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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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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바샤다르 유적'에 해당되는 글 11

  1. 2020.07.16 2600년 전 알타이의 장례식과 미라
  2. 2020.07.15 알타이의 그리핀...
  3. 2020.07.14 스키타이 문화 동물문양-싸우는 장면2
  4. 2020.07.13 시베리아 알타이 무덤속의 사슴문양
  5. 2020.07.12 사라진 미라의 신발과 검

26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에는 높은 곳에 깊은 무덤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을 만들고 말과 함께 매장하는 장례식이 행해졌다. 2600년 전 이전에도 장례식 이후에 축조된 결과물은 다르지만 성대한 장례식은 있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파지릭 유적, 바샤다르 유적, 투엑타 유적등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파지릭문화를 밝혀 낸 루덴코는 자신이 실제로 참석한 카자흐스탄 한 부족의 장례식 기념행사를 적어놓았다. 자신이 발굴한 유적에서 치러진 장례식이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며, 발트해부터 알타이 북동부 지역까지 오래전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왔을 가능성을 비추었다(루덴코 1960).

 

1927년 루덴코는 카자흐스탄 흑해로 흘러가는 이르티시 강 주변에 있는 한 부족의 장례식을 경험했다. 3월 25일에 죽은 사람의 장례식은 같은해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치러졌다.

장례식에는 30개의 펠트 마차(펠트마차로 번역이 되지만 문맥 상 일종의 텐트와 함께 겸비된 것으로 일종의 캠핑카?정도로 이해가 된다)가 줄을 있었고, 그 중 5개는 죽은 이의 아들을 위한 것이다. 손님을 위한 것도 15개나 준비되었고 그 중에는 여성을 위한 것도 있다. 손님을 위한 음식은 4마리의 말, 6마리의 황소, 25마리의 숫양이 준비되었고, 2~3개의 큰 용기에 쿠미즈(양 지방 유제품)로 가득채워서 준비했다. 쿠미즈는 선반에 담겨서 옮겼는데, 아주 비싼 카펫으로 장식된 낙타가 행렬을 이끌었다. 낙타뒤에는 여자, 그 뒤에 남자가 서 있었다.

 

손님들도 양과 말을 장례를 위해서 가져왔는데 손님들이 가져온 30마리의 숫양 중에 25마리를 죽여서 손님들을 대접했다. 낮에는 차와 쿠미즈가 간식으로 아침과 저녁에는 고기가 손님들에게 제공되었다. 음식은 특별히 지정된 노지(화덕자리)에서 만들어졌다. 고기는 신선하게 하기위해서 같은 장소에서 죽이고 같은 장소에서 음식을 했다. 음식은 2~4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에 실려서 손님이 끌고 온 마차로 배달되었다.

루덴코가 본 장례식에는 부족의 허락이 없어서 말 경주 대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말 경주대회가 장례식에 있었던 것을 그는 나이만족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1896년에 사망한 나이만족이 경험한 장례식은 매우 성대한 것이었다. 3일 동안 장례식이 치러 졌는데, 아주 먼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모였는데, 심지어 해외에서도 왔다. 손님을 위한 텐트(마차)가 300개나 설치되었고, 손님을 위해서 각 마차에 한 사람, 말 한 마리가 배정되었다. 손님들은 쿠미즈(유제품)와 빵반죽을 직접가져왔다.

말 경주는 장례식 전날부터 첫 번째 경주가 시작되었다. 이날은 장례식 음식 준비를 위해서 음식하기 위한 구덩이를 판 날이고, 말 경주가 열린다.  말 경주는 첫 번째와 네번 째 날 열렸다.  네 번째 경주는 장례식 마지막 날 열리는 데 25마일을 달리는 것이었다. 최대 250여마리의 말이 참가했고 그 중에 20마리에게 상이 수여되었다. 1등 말은 말2마리, 낙타1마리와 은을 받았고 나머지 말은 말 1마리를 받았다.

세 번째 대회는 낙타경주이다. 50마리의 낙타가 경주해서 10개의 상이 수여되었다.

 

이러한 성대하고 체계적인 음식문화를 동반한 혼잡한 기념은 부자와 귀족 사이에서 가능했다. 다양한 대회와 음식 때문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모일수 있었고 거대한 토루 등의 건설은 짧은 기간에 가능했다.

 

비슷한 광경이 19세기말~20세기 초 뿐만 아니라 2600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라고 루덴코는 추정했다.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6m의 구덩이를 파고 무덤방을 설치하는 작업은 많은 노동력이 동원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20세기 초에 루덴코가 목격한 장례식에서도 3월에 죽은 이를 9월에 묻었는데, 이는 2600년 전 파지릭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장례식은 봄과 가을에 치러진다고 했다. 20세기 초에는 그 사이에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2600년 전에는 죽고 나서 묻기 전의  몇 달동안 시신은 미라로 처리해서 보관했다.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에는 남성시신은 도둑맞았고 여성시신은 훼손이 심해서 죽은 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그러나 1호분에는 부패가 심해서 잘 남아 있지는 않지만 미라처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남아 있었다. 미라는 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지만 이 인골은 두개골과 여러 뼈에 미라처리 흔적만이 남아 있다. 두개골에 구멍을 파고 뇌를 제거한 흔적이 남아 있다(그림1). 아크 알라하-3 유적의 얼음공주 미라도 두개골에 그림 1과 같은 구멍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바샤다르 1호분의 남성미라는 좀 다른데, 경추(그림 2-1), 척추 등에 구멍이 뚫려 있다. 이곳으로 방부제를 투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0~12번째 흉추(그림 2-2), 나머지 흉추(그림 2-3,4)에 청공되었다. 요추에도 뚫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구멍이 잘 남아 있지 않다. 흉추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복강(배)은 내장을 추출하기 위해서 개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1호분 남성미라의 뇌

 

 

 

그림 2. 바샤다르 유적 1호분 남성미라의 척추

 

미라처리의 관건은 뇌를 제거하고 피부는 남기고 그 밑의 지방과 근육을 제거하는 것인데, 뼈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던 것은 근육이 이미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샤다르 유적 1호분의 남성도 미라이다. 아시다시피, 바샤다르 유적의 1호분은 무덤구덩이가 깊지 않았고, 얼음층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아서 다른 유적에 비해서 유기물질이 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남성 미라의 피부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참고문헌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의 2600년 전 무덤에는 사람 뿐 만 아니라 말도 함께 매장되었다. 말의 숫자는 정확하게 어떤 원칙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덤 마다 다르다.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는 남녀가 말 14마리와 함께 매장되었다. 앞서 살펴본 무덤은 무덤구덩이가 깊고, 무덤방 아래에 얼음층이 두텁게 형성된 경우 말 뿐만 아니라 기타 유기물질이 잘 냉동?되어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다. 무덤구덩이가 상대적으로 깊지 않고(2m), 얼음층이 덜 형성된 바샤다르 유적 1호분에서는 나무로 된 무덤방도 북쪽벽이 무너졌고, 유기물질로 된 유물도 잘 남아 있지 않은 편이었다.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은 깊이가 6m나 되는 무덤구덩이 속에 무덤방이 설치되어서, 유기물질로 된 유물들은 남아 있다. 그러나 도굴로 인해서 유물은 많이 없어진 상태이다. 특히 말의 매장지에도 손을 대어서 말 장식 세트도 거의 흩어진 상태였다. 그래도 생생한 것이 한 벌 남아 있어서 앞서 소개한 바 있다.

 

이 유적에서 확인된 말의 굴레장식은 앞에서 본 파지릭 유적과 아크 알라하 1유적, 아크 알라하 3유적과는 달리 동물문양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말의 재갈멈치 장식판에 달린 구름?모양은 그리핀으로 볼 수 있다. 재갈멈치 가운데 그리핀이 남아 있는 유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샤다르 유적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투엑타 유적의 유물을 살펴보면 구름처럼 장식판이 그리핀을 최소한으로 표현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림 1-1). 뿐만 아니라 바샤다르 유적 2호에서 굴레장식에 달았던 삼판 장식(그림 3)은 투엑타 유적에서 호랑이 얼굴(그림 1-2,3, 그림 2)과 함께 표현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말과 관련된 도구 각 부위 명칭은 앞서 바샤다르 유적 2호분의 마구를 소개한 글에서 알 수 있다.

 

 

그림 1. 투엑타 유적의 굴레장식판(1-재갈멈치, 2,3-굴레장식판)

 

그림 2. 투엑타 유적의 굴레장식판.투엑타 유적에서 표현된 호랑이는 파지릭 유적의 유물 보다 희화되었다(좀 우스꽝 스런 모습이다..귀엽기도 하다).

 

 

그림 3. 바샤다르 유적 2호분의 굴레장식판

 

그림 4. 바사댜르 유적 2호분의 굴레장식판

 

 

그림 3의 원판장식은 둥근 상단과 구름모양의 하단으로 구성되었는데, 투엑타 유적의 유물도 마찬가지이다. 투엑타 유적의 유물에서는 원판 대신에 호랑이 얼굴을 붙이고, 호랑이 얼굴과 어울리도록 하단에는 구름모양 판에 좀 더 세밀한 원판을 새긴 것이다.

 

투엑타 유적에서는 그림 1, 그림 2와 같은 호랑이 굴레장식판과 함께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간략한 장식판(그림 5)이 같은 무덤에서 출토된다. 바샤다르 유적이 도굴되지 않았고 좀 더 잘 남아 있었다면 투엑타 유적과 같은 호랑이 굴레장식판이 함께 출토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림 5. 투엑타 유적 1호분의 굴레장식 판

 

투엑타 유적에서는 날개 편 그리핀(그림 6)이 여러 점 확인된다. 크게 두 종류인데, 머리에 뿔이 달리고 귀 끝이 뾰족한 그리핀(그림 6-4, 6) 와 뿔이 없고 귀가 둥근 그리핀(그림 6-1~3)이다. 머리에 뿔 달린 그리핀은 100년 뒤의 아크 알라하 유적 1호분과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 많이 확인되어 계속된다. 머리에 뿔 없고 귀가 둥근 그리핀은 역시 100년 뒤에도 볼 수 있는데, 파지릭 유적이다.

 

그림 6.투엑타 유적 1호분의 그리핀

 

그리핀은 매우 다양한데, 바샤다르 유적과 같이 독수리를 메인 모티브로 해서 제작한 유물 외에도 여러 가지 가 있다.

 

맹수의 머리와 몸통에 우제류의 뿔과 날개가 붙는 스타일이 있다. 사자머리가 붙으면 페르시안 스타일(그림 7,8), 호랑이 머리가 붙는 스타일(그림 9)이 있다.

 

그림 7. 파지릭 유적 2호분, 구리판에 찍힌 그리핀, 관련된 앞선 포스팅 참고

 

그림 8, 파지릭 유적 2호분 여성 목걸이, 목제. 관련된 앞선 포스팅 참고

 

그림 9. 파지릭 유적 2호분의 안장덮개, 펠트, 관련된 앞선 포스팅 참고

 

 

그리핀은 맹수(호랑이 혹은 독수리)가 기본이라는 원칙에서는 벗어나서 일부 표현된 유물도 있다. 사슴몸통에 독수리 부리가 붙고 뿔이 화려한 환상의 동물이다(그림 10).

 

그림 10. 파지릭 유적 2호분의 남성 미라(왼손)의 타투 동물문양

 

알타이에서 주로 확인되는 것은 독수리를 기본으로 한 그리핀과 호랑이를 기본으로 한 스타일이다. 각각의 동물문양은 표현되는 부위에 따라서 더 분류가 가능하다. 전신이 보이는 경우, 머리만 표현되는 경우 등등...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투엑타 유적의 호랑이 장식판(그림 1, 그림 2)은 아래에 달린 장식판을 날개의 변형으로 본다면 이 또한 그리핀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함께 출토된 간략화된 장식판(그림 5)도? 바샤다르 유적의 것(그림 3,4)도?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에서 동물문양은 단독으로 그려진 것도 있지만 여러 동물이 함께 한 장면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맹수류가 우제류를 공격하는 장면과 동물이 열을 이루고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이다.

먼저 설명한 문양을 ‘동물투쟁문양’이라고 하는데, 주로 호랑이, 독수리 혹은 그리핀이 사슴 혹은 염소 등을 공격하는 주제를 그린 것이다. 동물투쟁문양은 기원전 5세기 대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파지릭 유적(그림 1)에서 다양한 동물투쟁문양이 발견되었다. 대체로 2~3마리의 동물이 한 주제로 그려진다.

 

 

그림1. 맹수와 우제류가 싸우는 장면, 동물투쟁문양(마지막 유물 제외하고 파지릭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의 주제, k-카탄다 유적)

 

며 칠 전에 설명드린 파지릭 유적의 5호분 여성의 오른쪽 손목 위에서도 동물투쟁문양이 발견되었다. 그 문양은 동물투쟁문양이 5마리가 등장하는데, 상단과 하단으로 구분해서 보면 동물투쟁문양 2개가 그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정된 카메라로 인해서 사지가 굳은 미라의 손목 안쪽은 찍기가 힘들어서 손목 그림 중에서 특히 위쪽의 팔목 안쪽 그림은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대략 사슴이 호랑이에게 물어 뜯기는 장면이 그려졌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림 1의 동물투쟁문양은 주로 우제류의 등을 물어 뜯는 장면이어서 판멸하기가 쉬운편이지만, 맹수의 입안에 동물머리가 들어있는 표현은 알기 힘들다.

 

여러 마리가 한 장면을 구성하는 동물문양장식 가운데 동물투쟁문양 외에도 여러 동물이 나란히 줄을 서는 주제도 있다. 동물투쟁문양에 비해서 평화롭다는 느낌이 든다.

현재 살펴보고 있는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 발견된 통나무관에는 호랑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호랑이는 평화롭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발밑에 사슴, 산양, 멧돼지 등을 밟고 있다는 점에서 나란히 서 있는 동물구도와 투쟁문양이 함께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물투쟁문양과 열상동물문양(별로 예쁜 이름은 아니지만)이 함께 그려진 것이 바샤다르 유적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두 동물문양장식은 100년 정도 늦은 파지릭 유적에서는 개별요소로 나타난다. 동물투쟁문양은 파지릭 유적에서 자주 확인되는 요소이다. 그런데 열상동물문양은 파지릭 유적에는 없는 요소처럼 보였으나, 5호분 남성 미라의 왼쪽 무릎 아래(그림 2)에 그려져서 확인된다. 즉 여성은 동물투쟁문양, 남성은 열상의 동물문양이 각각 팔과 다리에 그려져서 확인된 것이다.

 

*파지릭 유적 5호분 미라의 문신은 아래 포스팅참고

 

2020/07/0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5호분] - 2500년 전 미라에 그려진 동물문양문신

 

2500년 전 미라에 그려진 동물문양문신

현재까지 알타이의 큰 고분에서 발굴된 기원전 5세기 유적에서 미라가 남아 있는 곳은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일명 얼음공주), 파지릭 2호분의 남녀, 파지릭 5호분의 남녀, 베르흐 칼쥔 II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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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드립니다. 위 포스팅의 그림 10~13에 캡션이 잘못되어서 고쳤습니다.  이전 포스팅에서는 그림 10~13을 파지릭 유적 2호분으로 적었는데, 5호분으로 정정했습니다. 지금의 것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아마 흥분해서 눈에 헛것이 보였나 봅니다. 

 

 

 

기원전 5세기경부터 동물투쟁문양이 생긴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지만, 사실 바샤다르 유적(기원전 6세기)의 예를 참고로 한다면 동물투쟁문양과 열상 동물문양은 이 유적에서부터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물투쟁문양은 파지릭 유적에서는 주로 펠트로 안장덮개의 장식으로 많이 확인되지만, 표트르 1세가 시베리아에서 수집한 유물 중에는 금속제(그림 3)로도 많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시다시피, 유물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 중인데, 끈에 끼워서 사용하는 용도로 제작된 것이다.

 

그림 3.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표트르 1세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맹수가 약한 동물을 공격하는 동물투쟁문양은 알타이에서만 확인되는 것이다. 알타이 보다 아래에 위치한 카자흐스탄의 산에서도 ‘수수께끼 그림’으로 불리는 여러 마리 구도의 동물문양장식이 헴칙 봄, 타스몰라 유적 등에서 확인되지만 알타이의 것과는 다르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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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알타이의 2600년 전 바샤다르 무덤 2호에서는 잣나무로 만들어진 통나무관이 확인되었다. 관에는 관의 덮개와 하부 모두에 호랑이와 여러 굽동물들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사슴, 산양, 멧돼지 등이다. 호랑이를 제외한 나머지 동물들은 몸통의 문양장식이 일정한데, 어깨와 엉덩이 부위에 나선문양을 채운 것이다.

 

통나무관이 놓였던 무덤방 안에서도 사슴과 그리핀 등의 동물문양장식이 확인된다. 사슴은 가죽, 청동, 뿔로 만들어진 것이다. 가죽과 청동은 납작한 판으로 문양을 장식했다는 점에서 평면적이고, 뿔로 만들어진 것은 입체감 있게 제작된 것이다. 아주 얇은 염소가죽을 잘라서 만든 사슴문양(그림 1), 청동판에 찍어서 새긴 사슴(그림 2), 뿔을 깎아서 만든 사슴머리(그림 3)이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2호 출토, 가죽, 사슴

 

아주 얇은 염소가죽인데, 붉은색으로 염색되었을 것이나, 발굴과정 중에서 검게 변했다.

 

 

 

그림 2. 바샤다르 유적 2호 출토, 청동판에 찍힌 사슴머리, 뿔이 없는 사슴이다.

 

청동판에 찍힌 동물(그림 2)는 만약 이 유물만 출토되었다면 어떤 유물인지 약간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통나무관에 그려진 사슴의 눈표현과 거의 유사하다(아래포스팅참고). 통나무관에 새겨진 사슴문양도 눈이 둥글게 표현되었고 눈 주변을 동심원문으로 둘러 싸고 있는데 비슷하다.

 

2020/07/08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바샤다르 유적] - 2600년 전 시베리아 잣나무관, 동물문양, 나선문

2600년 전 시베리아 잣나무관, 동물문양, 나선문

시베리아 알타이의 칼라콜 계곡에는 2600년 전 미라가 잠들었던 바샤다르 라고 하는 유적이 있다. 이 유적에서 2호는 통나무관 2개가 있었다. 앞서서 보았던 파지릭 유적에서 남녀가 함께 매장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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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바샤다르 유적 2호 출토, 뿔로 깍아서 만든 사슴머리

 

청동판에 찍힌 동물이 한 점 더 있는데, 반쯤 사라진 그리핀(그림 4)이다. 그림 2의 사슴과 같이 얇은 청동판에 찍은 모양인데, 날개를 펴고 있으며, 부리와 다리가 과장되게 표현했고, 독수리 머리에 귀를 붙인 하이브리드 동물표현이다. 부리와 다리는 나선형에 가깝게 표현되었다.

 

 

 

그림4. 바샤다르 유적 2호 출토, 청동판에 새긴 날개 핀 그리핀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그리핀의 여러 자세 가운데서 날개를 편 그리핀이 출토되는 유적으로 이 유적을 소개한 바 있다. 목제로 제작된 그리핀으로 청동판에 새겨진 그리핀과 거의 같은 표현이다. 무덤방의 바깥쪽인 말 매장 구역에서 출토되었는데, 안장장식의 용도로 사용되었다.

 

2020/04/2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바샤다르 유적] - 시베리아 남부 알타이 무덤 속, 날개 편 그리핀

시베리아 남부 알타이 무덤 속, 날개 편 그리핀

2500년 전 시베리아 남부의 알타이 산에 위치한 파지릭 유적의 5호분에서는 인간의 무덤에 말이 함께 매장되었다. 말은 화려하게 치장되었는데, 주로 동물문양을 장식했다. 대상이 된 동물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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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정확하게 유물의 용도는 알 수 없지만 무덤방의 남동쪽 모서리 부근에서 출토되었는데 각종 가죽조각과 비드(목걸이)와 함께 출토되어서, 일종의 장신구 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 확인된 동물문양은 통나무관 뿐만 아니라 무덤방 안의 동물문양에도 나선문양이 주요한 문양장식이다. 말을 장식한 굴레장식도 사실적 표현보다는 기하학적인 표현에 가깝다.

 

그리고 사슴문양은 유라시아 동물문양장식 중 가장 널리 사용된 문양이다. 무덤 속에 들어가는 문양모티브 였을 뿐만 아니라 암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현재 소개하고 있는 바샤다르 유적은 기원전 6세기 경의 유적이지만 이 보다 더 오래된 시베리아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사슴이 바위에 그려진다.  암각화 주제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처럼 바위그림이 많이 없는 곳에서도 사슴은 확인된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육상동물가운데 가장 많이 그려진 것은 사슴문양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신석기패총에 남아 있는 가장 많은 뼈는 사슴이다. 사슴뼈는 곧고 단단해서 도구 만들기에 가장 좋은 뼈라고 한다.

 

유라시아 대륙 각 지역에서 시간과 지역에 따라서 사슴의 표현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사슴을 공통적으로 그린다는 사실이다. 

 

 

 

그림 5. 키르기스스탄의 촐본아타 암각화 박물관, 사슴문양

 

https://www.google.co.kr/maps/place/Petrogliphs+Museum/@42.536454,76.7048999,10z/data=!4m5!3m4!1s0x3884f1832d34935f:0x1fbf0bb3a771a636!8m2!3d42.6578793!4d77.0567959?hl=ko

Petrogliphs Museum

★★★★☆ · 박물관 · Cholpon Ata

www.google.co.kr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600년 전 알타이의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는 남녀가 각각 다른 통나무관에 매장되었다. 통나무관 1기는 뒤집힌 채로 발견되었는데, 여성의 관으로 추정된다. 여성미라는 훼손된 상태로 무덤방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이 관에는 앞서 살펴본 남성관과는 달리 동물문양이 거의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통나무관 덮개 조각에 나선문양(그림1)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통나무관 자체에는 동물문양이 장식되지 않았다. 이 통나무관에도 남성통나무관과 마찬가지로 청동못이 박혔던 구멍이 20cm간격으로 있었다. 청동못의 머리는 3cm가량으로 13점이 무덤방 바닥에서 확인되었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2호분 통나무관(여성)의 덮개장식

 

그런데 동물문양장식이 새겨진 통나무관은 어떻게 남성의 관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무덤방 안에서는 남성시신의 흔적 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통나무관 안에서 남성신발 1짝(그림 2)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이 미라로 처리되었기에 남성도 같은 방법으로 장례를 치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림 2. 바샤다르 유적 2호에서 출토된 남성용 신발

 

신발은 소개해 드린 펠트로 만든 스타킹과는 다르다. 비슷한 유물이 파지릭 유적의 2호분에서 나왔는데, 여성의 것이었다. 루덴코(1953)는 파지릭 2호분의 여성이 안에 긴 스타킹(양말이 붙어 있음)을 신고 그 위에 그림 3의 신발을 신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림 2는 일종의 부츠로 발 부분과 다리(부츠레그) 부분의 재질이 다르다. 신발 부위를 두꺼운 가죽으로 만들고 부츠레그 부위는 모피로 만들었다. 이 부츠는 무릎 약간 위에까지 오는 길이로, 신발과 부츠레그 사이에는 양모끈으로 이음줄이 만들어졌고, 부츠레그는 앞(60cm)이 뒤(43cm) 보다 길다. 부츠레그 부분은 3.5×5cm의 모피조각(갈색과 검은색)을 이어서 바둑판처럼 만들었다. 검은색 모피는 안감이 없고 이 보다 밝은색(갈색)의 모피는 가죽안감을 덧댄 것이다. 사각형 가운데서 4~5개의 같은 재질의 조각을 이어서 큰 사각형으로 만들었다.

 

그림 3. 파지릭 유적 2호분의 여성신발,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무덤방안에서는 남성용 신발 한 짝이 더 출토되었는데, 부드러운 밑창이 확인되었다. 가죽으로 모자이크 처리되었는데, 붉은 색 가죽을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이 신발은 발목이 따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어서 먼저 소개한 그림 2의 유물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바사댜르 유적 2호분의 남성과 관련된 유물로 단검의 검집이 출토되었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던 유물이다. 검집(그림 4-2,3)과 함께 펠트로 제작된 벨트(그림 4-1) 일부가 확인되었다. 검집은 검의 날 모양으로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데, 정확하지는 않지만 추정할 수 있는 검의 길이는 30cm보다 짧지 않다.

 

 

그림 4. 바샤다르 유적 2호에서 출토된 펠트제 벨트(1)와 가죽검집(2,3)

 

바샤다르 유적 2호에서는 남성 주인공이 착용한 유물은 신발과 검과 관련된 유물(검집과 벨트)을 제외하고는 남아 있지 않았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 Костюм и текстиль пазырыкцев Алтая (IV-III вв. до н.э.).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 2005. 232 с.(폴로스막, 바르코바 2005, 알타이 파지릭 사람들의 의복과 직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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