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 만들어진 무덤이 있다. 파지릭 유적이다. 여러 기의 무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1호분의 무덤상황을 설명한다.
아시다시피 파지릭 1호분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이 도둑은 무덤 구조를 잘 알았다. 무덤관이 있는 남쪽벽은 그대로 두고 주로 무덤의 빈공간이며, 유물을 두는 북쪽벽을 잘라냈다. 무덤방이 이중이었는데, 바깥에는 통나무 하나만 잘라내고 내부에는 크게 구멍을 냈다(그림 1).
그런데 그 도굴은 무덤이 축조된 같은 해에 도굴된 것으로 생각된다. 말 위를 덮은 통나무에서 잔디가 매우 많이 나 있었다. 이 잔디는 목화풀종류로 습지에서 잘 자란다. 이 풀의 이삭상태로 보아서 9월에 무덤이 새로 열렸다는 것을 식물학자 페트로프(В.А. Петров)가 분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9월에 말을 죽였다는 점도 그대로 드러난다. 말의 발굽에 있는 형성된 각질이 없어진 상태였다. 왜냐하면 알타이에서는 주로 눈이 녹기 시작하는 4월이 되면 말을 직접 먹이지 않는다. 직접 풀을 뜯을 수 없을 때 대략 9월 쯤부터 먹이를 준다. 얼음이 얼기시작하기 전에 무덤은 만들어져야 하기에 그때가 9월이다. 대략 5개월간은 말은 방목상태가 되는데 그때가 말 굽의 각질이 없어지는 시점이다. 동물학자인 타라세비치(А.Ю. Тарасевич)가 분석한 결과이다.
파지릭 1호분은 9월 어느쯤에 만들어 졌을 것이다. 파지릭 계곡에는 9월 아침에는 서리가 끼고 밤에는 영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며칠이 지나면 무덤은 얼어 붙는다. 도굴은 늦가을 쯤에 행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도굴꾼이 무덤을 열자 아직 덜 얼어 붙은 상부의 흙과 돌이 천장에서 떨어져서 무덤방 안에 원뿔 모양의 더미가 만들어졌다. 그 뒤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무덤안은 눈으로 차게 되고, 그 해 겨울 매우 추웠다면 그대로 얼어붙었을 것이다.
그랴즈노프가 처음 발굴했을 때 매장실은 얼음으로 가득 채워졌었다. 통나무관은 이미 열려진 채였고, 뚜껑을 뒤집어 놓은 채였다. 관 안에는 옷에 붙어 있던 장식만 약간 남아 있었다. 어제 포스팅한 유물가운데서 가죽으로 자른 산염소의 머리조각인데, 금박으로 도금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굴꾼은 묻힌 사람을 통째로 꺼내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산염소의 머리모양 조각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파지릭 1호분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은 도굴꾼이 통째로 꺼내어 간 까닭에 없다.
다행히 말과 말에 착장된 안장, 굴레장식 등은 그대로 였다. 말은 피부, 근육, 내장 및 내장 안에 소화되지 않은 내용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말이 묻힌 공간은 11㎡가량 된다. 말의 시체와 말 안장 등이 두께 50cm에 아주 조밀하게 매장되었다.
이미 소개된 무덤구덩이의 바닥 그림(어제포스팅)에는 말이 매우 불규칙적이게 들어간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규칙적이었는데, 비트(В.О. Витт) 교수의 도움이 있었다.
말은 다리를 배 아래로 넣고 머리를 구부린 채로 정해진 순서대로 무덤에 넣었다. 동쪽에 4마리, 서쪽에 네 마리를 넣고 무덤의 서쪽 끝에는 두 마리 말을 머리가 북쪽을 향하도록 가로방향으로 놓았다. 처음에 말이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것으로 보였던 것은 위에 놓인 통나무와 흙과 돌의 무게로 인해서 눌려서 생긴 현상이다. 무덤방 바깥에 세워둔 기둥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있었고 말은 이동했다.
그랴즈노프는 도굴당해서 무덤 주인공에 대한 정보는 없어졌지만, 도굴로 인해서 눈이 무덤 안에 쌓이면서, 무덤은 얼어붙었고, 그 결과 무덤안에서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많은 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평가를 했다...위기는 기회이다..머 이런..
(도굴당해서 열 받지만, 또 발굴이 괜히 한 것이 아니라고 평가받기 위해서는...필요한 구절이 아니었을까 싶기도하다)
파지릭 1호의 책이 출간된 것은 1950년이고, 발굴은 1929년에 했으며, 분석은 그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1993년에 발굴된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도 매장된 말의 상태가 좋았는데, 말 위에서 나온 풀을 분석한 결과 말은 가을에 죽었다. 무덤이 가을에 축조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같은 결과이다.
파지릭 유적과 같은 대형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통나무 300개 이상을 끌어와야 하며, 구덩이 파기 등 대역사인 것이다. 유목민들은 흩어져서 살았기 때문에 모여서 대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들의 생계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여름 초지에서 겨울초지로 옮기는 기간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때가 가을이다. 이것은 필자가 생각하는 부분이다. 무덤이 겨울이 되기 전에 만들어져야 하는.
그럼 사람도 그때 죽었어야만 했을까?
미라로 만들어져서 여러 달 동안 수레 혹은 마차에 싣고 여러 부족을 돌았다고 전해진다. 눈과 얼음이 있는 기간에는 마차가 이동할 수 없음으로, 이런 장례식을 치르는 기간은 정해진다. 죽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파지릭 1호분에서 확인된 도굴 구멍-왼쪽 무덤방 천장, 오른쪽-2차(내부)무덤방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50,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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