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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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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3. 7. 19:32 실크로드, 교역의 역사

https://blog.naver.com/eastsearoad/223376120238

 

실크로드, 교역의 역사

실크로드 라는 용어는 19세기 독일 지리학자(리히트호펜)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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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4. 2. 28. 11:23 카테고리 없음

 

오랫동안 이곳을 방치했습니다.

원래 네이버에서 블로그를 시작했지만, 당시에 네이버가 망조가 든 느낌이 확실해서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다음으로 이사해서 티스토리에서 블로그를 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또 바뀌어서, 네이버, 다음 모두....

 

차라리 이용자가 많은 네이버가 더 낳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티스토리는 글 관리하기(꾸미기 등)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저의 네이버 블로그를 살리고자 합니다.

(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물론 티스토리에도 지속적으로 퍼담을 생각입니다.

주제도 좀 바꾸고자 합니다.

많이들 와 주세요!

 

김재윤 드림

https://blog.naver.com/eastsearoad/223367621540

 

실크로드....

실크로드의 역사 실크로드라는 용어는 지극히 서양사적인 입장에서 사용된 단어이다. 19세기 말 독일의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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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아르메니아의 국립박물관은 역시나 광장에 위치한다. 광장과 박물관은 대부분의 유라시아 국가에서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도 국립역사박물관이 위치하고 있고, 블라디보스톡에도 중앙광장에 연해주주립박물관이 있다. 중국의 국가박물관도 광장에 있다.

조지아의 국립박물관도 광장과 매우 인접한 곳에 위치한다.

 

 

그림 1. 아름다운 아르메니아 예레반의 광장

 

그림 2. 예레반 광장 앞의 박물관

 

아르메니아는 박물관에 큰 관심이 없었다. 박물관 관리도 부실 한 편이었다. 물론 상대적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조지아는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박물관도 매우 관리를 많이 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부분은 현대사 혹은 현대정치와 관련이 많은 듯 했다. 아르메니아는 옆의 나라인 아제르바이잔, 튀르키예와 매우 사이가 않좋다. 아제르바이잔과는 아직도 분쟁(혹은 전쟁)중이고, 튀르키예와도 마찬가지이다. 아마도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 기독교국가, 그리고 자신들의 성지인 아라라트(대홍수 끝에 노아의 방주가 정박했다는 곳)를 빼앗다는 것 때문에 이슬람 국가들과 등지고 있는 것이었다. 덕분에 자신의 고대역사 연구도 크게 진전되지 못했다. 앗시리아와 견줄 만큼 강성했다고 하지만 우라르투의 이후 역사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지지 못했다.

 

그림 3. 예레반의 예레부니 성곽에서 보이는 아라라트, 눈으로는 이것보다는 잘 보였다.

 

반면에 조지아는 러시아에서 탈출하는데 힘쓴다. 아르메니아와는 달리 러시아말을 알아도 아는척 하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 다 러시아말을 안다. 국가명도 그루지아에서 조지아로 변경하는 것 만 봐도 그렇다. 박물관에도 이런 점들이 녹아 있다.

 

분명히 스키타이 문화의 청동 화살촉들이 Trell 유적에서 출토된 것으로 표시되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없다. 대신에 Cochian culture 문화로 설명하고 있다. 이 문화는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까지 지속된 문화로 설명한다. 특정 고고학문화가 시대를 막론하고 지속되었다고 하는 것은 좀 억지 스럽다. 특히 기원전 700-400년 사이는 Colchis 라고 조지아의 해안(흑해)가 따라서 문화가 번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앞에서 말한 유적은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주로 이 문화는 남쪽과 관련시켜서 이야기 하지 코카서스 산을 넘지 않았다.

 

왜 이런 현상이 있을까? 라는 질문에 다다르게 되었을 때, 박물관 가장 위층에서 답을 찾았다. 러시아 볼셰비키들의 만행을 전시하고 있었다. 심지어 기차칸 까지 떼어내어서 전시중이었다. 그래서 알았다. 왜 조지아 사람들이 스탈린을 숨기고 싶어하는지.

 

 

 

너무 당연한 것일까? 잘은 모르겠다.

조지아 대통령궁전의 화려함과 그와 관련된 비리도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와중에 들을 수 있었다.

 

아무튼 코카서스 남쪽까지 스키타이 문화의 영역으로 하기에는 너무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사실과 스키타이 문화 보다 청동기시대에 더 뚜렷하게 코카서스 북쪽과 닮았다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아마도 북방인들은 남방인들을 막기 위한 완충제 역할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스스로 그렇게 자초하고 있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또 그럴 것이다.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권(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에서 가장 이른 유적인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재지(스키타이 문화)의 유물 뿐만 아니라 외국(고대 이란과 그리스) 유물, 그리고 스키타이 귀족이 주문해서 생산한 유물이 나온다. 주문생산한 유물은 은제거울과 철제검이 있다.

 

은제거울에는 금판에 문양을 새겨서 접합했고, 철제검은 손잡이와 검집은 금으로 입히고 화려한 동물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철제검의 손잡이와 검집 문양은 두 사람이 나무를 마주보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 문양은 코카서스 남쪽의 고대 우라르투 왕(사르두우리 ii, 아르기쉬치 I)의 투구에 나온다. 또 반인반수도 고대 우라르투 왕의 의자를 장식하던 문양과 같다. 토프라흐-칼레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이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전시된 바 있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의 검집 문양 중 일부(거의 유사한 유물이 멜구노프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그림 2. 켈레르메스 유적의 검집 문양 중 일부 2

 

그림 3. 우라르투 왕의 투구

 

이러한 정황들 때문에 스키타이 문화권에 우라르투를 포함시켜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만약에 포함시킨다면, 우라르투 북쪽의 현재는 조지아 땅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가 매우 고민되었다. 여기에는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를 현지방문해서 사정을 알아보고, 결론을 내리고자 했다.

 

우라르투는 우라르투이고, 조지아는....현대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스키타이 문화권의 판단여부도 불분명하다는 결론. 우라르투는 역시 앗시리아와 북방의 스키타이 문화권을 연결 혹은 방어하던  역할을 했다. 

 

우라르투 이후의 앗시리아와 페르시아 문화가 이곳을 점령해서, 자기 색깔을 찾지 못했다. 또 그 이후에는 아마도 기독교가 밀려오면서 상황은 더 복잡해졌을 것이다. 현대 아르메니아의 적은 역시나 이슬람 문화이고, 조지아의 적은 러시아다.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는 몽골 국립박물관과 새로이 생긴 칭기스칸 국립박물관이 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칭기스칸 박물관에서 각 대학교 고고학 교수들이 그간 발굴한 유물을 싹 걷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칭기스킨 박물관에는 선사와 고대 유물은 그렇게 많이 전시되어 있지 않았다.

 

필자가 느끼기에는 그렇지만, 또 다른 입장에서 보면 그만하면 많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암튼 선사시대 보다는 흉노제국(기원전 4세기 이후)부터의 유물이 많은 편이다.

선사시대 유물은(흉노 이전) 아직 몽골 국립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칭기스칸 국립박물관은 칭기스칸이 제국을 세우기 전과 후로 나눠져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몽골인들은 칭기스칸의 뿌리를 흉노로부터 찾고 있다. 필자를 도와준 몽골학생이 말해준 바에 따르면 00비사에서도 칭기스칸이 자신의 뿌리를 흉노로 부터라고 하고 있다.

그리고 이 박물관에서는 사진찍기금지이다. 흉노이전에는 그렇게 살벌하지 않았지만 흉노 이후부터는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스마트폰 든 외국인들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몽골국립박물관에는 구석기시대부터 현대 몽골까지 골고루 다루고 있다. 아마도 칭기스칸 국립박물관은 현재 몽골 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전 국가에 불고 있는 자국 중심의 역사강조의 열풍일 것이다.

 

몽골국립박물관은 소련이었거나, 그 영향을 많이 받은 나라들처럼 수도의 중앙광장에 위치하고 있다. 옛 소비에트 건물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고, 전시도 비슷한 기법이다. 보기에는 커 보이지 않지만, 공간에 비해서 유물을 많이 전시하고 있다(러시아 계단이라고 불리는 1.5층이 1 층이 되는 것도 그대로이다).

반면에 칭기스칸 국립박물관은 아주 현대식 건물이다(사실 중국국가박물관이 떠올랐다. 필자가 받은 개인적인 느낌이다). 두 박물관은 불과 몇 m떨어져 있다. 참고하시면 좋겠다.

 

그림 1. 칭기스칸 국립박물관(몽골국립박물관의 외관은 사진이 없다..)

 

그림 2.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의 몽골 유물. 알타이 서부.

 

필자가 궁금했던 시기는 스키타이 문화 및 그 이전이다. 칭기스칸박물관에는 몇 몇 사슴돌 말고는 아예 없었고, 몽골국립박물관에는 예전에 필자가 확보한 자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몽골에서 크게 연구가 되지 않았거나 혹은 스키타이 문화 이전은 관심이 없다고 말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앞으로 몽골 연구자들이 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다.

 

 필자의 관심도는 13년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아졌고, 당장 논문도 적어야 한다. 책상위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머릿속에 장착되었다. (그걸 가서 뵈야 아냐고 욕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절대로 책상 위에서는 얻을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렇게 욕하는 사람들은 아마 절대로 모를 그런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 설명해 줄 필요도 없다. 설명해 줘도 모를것을 뭐하러 하나..)

 

지금은 아르메니아인데, 마음이 급하다. 할 것이 너무 많다. 내일은 조지아로 넘어가는데, 어서 빨리 가서 보고, 한국가서 집중해서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

 

 

김재윤. 아르메니아 예레반에서

 

 

 

 

 

posted by 김재윤23
2023. 8. 9. 14:14 카테고리 없음

 

 

지난번에 포스팅 한 국회도서관에서 요청한 금주의 서평이 출판되었습니다.

 

이 요청덕분에 책의 내용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생각과 아이디어도 얻었습니다.

책의 저자 생각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여성과 남성을 구분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저자의 입장입니다만. 아마도 그녀가 그런 입장인 것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남성과 여성은 자연의 부산물로써 다른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앞의 포스팅에서 밝혀둔 대로입니다.

 

오늘 포스팅은 내용은 없지만, 좀 더 예쁘게 포장된 글을 읽는 것이 편할 듯 해서 올립니다. 여러 가지로 적을 포스팅들이 있지만, 왠지 선뜻 손이 가지 않네요...

 

 

(url: https://www.nanet.go.kr/datasearch/commant/selectWeekCommantList.do)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2023. 7. 23. 10:10 카테고리 없음

 

국회도서관에서 서평을 작성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서 작성한 것이다.

책의 제목은 파뭍힌 여성이다.

 

 

 

프랑스 선사학자인 마릴렌 파투-마티스가 쓴 책이 국내에 번역되었다. 고고학자료를 통해서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불편한 시각을 비판한 책이다. 선사자료 뿐만 아니라 프랑스 혁명, 그 이후까지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고, 20세기 이후 여성이 투표권과 노동권을 획득하게 되는 긴 여정을 다루고 있다.

 

필자가 서평 말미에 밝혔지만 이 선사학자의 시각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지만, 동의하지않는 부분도 있다. 남성과 여성의 개념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는 부분이다. 필자(김재윤)는 남성과 여성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확신한다.

 

프랑스에서 여권 신장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던 이유는 아마도 프랑스 혁명으로 자유를 찾은 사람들은 남성들이었기 때문이다. 잘 아시다시피 서구권에서 여성이 투표권과 노동권을 찾은 것은 20세기 들어와서 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서구권에서 여성들의 투쟁이 먼저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부분까지 필자가 서평에서 밝힐 수 없었기에 블로그를 통해서 입장을 정리한다.

 

아래는 서평의 내용이다.

 

마릴렌 파투-마티스는 구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고고학 자료에서 때로는 역사적 사실에서 ‘여성의 존재’를 찾아서 남성 중심의 사회적 선입관을 반박했다. 그녀는 선사학 전공자로서 네안데르탈인 연구자로서 선사시대 물질 자료 뿐만 아니라 고대 및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와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더 기울어진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통찰했다. 서구권에서 여성이 투표권과 노동권을 획득하게 되는 20세기 이후까지 긴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녀는 ‘선사학’의 태동이 서구에서 여성의 투쟁이 시작된 시점과 거의 비슷하다는데 주목했다. 선사학이 활발하게 연구된 것은 20세기 들어와서 이지만 그 뿌리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있다. 엥겔스는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에서 인간사회 최초의 ‘가정’은 가족이 아닌 ‘모계’사회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본문 뒤 에필로그의 마무리에서 ‘이제 가부장제도는 다른 체재로 대체되어야 한다. 이제 남녀가 그것을 만들일 만 남아 있다’는 소견으로 자신의 생각이 선사학의 태동을 이끌어 낸 선학들과 맞닿아 있음을 밝혔다.

 

3장과 4장에서는 선사시대 고고학 자료를 사회적 맥락에서 읽어내고 있다. 1974년 아프리카 올드완 계곡에서 발굴된 ‘루시’라고 잘 알려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아파렌시스)‘의 인류화석은 ’인류의 할머니‘, ’아프리카의 이브’ 라는 별명이 있었다. 2000년대 선사학에 도입된 DNA분석법으로 생긴 ‘미토콘드리아 이브’도 결국은 파기되었다. 아프리카의 이브와 같은 맥락으로 남성 중심적 사고관에 젖어 있는 연구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녀는 선사시대 여성의 자리를 바로 찾기 위해서는 실제 존재한 것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상상 혹은 가설이 아닌 실제 유물, 사람 뼈, 혹은 후기구석기시대 예술가 들이 남겨놓은 여성의 이미지를 근거로 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후기구석기시대 동굴에 그려진 채색 벽화 혹은 새긴 암각화, 여성형상물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여성형상물은 구석기시대 동굴벽화 보다 더 이른 시점에 발생한 3만 5천년 전의 후기 구석기시대 예술품은 19세기 말 발견되는 그 순간부터 ‘부도덕한 비너스’라는 이름이 붙여져서 남성중심적이고 서구중심적인 시각으로 연구되었다. 20세기 초 로셀에서 발견된 ‘뿔을 든 비너스’로 불린 유물은 19세기 내내 유럽의 주요국가에서 논쟁이 되었던 특히 흑인여성이 ‘열등한 종족’이라는 당시 믿음의 기준이 되어 버렸고,. 이는 인종 서열화를 파생시킨 트리거가 되었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현재도 활동 중인 저명한 선사학자 앙리 델포르트도 구석기시대 예술가가 ‘남성’이었다는 고정된 시각아래에서 구석기시대 작품속 여성을 ‘어머니 혹은 쾌락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꼬집었다.

 

여성형상물들은 영국에서 시베리아까지 주로 후기구석기시대 유적에서부터 확인되고 있다. 대체로 벗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여성성이 매우 강조되었다. 바위그림과 동굴그림에는 여성의 음부가 강조되거나 혹은 여성의 성기만이 표현된 것도 상당수 존재한다. 그러나 벗은 몸이 아닌 옷을 입은 유물도 있고, 특정 신체부위를 훼손시킨 행위 등도 확인되어 모든 여성형상물이 같은 맥락에서 제작된 것은 아니다. 남성형상물은 여성보다 뒤 늦은 시점인 1만 5천년 전에 남성 성기가 강조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저자는 구석기시대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품이 19세기 말~20세기 초에 발견될 때와는 달리 성(性)을 금기시 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고자 했고,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려 했다고 생각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저자는 파묻힌 여성들부터, 르네상스 화가들의 미술에 주제가 된 여성들, 프랑스 혁명기의 여성들까지 서구권에서 20세기 여성들이 억압되어 온 역사를 끝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체도를 꿈꾸고 있었다.

끝으로 서평자는 동아프리카의 호텐족 사라 바트만의 비극적인 이야기에서 여성, 남성을 떠나서 한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독감을 느꼈다. 가슴과 둔부가 지나치게 강조된 로셀의 여성형상물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성기를 비롯한 신체 구석구석은 ‘탐구’라는 명분으로 19세기 제국주의 국가의 저속한 지식 욕구를 채웠다. 위의 서평에 나오는 엥겔스의 저서는 서평독자를 위해서 사족을 덧붙였다는 점도 밝혀둔다. 그리고 저자가 구석기시대 예술가를 바라보는 입장이나,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인 경전, 성스러운 문서, 지식인들의 글들이 남성중심적 사고관에 입각해서 쓴 글이라는 점도 동의한다. 그러나 서평자는 여성과 남성의 개념자체를 ‘자연스럽지’ 않다는 결론에는 동의할 수 없음을 밝혀둔다.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2023. 7. 4. 09:10 스키타이 동물장식

 

아르잔-2호의 남녀주인공 모자 장식은 사슴(그림 1, 2)과 말로 장식되어 있다. 그 중에서 남녀 모두 정수리 부분에 사슴을 장식하고 있다. 그 사슴의 자세는 서 있는자세이다.

 

 

그림 1. 아르잔-2호 남성 주인공 모자장식

 

그림 2. 아르잔-2호 여성 주인공 모자장식

 

두 남녀 주인공의 모자 장식에 있는 사슴의 의미가 무엇일까?

아직 확실치 않은(심증은 있지만 작업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부분은 말하지 않는다.

서 있는 자세의 사슴은 아르잔-2호에서 나온 석판에서도 암각화로 만날 수 있다.

 

고고학적인 자료로 말 할 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서 있는 사슴장식은 기원전 7세기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의 영역인 흑해부근의 자료들과 비교할 수 있다. 동유럽의 자료인 켈레르메스 유적의 사슴장식은 다리를 배 쪽으로 접어 넣은 앉아 있는 모습이다. 뿔은 한 방향으로 구름처럼 표현된 것은 같아 보이지만 엄밀하게는 양 지역에도 차이가 있다.

 

페레보드치코바가 스키타이 문화권의 동(중앙아시아, 남부시베리아~몽골)과 서(볼가 강~드네프르강 등 동유럽)에서 동물장식에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러한 특징을 아르잔-2호가 발굴되기 전에 이미 알아챘다. 아마도 1970년대 발굴된 아르잔-1호에서 서 있는 사슴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잔-1호의 사슴장식은 모자장식이나 단독의 유물로 확인된 것이 아니라, 사슴돌에 새겨져서 확인되었다.

 

그림 3. 켈레르메스 유적의 사슴장식

 

그림 4.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의 사슴돌

 

아르잔-1호의 사슴돌은 청동기시대의 것을 재사용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서 있는 사슴 자세가 스키타이 문양일 것이라는 논의는 부족했다.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사슴문양으로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르잔-2호에서 발견된 모자장식과 암각화는 서 있는 사슴문양이 기원전 7세기 스키타이 세계에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아르잔-1호의 사슴돌도 스키타이 사슴돌일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아르잔-2호가 발굴되지 않았다면, 서 있는 사슴자세의 사슴문양은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사슴문양으로만 남았을 가능성이 크다. ,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시베리아 청동기시대 사슴돌 전통이 후대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김재윤 2023). 물론 이 사실은 아르잔-2호 발굴되기 전에도 이미 페레보드치코바를 비롯한 동물문양 연구자들이 모두 지적하고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흑해지역에서 나타나는 남성형상물은 기원전 7세기 벨스크 성곽에서 출토되는 토제품을 시작으로 해서 기원전 5~기원전 4세기까지, 이 문화의 마지막 까지 발견되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유물에서 발견된다지 않는다. 그리고 유물마다 나타나는 형식에도 차이가 있어서 특정 인물로 간주하기에는 힘들었다(김재윤 2023a).

 

그런데 여성형상물은 다르다. 기원전 7세기경에 나타나는 여성형상물 A는 날개를 달고 있고, 맹수를 손에 쥐고 있다. 이 모습은 거울과 각배 속에 표현되어 있는데, 기원전 4세기까지 나타난다. 물론 여성형상물의 세세한 표현과 이 여성형상이 새겨진 유물에는 차이가 있다.

 

이를 분류해 보았는데, 기원전 7세기 전통이 남아 있는 맹수를 쥐고 있는 여성형상 A-1과 맹수가 아닌 사물을 들고 있는 여성형상 A-2으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맹수를 쥐고 있는 여성형상물 가운데는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것이 알렉산드로폴 유적에서 나왔다. 이 여성형상물은 간두장식으로 사용된 것이다. 톨스타야 마길라 유적에서 나온 여성형상물은 관을 장식하던 관자놀이의 끝장식(그림 1-3)에 표현된 것이다. 이 무덤의 여성 주인공은 스키타이 원통형관(그림 2-11)을 착용한 채 매장되었다.

 

그림 1. 스키타이 여성형상물의 분류

 

스키타이 여성들의 무덤 속에서 간혹 발견되는 스키타이 원통형 관은 유기질제 모자에 납작한 금속판을 쌓아서 올려 붙인 것이다.

 

그림 2. 스키타이 여성의 관

 

맹수가 아닌 다른 사물은 식물, 뱀, 사람머리, 단검 등을 양 손에 쥐고 있는 여성형상물(그림 1-9,10)이다. 날개를 달고 있는 모습 등은 기원전 7세기부터 이어져 온 유물과 유사하다. 그러나 맹수가 아닌 여성형상물 A-2는 그리스 칼라프(그림 2-14)를 착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물이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 쿨-오바 유적에서 나온 것이다. 볼쇼야 블리즈니차 유적에서는 실제로 그리스 칼라프도 나왔다. 이런 여성형상물은 장식판, 마면장식, 골제 빗 등 다양한 유물에서 발견된다.

기원전 5세기에는 그 이전에 나오지 않던 여성과 남성이 함께 나오는 유물(그림 2-14)도 있다. 거울을 들고 있는 여성이 앉아 있고, 각배를 들고 마시고 있는 남성과 마주하는 장면이다. 이 여성도 스키타이 원통형관을 착용하고 있다. 이 여성형상물 B는 다른 유물에서는 발견되지 않고 방형의 장식판에만 확인된다. 출토위치로 보아서 무덤 주인공 여성의 관에 달렸던 베일 장식으로 추정하고 있다. 스키타이 전통의 여성형상물로 생각된다.

기원전 5세기 이후 여성형상물 A-1은 대형고분 뿐만 아니라 소형무덤에서도 나오고, 아주 조잡하게 만들어지기도 해서 다양하게 소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성형상물 B는 대형고분에서만 발견되고, 특정한 유물에만 적용되고 있다. 이 점은 동시기의 남성형상물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그렇다면 대형고분에서만 나오는 여성형상물 B는 동일한 모습으로만 나오는데 당시에 이 여성에 대한 숭배가 있었을 수 있다. 또 무덤의 주인공은 이를 모시던 사제이거나 했을 수 있다. 러시아의 학자들은 여성형상물 B를 기록(헤로도토스) 속의 타비티(Табити, Tabiti)로 여기고 있다.

그리고 여성형상물 A-2가 나오는 시기(기원전 4세기)의 무덤에는 그리스 유물도 많이 출토되고, 스키타이 사회에 그리스 유물이 많이 수입되던 시기이다. 이 시점을 기점으로 스키타이 문화는 사르마트 문화로 대체되는데, 혼란기의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김재윤 2023b).

 

*앞의 포스팅에서 타비티를 티파티라고 잘 못 적었다...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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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흑해 스키타이 문화에서 남성의 형상은 간두령 뿐만 아니라 금제 그릇과 장식판에서도 볼 수 있다. 금(쿨-오바 유적)과 은(차스티예 유적) 항아리의 남성들은 기록(헤로도투스) 속의 타르기타우스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일상생활과 관련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타르기타우스는 스키타이 땅에 처음 나타난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셋째 아들이 스키테스인데, 세 아들 가운데 땅을 물려 주기 위해서 경합을 벌리는 장면으로 많이 회자된다.

 

항아리의 생김새도 유사하고, 남성들이 등장하며 특히 고리투스를 착용하고 있는 남성 때문에 스키테스를 떠올리는 것 같다. 그는 타르기타우스의 막내아들로 고리투스를 다룰 수 있었기에 스키타이 땅을 물려 받았던 인물이다.

 

장식판 가운데 두 남성이 각배를 들고 맹세를 하는 장면은 확실히 기록에 있는 “맹약의식”으로 보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남성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맹약의식이라는 행위이다.

 

간두령에 달린 남성, 항아리 속의 남성, 각종 장식판에 나오는 남성들이 과연 신화 혹은 기록 속의 인물일까?

 

이들은 스키타이의 전통적인 남성이거나 특정 영웅일 수도 있지만 의인화 된 신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성과 비교해 볼 때 기원전 7세기부터 지속되거나(아르김파사), 기원전 5세기 이후에 나오는 여성(타피티)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반복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여성형상물이 후기구석기시대 이래로 지속적으로 제작되지만 남성형상물은 스키타이 문화가 되어서야 만들어진다. 인간형상물 가운데 남성에 대한 관념이 변했을 수는 있고, 스키타이 전통 남성일 수 있지만 기록 속의 인물들로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림 1. 기원전 5세기 이후 흑해 스키타이 문화의 전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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