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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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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2500년 전 무덤인 파지릭 유적은 1929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발굴은 1947년부터 이다. 하지만 발굴은 1850년에 아직 로마노프 왕조일 때 ‘제국고고학위원회’를 만들어서 흑해북쪽의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1929년은 러시아혁명 후로 레닌이 죽고 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고, 스탈린이 집권했던 시점이다. 스탈린 집권기간 동안에 파지릭 유적은 발굴되었다. 스탈린은 사람을 아주 많이 죽인 지도자이다. 레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했던 권력을 잡은 수단은 등 뒤에서 칼을 꼽는 것이다. 인간백정이라는 평가도 있다. 2차대전 당시 독일과 싸워서 이겼지만, 자국민이 너무 많이 죽어서 그게 이긴 것일까 하는 평가도 나온다.

 그럼에도 러시아인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러시아인 3인중에 한명이다(2008년 필자가 유학당시, 러시아 국영tv 방송인 ‘러시아(РОССИЯ)’에서 했던 조사였는데, 아침마다 위대한 러시아의 위대함을 알리는 역사적 유적과 인물을 꼽아서 보여주었다. 아침마다 보면서 처음에는 거북했지만, 나중에는 그러려니...하고 되는 걸 경험했다. 아직도 스탈린이라니..이러면서. 복잡한 감정이었다.) 독일과 싸워서 이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열리는 전승기념일은 2차대전 종전일이 아니라 독일과 승전일인 5월 9일이다. 스탈린은 현대한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이 부분이야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일 테니...(우리나라에서 알려진 소련 혹은 러시아에 대한 인물의 이미지는 전부 미국언론을 통해서 알려져서, 미국입장에서 알려진 이미지이다. 실제 그 나라 감정과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필자는 스탈린 집권기에 알타이의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이상한 감정이 문득 든다.

 

2500년 전 유적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현대사로 넘어 갔는데, 다시 돌아와서 1929년에 그랴즈노프가 발굴한 유적은 이미 도굴당해서 주인공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하지만 말 10마리에 대한 정보는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 있고 필자가 공개했다.

 

2020/04/2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1호분] -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서는 한 가족 혹은 친족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이 확인된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과 그 안에는 관을 두고, 무덤방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었다..

eastsearoad.tistory.com

 

그런데 스키타이  문화의 유물은 늘 앞에 붙는 수식어가 ‘황금’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하지만 필자가 보여드린 유물은 거의 대부분 나무장식이었다. 그렇다면 황금은 어디에?

드문드문 말씀드렸지만 금박은 쉽게 찢어져서 벗겨진채로 많이 발견된다. 특히 1호분에는 금박이 많이 발견되었던지, 그 부분에 대해서 벗겨진 금박종이가 많다는 내용도 별도로 적어 놓았다.

여러분의 의심을 약간이나마 덜어드리기 위해서 4호분에서 가장 금박이 많이 남은 유물을 보여드리고자 한다. 유물은 말의 얼굴에 달렸던 굴레장식이다. 파지릭유적의 1호분에서 4번째 말의 굴레장식이라고 분류된 말이다. 비교적 많은 금박이 남아 있다(그림 1). (알타이에도 황금덩어리로 만든 유물이 출토되는 유적이 있다. 앞으로 소개할 예정임...)

 

 

그림1. 파지릭 유적 1호에서 출토된 말의 굴레

 

굴레장식에 관통하는 가죽줄은 뺨으로 돌아가는 부분은 가죽띠 2줄이고, 코로 돌아가는 부분에도 굴레장식이 부착되었다. 굴레장식은 산양머리와 팔메트 문양이다. 산양머리에는 가죽뿔이 붙어 있다. (그런데 가죽뿔이 빠진 왼쪽(우리가 볼때)의 굴레장식은 필자가 보기에는 새모양으로도 보인다.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나 싶기도 하다.)

 뺨으로 돌아가는 굴레는 2줄로 재갈멈치로 연결된다. 재갈멈치는 끝 부분에만 동물문양이 붙어 있는 유물과는 달리 재갈멈치가 통째로 산양을 표현했다. 앞다리는 몸 아래로 당기고, 뒷다리는 뒤로 뻗어서 몸을 수평으로 표현해서 산양은 뛰는 모습인지, 나는 모습인지를 표현했다. 재갈멈치가 대체로 막대기모양인데, 이 부분에 동물을 통째로 표현한다고 산양의 무릎을 꿇은 모양으로 표현하면, 다시 말해서 산양 몸을 수평으로 만들지 않으면 기능적인 부분이 약해지기 때문에 모양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세의 굽동물의 표현은 사슴돌에 이미 있다. 있지만 그것을 재갈멈치에 사용하는 것은 다른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유물의 이마장식은 물방울 모양을 표현했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