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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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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루덴코는 알타이의 카라콜 강 가에서 큰 고분 2기를 발굴했다. ‘바샤다르’라고 명명된 유적으로 바샤다르 유적의 1호와 2호가 발굴된 것이다.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무덤방 속에 통나무관 2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앞서 살펴본 파지릭 유적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왜냐하면 파지릭 유적에서는 남녀가 함께 한 통나무관에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도 통나무관 2개가 있었으나 이 무덤에는 남성 2명이었다.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는 원래 혼자 매장(단인장)되었기 때문에 2인의 매장시설과는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루덴코가 2기를 선택해서 발굴한 것은 57기 가운데 가장 큰 고분이었기 때문인데, 바샤다르 유적의 1호분은 어떨까?

 

2020/07/06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바샤다르 유적] - 26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미라가 출토된 곳

26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미라가 출토된 곳

바샤다르 유적은 앞에서 본 파지릭 유적보다 서쪽으로 약 162km(직선거리) 떨어진 알타이 산 위에 위치한다. 해발 1200m가량의 산 위의 분지 지형에서 무덤으로 보이는 시설물이 57기가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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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다르 유적 1호분은 유적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직경 40m이고, 봉분 중앙의 높이는 1.6m, 가장 높은 곳의 높이는 2m이다. 봉분은 가운데가 함몰되어서 가장 중앙이 높지 않다. 봉분이 함몰된 것은 무덤아래에 있는 무덤방에 구멍이 생기면서 그 쪽으로 무덤을 덮은 흙과 돌이 쓰러져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는 우육고원에 위치했던 아르잔-2 유적을 제외하고 파지릭 유적 및 아크 알라하 1 유적, 아크 알라하3 유적도 마찬가지였다.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특이하게 무덤을 덮은 봉분에서 후대의 무덤을 쓴 흔적이 남아 있다. 아주 약간 판 것으로 비교적 최근의 알타이 사람 무덤(그림 1의 검은색 부분)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이 무덤 때문에 아래에 있던 2600년 전 무덤에 손상이 가지는 않았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1호분

 

봉분 아래의 무덤구덩이는 봉분의 중앙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무덤구덩이의 동쪽벽은 봉분 중심을 기준으로 2m정도 서쪽으로 치우쳤다.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봉분의 가장자리에 큰 돌을 놓아서 무덤 경계(호석)를 설정한 것이 확인되었다.

 

무덤의 가장 상층은 큰 돌을 쌓았고, 아래로 갈수록 작은 돌을 썼으며, 큰 돌 사이에는 작은 돌을 써서 공극을 채웠다. 무덤방 아래에는 렌즈모양의 얼음층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무덤 남쪽 중앙의 봉분 아래에서 토기와 많은 양의 양뼈(앞다리와 갈비뼈)가 확인되었다.

 

무덤구덩이는 단면이 역사다리꼴 모양(그림 1의 아래, 단면도)이어서 앞서 살펴본 2호분과는 다르다. 무덤구덩이의 입구(4.2×4.8m)는 넓지만 바닥은 좁은 형태(2.9×3.8m)이다. 깊이는 3.2m이다.

 

바샤다르 유적 1호분에도 무덤구덩이 아래에 얼음층(영구동토층이라고 불림)이 확인되었으나, 무덤의 경계보다는 작은 범위에서 확인되었다. 앞서 살펴본 파지릭 유적에서는 봉분의 크기와 무덤방 아래의 얼음층의 너비가 같은 범위로 확인되었다. 얼음층이 형성하게 된 여러 가지 원인 중에서 돌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루덴코(1953)는 생각했다.

 

2020/03/0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2호분] - 기원전 6~5세기 알타이 산의 무덤아래 사람이 만든 냉동고

기원전 6~5세기 알타이 산의 무덤아래 사람이 만든 냉동고

알타이 산맥은 지형이 아주 복잡하고 높아서 이 지역에서 발원한 강과 강의 지류가 많이 있다. 파지릭 유적이 있는 파지릭 계곡은 연평균 기온이 낮고, 겨울이 길다. 영구동토대가 형성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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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샤다르 유적 1호에서는 얼음층의 너비가 넓지 않고, 무덤 구덩이가 깊지 않아서 무덤방 안의 유기물질이 잘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무덤구덩이 남쪽 절반에는 1.4×3.5m, 높이 1.2m의 무덤방이 설치되었다. 무덤방의 각 벽은 4개의 통나무를 쌓아서 만든 것이다. 덮개는 자작나무를 두 줄로 사용했는데, 무덤방의 남북벽에 걸쳤다. 자작나무 위에 자작나무 껍데기로 다시 덮었다. 무덤방의 외곽에는 북벽과 남벽에 높이 1.5~1.6m, 직경 30~36cm의 통나무를 각각 3개씩 세웠다. 무덤방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림 2. 바샤다르 유적의 1호분. 덮개 제거 후, 덮개 제거 전의 모습은 없었다. 화살표 방향은 북쪽을 의미.

 

말은 모두 7마리가 매장되었는데, 무덤구덩이 북쪽벽이 허물어지면서 말의 위치가 움직여서 처음 말이 매장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서쪽에 4마리, 동쪽에 3마리가 매장되었을 것이다. 말은 3~8세 가량이다.

 

바샤다르 유적 1호분에는 통나무관 1기에 젊은 남성이 묻혔다. 무덤방의 천장이 무너지면서 통나무관 덮개가 부서진 상태였는데, 남아 있는 통나무관은 길이가 2.4m 너비는 0.6~0.7m이다.

 

바샤다르 유적 1호분은 도굴은 되지 않아서 죽은 사자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무덤구덩이 아래의 얼음층이 작게 형성되고, 상대적으로 깊지 않은 무덤방으로 인해서 무덤안의 유기물질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무덤이 완전히 얼어붙지 않아서 무덤방도 붕괴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말의 상태도 좋지 않았으며, 금속제 재갈과 굴레를 장식하던 금판만 약간 남아 도굴당한 무덤보다 마구관련 유물이 적은 편이었다. [도굴꾼은 어떻게 알았을까? ]

 

 

 

 

그림 3. 바샤다르 유적 1호분 발굴모습,1-봉분제거 과정, 2-무덤구덩이가 드러난 모습

 

 

 

그림 4. 바샤다르 유적 1호분 발굴과정, 1-무덤구덩이, 2-통나무관 안의 인골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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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인 알타이 지역에 입지한 파지릭 문화는 파지릭 유적을 발굴하면서 그 곳에서 나온 매장문화의 특징을 일컫는 것이다. 무덤구덩이에 나무로 된 방(목곽)을 설치하고 통나무관을 넣고 시신을 안치하며 말을 함께 매장하는 특징은 알타이의 스키타이문화(파지릭문화) 뿐만 아니라 흑해 북쪽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무덤구덩이의 모양, 무덤방의 구조, 지표상에 들어나는 봉분(무덤을 덮은 흙)의 모습 등은 다르다. 시신을 미라처리 하는 것은 알타이 스키타이 문화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파지릭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인 파지릭 유적도 도굴당했고, 바샤다르 유적도 도굴당했다. 하지만 바샤다르 유적은 그 피해가 더 심한데, 적어도 파지릭 유적에서는 말의 매장부분은 많이 손대지 못했지만,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그 부분에도 피해가 심했다. 말을 통째로 꺼낼 수 없으니 무덤방에 들어간 도둑은 북쪽벽에 구멍을 내고 말을 잘라서 꺼냈고, 그 잔해가 무덤방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말 14마리를 장식한 굴레와 마구도 손상을 많이 당했다.

하지만 남아 있는 자료를 살펴보면 역시 말과 관련된 유물이 많다. 바샤다르 유적은 파지릭 유적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다고 생각하는데, 말을 장식하는 것에도 차이가 있다. 파지릭 유적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100년 전부터 사용하던 말 장식을 그대로 사용한 것도 정말 따분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나무를 깍고 금박지에 싸서 말의 굴레에 단 점, 청동재갈과 재갈멈치를 사용한 점은 바샤다르 유적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살펴본 아르잔-2 유적은 바샤다르 유적 보다 약 100년 정도 앞선다. 아르잔-2 유적에서는 재갈과 재갈멈치 및 굴레장식은 청동(그림 4)으로 제작되었다. 100년 늦은 바샤다르 유적에서는재갈과 재갈멈치는 청동이지만 굴레장식은 나무로 제작(그림 1, 그림 3)된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2호분 마구

 

바샤다르-2 유적에서 잘 남아 있는 마구세트(재갈, 재갈멈치, 굴레장식)는 7번 말의 것(그림 1, 그림 3)이다. 발굴당시에는 가죽굴레가 재갈에 붙어 있었는데(그림 1), 2017년 영국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 도록(그림3)에서는 없어진 채로 전시되었다.

 

 

그림2. 마구 각 부위 명칭

 

 

 

그림 3. 바샤다르 유적 2호분 마구(그림 1과 동일), 재갈멈치길이: 27cm, 재갈의 길이:21.7cm, 재갈구멍직경: 7.8cm

 

 

이 유물은 재갈멈치가 청동으로 제작된 것이다. 재갈멈치에는 굴레끈을 연결하기 위해서 구멍이 2개 있다. 아르잔-2유적의 유물을 상기해보면 재갈멈치는 화살처럼 휜 ‘(’모양(그림 4)이지만, 바샤다르 유적은 ‘S’형이고 그 끝에 장식판이 붙었다. 재갈멈치를 끼우기 위한 재갈의 고리모양은 원형이다. 지금 언급한 것은 파지릭 문화의 초기 문화의 특징으로 알려진 것이다.

 

 

 

그림 4. 아르잔 유적 2호분 말 퇴장지에서 출토된 마구를 기반으로 한 말 복원도. 아르잔 유적 2호분에서 출토된 재갈과 재갈멈치는 16호 무덤방, 퇴장지에서 출토된 것이 다르다. 바샤다르 유적 2호분 보다 약 100년 정도 빠른 유물.

 

 

그런데 같은 무덤에서 출토된 재갈멈치 가운데는 청동이 아닌 나무로 제작된 것도 있다(그림 5-1). ‘S’자형으로 양 끝에 독수리머리 그리핀이 달려 있다. 독수리가 아닌 하이브리드 동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귀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림 5. 바샤다르 유적 2호분 출토, 재갈멈치, 1-나무, 2-청동(그림1,3의 재갈멈치와 동일). 

 

스테파노바(2006)는 재갈멈치에 달려 있는 구름모양 같은 장식판이 그림 5-1의 그리핀과 같은 의미라고 보았다. 필자도 동의하는데, 재질이 다르기 때문에 나무처럼 세밀하게 표현을 못했을 수 있다. 어쨌든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 재갈멈치 장식으로 나무로 된 그리핀이 사용된 것(그림 5-1)은 사실이다.

 

 

100년 뒤의 파지릭 유적 및 아크 알라하 1, 아크 알라하 3 유적의 유물과 다른 점이 또 있는데, 재걸멈치를 연결하는 ‘Y’자 부위이다. 그림 1에서는 이 부분이 가죽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 3에서 가장 위의 둥근 원판 모양은 말 이마를 장식하는 것(당호)이다.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 출토된 말 이마장식은 모두 원판(그림 6)이다.

 

 

그림 6. 바샤다르 유적 2호분 출토, 말 이마 장식

 

 

참고문헌

 

Степанова.Е.В. Эволюция конского снаряжения и относительная хронология памятников пазырыкской культуры.//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вести .Вып. 13. СПб: 2006. 102-150 с.(스테파노바, 2006, 파지릭 문화의 마구 변천과정과 연대)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추구노프, 파르친게르, 나게르 2017, 투바의 아르잔-2, 스키타이 차르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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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알타이의 큰 고분에서 발굴된 기원전 5세기 유적에서 미라가 남아 있는 곳은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일명 얼음공주), 파지릭 2호분의 남녀, 파지릭 5호분의 남녀,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 남성 이다. 현재 소개하고 있는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도 남녀의 미라가 있었을 것이지만 여성은 훼손이 심해서 그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고, 남성은 통째로 없어졌다.

 

그 중에서 문신이 남아 있는 미라는 얼음공주, 파지릭 2호분의 60세 남성,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기마전사였다. 즉 미라로 발견되었지만 파지릭 2호분의 여성과 같은 유적 5호분의 남녀에게서는 발굴당시에는 전혀 문신이 발견되지 않았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의 문신도 발굴당시에는 아주 밝은색 피부색 위에서 선명하게 들어났지만 공기중에 드러나면서 피부색이 검게 변하면서 문신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특별한 보존처리를 통해서만 드러났다(코젤초프, 로마코프 2000).

 

미라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보관하면서 일 년에 2번씩 사진을 찍고 여러 검사를 했으나 아무것도 별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으나 2004년 10월에 파지릭 2호분(여성)과 파지릭 5호분(남성과 여성)의 미라 3구를 적외선 촬영하던 가운데서 문신이 발견되었다. 이 세 구의 미라는 피부가 매우 검게 변해서 육안으로는 문신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간 필자가 앞서 문신이 발견된 미라에 대한 정보는 모두 이 논문( 바르코바, 판코바 2005)이 발표되기 이전의 자료였다. 아크 알라하 3유적(폴로스막 2001), 파지릭 2호분의 남성(루덴코 1953),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몰로딘 외 2000)은 오늘 소개하는 자료보다 이전 자료를 보고 소개한 것이다.  결국 이 세 구의 미라 외에도 발굴된 파지릭 유적의 모든 미라에 문신이 그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죄송^^)]

 

적외선 촬영을 통해서 미라의 문신을 발견한 것은 문신에 사용된 염료가 그을음이었기 때문이다. 적외선 촬영에서 그을음을 사용해서 그린 문신은 선명하게 드러나고 피부는 반사되게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적외선 촬영도 한계가 있다고 한다. 문신은 팔과 다리에 그려져 있다. 신체의 볼록한 표면을 사진으로 찍어서 그림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연속촬영을 해야만 하는데, 제한이 있다. 삼각대 위에 고정된 카메라는 수직과 수평 이동만 가능한데, 미라를 여러 위치에서 찍으려면 각도가 맞지 않는 부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특히 미라가 나무와 같은 막대기처럼 굳어 있는 상태에서 손과 발 안쪽 표면에 있는 이미지는 비스듬히 찍어야 하지만 카메라로 찍을 수 없는 부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신의 세부모양이나 이미지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현 시점(2004년)에 복원된 문신의 이미지는 덜 정확할 수도 있다.

 

파지릭 2호분의 남성미라는 이미 문신으로 잘 알려져 있다. 발견당시에 사자의 몸은 조각난 상태였다는 점을 여러분은 이미 기억하실 것이다. 그는 양 어깨 및 팔, 가슴, 등, 오른쪽 무릎아래에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포스팅참고). 적외선 촬영한 결과 오른손의 엄지손가락에도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그림 1).

 

2020/03/1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2호분] - 2500년 전 알타이의 남성미라

 

2500년 전 알타이의 남성미라

스키타이 문화에는 사람이 죽으면 미라로 처리하는 장례풍습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필자가 나름 자세하게 공개했지만, 이미 한국에서도 서울과 부산에 다녀간 적인 있는 시베리아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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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파지릭 유적 2호분의 남성미라 오른손 손가락에 그려진 문신, 수탉

 

 

파지릭 유적 2호분의 여성미라는 함께 매장된 남성과는 달리 문신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 역시 왼쪽 어깨, 오른손 손목, 왼손 손목에 문신이 그려진 상태였다. 특히 왼쪽 어깨(그림 2-1), 오른손 어깨아래(그림 2-2)에 그려진 것은 각각 그리핀과 우제류이다. 그리핀은 얼음공주 어깨에서 발견된 것과 매우 비슷하고, 머리없는 우제류는 같은 무덤의 남성 어깨에 그려진 그림과도 매우 유사하다.

 

 

그림 2. 파지릭 유적 2호분의 여성미라의 문신. 1-왼쪽 어깨문신, 2-오른쪽 어깨 아래(상완), 3- 오른손 손목, 4-적외선촬영

 

파지릭 5호분의 남녀미라는 다행히 훼손당하지 않았으나, 문신을 발견한 것은 2004년이다. 발굴한지 50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은 이 미라에도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파지릭 5호분에는 마차와 대형 캐노피로 유명한 무덤이었다. 2010년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파지릭 5호분만 특별전을 한 적이 있는데, 미라도 그때 전시되었다.

 

2020/04/0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5호분] -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남성과 여성미라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남성과 여성미라

*사진은 좀 그렇습니다..내용상..... 2500년 전 알타이의 파지릭 유적 5호분에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하나의 통나무관에 매장되었다. 2호분에서도 같은 현상이 확인되었다. 2호분은 40대 가량의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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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파지릭 유적 5호분 남성미라의 왼쪽 어깨문신. 어깨에 걸쳐서 등 뒤에까지 호랑이가 이어져서 그려졌다.

 

 

그림 4. 파지릭 유적 5호분 남성미라의 오른쪽 어깨 아래(상완)문신. 굽이 있는 동물이다.

 

그림 5. 파지릭 유적 5호분 남성미라의 오른쪽 하완에 그려진 문신, 그림4와 이어지는 문양이다. 말과 함께 꼬리가 긴 다른 동물(호랑이 추정)이 그려져 있다.

 

 

파지릭 5호분 남성미라의 뒷면과 엉덩이에도 문신이 그려졌다. 이 부분은 미라에 생긴 주름으로 인해서 사진촬영이 잘 되지 않은 부분이다. 위의 문신은 다리 4개이고 그 아래에는 동물의 다리와 머리가 표현되어 있는데, 그리핀의 머리처럼 보인다.

 

그림 6. 파지릭 유적 5호분 남성미라의 허리아래부터 엉덩이에 그려진 문신

 

 

파지릭 5호분의 남성미라는 왼손과 오른손 엄지손가락(그림 7)에 닭 그림을 그려넣었다. 파지릭 2호분의 남성 오른손 엄지(그림1)에도 수탉이 그려져 있었다. 여성에게서는 없는 그림이다.

이 남성은 왼쪽 허벅지(그림 8)과 오른쪽 발목(그림 9)에도 문신이 그려졌는데, 상반신에 그려진 것과는 다른 문양이다. 굽이 있는 동물이지만 상반신의 동물들은 역동적인 자세였다면 하반신에 그려진 동물은 열을 짓고 서 있는 자세이다.

 

 

림 7. 파지릭 유적 5호분 남성미라의 왼손(1)과 오른손(2)

 

그림 8. 파지릭 유적 5호분 남성미라의 왼쪽 허벅지

 

그림 9. 파지릭 유적 5호분 남성미라의 오른쪽 발목

 

 

파지릭 유적 5호분의 남성과 함께 같은 무덤방, 같은 통나무관에 매장된 여성도 문신(그림 10~13)이 새겨졌다. 양 손목 위(그림 10, 11, 12)과 양 손의 네 번째 손가락(그림 13), 왼쪽 엄지손가락(그림 11, 13-2의 가장 상단)이다. 특히 오른쪽 손목 위에 새겨진 문신은 손목의 전면과 뒷면 전체에 그려졌다. 상단에는 호랑이가 사슴을 물어뜯는 장면, 하단에는 호랑이와 표범이 사슴을 공격하는 투쟁문양이 그려졌다.

두 마리 맹수가 사슴이나 양을 공격하는 장면은 표트르 1세의 황금유물컬렉션 유물에서 잘 알려진 그림이다.

 

그림 10. 파지릭 유적 5호분 여성미라의 손목 위

 

 

그림 11. 파지릭 유적 5호분 여성미라의 왼쪽 손목 위뿐만 아니라 왼쪽 엄지손가락에도 문신이 남아 있다. 새 그림인데, 그림 13의 2에 위에 그려진 새 그림이다.

 

 

 

그림 12. 파지릭 유적 5호분 여성미라의 오른쪽 손목 위

 

 

 

그림 13. 파지릭 유적 5호분 여성미라의 양 손.  1-오른손, 2번의 왼손가락의 네 번째 문신,  새 그림은 엄지손가락에 그려진 것이다.

 

일명 얼음공주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와 파지릭 유적 2호분의 여성미라는 문신의 그림이나 위치가 매우 비슷한 편이다. 그러나 파지릭 유적 5호분의 여성미라에는 앞의 두 여성에게는 없던 동물투쟁문양이 그려져 있다. 특히 호랑이는 파지릭 5호분의 남성(왼쪽어깨)와 파지릭 2호분의 남성 왼쪽 등에 그려졌던 문신이다.

 

 

 

 

 

참고문헌

Козельцов В.Л., Ромаков Ю.А. Новый способ сохранения человеческих мумий // Археология, этнография и антропология Евразии. 2000. №4. С. 103-106.(코젤초프, 로마코프 2000, 미라보존의 새로운 방법//유라시아의 고고학 민족학 인류학)

Баркова Л.Л., Панкова С.В. 2005 : Татуировки на мумиях из Больших Пазырыкских курганов (новые материалы). // АЭАЕ. 2005. №2 (22). С. 48-59.(바르코바, 판코바 2005, 파지릭 대형 고분의 미라에 새겨진 문신(최신자료)//유라시아의 고고학 민족학 인류학)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https://rg.ru/2010/12/09/ermitaj-altay.html

파지릭 5호분 특별전 신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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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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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알타이의 칼라콜 계곡에는 2600년 전 미라가 잠들었던 바샤다르 라고 하는 유적이 있다. 이 유적에서 2호는 통나무관 2개가 있었다. 앞서서 보았던 파지릭 유적에서 남녀가 함께 매장될 경우 통나무관 1개를 이용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파지릭 유적이 바샤다르 유적 보다 약 100년 정도 늦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파지릭 유적과 비슷한 시점에 남녀가 같은 통나무에 매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샤다르 유적 2호에서 확인된 통나무관 1개는 엎어진 채로 확인되었는데, 여성의 관으로 통남관 조차도 거의 파손이 심한 상태였고, 가장 남쪽에 고정되었던 통나무관은 그나마 잘 남아 있다. 이 안에 들어 있었던 남성미라는 정식 발굴시에는 이미 없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발견된 통나무관은 루덴코는 어디서도 볼 수 없다고 평가했다. 우선 관은 낙엽수가 아닌 잣나무 종류로 만들어진 것이다. 관의 가장자리 끝에는 보통 귀가 하나씩 이었으나 바샤다르 유적 2호분의 관은 관의 귀가 두 개다. 뿐만 아니라 관의 뚜껑은 여물통 모양이 아니라 편평하다. 관의 한쪽 옆은 뚫린 형태로 무덤방 벽에 붙인 걸 감안해서 만든 것이다. 길이는 3.1m가량이고, 높이는 0.56m이다. 통나무 관의 가장 위쪽에는 구멍이 있는데, 같은 간격으로 낸 것이다. 이 곳에는 청동 못(그림 2-1,2)을 밖았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2호의 통나무관의 덮개(위)와 관(아래)

 

 

 

그림 2. 바샤다르 유적 2호 통나무관의 못(1,2,3,4)

 

 

통나무관과 덮개에는 호랑이가 주요한 주제이다. 덮개에는 호랑이가 산양과 멧돼지 및 사슴(elk) 등이 호랑이에게 제압당하는 장면이다. 관에 그려진 호랑이 4마리 중 첫 번째 호랑이는 산양을 제압하고 있다.

 

 

 

그림 3. 바샤다르 유적의 통나무관 덮개(그림1과 동일), 필자편집

 

 

호랑이는 호랑이처럼 보이지만, (실제) 호랑이와는 다르다.

 

무슨 소리?

 

사실적으로 표현해서 각 동물의 종류를 알 수 있을 정도이지만, 추상적인 표현도 가미되었다는 이야기다. 호랑이의 표면을 장식한 곡선 문양과 우제류를 장식한 나선문양은 실제 동물에서는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루덴코는 파지릭문화 동물문양장식의 특징에서 기하학적인 표현이 덧 입혀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페레보드치코바도 사실적인 동물표현에 기하학적인 내부표현방법이 파지릭문화 동물문양장식의 특징이라고 보았다.

 

사실 동물표현에 나선문 혹은 동심원문을 표현하는 방법은 아르잔-2호의 무덤방 5호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예를 들면 무덤방 5호의 여성 주인공의 가슴장식 혹은 목걸이는 금으로 제작된 것이다. 호랑이를 포함한 우제류가 표현되었는데, 동물 사이를 메꾸는 것은 나선문양이었다. 같은 유적의 무덤방 5호에서 확인된 모형 솥에도 여러 동물이 장식되어 있고 그 사이를 나선문양이 메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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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통나무관에 새겨진 동물을 표현하고 있는 나선문양(우제류) 및 파상문(호랑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같은 통나무관에 새겨진 굽동물의 몸통은 털을 모방한 것일까?

 

 

 

그림4. 바샤다르 유적2호분의 통나무관의 덮개(위)와 관(아래)에 새겨진 호랑이

 

 

 

 

그림 5.  바샤다르 유적2호분의 통나무관의 덮개에 새겨진 사슴

 

 

 

그림 6.  바샤다르 유적2호분의 통나무관의 덮개에 새겨진 산양

 

 

 

 

그림 7. 바샤다르 유적2호분의 통나무관의 덮개에 새겨진 멧돼지

 

 

 

 

그림 8. 바샤다르 유적2호분의 통나무관의 덮개에 새겨진 산양

 

자세히 살펴보면 동물의 어깨와 대퇴부에도 같은 표현이다. 실제 동물은 몸통과 그 부분의 털의 색깔이 다르지만 통나무관에는 같은 표현이 되어 있다. 그냥 (통나무에 동물을 새긴) 장인이 그런 것을 구분하지 않았다고 하기에는 같은 그는 실력이 너무 좋다. 동물의 종(種)을 구분할 정도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 동물의 내부표현은 같은 문양을 반복한 것이다.

 

나선문양, 파상문이 실제 의미하는 바는 알 수 없지만, 계속해서 반복된다. 반복적인 요소는 내부를 표현하는 방법 뿐만 아니라 동물의 자세도 마찬가지이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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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다르 유적은 앞서 살펴본 파지릭 유적 보다 대략 100년 정도 이른 유적으로 생각한다. 대체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를 일종의 지역문화로서 ‘파지릭 문화’라고 한다. 파지릭 유적을 1947년에 발굴해서 이 유적에서 확인된 매장문화의 특징을 파지릭 문화(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라고 했다. 그런데 1950년에 바샤다르 유적을 발굴해 보니 ‘파지릭문화’의 특징이 이 유적에도 많이 확인되어서 이 유적도 파지릭 문화의 한 유적이 된 것이다. 바샤다르 유적이 파지릭 유적 보다 이르다고 해서 문화명칭을 쉽게 바꾸지는 않는다. 이미 다 잘 알려진 것이 ‘파지릭문화’이기 때문이다.

 

헤로도투스가 역사에 기록한 스키타이 사람들의 문화 중에서 왕의 장례식 치르는 장면에 미라처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재밌게도 19세기 말부터 아직 로마노프 왕조가 있을 때(혁명 전) 러시아제국고고학회가 발굴을 시작한(연구하기 시작한)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문화라고 믿던 유적에는 미라가 발견되지 않았다.

 

스키타이 문화권 중에서 내장을 발라내고 피부에 발삼(향료와 오일을 섞은 일종의 연고)처리를 한 미라처리 기법은 시베리아 알타이에서만 확인된다. 스키타이 문화중에서 미누신스크 분지에 위치한 타가르문화에서는 미라 비슷한 기법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알타이 미라와는 다르다. (타가르 문화문화도 동물문양장식, 마구, 무기 등이 확인되어서 스키타이 문화권의 일부로 본다. 앞에서 살펴본 아르잔 유적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편이다.)

 

포스팅(표에서 타가르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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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다르 유적의 2호는 직경이 58m 정도 된다. 1호는 직경이 40m이다. 가장 중심부의 높이는 1.85m, 가장 높은 곳의 높이는 2.7m가량이다. 구글 인공위성지도로 봉분이 보일 정도이니 도굴꾼들에겐 ‘어서 잡수셔’하는 의미로 보였을 것이다. 역시 도굴당한 흔적(그림 3, 그림 4)이 생생하다. [러시아의 알타이나 카자흐스탄, 몽골 등등 봉분이 있는 큰 무덤은 대부분 도굴꾼 들의 표적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금딱지 들을 주워가고 다른 것들은 남겨 놓고 가서 그나마 정보가 남아 있다]

그림 1의 봉분 위의 검은 색 표시는 도굴한 흔적은 아니다. 이는 근현대에 들어서 지역주민들이 봉분위에 자신들의 무덤을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그 옛날의 무덤 근처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분문에만 흙으로 덮은 흔적이 있어서 알아 보기 쉬웠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2호분, 돌로 덮은 부분의 아래에 있는 다른 물질은 땅에서 파낸 흙이다.(위: 평면도; 아래: 단면도)

 

봉분을 덮은 돌을 분해하면서 말의 재갈, 철제도구 및 목제 막대기와 석제로 된 곡물파쇄기(멧돌)?이 확인되었다.

 

 

 

그림 2. 바샤다르 유적 2호분, 돌을 분해하다가 발견된 석제품. 곡물파쇄기로 추정

 

무덤구덩이는 깊이 6.15m, 크기는 5.2× 6.3m이다. 무덤 구덩이는 돌 아래에는 수백개의 통나무로 채워져 있었다. 통나무 아래에는 덤불이 1m정도 눌려져서 확인되었다. 이 덤불은 ‘쿠릴 차’라고 하는 식물이다. 이 덤불은 무덤방 바깥에 매장된 말이 매장된 곳 위에도 16개의 통나무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그 아래에는 자작나무 껍질이 덮여 있었고, 역시 말이 매장된 곳에도 말 사이까지 확인되었다.

 

 

 

무덤방의 바닥에는 두께 17~18cm의 나무 4개를 깔고 그 위에서 두께 6cm의 통나무를 세 개씩 세워서 무덤방의 한 벽은 통나무 4개를 세워서 만든 것이다. 무덤방의 덮개는 8개의 통나무로 아주 조밀하게 만들어졌다. 무덤방의 크기는 2.2×4.15m, 높이는 1.3m이다. 무덤구덩이에서 남쪽은 무덤방이 설치되고 북쪽에는 말이 매장되는데 14마리가 확인되었다.

 

 

 

 

그림 3.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 단면도(위: 위도방향(남북), 아래: 자오선방향(동서)

 

 

 

그림 4.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 무덤방의 평면도(위: 무덤방의 덮개와 말, 아래: 덮개를 연 후 무덤방의 바닥)

 

바샤다르 2호의 무덤방에는 통나무관이 2개였다. 가장 남쪽에 안치된 것은 남성의 관이고 그 옆에 여성의 관이 놓여 있었을 것이나 도굴당하면서 관은 제자리에서 확인되지 않고 엎어져서 확인되었다. 여성의 시신도 미라 처리되었는데, 난도질 당해서 무덤방 여기저기에서 확인되었고, 남성의 시신은 아예 없어진 상태였다.

 

 

통나무 덮개에는 1.7×3m의 도굴구멍(그림 4)이 있었다. 이곳을 통해서 들어온 도굴꾼은 높이가 1.3m밖에 되지 않는 무덤방에서 마음대로 행동하기 위해서 도굴구멍 바로 아래에 위치한 통나무관의 뚜껑을 열고 통나무관을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이 관은 여성의 관이었다.

 

남쪽에 있는 두 번째 관은 나무로 된 못으로 고정된 것으로 제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굴꾼은 말을 매장한 곳도 손을 대었는데, 말 무덤 쪽의 북쪽벽에 구멍을 내었다. 말을 통째로 꺼낼 수 없으니, 말을 잘랐는데, 자른 뼈가 무덤방 안에서 확인되었다. 도굴꾼은 말의 굴레장식에서 금박만 벗겨내고 나머지 나무로 된 부분들은 바닥에 남겨 두었다. 청동제품은 그대로 두고 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 유물의 위치는 거의 제자리가 아니었고, 말의 장식까지도 거의 많이 흩어진 상태였다. 미라에 대한 정보도 남아 있지 않다. 파지릭 2호분을 도굴한 놈 보다 더 한 놈이 도굴했던 것 같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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