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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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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시베리아황금유물컬렉션'에 해당되는 글 31

  1. 2021.09.26 스키타이 황금유물 제작방법
  2. 2021.09.25 흑해지역 스키타이 금제품 제작방법
  3. 2021.05.19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팔찌1
  4. 2021.05.18 18세기 러시아 제국의 시베리아 탐험,광물자원
  5. 2021.05.17 황금 유물속의 궁수들

 

흑해지역의 스키타이 문화의 황금유물 가운데는 금의 중량을 작게 사용한 유물들이 있는데, 문양이 남아 있다. 이는 얇은 금박지를 유기질제로 만들어진 원래 유물의 문양이 눌러지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방법은 흑해지역에서는 드물지만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리크 문화에서는 많이 발견된다. 목제굴레장식에 조각된 문양이 금박에 그대로 찍혀져서 문양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법으로 제작된 유물은 알타이, 흑해지역 뿐만 아니라 표트르 1세의 유물에서도 확인된다(그림 1). 일부 동물투쟁문양에서 발견된다. 이 유물의 뒷면은 기본틀을 만들고 그 위를 눌러서 만들서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1. 표트르 1세 황금유물컬렉션 동물투쟁문양

 

같은 동물투쟁문양 중에서는 뒷면을 무딘 송곳과 같은 도구(체이싱 기법)로 눌러서 앞면을 양각한 유물도 있다(그림2). 이러한 기법은 아무다리야 퇴장유물에서도 확인되는 방법이다.

 

 

그림 2 표트르 1세 황금유물컬렉션 가운데 동물투쟁문양

 

표트르 1세의 황금유물은 루덴코가 분석할 당시(1962)에 거푸집에서 주조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왜냐하면 유물 뒷면에 헝겊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들은 주물틀에서 쉽게 꺼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조방법 뿐만 아니라 바스마 기법(러시아말 그대로...바뀔 수 있음(그림 1)과 체이싱 기법(그림 2)이 있다는 사실은 뒤에 밝혀진 것이다.

 

점토로 만든 거푸집에 직물을 깐 흔적이 유물에 남아 있는데, 2 가지 종류였던 것으로 보인다(그림 3, 4). 밀랍으로 물건의 모형을 만들어서 점토거푸집을 만든 후 그 곳에 금속액체를 부어서 주조한 것(그림 4)와 두 방향에서 점토거푸집으로 눌러서 제작한 것이다(그림 3).

점토로 된 거푸집은 남아 있지 않은데, 유물을 만든 후 거푸집을 깨고 유물을 꺼내기 때문이고, 돌로 된 거푸집은 계속 사용하기 때문에 종종발견된다. 더 세밀한 표현은 점토 거푸집이 더 유리하다.

 

그림 3.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 컬렉션, 양면 점토 거푸집에서 제작된 유물

 

그림 4. 표트르 1세의 황금 유물 컬렉션, 밀랍 모형으로 만든 점토 거푸집에서 제작된 유물

 

그림 5 거푸집을 만들기 위해서 만든 밀랍 모형, 1-첫 번째 밀랍모형, 2- 두 번째 몸을 둥글게 말았음. 3-둥글게 감은 밀랍 모형의 뒷면을 파냄

 

그러나 거푸집을 이용해서 만든 유물이라고 해도 그림 3,4와 같이 모든 유물에 헝겊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다.

 

 

참고문헌

 

Р.С. Минасян. Металлообработка в древности и Средневековье.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4.//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4. (미냐샨. 고대부터 중세까지 금속제작방법)

Руденко С.И. 19621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지역에서 발견되는 스키타이 금제 장식은 시베리아(알티이의 파지리크 문화)에서 발견되는 유물보다 훨씬 많은 금을 사용해서 잘남아 있다. 많은 양의 금을 사용해서 동물의 근육을 잘 표현한 켈레르메스 유적의 사슴장식은 흑해지역 스키타이 황금유물을 잘 표현한 유물로 일컬어진다. 반면에 시베리아 알타이 파지리크 문화의 황금장식판은 금이 주요하지 않고 목제품을 아주 얇은 금박으로 싸서 마무리해서 금제품이 잘 남아 있지 않다. 물론 비교적 최근에 발굴된 아르잔-2호의 금제품은 이 편견을 깨는 것으로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흑해지역 금제품도 매우 얇은 금박지 정도의 금으로 제작된 것이 기원전 5세기 이후에 발견된다. 가이모노바 유적에서 출토된 말의 볼 가리개 장식(그림 1-2)과 비슷한 형태가 볼샤야 침발카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볼사야 침발카 유적(그림 1-1)은 돌고래 형상이지만 비늘이 새의 깃털과 비슷하게 표현되어서 변형된 돌고래 모양이다. 이 유물과 가이모노바 유적의 유물은 비슷한 형상을 표현하고 있지만 다르게 제작된 것이다. 침발카 유적의 유물은 금판으로 제작되었고 가이모노보바 유적의 유물은 원판은 유기질제(나무, 뼈로 추정)이고 그 위를 금박(10.37g, 9.62g)으로 눌러서 제작한 것이다. 무게를 비교하지 않더라도 침발카 유적의 돌고래 표현은 매우 뚜렷한데 그 이유는 볼록하게 융기된 부분과 들어간 음각 부분이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인데, 주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돌고래의 눈의 음각 부분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림 1. 볼사야 침발카 유적과 가이모노바 유적의 말 볼 가리개

 

 

비슷한 방법으로 제작된 유물은 사흐노프스키 머리장식과 체르토믈리크 장식판이다. 사흐노프스키 머리장식은 매우 얇은 금박을 사용해서 둥글게 말 면서 주름이 생겼다(표시된 부분). 그래서 여성의 머리(그림 2-2)와 남성의 머리 부분(그림 2-1)은 체르토믈리크 장식판과 달리 경계선의 표현이 뚜렷하지 않다.

그림 2. 사흐노프스키 머리장식과 체르토믈리크 장식판

 

반면에 금판을 이용한 유물(그림 1-1, 그림 2-1,2)은 금 표면을 따라 무딘 날이 있는 송곳을 이용해서 부드럽게 두드려서 금속을 깍아내는 방법인 체이싱 기법(아래포스팅참고)을 사용해서 문양의 표현이 매우 뚜렷하다.

흑해지역에서 기원전 4세기경에 목제 조각품을 금박으로 싸는 알타이 제작방법을 이용했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알타이에서 발견되는 흑해지역 및 페르시아 제품으로 생각되는 유물들이 일방적이지 않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20.12.10 -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 스키타이 핸드메이드 제작기술: 두드리고, 깍고, 잘라내기

 

스키타이 핸드메이드 제작기술: 두드리고, 깍고, 잘라내기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물 가운데 스키타이 스타일과 제작기술로 만들어진 유물은 8점으로 파악된다. 광학현미경과 주사전사 현미경을 사용해서 분석한 결과이다(Scythians 2017). www.google.com/maps/d/edi

eastsearoad.tistory.com

 

 

 

참고문헌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12~319p.

Р.С. Минасян. Металлообработка в древности и Средневековье.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4.//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4. (미냐샨. 고대부터 중세까지 금속제작방법)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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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수집품 중 황금으로 된 여성상은 나신임에도 불구하고 팔찌를 착용한 것이 눈에 띄는 특징 중에 하나이다. 팔찌는 유라시아 초원 유목민의 특징적인 유물 중에 하나이다(사르아디니 1983).

표트르 1세의 켈렉션 중에는 목걸이 뿐만 아니라 팔찌도 여러 점 포함되어 있다. 장소가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진 유물 2점은 1909년에 시르다니아 강 유역의 ‘두즈락’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림 1. 1-시르다니야 강 유역의 두즈락에서 발견된 팔찌, 2-1716년 가가린 수집품(루덴코 1962)

 

그림 2. 시르다니야 강 유역의 두즈락에서 발견된 팔찌 2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이는 러시아 최초의 고고학연구기관인 ‘제국고고학위원회’의 활동으로 모은 유물도 있다. 이 기관은 1859년에 공식적으로 창립되었고 1909년에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시르다니야 강 유역의 ‘두즈락’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얻은 금제 팔찌 2점을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보냈다. 표트르 1세의 수집품으로 일컬어지는 유물 가운데1716년이 가가린이 모은 수집품, 1734~1735년 밀러가 발굴한 유물 보다 가장 늦게 입수된 유물 중에 하나이다.

 

이 유물에 대한 정보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물질문화연구소의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시르다리아 지역을 관할하던 주지사가 보낸 편지(1907년 7월 31일)에 금팔찌와 금으로 된 뱀을 보냈다고 기록되었다. 당시에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제국고고학위원회에서는 이 두 유물을 금의 양을 기준으로 150루블을 책정했다. 표트르 1세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났으나 당시에 표트르 1세의 수집품을 연구하던 제국고고학 위원회장(스트로가노프 С.Г. Строганов)의 주도로 유물은 표트르 1세의 수집품과 함께 등록되어서 전시되었다.

 

 

두즈락에서 발견된 팔찌 2점은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그림 1-1의 ‘팔찌’는 늑대의 머리와 그리핀의 머리가 표현된 것이다. 하지만 이 유물은 팔찌로 보기에는 너무 작지만 팔찌라고 추정하는 이유를 그림 1-2의 유물에서 찾는다. 그림 1-2의 팔찌는 16번 감긴 코일 모양의 팔찌의 가장 끝장식이다(그림 3). 그림 3은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유물로, 16번 감긴 코일에 연결되어 발견되었지만, 보관중에 분리되어 루덴코(1962)(그림 1-2)가 보고한 것이다.

 

그림 3.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 1세의 수집품(그림 1-2와 동일 유물, 동물장식 끝에 땜질한 흔적이 있다)

 

두즈락에서 발견된 또 다른 팔찌는 양쪽으로 개페가 가능한 것인데, 경첩으로 연결된 것이다. 기본적으로 호랑이가 장식된 개폐가 가능한 목걸이와 같은 방법으로 제작된 것인데, 연구자에 따라서 기원전 4세기, 기원전 2세기 등 연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미냐예프는 자바이칼 지역(바이칼의 우측)에서 출토되는 흉노 유물(기원전 3세기 이후)과 비교했고, 아르타모노프는 기원전 4세기의 팔찌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시르다니야 강과 아무다리야 강 유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물과 비교하는 것은 빼 놓을 수 없는 논쟁 중에 하나이다.

늑대와 그리핀의 조합은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서 벨트 장식(그림 4)에서 발견되는 주제이지만, 그 표현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벨트장식과의 관련성은 약한 것으로 이 유물의 연대를 기원전 일천년기 후반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연구(자비투히나 2001)도 있다. 중앙아시아에는 여러 곳에서 비철금속이 채굴되었으며 제작장소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4.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 1세의 수집품(호랑이와 싸우는 늑대+그리핀)

 

참고문헌

 

М.П. Завитухина Золотые браслеты из местности Дуздак (Туздак) в Средней Азии и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Евразия сквозь века. СПб: 2001. С. 200-203.(자비투히나 200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켈렉션과 중앙아시아 두즈락에서 발견된 황금팔찌)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М.И. Артамонов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1973 // М.: «Искусство». 1973. 280 с (아르타모노프 1973, 사카족의 부)

М.П. Завитухина Собрание М.П. Гагарина 1716 г. в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 АСГЭ. Вып. 18. Л.: 1977. С. 41-51 (자비투히나 1977,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Сарианиди В.И. : Афганистан: сокровища безымянных царей. М.: ГРВЛ. 1983. (사리아디니 1983, 아프카니스탄 이름없는 차르의 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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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된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은 여러 경로로 입수된 유물을 한 번에 부른 명칭이다. 표트르 1세가 사실상 시베리아를 러시아제국의 영토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이 모은 황금 유물도 있지만, 좀 더 학문적인 경로?로 모은 유물도 있는데 1734~1744년 동안 제2의 캄챠트카 대탐험 프로젝트 중에 밀러가 크라스노야르스크 지역의 유물(그림 3~5)을 모은 것도 포함된다.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콜렉션, 밀러의 발굴품

 

그림 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콜렉션, 밀러의 발굴품 2

 

제2의 캄챠트카 대탐험은 표트르 1세 이후 예카테리나 1세와 엘리자베타 여왕 기에 있었던 짧게 이야기 하면 시베리아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보낸 대 탐험대이다. 총 책임자는 베링이었고, 우랄에서 태평양 연안, 추코트카 반도까지 북극해안을 포함한 모든 시베리아를 조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 시기에는 현재 러시아의 극동도 시베리아 지역에 포함되었다.

주축은 러시아과학아카데미였고 밀러는 역사 전문가로 참가하게 된다. 이 탐험대에는 500명이 넘는 과학자, 측량사, 노동자, 군인, 선원 등이 포함되었다. 주로 천연자원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원래 사는 주민의 경제와 역사, 지리 등을 연구하기 위해서 관련된 연구자 들이 대거 파견된 것이다. 북극해를 연구하기 위해서 쇄빙선 함대가 투입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밀러는 1735년 겨울에 크라스노야르스크를 방문해서 고대 무덤에서 구리로 된 유물을 대량으로 발견했다는 보고서를 남겼고, 그 지역에 구리광석이 산포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그 지역은 사얀(미누신스크 분지 부근)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 유물들은 주로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분포하던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타가르 문화의 산염소와 사슴모양 입상이며(그림 3,4), 타가르 문화의 이른 시기인 기원전 7세기 경의 유물이다. 이 뿐만 아니라 철제품도 있었는데, 등자와 재갈멈치(그림 5)이다. 출토된 곳은 미누신스크 분지인데, 등자를 사용하던 시기는 예니세이 키르키스 문화라고 불리는 기원후 9세기 경(자비투히나 1977)으로 보았다.

그러나 최근 연구된 유적에서는 알타이에서 등자가 발견되는 시점은 기원후 5세기 중반이다(세레긴). 자비투히나는 1940년대 연구를 근거(에프투호바 1948)로 예니세이 강(미누신스크 분지) 유역에서 발견된 밀러 의 등자를 기원후 9세기로 보았다.

 

그림 3. 밀러의 발굴품

 

그림 4. 밀러의 발굴품

 

그림 5. 밀러의 발굴품

 

그런데 밀러가 조사한 시베리아의 역사는 1937년에 간행되어 그의 시베리아 탐험에 관한 내용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조사한 유물로 소개된 책(밀러 1937)에는 말탄 궁수와 목을 돌리고 있는 사슴 및 귀걸 등이 소개되어 있는데, 오비강과 이르티시 강 사이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로 기록되었다(그림 5). 밀러는 크라스노야스크 지역 외에 오비강과 이르티시 강 주변의 무덤에서도 조사한 것이다.

아마도 표트르 1세에게 유물을 보낸 시베리아 총독 가가린과 거의 비슷한 지점에서 유적을 조사 했다.

흥미로운 것은 밀러, 가가린 등은 자신이 발견 혹은 취득한 유물을 모두 무게를 달아서 기입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당시에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보기에는 시베리아를 보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었을까?

 

그림 6. 밀러가 조사한 이르티시~오비강 유역의 무덤에서 나온 유물

 

참고문헌

Г.Ф. Миллер История Сибири. Том I. // М.-Л.: 1937. 608 с.(밀러 1937, 시베리아 역사1권)

Серегин Н.Н. Матренин С.С. 2016 Погребальный обряд кочевников Алтая во II в. до н.э. – XI в. н.э.(세레긴, 마트레닌 2016, 기원전 2~기원후 11세기 알타이 유목민의 무덤)

Элерт А. Х. 2008, По следам академического отряда Великой Северной экспедиции , том 18, №6//(에레르트 2008, 위대한 북방 탐험대의 학문적 분리를 위한 발자취)

Завитухина М.П. 1978 : Коллекция Г.Ф. Миллера из Сибири — одно из древнейших археологических собраний России. // СГЭ. [ Вып. ] XLIII. Л.: 1978. C. 37-40(자비투히나 1978, 러시아 고고학자료가운데 가장 오래된 밀러의 시베리아 수집품)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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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에서 발견된 남성상은 공통점이 있는데 한 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말을 탄 상태에서 활을 쏘고 있다는 점이다. 나무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벨트 장식 속의 남성만 말을 타고 있지 않다(그림 1).

 

그림 1.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1716년 가가린 수집

 

1859년 밀러의 발굴품으로 알려진 말탄 전사(그림 2)도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으로 등록된 유물이다. 그 외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벨트 장식에 여러 명의 남성이 나오는데 모두 멧돼지를 사냥하는 장면으로 말 위에서 활을 쏘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그림 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밀러의 발굴품

 

그림 3.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1716년 가가린 수집

 

그림 4.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1716년 가가린 수집

 

그림 5. a,b-그림 3, c,d-4의 말탄 활을 쏘는 전사

 

남성들은 1명을 제외하고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으며, 장발의 남성이다. 휴식을 하고 있는 남성이든, 멧돼지를 사냥하는 남성이든지 남성은 장발이고 코에 수염을 달고 있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컬렉션을 연구한 자비투히나는 이 남성들의 얼굴이 유럽인도 아니고 완전한 몽골로이드도 아닌 혼합된 얼굴로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벨트를 만든 장인은 확실히 몽골로이드와 유럽인종을 구분해서 만들었다. 이것은 나무아래 쉬고 있는 3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는데, 이 여성은 둥근얼굴과 상대적으로 적은 찢어진 눈 덕분에 동양인의 모습을 표현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여성이 쓰고 있는 모자는 파지리크 유적 2호분에서 그대로 확인되었고, 2호분의 여성미라는 몽골로이드, 남성미라는 유로포이드로 이미 밝혀진 바 있다(루덴코 1953).

 

자히투히나는 사냥하는 장면이 그려진 벨트의 연대를 기원전 5~4세기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이 남성들의 얼굴모습이 파지리크 유적 5호분에서 발견된 벽걸이 캐노피에서 본 남성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캐노피 속의 남성(그림 6-?)은 상대적으로 높은 코, 수염 등은 분명히 동양인의 얼굴모습은 아니지만 그가 착용하고 있는 무기 특히 고리트(화살통)과 말의 마구 등은 스키타이 문화의 것이었다. 이는 표트르 1세의 수집품 가운데 벨트장식의 남성들도 마찬가지로 고리트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캐노피의 남성(그림 6-2)과 일맥상통한다.

 

그림 6. 파지리크 유적 5호분의 캐노피

 

파지리크 유적에서 남성은 매우 화려한 모자를 썼었다. 표트르 1세의 수집품이든지, 캐노피의 남성이든지 동양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남성(혼혈 혹은 유럽피언)은 1명을 제외하고는(그림 4-b,그림 3) 모자를 쓰지 않았다. 표트르 1세의 수집품으로 알려진 방형의 통에 그려진 전사 5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1716년 가가린의 수집품 가운데 황금나무(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인터넷사이트)

 

참고문헌

Завитухина М.П. 1978 : Коллекция Г.Ф. Миллера из Сибири — одно из древнейших археологических собраний России. // СГЭ. [ Вып. ] XLIII. Л.: 1978. C. 37-40(자비투히나 1978, 러시아 고고학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밀러의 시베리아 발굴품)

М.П. Завитухина Собрание М.П. Гагарина 1716 г. в Сибирской коллекции Петра I. // АСГЭ. Вып. 18. Л.: 1977. С. 41-51 (자비투히나 1977, 1716년 가가린이 수집한 표트르1세의 시베리아 수집품)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https://www.hermitagemuseum.org/

 

Hermitage

 

www.hermitage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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