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가장 이른 무덤인 아르잔-1호는 시베리아 투바 지역에 위치한다. 아르잔-1호에 대해서 소개한 지 오래되기는 했지만, 통나무 6000개 이상을 소비한 무덤에 대한 강열한 인상은 남아 있을 것이다.
나무를 이용한 무덤방의 전통은 투바에서 아르잔-1호와 아르잔-2호로 이어지고, 알타이의 무덤에서도 발견된다. 희한하게도 기원전 5세기 투바에서는 무덤이 발견되지만 나무방의 전통은 알려지지 않았다. 대신에 알타이의 해발 1500m이상 유적들에서 확인되었다.
아르잔-2호는 하나의 봉분 아래에 여러 개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인데, 그 중에서 5호묘에 나무방을 2겹으로 만든 것이 발견되었다. 땅을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을 넣도록 되어 있다. 구덩이의 크기는 나무로 된 무덤방 보다 살짝 크기 때문에 나무무덤방은 미리 재단을 해서 구덩이에 넣어야 했다. 나무가 겹쳐지는 끝에는 오목하게 홈을 파서 결구가 되도록 했다. 그런데 미리 재단을 하는 아르잔-2호의 무덤방 만드는 방법은 이른 시기의 아르잔-1호의 중심무덤방에서도 보이는 것이었다. 이 부분도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 2호와 5호에서도 미리 재단을 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알타이의 무덤에서는 무덤방 위에 자작나무 껍질을 넓게 잘라서 펴둔 것이 발견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는 가을과 겨울에 벗기지 못하고 봄 혹은 여름에 버낄 수 있는 것이다. 또 파지리크 유적, 바샤다르 유적 등에서는 무덤방을 덮었던 이끼 더미 속에서 노란색 꽃의 존재를 발견했다. 이들은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여름부터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덤방을 덮었던 자작나무 껍데기는 20세기 후반까지도 지역 유목민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유르트’라고 불리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집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세계관을 설명하는 유물로 간두령뿐만 아니라 동물문양이 장식된 검도 포함된다(페레보드치코바, 라에프스키 1981). 수직적 구조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유물이다. 그런데 스키타이 문화에서 검은 어느 지역에서나 출토되지만 간두령은 알타이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기원전 7세기 흑해지역에서 발견되는 유물이다.
멜레틴스키(1976)에 의하면 스키타이 사람들의 세계관은 수직 뿐만 아니라 수평적인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가장 널리 유행한 원형의 맹수장식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 동물장식은 머리와 꼬리가 둥글게 연결되었고 접은 다리 사이를 뚫어서 표현했다. 멜레틴스키는 이러한 표현방법이 어떤 것의 중앙을 감싸고 있는데, 동물의 몸통자체는 가장자리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가장자리는 하계를 의미하는 것이다(멜레틴스키 1976).
스키타이 문화의 동물문양장식중에 가장 이른 유물이 원형의 맹수장식이고,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그림 1)에서 시작되었다. 이 유물은 흑해지역 뿐만 아니라 카자흐스탄, 미누신스크 분지, 중국 오르도스에서도 발견되고 청동, 금 등 다양한 소재로 다양한 크기,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진다. 사실 표범 혹은 호랑이와 비슷한 것은 시베리아와 그 인접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이고 흑해 지역의 것은 주둥이가 튀어나와서 늑대와 가깝다고 여겨진다.
대부분 장신구이겠지만 그 용도는 약간씩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아르잔-1호의 원형 맹수는 단순히 말의 가슴장식으로 생각했지만, 스미르노프는 전차를 몰던 말의 장신구로 생각했던 것처럼, 각 지역의 원형맹수장식은 각기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다양한 동물의 種, 금속, 크기) ‘맹수’를 ‘원형’으로 만든 이유를 스키타이 문화연구자들은 유물에 내포된 ‘의미’때문이라고 로 본 것이다. 이것이 스키타이 인들의 세계관 중에 수평적 사고와 관련될 것이다. 또한 기호와 같은 역할이었을 것이라는 페레보드치코바(1994)의 생각에 필자도 동의한다. 스키타이인들은 매우 실용적이었기 때문이다.
스키타이 인들이 실용적이었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이 동물장식이 그냥 장식으로만 단독으로 존재한 것이 드물기 떄문이다. 어딘가의 부속품이었다. 가장 쉬운 예가 재갈멈치에 부착되는 동물장식이다.
드네프르 강 하류의 기원전 7세기 유적인 스타르샤야 마길라 유적에서 발견된 재갈멈치는 골제로 제작된 막대기 형태로 끝에만 동물문양이 부착되었다(그림2). 그러나 기원전 5세기 경에는 재갈멈치가 S자 형으로 변화되면서 동물의 몸통이 뒤틀리게 표현되었다(그림3).
그림 2. 스타르샤야 유적의 재갈멈치, 뼈제품(12제외)
그림3. 악슈틴츠 유적 1호의 재갈과 재갈멈치(2), 철제품
비슷한 현상은 알타이에서도 확인된다. 파지리크 유적에서는 대부분 재갈멈치의 양쪽 끝에 동물문양장식이 부착된다. 이때 동물은 전신이 부착되지 않고 머리 등의 부분이 달려 있다. 그런데 파지리크 1호에서 출토된 3번, 4번, 6번 말의 굴레장식에는 사슴, 산양 등 동물의 전신이 부착되었다. 이때 동물은 앞다리를 접고 뒷다리는 뒤로 펴서 ‘하늘을 나는 자세’처럼 보이도록 디자인되었다. 이는 스키타이 초식동물의 일반적인 자세와는 다르게 변형된 것이다. 동물문양장식이 재갈멈치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즉 매우 장식적인처럼 보이지만 실용적이라는 스키타이 동물장식의 특징은 알타이에서도 통용된다고 볼 수 있다.
미누신스크 분지의 타가르 문화에서 몸을 말고 있는 맹수장식은 기원전 6세기에 나타난다.아시다시피 원형의 맹수장식은 투바의 아르잔-1호 출토품이 최초의 것이다.
그랴즈노프는 이 유물이 말의 가슴을 했던 장식판으로 보았다(그림 1-67).
그런데 이 유물의 용도를 달리 생각하는 연구(스미로노프 2012)를 찾았다.
아르잔-1호 원형맹수장식(그림 2-9)의 뒷면에는 꼭지가 2개 달려 있는데, 구멍의 방향은 위 아래로 통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림 1-67)의 말 가슴장식처럼 사용하기 위해서는 꼭지의 방향이 옆으로 향하게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원형맹수장식의 꼭지대로 끈을 끼우면 그림 1-67처럼 착장할 수 없고, 마구가 완전히 흩틀어지게 된다. 가슴장식일 수 없다.
그림1. 아르잔-1호의 출토품(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92)
그래서 스미로노프(2012)는 골제 멍에(그림 2-8)가 이 유적에서 출토되는 것을 보고 아르잔-1호의 주인공은 전차를 타고 다닌 것으로 생각했다. 같은 무덤방(2호)에서 출토된 원형 맹수장식도 전차를 끌던 말의 장신구인데, 가슴이 아닌 말의 옆에 달았던 것으로 생각했다. 꼭지의 방향대로 끈을 끼우면 끈의 방향은 위아래로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시리아 궁전벽화에서전차를 끄는 말을 장식했던 원형장식이 있다는 사실도 주목했다.
멍에(그림 2-8)는 말의 어깨에 씌워서 뒤의 운반대를 끌게 하는 부분으로 전차부속품 가운데 바퀴만큼 중요한 유물로 생각하는 것이다.
스미로노프는 알타이 유적에는 안장과 안장을 조이는 벨트가 없다는 사실을 밝힌 슐가(2008)의 연구를 참고로 했다. 거의 비슷한 마구세트 구성인 아르잔-1호에서도 마찬가지로 안장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림 2. 아르잔-1호의 전차 관련 유물(1~9)과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나시르팔 II세(10, 10a)의 궁전벽 및 사르곤 II세의 궁전벽(11, 11a) (스미르노프 2012)
사실 원형의 맹수장식은 끈을 위아래로 끼우도록 고안되었기 때문에 말의 가슴장식이 아닐 수는 있지만 반드시 앗시리아궁전벽화처럼 사용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멍에는 이 유적의 주인공이 전차를 소유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유물 중에 하나이다.
그럼 타가르 문화의 원형의 맹수장식이 모두 전차를 몰던 말을 장식한 것일까?
아니다. 아르잔-1호의 유물은 직경 25cm으로 알려진 고리모양 맹수장식 가운데 가장 크다. 하지만 타가르 문화의 원형 맹수장식은 10cm미만이다.
사실 앞에서 타가르 문화의 맹수장식이 맹수로서 불분명하다고 했지만 그럴 수 밖에 없던 이유는 매우 작기 때문이다.
또한 어제 몸을 말고 있는 형태 때문에 고양이과 맹수장식이라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동물장식의 주둥이가 너무 길다.
1점이 아니라 대부분 그런 스타일이어서 디자인의 의도는 주둥이를 길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늑대와 가깝다.
소형 원형의 맹수장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참고문헌
Степная полоса Азиат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М.: 1992. 49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92, 스키타이-사르마트 시대의 소비에트 연방 내의 아시아 초원지역, 소비에크 고고학 시리즈 1992)
СМИРНОВ Н. Ю. На чем ездил аржанский «царь»? // Культуры степной Евразии и их взаимодействиес древними цивилизациями. Материалы международной научной конференции, посвящённой 110-летию со дня рождения выдающегося российского археолога М. П. Грязнова. – СПб., 2012. – Т. 2. – С. 424-431(스미르노프, 2012, 아르잔의 차르는 무엇을 타고 다녔나?)
ШУЛЬГА П. И. Снаряжение верховой лошади и воинские пояса на Алтае. – Ч I. Раннескифское время. –Барнаул, 2008. – 276 с.(슐가 2008, 알타이의 군사용과 승마용말의 마구연구)
3000여 년 전에 시베리아의 투바의 우육고원에는 직경 120m, 높이 3~4m의 대형 무덤이 만들어졌고, 1971년부터 발굴되어서 아르잔-1호로 명명되었다. 이 무덤을 발굴한 그랴즈노프는 이미 1920년대에 파지릭 유적의 1호분 뿐만 아니라 알타이의 무덤을 많이 발굴했지만, ‘그’가 남긴 책의 제목으로 ‘차르(цар)’라고 붙인 경우는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1984년 사망).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가운데 가장 이르면서 가장 컸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파지릭 유적은 1929년에 1호분을 발굴하고 그 뒤에 1947~1948년에 다시 조사해서 책은 1950년에 나왔지만, 1980년에 나온 아르잔 1호 보다는 훨씬 상세하고 책의 내용과 인쇄상태도 훨씬 좋다. 그 사이에 소련의 정치 경제가 많이 변화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국가의 정치경제안정은 학문성과로 바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아르잔 1호는 그 중요성에 비해서 전해지는 정보가 적어서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물론 주인공 남녀의 중심무덤방이 도굴이 심하고 빈 방이 많다고 해도, 말 170여 마리에 대한 정보 혹은 말이 확인된 무덤의 사진이나 그림은 남길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인간과 말이 함께 부장된 가장 중심 무덤방, 13번 무덤방, 31번 무덤방을 제외하고 말만 부장된 무덤을 어제 표로 소개한 바 있다. 말만 부장된 무덤방의 말도 재갈과 재갈멈치 등 마구를 착장한 상태였다. 굴레에는 멧돼지송곳니를 달아서 장식하는 점은 인간과 함께 묻힌 말과 같다.
그런데 34a 무덤방에서는 특이한 청동제 재갈멈치가 확인되는데, 3개의 구멍 끝에 뾰족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그림 1-1). 책에 적힌 내용에는 다른 무덤방에서는 출토되지 않았다 한다. 앞서 계속 포스팅한 재갈멈치와는 차이가 있다. 별꺼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확실히 의도적으로 다르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냥 3공 재갈멈치와는 다른 거푸집(청동을 부어서 틀을 만드는 곳)을 썼을 텐데, 거푸집 만드는 단계부터 미리 계획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무덤방에서 출토되지 않았다는 말은 크게 신뢰가 가지 않는다. 이 무덤에는 너무 경의 수가 많다.
그림 1-5,6도 앞서 본 3공 재갈멈치와 다르지만, 이 유물은 소재가 청동이 아닌 뼈로 제작된 유물이다.
그림 1. 아르잔-1호 출토 재갈멈치(1, 2-34a번 무덤방 출토, 3-5: 37번 무덤방, 6-5번 무덤방 출토)(5,6-뼈, 그 외 청동)
이 무덤방이 위치한 봉분 위에서 그림 2-2의 사슴돌이 발견되었다.
사슴돌은 주로 사슴이 많이 그려져셔 사슴돌이라고 불리지만, 사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슴돌에는 무기가 많이 그려져 있는데, 무기의 형태를 보고 사슴돌의 연대를 정한다. 이 사슴돌에는 앞서 소개한 바 있는 청동거울에 그려진 등에 혹 달린 사슴 3마리와 멧돼지 6마리가 남아있다(가장 왼편의 사슴 옆에 엉덩이와 입만 남은 사슴이 있다). 사슴과 멧돼지 위 쪽에는 검과 알 수 없는 막대기가 달려 있다.
이 유적에서는 멧돼지송곳니로 굴레에 달아서 장식을 했다.
멧돼지는 스키타이 문화중에서 기원전 5세기에 알타이 지역에 존재했던 파지릭 문화의 유적에서는 몇 점(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말의 가슴에 달았던 1점)출토되지 않았지만, 아르잔 1유적에서는 아주 많은 양의 멧돼지 송곳니로 만든 굴레 장신구가 출토된다. 멧돼지 모양의 장신구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림 2. 아르잔 및 그 주변에서 발견된 사슴돌.1-소스노프카 발견(아르잔과 가까운 곳)2- 아르잔1의 봉분 출토(사각형 돌을 펴서 그린 그림), 3, 10-오르삭-악시 출토, 4-투란(아르잔 무덤에서 우측에 위치한 마을이름) 발견 사슴돌, 5,6,8-아르잔과 가까운 벨로예 호수 출토, 7-우육고원 발견, 9-사말가타이, 11-볼쇼이 아직, 12-친가타그, 13-우육-아르잔 출토
아르잔-1호의 정보부족에 대한 아쉬움을 그나마 충족해 줄 유적이 아르잔-2호이다. 아르잔-2호는 연대는 1호에 비해서 늦지만, 황금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어서 세간의 관심을 많이 받은 유적이다. 멧돼지 모양의 황금 장신구도 포함된다.
그림 3. 아르잔-2호의 멧돼지, 고리트(활통)에 붙인 장신구
아르잔-1호에서 출토된 동물문양장식은 직접적인 유물은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호랑이와 지지대 위에 올라간 청동 산양이지만 간접적으로는 수 많은 멧돼지 장식과 사슴돌의 사슴도 포함시킬 수 있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투바의 아르잔-2, 스키타이 차르 무덤)
시베리아 투바공화국 아르잔 마을에는 30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직경 120m, 높이 3~4m의 무덤이 있었고, 1971년부터 1974년까지 러시아 학자인 그랴즈노프가 발굴했다.
아르잔-1호이다.
직경 120m 내부에는 6000여개의 통나무로 쌓아 올린 무덤방 70여개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가장 중심부에는 2중의 무덤방을 만들었다. 중심부의 가장 안쪽 무덤방에는 주인공 남녀과 이 무덤방을 벗어나서 북, 서, 남쪽에는 8개의 사람이 함께 매장되었고, 동쪽에는 말이 6마리가 확인되었다. 아쉽게도 무덤은 이미 도굴되었고 주인공 남녀는 사지골만 4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 중심 무덤방의 북쪽에 9호 무덤방이 있는데, 통나무관만 들어갈 공간이고, 중심무덤방과 바로 인접하고 있어서 중심무덤방의 주인공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이 무덤에서 중심무덤방을 제외하고는 13번과 31번 무덤방에서 사람이 묻혔는데, 관이 2개이고 말이 함께 매장된 것으로 보아서 9번 무덤방은 이 무덤의 주인공을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중심무덤방에 딸린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옳다.
중심무덤방을 기준으로 해서 동서남북으로 방사상으로 나무를 연결하고 확장해서 지름 80m까지 무덤방을 축조했다. 길다란 막대로 둥근 원형의 무덤형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무덤방의 모양은 제각각이며, 각 방의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인간과 말이 들어간 무덤을 제외하고는 말만 들어간 무덤방은 13개이다. 아래의 표는 알 수 있는 말만 들어간 무덤방이다. 참고문헌에는 170여 마리 분이 출토되었다고 하지만, 중심무덤방 6마리, 13번 무덤방 7마리, 31번 무덤방 10마리를 더 해도 총합은 맞지 않다. 늙은 말만 골라서 넣었다.
아르잔-1호에서 말 만 들어간 무덤방
말의 매장 수
2번 무덤방
90마리
2~3번 무덤방 사이
3마리
3번 무덤방
3마리
5번 무덤방
15마리
10번 무덤방
2마리
17번 무덤방
8마리
20번 무덤방
18마리
25-b 무덤방
?
26a, 26b무덤방
11마리
34a무덤방
5마리
37번 무덤방
13마리
68번 무덤방
2마리
70여개의 무덤방 중에서 빈 방은 53개나 된다. 후대의 고고학자들이 무덤크기를 보고 왕의 무덤이라고 명명은 했지만, 무덤구조는 경상도 사투리로 그냥 ‘퍼석’하다.
이런 표현을 하는 이유는 6000여 개의 통나무로 견고하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앞서 말한 바 있듯이 마치 ‘성냥쌓기’하듯이 가로 세로 통나무를 3~4단씩 교차해서 올렸다.
계속 포스팅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후대의 파지릭 유적이나 아크 알라하 유적에서 통나무로 만든 무덤방은 모서리 부분에 홈을 내어서 결구시키는 방법으로 제작되었다. 그래서 빈틈없이 무덤방을 만들 수 있었다.
아직 그 방법을 모르는게 아닌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무덤 가장 중심부의 주인공 남녀가 묻힌 중심 무덤방의 가장 안쪽 무덤방(2차 무덤방)은 단면도(그림 1)에서 볼 수 있듯이 무덤방의 벽이 빈틈 없이 만들어졌다. 가로세로를 교차해서 쌓는 방법이 아니라 방의 모서리에 홈을 내어서 결구시켜서 만들었다.
그림1. 아르잔-1호의 중심 무덤방
그들은 이러한 기술이 있었지만 무덤을 크게 만드는데 가장 중점을 둔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포스팅 한 바 있듯이 아무것도 없는 방, 아귀가 맞지 않아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 무덤의 가장 북쪽 등으로 보아서 가장 크게 만드는 것에 ‘꽂힌’것이다. 그래서 무덤도 구덩이를 파지 않고, 땅 위에 축조했지 않았을까?
무덤을 땅 위로 올리는 것은 아르잔-1호 이전인 청동기시대에도 없었고, 아르잔-2호는 약간 애매하지만 주인공의 무덤방은 다시 무덤 구덩이를 팠다.
아르잔-1호와 같은 무덤구조가 몇 개나 더 있을지 모르겠지만, 궁금하기 그지 없다. 돌연변이처럼 나타난 무덤인지, 그 시절 유행했었는지. 아직 예가 하나 뿐이니 뭐라고 규정할 수 없다. 러시아 사람들이 귀찮아서 그냥 가만 두기만을 기대해 본다.
물론 거대한 무덤이 동시대에는 여러 개 있었을 경우가 적지만, 만약 이러한 매장법이 중요한 아이덴티티 였다면 무덤을 땅위로 축조하는 점, 방사상의 무덤구조 등은 후대에도 오랫동안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