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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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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3. 10. 20:05 실크로드, 교역의 역사

https://blog.naver.com/eastsearoad/223378761434

 

기원전 2000년기 실크로드의 교역

우즈베키스탄의 선사시대는 구석기시대(150만년전)부터 신석기시대를 거쳐서 기원전 2000년기부터 청동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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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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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아르메니아의 국립박물관은 역시나 광장에 위치한다. 광장과 박물관은 대부분의 유라시아 국가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도 국립역사박물관이 위치하고 있고, 블라디보스톡에도 중앙광장에 연해주주립박물관이 있다. 중국의 국가박물관도 광장에 있다.

조지아의 국립박물관도 광장과 매우 인접한 곳에 위치한다.

 

 

그림 1. 아름다운 아르메니아 예레반의 광장

 

그림 2. 예레반 광장 앞의 박물관

 

아르메니아는 박물관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박물관 관리도 부실 한 편이었다. 물론 상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조지아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박물관도 매우 관리를 많이 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부분은 현대사 혹은 현대정치와 관련이 많은 듯 했다. 아르메니아는 옆의 나라인 아제르바이잔, 튀르키예와 매우 사이가 않좋다. 아제르바이잔과는 아직도 분쟁(혹은 전쟁)중이고, 튀르키예와도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 기독교국가, 그리고 자신들의 성지인 아라라트(대홍수 끝에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다는 곳)를 빼앗다는 것 때문에 이슬람 국가들과 등지고 있는 것이었다. 덕분에 자신의 고대역사 연구도 크게 진전되지 못했다. 앗시리아와 견줄 만큼 강성했다고 하지만 우라르투의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지지 못했다.

 

그림 3. 예레반의 예레부니 성곽에서 보이는 아라라트, 눈으로는 이것보다는 잘 보였다.

 

반면에 조지아는 러시아에서 탈출하는데 힘쓴다. 아르메니아와는 달리 러시아말을 알아도 아는척 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 다 러시아말을 안다. 국가명도 그루지아에서 조지아로 변경하는 것 만 봐도 그렇다. 박물관에도 이런 점들이 녹아 있다.

 

분명히 스키타이 문화의 청동 화살촉들이 Trell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표시되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 대신에 Cochian culture 문화로 설명하고 있다. 이 문화는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까지 지속된 문화로 설명한다. 특정 고고학문화가 시대를 막론하고 지속되었다고 하는 것은 좀 억지 스럽다. 특히 기원전 700-400년 사이는 Colchis 라고 조지아의 해안(흑해)가 따라서 문화가 번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에서 말한 유적은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주로 이 문화는 남쪽과 관련시켜서 이야기 하지 코카서스 산을 넘지 않았다.

 

왜 이런 현상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박물관 가장 위층에서 답을 찾았다. 러시아 볼셰비키들의 만행을 전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기차칸 까지 떼어내어서 전시중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왜 조지아 사람들이 스탈린을 숨기고 싶어하는지.

 

 

 

너무 당연한 것일까? 잘은 모르겠다.

조지아 대통령궁전의 화려함과 그와 관련된 비리도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와중에 들을 수 있었다.

 

아무튼 코카서스 남쪽까지 스키타이 문화의 영역으로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사실과 스키타이 문화 보다 청동기시대에 더 뚜렷하게 코카서스 북쪽과 닮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마도 북방인들은 남방인들을 막기 위한 완충제 역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스스로 그렇게 자초하고 있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또 그럴 것이다.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는 몽골 국립박물관과 새로이 생긴 칭기스칸 국립박물관이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칭기스칸 박물관에서 각 대학교 고고학 교수들이 그간 발굴한 유물을 싹 걷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칭기스킨 박물관에는 선사와 고대 유물은 그렇게 많이 전시되어 있지 않았다.

 

필자가 느끼기에는 그렇지만, 또 다른 입장에서 보면 그만하면 많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암튼 선사시대 보다는 흉노제국(기원전 4세기 이후)부터의 유물이 많은 편이다.

선사시대 유물은(흉노 이전) 아직 몽골 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칭기스칸 국립박물관은 칭기스칸이 제국을 세우기 전과 후로 나눠져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몽골인들은 칭기스칸의 뿌리를 흉노로부터 찾고 있다. 필자를 도와준 몽골학생이 말해준 바에 따르면 00비사에서도 칭기스칸이 자신의 뿌리를 흉노로 부터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박물관에서는 사진찍기금지이다. 흉노이전에는 그렇게 살벌하지 않았지만 흉노 이후부터는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스마트폰 든 외국인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몽골국립박물관에는 구석기시대부터 현대 몽골까지 골고루 다루고 있다. 아마도 칭기스칸 국립박물관은 현재 몽골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전 국가에 불고 있는 자국 중심의 역사강조의 열풍일 것이다.

 

몽골국립박물관은 소련이었거나, 그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들처럼 수도의 중앙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옛 소비에트 건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고, 전시도 비슷한 기법이다. 보기에는 커 보이지 않지만, 공간에 비해서 유물을 많이 전시하고 있다(러시아 계단이라고 불리는 1.5층이 1 층이 되는 것도 그대로이다).

반면에 칭기스칸 국립박물관은 아주 현대식 건물이다(사실 중국국가박물관이 떠올랐다. 필자가 받은 개인적인 느낌이다). 두 박물관은 불과 몇 m떨어져 있다. 참고하시면 좋겠다.

 

그림 1. 칭기스칸 국립박물관(몽골국립박물관의 외관은 사진이 없다..)

 

그림 2.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의 몽골 유물. 알타이 서부.

 

필자가 궁금했던 시기는 스키타이 문화 및 그 이전이다. 칭기스칸박물관에는 몇 몇 사슴돌 말고는 아예 없었고, 몽골국립박물관에는 예전에 필자가 확보한 자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몽골에서 크게 연구가 되지 않았거나 혹은 스키타이 문화 이전은 관심이 없다고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 몽골 연구자들이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필자의 관심도는 13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아졌고, 당장 논문도 적어야 한다. 책상위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머릿속에 장착되었다. (그걸 가서 뵈야 아냐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절대로 책상 위에서는 얻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렇게 욕하는 사람들은 아마 절대로 모를 그런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설명해 줄 필요도 없다. 설명해 줘도 모를것을 뭐하러 하나..)

 

지금은 아르메니아인데, 마음이 급하다. 할 것이 너무 많다. 내일은 조지아로 넘어가는데, 어서 빨리 가서 보고, 한국가서 집중해서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

 

 

김재윤.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

 

 

 

 

 

posted by 김재윤23
2023. 8. 9. 14:14 카테고리 없음

 

 

지난번에 포스팅 한 국회도서관에서 요청한 금주의 서평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요청덕분에 책의 내용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생각과 아이디어도 얻었습니다.

책의 저자 생각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저자의 입장입니다만. 아마도 그녀가 그런 입장인 것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남성과 여성은 자연의 부산물로써 다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앞의 포스팅에서 밝혀둔 대로입니다.

 

오늘 포스팅은 내용은 없지만, 좀 더 예쁘게 포장된 글을 읽는 것이 편할 듯 해서 올립니다. 여러 가지로 적을 포스팅들이 있지만, 왠지 선뜻 손이 가지 않네요...

 

 

(url: https://www.nanet.go.kr/datasearch/commant/selectWeekCommantList.do)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2023. 7. 23. 10:10 카테고리 없음

 

국회도서관에서 서평을 작성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서 작성한 것이다.

책의 제목은 파뭍힌 여성이다.

 

 

 

프랑스 선사학자인 마릴렌 파투-마티스가 쓴 책이 국내에 번역되었다. 고고학자료를 통해서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불편한 시각을 비판한 책이다. 선사자료 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 그 이후까지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고, 20세기 이후 여성이 투표권과 노동권을 획득하게 되는 긴 여정을 다루고 있다.

 

필자가 서평 말미에 밝혔지만 이 선사학자의 시각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지만, 동의하지않는 부분도 있다. 남성과 여성의 개념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부분이다. 필자(김재윤)는 남성과 여성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확신한다.

 

프랑스에서 여권 신장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던 이유는 아마도 프랑스 혁명으로 자유를 찾은 사람들은 남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잘 아시다시피 서구권에서 여성이 투표권과 노동권을 찾은 것은 20세기 들어와서 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구권에서 여성들의 투쟁이 먼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부분까지 필자가 서평에서 밝힐 수 없었기에 블로그를 통해서 입장을 정리한다.

 

아래는 서평의 내용이다.

 

마릴렌 파투-마티스는 구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고고학 자료에서 때로는 역사적 사실에서 ‘여성의 존재’를 찾아서 남성 중심의 사회적 선입관을 반박했다. 그녀는 선사학 전공자로서 네안데르탈인 연구자로서 선사시대 물질 자료 뿐만 아니라 고대 및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더 기울어진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통찰했다. 서구권에서 여성이 투표권과 노동권을 획득하게 되는 20세기 이후까지 긴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녀는 ‘선사학’의 태동이 서구에서 여성의 투쟁이 시작된 시점과 거의 비슷하다는데 주목했다. 선사학이 활발하게 연구된 것은 20세기 들어와서 이지만 그 뿌리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있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인간사회 최초의 ‘가정’은 가족이 아닌 ‘모계’사회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본문 뒤 에필로그의 마무리에서 ‘이제 가부장제도는 다른 체재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제 남녀가 그것을 만들일 만 남아 있다’는 소견으로 자신의 생각이 선사학의 태동을 이끌어 낸 선학들과 맞닿아 있음을 밝혔다.

 

3장과 4장에서는 선사시대 고고학 자료를 사회적 맥락에서 읽어내고 있다. 1974년 아프리카 올드완 계곡에서 발굴된 ‘루시’라고 잘 알려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아파렌시스)‘의 인류화석은 ’인류의 할머니‘, ’아프리카의 이브’ 라는 별명이 있었다. 2000년대 선사학에 도입된 DNA분석법으로 생긴 ‘미토콘드리아 이브’도 결국은 파기되었다. 아프리카의 이브와 같은 맥락으로 남성 중심적 사고관에 젖어 있는 연구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선사시대 여성의 자리를 바로 찾기 위해서는 실제 존재한 것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상상 혹은 가설이 아닌 실제 유물, 사람 뼈, 혹은 후기구석기시대 예술가 들이 남겨놓은 여성의 이미지를 근거로 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후기구석기시대 동굴에 그려진 채색 벽화 혹은 새긴 암각화, 여성형상물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여성형상물은 구석기시대 동굴벽화 보다 더 이른 시점에 발생한 3만 5천년 전의 후기 구석기시대 예술품은 19세기 말 발견되는 그 순간부터 ‘부도덕한 비너스’라는 이름이 붙여져서 남성중심적이고 서구중심적인 시각으로 연구되었다. 20세기 초 로셀에서 발견된 ‘뿔을 든 비너스’로 불린 유물은 19세기 내내 유럽의 주요국가에서 논쟁이 되었던 특히 흑인여성이 ‘열등한 종족’이라는 당시 믿음의 기준이 되어 버렸고,. 이는 인종 서열화를 파생시킨 트리거가 되었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현재도 활동 중인 저명한 선사학자 앙리 델포르트도 구석기시대 예술가가 ‘남성’이었다는 고정된 시각아래에서 구석기시대 작품속 여성을 ‘어머니 혹은 쾌락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꼬집었다.

 

여성형상물들은 영국에서 시베리아까지 주로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에서부터 확인되고 있다. 대체로 벗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여성성이 매우 강조되었다. 바위그림과 동굴그림에는 여성의 음부가 강조되거나 혹은 여성의 성기만이 표현된 것도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나 벗은 몸이 아닌 옷을 입은 유물도 있고, 특정 신체부위를 훼손시킨 행위 등도 확인되어 모든 여성형상물이 같은 맥락에서 제작된 것은 아니다. 남성형상물은 여성보다 뒤 늦은 시점인 1만 5천년 전에 남성 성기가 강조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구석기시대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이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발견될 때와는 달리 성(性)을 금기시 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고자 했고,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려 했다고 생각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저자는 파묻힌 여성들부터, 르네상스 화가들의 미술에 주제가 된 여성들, 프랑스 혁명기의 여성들까지 서구권에서 20세기 여성들이 억압되어 온 역사를 끝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체도를 꿈꾸고 있었다.

끝으로 서평자는 동아프리카의 호텐족 사라 바트만의 비극적인 이야기에서 여성, 남성을 떠나서 한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독감을 느꼈다. 가슴과 둔부가 지나치게 강조된 로셀의 여성형상물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성기를 비롯한 신체 구석구석은 ‘탐구’라는 명분으로 19세기 제국주의 국가의 저속한 지식 욕구를 채웠다. 위의 서평에 나오는 엥겔스의 저서는 서평독자를 위해서 사족을 덧붙였다는 점도 밝혀둔다. 그리고 저자가 구석기시대 예술가를 바라보는 입장이나,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인 경전, 성스러운 문서, 지식인들의 글들이 남성중심적 사고관에 입각해서 쓴 글이라는 점도 동의한다. 그러나 서평자는 여성과 남성의 개념자체를 ‘자연스럽지’ 않다는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음을 밝혀둔다.

 

 

 

김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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