스, 이집트 등등 너무 많아서 피곤하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다.

비행기 값만 빼면 루블값이 거의 바닥을 기고 있어서 크게 비싸지 않다. 운하에서 배를 탈 수 있는 여름이 좋다..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음으로 유럽의 휴가철이 끝나는 8말이 더 좋을 듯도 하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얼음공주미라는 고르노-알타이 시 박물관에 있는데, 진열을 해 놓았는지는 모르겠다..워낙 주민들의 반발이 심해서..)

 

 

김재윤의 고고학광좌

 

posted by 김재윤23

 

 

이제까지 2500년 전 알타이 위주로 스키타이 문화를 살펴보았다. 좀 더 자세하게는 파지릭 문화라고 일컫는다. 아시다시피 스키타이 문화라고 불리는 문화는 흑해 북안부터 시베리아 까지 매우 널리 퍼져 있었다. 기원전 9세기 까지 올라가는 유적이 있는 곳은 시베리아의 투바 이고, 아르잔 1유적에서 확인된다.

(아래 포스팅에서 스키타이 문화의 권역에 대한 표를 확인할 수 있다).

 

2020/02/1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1유적] -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그림 1.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전체 모습은 앞의 포스팅 참고 그림 2.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말탄 스키타이 전사의 모습, 투구는 코린트 식 그림 3.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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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북안에서 시베리아까지 광범위하게 퍼진 시간은 기원전 8~7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로 이 기간과 공간을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한다. 혹은 스키타이 세계, 스키타이 문화공동체라고도 한다. 그냥 쉽게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하자.

 

하지만 시베리아 남부 투바의 아르잔 1유적을 발굴(1971~1974년)하기 이전까지는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설은 흑해북안에 출토되는 그리스 스타일의 유물과 관련된 것으로 믿었다.(앞에서 스키타이문화의 기원과 관련된 학설을 설명한 바 있다)

왜냐하면 19세기 말 흑해북안과 가까운 쿠반 강(코카스서 산맥의 북쪽) 유역에서 발굴된 유물에서 동물문양장식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그리스 스타일의 색채를 많이 띄고 있었다. 이름하여 그리스-이오니아 양식이라고 불렸다.

이 지역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그리스 스타일 유물은 스키타이 문화인들이 그리스장인에게 ‘오더 메이드’해서 만든 주문자생산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당시 그리스는 흑해 북안에도 식민도시를 두었다고 한다(헤로도투스도 그리스 식민도시인 흑해의 올리비아에 살았다.)

 

그럼 어떻게 그리스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

 

그림 1은 켈레르메스(유적의 위치는 아래 포스팅 참고)라고 하는 유적의 4호분에서 출토된 거울이다. 은제 거울인데, 얼굴을 볼 수 있는 면은 은제로 주조된 것이고, 그 반대부분에는 중앙에 고리가 달렸던 흔적이 남아 있다. 8부분으로 섹션을 나누어서 주제가 그려져 있다. 8개의 각 섹션은 금제로 만든 판을 은제 원판에 붙이도록 제작된 것이다. 섹 션 사이의 눈금이 있는 부분은 금테인데 뗌질 되었다. 주조한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거울의 가장자리를 보면 알 수 있다. (필자는 주조방법을 설명할 때 붕어빵 굽는 것을 대입해서 학생들에게 설명한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 4호분 출토, 17.3cm

 

그림 2. 켈레르메스 유적 1호분 출토, 그림 1의 세부

 

거울의 가장 상단부에 그려진 여성은 사이벨레(그리스의 아르테미스)로 양손에 표범을 들고 있고, 여신과 대칭되는 곳에는 털로 덮인 괴물들이 사자머리 그리핀과 싸우고 있다. 날개달린 여성, 털달린 괴물, 사자머리 그리핀은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요소이고, 양과 같은 동물은 스키타이 문화의 요소이다. 그리고 중앙에 꼭지가 달려 있는 거울은 시베리아 남부에서 출토되는 유물에서 확인되는 특징이다.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그리스적이지 않은 스키타이 문화의 동물문양도 확인된다.

 

금제 유물 장식으로 표범을 형상화 한 것이다. 켈레르메스 유적은 기원전 7세기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아르잔 1유적이 발굴되기 전까지 그림 3과 같은 유물이 가장 이른 동물문양장식으로 여겨졌다.

 

그림 3. 켈레르메스 유적 1호분, 길이: 32.6cm, 높이 16.2cm, 방패장식으로 생각됨. 

 

위의 말은 바꾸어 말하면, 아르잔 1유적이 발굴되고 나서 그 생각은 바뀌었다는 것이다. 즉 더 이상 스키타문화에서 그리스-이오니아 양식으로 동물문양장식이 생겨났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리스 스타일의 유물이 스키타이 문화의 요소에서 확인되는 것은 맞다.

 

현재 이 유물들은 에르미타주에 소장되어 있다.

원래, 이 유물들은 표트르 1세가 모은 시베리아 황금유물 컬렉션과 함께 처음에는 쿤스트카메라에서 보관되었다. 그런데 표트르 1세가 수집한 시베리아 황금 유물과 흑해북안의 유물 중에서 비슷한 공통점이 발견되었고, 헤로투투스가 기록한 대로 이 문화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헤로도투스는 올리비아에 살았기 때문에 당시 흑해북안에 살던 이민족을 ‘스키타이’라고 불렀고, 이 문화의 이름도 여기서 연유하게 되었다.

 

흑해북안의 유적들은 1859년에 아직 로마노프 왕조가 있을 때 제국고고학위원회에서 시작했다. 켈레르메스 고분은 1904년에 발굴된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에 발굴되어서 스키타이 문화의 그리스 기원설은 시베리아 유적을 발굴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학계에서 대세를 이루었다. 시베리아의 대표적인 파지릭 유적은 1920년대 1호분 이후에 1947~1948년에 발굴되었고, 아르잔 1유적(스키타이문화의 가장 오래된 유적)은 1971~1974년에 조사되었고 현재는 스키타이문화의 기원 및 중심은 시베리아이다. (아르잔 1 유적에 대한 설명은 앞으로 할 예정입니다)

 

2020/04/1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시베리아황금유물컬렉션] - 기원전 9세기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의 기원에 대한 여러의견

 

기원전 9세기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의 기원에 대한 여러의견

우리는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대형의 벽걸이를 보았다. 그곳에서는 얼굴이 다른 남녀가 표현되어 있었다. 특히 남성은 말을 타고 있었는데, 남성의 복장은 알타이 지역의 2500년 전 문화에서는 볼 수 없는 짧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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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아르타모노프 1966,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페레보드치코바 1994,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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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시베리아 파지릭 유적의 5호에서는 마차가 해체된 채 무덤에 부장되었다. 마차는 4바퀴가 달린 마차이다. 해체되었지만 마차는 대부분 복원되었다.

 

그런데 파지릭 5호분의 무덤 단면도를 다시 보시기 바란다. 무덤 단면도에 있는 유물은 대부분 필자가 설명했다. 하지만 아직 설명하지 않은 유물 가운데서 펠트로 만든 백조모양의 새인형이 있다(그림1). 모두 4점 출토되었고, 분해된 마차 위의 대형 벽걸이 캐노피 위에 놓인 채 출토되었다.

 

 

그림 1.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백조모양인형. 펠트제. 

 

위와 같은 유물, 에르미타주 박물관 특별전(아즈벨레프 2019)

 

 

백조모양 새 인형은 펠트를 꿰매어 만든 것으로 속은 사슴털로 채워졌다. 처음에 백조는 흰색 몸통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누렇게 변했다. 꼬리는 붉고, 날개의 끝은 검고 아래로 쳐지게 표현했다. 모두 4점이 출토되었다.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실크로 만든 안장 덮개와 함께 중국기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 유물로 인해서 마차도 중국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제기된 것이다. 무덤 전체가 스키타이문화의 것이지만, 이렇게 백조 때문에 다른 것들도 의심을 받게 되었다.

 

루덴코(1953)는 이 유물을 마차의 장식품으로 마차의 지붕위에 부착했던 유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랴즈노프는(1958) 무덤의 가장 높은 곳을 장식하던 유물로 생각했다(그림 2). 그리고 두 사람의 의견은 현재까지도 지속되었다. 하지만 최근에 좀 더 과학적인 방법으로 백조인형이 마차와 관련있다는 설득력이 더 큰 힘이 실리게 되었다(아즈벨레프 2019)

 

 

그림 2. 그랴즈노프가 생각한 파지릭 5호분의 내부, 필자의 전 포스팅에서 무덤방 크기와 벽걸이 캐노피의 크기가 맞지 않음을 언급했다.

 

그랴즈노프가 주장한 백조가 벽걸이 장식의 상단을 차지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벽걸이 캐노피를 지지 하는 막대기의 각 때문이다. 약간 안으로 기울어져서 기둥을 세워서 착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그림 2).

 

 

그림 3. 그래픽 복원에 의한 파지릭 5호분 벽걸이의 착장복원(국, 니콜라예프 2011)

 

그런데 파지릭 유적의 5호분 특별전을 준비하면서 남아 있는 캐노피를 3D 그래픽 복원한 결과 캐노피가 직각으로 그림2와 같이 직각으로 서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국, 니콜라예프 2011), 펠트(벽걸이 캐노프)를 지지하는 막대기는 피라미드 구조와(그림 3)과 비슷해서, 무덤 천장의 꼭대기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아즈벨레프 2011).

 

백조인형은 벽걸이 장식과는 관련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벽걸이 캐노피가 아닌 펠트 조각 중에서 검은색 펠트가 있었는데, 이는 마차의 천장덮개 크기와 일치한다. 백조모양 새 다리에 긴 막대기(그림 1의 하단)가 연결된 것이 있는데 , 백조를 천장에 착장하기 위한 장치로 판명했다(니콜라예프 ,국 2017). 결국 백조모양 펠트인형은 마차의 상부덮개에 달렸던 유물이다(그림 4)

 

 

그림 4.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마차의 복원(아즈벨레프 2019)

 

 

그리고 ‘백조모양’은 말 그대로 백조모양이다. 앞에서 백조는 원래 흰색펠트로 제작되었다고 말씀드렸다. 흰색백조의 날개는 완전한 순백색이고 저렇게 길지 않다(그림 1). 그림 1의 새 날개는 백조날개가 아닌 독수리 날개이다 독수리의 날개는 아주 길고 갈색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 1이 백조이고,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드문유물로 생각했다면, 아니다. 이 새 조차도 독수리와 합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파지릭 5호분 보다 더 이른 기원전 7세기 아르잔 2 유적에서는 마차가 그려진 암각화가 무덤 내에서 출토되었고, 기원전 13~8세기의 카라숙문화(시베리아 청동기시대)에서 마차의 부속품이 출토되어서, 이미 시베리아에는 마차가 존재했다.

 

참고문헌

아즈벨레프 2011, Азбелев П.П. 2011, Пят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в экспозиц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Методическое пособие.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1. 32 с.(아즈벨레프 2011, 에르미타주 박물관 파지릭 5호분 특별전)

아즈벨레프 2019, Азбелев П.П. 2019 : Пазырыкские лебеди. // Актуальные 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кыргызского народа: прошлое, настоящее и будущее. Сб. статей в честь 70-летия кыргызского историка и востоковеда Мокеева А.М. Бишкек: 2019.(아즈벨레프 2019, 파지릭 유적의 백조)

국, 니콜라예프 2011, Гук Д.Ю., Николаев Н.Н. Замечания к реконструкции погребального шатра из пятого Пазырыкского кургана. // Методика междисциплинарных археологических исследований. Омск: 2011. С. 49-61.(국, 니콜라예프 2011,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벽걸이 캐노피의 복원)

니콜라예프, 국 2017, Николаев Н.Н., Гук Д.Ю. 2017, Проверка гипотезы на 3D модели находок из Пятого Пазырыкского кургана. // V (XXI) Всероссийский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съезд [Электронный ресурс]. / отв. ред. А.П. Деревянко, А.А. Тишкин. Электрон. текст. дан. (36,739 Мб). Барнаул: ФГБОУ ВО «Алтайский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университет». 2017(니콜라예프, 국 2017, 파지릭 5호분 출토 유물을 3D그래픽 복원으로 검증)

그랴즈노프 1958 Грязнов М.П. Древнее искусство Алтая. Л.: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Эрмитаж. 1958(그랴즈노프 1968, 알타이의 고대 예술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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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시베리아 남부의 알타이 산에 위치한 파지릭 유적의 5호분에서는 인간의 무덤에 말이 함께 매장되었다. 말은 화려하게 치장되었는데, 주로 동물문양을 장식했다. 대상이 된 동물은 사슴과 같은 굽동물, 호랑이와 같은 맹수와 독수리로 보이는 맹금류이다.

뿐만 아니라 이를 다 조합한 유물이 있는데, 이름해서 그리핀이다. 앞에서 그리핀의 모습에 대해서 설명했다. 주로 맹수와 굽동물이 결합되거나, 맹금류를 변형시키기도 한다.

 

맹수의 입에 독수리 부리를 붙이기도 하고, 독수리 머리와 목에 말의 갈기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보여드린 그리핀 가운데서 날개를 펴고 있는 그리핀을 보여 드렸다. 바샤다르 유적은 같은 알타이 산에 위치하는데, 파지릭 유적 보다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서쪽으로 약 151km 떨어져 있다(직선거리).

 

https://drive.google.com/open?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파지릭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파지릭문화의 유적

www.google.com

 

지도 1.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현재까지 언급된 유적이 다 있음. 바샤다르 유적은 지도에서 가장 왼쪽 점(주황색)이다. 지난 번에 아르잔 유적(보라색)은 지도 사진만 제공했으나, 위의 링크를 보시면 좀 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구글에 사진도 소개되어 있다. 구글로 여행을 떠나는 것도 나름 재밌다. 필자는 러시아 연해주의 발해성이나 여진 성을 구글 지도로 찾아본다...요즘은 시간이 없지만.....

 

이곳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파지릭이나 아크 알라하 유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모습의 그리핀이 확인되었다.

바로 보면 독수리라고 알아 차릴 수 있으나, 자세히 보면 독수리와는 다르다. 조류에는 없는 귀와 독수리 다리라기에는 매우 두꺼운 다리의 표현 때문이다. 새의 머리는 오른쪽을 향하고 날개를 활짝 폈다. 귀가 매우 큰데, 소용돌이 모양으로 표현되었다. 새의 몸통 표현도 새라기 보다는 물고기의 비늘표현과 같다. 실제로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는 말의 안장에 장식한 유물 가운데서 물고기가 있었다. 이 유물은 모두 4개가 확인되었는데, 크기가 거의 비슷하다. 14× 24.4cm이고, 안장의 장식판이다. 안장 앞에 2점, 뒤에 두 점 달도록 되어 있다. 이 유물은 편평해 보이지만 실제로 단면은 약간 굽어서 안장의 곡면에 맞게 제작되었다고 한다.

 

바샤다르 유적의 그리핀(그림1)은 한국에도 1991년에 온 적이 있다. 알타이의 목제 마구 장식은 모두 금박을 입혔다. 쉽게 찢어져서 남아 있지 않지만.

 

바샤다르 유적은 파지릭 유적 보다 약간 이르다고 생각해서 기원전 6세기 가량으로 생각한다.

파지릭 유적(2호분, 5호분)과 아크 알라하 3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1호분, 2호분)에서는 그리핀이 독수리 머리를 그리핀으로 많이 표현했지만 주로 두상을 표현했고, 전신을 표현한 경우는 맹수가 중심이 되었다. 독수리 전신을 합성 시킨 그리핀이 파지릭 2호분(가죽용기)에서 확인되기는 하지만 그리핀의 날개가 접혀진 모양이어서 바샤다르 유적과 같이 날개를 편 유물과는 방법에서 차이가 있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 출토된 말 안장 장식. 목제.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https://youtu.be/Dij6QpK_ho4

 

이 동영상은 얼음공주 무덤으로 알려진 아크 알라하 3유적의 발굴과정과 여러 분석 및 보관처리까지를 BBC에서 만든 것이다.  필자는 러시아어 나레이션 된 것을 우연히 찾아서 필자에게 영문 동영상은 없다. BBC에서 촬영한 것도 있을 테고 촬영을 노보시베리스크 과학아카데미에서 하고 제공된 영상도 편집되어 보인다. 지난번 보다는 길고(48분 가량) 없던 부분도 포함되어서 필자에게는 무척 흥미로웠다. 러시아어 지만 간간히 영문자막도 있다. 혹시 BBC에서 찾으면 좀 더 구체적인 영문동영상도 있을 지 모르겠다.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무덤 속에는 사람과 말이 함께 매장되었다(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 식상하시겠지만). 말의 숫자는 무덤의 주인공에 따라서 달라진다. 이제까지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무덤 5기 소개 해 드렸다. 얼음공주의 무덤인 아크 알라하 3유적 1기, 남성전사의 무덤인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아이의 무덤인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은 우코크 고원에 위치했고, 파지릭 유적의 2호분과 5호분에는 모두 남녀가 함께 매장되었으며, 파지릭 계곡에 위치한다.

말은 대부분 재갈과 굴레장식을 착장했다(물론 하지 않은 채 무덤에 들어간 말도 있다.)

 

오늘은 약간 흥미로운 말의 굴레장식을 소개하고자 한다. 파지릭 1호분은 아직 무덤을 소개하지 않았지만, 굴레장식에 동물문양 대신해서 사람얼굴을 5개 조각해서 달아 놓았다. 말의 굴레장식에 매단 동물문양장식은 대부분 이마와 콧잔등에 달리는 장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비슷했다. 그런데 1호에서 출토된 말의 얼굴모양굴레 장식은 얼굴모양이 달라서 4명의 얼굴이 확인된다. 콧잔등을 장식 하는 사람(그림 2-4)과 말의 귀 아래를 장식하는 사람(그림 2-1,2)은 서로 다른 얼굴이고 Y자형 장식 위에 붙은 사람(2-3)은 양쪽이 같은 얼굴(그림 1)이다.

 

공통적인 것은 모두 턱수염을 기르고 있다. 이 얼굴모양 마스크를 자세히 보시면 스키타이 문화의 사람들이 대단히 세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모두 눈과 특히 광대뼈 표현이 차이가 크다. 입모양도 4명이 약간씩 다르다. 물론 얼굴의 길이와 너비의 비 차이가 달라서 인종이 다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을 수 없다.

 

콧잔등을 장식하는 사람얼굴(그림 2-4)이 특히 다른데(눈, 코, 입, 수염, 얼굴모양), 말의 주인 얼굴인지도 모르겠다.

 

 

그림 1. 파지릭 유적 1호분 출토 말의 굴레장식, 말의 굴레 착용은 그림 3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그림 2. 파지릭 유적 1호분 출토 말의 굴레장식 세부(그림1과 동일유물), 목제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남성얼굴의 머리와 턱수염사이의 둥근 원이다. 이미 여러번 보여드린 호랑이나 맹수의 귀와 같은 표현이다. 만약에 이 부분을 설명할 수 있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 다면, 단순한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 파지릭 5호에서 확인된 반인반수를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5호분에서 남성의 얼굴이 표현된 벽걸이가 확인되었고, 1호분에서 남성 얼굴이 표현되었고, 그 벽걸이에서 사슴 뿔을 뒤집어 쓰고, 동물문양의 옷을 입은 반인반수의 남성도 확인되었다(앞의 포스팅에서 확인바랍니다.).

 

전해지지 않고, 확인되지는 않지만 2500년 전 그들의 ‘이야기’속 컨텐츠 였을 것이다. 이런 게 신화가 아니었겠는가? 또한 동물에 대한 관념을 표현한다고도 생각한다. 인간과 동물이 같은 동격이라고 생각한 것이지 않을까?

 

 

 

그림 3. 말의 굴레 장식 및, 안장 등 착용 예, 그림 1을 그림 3의 말 얼굴에 대입하면 된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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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무덤 속에는 인간과 함께 동물이 함께 묻혔다. 실제로 묻은 동물은 주로 말이었지만, 말과 인간을 장식하는 곳곳에는 그 외의 동물이 형상화되었다.

크게는 세 가지 동물로 구분되는데, 굽동물, 맹수류와 맹금류이다. 상상의 동물인 그리핀은 이 동물들이 합성된 것이다.

 

그 중에서 맹수류는 늑대, 호랑이(혹은 표범)과 곰이 대상물이다. 늑대와 호랑이는 주둥이가 긴 동물은 늑대 그 외는 표범 혹은 호랑이로 보고 있다. 곰도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 필자는 보지 못했다.

 

어제 설명드린 아르잔 1유적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몸을 동그랗게 만 표범 장식은 스키타이 문화에서 가장 이른 유물이다. 벨트장식이라고 불리는데, 말의 안장과 연결되어 말의 앞 가슴을 장식하는 유물로 생각된다.

 

2020/04/04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시베리아황금유물컬렉션] - 에르미타주 소장, 황금 버클 표범장식

 

에르미타주 소장, 황금 버클 표범장식

파지릭 유적은 스키타이 문화에서도 기원전 5세기 가량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스키타이문화는 이르면 기원전 9세기 까지도 올라가는데, 그때도 동물문양장식이 있을까?스키타이 문화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동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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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아르잔 1 유적에서 출토된 표범장식을 착용한 말

 

 

그림 2. 그림 1과 유사하게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맹수류이다. 1-쿠라코프스키 유적, 2-퍄노프카 유적, 3-이르쿨, 4-파지릭 유적, 5-이식 유적, 6-브류메펠드, 7-베레지노프카,8-바르나, 9-투엑타, 10, 11, 퍄티마리 유적(페레보드치코바 그림)

 

볼가 강 유역의 퍄노프카 유적(그림 2-2), 우랄 강 유역의 이르쿨(그림 2-2), 카자스스탄의 이식 유적(그림 2-5), 알타이의 파지릭 유적 4호분 출토(그림 2-4)등에서 출토된 유물은 주둥이가 길어서 늑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동물장식의 꼬리가 길면 호랑이나 표범종류라고 한다. 이 들 유물은 대부분 기원전 5~4세기 유물이다.

 

초기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동물문양은 추상적인 기법이 많아서 실제로 종을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으나 기원전 5세기에는 매우 표현이 구체적이고 실제와 된다.

페레보드치코바는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동물들이 늑대라는 주장에 대해서 약간 다른 입장인데, 호랑이나 표범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늑대, 호랑이 모두 꼬리가 길기 때문이다.

 

필자는 페레보드치코바의 의견에 좀 더 수긍이 간다. 꼬리의 구분은 애매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늑대와 호랑이를 꼬리와 주둥이의 길이로 구분하기에는 애매 한 점도 있다.

실제로 늑대와 호랑이를 살펴보면 가장 큰 차이점은 몸의 크기, 몸의 문양 등이 있지만 그 보다 더 큰 차이점은 귀의 모양이다. 늑대는 귀가 뾰족하고, 호랑이는 귀가 둥글다. 유라시아늑대는 다른 지역 늑대보다 더 뾰족하다고 한다. 늑대와 호랑이의 꼬리는 길지만 꼬리의 모양도 다르다.

 

호랑이는 나무가 많고 물이 많은 곳에 산다. 호랑이는 나무에 몸을 숨기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늑대는 서식환경이 매우 다양하며, 특히 회색늑대는 인간과 사자를 제외하고는 가장 널리 퍼져 사는 동물로 알려졌다(Feldhamer, George A 2003).

 

늑대의 천적 중에 하나가 호랑이라고 하는데, 같이 공존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지만

파지릭 5호분에서 확인된 동물문양장식에는 한 말의 굴레장식에 두 동물이 같이 표현되어 있다.(아래 포스팅의 그림 5에서 확인가능하다)

 

2020/04/13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5호분] -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무덤 속 동물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무덤 속 동물

시베리아의 알타이 산맥 가운데서 해발 1500m 파지릭 계곡에는 2500년 전 무덤이 남아 있다. 2500년 전 알타이에는 무덤 안에 말을 함께 매장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파지릭 유적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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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수류는 굽동물과 생김새도 다르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법도 차이가 있다. 생물이니 두 동물이 다르게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듯 보이지만 필자는 그냥 그런 방법까지 차이를 두었다는 점에서 놀란다.

 

맹수와 굽동물의 표현법에 차이는 자세이다. 전신을 표현했을 때이다.

맹수류는 표현할 때 관절을 굽힐 때는 다리를 앞으로 직각으로 펴고 앉는 자세로 그려진다(그림 3-4,15,17,19).( 굽동물은 앉은 모습이 다르다.) 혹은 앞에서 보았듯이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자세와 다리를 세운 자세의 유물(그림 4)도 출토된다.

 

 

그림 3. 파지릭 유적, 투엑타 유적, 에르미타주 소장 맹수표현

 

그림 4.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맹수

 

 

참고문헌

Feldhamer, George A.; Thompson, Bruce Carlyle; Chapman, Joseph A. (2003). 《Wild Mammals of North America: Biology, Management, and Conservation》

그랴즈노프 1980, Грязнов М.П. 1980 :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Л.: 1980.(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문화의 차르 고분, 아르잔)

아르타모노프 1966,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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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대형의 벽걸이를 보았다. 그곳에서는 얼굴이 다른 남녀가 표현되어 있었다. 특히 남성은 말을 타고 있었는데, 남성의 복장은 알타이 지역의 2500년 전 문화에서는 볼 수 없는 짧고 달라붙는 상의 자켓과 하의를 착용했지만, 남성이 타고 있는 말은 달랐다. 알타이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흡사한 굴레장식과 고리투스(활과 화살통), 안장 및 덮개 등이 그렇다. 이 벽걸이의 오른쪽 하단에서 확인된 반인반수로 표현된 사람도 얼굴은 말탄 남성과 유사하다. 반인반수, 피닉스, 말탄 남성 뿐만 등은 알타이가 아닌 외부적인 성격으로 생각된다. 의자에 앉은 여성이 들고 있는 꽃 모양 등도 마찬가지이다.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표트르 1세는 17세기 후반부터 스키타이 유물을 수집했고, 황금 유물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학문적’인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이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에 흑해북안에서부터 이다. 흑해북안에서 출토된 유물이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유물과 공통점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아무도 하지 못했지만, 켈레르메스 등 여러 유적이 발굴되고, ‘다르지만 비슷한 요소’가 확인되기 시작했다.

 

 

그림 1. 흑해 북안과 쿠반강. 쿠반강은 코카스서 산맥의 북쪽 지역이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필자는 흑해북안의 유물이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그의 쿤스트카메라에 같이 소장되기 시작하면서 더 그런 효과를 가져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설명한 바 있지만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이관하기 이전에는 쿤스트카메라에 소장되었다.

 

지도를 펴서 살펴보시면 아시겠지만 흑해(현재 우크라이나 남부)는 그리스와 가깝다. 그래서 흑해북안에서 출토된 유물은 스키타이 민족들이 그리스의 소 도시에서 주문받아서 만들게 되면서 스키타이 요소+그리스 혹은 근동적인 요소가 함께 섞인 유물이 나오게 되었다. 이를 그리스-이오니아 양식이라고 하는데, 알타이가 발굴되기 이전까지 동물문양장식의 기원을 그리스-이오니아양식에서 찾으려고 했다(파르마콥스키 1914).

 

흑해북쪽과 가까운 곳으로 쿠반강 유역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서 이란(페르시아)에서 볼 수 있는 유물의 특징에서 스키타이문화의 기원을 찾으려는 연구자도 있었다(로스톱체프 1925). 그는 아주 빈약한 유물로 이란의 청동유물, 쿠반 강, 흑해북안, 중국의 오르도스 지역의 유물을 유사성을 주장했는데, 그가 주장한 바는 20년이 지나서 유물이 구체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1947년 이란의 북쪽 지비예 유적에서 확인된 유물이다. 이 유적의 유물은 여러 이란적인 요소+스키타이 동물문양이 묘사되었고, 고다르드는 기원전 9세기 까지 올라간다고 생각되어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과 일정정도 연관이 있다고 믿었다(페레보드치코바 1994). 그러나 이 유적은 연대가 지나치게 빠르고 흑해북안의 스키타이문화권 유적인 켈레르메스(기원전 7~6세기)정이다. 왜냐하면 그 뒤에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는 유적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대략 기원전 7~6세기대의 유적이었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의 남부 투바 아르잔에서 1971~1974년에 걸쳐서 발굴된 유적은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을 시베리아로 옮겨놓게 되었다. 이 유적은 기원전 9~8세기로 연대가 확정되었고 그 근거는 나무나이테 연대측정법과 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한 것이었다(테르네노시킨 1976, 그랴즈노프 1980). 발굴당시에 연대측정되었고, 2000년대 들어와서 다시 유적들의 연대측정을 실시했으나 같은 결과였다(알렉세프 외 2005). 아르잔 1유적에서는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표범장식이 확인되었고, 무덤의 구조물로 쓴 부자재 가운데 사슴이 그려진 돌들이 발견된다. 이름해서 사슴돌이라고 하는데, 사슴돌에 그려진 사슴의 모습은 알타이 유적의 유물과도 그 모습에서 관련성이 확인된다.

 

 

그림 2. 시베리아 남부, 투바의 아르잔 1, 왼쪽 가장 상단의 그림(1)과 오른쪽 상단(5)에 사슴이 그려져 있는데, 사슴돌이라고 한다.  아르잔 유적의 위치는 포스팅되었다. 사슴돌은 비석과 같은 모습이다. 글자 대신 그림이 그려져 있다.

 

스키타이문화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외부와 내부설이 있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스키타이문화권이 흑해 북안부터 시베리아에 걸쳐서 광대한 지역에 퍼져 있었다면, 그 외연인 흑해북안은 그리스와 이란 지역과 멀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서로 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파지릭 5호분에서 확인되는 남성의 모습이나 꽃 모양 등이 이유 없이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Грязнов М.П. 1980 :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Л.(그랴즈노프 1980, 초기스키타이문화의 차르 무덤, 아르잔)

파르마코프스키 1914, Фармаковский Б.В. 1914, Архаический период в России. — MAP, 1914, №34. (파르마코프스키 1914, 러시아의 고대시대)

로스토프체프, 1925. Ростовцев М.И. Скифия и Боспор. Л., 1925 (로스토프체프 1925, 보스포르 지역의 스키타이)

테레노시키니 1976, Тереножкин. А.И. Киммерийцы. Киев, 1976.(테레노시킨 1976, 킴메리츠 )

알렉세프 외 2005, А.Ю. Алексеев 2005, Евразия в скифскую эпоху: радиоуглеродная и археологическая хронология. СПб: «Теза». 2005(유라시아 스키타이 시대: 탄소연대)

페레보드치코바 1994,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Godard A. Le trésor de Ziwiye (Kurdistan). Haarlem, 1950.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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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파지릭 5호에서 출토된 마차. 바퀴는 바퀴를 구성하는 프레임 2개로 제작되었다.

 

 

그림 2. 파지릭 5호에서 출토된 마차의 견인 막대기(1)과 바퀴(2)

 

 

2500년 전 시베리아의 알타이 파지릭 유적 5호분에서 출토된 마차가 출토되었다. 마차는 원시적인 형태가 아니라 바퀴가 4개 달려 있고, 바퀴는 바퀴살이 있는 구조이다.

 

마차의 바퀴는 자작나무로 제작되었다. 바퀴가 달린 두 개의 축은 6개의 축으로 연결된다. 견인하는 막대기와 멍에가 있다. 마차의 기본 축은 세로 두 개의 세로 방향 막대기가 중심을 잡는데 하단 막대기는 지지역할을 하며 126cm, 상단은 92cm이다. 앞 뒤 바퀴를 연결하는 막대의 길이는 178cm이다. 이 막대는 흔들림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한다. 바퀴의 직경은 160cm가량이고, 바퀴의 프레임을 만드는 가장자리는 길이 66cm이고, 불규칙적인 원통형 모양이다. 바퀴의 가장 중앙 직경은 12cm이고, 이곳에서부터 고정해서 바퀴의 프레임과 연결되는데, 그 곳의 바퀴 살의 간격은 24cm이다. 바퀴의 프레임은 두 개의 구부러지는 막대(각각 290cm)로 구성되는데, 폭은 7cm이고, 두께가 5.6 cm이다. 바퀴 둘레가 겹쳐지는 부분은 30~40cm에 막대기와 벨트로 고정된다(그림 1). 프레임에는 길이 5cm, 너비 1cm로 바퀴살을 넣는 구멍이 있다.바퀴의 살은 모두 34점으로 길이는 70~71cm가량이다.

 

 

그림 3.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마차의 구조

 

바퀴가 큰 데 비해서 마차의 크기가 작은 편이기 때문에 앞 바퀴와 뒷바퀴 사이의 거리는 약 6cm가량이다. 견인바를 묶는 곳에는 앞 차축 쿠션에 3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마차의 몸체는 다소 복잡하다. 상 하단 두 개의 프레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단은 128× 238cm, 상단은 128×206cm이다. 상하단은 작은 기둥처럼 생긴 발러스터 연결되어 있는데, 높이는 27cm이다. 모두 21개이다.

 

하단프레임에는 세로 막대에 4개의 발러스터가 착장되어 있다. 3개는 앞쪽에 1개는 뒤쪽에 위치한다. 상단 프레임에는 6개의 가로 막대가 운전석 뒤쪽에 세로 방향의 막대기 안쪽으로 착장되어 있다. 발러스터는 가로 방향의 상하 막대기에 삽입되어 구성되는데, 운전석 뒷자석의 프레임은 마차 길이방향의 막대기 안으로 끼워넣게 설계 되었다.

하부프레임의 운전석 뒤쪽에는 길이 22cm의 발러스터가 3개 삽입되어 있다. 직경이 1cm이다. 발러스터는 가로방향의 막대기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데, 이 발러스터 사이는 끈으로도 고정된다.

 

운전석 바로 뒤쪽부터 상단프레임이 시작되는데, 길이가 27cm인 가로 막대가 사이에 6개의 납작한 막대기가 삽입되어 있다. 운전석 바로 뒤쪽의 가로 막대기는 발러스터 3개 및 끈으로 연결되었다. 상부 프레임에는 세로로 14개의 막대기가 세워져서 선반과 같은 구조인데, 막대기 사이는 벨트와 같은 역할을 파는 격자판이 하단을 고정하고 있다. 이 격자판의 전체 둘레는 3.5m이고 탄성이 좋은 막대를 이용했다. 직경 6-7mm의 나무막대기를 세로로 고정해서 격자 모양이 되도록 했고, 격자 간의 길이는 4~4.5cm이다. 세로방향의 막대기는 짧게 끊어져서 가로 방향의 막대기와 패드로 연결되었고, 어떤 곳은 천으로도 연결시킨 부위도 있다. 격자판은 전체가 붉은 색으로 칠해졌다.

운전자의 좌석에서 다리를 놓는 난간과 상단의 지붕은 두께 1cm가량의 널빤지로 덮여 있다. 측면에는 구멍을 통해서 끈으로 묶었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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