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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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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시베리아에서는 무덤속에 사람 뿐만 아니라 말도 함께 매장했다. 이런 무덤이 확인되는 곳은 해발 1500m의 파지릭 계곡, 2500m의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다. 전자에는 파지릭 유적, 후자에는 이미 설명드린 바 있는 아크 알라하 3유적과 아크 알라하 1유적이 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은 남자아이의 무덤인데도 말이 부장되었다. 유목을 기본으로 하는 생업환경에서 동물은 그들의 재산이자, 문화 전반에 동물에 대한 표식이 남아 있다.

 

파지릭 5호분의 무덤구덩이 북쪽에는 말은 9마리 매장되었다. 9마리 가운데서 1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재갈을 비롯한 굴레, 안장, 머리장식을 착장했다. 말은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가장 아래에서 확인된 IX번 말이 머리장식까지 있어서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무덤안에 4륜 마차가 함께 매장되었고 이를 끌던 말이라고 생각하면, IX번 말은 가장 선두였을 가능성이 크다.

 

무덤구덩이는 기본적으로 무덤방을 설치한 후 남는 공간을 이용해서 매우 좁다. 말 9마리와 마차를 부장하기 위해서 층층이 쌓아서 넣었다. 무덤방의 바깥에 무덤위의 돌을 지지하기 위해서 수직으로 세운 세 개의 기둥이 기준이 된다. 무덤구덩이의 북쪽에서 동쪽 절반은 세 마리 말이 머리 방향이 동과 서로 교차되게 해서 묻혔다. 가장 아래의 말은 IX번 말로 머리방향이 서쪽을 향하고 배는 바닥에 깔고 있고, 그 위에는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등을 아래말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다시 그 위의 말은 머리가 서쪽으로 향하고 등을 아래로 향하도록 배치되었다. 기둥 뒤에는 동쪽을 향하고 있는 IV번 말만 넣었다. 기둥을 넘어선 서쪽에는 말 3마리가 쌓였는데, 가장 아래의 VIII번 말은 배를 바닥에 깔고 서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그 위의 말은 등을 바닥쪽으로 향하고, 머리는 동향이다. 말 위에는 마차가 분해한 채로 부장했고, 그 남은 공간인 가장 서쪽에 말 2마리가 서로 머리를 다른 방향으로 해서 부장되었다. 위에 있는 말은 말 머리가 무덤구덩이의 입구로 향하고 등이 하늘로 보도록 하는 자세이다.

 

말은 매장할 때 관의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매장된다(그림 1, 그림2). 관의 방향이 동서방향이면, 말도 동서방향이다. 파지릭 유적에서 통나무관은 모두 동서방향이고, 사람의 두향은 동향이다. 5호를 제외하고는 말의 머리장식이 있는 다른 무덤의 말은 모두 동향을 향하고 있다. 1~3호분에서는 말 머리 장식이 2개체분 출토되었고, 4호와 5호는 하나씩만 출토되었다. 그러나 5호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말 머리 장식이 있는 IX번 말의 두향은 서향이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말과 인간의 두향에서 규칙성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루덴코의 설명은 관이 동서방향인데, 말이 남북방향으로 매장되지 않는 것이다(그림 1, 2).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말의 두향이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루덴코가 상트페테르부르그 출신이고 유럽인이어서, 동양인과는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과학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필자는 자는 방향을 바꾸거나 스트레스가 심한 날은 꿈을 심하게 꾼다. 모든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만 특히 자는 방향을 바꾸면 더 심해진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그런데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그 옛날에도 있었을 테고, 두향에 대한 관념도 정해져 있었을 텐데....이런 부분은 알 수 없다.

 

 

     말 번호->

말 장식

I

II

III

IV

V

VI

VII

VIII

IX

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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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레

 

 

 

 

 

안장

 

 

 

 

 

머리장식

 

 

 

 

 

 

 

 

표1. 파지릭 5호분의 말 장식(김재윤 편집)

 

위의 표는 루덴코의 서술에 따라서 말과 관련된 마구를 표로 만들었다. 의문점은 말을 부릴 때 가장 핵심인 재갈에 대한 설명이 애매하다. 애매한 부분은 물음표로 표현했다.

 

그림1. 파지릭 5호분의 무덤구덩이 내부

 

 

그림2. 파지릭 5호분의 무덤 구덩이 단면도

 

그런데 우리나라의 고고학 환경에서는 무덤의 두향방향은 거의 연구되지 않는다. 전 시대는 아니고 선사시대가 특히 그렇다. 왜냐하면 토양특성상 인골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몇 몇 특수한 환경을 제외하고는...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그림 1.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안장, 안장덮개와 크루퍼

 

그림 2.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안장머리 부분. 그림1의 상세사진.

 

2500년 전 시베리아 파지릭 유적 5호분에는 말이 9마리 사람 2인과 함께 매장되었다. 2인 중에서 누구의 안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장과 안장덮개이다(안장은 4개 출토되었다). 가죽으로 제작되었으며 사슴털을 이용해서 꿰매었다. 안장의 앉는 부분에는 중간에 건초를 넣어서 푹신하게 했다. 앞면인 안장머리 부분과 뒷면에 2개의 타원형 지지대(그림2)가 있고, 무릎 혹은 엉덩이쪽으로 패널이 붙어져 있다.

지지대에는 사슴이 몸을 뒤튀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그 중앙에 패널도 부착되었다. 패널에는 그리핀 혹은 맹수의 머리가 새겨져 있다(그림 3-3~5).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새겨졌는데, 맹수인지, 새의 얼굴에 맹수가 조합된 것인지는 구분이 힘들다. 패널은 4개(그림1) 모두 맹수 혹은 그리핀머리가 새겨져 있고, 엉덩이의 크루퍼와 연결된 패널에도 끝 부분의 장식(그림 3-7)도 같은 장식이다. 안장의 지지대 위에도 호랑이의 머리조각이 각각 5마리씩 안장머리에 10마리(그림 3-6)부착되었다. 안장뒷부분에는 정확하지 않지만 머리조각을 그림 1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림 3.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안장의 부속품

 

스키타이 문화의 안장은 단단한 프레임과 포멜은 없었지만 오늘날 안장의 모든 요소가 이미 다 있다. 땀을 흡수하는 역할을 하는 안장덮개, 고삐끈, 복대, 등자쇠, 가슴밴드, 크루퍼까지 모두 다 있다. 크루퍼는 안장 뒷부분과 말 꼬리를 연결하는 스트랩이다.

크루퍼는 한국어로는 번역이 되지 않는다. 아래의 위키페디아에서 현대 크루퍼를 보시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림 1에서 안장의 뒷 부분에서 패널과 연결된 U자모양의 끈이 크루퍼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Crupper

 

이 안장은 지지대가 낮은 편이다. 그림 1을 자세히 보시면 안장을 덮은 붉은색 가죽이 있다. 가죽에는 아플리케 장식이 붙어 있다. 이 부분은 안장덮개로 땀을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사슴가죽이고, 말총을 이용해서 덧 붙인 것이다. 이 안장덮개는 얇은 끈으로 안장과 연결되어 있다.

안장덮개에 덧 붙인 정사각형의 패널은 사슴가죽을 말총으로 이어 붙인 것이다. 땀을 흡수하기 위한 천은 안장의 안쪽에 부착되었다. 그 위에는 파란색털과 광택이 나는 붉은색 삼각형, 긴 네모꼴의 가죽 아플리케를 덧붙인 것이다. 원형의 금빛 나는 못이 아플리케를 고정시키는 역할도 한다. 붉은 정사각형에는 4개의 꽃잎과 1개의 원형 못이 박혀서 꽃모양으로 덮고 있다.

 

이 유적은 기원전 5세기 가량이지만, 스키타이문화에서 말안장은 기원전 7세기 가량부터 확인된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사진은 좀 그렇습니다..내용상.....

 

 

2500년 전 알타이의 파지릭 유적 5호분에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하나의 통나무관에 매장되었다. 2호분에서도 같은 현상이 확인되었다. 2호분은 40대 가량의 여성과 55~60세 가량의 남성이었다. 골격의 특징으로 보아서 몽골로이드로 판명되었다. 요즘 같으면 DNA분석법을 썻겠지만, 1947년에 발굴하고, 1953년에 나온 단행본에서는 형질인류학적인 분석에 의존했다.

 

5호분의 남성은 대략 55세 가량이다. 그런데 2호분의 남성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고 한다. 머리크기는 중간정도인데(두개골 계측치 78), 이마는 높고 길고 턱이 돌출되었다. 광대뼈는 넓은 편인데, 그렇게 돌출되지는 않았다.(광대뼈 사이의 직경은 146mm)이다. 코는 길고 좁으며(32×54mm) 강하게 돌출되었다.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니아 강 사이가 민족의 기원지로 밝혀진 오늘날 카자흐인과 키르기즈스탄 인의 얼굴 가운데서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이 남성의 키는 175~176cm이다. 이 남성의 머리색은 검고 약간 곱슬기가 있는 편이다.

5호분의 여성에 대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고, 미라처리에 관한 부분만 남아 있다.

 

그림 1. 파지릭 5호분에서 통나무관에서 확인된 남성의 모습

 

 

5호분의 남성은 미라처리를 했으나, 2호분의 미라와는 다르다고 했다. 어떤 점이 다를까?

 

미라처리를 했다는 말은 두개골의 뇌를 제거했고, 신체에서도 근육과 장기등을 제거한 흔적이 남아 있다.

남성의 두개골 뒤쪽에는 정수리에서 약간 왼쪽을 통해서 뼈를 잘라내었다. 11cm가량으로 꿰맨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남성의 뒷면은 목 아래 3cm 척추까지 세로 절개선이 남아 있다. 이 절개면은 어깨를 가로지르는 절개면과 교차된다. 어깨부위의 절개면은 5cm간격으로 꿰매었다. 목 부위의 절개면은 어깨면을 묶은 끈 보다 가는 끈을 이용했다(그림 2).

몸에는 겨드랑이에서 갈비뼈까지 절개한 흔적이 있는데, 말총으로 꿰맨 흔적이 선명하다. 남성과 여성 모두의 신체에 절개흔적이 남아 있고 말총으로 꿰매었다. 가슴의 피부는 겨드랑이 부분에서부터 여섯 번째 갈비뼈까지 찢어진 상태이다. 흉부의 절개면 9cm아래에서부터 복부 절개가 시작되는데, 배꼽 오른쪽에서부터 시작해서 사타구니까지 남아 있다. 배꼽 옆에는 2~3cm가량의 작은 절개면이 있다(그림3).

팔의 절개면은 겨드랑이 안쪽에서부터 팔꿈치 안쪽까지 있다. 손과 손가락 바깥쪽에도 절개면이 남아 있다. 손근처와 팔뚝 바깥쪽에 길이 4~5cm가량의 절개면이 남아 있다. 남성의 오른손의 중지와 남성의 성기를 관통해서 실로 묶였다.

하반부의 천골 안쪽 가장자리로부터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까지 절개면이 연결된다. 무릎 뒤에만 3~4cm 간격이 남아 있다. 발목뼈에서 둘째 발가락까지 이어지는 절개면이 있다.

남성의 몸에 있는 절개면은 모두 말총꼬리를 사용했는데, 손가락을 고정시키는 부분에만 양털을 이용했다.

 

그림 2. 파지릭 5호분의 남성 두개골 뒷모습

 

그림 3. 파지릭 5호분 남성의 전신

 

 

여성은 엠블링하는 방법이 약간 달랐는데, 두개골은 측두골과 두정골 사이의 왼쪽에 남아 있는데, 절개면은 꿰매져 있었다(그림 4). 후두부에는 오래전에 만들어진 2개의 절개면(4cm, 10cm)이 남아 있다. 오른쪽 관자놀이의 귀 앞과 왼쪽 뺨에도 절개면이 남아 있었다. 오른쪽 목과 쇄골에는 반원형으로 절개되었다.

몸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가슴 양쪽 겨드랑이에서 유두부위까지 절개면이 남아 있다. 흉부의 가장 아래쪽에는 오른쪽 배꼽과 장골 뼈를 통과하는 절개면이 있는데, 치골과 대퇴골 사이의 허벅지 안쪽에서 마무리 되었다. 팔에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겨드랑이에서 손까지 절개면이 잇는데, 팔꿈치 뒤에서만 남아 있지 않았다. 손에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절개면이 남아 있다. 왼손과 오른손을 교차한 모습이다(그림 5). 

여성의 등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양쪽 어깨에 절개면이 있고, 목과 척추에 세로의 절개가 있다. 목에는 절개면이 10cm, 척추에는 6~7cm가량이다. 왼쪽과 오른쪽 천 골 아래에서 다리까지 무릎 부위 4~5cm정도만 제외하고는 절개되었다. 왼쪽 다리에는 절개면이 하나 더 있다.

 

그림 4. 파지릭 5호분의 여성 뒷모습

 

 

그림5 . 파지릭 5호분의 여성미라

 

파지릭 2호분의 미라와 다른 점은 파지릭 5호분의 남성은 근육을 모두 제거 했지만, 2호분은 그렇지 않았다. 여성과 남성 모두 절개면을 말총으로 꿰매었다. 남성의 손을 묶는 부분만 양모를 사용했다. 미라의 처리를 할 때 꿰맨 흔적을 말총으로 하는 것은 같은 시기의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일명 얼음공주)도 마찬가지였다.

 

루덴코는 절개를 하고 근육을 제거한 것은 방부제를 바르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바르코바의 연구에 따르면 파지릭의 미라 피부와 머리에는 송진과 밀랍을 사용했는데, 송진은 특히 열대지역에서 자라는 다마르(dammar)와 셀라크(shellac) 라는 것이 밝혀졌다(바르코바,  고흐만 2001). 미라 처리할 때 쓴 발삼 물질이 밝힘으로써 교류지역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폴로스막은 더 낮은 계급의 사람들로 중국과 접하면서 살던 사람들은 발삼을 대신 다른 물질을 이용했다고 한다.

 

파지릭 5호분에서 확인되는 남성와 여성미라의 몸의 수많은 절개면은 근육제거를 위한 것도 있지만 피하지방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클 수도 있다. 가장먼저 부패가 시작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루덴코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바르코바, 고흐만 2001 Баркова Л.Л., Гохман И.И. 2001 : Ещё раз о мумиях человека из Пазырыкских курганов. // АСГЭ. [Вып.] 35. СПб: 2001. С. 78-90.(바르코바, 고흐만 2001, 파지릭 고분의 미라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필자의 블로그를 계속 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스키타이 문화에는 나무로 된 무덤방과 그 안에는 통나무관이 매장되었다. 2500년 전의 알타이 산에서 확인되는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모두 확인된다.

 

시베리아 남부의 알타이 산 중에서도 파지릭 계곡에 위치한 파지릭 유적의 5호분은 그간에 소개해 드린 무덤과는 달리 마차가 들어가 있어서 좀 다른 양상이다.

잘 알려진 대형의 고분은 도굴이 심하다. 아시다시피.

하지만 도굴꾼은 마차따위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무덤방 밖의 말과 마차가 부장된 공간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무덤방 내부의 통나무관과 그 안의 유물에만 탐을 낸 것 같다. 왜냐하면 아래 포스팅에서 보시겠지만 무덤의 단면에서 살펴본 모양은 무덤방 천장에만 구멍을 냈다. 만약에 무덤방 바깥의 말과 마차공간에도 손을 대었다면, 무덤을 덮은 돌이 흐틀어졌겠지만, 무덤상부의 함몰은 무덤방의 중앙에서만 관찰된다.

도굴꾼은 실망했을 것이다. 황금이 가득찬 무덤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무덤방 안은 거의 텅텅 비었고, 통나무관 안에도 황금 유물 대신에 목제 혹은 목제에 금박을 씌운 유물정도만 확인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덤방은 이중으로 내부에 있는 2차 무덤방의 크기는 5.2×2.3m, 높이는 1.4m, 외부의 1차 부덩방의 크기는 3.4×6.42m,높이는 1.68m가량이다. 2차 무덤방의 바닥에는 6cm 너비의 나무판은 13개 깔려 있다. 2차 무덤방의 벽은 8개의 통나무, 천장은 13개의 통나무. 외부에 있는 1차 무덤방의 벽은 10개의 통나무, 천장은 18개의 통나무로 구성된다.

이 무덤이 다른 무덤과 구분되는 점 중에 하나가 무덤방의 통나무를 그대로 쓰지 않고 무덤방 내부는 편평하게 다듬었다는 점이다. 1차 무덤방과 2차무덤방 사이를 지지하는 나무상자는 다른 무덤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무덤구조에서 또 다른 점 중에 하나는 무덤방의 남쪽 방향 일종의 창(그림 2)이 있는데, 이곳으로 통나무를 한 다발 가로질로 넣어서 통나무관의 뚜껑을 누르고 있다(그림 1-21). 무덤방의 하중을 견디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루덴코의 책에는 설명이 없었지만, 무덤방에 창을 만들고 일부러 넣었다는 점에서 하중을 견디기 위한 구조라고 생각된다.).

 

2020/04/03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5호분] - 시베리아 알타이 2500년 전 관은 하나, 사람은 두 명

 

시베리아 알타이 2500년 전 관은 하나, 사람은 두 명

무덤구덩이를 덮은 돌은 가장 상부에는 큰 돌이고, 그 아래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돌을 채워넣었는데, 3톤정도 된다. 그 아래에는 통나무가 층층이 쌓여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통나무 층 가장 아래에 도굴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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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포스팅에서 무덤의 단면도에 1번 나무상자가 1차무덤방과 2차무덤방을 지지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두번째 나무상자이다.

 

그림1. 파지릭 5호분의 무덤방 내부

1. 마차바퀴의 축, 2: 관 뚜껑; 3: 안치된 시신; 4-마차바퀴의 지지대, 5-사다리, 6-안장덮개, 7-9: 마차바퀴의 부속품; 10-말; 11-카펫에서 풀린 실타래; 12-액체 담는 토기의 파편; 13-펠트조각; 14-양 가죽; 15-목제 상 다리; 16-막대기; 17-뼈로 만든 북; 18-펠트제 베개; 19-손잡이가 나무인 뿔 그릇; 20-여성의 머리장식; 21-끈으로 묶인 나무판; 22:무덤방의 일부 목제; 23: 마차 부속품

 

 

 

그림 2. 파지릭 5호분의 2차무덤방(안의 무덤방)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방 안에는 주로 확인되는 유물은 정해져 있다. 토기(액체담는 그릇), 뿔 그릇, 나무 그릇과 같은 그릇 종류, 목제 쟁반(아크 알라하 1유적, 아크 알라하 3유적) 혹은 다리가 있는 상(파지릭 2호분 파지릭 5호분)은 공통적인 듯 하다.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1유적 및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 없었지만 파지릭 유적에서 나오는 유물 중에 하나는 악기이다.

파지릭 2호분에는 일종의 하프가 확인되었고, 파지릭 5호분에는 뿔로 만든 드럼 모양(그림 3)의 악기가 확인된다. 무덤방의 유물이 관 안에 있었는지 관 밖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관 밖에(그림 1-17)서 확인되었다.

 

2020/03/22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2호분] - 에르미타주 소장,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산 무덤에서 나온 스키타이 문화의 악기

 

에르미타주 소장,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산 무덤에서 나온 스키타이 문화의 악기

러시아의 상트페트르부르그 시에 위치한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근현대 유명화가의 그림부터 시베리아의 구석기시대 유물까지 없는게 없어서 ‘박물관’이라는 뜻이 딱 맞는 곳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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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파지릭 5호분 출토 뿔로 만든 북

 

기원전 5세기 가량에 현악기(파지릭 2호분)와 타악기(파지릭 5호분)가 이미 존재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마차와 악기는 이제까지 살펴보았던 알타이의 다른 유적(아크 알라하 3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에는 없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조합이기도 하다.

차 타면,,,,음악듣는..!!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의 남부 알타이 산에서 파지릭 계곡에 위치한 2500년 전 무덤에는 죽은 자를 위해서 말을 매장하는 풍습이 이었다. 무덤의 가장 위는 둥글게 돌을 깔고 무덤구덩이를 채웠으며, 무덤구덩이 가장 아래에는 통나무를 다듬어서 만든 무덤방과 통나무관을 넣었다.

무덤방의 바깥 빈 공간에 말을 여러 마리 매장했다. 말은 대부분 말을 부리는데 필요한 재갈 뿐만 아니라 말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굴레장식까지 갖쳐진 상태였다.

 알타이산에서 파지릭계곡 뿐만 아니라 우코크 고원 등 여러 지점에서 비슷한 매장풍습이 확인된다. 이러한 유적을 그룹화 해서 파지릭문화라고 부른다. 파지릭문화는 마구, 무기, 동물문양장식을 상징으로 하는 유라시아의 스키타이문화권의 일부이다. 스키타이문화권은 넓은 지역을 아루르는 명칭으로 각 지역에서 문화가 나타난다.

 

 그런데 파지릭문화에서 특히 파지릭 유적 5호분에는 말 뿐만 아니라 마차를 매장한 무덤이 있다. 마차의 바퀴는 4개이고, 수레바퀴는 통판이 아니라, 바퀴의 살이 있다. 통판의 수레바퀴가 달린 마차는 이미 유라시아에서는 청동기시대에 나타난다. 파지릭문화는 시베리아의 초기철기시대문화이다.

 

 파지릭 유적의 5호분에는 무덤구덩이의 북쪽을 빈 공간으로 두고 말 9마리와 4개의 수레바퀴가 달린 마차가 확인되었다. 말은 모두 같은 상태로 묻힌게 아니라, 말 마다 착장한 장식에 차이가 있다. 말 1마리(I번 말)는 아무런 장식이 없었고, 재갈만 물린 말 4마리(II,III,V,VI번 말), 재갈+굴레장식+안장이 있는 말 3마리(IV,VII,VIII번 말), 재갈+굴레장식+안장+머리장식까지 있는 말 1마리(IX번 말)가 확인되었다.

 

가장 복잡하고 화려한 말은 IX번 말이다. 말의 머리까지 장식을 화려하게 했다. 그림 1에서 무덤구덩이의 가장 아래에 있어서 가장 먼저 무덤에 들어갔다.

이제까지 살펴본 파지릭 문화의 무덤 가운데 말의 치장 정도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무덤이기도 하다.

말의 머리장식을 한 현상은 아크 아라하 3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는 없었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머리부터 등끝까지 치장한 말이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1. 파지릭 유적의 5호분 무덤의 북쪽 단면도 

1.바퀴의 축; 2.마차의 몸체; 3. 마차몸체의 백조장식 ; 4. 검은색 펠트로 된 마차의 덮개; 5.펠트조각; 6.펠트로 된 카펫트; 7. 삽의 손잡이; 8. 마차의 바퀴; 9. 마차를 끄는 막대;10. 말총; 11. 카펫에서 풀린 실꾸러미; 12. 13. 말의 안장과 굴레장식; 14. II,III,V,VI번 말의 마구; 15. IV번의 안장; 16, 17-VII번의 말 안장과 굴레장식; 18, 19-VIII번 말의 안장과 굴레장식; 20 ,21-IX번 말의 안장과 굴레장식 ; 22-IX번 말의 머리장식; 23-IV번 말의 굴레장식; I~IX: 말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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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릭 유적은 스키타이 문화에서도 기원전 5세기 가량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스키타이문화는 이르면 기원전 9세기 까지도 올라가는데, 그때도 동물문양장식이 있을까?스키타이 문화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동물문양장식은 무엇일까?

 

그림 1은 에르미타주에 소장중인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 컬렉션 중에 하나이다. 버클장식이다. 둥글게 말린 표범이다. 꼬리와 다리를 말아서 원의 중간을 채우고 있다. 앞 발과 뒷 발, 귀, 꼬리의 끝은 둥글게 파진 홈으로 표현되었는데, 원래는 보석을 감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원형의 감입홈에는 옥이나 기타 보석류의 돌을 끼운 후에 금판은 나중에 땜질했다(그림 1). 뒷면에는 가죽띠에 고정하기 위한 고리가 세 개 땜질되어 있다(그림 2).

 

그림 1. 에르미타주 소장. 황금제 버클 장식. 10.9×9.3cm

 

그림 2. 그림1의 뒷 면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원형의 동물장식은 표트르가 모은 수집품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로 생각된다.

표트르 대제의 시베리아 수집품은 정확한 출토지를 몰라서, 유물의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아르잔 1 유적에서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림 3. 아르잔 1유적의 위치(아르잔: 보라색 표시, 파지릭 유적: 녹색)

 

그림 4. 아르잔 1유적 출토, 청동제 버클 장식

 

 

투바지역의 아르잔 1유적은 스키타이문화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이다. 탄소연대측정과 나이테연대 보정으로 B.C 885~790로 밝혀졌다.

 

아르잔 1유적이 발굴되기 전에는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을 흑해 북안에서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시베리아 남부의 아르잔 1유적이 발굴되면서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은 시베리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르잔 1유적에서 이미 각종 마구 및 동물문양장식등이 확인되고, 정확한 나이테연대측정법이 한 몫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가 이미 제공한 표에서 흑해보다 시베리아가 좀 더 올라가고 그 곳에 초기 스티카이문화라고 적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르잔 1의 청동제 버클 장식은 보석의 감입을 위한 감입홈이 없는 점과 청동제(그림 4)라는 특징으로 보아서 황금제 버클(그림1)장식보다 이른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표트르 1세의 황금제 버클 장식은 이보다 늦은데 루덴코는 대략 기원전 600년 경 혹은 기원전 500년 경 정도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형의 동물문양장식은 흑해북안의 켈레르메스 유적의 2호분에서도 출토된다.

크기가 약 2cm밖에 안되지만, 굴레장식으로 고양이과의 짐승이 몸을 말고 있는 유물이다.

이 유적은 20세기 초반에 발굴되었는데, 기원전 7세기 가량으로 학계에서는 생각한다. 흑해북안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 중에 하나이다.

 

그림 5. 흑해 북안, 켈레르메스 2호분, 두 번째 유물이 몸을 둥글게 만 고양이과의 동물문양장식,  골제품. 지름 2cm

 

참고문헌

루덴코 1962,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루덴코 196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콜렉션)

그랴즈노프 1980, Грязнов М.П. 1980 :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Л.: 1980.(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문화의 차르 고분, 아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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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구덩이를 덮은 돌은 가장 상부에는 큰 돌이고, 그 아래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돌을 채워넣었는데, 3톤정도 된다. 그 아래에는 통나무가 층층이 쌓여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통나무 층 가장 아래에 도굴꾼이 만들어 놓은 1.45×1.9m의 구멍이 남아 있다. 무덤방의 가장 상부는 자작나무 껍질로 덮었는데, 그 곳에도 도굴구멍(0.89×0.93m)이 있었다.

무덤방의 덮개는 두 단으로 덮여 있었는데, 그 안에 얼음이 채워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무덤방은 납작한 판자로 만들어졌는데, 무덤구덩이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다. 무덤방 안에는 다듬은 통나무로 제작되었다. 무덤방 내부의 크기는 높이는 1.4m이고, 2.3×5.2m가량이다.

 

파지릭 유적의 무덤 구조는 비슷한 듯 서로 다른 점이 있다. 파지릭 2호분의 단면과 그림 1에서 아래의 무덤 단면도를 보시면 차이가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림 1. 파지릭 5호분의 무덤 단면도

 

2중의 무덤방 구조 바깥으로 아주 두터운 수직의 나무 기둥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설치되어 3개의 기둥벽(그림 2)이 버티고 있고, 무덤 위의 돌과 통나무층의 하중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림 2. 파지릭 5호분의 무덤 상부, 아직은 무덤방의 덮개를 열지 않고, 상부의 돌만 치운 상태. 수직의 기둥 3개가 보인다. 아래 그림(2)이 무덤방의 덮개인데 도굴꾼에 의한 구멍이 선명하다. 무덤방 바깥으로 마차의 바퀴가 보인다(2).

 

무덤방의 북쪽 빈공간은 말과 마차가 부장되었다.

 

그런데 그림 1에서 통나무 관이 1개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통나무관에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확인되었고, 여성 아래에 남성이 깔려 있었다.

 

지난 포스팅에서 파지릭 2호분에서 통나무관이 1개인데 여성과 남성이 확인되어서 함께 묻혔을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어떻게 보면 바보같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막 살펴 보지 않아도, 조금만 더 자세히 다른 무덤을 살폈다면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어찌 되었던가 통나무관 안에 여성과 남성을 함께 매장되었다.

생각해보면 잔인한 일이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또 다르게 해석할 수 도 있다.

한날한시에 혹은 비슷한 시기에 죽었을까? 그게 우연하게 일어났을까?

만약에 그런 경우가 하나였다면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도 가능하겠지만, 벌써 두 번째이다.

그렇다면 누군가 먼저 죽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연사가 아닐 가능성이 있다.

 

앞에서 여러 가지 정황상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무덤을 만드는 시기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렸다. 봄과 가을이다. 러시아학자들은 영구동토대를 이용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럴 수도 있지만,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무덤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모여야 하는데, 흩어져서 사는 유목민의 특징상 사람이 모이는 시기는 목초지로 이동하는 과정이었을 것이고, 그때가 여름이 되기 전과 겨울이 되기 전이다. 그 때 때마침 사람들이 죽었을 수 있다. 또 동시에 남녀가 모두..?!

 

이 모든 과정을 그들도 계획했을까? 영화대사처럼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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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알타이 산 중에서도 해발 높이 1500m가량의 파지릭 고원에는 2500년 전 스키타이 시대에 살던 사람이 묻힌 무덤이 있다. 유라시아를 횡단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을 공통적으로 묶는 일종의 상징 같은 것이 있는데 무기, 마구, 동물문양장식이다. 스키타이 3요소라고 한다. 그런데 동물문양장식은 깍두기 같다. 단독으로도 확인되기도 하지만 주로 무기나 마구에 장식물로 달리기도 하고, 옷, 안장덮개, 방울, 거울, 목걸이 등 다양한 곳에 표현된다. 스키타이 문화권은 흑해북안, 쿠반 지역(코카스서 산맥, 지금의 그루지아), 카자흐스탄, 알타이, 미누신스크 분지 등에서 나타난다. 이 지역을 아울러서 스키타이문화권이라고 한다.

 

2020/02/1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1유적] -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그림 1.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전체 모습은 앞의 포스팅 참고 그림 2.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말탄 스키타이 전사의 모습, 투구는 코린트 식 그림 3.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

eastsearoad.tistory.com

 

위의 포스팅에서 스키타이 문화권의 표를 소개한 바 있다.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불리는 부분은 포스팅에 표시해 두었고, 아래표는 혹시나 제공해 드린다..

 

 

지도. 스키타이 문화권의 분포범위, 위 포스팅의 표와 비교해 보시면 재미있으실 것이다. 필자는 표를 지도로 인식한다.

 

물론 모든 지역의 문화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그들 문화에서 공통적인 요소가 있어서 문화권이라고 한 것이다. 비슷한 요소가 나타나는 이유는 서로 ‘contact’ 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SNS가 없으니 비대면 접촉이 아닌 대면 접촉이었다. 혹은 실제로 만난적은 없지만 전해 들은 사람들이 또 비슷한 유물을 생산하기도 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인간의 활동영역은 매우 넓었다.(우리는 남북이 끊겨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섬으로 여기면서 생각이 닫히는 경우가 많다.)

 

파지릭 고원의 파지릭 유적에는 5호 무덤에서는 4바퀴 마차가 함께 부장되었다. 아마도? 유라시아를 돌아다녔겠지? 알타이 산에서 어떻게?

알타이 산맥은 높지만 바위산 마다 교통로가 있다. 그 곳에서 암각화가 많이 발견된다.

 

 

아뭏튼 파지릭 5호분에는 마차가 매장되었으니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그림 1. 파지릭 5호분의 평면도

 

무덤의 상부 직경이 42m, 높이가 3.75m가량 된다. 5호에는 무덤의 상부를 덮은 돌에서 연접한 남쪽에 둥근 원형으로 돌이 둘러있는 것이 확인된다.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돌 무지의 직경은 3.5m~5.7m이고 간격이다. 이러한 현상은 투엑타 유적에서 확인된다.

 

무덤방의 크기는 8.25×6.65m이고, 무덤바닥은 땅의 표면 기준으로 4m가량이다(그림1).

 

그림 2.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양탄자의 아플리케 장식.

 

 

 

 

참고문헌

 

Золотые олени Евразии.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в Гос. Эрмитаже, СПб, 18 октября 2001 года — 20 января 2002 года. СПб: «Славия». 2001. 248 с. (에르미타주 국가박물관 특별전 도록, 유라시아의 황금 사슴, 2001)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지난 3주 정도는 시베리아의 스키타이 문화권에서도 알타이에 위치한 파지릭문화의 파지릭 유적에서 남녀 미라가 들어간 무덤을 살펴보았다.

 

이제 까지 파지릭문화에 해당하는 무덤은 여성무덤(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 남성무덤(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아이무덤(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남녀무덤(파지릭 유적의 2호분)을 살펴보았다. 나름 자세히 생생히 알려드릴려고 노력했는데, 부족한 점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위의 무덤에는 모두 말이 부장되어 있었다.

그럼 말 만 타고 다녔을 까? 마차도 타고 다녔다. 파지릭 유적의 5호에는 마차가 들어가 있다. 이 유적의 파지릭 2호분은 대체로 2500년 전 아크 알라하 3유적과 비슷한 시점에 공존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미라의 몸에 문신이 같은 사람이 그린 것이라면 생각해 볼 수 있다.

 

파지릭 5호분은 파지릭 유적의 1호분 보다 48년 정도 늦은 뒤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나무 나이테를 비교해서 얻은 상대적인 수치이다. 이 유적이 발굴될 당시 1947~1948년에는 탄소연대측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방법은 1960년대 이후에 개발되었다. 파지릭 1호분은 파지릭 2호분과 같은 시기의 무덤으로 생각한다.

 

파지릭 유적이 위치한 곳은 해발 1500m정도 된다. 이는 앞의 포스팅에서 필자가 구글지형도에 표시해 놓았다. 유적에서 마차가 확인됨으로 마차가 올라갈 수 있는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마차가 갈 수도 없는데, 그곳에 묻었다고 추론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실제로 파지릭유적은 계곡의 낮은 곳과도 가깝고 강 주변의 자작나무로 무덤을 만들었다. 

 

앞에서 러시아 학자들이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는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보다 낮은 계급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원인 중에 하나가 무덤의 크기가 작고, 부장품에 차이, 환경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특히 파지릭 유적에서 확인되는 마차의 존재는 더 그러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같다. 러시아 학자들은 상대적으로 덜 높은 생활 환경이 좋은 파지릭계곡이 우코크 고원보다 더 상위 계급을 위한 사람들을 위한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석달 전만해도 긴가민가 하면서 러시아학자들의 생각을 전했다.

하지만 러시아 학자들이 놓친 생각은 우코크 고원의 위치이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은 파지릭 계곡 보다 1000m높은 곳에 위치한다.

발굴당시에 완벽하게 남은 미라를 옮기기 위해서 모스크바에서 헬기를 띄었다. 우코크 고원은 고원에 올라가면 매우 아늑한 장소이지만, 잘 갈 수 없다. 그곳에 가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지난번에 링크한 폴로스막의 인터뷰에도 나온다.

러시아 군용 트럭(가즈-66, 시베리아 벌목공 들이 타고 찍은 군용 트럭의 사진이 간혹 보이는데, 그 차가 군용트럭이다)과 헬기만이 갈 수 있다. 그 군용트럭은 필자도 타 보았는데,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트럭의 장점은 어디든지 갈 수 있다. 한시간 정도 타고 나면 사람들은 거의 실신할 정도가 된다. 그 트럭에 미라를 옮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라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기 때문에. 아마 발굴할 때 연구자와 물건들은 군용트럭으로 이동했지만, 몇몇 우두머리와 미라는 헬기로 날랐다는 기사를 읽었다.

 

즉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 마차가 없는 것은 그녀가 묻힌 곳이 마차가 갈 수 없는 곳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면 안된다. 그 여성미라가 지위가 낮아서가 아니라 마차가 갈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에 묻었다는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한다.

 

어쨋거나 파지릭 5호분에는 말 9필과 마차가 확인된다.

그럼 시베리아에서 마차는 스키타이문화부터 있었을까?

 

아니니깐 저렇게 물어보겠죠?

이 동네 마차는 마차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지 않지만 마차의 부속품과 마차를 그린 암각화가 청동기시대부터 확인된다. 안드로노보문화와 카라숙문화에서 확인되는데, 차차 소개하도록 하겠다.

어쨋거나 흥미진진하지 않으신지? 무덤 속의 마차라...

 

 

그림 1. 2500년 전 파지릭 유적 5호에서 출토된 마차복원품

 

 

그림 2. 파지릭 유적의 무덤 배치도, 가장 남쪽에서 큰 점이 5호분의 위치이다. 

 

참고문헌

루덴코 1960,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의 알타이 남부 파지릭계곡에는 2500년 전 공동묘지가 있다. 그곳의 이름은 파지릭 유적인데, 2호분에는 남성과 여성 미라가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스키타이 문화를 이루는 한 장소로서, 알타이에 위치한 유적은 파지릭문화라는 지역명칭이 있다. 파지릭문화에서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를 소개한 바 있다. 시신을 미라 처리했다는 점에서 두 유적은 늘 비교된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은 살아생전에 샤먼이었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정한다.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은 스키타이 문화의 왕족이었다고 들 한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흔히들 거울은 샤먼의 물건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그 당시에는 샤먼과 왕족의 구분이 애매했 던 사회였는지도 모른다. 거울이 일상생활용품은 아니기에 위세품, prestige 라는 말로 설명이 되는지도 모르겠지만....

 

암튼 파지릭 유적 2호분에는 거울이 2점 출토된다. 청동제 거울(그림1)과 은제 거울(그림2,3)이다.

청동제 거울은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손잡이 달린 목제 틀에 네모난 청동판을 한쪽에 끼워넣은 것이다. 파지릭 2호분 청동제 거울은 원형의 청동제 거울에 한쪽에 손잡이를 붙인 것이다. 거울의 단면은 한쪽은 편평하고 한쪽은 볼록하다. 손잡이는 긴 가죽으로 싼 것이다(그림1-4). 청동거울은 표범모피로 된 주머니와 함께 확인되었다(그림1-5).

 

그림 1. 파지릭 2호분 출토 청동제 거울과 표범모피로 된 주머니

 

 

그림 2. 파지릭 2호분출토 은제 거울

 

 

그림 3. 파지릭 2호분 출토 은제 거울 , X선 촬영

 

은제 거울은 가죽주머니 안에서 화장품과 함께 확인되었기 때문에 여성용이다. 원형(직경 15cm)의 거울 아래에 사다리꼴 모양의 자루(길이 11.5cm)가 아래에 붙어 있다. 거울의 한면은 완전히 매끄럽고 반대쪽은 문양이 있다. 중앙에는 원뿔모양의 원형 꼭지가 있고 그 주변을 원형 테두리가 둘러 싸져 있다(그림 2,3). 그 테두리 주변에는 12개의 동심원 문양이 있고, 그 간격에는 수직 및 대각선으로 음각되어 있다(그림 2). 은제 거울 끝에는 이등변 삼각형 모양으로 자루가 붙어 있고, 이 자루는 뿔로 된 손잡이에 삽입되어 제작된 것이 X선 촬영 결과 알 수 있었다(그림 3). 손잡이의 단면은 팔각형이다.

은제 거울이 여성용이었기 때문에 청동제 거울은 남성의 것이라고 루덴코는 설명했다.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 출토된 목제+청동 거울은 나무틀의 뒷면에 사슴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담는 주머니는 펠트로 된 것이었다. 파지릭 2호분의 출토품은 청동제 거울은 손잡이 까지 청동으로 제작되었고, 표범모피로 된 가죽주머니 안에서 보관되었다. 은제 거울 역시 남아 있지는 않지만 표범모피주머니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거울도 동물과 관련을 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경우의 수가 너무 적지만.)

 

필자가 하나씩 설명할수록 놀라운 점은 문화의 성격이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방향성은 공통적이지만, 거기에 표현된 것은 각기 개성이 있다.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전제조건은 같은 시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유물이 출토된 시간성에 차이가 있다면 동시대의 것이 아니라면 다를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에 논할 근거가 없다. 그러나 동시대이고, 가까운 장소에서 같은 문화에서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는 점은 매우 다양하고 개성이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큰 테두리의 질서는 유지되지만 그 안에서의 개성은 존중되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53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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