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스키타이 무덤의 벽과 바닥에 깔았고, 고대인의 옷의 주요 소재였던 펠트는 유목민의 발명품이었다. 기원전 3천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에 이에 대한 언급이 알려져 있다. 펠트는 양을 길들인 후부터 발명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소재는 시베리아를 포함한 중앙아시아에서 더 인기있는 소재였다.

 

펠트는 양털을 실로 만들어 직조하는 것이 아닌 높은 온도에서 압력을 가해서 만든 텍스틸이다. 봄에 자른 양털은 길기 때문에 실로 만들어서 직조하기 좋고, 가을에 자른 양털은 비교적 짧기 때문에 펠트 만들기 적합하다. 펠트는 양실로 만든 직조물보다 훨씬 마찰력에 강하다.

 

펠트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털을 납작하게 눕히도록 하기 위해서 두드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납작한 여러겹의 펠트를 여러 층으로 쌓고 이를 고정시키기 위해서 물이 필요하다. 물을 준 후에 카펫처럼 단단하게 말아서, 누르거나 발로 차거나 해서 롤을 단단하게 만든다.

 

펠트는 무덤 바닥의 깔개와 벽의 장식으로도 사용되었다. 바닥의 깔개로 사용된 것은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 그대로 나왔고, 벽의 장식용으로 사용된 문양이 화려한 것은 파지리크 유적 5호묘의 것이 유명하다. 이 외에도 사슴털로 채워진 안장의 쿠션, 안장의 덮개, 모자, 후드가 달린 상의, 스타킹, 말 머리 장식 등 매우 많은 용도로 사용되었다.

양모 뿐만 아니라 야크의 털도 이용되었는데, 파지리크 2호와 5호묘에서 출토되었다.

 

 

 

 

 

그림 1. 파지리크 유적의 5호 출토품, 펠트로 만들어진 벽장식 카페트. 카페트 속의 남성과 여성은 같은 민족이 아니어서 더 눈길을 끈다.

 

 

 

무덤만드는 기술에 이용된 나무를 결구하는 방법과 펠트를 제작하는 방법은 결국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되는 것이었다. 필자가 소개한 알타이의 유적 가운데 미라가 나오는 무덤은 극히 일부이고 파지리크 유적, 바샤다르, 투엑타 유적과 같이 화려하고 많은 부장품의 경우도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해발 2500m의 우코크 고원에서 발견된 아크 알라하 3, 베르흐 칼쥔II유적, 추야 계곡의 수많은 기원전 5세기 사람들은 대부분 무덤 부장품이 소박하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시베리아에서 무덤 속에 나무방을 지었다.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로부터 시작된 나무 다듬는 기술은 기원전 5세기 알타이의 유적까지 이어진다.

 

시베리아의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집과 관련된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스키타이 문화의 서쪽에서는 성벽을 아주 튼튼하게 쌓은 성곽 유적들이 드네프르강 주변에 빼곡하게 발견되었다. 필자가 이는 이미 포스팅 한 바 있다.

 

시베리아 스키타이 사람들은 헤로도투스가 말한 것처럼 집도 없었을까?

하지만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분지의 보야르 암각화 유적에서는 집을 그린 것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타가르 문화(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미누신스크 지역문화)에 해당하며, 가장 늦은 기원전 4세기 가량의 유적으로 알려졌다.

 

 

그림 1.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보야르 유적의 말라야 보야르 지접, 볼사야 보야르와 말라야 보야르 지점이 있다.

 

 

 

그림 2.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에서 출토된 직물들. 유적의 중심무덤방은 도굴된 상태여서 중요한 유물은 없었지만, 직물의 존재는 알려지게 되었다. 펠트 조각들이다. 

 

 

 

아마도 이들의 집은 일종의 ‘유르트’라고 불리는 텐트와 관련되었을 것이다. 유르트의 본질은 쉽게 조립되고 분해되는 것이다. 일종의 밴드로 연결된 격자벽을 둥글게 엮고 그 위에 반원형 모양의 지붕을 만들 수 있는 돔형 구조물이 있고, 이를 덮을 수 있는 펠트만 있다면 가능했을 것이다. 연구자들은 암각화 속의 집을 일종의 유르트 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유르트는 쉽게 분해 할 수 있고, 흔적은 남지 않는다.

 

스키타이 무덤속에서 발견되는 나무를 다듬는 기술을 아마도 당시에도 텐트의 골조를 만들던 기술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아크 알라하-1 유적의 무덤방에는 이미 사용되었던 것으로 나무를 재사용해서 무덤방을 만들었던 것이 발견된 적이 있다. 물론 펠트는 사방에 널려 있었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가장 이른 무덤인 아르잔-1호는 시베리아 투바 지역에 위치한다. 아르잔-1호에 대해서 소개한 지 오래되기는 했지만, 통나무 6000개 이상을 소비한 무덤에 대한 강열한 인상은 남아 있을 것이다.

 

나무를 이용한 무덤방의 전통은 투바에서 아르잔-1호와 아르잔-2호로 이어지고, 알타이의 무덤에서도 발견된다. 희한하게도 기원전 5세기 투바에서는 무덤이 발견되지만 나무방의 전통은 알려지지 않았다. 대신에 알타이의 해발 1500m이상 유적들에서 확인되었다.

 

아르잔-2호는 하나의 봉분 아래에 여러 개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인데, 그 중에서 5호묘에 나무방을 2겹으로 만든 것이 발견되었다. 땅을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을 넣도록 되어 있다. 구덩이의 크기는 나무로 된 무덤방 보다 살짝 크기 때문에 나무무덤방은 미리 재단을 해서 구덩이에 넣어야 했다. 나무가 겹쳐지는 끝에는 오목하게 홈을 파서 결구가 되도록 했다. 그런데 미리 재단을 하는 아르잔-2호의 무덤방 만드는 방법은 이른 시기의 아르잔-1호의 중심무덤방에서도 보이는 것이었다. 이 부분도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 2호와 5호에서도 미리 재단을 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알타이의 무덤에서는 무덤방 위에 자작나무 껍질을 넓게 잘라서 펴둔 것이 발견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는 가을과 겨울에 벗기지 못하고 봄 혹은 여름에 버낄 수 있는 것이다. 또 파지리크 유적, 바샤다르 유적 등에서는 무덤방을 덮었던 이끼 더미 속에서 노란색 꽃의 존재를 발견했다. 이들은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여름부터 준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덤방을 덮었던 자작나무 껍데기는 20세기 후반까지도 지역 유목민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유르트’라고 불리는 중앙아시아 유목민족의 집이다.

 

 

그림 1. 기원전 5~4세기 시베리아의 암각화, 보야르 암각화 유적, 말라야 보야르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2. 10. 09:30 스키타이 동물장식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는 지역은 흑해지역부터 시베리아를 거쳐 몽골 및 중국동북지역까지 넓은 지역에 퍼져 있다. 이는 그간 고고학적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시베리아가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지로 주목된 것은 아르잔-1호에서 출토된 원형의 맹수장식 때문이다. 이 문양은 기원전 9세기 이후부터 스키타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과연 시베리아가 스키타이의 땅이었을까? 하는 의심을 가진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스키타이 문화에 대해서 처음 기록한 헤로도투스는 이런 문구를 기록했다.

'그 나라(스키타이) 의 북쪽에는 계속해서 눈이 내린다... 이 대륙의 북쪽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흑해북안의 올리비아에 살던 헤로도투스가 어떻게 이를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흑해북안과는 다른 지역이다. 물론 그가 살던 기원전 4세기 전후의 기후상황도 살펴야 할 것이다.

 

시베리아는 드넓고 위도에 따라서 자랄 수 있는 식물의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기후대가 형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산림스텦지역과 초원스텦지역에 유적이 남아 있다. 시베리아에서 유적들이 발견되는 강은 오브강, 예니세이 강, 레나 강이 가장 큰 강이며, 이 세 개의 강이 체계의 근원이다. 이 강에서 뻗어져나간 지류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리스 역사가는 ‘이 나라가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크고 많은 강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언급하고 있다.

 

17세기에 러시아의 벌목꾼, 광부, 정착민들이 이 지역에 들어오기 전까지 이곳에 살던 사람은 목축, 수렵채집, 어로생활을 유지했다. 그만큼 자연환경이 풍족했기 떄문이다. 17세기에서 20세기 사이에 3600만명의 사람들이 지역의 자원을 착취하기 위해 수용소에 투옥되거나 내부 추방 또는 재정착을 위해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즉 러시아는 시베리아를 식민지로 개척했다.

1989년 조사 당시에 26개의 민족집단이 거주 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곧 멸종된 운명이라고 여겨졌다. 이들의 수가 많이 준 이유는 질병 때문이다.

 

 

 

그림 1.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러시아 민족학박물관, 17세기~20세기 초반에 로마노프 왕조에서 보낸 사람들이 모은 각 민족의 자료는 이곳(러시아민족학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림 2. 야생 순록 사냥을 하는 민족

 

 

 

헤로도투스(4-47)는 ‘그들(스키타이)의 나라는 편평하고 풀이 무성하며 물이 잘 흐르고 강이 흐른다’고 묘사했다.

 

산림스텦지역 이남은 초원스텦지역으로 사냥이나 목축에 완벽하게 적합하다.

스키타이 사람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목축유목주의에 기초한 독특한 경제와 생활 방식을 발전시킨 것은 광대한 내륙아시아의 개방된 공간에서이다. 중앙아시아 서쪽에는 건조한 스텝지역, 신장 남부는 모래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고, 서쪽은 코카서스 산맥 및 흑해와 숲을 경계로 한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전사들은 ‘비늘’갑옷을 입고 있었다. ‘비늘’이라고 불리는 부분은 길이 2~5cm가량의 청동, 철, 뿔 등 다양한 소재로 제작되었다. 특수하게 그을린 소가죽 조끼 위에 작은 ‘비늘’을 붙여서 만드는데, 금속바늘을 이용해서 꿰매서 만들었다. 가죽조끼에 붙는 부분은 편평하고 바깥면은 둥글게 처리된 것이다. 보통 비늘 조각의 2/3정도가 겹쳐지게 꿰맸는데, 3중 혹은 4중으로 겹쳐진 것도 있다.

 

철제로 만들어진 것이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부터 확인되었고, 기원전 5세기 이후의 유적에서는 매우 흔하게 발견된다. 수백 개의 스키타이 무덤에서 갑옷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서, 권력자 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활로부터 부상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었다. 몇 몇 유적에서는 삼익형 화살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갑옷이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이후에는 가슴에 그리스 사람얼굴을 붙이는 것도 유행이었다. 메두사고르곤 이라고 생각하는 신화 속의 인물이 대표적이다. 그녀와 관련된 신화(상대를 돌로 만드는)를 생각하면, 보호와 관련된 부적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림 1. 기원전 4세기 스키타이 갑옷

 

이 유행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25. 11:33 스키타이 무기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요인인 있었지만 스키타이 사람들의 방어무기인 비늘 갑옷으로 말과 기수를 잘 보호했기 때문이라고 아리안(Arrian)이 아나바시스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림 1. 스키타이 문화의 비늘갑옷, 기원전 5~4세기

 

중무장을 한 전사는 말을 타고 다닌 기마병이다. 말은 아마도 유목민들이 이용하는 동물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다목적이었을 것이다. 타고 다니는 용도 뿐만 아니라 우유, 고기, 가죽을 제공했다. 말을 타고 다니는 지역에서 문화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속도는 농경사회와는 차원이 다르다. 말을 타고 다니던 유목민의 기마병과 농경사회의 전사가 싸우는 것은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에 대한 정보는 다행히 무덤속에서 얻을 수 있다. 스키타이(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무덤속에 사람과 말을 함께 부장했기 때문이다. 많은 동물을 숭배했지만(동물장식) 마지막까지도 함께 가는 동물은 말이었다. 아마도 말을 무덤에 넣는 것은 사후세계에도 말이 필요하다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안장은 스키타이 문화 이전에는 발견된 적이 없는데, 중요한 발명품이었고, 유목민들이 세계 문명발전에 기여한 중요한 공헌 중에 하나로 여겨진다.

특히 알타이의 파지리크 유적에서는 다양한 안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림 2. 기원전 5세기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의 안장과 말

 

 

 

하지만 안장이 없는 말도 무덤 속에서 많이 발견된다. 재갈과 재갈멈치, 굴레장식등은 있지만 안장이 없는 유적도 수를 헤어릴 수 없다. 예를 들어 파지리크 유적과 같이 시신을 미라 처리한 아크 알라하 3유적이 대표적이다.

 

루덴코는 자신이 발굴한 파지리크 유적의 말도 꼼꼼히 조사했다. 파지리크 유적 아래에는 냉동고와 같은 거대한 얼음층이 형성되어서 말의 상태가 매우 양호하게 남아 있었다. 지금도 그 중에 한 마리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안장이 있는 말들은 영양상태가 좋았다고 루덴코는 기록했다. 안장을 지고 다녔던 말들은 1년 내내 목초지에서 스스로 먹이를 찾아다녔던 말과는 달리 보살핌을 잘 받은 것으로 여겨졌다. 말굽에 기근 고리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18. 11:05 스키타이 무기

 

기원전 일천년기를 살았던 스키타이 사람들은 활과 화살만으로 멀리서 자신을 방어했을까?

 

하지만 이제까지 무덤에서 나온 무기는 활과 화살 이외에도 검과 투부(전투용 도끼) 등이 있다. 특히 스키타이 검은 짧은데 대체로 60cm 내외로 아키나케스 라고 불린다. 실제 유물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석인상에도 투부와 검이 허리에 묘사되었는데, 의례용이다. 기원전 7세기 코카서스 북쪽의 켈레르메스 유적과 시베리아의 투바 아르잔-2호에서도 의식용 투부가 발견되었다. 특히 투부는 근접거리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용도로, 기원전 일천년기를 살았던 유목민이 모두 사용하지 않았다. 아르잔-2호 가운데에는 투부로 두개골에 치명상을 입은 여성궁수가 발견되었다.

 

그림 1. 투바 아르잔-2호의 공격용 도끼의 머리

멀리서 발사되는 화살과 창, 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장비는 헬멧과 갑옷이다.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청동헬멧과 철제 갑옷(찰갑)이 실제로 발견되었다. 스키타이 석인상 중에는 머리에 헬멧과 갑옷을 입은 것도 발견되었다. 스텦 초원에서는 흔한 물건이었지만, 그리스의 지식인들에게는 특별했던 것 같다.

 

그림 2. 스타르로폴 지역 출토, 헬멧과 갑옷을 입은 스키타이 남성 전사

 

 

그림 3.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의 철제 갑옷의 부분. 장방형 판을 이어서 끈으로 엮어서 갑옷을 만든 것이다. 한국에서는 찰갑이라고 부른다.

 

 

스키타이 유적에서 기원전 7세기부터 발견되는 갑옷은 헤로도투스의 표현에 따르면 ‘물고기 비늘’처럼 생긴 것이다.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 인들이 물고기 비늘처럼 생긴 소매가 달린 화려한 외투를 입고 있는데, 무기의 일부라고 언급했다 Herodotus 7.61.

   하지만 아리안(Arrian)은 헤레도투스가 본 것은 페르시아 사람들이 아니라 메디아인이라고 했다. 아리안은 자신의 저서 아나바시스에서 메디아 군사 장비 중의 일부인 갑옷은 스키타이 유목민들에게 빌린 것이라고 했다. 또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싸운 것은 스키타이 사람들이 기수와 말을 방어무기(보호구)로 적들로부터 잘 지켰기 때문이라고 했다(Arrian, Anabasis 3.13.).

 

이 이야기는 하기 싫지만 아리안의 아나바시스는 기원전 4세기 그리스 작가인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의 구조, 형식,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아리안이 스키타이 철제 갑옷에 대한 견해는 근거가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17. 11:05 스키타이 무기

고대 유라시아 초원 지역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스키타이 궁수였다. 그들은 페르시아 궁전의 벽화에 스키타이 사람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군인들과 기타 여러민족의 군인들 허리춤에서 발견될 만큼 강력한 무기였다. 페르시아 궁전의 묘사된 고리투스는 대략 75~100cm 정도로 길지 않다. 흔히들 스키타이 활(the Scythian bow’ 이라고 불리는 활은 나무와 힘줄로 만들어진 것으로 두 가지 소재를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복합 활이라고 불리는데, 그리스에서는 스키티쿠스 아르쿠스(Scythicus arcus)라고 불리는 존재였다. 스키타이 활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은 고리투스 위로 튀어나온 구부러진 활의 끝이 돌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궁전묘사 뿐만 아니라 장식판의 스키타이 궁수들의 활도 끝이 구부러진 것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 1. 페르시아 궁전묘사, 고리투스

 

이 부분은 나무로 된 본체에 힘줄을 묶기 위한 장치인데, 이 부분 때문에 스키타이 활이 위대했다고 알려져 있다. 단순한 나무활이나 그냥 나무로 된 활에 힘줄을 뒤로 매단 것과는 달리 스키타이 활은 매우 강력했다. 때문에 스키타이 활을 당기기 위해서는 이 활이 없는 군대와 다른 훈련을 했다는 것은 다 아는 비밀이었고, 인접한 지역 지식인들은 이를 적어 놓았다.

 

그림 2. 쿨-오바 유적의 장식판, 스키타이 궁수

 

 

 페르시아 인들이 스키타이 궁수들이 수행한 훈련 때문에 그리스 군대를 막았다는 것을 아르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가 기록한 바 있다. 기원전 401년에 티그리스 강을 건너려는 그리스인들을 막은 것은 페르시아 궁수들이 강 반대편에서 티그리스 강을 향해 활을 쏘면서 좌절된 것으로 알려졌다.

 실물자료가 가장 잘 남아 있는 알타이의 무덤에서는 대체로 15~20개 가량의 화살이 한 무덤 안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파지리크 유적 2호에서는 279개의 화살이 한 통에서 발견되었다(루덴코 1953). 바르코바(2013)는 화살 쏘는 실험을 했다. 3분안에 화살 30개를 쏠 수 있고, 15분간 화살을 쏜다면 150개의 화살이 소비될 수 있다고 계산했다. 뭐 그러기 위해서는 15분간 쏠 수 있는 어깨의 힘이 필요하겠지만....

 

 스키타이 활은 기원전 4세기 이후 흉노에서 크게 개선되었다. 길이는 1.5m가 조금 넘었고, 당시 사용된 갑옷을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졌다. 나무로 만들던 활을 뼈나 뿔로된 판으로 보강했다. 활의 양쪽 끝에는 2개, 중앙에는 세 개를 덧대었는데, 접착제를 사용하거나 동물의 힘줄 혹은 자작나무 껍질로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활을 제작하는데 1년 이상이 걸린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합성 활은 큰 묶음으로 제작되었다(맥윈 1978).

 

활에 이용된 골판은 시베리아 투바의 아물루그 XXXI 유적에서 발굴되었다. 기원후 2세기 유적으로 흉노시기의 유적이다.

 

그림 3. 아물루그 XXXI유적의 골판

 

참고문헌

E. McEwen, ‘Nomadic archery: some observations on composite bow design and construction’, Arts of the Eurasian Steppelands, ed. P. Denwood. London, 1978: 188–202.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16. 11:15 스키타이 무기

스키타이 사람들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활과 화살이라는 점은 이미 여러 번 포스팅한 바 있다. 코카서스 산맥의 남쪽에 강력한 국가였던 우라루투도 결국 스키타이 사람들에 의해서 망했다. 테이시바이니 성벽에서는 무수히 많은 스키타이 화살이 발견되었다. 앗시리아 및 페르시아에서도 스키타이 고리투스(활과 화살을 함께 넣는 복합궁)는 궁전 벽을 장식하는 주요한 주제였다.

 

스키타이 인의 시조인 타르기타우스의 전설에 대해서 헤로도투스가 상기시켰다. 어떤 활이라도 구부릴 수 있고 스스로 띠를 맬 수 있으며, 허리띠를 찰 수 있는 자를 이 땅에 살게 하라는 것이다.

 

페르시아 궁전벽에 남아 있는 스키타이 ‘고리투스’는 헤로도투스가 명명한 용어이지만, 실제로 발견되는 예는 시베리아이다. 아르잔-2호에서는 주인공무덤인 5호묘에서 남성 주인공이 화려하게 장식된 활과 화살을 고리투스와 함께 가졌던 것이 발견되었다.

 

그림 1. 시베리아 투바 아르잔-2호의 고리투스, 기원전 7세기

 

흑해지역에서는 실제로 발견된 고리투스는 없고, 기원전 4세기 유적인 체르토믈리크 유적에서 확인된 고리투스를 감쌌던 껍데기만 남아 있다. 이 유적의 암포라 속에 스키타이 남성도 고리투스를 착용하고 있는 장면이 있어 대체적인 모습만 가늠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남성들이 고리투스를 찬 장면은 금으로 된 유물 속에서 자주 목격된다. 물론 기원전 7세기경 돌로 된 스키타이 전사들도 고리투스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림 2. 기원전 4세기 체르토므리크 유적 출토 암포라 속 스키타이 남성

 

스키타이 화살촉은 날개가 두 개(양익형) 혹은 세 개(삼익형) 있는 소켓형 화살촉이다. 자루를 끼우는 부분이 안쪽으로 있어서 소켓용이라고 한다. 이러한 화살촉은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불리는 전 지역에서 나타난다.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로부터 흑해지역, 코카서스지역, 그리고 몽골과 더 동쪽에서도 확인된다.

 

러시아연구자들에 의하면 스키타이의 화살촉은 그 모양과 크기에 따라서 전투 유형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거대한 화살촉은 기병이 사용했다고 보았다. 무거운 화살은 천천히 날라가는데, 말에 타서 쏘게 되면, 화살의 속도를 증가시키고 상대를 더 공격하기 쉽게 된다는 것이다. 또 스키타이 화살촉 가운데는 아름답게 장식된 것들도 시베리아의 아르잔-2호와 파지리크 유적등에서 발견된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2. 11. 10. 09:15 고깔모자와 코트

 

 

스키타이 사람들의 복장 가운데 실물자료는 동부지역인 대부분 알타이에서 발견되었고, 서부지역에서는 간접적인 자료들(장식판이나 유물에 남아 있는 그림)로 알 수 있다. 남성들이 매우 편해 보이는 바지를 입는 것은 당연하다. 말을 타기 위해서는 튼튼한 바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바지는 유목민의 발명품이라고 주장한다.

 

 알타이의 남성들은 긴 바지를 입은 채 매장되었지만, 여성들은 긴 치마를 입고 발견되었다. 그럼 여성들은 말을 타지 않았는가?

하지만 형질 인류학적으로 보았을 때 이른바 '라이더 콤플렉스' 라고 하는 현상이 주로 35세 이상의 남성 골격의 40%, 여성골격의 10%에서 확인된다고 한다. 주로 승마로 인해서 하퇴골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알타이의 스키타이 인골을 대상으로 한 결과다(스테파노바 2015).

  그렇다면 알타이의 여성들도 말을 탔고, 당연히 바지를 입었을 것이다.

 

 또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 여성들은 활을 쏘고 창을 던지고 직접전투에 참가했다.(Herodotus 4.114)  헤로도투스가 살았던 흑해 주변의 유적에서는 그리스 토기나 황금모자에 스키타이 여성이 종종묘사된다. 그들은 짧은 상의를 입고, 바지를 입고 칼과 활을 들고 싸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림 1.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에서 출토된 칼라프(모자)의 세부

 

 

그림 2. 그리스 토기의 스키타이 궁수(여성이라고 함)

 

아크 알라하-3 유적과 같은 치마가 발견된 중국 신강성의 수바쉬-3 유적에서는 모직으로 된 긴 바지를 여성미라들이 입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아마도 여성들은 TPO에 맞추어서 옷을 입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파지리크 유적의 2호에서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된 여성의 모피코트가 있었다(그림 3). 또 아크 알라하-3유적의 여성도 금박지로 장식된 매우 화려한 코트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여성미라 주변에 떨어져 있는 금박지가 썩어서 없어진 유기질제 코트의 장식품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그림 3. 파지리크 유적 2호 출토, 여성의 모피코트와 고깔모자

 

파지리크 유적의 2호 모피코트는 이란식 칸디스와 비교된다. 어깨가 매우 좁고 좁은 소매인데, 망토처럼 어깨에 걸쳐서 입는 스타일이다. 화려한 모피코트와 긴 치마는 아마도 생전에 의식용(의례, 축제)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Е.В. Степанова. 2015, Скифские сёдла и последствия верховой езды для лошади и всадника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Археологический сборник. 40,(스테파노바, 2015. 스키타이 시대 말과 기수를 위한 안장과 그 결과)

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 Костюм и текстиль пазырыкцев Алтая (IV-III вв. до н.э.).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 2005. 23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