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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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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활에 대한 염원, 무덤 부장의 연속: 시베리아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이어져 온 인간형상물의 전통은 시베리아에서 신석기시대에도 이어진다. 말타 유적은 앙가라 강 유역에 위치하는데, 이 지역의 신석기 유적들도 이곳에서 주로 발견된다. 구석기시대와는 달리 무덤과 집의 구분이 뚜렷해지면서 확실히 무덤 속에 인간형상물들이 부장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에서는 철기시대까지 줄 곳 무덤 속에서 인간형상물들이 발견된다.

7000~6000년 전 키토이 문화(Китой, Kitoy)와 5000~4700년 전 세로보(Серово, Serovo) 문화이다. 키토이 문화와 세로보 문화 모두 무덤에서 부장되었다. 토광묘가 특징인 키토이 문화의 인간형상물은 라스푸티노(Распутино; Rasputino) I유적과 치클로드롬(Циклодром; Tsiklodrom) 유적에서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가 되면서 전신을 표현한 것 뿐만 아니라 얼굴만 있는 것도 나온다.

세로보 문화에서는 석관묘 속에서 인간형상물이 발견된다. 세로보 유적 12호(그림 6)에서 얼굴몸통형(그림 6-21)이 붙은 것과 얼굴만 있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후자의 인간형상물(그림 6-22, 33, 그림 7)은 동물형상과 함께 붙인 것이고 꼬리 끝에 인간 얼굴이 붙어 있는 모습이다. 바이칼 유역의 신석기시대 인간형상물은 맘모스 상아로 제작된 것이다(김재윤 2019).

무덤 속에 부장되며, 뼈로 제작된다는 점은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지속되지만, 성(性)의 표현이 없어졌다. 뚜렷하게 가슴과 Y존을 드러내면서 여성성이 강조된 여성형상물과 남성상징 모양의 남성형상물은 없어지고, 인간인 것만 뚜렷하게 드러난다. 무미건조하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물론 답을 알 수는 없다.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죽은이의 성별 조차 비밀이었을까?

그렇지만 세로보 유적의 12호 인간형상물은 인간과 동물이 어깨를 나란히 겨누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이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엿볼 수 있다. 하찮은 동물이 아닌, 숭배의 대상, ‘토템사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림 6.  세로보 유적 12호

 

그림 7. 세로보 유적 12호의 인간과 동물 합체 형상물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부활

 

흑해지역의 후기구석기시대 여성형상물은 대부분 주거지에서 출토되며, 남성상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시베리아와 대조적이다(김재윤 2019a).

시베리아에서는 14000년 전 말타(Мальта, Malta)와 부레티(Буреть, Buret') 유적에서부터 인간형상물의 전통이 확인되었다. 말타 유적은 주거지 15기가 있는 취락유적으로 각 주거지에서 1개 이상의 인간형상물이 발견된다. 그 중에서 원형의 지상식 주거지 안에 화덕자리에는 인골과 함께 인간형상물(그림 3, 그림 4) 및 동물형상물(그림 5)이 발견되었다. 이를 두고 집 속의 무덤이라고 생각하며, 인간형상물 부장의 시원적인 모습이다. 여성(그림 3, 4-1)은 머리, 몸통, 팔 다리가 뚜렷하게 구분되며, 가슴과 엉덩이를 표현했고, 하반신에 Y존을 뚜렷하게 그려서 여성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반면에 남성(그림 4-2)은 남성상징형태이고, 몸통 표현은 없고 얼굴만 표현되었다(김재윤 2021b).

 

 

 

 

구석기시대 마지막 기간에 집 속에 인간형상물을 부장한다는 현상은 시베리아와 흑해지역에서 유사하게 나타나지만 이를 하는 사람들의 행위에는 차이가 있었다. 흑해지역에서 순수한 특정한 ‘집’에 왕창 넣어준다던지, 여성만을 형상물화 한다던지 하는 현상은 시베리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평등’이라는 개념이 있었다면 23000년 전 동유럽 후기구석기문화에서는 보기 어렵다.

 

 

하지만 시베리아에서는 여성형상물에 비해서 숫자가 적고, 간단하게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남성들도 형상물로 만들어졌다. 동유럽에 비해서 살찌거나 임신한 여성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지 않은 점도 여성을 ‘생산’의 대상으로만 본 것은 아니고 어쩌면 ‘부활’의 의미를 담았을 수 있다. 말타 유적의 여성형상물은 집 안에 인골과 함께 매장되었고, 무덤 속의 매장으로 보기 때문이다. 집 안에 무덤을 만들어서, 그가 다시 부활하기를 바랬을 수 있다. 미라를 만들었던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말타 유적의 모든 집에서는 인간형상물들이 1개 이상 발견된다는 점도 흑해와는 구분된다(김재윤 2022a).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 여성형상물 전통의 시작: 부활과 다산(흑해지역)

 

인간은 스스로를 닮은 인형을 ‘인간형상물’을 후기구석기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오스트리아의 빈델도르프?는 ‘비너스’라고 일컬어졌다. 그런데 같은 시대에 유럽 뿐만 아니라 흑해 부근의 후기 구석기 문화와 시베리아의 말타 유적에서도 여성형상물을 주거지에 매장하는 관습이 있다. 흑해 부근에서는 대략 23000년 전 유적인 코스텐키 (Kостенки, Kostenki) I유적(그림 1), 가가리노(Гагарино, Gagarino) 유적, 호틸레보(Хотылево, Khotylevo) 2 유적 등에서 인간형상물이 대거 발견된다. 시베리아에서는 말타 유적 외에도 부레티 유적 등에서 출토된다.

이들 유적은 모두 당시 후기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취락 유적이다.

코스텐키 I유적은 주거지 4기가 발견되었고 그 중에 2기가 발굴조사되었다. 주거지는 타원형으로 장변의 길이가 대략 40m 너비는 일정하지 않지만 가장 넓은 곳을 기준으로는 19m가량이다. 중앙에는 8개의 노지가 일렬로 위치하고 있으며, 문지는 3개인데, 장변의 2/3지점과, 단면의 모서리 부분에 위치한다. 뿐만 아니라 주거지에는 노지 주변과 주거지 가장자리를 따라서 수혈이 많은데, 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김재윤 2019a).

 

 

인간형상물은 1호 주거지(그림 1)에서만 여성형상물이 102 개가 집중 출토되었다. 여성상은 맘모스 상아로 제작된 것이 4점이고 그 외는 이회암으로 만들어졌다. 대부분 전신상으로 머리에 눈코입을 표현하지 않고 가슴과 엉덩이를 매우 강조한 형태이고(그림 2-1), 일부러 훼손한 흔적도 발견된다(그림 2-2). 측면에서 볼 때 등을 구부린 모습이다(아브라모바 1987, 김재윤 2019a). 동시대의 가가리노 유적(그림 2-3)과 호틸레보 2 적(그림 2-2)에서도 여성형상물이 출토된다. 그런데 호틸레보 2 유적의 여성형상물(그림 2-2)은 단순히 살찐 모습이 아닌 임신한 여성으로 알려져서, 다른 형상물들과 구분하기도 한다. 가가리노 유적의 유물은 비만한 앉아 있는 여성이다(가브릴로프, 흘로파체프 2018).

흑해지역의 후기구석기시대 여성형상물은 대부분 주거지에서 출토되며, 남성상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시베리아와 대조적이다(김재윤 2019a).

 

 

 

하지만 시베리아에서는 여성형상물에 비해서 숫자가 적고, 간단하게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남성들도 형상물로 만들어졌다. 동유럽에 비해서 살찌거나 임신한 여성을 두드러지게 표현하지 않은 점도 여성을 ‘생산’의 대상으로만 본 것은 아니고 어쩌면 ‘부활’의 의미를 담았다. 말타 유적의 여성형상물은 집 안에 인골과 함께 매장되었고, 무덤 속의 매장으로 보기 때문이다. 집 안에 무덤을 만들어서, 그가 다시 부활하기를 바랬을 수 있다. 미라를 만들었던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김재윤 2022a).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그간 포스팅을 하지 못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자료를 찾지 못했고 등등 핑계가 많습니다. 그래서 2023년 1월 한국의 고고학이라고 하는 계간 잡지에 제가 기고한 글이 발표되어서 올리고자 합니다. ‘한국의 고고학’은 학계의 동향에 맞추어서 당시의 가장 뜨거운 이슈나 주제 등을 기획해서 엮어내는 잡지입니다. 고고학 전문 잡지라기 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내용입니다. 제가 기고한 글은 이미 벌써 2021년도 출판물이 되어 버린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과 관련된 것입니다. 일부 내용은 겹치는 것도 있지만 새롭게 쓴 내용을 더해서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라는 제목이다.

 

I. 왜 ‘미라와 여신상’인가?

2021년 책에서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하 스키타이 문화권)의 유물 가운데 왜 인간형상물을 다루었는지를 간략하게(?) 축약한 것이다. 이미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이 문화권의 대표유물은 동물문양장식이다. 흑해 북안의 조사는 19세기부터 시작되었고, 황금유물이 출토되며 육안으로도 신기한 유적임을 판별가능했던 쿠르간(대형고분)이 그 중심이 되었다. 대체로 기원전 7~4세기의 유적이었는데, 헤로도투스가 기록한 흑해 북안의 이민족 스키타이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19세기 당시에 특별한 연대측정법이 없었던 까닭에 동물문양장식을 근거로 해서 유적의 연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물론 이후에 남겨진 목관이나 목판 등으로 방사성탄소연대측정치로 세밀하게 조정되었지만 근간은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는 다소 복잡한 이름은 시베리아의 아르잔-1호를 발굴하면서부터 이다. 유적을 발굴한 그랴즈노프가 명명한 것인데, 스키타이 문화권의 동물문양장식은 결국 시베리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흑해지역에서 가장 이른 유적인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에서는 청동거울의 꼭지와 화살통 장식 등에서 몸을 말고 있는 표범장식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표범장식은 이미 기원전 9세기 아르잔-1호에서 청동으로 만들어져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동물문양장식의 대표 연구자인 페레보드치코바는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동물문양장식이 크게 동과 서로 구분된다고 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형상물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필자가 연구해 온 시베리아의 인간형상물은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극대화 된 모습 미라로 기원전 5세기 유적에서 나타난다. 또 동 시기의 스키타이 문화권의 흑해지역 자료에서는 여러 유물에서 여성형상물들이 발견된다. 이들 여성형상물은 스키타이 신화 속의 인물들로 비교되어서 연구된 바 있다. 이러한 이유로 2021년 저서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 문화권에서 동과 서의 중심지역은 각각 시베리아와 흑해 부근이다. 흥미롭게도 두 지역은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인간형상물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전문은 아니며, 기고된 원고를 바탕으로 간추린 내용이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3,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전통의 시작부터 극대화까지」, 『한국의 고고학』, 58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권의 청동솥은 대체로 나팔 모양의 다리가 붙고, 손잡이가 솥의 입구에 붙어 있다. 둥근 고리 모양의 손잡이는 수직으로 붙어 있는데, 그 중에서 버섯 모양의 돌기가 붙은 솥(그림 1)이 주로 예니세이강에서 발견되었다.

 

그림 1.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발견된 청동솥, 기원전 4세기

 

그런데 예니세이 강의 상류에 키질-카이야(그림 2) 라고 불리는 암각화에서 거의 같은 모양의 청동솥으로 요리하는 장면이 그려진 것이 발견되었다. 이 암각화는 사벤코프(1910)가 20세기 초에 발견해서 그림을 남겼는데, 보르스카야 암각화 보다 훨씬 더 요리하는 장면이 잘 묘사되었다. 이 암각화에는 돌기가 있는 둥근 모양의 손잡이가 붙은 청동솥과 그냥 둥근 고리모양의 손잡이가 붙은 청동솥이 함께 그려져 있다.

 

그림 2. 키질-카이야 암각화, 예니세이 강 상류

 

 

그림 3.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발견된 청동솥2, 기원전 4세기

 

그렇다면 이 두 모양의 청동솥은 동 시기에 이 동네(미누신스크 분지)에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암각화가 20세기 초부터 발견되었기 때문에 청동솥이 의례용 뿐만 아니라 음식조리용으로 사용된 것을 알았다. 특히 가장 처음에 나오는 장면은 동물의 젖을 짜서 조리하는 장면(유제품)으로 보여지게 되면서 유목민족의 생활 상을 알 수 있게 한 자료로 손꼽힌다. 하지만 이 유적은 현재는 잘 남아 있지 않다.

 

다시 한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с новым годом с новым счастье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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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청동솥은 흑해지역부터 시베리아, 몽골까지 전 지역에서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4세기까지 발견된다. 다리라고 부를 수 있는 바닥은 나팔모양인데, 간혹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가운데 세 다리가 붙은 청동솥이 발견되기도 한다. 하지만 극히 일부이다.

 

흑해지역에서는 대체로 동체부가 무문양이고, 나팔모양의 다리가 붙은 청동솥이 기원전 5~4세기에 나온다(그림1).

 

그림 1. 쿨-오바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솥

 

그런데 흑해주변의 유적 가운데서 라스코파나 모길라 유적(그림 2)에서는 아주 장식이 많은 청동솥도 출토되었다. 청동솥에 붙은 황소머리는 그리스장식의 요소이다. 황소머리 장식 사이에는 동심원문양도 함께 시문되어 있다. 중간에는 팔메트 문양, 하단에는 지그재그 문양이다.

 

그래도 이 유물은 스키타이 사람들이 만든 청동솥이다. 주로 점토로 주조되었다. 다리는 따로 만들어서 붙인 것이다. 손잡이는 대부분 아치형이지만, 일부는 동물모양으로 장식된 것들이 있다.

 

 

그림 2. 라스코파나 모길라 고분

 

 

그림 3. 손잡이가 동물장식인 청동솥

 

청동솥은 유목민의 일상생활에서 사용되었더라고 해도 의식적인 의미도 포함한다. 가족이나 부족들은 청동솥 주위에 모여서, 종교 의식을 위한 제물을 바치는 동물들의 고기를 요리했다.

또 시베리아의 파지리크 유적에서 나온 높이 10cm 남짓의 청동솥은 일종의 향로로 사용되었다(그림 4).

 

그림 4. 파지리크 유적 2호 출토 청동솥

 

헤로도투스가 본 스키타이 인의 거대한 청동솥은 수많은 화살촉을 녹여 만든 것인데, 4500갤런 정도 되는 용량이라고 한다. 이제까지 출토되거나 발견된 청동솥 중에 저렇게 큰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건장한 3명의 소년이 옮겨야 할 정도로 큰 청동솥이 볼가강 유역의 필리포프카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그림 5. 필리포프카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솥

 

아무리 황소머리 문양이 있었다고 해도 청동솥은 스키타이 사람들의 일상용, 의식용 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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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고대 유라시아의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청동솥은 거의 대부분이 발견된다. 기원전 7세기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청동솥은 기본적으로 나팔 모양의 다리가 붙어 있고, 손잡이가 있다. 물론 지역에 따라서 손잡이와 솥의 몸통에 동물문양이 붙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은 지역이 있다. 대체로 시베리아와 흑해지역에서 기원전 7세기 유적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시베리아 투바의 아르잔-2호에서는 실제로 청동솥이 나오기도 나왔다. 뿐만 아니라 청동솥을 모델링 해서 만든 작은 금제품을 긴 체인에 달아서 허리에 달았던 것도 확인되었다. 아르잔-2호에서 출토된 작은 금제품의 솥 모양 장식품(그림1)은 표트르 대제의 시베리안 콜렉션에서 발견된 잔 모양의 금제품과 비교된다. 실제의 그릇을 모형화해서 장신구처럼 달아서 사용했던 것을 아르잔-2호에서 실제로 확인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림 1. 아르잔-2호의 금제 모형 솥.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맞는 부분들도 많다. 그가 ’스키타이 사람들은 오늘날까지 허리띠에 그릇을 메고 다닌다‘고 한 말이 이 장식용 그릇을 말한 것인지, 실제 그릇을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암튼 최소한 장식용 그릇은 허리에 메고 다닌 것 같다.

 

그런데 카자흐스탄 동남부의 세미레치예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솥은 이상하게 생긴 것이 우연하게 발견되었다. ’우연하게 발견된 유물‘은 발굴된 유물이 아니라 대체로 비정상적인 경로(도굴 등)로 발견된 것이다(그림 2). 다리 세 개 달린 청동솥은 시베리아가 아닌 지역에서 주로 발견된다.

 

 

그림 2. 카자흐스탄에서 발견된 기원전 일천년기 중반(기원전 5세기 가량)의 청동솥.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다리 세 개가 붙은 청동으로 된 그릇은 중국의 상나라 초기에도 알려져 있지만, 이란 북부의 청동기시대의 유물 가운데도 다리 세 개 붙은 토기가 이 유물(그림2)의 기원이라고 하는 연구(보코벤코 1981)일반적으로 받아 들여진다. 더욱이 청동솥에 붙은 양 머리는 고대 이란 사람들에게 신의 행운(xvarna)을 상징한다. 그래서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숫양 머리 달린 이미지는 의식적인 용도로써 고대 이란과의 관련성을 설명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다리 세 개 붙은 유물은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주류를 이루지는 못했다. 기원전 4세기 이후 흉노와 사르마트 문화에서도 여전히 나팔모양의 다리가 붙은 청동솥이 나오기 때문이다. 혹은 다리가 없는 유물들도 있고, 그 모양은 지역과 시간에 따라서 더 다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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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의 물질문화 중에서 가장 넓게 분포하고 가장 오랫동안 사용되는 유물 중에 하나는 청동솥(동복)이다. 스키타이가 망한 이후 흉노와 사르마트 문화에서도 사용되며, 유럽의 헝가리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에서도 뚜렷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1세기 이후(길림성 유적인 유수노하심의 연대문제)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중국 감숙성에는 더 이른 시기에 나오는 유물도 존재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뚜렷하지는 않다.

 

아뭏튼 유라시아 초원지역에서 기원전 7세기경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청동솥은 크기부터 모양까지 매우 다양하며 실제로 요리에 사용된 흔적이 남아 있는 경우도 종종 있다. 지역과 연대마다 청동솥의 형태는 다르지만 지속적으로 사용되는데, 복잡하고 힘들지만 재밌는 주제이다.

 

 

 

그림 1.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발견된 청동솥, 기원전 7~4세기로 추정.

 

 

그림 2. 러시아의 오렌부르크 지역. A.D.4-5세기

 

 

 

올해 하반기에는 블로그에 글 적는 일이 줄어들어서 매우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신경쓸 일이 많았고, 또 생각할 부분도 많아서입니다. 새해에는 장담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지속적으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청동솥에 복이 담겨 있습니다^^

 

 

김재윤 드림

 

 

 

posted by 김재윤23

고대 알타이(기원전 5세기)의 무덤 속에서 나오는 그릇은 토기 외에도 목제로 된 용기가 존재한다. 손잡이가 한쪽으로만 붙은 것인데, 아르잔-2호에서 발견되면서 기원전 7세기 이후부터 이미 시베리아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목제 용기는 알타이의 무덤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나오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더 전통적인 그릇이며, 역시 쿠미즈를 담기 위한 그릇이다.

 

주로 알타이에서만 출토되지만 서쪽에도 사용되었다. 볼가 강 유역의 필리포프카 유적에서는 목제 그릇에 달아서 장식했던 동물장식이 발견되었다. 모로드비노프카 유적의 목제 그릇은 아마도 유일하게 알타이를 벗어나서 목제 그릇의 존재가 확인된 예일 것이다.

필리포프카 유적에서 나온 금판 장식들과 유사한 유물들이 기원전 5세기 이후에는 흑해지역에서도 드문드문 발견되기 때문에 목제그릇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파지리크 유적의 5호분 출토 목제 잔

 

그림 2. 알타이의 뿔로 된 항아리, 아크 알라하-3 유적

 

나무잔 혹은 나무용기가 우유 혹은 유제품을 담는 용기를 사용하는 장면을 헤로도투스는 설명했다.

 

‘속이 깊은 나무 용기에 노예들이 주위에 서서 우유를 흔들도록 만든다. 표면에 생긴 것을 끌어내는데, 이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바닥에 있는 것은 덜 한 것으로 취급받는다’라는 구절이다. 우유의 상층만 걷어내서 뭔가를 만드는 장면이다.

 

아뭏튼 나무잔과 토기는 모두 유제품과 관련된 그릇이라는 것은 이미 다 밝혀진 바이다.

 

그런데 알타이의 무덤에는 액체를 담기 위한 그릇이 한 종류 더 있는데 뿔로 만든 항아리 혹은 잔이다. 사실 스키타이 서쪽에서는 뿔로 된 항아리는 나오지 않는다. 각배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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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의 기원전 9세기 유적인 아르잔-1호에서부터 산(알타이) 위의 유적까지 연속적으로 보이는 것은 나무무덤방의 축조기술이다. 알타이 파지리크 유적에서는 무덤구덩이에 넣기 전에 나무를 미리 재단해서 표시를 해 두었는데, 이 기술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알타이 보다 먼저 무덤이 만들어졌던 우육분지 투바의 아르잔-2호, 아르잔-1호에서도 무덤방을 만들 때 가장자리에 홈을 파서 아래와 위의 나무를 결구하는 방법이 발견되었다. 그 엉성해 보이는 아르잔-1호에서도 주인공을 위한 무덤방은 같은 무덤 안에서도 달랐다.

 

연속성이 보인다고 해도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물질문화도 생겨난다. 필자가 보기에는 토기이다. 화려한 물질문화 속에서 어쩌면 매우 소박해 보이기도 하고, 별꺼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알타이의 무덤에서는 꼭 1~2점씩 부장되었다.

이들을 알타이에서 만들지는 않았고, 연구된 바에 의하면 산림스텦지역에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500km 이상 떨어진 곳이다.

다양한 모양의 토제 그릇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한 기종만 나오는데, 목이 긴 항아리이다. 물론 항아리 마다 차이는 있으나, 사발이나 접시 이런 기종은 나오지 않는다. 모두 목이 긴 항아리이며, 채색되거나, 가죽 아플리케를 붙여서 장식했다.

 

 

그림 1. 파지리크 유적의 토기

 

목이 좁고 긴 항아리는 액체류를 위한 그릇이다. 특히 유제품(쿠미즈)와 같은 음료를 담았거나 혹은 좀 더 발효된 우유로 된 알코올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특히 파지리크 유적이나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는 토기 주변에서 유제로 된 어떤 액체류가 주변에 흥건했던 것을 기록했다.

 

쿠미즈와 우유로 술을 만드는 기술은 매우 오래되었던 것 같은데 13세기기록에도 남아 있다. 1253~1255에 몽골을 다녀온 루브룩(William of Rubruck) 수도사가 ‘루브룩 여행기(William of Rubruck's Account of the Mongols)’에 몽골의 풍속, 종교 등을 기록해서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V장에서 쿠미즈 및 술과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V장의 제목은 쿠미즈이지만, 내용에서 쿠미즈를 만들고, 버터도 추출하고, 거기서 더 자극적인 맛이 나기 시작하면 취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것으로 보아서 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은 라틴어로 쓰여졌고, 영어로 번역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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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