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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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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 만들어진 무덤이 있다. 파지릭 유적이다. 여러 기의 무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1호분의 무덤상황을 설명한다.

 

아시다시피 파지릭 1호분은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 이 도둑은 무덤 구조를 잘 알았다. 무덤관이 있는 남쪽벽은 그대로 두고 주로 무덤의 빈공간이며, 유물을 두는 북쪽벽을 잘라냈다. 무덤방이 이중이었는데, 바깥에는 통나무 하나만 잘라내고 내부에는 크게 구멍을 냈다(그림 1).

 

그런데 그 도굴은 무덤이 축조된 같은 해에 도굴된 것으로 생각된다. 말 위를 덮은 통나무에서 잔디가 매우 많이 나 있었다. 이 잔디는 목화풀종류로 습지에서 잘 자란다. 이 풀의 이삭상태로 보아서 9월에 무덤이 새로 열렸다는 것을 식물학자 페트로프(В.А. Петров)가 분석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9월에 말을 죽였다는 점도 그대로 드러난다. 말의 발굽에 있는 형성된 각질이 없어진 상태였다. 왜냐하면 알타이에서는 주로 눈이 녹기 시작하는 4월이 되면 말을 직접 먹이지 않는다. 직접 풀을 뜯을 수 없을 때 대략 9월 쯤부터 먹이를 준다. 얼음이 얼기시작하기 전에 무덤은 만들어져야 하기에 그때가 9월이다. 대략 5개월간은 말은 방목상태가 되는데 그때가 말 굽의 각질이 없어지는 시점이다. 동물학자인 타라세비치(А.Ю. Тарасевич)가 분석한 결과이다.

 

파지릭 1호분은 9월 어느쯤에 만들어 졌을 것이다. 파지릭 계곡에는 9월 아침에는 서리가 끼고 밤에는 영하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며칠이 지나면 무덤은 얼어 붙는다. 도굴은 늦가을 쯤에 행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도굴꾼이 무덤을 열자 아직 덜 얼어 붙은 상부의 흙과 돌이 천장에서 떨어져서 무덤방 안에 원뿔 모양의 더미가 만들어졌다. 그 뒤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무덤안은 눈으로 차게 되고, 그 해 겨울 매우 추웠다면 그대로 얼어붙었을 것이다.

 

그랴즈노프가 처음 발굴했을 때 매장실은 얼음으로 가득 채워졌었다. 통나무관은 이미 열려진 채였고, 뚜껑을 뒤집어 놓은 채였다. 관 안에는 옷에 붙어 있던 장식만 약간 남아 있었다. 어제 포스팅한 유물가운데서 가죽으로 자른 산염소의 머리조각인데, 금박으로 도금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도굴꾼은 묻힌 사람을 통째로 꺼내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산염소의 머리모양 조각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파지릭 1호분의 주인공에 대한 내용은 도굴꾼이 통째로 꺼내어 간 까닭에 없다.

 

다행히 말과 말에 착장된 안장, 굴레장식 등은 그대로 였다. 말은 피부, 근육, 내장 및 내장 안에 소화되지 않은 내용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말이 묻힌 공간은 11㎡가량 된다. 말의 시체와 말 안장 등이 두께 50cm에 아주 조밀하게 매장되었다.

이미 소개된 무덤구덩이의 바닥 그림(어제포스팅)에는 말이 매우 불규칙적이게 들어간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규칙적이었는데, 비트(В.О. Витт) 교수의 도움이 있었다.

 

말은 다리를 배 아래로 넣고 머리를 구부린 채로 정해진 순서대로 무덤에 넣었다. 동쪽에 4마리, 서쪽에 네 마리를 넣고 무덤의 서쪽 끝에는 두 마리 말을 머리가 북쪽을 향하도록 가로방향으로 놓았다. 처음에 말이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것으로 보였던 것은 위에 놓인 통나무와 흙과 돌의 무게로 인해서 눌려서 생긴 현상이다. 무덤방 바깥에 세워둔 기둥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있었고 말은 이동했다.

 

그랴즈노프는 도굴당해서 무덤 주인공에 대한 정보는 없어졌지만, 도굴로 인해서 눈이 무덤 안에 쌓이면서, 무덤은 얼어붙었고, 그 결과 무덤안에서 유기물질로 만들어진 많은 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다는 평가를 했다...위기는 기회이다..머 이런..

(도굴당해서 열 받지만, 또 발굴이 괜히 한 것이 아니라고 평가받기 위해서는...필요한 구절이 아니었을까 싶기도하다)

 

파지릭 1호의 책이 출간된 것은 1950년이고, 발굴은 1929년에 했으며, 분석은 그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1993년에 발굴된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도 매장된 말의 상태가 좋았는데, 말 위에서 나온 풀을 분석한 결과 말은 가을에 죽었다. 무덤이 가을에 축조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같은 결과이다.

 

파지릭 유적과 같은 대형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통나무 300개 이상을 끌어와야 하며, 구덩이 파기 등 대역사인 것이다. 유목민들은 흩어져서 살았기 때문에 모여서 대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들의 생계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여름 초지에서 겨울초지로 옮기는 기간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때가 가을이다. 이것은 필자가 생각하는 부분이다. 무덤이 겨울이 되기 전에 만들어져야 하는.

 

그럼 사람도 그때 죽었어야만 했을까?

미라로 만들어져서 여러 달 동안 수레 혹은 마차에 싣고 여러 부족을 돌았다고 전해진다. 눈과 얼음이 있는 기간에는 마차가 이동할 수 없음으로, 이런 장례식을 치르는 기간은 정해진다. 죽는 시간은 정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파지릭 1호분에서 확인된 도굴 구멍-왼쪽 무덤방 천장, 오른쪽-2차(내부)무덤방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50,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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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서는 한 가족 혹은 친족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이 확인된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과 그 안에는 관을 두고, 무덤방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었다. 계곡의 모든 무덤이 같은 크기는 아닌데, 파지릭 유적에서는 대형 고분은 5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1호는 가장 먼저 발굴된 것이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무덤 구덩이에서도 유물이 발견된다. 1호에서는 나무 삽 조각, 이미 깨진 말뚝 4점, 말뚝을 박는데 사용된 일종의 나무 망치와 마차의 부속품이 확인되었다. 이음쇠 2개, 쐐기, 끝이 뾰족한 막대기 2개 등이다.

 

무덤방 안에서는 통나무관과 통나무관을 장식한 수탉 아플리케 장식(가죽)(어제 포스팅 참고), 산양머리조각(가죽)(그림1-6,7), 무덤방 벽에 붙었던 사자머리 아플리케(그림2)이 있다.

뿐만 아니라 양모로 제작된 그릇 받침대로 둥근 고리모양이다. 숫양의 꼬리뼈도 출토되었는데, 고깃덩어리를 부장했을 것이다. 목제 상의 다리(그림3-1), 목침(그림4-a), 목제 손잡이 달린 망치(그림 5-1,2), 토기 파편, 나무와 금제 잎으로 장식된 가죽 끈 등이 출토되었다.

 

그림 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산양머리조각(6,7)

 

그림 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사자머리아플리케

 

그림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제 상다리(1)

 

그림 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침(1). 루덴코는 이를 나무의자로 보았으나 목침이다. 이것은 서양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그림 5.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제망치(1,2)

 

무덤방의 바깥에는 말이 매장되었다. 모두 10마리이다. 말은 좁은 공간에 10마리가 부장되기 때문에 잘 정리되어 들어갔는데, 앞선 포스팅에서 말의 매장순서를 간략하게 모식화 한 것을 이미 공개했다.

말은 10마리 모두 재갈 뿐만 아니라 고삐를 연결하고 말 얼굴을 둘러싼 굴레와 안장이 모두 착장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면장식을 쓴 말은 2개 확인되었다. 같은 유적이라도 파지릭 2호와 5호에서 출토된 말은 모든 말에 장식이 착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랴즈노프는 10마리를 모두 복원해 놓았다(그림 6~23).

 

그림 6.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번 말

 

그림 7.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6과 동일

 

 

그림 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2번 말

 

그림 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3번 말

 

그림 9.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3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8과 동일

 

그림 10.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4번 말

 

그림 1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4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10과 동일

 

그림 1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

 

그림 1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의 굴레

 

그림 1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의 굴레의 굴레장식, 그림 13과 동일

 

그림 15.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6번 말의 굴레

 

그림 16.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7번 말

 

그림 17.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7번 말의 굴레와 안장, 그림 16과 동일

 

그림 1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말의 굴레, 그림 16과동일

 

 

그림 19.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8번 말, 이 말의 굴레장식은 이미 공개되었음

 

그림 20.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

 

그림 2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의 굴레, 그림 20와 동일

 

그림 2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의 굴레, 그림 20와 동일

 

그림 2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

 

그림 2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의 굴레

 

그림 2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의 굴레, 그림 23와 동일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50,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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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파지릭 계곡에는 2500년 전 무덤이 발견되었다. 한 계곡에는 여러 기의 무덤이 확인되는데, 주로 가족 혹은 친족들이 같은 공간을 차지했다. 이 시절 이 곳에는 매우 큰 무덤구덩이를 파고 구덩이 안에는 무덤방과 통나무관을 안치했다. 하지만 그렇게 큰 무덤은 아니고 소형무덤도 있다. 파지릭계곡에서 큰 무덤은 모두 5기이다. 어제 소개한 1호 무덤은 상부에 드러난 돌의 범위가 직경이 47m,높이는 2.2m정도이다. 그 안에 무덤 구덩이 크기는 7.2×7.2m가량이다.

 

무덤 구덩이 안에 무덤방 안은 관을 넣어두는 공간을 빼고는 빈 공간이 대부분이고, 무덤구덩이를 통나무 300개와 흙, 돌을 차례대로 채워 넣었기 때문에 대단히 계획적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무덤방안에서 관은 한쪽 벽에 치우치게 배치되어 정중앙은 비어 있는 상태가 된다. 아마도 파지릭 인들은 무덤 구덩이가 내려앉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했을 것이다.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그들 조상의 무덤을 보아서도 관은 한쪽 벽으로 부쳐두었을 것이다. 이 유적은 2500년 전으로 멀지 않은 곳에 바샤다르 유적이 있는데, 파지릭 유적보다 약 100여년 빠르다. 파지릭 유적에 매장된 혹은 무덤을 만든 사람들은 바샤다르 유적을 알았을 것이다.

 

 

그림 1. 파지릭 유적 1호 통나무 관

 

 

그림 2. 파지릭 유적 1호 통나무 관 복원

 

1호 통나무관은 관은 길이가 371cm, 너비 65-78cm, 높이가 58-60cm가량이다.(어제 포스팅에 잘못된 수치를 넣었다.) 뚜껑은 길이 371cm, 너비 54-61cm, 높이가 25-27cm이다.

이 관은 낙엽송의 하부를 이용한 것이다. 관의 구멍은 무덤으로 내려간 밧줄을 지탱하기 위한 구멍이다. 관의 바닥 두께는 9~11cm, 측벽 두께는 1.5~3cm, 상단 끝의 두께는 최대 25cm이다. 뚜껑은 큰 청동못으로 관에 고정되었지만, 이미 제거된 상태이다. 주로 나무못을 많이 사용하는데, 베렐 유적, 아크 알라하 3 유적에서는 청동못을 사용했다.

 

통나무관의 길이는 주인공의 계급에 따라서 달라지는데, 족장은 3.25m에서 긴 것은 5m까지, 귀족은 2.5~3m이고, 일반인은 관 대신에 나무판 위에 올려놓은 경우도 많다. 아이의 무덤은 무덤방을 따로 만들지 않고 1~1.3m의 나무판을 이용해서 간단하게 만든다.

 

파지릭 1호 통나무관의 측벽에는 나무 마개가 삽입되었는데, 비슷한 마개가 다른 관에서도 관찰된다. 통나무관의 뚜껑에는 금이 가 있는데, 이는 관을 만드는 동안에 생겨서 가죽끈으로 이를 보수한 흔적이 있다.

 

관은 가죽이나 자작나무껍질로 장식된다. 파지릭 무덤의 1호 관에는 통나무관의 양 측벽에 14개의 가죽아플리케가 조각되어 있다. 가장 중앙(그림 3-1)에는 수탉 머리와 날개가 표현된 가죽장식이 부착되었고(그림 2), 양 쪽에는 수탉의 전신(그림 3-2, 그림 2)이 가죽을 잘라서 만들어서 붙였다. 두 가죽 장식 모두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자른 것이다.

 

수탉은 동물문양장식 가운데, 독수리 보다 늦게 등장하는데, 큰 동물의 뿔과 갈기에 표현되기 시작하면서 등장한다. 닭이 이 지역에서 길렀다는 증거는 아직 없지만, 중국북부(만주)에는 암탉이 존재했다. 수탉은 의복, 토기, 못의 대가리, 문신 등에서 머리 혹은 머리의 벼슬만이 주로 확인된다. 러시아 학자들은 수탉이 독수리를 대체했다고 생각하는데, 그 예를 보이는 것이 베렐 유적에서는 거울 손잡이에 독수리와 수탉이 함께 장식된 유물이다.

 

 

그림 3. 파지릭 유적 1호 관의 가죽 아플리케 장식, 1-길이 18.5cm, 너비: 12cm, 2-길이: 18.5cm, 15.5cm.

 

그런데 정말로 수탉이 독수리를 대체했을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참고문헌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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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남부 알타이 파지릭 계곡에는 2500년 전 무덤이 남아 있다. 이 계곡의 무덤은 여러 기가 있는데, 그 가운데 미라의 존재로 가장 잘 알려진 2호와 5호 무덤은 이미 포스팅했다. 이 무덤은 루덴코라는 러시아 학자가 1947~1948년에 걸쳐서 발굴한 것이다.

 

그런데 2호 바로 옆에 있는 1호는 18년 정도 먼저 발굴되었고, 그랴즈노프라는 사람이 발굴했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최초로 발굴된 무덤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까지 ‘스키타이 문화’의 중심축이 흑해북안에 치우쳐 있었으나, 이를 시베리아로 관심을 갖게 하게 한 발굴이었다. 매우 중요한 발굴이었다고 생각된다.

 

 

2500년 전 시베리아 남부 알타이의 무덤은 소형도 있지만 대형 고분은 무덤구덩이를 크게 파고 통나무로 된 무덤방을 만들고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고, 통나무로 무덤구덩이를 덮고 흙과 돌로 무덤구덩이를 채우고 가장 위에는 돌로 마무리 하는 구조이다.

 

1호무덤도 마찬가지인데, 외관에서 드러난 무덤의 직경은 47m이고 높이는 2.2 m이다(그림 1).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7.2×7.2m, 깊이는 4m가량이다. 가장 상부에 돌을 드러내고 그 아래에는 무덤구덩이를 파낸 흙을 다시 채운 흙이 상부의 돌 아래부터 무덤구덩이 까지 채워졌다(그림 2). 그 아래에는 낙엽송 300개를 채워서 무덤을 덮고 있었다(그림 3).

 

그림 1. 파지릭 1호분의 평면도

 

그림 2. 파지릭 1호분의 단면도 (남북방향)

 

그림 3. 파지릭 1호분의 경관(1), 파지릭 1호분의 무덤 내부(2) 중 무덤을 덮고 있는 낙엽송의 존재

 

 

무덤구덩이는 정확하게 네모꼴이지만 가장 바닥에 설치된 무덤방은 사다리꼴에 가까운데, 무덤방 덮개를 기준으로 긴 변의 길이는 4.87m, 짧은 변의 길이는 3.35m이고, 깊이는 1.4m가량이다(그림 4). 무덤방 덮개의 가장 상부는 매우 두터운 3개의 통나무가 덮개와는 반대방향으로 놓인 것이 확인되었다. 무덤방은 무덤구덩이의 남쪽벽에 붙여서 설치되었다. 2중으로 바닥에서는 통나무로 된 관(2.6×1.2m)이 확인되었다(그림 5). 무덤방 사이에는 돌로 채워졌다(그림 3, 그림6) 북쪽에는 말이 10마리 부장되었다. 말을 부장한 곳에도 통나무로 덮은 채 였다.

 

 

그림 4.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천장

 

그림 5.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내부

 

 

그림 6. 파지릭 1호분의 무덤 단면도(동서방향)

 

 

그림 4에는 도굴구덩이가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그림 6과 7에는 천장에 도굴로 무덤천장을 절단한 흔적이 선명하다. 도굴구덩이로 인해서 무덤내부에는 원뿔모양으로 얼음이 차 있었다(그림 6, 그림 8-2).

 

그림 7. 파지릭 1호분의 무덤구덩이 내부 천장

 

 

 

그림 8. 파지릭 1호분의 무덤방 내부 상태, 1-관이 놓인 남쪽벽, 2- 그 반대편, 무덤방은 1차와 2차무덤방이 있었다. 도굴로 인해서 북쪽 내벽은 크게 구멍이 나 있었고, 외벽은 하나의 통나무만 잘려 진 상태였다.

 

 

상부에 통나무 300개를 지지하기 위해서 무덤방 바깥에 북쪽과 남쪽에 이를 지지하기 위해서 수직으로 각각 3개씩 나무를 세워놓았다(그림4, 그림 5). 무덤의 단면에서도 확인된다(그림 3. 그림 6)

 

흥미로운 점은 무덤방의 평면형태이다.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는데, 파지릭 2호분도 모를 줄여서 정확하게 네모꼴이 아니었다. 평면형태가 직각사다리꼴에 가까웠다. 왜 그랬을까?

 

 

 

참고문헌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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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남부의 파지릭 5호분에서는 펠트로 제작된 대형 캐노피가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양모를 짠 카펫도 출토되었다. 200×185cm 이다(그림 1).

 

 가장 내부에는 긴네모꼴 안에 십자형 도형 24개(가로 4, 세로 6개)가 표현되었다(그림 2). 십자형 도형으로 보이지만, 연꽃봉우리가 4잎으로 도식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 연꽃 봉우리 모양은 동물문양장식을 표현한 뒤에 다시 보인다.

 이 연꽃봉우리 밖에는 그리핀이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는 뒤로 젖히고, 날개 및 꼬리가 위로 올라가게 한 것이다. 그리핀 다음에는 큰 뿔이 달린 사슴(혹은 순록) 이 표현되었다. 그 다음에는 말탄 전사가 표현되었는데, 각 면에 7개씩 49개가 표현되었다. 말은 목을 구부리게 표현되었고, 머리에는 깃털을 장식하고, 코리는 활로 묶여 있다. 무늬가 있는 안장 덮개가 표현되었다. 가장 마지막에는 다시 그리핀 모양을 반복해서 그리고 있다. 이 카펫에는 3종류의 동물이 등장한다.

 

그림 1. 파지릭 5호 출토, 카펫

 

그림 2. 파지릭 5호 출토 카펫의 세부(그림 1과 동일)

 

고대 이란의 표현된다고 한다.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그리핀은 독수리의 머리와 목에 갈기를 표현하는 것이 인기가 있었는데, 그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 카펫에 표현된 그리핀은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제이말, 1979).

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이란에서는 안장이 없어서 유라시아 유목민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말 장식, 전사의 모습과 의복, 목을 구부린 말의 표현등은 아무다리야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 봉헌 판에 있는 유목민의 인물 이미지와 유사하다(제이말 1979).

 

이 유물은 양모의 털로 씨실과 날씰을 교차해서 짠 것이다. 그런데 실을 만드는 털 가운데는 아주 소량으로 죽은 양의 털을 이용한 흔적을 코노노프(루덴코 1968)가 확인했고 후에 미콜라이축(1999)도 다시 확인했다.

 

이 유물에 대해서 그랴즈노프와 루덴코는 알타이에서 제작되었다고 생각했다(루덴코 1961). 온갖 종류를 다 응용하는 고대 이 지역의 전통은 유목민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알타이 유목민의 기술로 제작될 수 없었고, 이란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아르타모프(1973)도 있었다.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는 아마도 그 당시 세상 문화의 중심이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참고문헌

아르타모프 1973Артамонов М.И.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М.: Искусство, 1973. 279 с.(아르타모프 1973, 사카족의 부(富)

제이말 1979 Зеймаль Е.В.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Л.: Искусство, 1979. С. 39, 44, 51-52, 64.(제이말 1973, 아무다르 유적: 전시회도록)

미콜라이축 1999 Миколайчук Е.А. Исследование физико-химического состояния ворсового шерстяного ковра из пятого Пазырыкского кургана // Реставрационный сб. СПб.: АО «Славия», 1999. Вып. 2. С. 13-17. (미콜라이축 1999, 파지릭 유적의 5호에서 출토된 카펫의 화학적 분석

루덴코 1961, Руденко С.И. Искусство Алтая и Передней Азии (середина I тыс. до н.э.). М.: Издат. фирма РАН «Восточная литература», 1961. 66 с.(루덴코 1961, 알타이와 근동의 예술)

루덴코 1968 Руденко С.И. Древнейшие в мире художественные ковры и ткани. М.: Искусство, 1968. 121 с.(루덴코 1968, 고대 예술적인 양탄자와 직조물)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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