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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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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 여 년 전에 시베리아 투바에는 직경 120m의 무덤이 축조되었다. 그 안에는 6000여개의 통나무를 사용해서 중심 무덤방이 있고 이를 기준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방을 70여개 만든 구조이다. 무덤의 가장자리는 판석으로 쌓아 올렸고, 무덤방을 돌로 덮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유적의 이름은 아르잔이라고 불리고, 해발 1050m의 우육고원에 위치한다. 1970년대 발굴되었고, 1980년에 이에 대한 아주 간략한 단행본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이 유적의 학술적 가치에 비해서 매우 빈약한 단행본이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몸을 말고 있는 원형의 맹수(호랑이 혹은 표험)장식물은 스키타이 동물문양 중에서 가장 이른 유물로,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을 시베리아로 생각을 바꾸게 한 기념비적인 유적인데 말이다.

 

이 유적을 발굴한 30 여년이 지나서 2000~2004년에 아르잔-2호가 발굴되었다. 아르잔-2호는 아르잔-1호에 비해서 작은 크기(직경 80m)지만,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었다. 남쪽의 호석 일부가 없어진 것 빼고는 무덤방의 주인공에 대한 정보 및 거의 모든 무덤이 파손되지 않았다.

 

어제 필자가 사진을 보여드리면서, 무덤의 상부가 앞에서 본 알타이의 다른 유적 무덤 상부에 비해서 울퉁불퉁한데 그 이유(그림 1, 2)는 오늘 알 수 있다.

 

원형의 무덤은 대체로 케잌 자르듯이 무덤을 동서(그림 1의 FS라인), 남북방향(그림 1의 KB라인)으로 가로지르는 단면을 잘라서 확인한다. 그리고 주변을 두른 호석 14곳을 잘러서 호석을 쌓은 방법도 확인했다(그림 1). 

 

 

그림1. 아르잔-2호의 무덤 내부, KB라인과 FS라인이 무덤을 발굴할 때 가장 먼저 확인했던 단면도이다. 그 외에 케익 자르듯이 표시된 선(C,D,E,G,H,I,J,L,M,N,P,R,T,U)이 호석의 단면을 확인한 선이다. 

 

그림2. 아르잔-2호의 무덤 내부, 그림1과 동일. 오렌지 색이 스키타이 무덤이고, 녹색은 그 뒤에 추가되었던 무덤이다.무덤번호는 인간이 묻힌 무덤과 말이 묻힌 무덤 구분없이 일련번호이다. 오렌지 색으로 표시된 것이 주인공인 무덤 5호와 함께 만들어진 것이다. 녹색으로 표시된 것은 뒤에 생긴 무덤이다. 

 

 

 

예상하셨듯이, 무덤은 여러 개가 지하로 무덤구덩이를 파서 만든 것이다.

아르잔-1호와는 너무 다르다. 그리고 이제까지 본 파지릭 고원과 우코크 고원의 무덤과도 너무 다르다.

 

무덤 위(봉분)에 생긴 함몰은 지하에 생긴 빈공간 때문에 생긴다. 그 빈공간은 아주 큰 무덤구덩이다 그래서 무덤위에 생긴 함몰은 여러 곳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진상 외관이 울룩불룩했다. 크게 3곳이었는데,  어제 포스팅한 유적의 지형도를 참고하시면 된다.

 

 

그런데, 어떤 곳이 주인공의 무덤방일까?? 

아르잔-1호는 가장 중앙에 있었는데??

5호이다.

 

 

왜?? 

5호가 무덤의 중심에 있지도 않고, 특별히 커 보이지도 않는데 왜 무덤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할까?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기도 하지만, 무덤방 때문이기도 하다.

이 유적에서는 나무로 된 무덤방은 5호(그림 3)에서만 확인된다. 11호에도 나무로 된 통나무가 사용되었으나 관이고, 아주 작은 무덤으로 무덤방은 돌로 만들어졌다. 5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무덤방은 돌로 만들어졌다.

 

5호의 무덤방은 아주 견고하게 만들어진 2중 나무 무덤방으로 만들어졌다. 비록 통나무관은 없었지만.

 

그림 3. 아르잔-2호의 주인공 무덤방 5번.

 

참고문헌

 

추구노프 2011, Чугунов, К. В. “Аржан-2: реконструкция этапов функционирования погребально-поминального комплекса и некоторые вопросы его хронологии.” Российский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ежегодник . СПб: Издательство СПб ГУ, 2011, С. 262-335

(추구노프 2011, 아르잔-2호: 무덤의례복합 유구의 복원과 연대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투바의 아르잔-2, 스키타이 차르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3000여 년 전 시베리아 투바에는 직경 120m의 무덤이 만들어졌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지 않고 땅위에 나무를 쌓아올렸는데, 가장 중앙의 중심 무덤방을 기준으로 방사상으로 퍼져서 전체 무덤의 평면형태는 원형이다. 이 무덤의 중앙에는 무덤방 안에 또 무덤방(2차무덤방)이 있는 구조로 이곳에는 10인이 매장되었으며, 이 무덤의 북쪽에 있는 9호 무덤방은 중심무덤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중심무덤방에는 말이 무덤방의 동쪽에 매장되었다.

 

2020/05/1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르잔 유적 1호분] - 3000여년 전 시베리아 무덤 안의 무덤방 1번.

3000여년 전 시베리아 무덤 안의 무덤방 1번.

3000여 년 전 시베리아의 투바(현재)에 위치한 해발 1050m의 우육고원에는 이름하여 ‘왕의 무덤 계곡’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이 곳에는 마을이름이 아르잔인데, 3000여년 전 무덤이 남아 있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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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아르잔-1호의 평면도

 

9번 무덤방처럼 통나무관 안에 단독으로 매장된 경우는 중심무덤방 안에 있는 무덤방과 같은 특징이기 때문에 중심매장부와 관련된 사람의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르잔-1호에는 중심 무덤방을 제외하고 13번과 31번 무덤방에서 사람과 말이 함께 묻혔다. 으며, 통나무관이 2개 있어서 2인의 매장된 곳 이기 때문이다. 13번(7.5×5.5m, 높이 2.5m)과 31번 무덤방(5.5×5.5m)은 9번에 비해서 큰데, 통나무관 2개씩이 확인되었고, 13번 무덤방에는 말이 7개체분이 발견되어서 각 방의 주인공의 계급 혹은 무덤 가장 중심부에 묻힌 주인공과의 관련성이 훨씬 9번 무덤방에 비해서 클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13번 방은 이미 도굴당했는데, 무덤방 바닥에는 검은 색 모피와 양모직물로 만든 옷이 남아 있었고, 인간의 뼈와 사람과 관련된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에 13번과 14번 방 사이에 두개골 3개과 모피와 직물과 만든 옷, 청동 핀, 청록색 터키색을 상감한 금제 귀걸이와 황금 장식판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기마용 말 7마리와 재갈, 멧돼지 송곳니로 만든 6개의 펜던트, 말꼬리를 장식한 황금판 등이 출토되었다.

 

필자는 이곳의 상황이 의심스러운데, 평면도에도 나오지 않고, 출토된 유물도 기술로만 남아 있다. 도굴꾼이 흘리고 갔다.  이 무덤에서는 사람의 뼈는 적어도 통나무관 혹은 무덤방에서 나오는데, 예외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말이 함께 부장된 또 다른 무덤방인 31번 무덤방은 도굴당하지 않았고, 말 10마리가 무덤방의 왼편에 일렬로 가지런히 놓인 상태였다. 말 10마리 모두 재갈과 재갈멈치 및 굴레장식으로 멧돼지송곳니를 이용했다.

그런데 31번 무덤방에는 다른 무덤방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것이 발견되었는데, 2~4번 말의 몸통 뼈 사이에는 나무걸쇠가 확인되었다. 두개골과 거리가 멀어서 굴레가 아닌 안장을 고정하는 걸쇠 일 가능성이 있다. 안장은 이미 섞어서 없어진 상태이다.

 

자 다음은 31번 방에서 출토된 말의 마구이다.(그림 2) 

그런데 그림 2을 보시면 좀 이상한 점이 있지 않은가?

 

앞의 포스팅에서 다른 무덤방의 마구와 비교해 볼 때?

 

2020/05/14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르잔 유적 1호분] - 3000여 년 전 시베리아의 말馬 무덤

3000여 년 전 시베리아의 말馬 무덤

시베리아 투바에는 3000여 년 전 스키타이의 왕이 묻힌 곳일 지도 모른다는 무덤이 있는 곳이 있다. 해발 1050m의 우육고원에 위치했는데, 그랴즈노프가 조사할 당시에는 무덤이 많아서 왕들의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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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아르잔-1호 무덤 31번 무덤방에서 출토된 재갈과 굴레장식. 번호는 말의 번호와 일치. 2~4번 말의 몸통에서 확인된 걸쇠는 도면이 없었다.

 

 

 

 

 

 

 

 

 

 

 

 

앞에서 설명했던 재갈만 있고 앞에서 보았던 재갈멈치가 없다.

이 무덤방에는 10마리의 말 두개골이 가지런했고 도굴당한 흔적도 없었지만, 재갈만 있었고 구멍 3개 있는 재갈멈치가 확인되지 않는다.

 

대신에 재갈의 끝 구멍(그림 2-6, 그림 3-19 )에 둥근 나무판이 청동고리로 연결된 것이 확인되었다. 이 나무판이 말의 입 옆을 눌러서 재갈멈치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 3. 아르잔-1 출토 재갈멈치, 이 유적에서는 재갈멈치가 한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가 있다. 그림 19와 그림 2-6은 같은 유물.

 

 

 

통나무관(전체길이와 너비: 180×60cm, 통나무관의 내부: 130×35cm, 통나무관은 중심 무덤방에서 출토된 것을 확인하시면 되는데, 통나무의 안을 다 판 것이 아니다. 도면이 제시되지 않았다.) 남서쪽 통나무관에서 40세 이상의 남성이 발견되었다. 무릎을 구부린 상태로 옆으로 뉘운 상태로 매장되었다. 다른 통나무관(전체 길이 2.3m, 관의 내부길이 1.5m)에는 뼈가 보존되지 않았다.

이 무덤방에서는 모직물과 모피옷이 많이 확인되었고, 귀걸이와 금제 장식핀 등이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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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잔 유적의 1호는 봉분이 있는 직경이 120m가 넘고, 봉분을 제거한 후에 드러난 나무방은 직경이 80m가량이다. 직경 80m안에는 무덤방이 70여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그림2). 무덤은 현대에 이미 훼손된 상태여서 무덤방의 숫자가 정확하지는 않다.

 

무덤방은 지름 50~85cm가량의 낙엽송을 이용했으며, 가장 중앙에 주인공의 무덤방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나무방이 설치되었는데, 각 방의 크기와 모양은 다른데, 각 방의 면적은 15~150㎡이고, 전체 사용된 통나무의 수는 6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림 1. 아르잔 1호분의 발굴광경

 

 

그림 2. 아르잔 1호분의 무덤내부

 

중심부의 메인 무덤방은 크기가 8×8m, 높이는 2.6m이다. 그 안에는 다시 2차무덤방이 설치되었는데, 4.4×3.7m이고, 높이는 1m인데, 안에는 남녀의 통나무관 2개가 설치되었다. 바닥에도 지름 20cm나무를 깔았다. 1차 무덤방과 2차 무덤방 사이에는 통나무관 6개와 작은 나무방 2개가 따로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곳(그림 3-2)에는 통나무관이 따로 들어가 있었다. 동쪽에는 마구를 착용한 말이 6마리가 부장되었다. 중심부의 메인무덤방에서는 모두 8명의 사람이 확인되었는데, 가장 중심의 2차 무덤방 안(그림 3-1)에 통나무관에는 각각 남성과 여성이 묻혔고, 외부의 작은 무덤방(그림 3-5)에는 남성 1명(40~60세), 통나무관에는 한 곳(그림 3-3)을 빼고는 모두 남성이 묻혔다. 나이는 다양하다. 20세가 채 안된 남성 1명, 60대 2명,  40대 1명이다.  그런데  그림 3-2의 작은 나무방안의 통나무관과 그림 3-3 통나무관에도 관이 있기에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 10명이 메인 무덤방 안에는 있었을 것이다.

 

 

그림 3. 아르잔 1호분의 중심 나무방

 

무덤방은 나무를 쌓아 올렸는데, 한 단씩 가로와 세로를 교차해서 올린 것이다. 여러분은 해본적이 있으신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성냥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 성냥으로 쌓는 놀이를 한적이 있다. 성냥을 쌓는 방법은 가로와 세로를 한단 씩 교차하는 방법인데, 이 무덤이 딱 그렇게 축조되었다.

 

아직 아르잔 1유적의 외부무덤구조를 설명드리지 않았지만, 어제 포스팅한 도면에서 이미 파손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무덤의 봉분을 돌로 덮었고, 가장 중심의 매장주체부는 도굴이 심했으나, 외부에서 온 남겨진 유물로 보아서 대단한 인물의 무덤으로 생각한다.

 

 

아르잔 유적의 1호는 이제까지 소개해 드린 파지릭 유적과 아크 알라하 3유적과 비교해 볼 때 무덤구조가 많이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의 탄소연대측정과 나이테를 비교해서 보정한 결과는 가장 오래된 연대는 기원전 885년 가장 늦은 연대는 기원전 790년 이다(Zaitseva GI, Vasiliev SS, Marsadolov LS, van der PlichtJ, Sementsov AA, Dergachev VA, Lebedeva LM.1998.). 이 연대는 그랴즈노프가 발표한 책에서도 비슷한 연대가 발표되었다. 필자가 먼저 인용한 이유는 좀 더 최신의 기계로 분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코크 고원의 얼음공주 무덤과도 비교해볼 때 300년 이상 빠르다.

zaitseva_gi_et_al_a_treering_and_14c_chronology_of_the_key_s.pdf
0.92MB

300년 동안 무덤구조가 그대로라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무덤구조는 매우 심하게 차이난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개별 무덤방의 차이 등 너무 많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 유적은 무덤을 땅위에 만들었다는 점이다. 구덩이를 파지 않았다. 구덩이를 파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큰 무덤을 만들 수 있었다. 반대로 큰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구덩이를 파지 않았을 수도 있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

Zaitseva GI, Vasiliev SS, Marsadolov LS, van der Plicht J, Sementsov AA, Dergachev VA, Lebedeva LM. 1998. A tree-ring and 14C chronology of the key Sayan-Altai monuments. Radiocarbon 40(1):57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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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2500년 전 무덤인 파지릭 유적은 1929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발굴은 1947년부터 이다. 하지만 발굴은 1850년에 아직 로마노프 왕조일 때 ‘제국고고학위원회’를 만들어서 흑해북쪽의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1929년은 러시아혁명 후로 레닌이 죽고 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고, 스탈린이 집권했던 시점이다. 스탈린 집권기간 동안에 파지릭 유적은 발굴되었다. 스탈린은 사람을 아주 많이 죽인 지도자이다. 레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했던 권력을 잡은 수단은 등 뒤에서 칼을 꼽는 것이다. 인간백정이라는 평가도 있다. 2차대전 당시 독일과 싸워서 이겼지만, 자국민이 너무 많이 죽어서 그게 이긴 것일까 하는 평가도 나온다.

 그럼에도 러시아인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러시아인 3인중에 한명이다(2008년 필자가 유학당시, 러시아 국영tv 방송인 ‘러시아(РОССИЯ)’에서 했던 조사였는데, 아침마다 위대한 러시아의 위대함을 알리는 역사적 유적과 인물을 꼽아서 보여주었다. 아침마다 보면서 처음에는 거북했지만, 나중에는 그러려니...하고 되는 걸 경험했다. 아직도 스탈린이라니..이러면서. 복잡한 감정이었다.) 독일과 싸워서 이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열리는 전승기념일은 2차대전 종전일이 아니라 독일과 승전일인 5월 9일이다. 스탈린은 현대한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이 부분이야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일 테니...(우리나라에서 알려진 소련 혹은 러시아에 대한 인물의 이미지는 전부 미국언론을 통해서 알려져서, 미국입장에서 알려진 이미지이다. 실제 그 나라 감정과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필자는 스탈린 집권기에 알타이의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이상한 감정이 문득 든다.

 

2500년 전 유적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현대사로 넘어 갔는데, 다시 돌아와서 1929년에 그랴즈노프가 발굴한 유적은 이미 도굴당해서 주인공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하지만 말 10마리에 대한 정보는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 있고 필자가 공개했다.

 

2020/04/2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1호분] -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서는 한 가족 혹은 친족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이 확인된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과 그 안에는 관을 두고, 무덤방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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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스키타이  문화의 유물은 늘 앞에 붙는 수식어가 ‘황금’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하지만 필자가 보여드린 유물은 거의 대부분 나무장식이었다. 그렇다면 황금은 어디에?

드문드문 말씀드렸지만 금박은 쉽게 찢어져서 벗겨진채로 많이 발견된다. 특히 1호분에는 금박이 많이 발견되었던지, 그 부분에 대해서 벗겨진 금박종이가 많다는 내용도 별도로 적어 놓았다.

여러분의 의심을 약간이나마 덜어드리기 위해서 4호분에서 가장 금박이 많이 남은 유물을 보여드리고자 한다. 유물은 말의 얼굴에 달렸던 굴레장식이다. 파지릭유적의 1호분에서 4번째 말의 굴레장식이라고 분류된 말이다. 비교적 많은 금박이 남아 있다(그림 1). (알타이에도 황금덩어리로 만든 유물이 출토되는 유적이 있다. 앞으로 소개할 예정임...)

 

 

그림1. 파지릭 유적 1호에서 출토된 말의 굴레

 

굴레장식에 관통하는 가죽줄은 뺨으로 돌아가는 부분은 가죽띠 2줄이고, 코로 돌아가는 부분에도 굴레장식이 부착되었다. 굴레장식은 산양머리와 팔메트 문양이다. 산양머리에는 가죽뿔이 붙어 있다. (그런데 가죽뿔이 빠진 왼쪽(우리가 볼때)의 굴레장식은 필자가 보기에는 새모양으로도 보인다.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나 싶기도 하다.)

 뺨으로 돌아가는 굴레는 2줄로 재갈멈치로 연결된다. 재갈멈치는 끝 부분에만 동물문양이 붙어 있는 유물과는 달리 재갈멈치가 통째로 산양을 표현했다. 앞다리는 몸 아래로 당기고, 뒷다리는 뒤로 뻗어서 몸을 수평으로 표현해서 산양은 뛰는 모습인지, 나는 모습인지를 표현했다. 재갈멈치가 대체로 막대기모양인데, 이 부분에 동물을 통째로 표현한다고 산양의 무릎을 꿇은 모양으로 표현하면, 다시 말해서 산양 몸을 수평으로 만들지 않으면 기능적인 부분이 약해지기 때문에 모양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세의 굽동물의 표현은 사슴돌에 이미 있다. 있지만 그것을 재갈멈치에 사용하는 것은 다른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유물의 이마장식은 물방울 모양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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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남부 알타이 파지릭 계곡에는 2500년 전 무덤이 남아 있다. 이 계곡의 무덤은 여러 기가 있는데, 그 가운데 미라의 존재로 가장 잘 알려진 2호와 5호 무덤은 이미 포스팅했다. 이 무덤은 루덴코라는 러시아 학자가 1947~1948년에 걸쳐서 발굴한 것이다.

 

그런데 2호 바로 옆에 있는 1호는 18년 정도 먼저 발굴되었고, 그랴즈노프라는 사람이 발굴했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최초로 발굴된 무덤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까지 ‘스키타이 문화’의 중심축이 흑해북안에 치우쳐 있었으나, 이를 시베리아로 관심을 갖게 하게 한 발굴이었다. 매우 중요한 발굴이었다고 생각된다.

 

 

2500년 전 시베리아 남부 알타이의 무덤은 소형도 있지만 대형 고분은 무덤구덩이를 크게 파고 통나무로 된 무덤방을 만들고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고, 통나무로 무덤구덩이를 덮고 흙과 돌로 무덤구덩이를 채우고 가장 위에는 돌로 마무리 하는 구조이다.

 

1호무덤도 마찬가지인데, 외관에서 드러난 무덤의 직경은 47m이고 높이는 2.2 m이다(그림 1).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7.2×7.2m, 깊이는 4m가량이다. 가장 상부에 돌을 드러내고 그 아래에는 무덤구덩이를 파낸 흙을 다시 채운 흙이 상부의 돌 아래부터 무덤구덩이 까지 채워졌다(그림 2). 그 아래에는 낙엽송 300개를 채워서 무덤을 덮고 있었다(그림 3).

 

그림 1. 파지릭 1호분의 평면도

 

그림 2. 파지릭 1호분의 단면도 (남북방향)

 

그림 3. 파지릭 1호분의 경관(1), 파지릭 1호분의 무덤 내부(2) 중 무덤을 덮고 있는 낙엽송의 존재

 

 

무덤구덩이는 정확하게 네모꼴이지만 가장 바닥에 설치된 무덤방은 사다리꼴에 가까운데, 무덤방 덮개를 기준으로 긴 변의 길이는 4.87m, 짧은 변의 길이는 3.35m이고, 깊이는 1.4m가량이다(그림 4). 무덤방 덮개의 가장 상부는 매우 두터운 3개의 통나무가 덮개와는 반대방향으로 놓인 것이 확인되었다. 무덤방은 무덤구덩이의 남쪽벽에 붙여서 설치되었다. 2중으로 바닥에서는 통나무로 된 관(2.6×1.2m)이 확인되었다(그림 5). 무덤방 사이에는 돌로 채워졌다(그림 3, 그림6) 북쪽에는 말이 10마리 부장되었다. 말을 부장한 곳에도 통나무로 덮은 채 였다.

 

 

그림 4.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천장

 

그림 5.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내부

 

 

그림 6. 파지릭 1호분의 무덤 단면도(동서방향)

 

 

그림 4에는 도굴구덩이가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림 6과 7에는 천장에 도굴로 무덤천장을 절단한 흔적이 선명하다. 도굴구덩이로 인해서 무덤내부에는 원뿔모양으로 얼음이 차 있었다(그림 6, 그림 8-2).

 

그림 7. 파지릭 1호분의 무덤구덩이 내부 천장

 

 

 

그림 8.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내부 상태, 1-관이 놓인 남쪽벽, 2- 그 반대편, 무덤방은 1차와 2차무덤방이 있었다. 도굴로 인해서 북쪽 내벽은 크게 구멍이 나 있었고, 외벽은 하나의 통나무만 잘려 진 상태였다.

 

 

상부에 통나무 300개를 지지하기 위해서 무덤방 바깥에 북쪽과 남쪽에 이를 지지하기 위해서 수직으로 각각 3개씩 나무를 세워놓았다(그림4, 그림 5). 무덤의 단면에서도 확인된다(그림 3. 그림 6)

 

흥미로운 점은 무덤방의 평면형태이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파지릭 2호분도 모를 줄여서 정확하게 네모꼴이 아니었다. 평면형태가 직각사다리꼴에 가까웠다. 왜 그랬을까?

 

 

 

참고문헌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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