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2022. 12. 10. 09:30 스키타이 동물장식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는 지역은 흑해지역부터 시베리아를 거쳐 몽골 및 중국동북지역까지 넓은 지역에 퍼져 있다. 이는 그간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시베리아가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지로 주목된 것은 아르잔-1호에서 출토된 원형의 맹수장식 때문이다. 이 문양은 기원전 9세기 이후부터 스키타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과연 시베리아가 스키타이의 땅이었을까? 하는 의심을 가진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키타이 문화에 대해서 처음 기록한 헤로도투스는 이런 문구를 기록했다.

'그 나라(스키타이) 의 북쪽에는 계속해서 눈이 내린다... 이 대륙의 북쪽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흑해북안의 올리비아에 살던 헤로도투스가 어떻게 이를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흑해북안과는 다른 지역이다. 물론 그가 살던 기원전 4세기 전후의 기후상황도 살펴야 할 것이다.

 

시베리아는 드넓고 위도에 따라서 자랄 수 있는 식물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기후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산림스텦지역과 초원스텦지역에 유적이 남아 있다. 시베리아에서 유적들이 발견되는 강은 오브강, 예니세이 강, 레나 강이 가장 큰 강이며, 이 세 개의 강이 체계의 근원이다. 이 강에서 뻗어져나간 지류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리스 역사가는 ‘이 나라가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크고 많은 강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언급하고 있다.

 

17세기에 러시아의 벌목꾼, 광부, 정착민들이 이 지역에 들어오기 전까지 이곳에 살던 사람은 목축, 수렵채집, 어로생활을 유지했다. 그만큼 자연환경이 풍족했기 떄문이다. 17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3600만명의 사람들이 지역의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수용소에 투옥되거나 내부 추방 또는 재정착을 위해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즉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개척했다.

1989년 조사 당시에 26개의 민족집단이 거주 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곧 멸종된 운명이라고 여겨졌다. 이들의 수가 많이 준 이유는 질병 때문이다.

 

 

 

그림 1.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러시아 민족학박물관, 17세기~20세기 초반에 로마노프 왕조에서 보낸 사람들이 모은 각 민족의 자료는 이곳(러시아민족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림 2. 야생 순록 사냥을 하는 민족

 

 

 

헤로도투스(4-47)는 ‘그들(스키타이)의 나라는 편평하고 풀이 무성하며 물이 잘 흐르고 강이 흐른다’고 묘사했다.

 

산림스텦지역 이남은 초원스텦지역으로 사냥이나 목축에 완벽하게 적합하다.

스키타이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목축유목주의에 기초한 독특한 경제와 생활 방식을 발전시킨 것은 광대한 내륙아시아의 개방된 공간에서이다. 중앙아시아 서쪽에는 건조한 스텝지역, 신장 남부는 모래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고, 서쪽은 코카서스 산맥 및 흑해와 숲을 경계로 한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전사들은 ‘비늘’갑옷을 입고 있었다. ‘비늘’이라고 불리는 부분은 길이 2~5cm가량의 청동, 철, 뿔 등 다양한 소재로 제작되었다. 특수하게 그을린 소가죽 조끼 위에 작은 ‘비늘’을 붙여서 만드는데, 금속바늘을 이용해서 꿰매서 만들었다. 가죽조끼에 붙는 부분은 편평하고 바깥면은 둥글게 처리된 것이다. 보통 비늘 조각의 2/3정도가 겹쳐지게 꿰맸는데, 3중 혹은 4중으로 겹쳐진 것도 있다.

 

철제로 만들어진 것이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부터 확인되었고,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유적에서는 매우 흔하게 발견된다. 수백 개의 스키타이 무덤에서 갑옷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서, 권력자 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활로부터 부상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몇 몇 유적에서는 삼익형 화살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갑옷이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이후에는 가슴에 그리스 사람얼굴을 붙이는 것도 유행이었다. 메두사고르곤 이라고 생각하는 신화 속의 인물이 대표적이다. 그녀와 관련된 신화(상대를 돌로 만드는)를 생각하면, 보호와 관련된 부적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림 1.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갑옷

 

이 유행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25. 11:33 스키타이 무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요인인 있었지만 스키타이 사람들의 방어무기인 비늘 갑옷으로 말과 기수를 잘 보호했기 때문이라고 아리안(Arrian)이 아나바시스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림 1. 스키타이 문화의 비늘갑옷, 기원전 5~4세기

 

중무장을 한 전사는 말을 타고 다닌 기마병이다. 말은 아마도 유목민들이 이용하는 동물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다목적이었을 것이다. 타고 다니는 용도 뿐만 아니라 우유, 고기, 가죽을 제공했다. 말을 타고 다니는 지역에서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속도는 농경사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말을 타고 다니던 유목민의 기마병과 농경사회의 전사가 싸우는 것은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에 대한 정보는 다행히 무덤속에서 얻을 수 있다. 스키타이(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무덤속에 사람과 말을 함께 부장했기 때문이다. 많은 동물을 숭배했지만(동물장식) 마지막까지도 함께 가는 동물은 말이었다. 아마도 말을 무덤에 넣는 것은 사후세계에도 말이 필요하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안장은 스키타이 문화 이전에는 발견된 적이 없는데, 중요한 발명품이었고, 유목민들이 세계 문명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공헌 중에 하나로 여겨진다.

특히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에서는 다양한 안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림 2. 기원전 5세기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의 안장과 말

 

 

 

하지만 안장이 없는 말도 무덤 속에서 많이 발견된다. 재갈과 재갈멈치, 굴레장식등은 있지만 안장이 없는 유적도 수를 헤어릴 수 없다. 예를 들어 파지리크 유적과 같이 시신을 미라 처리한 아크 알라하 3유적이 대표적이다.

 

루덴코는 자신이 발굴한 파지리크 유적의 말도 꼼꼼히 조사했다. 파지리크 유적 아래에는 냉동고와 같은 거대한 얼음층이 형성되어서 말의 상태가 매우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도 그 중에 한 마리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안장이 있는 말들은 영양상태가 좋았다고 루덴코는 기록했다. 안장을 지고 다녔던 말들은 1년 내내 목초지에서 스스로 먹이를 찾아다녔던 말과는 달리 보살핌을 잘 받은 것으로 여겨졌다. 말굽에 기근 고리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18. 11:05 스키타이 무기

 

기원전 일천년기를 살았던 스키타이 사람들은 활과 화살만으로 멀리서 자신을 방어했을까?

 

하지만 이제까지 무덤에서 나온 무기는 활과 화살 이외에도 검과 투부(전투용 도끼) 등이 있다. 특히 스키타이 검은 짧은데 대체로 60cm 내외로 아키나케스 라고 불린다. 실제 유물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석인상에도 투부와 검이 허리에 묘사되었는데, 의례용이다. 기원전 7세기 코카서스 북쪽의 켈레르메스 유적과 시베리아의 투바 아르잔-2호에서도 의식용 투부가 발견되었다. 특히 투부는 근접거리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용도로, 기원전 일천년기를 살았던 유목민이 모두 사용하지 않았다. 아르잔-2호 가운데에는 투부로 두개골에 치명상을 입은 여성궁수가 발견되었다.

 

그림 1. 투바 아르잔-2호의 공격용 도끼의 머리

멀리서 발사되는 화살과 창, 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장비는 헬멧과 갑옷이다.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청동헬멧과 철제 갑옷(찰갑)이 실제로 발견되었다. 스키타이 석인상 중에는 머리에 헬멧과 갑옷을 입은 것도 발견되었다. 스텦 초원에서는 흔한 물건이었지만, 그리스의 지식인들에게는 특별했던 것 같다.

 

그림 2. 스타르로폴 지역 출토, 헬멧과 갑옷을 입은 스키타이 남성 전사

 

 

그림 3.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의 철제 갑옷의 부분. 장방형 판을 이어서 끈으로 엮어서 갑옷을 만든 것이다. 한국에서는 찰갑이라고 부른다.

 

 

스키타이 유적에서 기원전 7세기부터 발견되는 갑옷은 헤로도투스의 표현에 따르면 ‘물고기 비늘’처럼 생긴 것이다.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 인들이 물고기 비늘처럼 생긴 소매가 달린 화려한 외투를 입고 있는데, 무기의 일부라고 언급했다 Herodotus 7.61.

   하지만 아리안(Arrian)은 헤레도투스가 본 것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아니라 메디아인이라고 했다. 아리안은 자신의 저서 아나바시스에서 메디아 군사 장비 중의 일부인 갑옷은 스키타이 유목민들에게 빌린 것이라고 했다. 또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싸운 것은 스키타이 사람들이 기수와 말을 방어무기(보호구)로 적들로부터 잘 지켰기 때문이라고 했다(Arrian, Anabasis 3.13.).

 

이 이야기는 하기 싫지만 아리안의 아나바시스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작가인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의 구조, 형식,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아리안이 스키타이 철제 갑옷에 대한 견해는 근거가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17. 11:05 스키타이 무기

고대 유라시아 초원 지역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스키타이 궁수였다. 그들은 페르시아 궁전의 벽화에 스키타이 사람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군인들과 기타 여러민족의 군인들 허리춤에서 발견될 만큼 강력한 무기였다. 페르시아 궁전의 묘사된 고리투스는 대략 75~100cm 정도로 길지 않다. 흔히들 스키타이 활(the Scythian bow’ 이라고 불리는 활은 나무와 힘줄로 만들어진 것으로 두 가지 소재를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복합 활이라고 불리는데, 그리스에서는 스키티쿠스 아르쿠스(Scythicus arcus)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스키타이 활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은 고리투스 위로 튀어나온 구부러진 활의 끝이 돌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궁전묘사 뿐만 아니라 장식판의 스키타이 궁수들의 활도 끝이 구부러진 것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 1. 페르시아 궁전묘사, 고리투스

 

이 부분은 나무로 된 본체에 힘줄을 묶기 위한 장치인데, 이 부분 때문에 스키타이 활이 위대했다고 알려져 있다. 단순한 나무활이나 그냥 나무로 된 활에 힘줄을 뒤로 매단 것과는 달리 스키타이 활은 매우 강력했다. 때문에 스키타이 활을 당기기 위해서는 이 활이 없는 군대와 다른 훈련을 했다는 것은 다 아는 비밀이었고, 인접한 지역 지식인들은 이를 적어 놓았다.

 

그림 2. 쿨-오바 유적의 장식판, 스키타이 궁수

 

 

 페르시아 인들이 스키타이 궁수들이 수행한 훈련 때문에 그리스 군대를 막았다는 것을 아르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가 기록한 바 있다. 기원전 401년에 티그리스 강을 건너려는 그리스인들을 막은 것은 페르시아 궁수들이 강 반대편에서 티그리스 강을 향해 활을 쏘면서 좌절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물자료가 가장 잘 남아 있는 알타이의 무덤에서는 대체로 15~20개 가량의 화살이 한 무덤 안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파지리크 유적 2호에서는 279개의 화살이 한 통에서 발견되었다(루덴코 1953). 바르코바(2013)는 화살 쏘는 실험을 했다. 3분안에 화살 30개를 쏠 수 있고, 15분간 화살을 쏜다면 150개의 화살이 소비될 수 있다고 계산했다. 뭐 그러기 위해서는 15분간 쏠 수 있는 어깨의 힘이 필요하겠지만....

 

 스키타이 활은 기원전 4세기 이후 흉노에서 크게 개선되었다. 길이는 1.5m가 조금 넘었고, 당시 사용된 갑옷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나무로 만들던 활을 뼈나 뿔로된 판으로 보강했다. 활의 양쪽 끝에는 2개, 중앙에는 세 개를 덧대었는데, 접착제를 사용하거나 동물의 힘줄 혹은 자작나무 껍질로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활을 제작하는데 1년 이상이 걸린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합성 활은 큰 묶음으로 제작되었다(맥윈 1978).

 

활에 이용된 골판은 시베리아 투바의 아물루그 XXXI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기원후 2세기 유적으로 흉노시기의 유적이다.

 

그림 3. 아물루그 XXXI유적의 골판

 

참고문헌

E. McEwen, ‘Nomadic archery: some observations on composite bow design and construction’, Arts of the Eurasian Steppelands, ed. P. Denwood. London, 1978: 188–202.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16. 11:15 스키타이 무기

스키타이 사람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활과 화살이라는 점은 이미 여러 번 포스팅한 바 있다. 코카서스 산맥의 남쪽에 강력한 국가였던 우라루투도 결국 스키타이 사람들에 의해서 망했다. 테이시바이니 성벽에서는 무수히 많은 스키타이 화살이 발견되었다. 앗시리아 및 페르시아에서도 스키타이 고리투스(활과 화살을 함께 넣는 복합궁)는 궁전 벽을 장식하는 주요한 주제였다.

 

스키타이 인의 시조인 타르기타우스의 전설에 대해서 헤로도투스가 상기시켰다. 어떤 활이라도 구부릴 수 있고 스스로 띠를 맬 수 있으며, 허리띠를 찰 수 있는 자를 이 땅에 살게 하라는 것이다.

 

페르시아 궁전벽에 남아 있는 스키타이 ‘고리투스’는 헤로도투스가 명명한 용어이지만, 실제로 발견되는 예는 시베리아이다. 아르잔-2호에서는 주인공무덤인 5호묘에서 남성 주인공이 화려하게 장식된 활과 화살을 고리투스와 함께 가졌던 것이 발견되었다.

 

그림 1. 시베리아 투바 아르잔-2호의 고리투스, 기원전 7세기

 

흑해지역에서는 실제로 발견된 고리투스는 없고, 기원전 4세기 유적인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 확인된 고리투스를 감쌌던 껍데기만 남아 있다. 이 유적의 암포라 속에 스키타이 남성도 고리투스를 착용하고 있는 장면이 있어 대체적인 모습만 가늠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남성들이 고리투스를 찬 장면은 금으로 된 유물 속에서 자주 목격된다. 물론 기원전 7세기경 돌로 된 스키타이 전사들도 고리투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림 2. 기원전 4세기 체르토므리크 유적 출토 암포라 속 스키타이 남성

 

스키타이 화살촉은 날개가 두 개(양익형) 혹은 세 개(삼익형) 있는 소켓형 화살촉이다. 자루를 끼우는 부분이 안쪽으로 있어서 소켓용이라고 한다. 이러한 화살촉은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불리는 전 지역에서 나타난다.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로부터 흑해지역, 코카서스지역, 그리고 몽골과 더 동쪽에서도 확인된다.

 

러시아연구자들에 의하면 스키타이의 화살촉은 그 모양과 크기에 따라서 전투 유형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거대한 화살촉은 기병이 사용했다고 보았다. 무거운 화살은 천천히 날라가는데, 말에 타서 쏘게 되면, 화살의 속도를 증가시키고 상대를 더 공격하기 쉽게 된다는 것이다. 또 스키타이 화살촉 가운데는 아름답게 장식된 것들도 시베리아의 아르잔-2호와 파지리크 유적등에서 발견된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10. 09:15 고깔모자와 코트

 

 

스키타이 사람들의 복장 가운데 실물자료는 동부지역인 대부분 알타이에서 발견되었고, 서부지역에서는 간접적인 자료들(장식판이나 유물에 남아 있는 그림)로 알 수 있다. 남성들이 매우 편해 보이는 바지를 입는 것은 당연하다. 말을 타기 위해서는 튼튼한 바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바지는 유목민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알타이의 남성들은 긴 바지를 입은 채 매장되었지만, 여성들은 긴 치마를 입고 발견되었다. 그럼 여성들은 말을 타지 않았는가?

하지만 형질 인류학적으로 보았을 때 이른바 '라이더 콤플렉스' 라고 하는 현상이 주로 35세 이상의 남성 골격의 40%, 여성골격의 10%에서 확인된다고 한다. 주로 승마로 인해서 하퇴골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알타이의 스키타이 인골을 대상으로 한 결과다(스테파노바 2015).

  그렇다면 알타이의 여성들도 말을 탔고, 당연히 바지를 입었을 것이다.

 

 또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 여성들은 활을 쏘고 창을 던지고 직접전투에 참가했다.(Herodotus 4.114)  헤로도투스가 살았던 흑해 주변의 유적에서는 그리스 토기나 황금모자에 스키타이 여성이 종종묘사된다. 그들은 짧은 상의를 입고, 바지를 입고 칼과 활을 들고 싸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림 1.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에서 출토된 칼라프(모자)의 세부

 

 

그림 2. 그리스 토기의 스키타이 궁수(여성이라고 함)

 

아크 알라하-3 유적과 같은 치마가 발견된 중국 신강성의 수바쉬-3 유적에서는 모직으로 된 긴 바지를 여성미라들이 입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아마도 여성들은 TPO에 맞추어서 옷을 입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파지리크 유적의 2호에서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된 여성의 모피코트가 있었다(그림 3). 또 아크 알라하-3유적의 여성도 금박지로 장식된 매우 화려한 코트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여성미라 주변에 떨어져 있는 금박지가 썩어서 없어진 유기질제 코트의 장식품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그림 3. 파지리크 유적 2호 출토, 여성의 모피코트와 고깔모자

 

파지리크 유적의 2호 모피코트는 이란식 칸디스와 비교된다. 어깨가 매우 좁고 좁은 소매인데, 망토처럼 어깨에 걸쳐서 입는 스타일이다. 화려한 모피코트와 긴 치마는 아마도 생전에 의식용(의례, 축제)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Е.В. Степанова. 2015, Скифские сёдла и последствия верховой езды для лошади и всадника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сборник. 40,(스테파노바, 2015. 스키타이 시대 말과 기수를 위한 안장과 그 결과)

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 Костюм и текстиль пазырыкцев Алтая (IV-III вв. до н.э.).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 2005. 23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9. 09:15 고깔모자와 코트

 

시베리아에서 발견되는 외투 종류 가운데 모피가 아닌 펠트로 제작된 코트가 파지리크 유적의 3호에서 발견되었다. 3호는 기원전 5세기의 1호, 2호, 5호와는 달리 기원전 3세기로 이미 스키타이 문화는 없어지고, 흉노 시절에 해당하는 무덤이다.

 

모자가 달린 매우 부피가 큰 펠트로 만들어진 것인데, 옷 위에 착용할 수 있고, 고리투스를 덮을 수 있다. 후드는 탈부착 가능하다. 인접한 투바지역의 민족지 자료가운데 비슷한 옷이 비옷으로 사용되었다. 이 펠트로 된 레인코트는 카자흐스탄의 말 목동과 몽골과 투바에서도 20세기 초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그림 1. 파지리크 유적 3호의 펠트코트

 

무기를 덮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의복은 시베리아 남부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유목민들 사이에 매우 인기 있었다. 사냥이나 목축 뿐만 아니라 군사작전에도 사용된 기록이 남아 있다. ‘Strategikon’은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인 Maurice(582~602년)가 남겨 놓은 군사매뉴얼인데, 이 코트에 대한 기록이 있다. 스트라테기콘에 따르면 소매가 넓은 펠트로 된 외투 또는 후드가 달린 옷이 군사들에게 제공되어야 한다고 한다. 갑옷과 활을 덮을 수 있을 만큼 커서, 우천시 혹은 이슬로 축축해지면, 갑옷과 활을 덮어서 무장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언제라도 활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 갑옷은 펠트 코트로 가리면 그 빛이 적에게 멀리 보이지 않고, 또한 적의 화살로부터 보호하기 때문에 필요하기 위함이다.

 

아마도 이 비옷이 나온 3호 보다 이른 시점의 무덤에서도 비슷한 유물이 남아 있었을 수 있다. 이들 무덤에서는 알 수 없는 펠트조각들이 대량으로 나왔으나, 이미 형태를 알 수 없었다. 코트 형태가 아니라도 어떤 모습으로든 비오는 날에 대한 대비는 있었을 것이다. 

스키타이 활이 다른 유목민들 사이에서 매우 유명했고, 이 활을 만든 사람들은 잘 사용하고 보관하는 방법도 알았을 것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8. 09:15 고깔모자와 코트

 

 

기원전 5~4세기 스키타이 남성들의 복장이 실물로 남아 있는 지역은 알타이이다. 여밈이 없는 긴 셔츠와 바지 및 펠트로 된 스타킹이 발견되었다. 특히 펠트로 된 스타킹은 남녀노소가 모두 착용했다. 키의 여부에 관계 없이 무릎까지 오는 펠트 스타킹이다. 이 위에 부츠를 신었다. 대부분 무릎까지 오며, 가죽과 모피로 만들어졌다. 부츠의 종아리와 발가락을 따로 만들어 연결했다. 표트르 대제의 시베리안 컬렉션 기마궁수(그림 3)도 펠트 스타킹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림 1. 파지리크 유적에서 발견된 여성 펠트스타킹, 파지리크 2호

 

그림 2. 파지리크 유적 2호, 남성부츠

 

 

 

그림 3. 표트르 대제의 시베리안 콜렉션 기마궁수

 

반면에 흑해지역의 스키타이 남성들은 대신 가죽으로 된 부츠를 신고 있는데, 무릎까지 올라가지 않고 낮은 것이다. 장식판의 스키타이 남성들이 신고 있는데, 이들은 펠트로 된 스타킹은 신지 않았다.

 

그림 4. 쿨-오바 유적의 황금 항아리 속의 스키타이 남성

 

그림 5. 아파다나 궁전에서 스키타이 외교사절단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 아파다나 궁전에서 스키타이 외교사절단이 조공하는 장면이 있는데, 긴 옷과 펠트로 된 스타킹이 분명하게 표현되었다. 외교사절단이 들고 갈 만큼 펠트 스타킹은 중요한 특산품이다. 알타이 유적을 발굴한 루덴코와 폴로스막은 이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또 이들도 발목에 끈을 묶은 낮은 신발을 신고 있다. 궁전의 벽화에 있는 각 국의 사절단의 얼굴은 모두 서아시아인이기 때문에 얼굴의 형태는 참고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리스 유물에서 발견되는 스키타이 남성들은 맨발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덜 정확하다. 아마도 그리스 사람들이 표현될 때 대부분 얇은 옷 혹은 벗은 몸, 맨 발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5. 09:15 고깔모자와 코트

스키타이 사람들의 고깔모자를 찾아서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간접적인 자료(궁전 벽화, 토기)를 살펴보았다. 대개 인접한 국가들의 사람들은 스키타이인을 표시할 때 고깔모자를 쓴 채로 표시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하지만 실물자료가 발견되는 알타이에는 고깔모자(물론 하위 유형은 여러 가지이다) 외에 그냥 둥글고 귀를 덮는 흔히들 투구형 모자라고 부르는 자료가 알타이에서 발견되었다.

 

그림 1.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 2호분의 투구형 모자

 

가장 많이 인용되는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이 사람들을 묘사할 때 머리장식, 허리띠와 그 장식은 황금이라고 간략하게 묘사한 것과는 달리 페르시아 문헌에서는 3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사카하우마바르가(하오마(음료)를 마시는 사카), 사카티그락사우다(뾰족한 모자를 쓴 사카), 사카타이 파라드라야(바다 건너 사카족)이다. 그중에 헤로도투스가 언급한 아미르 스키타이는 사카하우마바르가와 같다(스테파노바, 판코바). 현재의 자료로 이들을 구분할 수는 없다.

 

특히 흑해지역의 자료는 유기물질은 거의 남겨져 있지 않고 알타이에서만 실물자료가 남아 있다. 이전에 포스팅 한 바와 같이 ‘왕의 장례치르는 방법’에 나오는 미라도 알타이에서 발견된다.

 

알타이의 쿠르간에서는 외투가 발견된다. 모피로 만든 것인데,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남성미라도 모피를 입고 매장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 남성은 바지와 모피코트 외에는 그 안에 상의는 입고 있지 않았다.

 

그림 2.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모피코트

 

그런데 흑해지역의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 출토된 은제 암포라는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주인공의 여성 무덤방에서 발견되었다. 그릇의 모양와 문양은 전체적으로 그리스 수입품으로 보이는데, 중간에는 스키타이 남성들이 말을 다루고 있는 장면이 함께 표현되었다.

그 중에 한 남성은 맨발에 바지를 입고 벗은 가슴 위에 모피 자켓을 입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그림 3).

 

그림 3. 체르토믈리크 유적의 은제 암포라 세부.

 

또 톨스타야 마길라 유적에서도 모피코트가 등장한다. 금으로된 가슴장식 혹은 목걸이에도 스키타이 남성들이 유목을 하는 장면이 가장 안쪽에 표시되었다. 그중에 가장 중앙에 있는 두 남성이 바지만 입고, 모피코트를 두고 서로 잡아 당기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그림 4. 톨스타야 유적의 가슴걸이(혹은 목걸이) 중 세부

 

알타이의 혹독한 기후를 생각한다면 모피코트는 당연하지만, 흑해지역의 자료는 좀 의외이다. 이제까지 살펴온 여러자료(특히 그리스 토기)에서 스키타이 남성들이 옷은 다 입었지만 종종 맨발로 표현되는데 맨발에 모피코트는 아이러니 하기 때문이다. 체르토믈리크 유적의 암포라에 스키타이 남성도 맨발이다. 그렇다고 스키타이 남성들이 다 맨발로 다니는가? 그렇지 않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