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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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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는 몽골 국립박물관과 새로이 생긴 칭기스칸 국립박물관이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칭기스칸 박물관에서 각 대학교 고고학 교수들이 그간 발굴한 유물을 싹 걷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칭기스킨 박물관에는 선사와 고대 유물은 그렇게 많이 전시되어 있지 않았다.

 

필자가 느끼기에는 그렇지만, 또 다른 입장에서 보면 그만하면 많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암튼 선사시대 보다는 흉노제국(기원전 4세기 이후)부터의 유물이 많은 편이다.

선사시대 유물은(흉노 이전) 아직 몽골 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칭기스칸 국립박물관은 칭기스칸이 제국을 세우기 전과 후로 나눠져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몽골인들은 칭기스칸의 뿌리를 흉노로부터 찾고 있다. 필자를 도와준 몽골학생이 말해준 바에 따르면 00비사에서도 칭기스칸이 자신의 뿌리를 흉노로 부터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박물관에서는 사진찍기금지이다. 흉노이전에는 그렇게 살벌하지 않았지만 흉노 이후부터는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스마트폰 든 외국인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몽골국립박물관에는 구석기시대부터 현대 몽골까지 골고루 다루고 있다. 아마도 칭기스칸 국립박물관은 현재 몽골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전 국가에 불고 있는 자국 중심의 역사강조의 열풍일 것이다.

 

몽골국립박물관은 소련이었거나, 그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들처럼 수도의 중앙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옛 소비에트 건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고, 전시도 비슷한 기법이다. 보기에는 커 보이지 않지만, 공간에 비해서 유물을 많이 전시하고 있다(러시아 계단이라고 불리는 1.5층이 1 층이 되는 것도 그대로이다).

반면에 칭기스칸 국립박물관은 아주 현대식 건물이다(사실 중국국가박물관이 떠올랐다. 필자가 받은 개인적인 느낌이다). 두 박물관은 불과 몇 m떨어져 있다. 참고하시면 좋겠다.

 

그림 1. 칭기스칸 국립박물관(몽골국립박물관의 외관은 사진이 없다..)

 

그림 2.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의 몽골 유물. 알타이 서부.

 

필자가 궁금했던 시기는 스키타이 문화 및 그 이전이다. 칭기스칸박물관에는 몇 몇 사슴돌 말고는 아예 없었고, 몽골국립박물관에는 예전에 필자가 확보한 자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몽골에서 크게 연구가 되지 않았거나 혹은 스키타이 문화 이전은 관심이 없다고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 몽골 연구자들이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필자의 관심도는 13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아졌고, 당장 논문도 적어야 한다. 책상위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머릿속에 장착되었다. (그걸 가서 뵈야 아냐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절대로 책상 위에서는 얻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렇게 욕하는 사람들은 아마 절대로 모를 그런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설명해 줄 필요도 없다. 설명해 줘도 모를것을 뭐하러 하나..)

 

지금은 아르메니아인데, 마음이 급하다. 할 것이 너무 많다. 내일은 조지아로 넘어가는데, 어서 빨리 가서 보고, 한국가서 집중해서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

 

 

김재윤.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

 

 

 

 

 

posted by 김재윤23

 

 

흑해 스키타이 문화에서 남성의 형상은 간두령 뿐만 아니라 금제 그릇과 장식판에서도 볼 수 있다. 금(쿨-오바 유적)과 은(차스티예 유적) 항아리의 남성들은 기록(헤로도투스) 속의 타르기타우스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일상생활과 관련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타르기타우스는 스키타이 땅에 처음 나타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셋째 아들이 스키테스인데, 세 아들 가운데 땅을 물려 주기 위해서 경합을 벌리는 장면으로 많이 회자된다.

 

항아리의 생김새도 유사하고, 남성들이 등장하며 특히 고리투스를 착용하고 있는 남성 때문에 스키테스를 떠올리는 것 같다. 그는 타르기타우스의 막내아들로 고리투스를 다룰 수 있었기에 스키타이 땅을 물려 받았던 인물이다.

 

장식판 가운데 두 남성이 각배를 들고 맹세를 하는 장면은 확실히 기록에 있는 “맹약의식”으로 보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남성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맹약의식이라는 행위이다.

 

간두령에 달린 남성, 항아리 속의 남성, 각종 장식판에 나오는 남성들이 과연 신화 혹은 기록 속의 인물일까?

 

이들은 스키타이의 전통적인 남성이거나 특정 영웅일 수도 있지만 의인화 된 신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성과 비교해 볼 때 기원전 7세기부터 지속되거나(아르김파사), 기원전 5세기 이후에 나오는 여성(타피티)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성형상물이 후기구석기시대 이래로 지속적으로 제작되지만 남성형상물은 스키타이 문화가 되어서야 만들어진다. 인간형상물 가운데 남성에 대한 관념이 변했을 수는 있고, 스키타이 전통 남성일 수 있지만 기록 속의 인물들로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림 1. 기원전 5세기 이후 흑해 스키타이 문화의 전사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5. 인간형상물의 극대화와 스키타이의 멸망

 

 

필자의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은 필자가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여성형상물을 대상으로 그 모습이 극대화 되어서 나타나는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 동부지역의 미라와 서부지역 인간형상물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특히 여성형상물 뿐만 아니라 무덤의 구조 등도 설명해서 평소에 관심은 있지만 접근성 때문에 인용되지 못했던 러시아 자료를 소개하고 싶었다. 뿐만 아니라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인간형상물이 유적에 부장되는데 그 의미도 찾고자 했다.

알타이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

 

이미 주류성 출판사에서 펴낸 경희대학교 강인욱 교수님이 번역하신 알타이 초원의 기마인이 있어서 독자들은 많은 도움을 받았을 것이지만, 중간에 언급되는 파지리크 유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요한 부분이었다. 흑해지역의 자료는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설명되지만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아서 평소에 강의에서 하던 자료를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또 글 후반부의 여성형상물은 필자가 책을 펴낸 후에 작성된 논문(김재윤 2022b)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을 덧붙인 것이다.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은 초원지역의 대()문화권은 고고자료로 무기, 마구, 동물문양장식을 공통성으로 여기지만, 이러한 배경에는 경제공동체라는 관념이 있다. 하지만 인간사는 세상이니 지역마다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다.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이는 지역은 유적이 많은 시베리아와 흑해지역이고, 페레보드치코바가 동물문양장식의 특징에서 동과 서로 구분한 곳이기도 하다.

 

필자가 생각할 때는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까지 시베리아에서는 인간형상물을 만들어 무덤 속에 넣는 행위는 곧 부활이라는 관념 혹은 염원과 상통한다. 그 관념이 이어져서 현존하는 시베리아 민족들에게도 나무 속의 아이를 묻어두는 풍습이 남아 있다. ‘미라는 인간형상물이 극대화된 모습인데, 기원전 5~4세기 알타이에서만 볼 수 있다.

반면에 흑해 부근을 비롯한 동유럽에서는 다산을 염원하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후기구석기시대 유럽의 퉁실한 비너스상들도 같은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관념은 순동시대인 쿠쿠테니 트리폴리예 문화까지도 지속된다. 마을에서 소수의 집에서 발견되는 비대한 모습의 여성형상물들의 부장양상은 유사하다. 쿠쿠테니-트리폴리예 문화 후반부로 가면서 무덤에 부장되는 것들도 발견되어 인간형상물을 묻는 관념에 변화가 생겼다.

기원전 7세기 흑해지역이 스키타이 문화가 되면서도 다산에 대한 갈망은 스키타이 여신인 아르김파사로 나타난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 이후는 사뭇 다르다. 여성형상물과 남성형상물은 어떤 인물들에 대한 숭배로 보인다. 거대한 무덤 속에서 출토되는 여성형상물과 그것을 닮은 스키타이 칼라프를 쓴 왕비들은 존경을 받았는지, 스스로 숭배의 대상인 신()이 되고자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은 괴기스러운 인간형상물이 만들어지고, 인간이 신격화 된 이후에 점점 없어지게 된다. 기원전 4세기가 되면 시베리아의 동쪽에서는 흉노, 흑해북안에서는 볼가강 유역에서 밀려 들어온 사르마트 문화로 대체된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지역(흑해북안 및 코카서스 북부)에서는 철기시대가 되면서 거대한 봉분이 있는 무덤들이 생긴다. 이 지역에서 쿠르간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청동기시대부터 있어왔지만, 남들이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무덤은 철기시대가 되면서 생기게 되었다.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있었던 흙으로 인형을 만들어 집에 넣어 두는 행위는 기원전 7세기 성곽의 마을 유적에서만 발견되었다.

하지만 인간형상이 동물문양장식처럼 다른 용도의 물건 속에 장식되기 시작한다. 특히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은제거울과 각배 속의 여성은 신화와 관련되었다고 여겨진다.

이 유물은 여성형상물 뿐만 아니라 거울 속의 반인반수 및 함께 출토된 철제 검과 검집의 문양들로 보아서 코카서스 남쪽의 우라루트에서 제작된 것이다(알렉세예프 2012, 김재윤 2022b). 하지만 거울의 뒷면에 꼭지를 붙이거나, 스키타이 표범을 장식한 것은 스키타이 귀족의 요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막시모바 1954 ).

거울과 각배(그림 14) 속의 여성은 아나톨리 지역의 여신이었던 Cybele를 받아들인 스키타이 신화 속의 아르김파사로 보는 견해가 더 지지를 받는다. 사이벨레는 대자연을 의인화 한 것인데, 스키타이 신화 속의 다산의 역할을 했던 아르김파사와 같다고 여겼기 때문이다(막시모바 1954).

 

 

 

그리스의 아프로디테 숭배 역시 기원전 8~7세기에 아나톨리 지역에 거주하던 그리스인이 에게 해와 그리스 본토로 이 여신 숭배를 전했다(막시모바 1954, 굴랴예프 2018).

러시아 연구자들이 이 여성을 신화 속의 인물이라고 생각한 이유 중에 하나는 도상학적으로 두 팔을 벌리고 동물을 잡고 있는 모습이 기원전 5~4세기 유적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기원전 5~4세기 유물 가운데 맹수를 잡고 있거나 맹수를 세워두는 여성형상물(그림 15-1)과 맹수가 아닌 다른 동물이나 사물을 들고 있는 것(그림 15-2)으로 구분했다(김재윤 2022b). 맹수와 동반자인 여성은 스키타이 칼라프를 착용하고 있고, 이 유물이 출토된 톨스타야 마길라(Толстая Могила, Tolstaya Mogila)와 같은 무덤에서도 실제로 스키타이 칼라프(그림 16)가 출토된다. 맹수와 관련되지 않은 여성형상물은 아마도 그리스적인 색채가 농후한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1) 부활에 대한 염원 :나무 속의 미라 1

 

청동기시대가 끝나고 철기시대인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는 알타이의 해발 1500m이상 무덤에서 미라가 나온다. 미라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미라 처리에서 가장 관건은 부패방지를 위해서 근육과 지방을 제거하는데, 관절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서 인간 형체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관절이 끊어지면 모습이 어긋나기 때문이다(폴로스막 2016). 즉 인간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고, ‘인간형상물’로 필자는 이해한다.

헤로도투스(4.71~73)에 의하면 미라를 만든 대상은 ‘왕’이다. 이 그리스 역사가는 흑해 북안의 올비아라는 도시에 살았지만, 그가 구술한 ‘왕의 장레치르는 장면’은 알타이에서 확인된다. 동 시기의 흑해 북안의 유적에서 거대한 무덤 역시 ‘차르’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고, 인골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미라로 처리되지는 않았다.

아무튼 알타이의 높은 곳에서 미라(그림 11)로 처리되었던 죽은 왕들은 거대한 무덤 속에서 출토된다. 미라처리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다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고, 무덤의 아래에 ‘결빙층’이 남아 있는 몇몇 유적에서만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샤다르(Башадар,Bashadar) 유적인데, 두개골 상태는 후대에 발굴된 아크 알라하(Ак алаха, Ak alakha)-3 유적과 같지만, 이 무덤의 아래에는 결빙층이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결빙층이 잘 남아 있던 파지리크(Пазырык,Pazyryk) 유적 중에서도 2호(그림 12)와 5호, 아크 알라하-3 유적, 베르흐 칼쥔(Верх Кальджин, Verkh Kal'dzhin) II유적 등에서는 미라가 아주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파지리크 유적에서도 계곡의 입구에 위치한 3 호에서는 미라가 발견되지 않았다. 아쉽게도 2호는 도굴되면서, 미라가 찢어진 채 발견되었다(김재윤 2021a).

 

그림 11. 파지리크 유적 5호 미라

 

 

 

그림 12. 파지리크 유적 2호 미라

 

알타이의 무덤구조는 익히 잘 알려진 대로 무덤구덩이 속에 미리 재단하고 다듬어 둔 목재로 나무방을 만들고, 그 안에 통나무 관을 넣는 것이다. 무덤방 바깥에 말을 여러 마리 묻어두고 그 위를 통나무 수 천개와 흙과 나무로 채우는 것이다. 무덤 위에는 돌을 덮었다. 무덤방의 목재는 가장자리에 홈을 내었고, 상단과 하단을 결구했다. 이 방법은 투바의 기원전 7세기 아르잔-2호에서도 확인된다(추구노프 외 2017). 더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의 중심무덤방에서도 있었다. 아르잔-1호는 매우 엉성하게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중심무덤방에서는 상단과 하단의 목재에 홈을 내어서 결구하는 방법을 사용했기에, 알타이의 나무무덤방 구조를 만드는 기술은 아르잔-1호로부터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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