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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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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7.07 2600년 전 알타이 유적의 없어진 미라

바샤다르 유적은 앞서 살펴본 파지릭 유적 보다 대략 100년 정도 이른 유적으로 생각한다. 대체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를 일종의 지역문화로서 ‘파지릭 문화’라고 한다. 파지릭 유적을 1947년에 발굴해서 이 유적에서 확인된 매장문화의 특징을 파지릭 문화(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라고 했다. 그런데 1950년에 바샤다르 유적을 발굴해 보니 ‘파지릭문화’의 특징이 이 유적에도 많이 확인되어서 이 유적도 파지릭 문화의 한 유적이 된 것이다. 바샤다르 유적이 파지릭 유적 보다 이르다고 해서 문화명칭을 쉽게 바꾸지는 않는다. 이미 다 잘 알려진 것이 ‘파지릭문화’이기 때문이다.

 

헤로도투스가 역사에 기록한 스키타이 사람들의 문화 중에서 왕의 장례식 치르는 장면에 미라처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재밌게도 19세기 말부터 아직 로마노프 왕조가 있을 때(혁명 전) 러시아제국고고학회가 발굴을 시작한(연구하기 시작한)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문화라고 믿던 유적에는 미라가 발견되지 않았다.

 

스키타이 문화권 중에서 내장을 발라내고 피부에 발삼(향료와 오일을 섞은 일종의 연고)처리를 한 미라처리 기법은 시베리아 알타이에서만 확인된다. 스키타이 문화중에서 미누신스크 분지에 위치한 타가르문화에서는 미라 비슷한 기법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알타이 미라와는 다르다. (타가르 문화문화도 동물문양장식, 마구, 무기 등이 확인되어서 스키타이 문화권의 일부로 본다. 앞에서 살펴본 아르잔 유적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편이다.)

 

포스팅(표에서 타가르 문화를 확인할 수 있다)

2020/02/1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1유적] -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그림 1.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전체 모습은 앞의 포스팅 참고 그림 2.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말탄 스키타이 전사의 모습, 투구는 코린트 식 그림 3. 솔로하 출토 �

eastsearoad.tistory.com

 

바샤다르 유적의 2호는 직경이 58m 정도 된다. 1호는 직경이 40m이다. 가장 중심부의 높이는 1.85m, 가장 높은 곳의 높이는 2.7m가량이다. 구글 인공위성지도로 봉분이 보일 정도이니 도굴꾼들에겐 ‘어서 잡수셔’하는 의미로 보였을 것이다. 역시 도굴당한 흔적(그림 3, 그림 4)이 생생하다. [러시아의 알타이나 카자흐스탄, 몽골 등등 봉분이 있는 큰 무덤은 대부분 도굴꾼 들의 표적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금딱지 들을 주워가고 다른 것들은 남겨 놓고 가서 그나마 정보가 남아 있다]

그림 1의 봉분 위의 검은 색 표시는 도굴한 흔적은 아니다. 이는 근현대에 들어서 지역주민들이 봉분위에 자신들의 무덤을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그 옛날의 무덤 근처는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분문에만 흙으로 덮은 흔적이 있어서 알아 보기 쉬웠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2호분, 돌로 덮은 부분의 아래에 있는 다른 물질은 땅에서 파낸 흙이다.(위: 평면도; 아래: 단면도)

 

봉분을 덮은 돌을 분해하면서 말의 재갈, 철제도구 및 목제 막대기와 석제로 된 곡물파쇄기(멧돌)?이 확인되었다.

 

 

 

그림 2. 바샤다르 유적 2호분, 돌을 분해하다가 발견된 석제품. 곡물파쇄기로 추정

 

무덤구덩이는 깊이 6.15m, 크기는 5.2× 6.3m이다. 무덤 구덩이는 돌 아래에는 수백개의 통나무로 채워져 있었다. 통나무 아래에는 덤불이 1m정도 눌려져서 확인되었다. 이 덤불은 ‘쿠릴 차’라고 하는 식물이다. 이 덤불은 무덤방 바깥에 매장된 말이 매장된 곳 위에도 16개의 통나무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그 아래에는 자작나무 껍질이 덮여 있었고, 역시 말이 매장된 곳에도 말 사이까지 확인되었다.

 

 

 

무덤방의 바닥에는 두께 17~18cm의 나무 4개를 깔고 그 위에서 두께 6cm의 통나무를 세 개씩 세워서 무덤방의 한 벽은 통나무 4개를 세워서 만든 것이다. 무덤방의 덮개는 8개의 통나무로 아주 조밀하게 만들어졌다. 무덤방의 크기는 2.2×4.15m, 높이는 1.3m이다. 무덤구덩이에서 남쪽은 무덤방이 설치되고 북쪽에는 말이 매장되는데 14마리가 확인되었다.

 

 

 

 

그림 3.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 단면도(위: 위도방향(남북), 아래: 자오선방향(동서)

 

 

 

그림 4.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 무덤방의 평면도(위: 무덤방의 덮개와 말, 아래: 덮개를 연 후 무덤방의 바닥)

 

바샤다르 2호의 무덤방에는 통나무관이 2개였다. 가장 남쪽에 안치된 것은 남성의 관이고 그 옆에 여성의 관이 놓여 있었을 것이나 도굴당하면서 관은 제자리에서 확인되지 않고 엎어져서 확인되었다. 여성의 시신도 미라 처리되었는데, 난도질 당해서 무덤방 여기저기에서 확인되었고, 남성의 시신은 아예 없어진 상태였다.

 

 

통나무 덮개에는 1.7×3m의 도굴구멍(그림 4)이 있었다. 이곳을 통해서 들어온 도굴꾼은 높이가 1.3m밖에 되지 않는 무덤방에서 마음대로 행동하기 위해서 도굴구멍 바로 아래에 위치한 통나무관의 뚜껑을 열고 통나무관을 움직여야 했을 것이다. 이 관은 여성의 관이었다.

 

남쪽에 있는 두 번째 관은 나무로 된 못으로 고정된 것으로 제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도굴꾼은 말을 매장한 곳도 손을 대었는데, 말 무덤 쪽의 북쪽벽에 구멍을 내었다. 말을 통째로 꺼낼 수 없으니, 말을 잘랐는데, 자른 뼈가 무덤방 안에서 확인되었다. 도굴꾼은 말의 굴레장식에서 금박만 벗겨내고 나머지 나무로 된 부분들은 바닥에 남겨 두었다. 청동제품은 그대로 두고 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 유물의 위치는 거의 제자리가 아니었고, 말의 장식까지도 거의 많이 흩어진 상태였다. 미라에 대한 정보도 남아 있지 않다. 파지릭 2호분을 도굴한 놈 보다 더 한 놈이 도굴했던 것 같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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