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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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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잔 유적의 1호는 봉분이 있는 직경이 120m가 넘고, 봉분을 제거한 후에 드러난 나무방은 직경이 80m가량이다. 직경 80m안에는 무덤방이 70여개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그림2). 무덤은 현대에 이미 훼손된 상태여서 무덤방의 숫자가 정확하지는 않다.

 

무덤방은 지름 50~85cm가량의 낙엽송을 이용했으며, 가장 중앙에 주인공의 무덤방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나무방이 설치되었는데, 각 방의 크기와 모양은 다른데, 각 방의 면적은 15~150㎡이고, 전체 사용된 통나무의 수는 600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림 1. 아르잔 1호분의 발굴광경

 

 

그림 2. 아르잔 1호분의 무덤내부

 

중심부의 메인 무덤방은 크기가 8×8m, 높이는 2.6m이다. 그 안에는 다시 2차무덤방이 설치되었는데, 4.4×3.7m이고, 높이는 1m인데, 안에는 남녀의 통나무관 2개가 설치되었다. 바닥에도 지름 20cm나무를 깔았다. 1차 무덤방과 2차 무덤방 사이에는 통나무관 6개와 작은 나무방 2개가 따로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곳(그림 3-2)에는 통나무관이 따로 들어가 있었다. 동쪽에는 마구를 착용한 말이 6마리가 부장되었다. 중심부의 메인무덤방에서는 모두 8명의 사람이 확인되었는데, 가장 중심의 2차 무덤방 안(그림 3-1)에 통나무관에는 각각 남성과 여성이 묻혔고, 외부의 작은 무덤방(그림 3-5)에는 남성 1명(40~60세), 통나무관에는 한 곳(그림 3-3)을 빼고는 모두 남성이 묻혔다. 나이는 다양하다. 20세가 채 안된 남성 1명, 60대 2명,  40대 1명이다.  그런데  그림 3-2의 작은 나무방안의 통나무관과 그림 3-3 통나무관에도 관이 있기에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두 10명이 메인 무덤방 안에는 있었을 것이다.

 

 

그림 3. 아르잔 1호분의 중심 나무방

 

무덤방은 나무를 쌓아 올렸는데, 한 단씩 가로와 세로를 교차해서 올린 것이다. 여러분은 해본적이 있으신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성냥이 거의 없지만 예전에 성냥으로 쌓는 놀이를 한적이 있다. 성냥을 쌓는 방법은 가로와 세로를 한단 씩 교차하는 방법인데, 이 무덤이 딱 그렇게 축조되었다.

 

아직 아르잔 1유적의 외부무덤구조를 설명드리지 않았지만, 어제 포스팅한 도면에서 이미 파손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무덤의 봉분을 돌로 덮었고, 가장 중심의 매장주체부는 도굴이 심했으나, 외부에서 온 남겨진 유물로 보아서 대단한 인물의 무덤으로 생각한다.

 

 

아르잔 유적의 1호는 이제까지 소개해 드린 파지릭 유적과 아크 알라하 3유적과 비교해 볼 때 무덤구조가 많이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유적의 탄소연대측정과 나이테를 비교해서 보정한 결과는 가장 오래된 연대는 기원전 885년 가장 늦은 연대는 기원전 790년 이다(Zaitseva GI, Vasiliev SS, Marsadolov LS, van der PlichtJ, Sementsov AA, Dergachev VA, Lebedeva LM.1998.). 이 연대는 그랴즈노프가 발표한 책에서도 비슷한 연대가 발표되었다. 필자가 먼저 인용한 이유는 좀 더 최신의 기계로 분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코크 고원의 얼음공주 무덤과도 비교해볼 때 300년 이상 빠르다.

zaitseva_gi_et_al_a_treering_and_14c_chronology_of_the_key_s.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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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동안 무덤구조가 그대로라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다. 하지만 무덤구조는 매우 심하게 차이난다.

 

여러분이 보시기에는 가장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개별 무덤방의 차이 등 너무 많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이 유적은 무덤을 땅위에 만들었다는 점이다. 구덩이를 파지 않았다. 구덩이를 파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큰 무덤을 만들 수 있었다. 반대로 큰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구덩이를 파지 않았을 수도 있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초기 스키타이 차르 무덤, 아르잔)

Zaitseva GI, Vasiliev SS, Marsadolov LS, van der Plicht J, Sementsov AA, Dergachev VA, Lebedeva LM. 1998. A tree-ring and 14C chronology of the key Sayan-Altai monuments. Radiocarbon 40(1):571–80.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는 표트르 1세가 수집한 시베리아 황금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이 유물은 18세기 초반에 수집된 유물로 발굴되지 않아서 정확하게 어디서 출토되었는지 모른다. 다만 당시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이 표트르 1세에게 보내기 시작했고, 그를 통해서 유물은 황제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하게 어떤 유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출토지가 시베리아인 점은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물로 추정하는 것은 몸을 말고 있는 호랑이(혹은 표범) 장식이다. 필자가 이미 이 유물에 대해서는 소개한 바 있다. 이 유물이 가장 이르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된 유적은 시베리아의 투바에 위치한 아르잔 유적의 1호분이다.

 

 

그림 1. 지도에서 보라색 표시가 있는 곳이 아르잔이 위치한 곳이다. 필자가 앞에서 지도를 링크해 둔 적이 있는데, 이를 찾아서 들어가면 필자의 지도를 공유할 수 있다.

 

이 유적은 스키타이 문화에서 가장 이른 시기로 기원전 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근거는 무덤의 소재가 된 통나무 6000개이다. 1호는 1971~1974년에 발굴되었다. 이제까지 소개해 드린 우코크 고원(아크 알라하 3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과 파지릭 계곡(파지릭 유적의 1호분, 2호분, 5호분) 보다 최소한 300년~400년은 빠른 무덤이다. 연대차이가 있기 때문에 무덤 구조가 차이가 크다. 아르잔 1호는 무덤의 직경이 120m가 넘어서 아직도 구글지도(그림 2)에 흔적이 남아 있다. 호석(무덤 주변을 두른 돌)의 흔적으로 보인다.

 

그림 2. 아르잔 유적의 무덤, 아직도 무덤 주위의 흔적이 희미하게 둥글게 남아 있다. 그림3-1과 비교해 보면 도로와 앞에 있는 건물의 위치가 그대로 임을 알 수 있다.

 

그림 3. 아르잔 유적 발굴 모습, 1- 전경, 2- 무덤방 7호의 가장자리에 놓인 통나무, 3-무덤방 3번의 말, 4-무덤천장덮개를 제거한 후 무덤방 26b, 5-무덤 봉분을 제거 한 후 드러난 무덤방의 모습, 동->북동방향

 

아르잔 유적 1호분이 책으로 출간된 것은 1980년이고 발굴책임자인 그랴즈노프가 출판했다. 그랴즈노프는 ‘아르잔’ 유적이 있는 곳(해발 1050m)은 주변이 높은 산지로 둘러싸인 계곡인데, 왕의 계곡이라고 불렀다. 아르잔은 이 곳의 마을 이름인데, 마을에서 서쪽으로 반경 4km 내에 6개의 무덤이 줄을 서서 있다고 한다(그림 4-1). 또한 마을에서 서쪽으로 4-5km 에는 무덤 11기, 6km 떨어진 곳에는 무덤이 3개 확인되었다.

 

그림 4-1에서 7번 지점에는 2줄 로 3km 가량 무덤이 열을 이루고 있는데 각각 13개, 12개가 확인되었다.

 

아르잔 마을 주변의 많은 무덤 가운데서 가장 특별하고 가장 눈에 띄고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그림 4-1에서 1, 2, 8번이다. 2번이 먼저 발굴되어 아르잔 1호로 명명되었고, 1번이 아르잔 2호이다. 직경 120m, 높이 3~4m로 워낙 직경이 크고 무덤의 봉분이 완만해서 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림 4. 아르잔 유적, 1- 아르잔 마을 주변에서 확인되는 무덤(2~8번 숫자가 적힌 것이 마을에서 서쪽으로 반경 4km 내의 무덤이다), 2-아르잔 1호분의 봉분과 주변의 제사유구.

 

아르잔 1호 주변 무덤의 남동쪽에는 2~3줄의 원형 돌무더기가 무덤을 둘러싸고 있었다(그림 4-2). 이 곳을 발굴한 결과 일정한 크기로 비슷한 간격으로 돌 무더기가 열을 이루고 있었는데, 일종의 제사유구(그림 5)로 생각된다.

 

 

그림 5. 아르잔 1유적의 외곽, 그림 4-2에서 A부분.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80, М.П. Грязнов, 1980, Аржан.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ранне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그랴즈노프 1980, 스키타이 초기의 차르 무덤, 아르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의 2500년 전 무덤인 파지릭 유적은 1929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발굴은 1947년부터 이다. 하지만 발굴은 1850년에 아직 로마노프 왕조일 때 ‘제국고고학위원회’를 만들어서 흑해북쪽의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1929년은 러시아혁명 후로 레닌이 죽고 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고, 스탈린이 집권했던 시점이다. 스탈린 집권기간 동안에 파지릭 유적은 발굴되었다. 스탈린은 사람을 아주 많이 죽인 지도자이다. 레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했던 권력을 잡은 수단은 등 뒤에서 칼을 꼽는 것이다. 인간백정이라는 평가도 있다. 2차대전 당시 독일과 싸워서 이겼지만, 자국민이 너무 많이 죽어서 그게 이긴 것일까 하는 평가도 나온다.

 그럼에도 러시아인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러시아인 3인중에 한명이다(2008년 필자가 유학당시, 러시아 국영tv 방송인 ‘러시아(РОССИЯ)’에서 했던 조사였는데, 아침마다 위대한 러시아의 위대함을 알리는 역사적 유적과 인물을 꼽아서 보여주었다. 아침마다 보면서 처음에는 거북했지만, 나중에는 그러려니...하고 되는 걸 경험했다. 아직도 스탈린이라니..이러면서. 복잡한 감정이었다.) 독일과 싸워서 이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열리는 전승기념일은 2차대전 종전일이 아니라 독일과 승전일인 5월 9일이다. 스탈린은 현대한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이 부분이야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일 테니...(우리나라에서 알려진 소련 혹은 러시아에 대한 인물의 이미지는 전부 미국언론을 통해서 알려져서, 미국입장에서 알려진 이미지이다. 실제 그 나라 감정과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필자는 스탈린 집권기에 알타이의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이상한 감정이 문득 든다.

 

2500년 전 유적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현대사로 넘어 갔는데, 다시 돌아와서 1929년에 그랴즈노프가 발굴한 유적은 이미 도굴당해서 주인공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하지만 말 10마리에 대한 정보는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 있고 필자가 공개했다.

 

2020/04/2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1호분] -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서는 한 가족 혹은 친족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이 확인된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과 그 안에는 관을 두고, 무덤방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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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스키타이  문화의 유물은 늘 앞에 붙는 수식어가 ‘황금’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하지만 필자가 보여드린 유물은 거의 대부분 나무장식이었다. 그렇다면 황금은 어디에?

드문드문 말씀드렸지만 금박은 쉽게 찢어져서 벗겨진채로 많이 발견된다. 특히 1호분에는 금박이 많이 발견되었던지, 그 부분에 대해서 벗겨진 금박종이가 많다는 내용도 별도로 적어 놓았다.

여러분의 의심을 약간이나마 덜어드리기 위해서 4호분에서 가장 금박이 많이 남은 유물을 보여드리고자 한다. 유물은 말의 얼굴에 달렸던 굴레장식이다. 파지릭유적의 1호분에서 4번째 말의 굴레장식이라고 분류된 말이다. 비교적 많은 금박이 남아 있다(그림 1). (알타이에도 황금덩어리로 만든 유물이 출토되는 유적이 있다. 앞으로 소개할 예정임...)

 

 

그림1. 파지릭 유적 1호에서 출토된 말의 굴레

 

굴레장식에 관통하는 가죽줄은 뺨으로 돌아가는 부분은 가죽띠 2줄이고, 코로 돌아가는 부분에도 굴레장식이 부착되었다. 굴레장식은 산양머리와 팔메트 문양이다. 산양머리에는 가죽뿔이 붙어 있다. (그런데 가죽뿔이 빠진 왼쪽(우리가 볼때)의 굴레장식은 필자가 보기에는 새모양으로도 보인다.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나 싶기도 하다.)

 뺨으로 돌아가는 굴레는 2줄로 재갈멈치로 연결된다. 재갈멈치는 끝 부분에만 동물문양이 붙어 있는 유물과는 달리 재갈멈치가 통째로 산양을 표현했다. 앞다리는 몸 아래로 당기고, 뒷다리는 뒤로 뻗어서 몸을 수평으로 표현해서 산양은 뛰는 모습인지, 나는 모습인지를 표현했다. 재갈멈치가 대체로 막대기모양인데, 이 부분에 동물을 통째로 표현한다고 산양의 무릎을 꿇은 모양으로 표현하면, 다시 말해서 산양 몸을 수평으로 만들지 않으면 기능적인 부분이 약해지기 때문에 모양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세의 굽동물의 표현은 사슴돌에 이미 있다. 있지만 그것을 재갈멈치에 사용하는 것은 다른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유물의 이마장식은 물방울 모양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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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1929년에 발굴된 파지릭 유적의 1호 무덤 주인공은 발굴 이전에 이미 도굴로 인해서 주인공에 대한 정보는 없다. 도굴은 교묘하게 이루어져서 나무로 된 무덤방의 안쪽과 무덤방의 천장에 구멍을 남겨놓아서 자신의 흔적을 남겼고 주인공도 통째로 무덤에서 꺼내갔다.

 

대신에 무덤방 밖의 말 10마리는 그대로 남겨 놓았다. 파지릭 1호의 말은 10마리 모두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말을 부리는데 필수요소인 재갈과 고삐 외에도 각 종 동물문양으로 장식된 굴레장식과 안장 뿐만 아니라 말의 가면까지 확인된다. 또한 나무목제장식을 덮었던 수많은 금박들이 출토되었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대형고분이 5기인데, 그 중에서 말 가면이 확인된 무덤은 2호, 5호 외에 1호가 있다. 2호와 5호에서는 1마리분만 확인되었으나, 1호에서는 2마리 분의 말 가면이 확인되었다(이미 포스팅 되었음). 두 무덤 모두 남녀가 한 통나무관에 들어가 있었고, 미라처리된 것이다. 말 마스크가 있다고 해서 1호무덤에도 미라가 들어있었다는 보장은 없지만, 대형고분이고 말의 마스크가 모든 무덤에서 확인되지 않다는 점에서 1호 무덤의 주인공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정정도는 할 수 있다.

누가 알겠는가?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같은 결과가 도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파지릭 1호에서는 같은 유적의 다른 무덤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말의 굴레장식이 있다.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사람얼굴모양의 장식이 달린 것이다. 장식은 5개 달렸지만, 4인의 얼굴이다. 눈, 입, 코, 광대뼈모양이 다른 4명이 나무에 조각되었다. 아마도 1호무덤 주인공과 관련이 있을 듯 싶다(파지릭 1호에 제일 첫 번째 포스팅에서 찾아보시면 된다).

 

뿐만 아니라 가죽조각으로 사람얼굴이 표현된 유물도 출토되었다(그림 1-7). 이 사람의 머리 정수리에는 커다른 뿔 모양 혹은 나무모습의 장식이 연결되어 있다. 그 옆에는 동물의 귀인지, 나뭇잎인지 모를 장식도 붙어 있다. 이 유물의 용도 등은 확정할 수 없으나, 어딘가에 붙였을 것이다.

 

 

그림 1. 파지릭 1호출토 가죽아플리케, 사람얼굴모습(7)

 

파지릭 1호의 사람얼굴장식을 달고 있는 말을 상상해보면, 말 얼굴에 사람얼굴이 붙어 있는 모습인데, 반 대의 정황이 확인된 적이 있다.

 

파지릭 5호에서 얼굴은 사람인데, 머리에 사슴뿔이 달려 있고, 몸은 사슴인 표현이다(이미 포스팅했음). 이는 5호의 펠트로 제작된 벽걸이에서 확인되었다. 묘사된 동물이 말은 아니지만 사람과 동물이 같은 장면으로 묘사하고자 했다는 점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말(그림 2) 가운데 마스크가 있는 5번째 말을 탄 사람을 상상해 보자. 내가 말을 타지 않고, 그냥 아래에서 서 있고, 이 말을 탄 사람을 쳐다본다면, 나는 사람보다는 말에 더 눈길이 갔을 것 같다.

왜냐하면 말이 너무 화려해서 그 화려함을 찬찬히 쳐다봤을 것이다. 말은 이미 그리핀처럼 보였을 것(이 부분에 대한 포스팅은 이미 있음)이고 이게 말인가 상상의 그리핀이 실제로 살아왔나 하며 몇 번이나 쳐다보았을 것이기때문이다.

 

말을 화려하게 꾸민 이유는 이런 효과를 말 탄 이가 누리도록 한 게 아닐까?

되게 먼가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명품으로 몸을 휘감는 이유랑 비슷한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여기에 사람이 동물처럼 보이는 것도 동물이 사람처럼 보이는 그런 효과도 더해졌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보여주는 유물이 얼굴장식이 달린 말의 굴레와 파지릭 5호에서 출토되는 사람을 얼굴 빼고 동물로 표현한 펠트조각에서 엿볼 수 있다. ....... 신화?

 

 

그림 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말의 복원도, 1991년에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스키타이 황금 전 도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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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의 알타이 무덤에서는 인간과 함께 말이 매장되었다. 재밌는 점은 인간과 관련된 유물보다는 말과 관련된 유물이 더 많이 나온다는 점이다. 물론 파지릭 1호분은 주인공이 이미 도굴로 없어져 버려서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만, 동시대의 알타이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일명 ‘얼음공주’라고 불린 여성도 마찬가지이다. 유물은 대부분 그녀가 입고 있거나 착장하고 있는 머리장식이었다. 필자가 이야기 하는 것은 필요도 없는 유물을 무덤 안에 꽉 채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지릭 2호분에서도 주인공 관련 유물은 의복과 토기, 목기이다. 반면에 말은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사실 말을 부릴 때 필요한 것은 재갈과 고삐이다. 그 외는 전부 장식적인 요소인데, 말은 대부분 치장되었다.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 중에 일종인 파지릭 문화에서는 주인공 관련 유물 가운데는 거울도 있다. 얼음공주의 거울은 손잡이가 달린 목제로 만든 거울에 경면은 청동으로 만들어 붙인 것이다. 파지릭 유적의 2호분에서 출토된 것은 은제로 만든 거울을 뿔로 만든 받침대에 삽입해서 만들었다. 둘다 거울을 담는 주머니가 있었는데, 얼음공주 거울은 펠트로 만든 주머니 였고, 파지릭 2호분의 은제 거울은 표범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두 개의 포스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아크 알라하 3 유적 얼음공주의 거울

2020/01/3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3 유적(여성미라,'얼음공주')] - 시베리아 알타이 얼음공주의 거울과 목걸이

 

시베리아 알타이 얼음공주의 거울과 목걸이

2500년 전, 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우코크 고원에서도 아크 알라하 3유적 중에서 1호분에 묻힌 여성은 25~30세 혹은 조금 더 정확하게 28세에 생을 마감했다. 이제 까지 시베리아 알타이의 ‘얼음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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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지릭 2호분 은제 거울

2020/03/3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2호분] - 2500년 전 알타이 산 파지릭 유적의 2호 무덤을 마감하면서...

 

2500년 전 알타이 산 파지릭 유적의 2호 무덤을 마감하면서...

시베리아의 알타이 남부 파지릭계곡에는 2500년 전 공동묘지가 있다. 그곳의 이름은 파지릭 유적인데, 2호분에는 남성과 여성 미라가 확인되었다. 이 유적은 스키타이 문화를 이루는 한 장소로서, 알타이에 위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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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 가운데서 흑해와 가까운 쿠반 강(카프카스 산맥 북쪽, 강은 흑해로 흘러감) 유역에서 출토되는 거울은 청동으로 제작되었는데 손잡이에 동물문양장식이 부착되었다(그림 1). 예전에 이야기 한 바 있는 그리스-이오니아 양식의 유물로, 스키타이 인들이 그리스 공방에 주문해서 제작했었을 것으로 본다. 손잡이의 세로 방향 으로 깊게 파인 모습이나, 손잡이가 달린 거울은 그리스 거울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림 1. 에르미타주 소장, 쿠반 지역에서 출토된 스키타이 문화의 거울, 기원전 6세기로 추정,손잡이 포함 길이 35.5, 너비 18cm

 

손잡이가 달린 거울은 시베리아에서도 출토되지만, 막대기 모양의 손잡이 대신 해서 바로 동물문양장식이 부착된다. 청동으로 제작되었고, 맹수 두 마리가 서로 머리를 감고 있는 모습을 표현했다(그림 2-아래). 유물은 사글리-바치 II유적 출토품이다. 이 유적은 시베리아의 투바에 위치한다. 투바는 이미 공개한 바 있는 아르잔 유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유적은 기원전 5~4세기 가량으로 파지릭 유적 보다 늦다고 평가받는다.

 

시베리아에서 가장 이른 청동거울로 생각되는 유물은 손잡이가 없고, 거울에 꼭지가 붙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알타이의 서쪽에서 채집된 유물로 알려졌는데, 사슴 6마리가 경면(얼굴보는 면)의 반대쪽에 돌아가면서 표현되었다(그림 2-위). 중앙에 꼭지가 붙어 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재밌는 점은 이 거울의 사슴표현이다.

 

자세히 보면 사슴의 등에서 목과 가까운 부분에 볼록 솟은 표현이 있다. 발은 쭉 뻗어서 발로 선 자세로 표현되었다. 눈은 매우 지나치게 과장해서 둥글게 그렸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사슴의 등은 대게 편평하게 표현된다. 그리고 주로 사슴은 다리를 배 쪽으로 넣고 무릎을 꿇은 자세였지만, 이 사슴은 다리를 쭉 펴고 있다. 이 유물은 기원전 8~7세기 가량으로 평가받는다.

 

 

 

그림 2. 시베리아의 스키타이 문화의 거울, 위: 청동제, 알타이 서부지역 수집(부흐타르마 라고 알려짐). 에르미타주 소장, 13.5cm, 아래: 청동제, 사글리-바치II유적 기원전 5~4세기, 발굴품

 

거울은 발굴된 유물이 아니라 채집된 유물인데 어떻게 구체적인 연대가 나왔을까?

 

답은 사슴의 표현에 있다.

 

파지릭 고원에서 동쪽에 위치한 투바지역에서 발굴된 아르잔 1유적에서 확인된 유물 때문이다. 아르잔 1유적에서는 봉분(무덤을 덮은 흙) 위에서 사슴돌이 몇 개 발견되었다(그림 3). 사슴돌은 일종의 비석처럼 생긴 것인데, 주로 사슴이 그려져서 사슴돌이라고 한다.(그러나 사슴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사슴돌에는 등이 볼록 솟아있고, 발을 곧추세운 사슴이 그려져 있다(그림 3-1). 뿐만 아니라 이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제 사슴표현에도 발을 뻗어서 표현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아르잔 1유적의 연대가 기원전 834년 기원전 9세기에 이 유적이 만들어졌다면, 청동거울에 그려진 사슴문양도 그 때 유행했던 문양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사슴돌은 이 지역 청동기시대인 카라숙문화에서 아주 널리 유행했는데, 등이 솟은 사슴표현은 그 때부터 전해지던 것이다. 즉 사슴표현 중에서 아주 이른 표현방법이다.

 

 

그림 3. 아르잔 1유적의 봉분 위 사슴돌(1~6)

 

이런 이유 때문에 사슴문양 청동제 거울은 대략 기원전 8세기부터 늦게는 기원전 7세기에 만들어진 유물로 본다. 물론 사슴청동제 거울(그림 2-위)이 출토된 유적이 더 빠를 수 있지만, 고고학자들은 좀 더 보수적인 선택을 한다. 확실한 연대가 있는 유적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