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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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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주 정도는 시베리아의 스키타이 문화권에서도 알타이에 위치한 파지릭문화의 파지릭 유적에서 남녀 미라가 들어간 무덤을 살펴보았다.

 

이제 까지 파지릭문화에 해당하는 무덤은 여성무덤(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 남성무덤(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아이무덤(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남녀무덤(파지릭 유적의 2호분)을 살펴보았다. 나름 자세히 생생히 알려드릴려고 노력했는데, 부족한 점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위의 무덤에는 모두 말이 부장되어 있었다.

그럼 말 만 타고 다녔을 까? 마차도 타고 다녔다. 파지릭 유적의 5호에는 마차가 들어가 있다. 이 유적의 파지릭 2호분은 대체로 2500년 전 아크 알라하 3유적과 비슷한 시점에 공존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미라의 몸에 문신이 같은 사람이 그린 것이라면 생각해 볼 수 있다.

 

파지릭 5호분은 파지릭 유적의 1호분 보다 48년 정도 늦은 뒤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나무 나이테를 비교해서 얻은 상대적인 수치이다. 이 유적이 발굴될 당시 1947~1948년에는 탄소연대측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방법은 1960년대 이후에 개발되었다. 파지릭 1호분은 파지릭 2호분과 같은 시기의 무덤으로 생각한다.

 

파지릭 유적이 위치한 곳은 해발 1500m정도 된다. 이는 앞의 포스팅에서 필자가 구글지형도에 표시해 놓았다. 유적에서 마차가 확인됨으로 마차가 올라갈 수 있는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마차가 갈 수도 없는데, 그곳에 묻었다고 추론하는 것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실제로 파지릭유적은 계곡의 낮은 곳과도 가깝고 강 주변의 자작나무로 무덤을 만들었다. 

 

앞에서 러시아 학자들이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는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보다 낮은 계급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원인 중에 하나가 무덤의 크기가 작고, 부장품에 차이, 환경의 차이가 있다고 했다. 특히 파지릭 유적에서 확인되는 마차의 존재는 더 그러한 생각을 하게 하는 것 같다. 러시아 학자들은 상대적으로 덜 높은 생활 환경이 좋은 파지릭계곡이 우코크 고원보다 더 상위 계급을 위한 사람들을 위한 장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석달 전만해도 긴가민가 하면서 러시아학자들의 생각을 전했다.

하지만 러시아 학자들이 놓친 생각은 우코크 고원의 위치이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은 파지릭 계곡 보다 1000m높은 곳에 위치한다.

발굴당시에 완벽하게 남은 미라를 옮기기 위해서 모스크바에서 헬기를 띄었다. 우코크 고원은 고원에 올라가면 매우 아늑한 장소이지만, 잘 갈 수 없다. 그곳에 가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지난번에 링크한 폴로스막의 인터뷰에도 나온다.

러시아 군용 트럭(가즈-66, 시베리아 벌목공 들이 타고 찍은 군용 트럭의 사진이 간혹 보이는데, 그 차가 군용트럭이다)과 헬기만이 갈 수 있다. 그 군용트럭은 필자도 타 보았는데,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 트럭의 장점은 어디든지 갈 수 있다. 한시간 정도 타고 나면 사람들은 거의 실신할 정도가 된다. 그 트럭에 미라를 옮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미라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기 때문에. 아마 발굴할 때 연구자와 물건들은 군용트럭으로 이동했지만, 몇몇 우두머리와 미라는 헬기로 날랐다는 기사를 읽었다.

 

즉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 마차가 없는 것은 그녀가 묻힌 곳이 마차가 갈 수 없는 곳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하면 안된다. 그 여성미라가 지위가 낮아서가 아니라 마차가 갈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에 묻었다는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한다.

 

어쨋거나 파지릭 5호분에는 말 9필과 마차가 확인된다.

그럼 시베리아에서 마차는 스키타이문화부터 있었을까?

 

아니니깐 저렇게 물어보겠죠?

이 동네 마차는 마차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지 않지만 마차의 부속품과 마차를 그린 암각화가 청동기시대부터 확인된다. 안드로노보문화와 카라숙문화에서 확인되는데, 차차 소개하도록 하겠다.

어쨋거나 흥미진진하지 않으신지? 무덤 속의 마차라...

 

 

그림 1. 2500년 전 파지릭 유적 5호에서 출토된 마차복원품

 

 

그림 2. 파지릭 유적의 무덤 배치도, 가장 남쪽에서 큰 점이 5호분의 위치이다. 

 

참고문헌

루덴코 1960,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산의 파지릭 계곡에는 그 때 사람들이 남겨 놓은 공동묘지가 있다. 우리는 인간이 남겨 놓은 옛날의 장소를 유적이라고 부른다.

이 공동묘지는 계곡의 이름을 따서 파지릭 유적이라고 한다. 파지릭 유적의 2호무덤은 55~60세의 남성과 40세 가량의 여성이 미라처리 되어서 매장되었다. 이 때 모든 사람을 미라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라화 된 사람들은 특정 계급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실제로 미라가 들어 있는 무덤에는 규모도 크고, 유물도 많다.

그런데 무덤은 크게 만들어졌을수록 무덤 위에 솟아 오른 봉분이 클수록 그 곳에 먼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도굴이 쉬워지는 것이다.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이 만약 도굴당하지 않았다면 엄청난 정보의 제공처가 되었을 것이다.

 

이 무덤에는 남녀의 모자 혹은 머리장식이 각각 2점씩 확인되었다. 이미 여성의 머리장식으로 나무로 제작된 것은 한 점 공개한 바 있다(그림 3-2). 남성의 모자도 가죽으로 된 것을 공개한 바 있다.

 

2020/01/2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3 유적(여성미라,'얼음공주')] -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코로나(корона)'의 기원?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코로나(корона)'의 기원?

필자도 중국 상해, 남경 등 학과 답사로 같이 참여하기로 계획되었다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취소되었다. 비자피와 얼마간의 위약금을 물어야 했지만, 그래도 그냥 취소보다 병이 창궐하는 덕분?에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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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의 모자는 이 남성의 계급 때문인지 코로나 라는 별칭이 있다고 했다. 코로나는 왕관이라는 뜻이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요즘 유행하는 러시아어 중에 하나이다.

이미 소개한 남성의 모자는 가죽으로 되었있었고, 머리의 정수리에 4점의 가죽 조각으로 사슴 뿔을 상징하는 아플리케 장식이 붙어 있다.

 

머리에 쓰는 모자의 베이스는 비슷하지만 붙어 있는 장식이 매우 화려한 남성의 모자가 있다.  나무, 가죽, 펠트로 제작된 것이다.

펠트는 모자의 베이스에 사용되었고, 나무와 가죽은 붙어 있는 그리핀 장식에 사용되었다.

나무로 제작된 그리핀의 입속에 뿔 달린 사슴머리(그림 1-1, 2-3)를 표현 한 것이다. 남아 있는 이 나무조각의 높이는 34.5cm, 너비가 15cm가량이다. 그리핀의 목에도 작은 그리핀의 머리가 양쪽으로 한 쌍(그림 2-2)붙어 있는데, 큰 그리핀의 몸통에 삽입 가능한 사각형 구멍이 있다. 이 그리핀의 몸은 큰 그리핀의 몸통에 조각되어 있는데, 그 아래에는 거위가 한 마리씩 조각되어 있다(그림 2-4). 그리핀 본체의 눈과 부리 사이에는 부채꼴 모양으로 수염?을 표현하고 있고, 정수리부터 목에는 가죽으로 갈귀를 표현하고 있다(그림 1-1, 그림 2-1).

그래서 이 그리핀은 독수리+굽동물의 갈귀+호랑이의 수염이 합체된 것이다.

 

이 그리핀의 머리 및 목과 함께 출토된 유물은 뿔이 화려한 사슴 장식이다(그림 1-2, 4). 나무와 가죽으로 제작된 것인데, 머리는 나무로 입체적으로 제작되었고, 가죽은 몸통을 표현했는데, 평면으로 표현되었다. 앞 다리와 뒷다리가 구부린 것으로 마치 달리는 모습을 표현한 듯 보인다.  앞서 살펴본 그리핀의 아래에 모자의 베이스에 부착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사슴의 몸통이 평면이어서 어딘가에 부착되었을 것이고, 모자의 베이스에 부착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1. 파지릭 유적의 2호 출토 남성 머리 장식

 

 

그림2. 파지릭 유적의 2호 출토 남성 머리 장식, 위와 같은 유물

 

특이한 여성의 머리장식도 출토되었다. 앞서서 살펴본 목제의 나무장식과는 달리 주로 가죽으로 제작되었다(그림 3-4). 머리에 텐트를 두른 듯, 쓰면 눈,코,입만 보일 듯하다. 머리 정수리에는 반구형의 모자틀이 있고 그 아래로 가림막을 가린 듯 한 모습이다. 머리의 정수리에는 수탉모양의 가죽 아플리케 장식(그림 3-3)이 세워져서 붙어 있고, 그 아래에 모피조각이 세 점 붙어 있다(그림 3-1). 가림막에도 마름모 모양안에 연꽃 장식이 있는 아플리케가 붙어 있다(그림 3-4).

 

그림 3. 파지릭 2호 출토 여성의 머리장식

 

 

새머리 모양의 장식이 있는 모자가 출토된 유적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아크 알라하 1 유적(1호분), 베르흐 칼쥔 2 유적(3호분), 올론-쿠린-골 10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독수리 머리에 굽이 있는 동물이 양식화 된 표현이다. 굽이 있는 동물은 주로 말, 사슴, 숫양이 대상이고, 새 머리도 양식화 된 것이다.

 

그리핀 장식은 발견당시 금박으로 입혀져 있었고, 붉은색으로 채색되었었다고 한다. 남성의 높은 그리핀 달린 모자의 베이스는 펠트로 제작되었다. 무덤에서 펠트조각과 함께 발견되었다고 한다.

 

종합하면, 파지릭 2호분의 남녀는 각각 높은 머리장식 1점과 낮은 머리장식 1점을 가지고 있었다. 남성의 머리장식 중 높은 것은 의례용이었겠지만, 여성의 머리장식은 둘 다 평소에 쓰기에는 불편한데, 무엇을 평소에 썼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불편함을 감수한 노력?은 여전한가 보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의 상트페트르부르그 시에 위치한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근현대 유명화가의 그림부터 시베리아의 구석기시대 유물까지 없는게 없어서 ‘박물관’이라는 뜻이 딱 맞는 곳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건물 자체가 표트르 때부터 사용되었던 겨울 궁전이다. 건물부터 내부에 든 유물까지 전부 인간이 남겨놓은 그 모든 것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유명한 그림들이 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지하까지 내려가면 고고유물이 있다. 지하에는 주로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의 유물이 많다..‘많다’라는 말로 전달이 안된다. 너무 피곤하다. 너무 많아서...

 

그중에서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차르로 여겨지는 표트르 1세가 수집한 시베리아의 황금 유물 컬렉션은 가장 화려한 방에 배치되어 있다...(그래서 사진이 잘 안나온다..벽에다가 붉은색 카펫을 달아서 유물을 매달아 놓았는데....사진이 죄다 흔들린다..일부러 그런것일까 싶기도 하고...)

 

이 유물들이 시베리아의 어떤 곳에서 수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풀려고 노력을 했고 하고 있으나, 모두가 동의하는 답은 없을 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밌기도 하다.

그 중에서 필자가 나무 아래서 세 사람이 쉬고 있는 장면을 소개한 주제가 있는 버클 장식을 소개한 바 있다. 바로 파지릭 유적 2호분에서 나온 머리장식과 이 버클에 표현된 여성의 머리장식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버클에는 잘 이해가 안되는 유물이 한 점 걸려 있다(그림 1).

바로 나무 아래에 걸려 있는 네모꼴? 혹은 타원형의 유물 때문이다. 필자가 여러 책을 뒤적거려도 여기에 대해서 해석을 해 놓은 사람은 아직 없었다.

 

그림1. 에르미타주 소장, 표트르 1세 황금유물 컬렉션, 황금 버클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어쩌면 나무 밑에 걸려 있는 이 물건은 파지릭 2호분에서 출토된 일종의 악기인 하프 일 수도 있다.

 

 

 

그림 2. 파지릭 유적 2호분의 유물배치도

 

 

앞에서 파지릭 2호분 무덤 배치를 유심히 보신 분은 이미 이 유구에서 악기가 출토된다는 사살을 눈치 챈 분이 있었을 것이다. 2017년 영국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에는 이 유물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런데 루덴코가 파지릭 유적에 대한 단행본을 펴낼 때 이 유물은 이미 공개되었다.(그림 2)

나무로 만들어진 것인데 전체 길이는 83cm이고, 가장 자리는 11~12cm가량 넓고, 중간 부분은 너비가 3~4cm가량으로 좁아지는 형태로 길고 단단 나무 조각으로 중간에는 비어 있어 공진기 역할을 한다. 하프 바디의 아랫면은 거의 수평이지만 가운데는 오목하다. 가장 가운데 높이는 5cm밖에 되지 않는다. 몸의 중간 부분에는 길이 26cm로 된 소리판으로 덮여 있다. X모양의 공명 조리개가 가운데 길게 나 있다. 바디에서 뚫린 부분은 소리를 확장하기 위한 부분으로 얇은 가죽을 씌웠을 것이고, 그 부분은 바디에 붉은색으로 염색한 흔적이 남아 있다. 가죽막에는 3개의 원형 공명구멍이 있었고, 하나는 끝 부분에 다른 하나는 중간에 있었다. 얇은 나무 못으로 막을 악기의 바디에 고정시켰다. 바다의 한쪽에는 끈을 매기 위한 홀더가 있었는데 길이가 24cm가량이다. 몸통의 넓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에 부착된 돌출된 부위에 묶어서 사용했던 것이다. 남아 있는 줄의 수는 4개 이상이다.

 

 

그림 3. 파지릭 유적 2호분 출토, 현악기, 일종의 하프, 가죽막은 그림이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다시 그림 1의 나무 밑에 걸려 있는 물건을 보면, 앉아 있는 여성 방향으로 튀어 나온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어쩌면 악기의 스트링 홀더가 아닐까? 이런 악기를 그냥 들고 다녔을 리는 없고, 아마 가죽 주머니 같은 곳에 넣고 다녔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나무 밑에 걸려 있는 물건에는 세로 방향으로 긴 줄이 4~5줄 표현되어 있다.

 

황금벨트에 표현된 나무 아래의 물건은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는데, 화살과 활이 들어간 스키타이 고리트라고 불리는 유물이다. 고리트는 전사들의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무기이다. 쉬기 위해서 허리춤에 있던 무기를 풀러서 나무밑에 걸었다는 설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우코크 고원의 전사 무덤(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이 유물에 대해서 살핀 바 있다. 하지만 고리트라고 하기에는 고리트에 씌운 고깔모자도 없다. 그리고 이 유물이 만약 고리트라면 벨트에 표현된 이 유물에서 여신방향으로 불룩 튀어나온 부분이 해석이 되지 않는다.

 

2020/02/12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1유적] - 알타이 산의 스키타이 전사 2인의 활집과 평화

 

알타이 산의 스키타이 전사 2인의 활집과 평화

알타이 산의 우코크 고원에서도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는 16세 가량의 소년과 45~50세 가량의 남성이 함께 확인되었는데, 우리는 이미 소년과 장년기의 남성이 어떤 물건과 함께 부장되었는지 살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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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이 황금벨트를 디자인 한 사람이었더라도, 가장 중요한 소재인 나무 아래에 무기보다는 악기를 매달았을 것 같다. 휴식을 위한 주제를 선택했다면...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그림 1.

 

 

 

그림 2.

 

2500년 전 알타이 산에서도 파지릭 계곡에는 파지릭문화로 불리던 유적이 확인되었다. 파지릭문화는 좀 더 넓은 개념으로는 스키타이 문화(권)‘으로도 불린다. 유적에서는 대형무덤 5개가 1940년대에 발굴되었다.

 

무덤을 발굴하면서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무덤을 흙과 돌로 채운 공간에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물론 의례와 관련된 부서진 토기 등은 종종 다른 문화에서도 출토된다.

하지만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무덤구덩이를 발굴하는 동안 내내 뭔가를 기대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무덤방 바깥에는 주로 말이 매장된 것이 확인되기도 했던 것을 우리는 파지릭 유적 보다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우코크 고원에서 보았다.

 

그런데 파지릭 유적에서는 흥미로운 것이 당시에 무덤을 축조할 때 사용했던 도구 들이 무덤속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것은 아니었겠지만, 무덤방 위에서 나무로 만든 삽도 있었다.

2호분에서는 나무로 만든 무덤방 부근만 아니라 무덤구덩이 여러 곳에서 목제 쐐기(그림 1)와 망치(그림 2)가 발견되었다. 나무쐐기(그림1)는 길이가 30~73cm가량으로, 머리부분은 타원형이었을 테지만 도끼로 내려쳐서 끝은 변형되었고, 끝의 뾰족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2호에서는 나무망치(그림2)는 낙엽수림의 줄기로 제작되었는데, 나무의 뿌리부분이 이용되기도 했다. 전체길이는 46~70cm이고, 손잡이의 직경은 12cm, 손잡이 길이는 25cm가량이다. 매우 무겁다. 오랫동안 사용했던 흔적이 타격흔으로 남아 있다.

 

이 두 유물은 특히 2호분에서 대량의 나무쇄기와 망치가 발견되었다. 2호분에는 자갈과 흙을 섞어서 무덤구덩이를 충전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3. 4호분과 무덤을 채운 흙이 모래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이 부분은 차후에 다시 설명하겠다.)

 

 

그림3.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의 자작나무 무덤방, 왼쪽은 발굴되었을 당시를 설명하고, 오른쪽은 원래 무덤이 축조되었을 당시를 복원한 모습이다.

 

2호의 무덤구조 중에 다른 호수의 무덤과 다른 점은 가장 아래 바닥이다.

나무로 만든 무덤방 아래에 돌을 깨서 두께 10cm정도로 깔고 그 위에 검은 흙으로 덮고(5cm) 무덤방을 만들었다.

 

무덤방은 2중으로 되어 있는데, 2호는 이중 나무방 사이의 공간이 비어 있다. 무덤방의 상부는 가장 위 무덤방 위에는 많은 자작나무로 채웠고, 외부 무덤방 천장은 두터운 자작나무로 덮은 다음 그 안에는 자작나무껍질을 깔고, 마지막으로 관목(Potentilla dasiphora fruticosa L. Rybd.)으로 덮었다.

 

안의 무덤방은 높이 1.53m, 평면형태는 3.65×4.92m이다. 외부의 무덤방은 높이 2.1m, 평면형태는 4.15×5.7m이다. 내부무덤방의 바닥은 나무판으로 제작되었는데 두께 5~6cm가량 너비 12~24cm의 17개로 구성되었다. 무덤방의 가장자리에는 가로 8개(북과 남쪽), 세로 7개(동과 서쪽)로 짜여있고, 천장은 20개로 구성되었다. 외부 무덤방에는 천장은 28개의 통나무이고, 벽은 남쪽과 북쪽은 10개의 통나무로 짜여있다. 동과 서쪽의 개수는 표시되지 않았다.

 

그림 4. 파지릭 유적의 2호분 천장을 열고 본 무덤내부. 유물을 아직 수습하지 않은 상태.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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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시베리아에서도 알타이 산맥 중에서 가장 높은 고원인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은 어린아이의 무덤이다.

 

무덤의 방향은 동북-남서방향이 긴 장축방향이다. 무덤구덩이는 위는 크고, 무덤바닥으로 갈수록 작아지는데, 지상에 드러난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3.95×2.7m, 바닥은 3.16×1.9m이다(그림1).

 

그림1.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의 무덤 단면도

 

첫 번째 무덤방의 덮개가 드러났는데(그림 2),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이곳의 높이는 지상으로부터 170cm가량에서 확인되었다. 통나무 12개를 가지런히 놓았다. 그 크기는 168×270cm이다. 무덤방의 첫 번째 뚜껑을 열자 다시 무덤 뚜껑이 있었다. 무덤의 북쪽 빈공간에는 말이 한 마리 부장되었다.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의 무덤방 첫 번째 덮개(숫자는 높이를 의미함)

 

 

무덤바닥에는 크지 않는 무덤방이 확인되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과 얼음공주 무덤처럼 통나무관은 없었다. 무덤방의 크기는 2×0.95cm인데, 높이는 상층의 압력으로 인해서 무너져 내린 상태여서 정확하지 않다. 두 번째 덮개는 7개의 통나무를 가지런히 놓았다.

 

그림3.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의 무덤방 두 번째 덮개

 

 

무덤바닥은 5개의 납작한 나무판자를 놓은 것이다. 사자는 8살의 남자아이다. 오른쪽으로 누웠고, 무릎을 살짝 구부렸고, 머리는 동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림 4.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의 무덤방 덮개가 열린 모습

 

어린아이의 무덤이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고, 같은 시기의 다른 아이 무덤(아크 알라하 5유적의 2호분)과 비교해도 큰 편이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무덤방을 설치하고 위에 돌을 쌓아서 마감하는 방법으로 축조되었다. 크기는 어른 무덤에 비해서 작다. 어린 아이의 체격이 작으니 무덤 크기도 차이가 있다. 장례식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자의 체격에 따라서 관의 호수가 정해진다는 사실을.

 

계속 포스팅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앞의 어른관과 비교해서 어떤 차이가 있나요?

 

1호분 어른 무덤에는 통나무관이 있었지만 어린 아이 무덤에는 그런 관은 없다.

 

문득 든 생각은 이 사회에서 이들이 가장 값지다고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 하는 ....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이 있어서 황금일까?

영화인디어나존스의 몇 편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성배를 찾아서 헤매는 편이 있다. 가장 마지막에 그 성배는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도 잘마르고, 쭉바로 큰 나무는 무지 비싸다고 들었다. 가격은 모르지만.

남대문이 전소되고 복원할 때 나무 때문에 가장 애를 먹었다고 들었다......

러시아에도 그들의 크리스마스(유럽과는 다름)가 있는데, 집에 전나무를 들여서 꾸민다.

혹은 그렇지 못하면 전나무 나뭇가지라도 걸어두고 집안을 장식한다.

그런데 그게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주 크다. 그 상쾌함이란 말할 수 없다.

필자도 유학 당시에 러시아 할머니의 아파트에 방 한칸 렌트해서 살았는데, 할머니가 그 즈음에 어디서 구해오셔서 걸어두셨다. 그 나무 향이 온 집에 퍼지는 경험을 했는데, 정말 다른 세상이었다. 더우기 공기난방을 해서 매우 건조한데 가습기 역할도 일정 하는 것 같았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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