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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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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 이후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 가운데 흑해지역에서는 특히 그리스와 관련된 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특히 흑해와 아조프해가 연결되는 지역에서는 그리스 문화와 스키타이 문화가 복합된 문화가 존재한다. 볼쇼야 블리지니차 유적과 쿨-오바 유적이 대표적인 유적인데 기원전 4세기의 무덤이다. 두 유적은 지척에 위치하지만 각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로 현재의 국적은 다르다.

 

이 유적에서는 3개의 여성묘와 1개의 남성묘가 남아 있는데, 그중에 1 여성묘와 남성묘는 지하에 설치되었고 나머지 2개의 여성묘는 봉분 속 즉 지상에 축조되었다.

1여성묘와 남성묘는 각각 만들어졌고 지하에 지붕이 있는 석실묘이고, 그 안에 나무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여성묘의 무덤방은 피라미드와 같은 천장이 있는 구조물로 알려졌다. 천장이 위로 갈수록 줄어드는 구조이다. 이곳에서는 어떤 여성의 벽화가 남아 있었다. 머리에는 꽃 화환을 쓰고 베일을 쓰고 있었고, 오른손에는 여러개의 꽃과 긴 잎이 있는 줄기가 있었다(그림 1). 이 여성이 그려진 무덤 속에서 바구니를 거꾸로 세운 모양의 모자인 칼라프와 기타 유물들이 출토된 것이다. 칼라프는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1여성묘 뿐만 아니라 이 유적에서 출토된 말 머리 장식에도 칼라프를 쓰고 있는 여성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1 매장지에 남아 있던 여성의 벽화와 칼라프로 인해서 이 무덤은 데메테르와 관련된 여성매장지로 여겨졌고, 현재도 크게 변화된 시각은 없다. 그래서 이 유적은 발굴되던 19세기말 당시부터 ‘데메테르’의 여신과 추정되었다.

 

 

그림 1. 볼쇼야 블리즈니차 1여성묘의 천장벽화

 

 

 

 

여러 기록에 의하면 흑해 북부지역의 그리스도시에서는 엘레시우스 종교?가 널리 확산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데메테르와 그의 딸 페르세포네와 관련된 여러 물건들도 만들어졌다. 데메테르는 농업의 여신으로 존경받았지만 동시에 생산과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특히 그의 딸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후자와 관련된 내용이다.

 

참고문헌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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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4세기 흑해지역의 스키타이 유적인 볼쇼야 블리즈니차는 19세기 말에 발굴된 대표적인 유적이다. 유적에서는 3개의 여성매장지와 1개의 남성 매장지가 확인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해 보이는 여성매장지는 심하게 도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물이 남아 있었다.

 

하나(?)의 봉분안에 4개의 매장지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도굴이 심하게 된 첫 번째 여성 매장지와 남성 매장지를 제외하고는 무덤은 지상 즉 봉분안에서 발견되었다. 첫 번째 매장지에서는 최소한 2벌 이상의 의복세트가 발견되었다.

2번째 지상에서 발견된 여성무덤에서도 머리장식을 포함한 여성의복세트가 발견되었다. 가장 중요한 머리장식은 이마를 덮는 stlenida 형식이고(그림1), 관자놀이 장식과 함께 발견되었다. 특히 하게 이 머리장식은 말린 컬을 표현한 것이다. 이 여성은 매우 화려한 목걸이(혹은 가슴덮개)를 하고 있었다. 각종 동물(염소, , , 토끼)이 표현된 것인데,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도 사진을 찍는 것이 금지된 방에 머리장식과 함께 있었다. 이 외에도 2개의 목걸이가 더 있었다. 이 외에도 팔찌, 반지 등도 있었다.

 

그림 1.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 제2매장지의 머리 및 얼굴장식

 

그림 2.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 그림1과 세트

 

이 무덤의 세 번째 여성매장은 약간 다른 구조의 관에서 발견되었다. 역시 지상위의 봉분안에서 발견되었는데, 돌로 된 무덤과 함께 나무로 덮인 토굴형태이다. 황금화한과 황금귀걸이와 목걸이(그림 3), 팔찌 한 쌍(그림 4)이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7개의 토제 인형과 청동거울, 채색된 꽃병 들도 발견되었다.

 

그림 3.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

 

그림 4.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

 

이 유적의 유일한 남성매장은 첫 번째 여성매장지와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돌로 지어진 지하의 돌 방안에서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상아로 된 그림이 그려진 관 장식이 대표적이다(그림 5). 이는 쿨-오바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발굴당시에 인골이 남아 있었는데 금판장식이 많이 남아 있었는데 메두사, 아테나, 사티로스, 날개가 있는 여성의 머리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림 5.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 남성매장지 출토

 

이 유적 출토품으로 알려진 말 얼굴장식은 정확하게 어느 매장지에서 출토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거기에 표현된 여성이 쓰고 있는 머리장식의 모습(그림 6)은 제1매장지에서 출토된 칼라프의 모습과 유사하다. 칼라프는 바구니 모양과 유사한데, 다산의 상징으로 알려졌다(아르타모노프 1966).

 

그림 6.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 출토 말 머리 장식

 

 

 

참고문헌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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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2. 7. 30.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의 호흘라치 유적에서 출토된 화려한 왕관은 하단에 부착된 여성 때문에 보스퍼러스 해협에 있던 그리스 공방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흑해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이 그리스 지역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로스토프체프(1925)는 이 관도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자료가 축적되면서 의아한 점도 많이 생겼다. 황금관에 여러 장식을 고정했던 방법은 금으로 된 와이어 끈을 이용한 것인데, 틸리아-테페 유적에서도 발견되는 방법이다(포스팅참고). 이 유적은 오늘날 아프카니스탄의 북부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이 유적의 관은 매장을 위해서 특별히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호흘라치 유적과 비슷한 모티프를 가진 우스티-라빈스카야 유적과 코비야코프스키 유적의 관은 유기질제로 된 모자와 같은 것에 붙이는 방법으로 제작된 것이다. 호흘라치 유적은 그렇지 않고 주조물로 된 나무, 사슴, 새를 입체적으로 붙이는 방법이고, 하단의 여성상, 새등도 따로 제작해서 붙이는 것이라는 점에서 특별하게 제작된 것이다.

 

2022.01.11 - [이름없는 왕의 무덤:틸랴-테페유적] - 아프카니스탄에서 발견된 북방유목문화

 

아프카니스탄에서 발견된 북방유목문화

아프카니스탄에 위치한 틸랴-테페 유적의 6호 무덤은 여성이 피장자인데, 매우 화려한 옷을 입고 매장되었다. 목 아래에는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이 표현된 장식판으로 장식되었다. 그러나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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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카니스탄에서 발견된 북방 유목문화

틸랴 테페 유적은 아프카니스탄에 위치한 유적으로 여러 문화가 복합되었다고 생각된다. 6기의 무덤 가운데 1기가 남성무덤인데 이곳에서 그 특징이 가장 두드러진다. 다른 무덤과는 달리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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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흘라치 유적과 틸리아-테페 유적의 관 제작 방법이  비슷한 방법(와이어 사용)으로 제작되었는데, 여기저기서 발견되지 않는 다면  호흘라치 유적의 관이 보스포러스 해협에서만 제작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틸리아-테페 유적의 관에는 그리스적인 요소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두 유물의 공통적인 주제는 나무와 새이다.

 

그림 1. 호흘라치 유적의 관. 뒷면.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이유에서도 호흘라치 관은 스키타이나 사르마트 문화에서 보이는 특징이 관찰된다. 왕관의 바닥과 맹금류의 제조에 일종의 수지성 암흑물질을 사용하는 것이다. 터키석이나 유색 돌의 뒷면의 빈 공간을 채우데 검은색 수지 물질이 종종발견된다. 예를 들면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유적인 체르토므리크 유적과 엘리자베토프카 유적에서 발견된 칼집의 판에는 비슷한 성분의 물질로 채워진 것이 발견되었다. 어두운 색 수지 물질도 많이 발견되는데 사르마트 문화의 여러 무덤(키라소노프 유적, 주토프스키 유적)에서 발견되었다(자세츠카야 2011).

 

 

 

참고문헌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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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7. 24. 09:22 사르마트 문화

로마의 황제들이 북방민족의 머리장식을 착용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부터이다. 그들이 사랑한 은제 쟁반에 남겨진 황제의 모습으로부터 알 수 있다.

여기서 북방민족은 사르마트 문화와 그 이전의 스키타이 민족이다. 또 페르시아에서도 착용했다. 알려지기로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원정을 떠나서 돌아올 때 페르시아에서 가져왔다고 알려졌다.

 

일단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문화/사르마트 문화에서 보이는 여성의 머리장식은 앞이마를 가리는 머리띠가 있고 정수리 부근에 이등변삼각형(나무 모양)의 높고 복잡한 머리장식으로 치장을 하는 것이 흑해 북쪽에서 발견된다. 특히 앞이마를 가리는 머리띠 장식은 상당히 널리 유행한 장식 다. 기원전 5세기~4세기 알타이에서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도 확인된다.

 

그림 1. 기원전 4세기 사흐노프스키 쿠르간, 머리밴드 형식

 

그림 2. 스키타이 여성 머리장식 복원, 그림 1은 앞이마를 가리는 모습으로 사용되었다.

 

 

흑해지역에서 앞이마를 가리는 고리 모양의 머리장식은 기원전 7세기 멜구노프 유적에서도 나온다(그림 3-1). 이 시대에는 크라운도 있다. 단순한 머리밴드가 아니라 머리높이 보다 더 높게 하는 것이다(그림 3-2). 물론 이 유물은 그리스제품이라고도 알려져 있지만, 이 유물이 왜 이곳에서 발견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림 3. 멜구노프 유적(상)과 켈레르메스 유적(하), 기원전 7세기

 

 

크라운 형태(머리 보다 높은)는 기원전 5세기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 5호분에서 나온 카페트의 여성들도 착용하고 있었다. 또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출토된 남성들도 비슷한 관을 썼다. 이 유적은 기원전 5~기원전 3세기이다(아래포스팅 참고).

 

 

그림 4.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 5호 카페트

 

2020.12.18 -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 아무다리야 강 유역의 기원전 5~3세기 신전

 

아무다리야 강 유역의 기원전 5~3세기 신전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는 유물 속에 인물이 많이 숨어 있다. 평면판 속의 사람들, 입체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은 모두 남성이다. 그런데 여성도 발견되는데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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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초원에서 머리보다 높은 장식을 하는 관의 형태와 앞이마를 가리는 머리밴드 형식이 이미 기원전 7세기경부터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각각 존재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4세기경부터 변화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앞이마를 가리고 정수리를 높게 하는 장식이 특히 여성들 사이에 번져나갔다. 이는 여성의 무덤에서만 출토되기 때문이다.

 

둘 중에 누가 더 오랫동안 사용되었을까? 당연히 더 간단한 머리밴드 형식이다. 동유럽에서 발견되는 4~5세기 훈족의 무덤에서도 금으로 된 밴드 모양의 장식이 남아 있다(그림 5,6). 이들은 천으로 된 머리밴드를 장식했다. 실제로 금 안쪽으로 유기물질이 부착된 채 남아 있는경우가 아주 드물게 있다. 흑해지역도 유기물질은 잘 남아 있지 않는다.

 

그림 5. 훈족의 머리장식, 5세기, 리굴스키 리만 유적(상)과 카라-아르크 유적(하)

 

그럼 사르마트 문화의 상징적인 호흘라치 유적의 관은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크라운 혹은 머리밴드?

 

그림 6. 호흘라치 유적의 여성관, 1세기

 

 

참고문헌

Яценко С. А. Костюм древней Евразии. М(야센코 2006, 고대 유라시아의 의복)

Засецкая И. П. Сокровища кургана Хохлач. Новочеркасский клад. СПб.: ГЭ, 2011. 328 с(자세츠카야 2011, 노보체르카스크 퇴장지, 호흘라치 쿠르간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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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6. 26. 09:22 사르마트 문화

사르마트 문화가 흑해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2~1세기이고, 기원후 1세기경 흑해 북안의 드네프르강까지 다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보스퍼러스 왕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기원전 5세기 경 케르치 해협(흑해와 아조프해 사이의 해협)에 위치한 이 국가는 그리스 문화의 색채를 많이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그리스 문화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포스팅 참고).

 

2020.08.3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흑해의 전사] - 보스포러스 왕국의 사슴장식판

 

보스포러스 왕국의 사슴장식판

흑해의 크림반도 끝은 케르치 해협이라고 불리고 이곳을 케르치 반도라고 한다. 흑해와 아조프해를 연결하는 곳으로 다리처럼 생긴 지형이다. 이곳에는 스키타이 유목민과 그리스의 특징이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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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들의 지도자 이름 가운데 아스푸르그, 파르조이 등 이란 출신의 이름이나 사브로마트라고 하는 민족명도 있었다. 아마도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1세기에는 특히 보스포러스 왕국 인구의 인종 구성은 크게 혼합되었던 것고 생활방식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유목생활방식과 흑해 북안의 대초원의 호전적인 성향이 유물에 그대로 반영되었던 것이다.

 

지하실에서 발견된 벽화는 유르트를 묘사하고 있다. 또 케르치 해협에서는 이 시기의 4바퀴의 수레 점토모형도 발견되었다(그림 1). 유목민의 텐트는 펠트로 만들어졌고 마차에 부착되었고, (그림 2) 소는 텐트 주변에서 풀을 뜯고 치즈와 우유를 먹었다.

 

사르마트 사람들은 스키타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목축업을 했는데 특히 유목생활을 했다. 지리학자는 Strabo는 사르마트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이동했던 것으로 기록했다. “ 그들은 무리를 따라가며 항상 가장 좋은 목초지가 있는 지역을 선택하는데 여름에는 평야, 겨울에는 아조프 해 근처의 늪에서 지낸다.

 

 

그림 1. 기원전 1세기경 보스포러스 지하의 벽화 그림

 

 

 

그림 2. 기원후 1~2세기 케르치반도. 수레모형, 토제품, 1900년도에 구입함.

 

스키타이 문화와 사르마트 문화의 유사성은 쿠르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때로는 무덤이 일렬로 늘어져서 언덕 위에 축조되거나 가장 높은 지역 주위에 그룹화되어서 발견되었다. 사르마트 사람들도 사후 세계에 대한 관념이 있었던 것 같다. 고대 무덤에 개인 소지품, 생활용품과 의례용품, 음식(고기 및 음료) 등을 넣었다.

 

참고문헌

 

И.П. Засецкая Сарматы в Северном Причерноморье. // Сокровища сарматов.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СПб; Азов: 2008.(자세츠카야, 2008, 흑해 북안의 사르마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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