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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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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7.11 도굴 흔적 없는 알타이 무덤

 

1950년 루덴코는 알타이의 카라콜 강 가에서 큰 고분 2기를 발굴했다. ‘바샤다르’라고 명명된 유적으로 바샤다르 유적의 1호와 2호가 발굴된 것이다.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무덤방 속에 통나무관 2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앞서 살펴본 파지릭 유적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왜냐하면 파지릭 유적에서는 남녀가 함께 한 통나무관에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도 통나무관 2개가 있었으나 이 무덤에는 남성 2명이었다.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는 원래 혼자 매장(단인장)되었기 때문에 2인의 매장시설과는 다른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루덴코가 2기를 선택해서 발굴한 것은 57기 가운데 가장 큰 고분이었기 때문인데, 바샤다르 유적의 1호분은 어떨까?

 

2020/07/06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바샤다르 유적] - 26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미라가 출토된 곳

26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미라가 출토된 곳

바샤다르 유적은 앞에서 본 파지릭 유적보다 서쪽으로 약 162km(직선거리) 떨어진 알타이 산 위에 위치한다. 해발 1200m가량의 산 위의 분지 지형에서 무덤으로 보이는 시설물이 57기가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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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샤다르 유적 1호분은 유적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직경 40m이고, 봉분 중앙의 높이는 1.6m, 가장 높은 곳의 높이는 2m이다. 봉분은 가운데가 함몰되어서 가장 중앙이 높지 않다. 봉분이 함몰된 것은 무덤아래에 있는 무덤방에 구멍이 생기면서 그 쪽으로 무덤을 덮은 흙과 돌이 쓰러져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는 우육고원에 위치했던 아르잔-2 유적을 제외하고 파지릭 유적 및 아크 알라하 1 유적, 아크 알라하3 유적도 마찬가지였다.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특이하게 무덤을 덮은 봉분에서 후대의 무덤을 쓴 흔적이 남아 있다. 아주 약간 판 것으로 비교적 최근의 알타이 사람 무덤(그림 1의 검은색 부분)이라고만 알려져 있다. 이 무덤 때문에 아래에 있던 2600년 전 무덤에 손상이 가지는 않았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1호분

 

봉분 아래의 무덤구덩이는 봉분의 중앙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무덤구덩이의 동쪽벽은 봉분 중심을 기준으로 2m정도 서쪽으로 치우쳤다.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봉분의 가장자리에 큰 돌을 놓아서 무덤 경계(호석)를 설정한 것이 확인되었다.

 

무덤의 가장 상층은 큰 돌을 쌓았고, 아래로 갈수록 작은 돌을 썼으며, 큰 돌 사이에는 작은 돌을 써서 공극을 채웠다. 무덤방 아래에는 렌즈모양의 얼음층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무덤 남쪽 중앙의 봉분 아래에서 토기와 많은 양의 양뼈(앞다리와 갈비뼈)가 확인되었다.

 

무덤구덩이는 단면이 역사다리꼴 모양(그림 1의 아래, 단면도)이어서 앞서 살펴본 2호분과는 다르다. 무덤구덩이의 입구(4.2×4.8m)는 넓지만 바닥은 좁은 형태(2.9×3.8m)이다. 깊이는 3.2m이다.

 

바샤다르 유적 1호분에도 무덤구덩이 아래에 얼음층(영구동토층이라고 불림)이 확인되었으나, 무덤의 경계보다는 작은 범위에서 확인되었다. 앞서 살펴본 파지릭 유적에서는 봉분의 크기와 무덤방 아래의 얼음층의 너비가 같은 범위로 확인되었다. 얼음층이 형성하게 된 여러 가지 원인 중에서 돌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루덴코(1953)는 생각했다.

 

2020/03/0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2호분] - 기원전 6~5세기 알타이 산의 무덤아래 사람이 만든 냉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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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 산맥은 지형이 아주 복잡하고 높아서 이 지역에서 발원한 강과 강의 지류가 많이 있다. 파지릭 유적이 있는 파지릭 계곡은 연평균 기온이 낮고, 겨울이 길다. 영구동토대가 형성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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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샤다르 유적 1호에서는 얼음층의 너비가 넓지 않고, 무덤 구덩이가 깊지 않아서 무덤방 안의 유기물질이 잘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무덤구덩이 남쪽 절반에는 1.4×3.5m, 높이 1.2m의 무덤방이 설치되었다. 무덤방의 각 벽은 4개의 통나무를 쌓아서 만든 것이다. 덮개는 자작나무를 두 줄로 사용했는데, 무덤방의 남북벽에 걸쳤다. 자작나무 위에 자작나무 껍데기로 다시 덮었다. 무덤방의 외곽에는 북벽과 남벽에 높이 1.5~1.6m, 직경 30~36cm의 통나무를 각각 3개씩 세웠다. 무덤방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림 2. 바샤다르 유적의 1호분. 덮개 제거 후, 덮개 제거 전의 모습은 없었다. 화살표 방향은 북쪽을 의미.

 

말은 모두 7마리가 매장되었는데, 무덤구덩이 북쪽벽이 허물어지면서 말의 위치가 움직여서 처음 말이 매장된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서쪽에 4마리, 동쪽에 3마리가 매장되었을 것이다. 말은 3~8세 가량이다.

 

바샤다르 유적 1호분에는 통나무관 1기에 젊은 남성이 묻혔다. 무덤방의 천장이 무너지면서 통나무관 덮개가 부서진 상태였는데, 남아 있는 통나무관은 길이가 2.4m 너비는 0.6~0.7m이다.

 

바샤다르 유적 1호분은 도굴은 되지 않아서 죽은 사자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무덤구덩이 아래의 얼음층이 작게 형성되고, 상대적으로 깊지 않은 무덤방으로 인해서 무덤안의 유기물질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무덤이 완전히 얼어붙지 않아서 무덤방도 붕괴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말의 상태도 좋지 않았으며, 금속제 재갈과 굴레를 장식하던 금판만 약간 남아 도굴당한 무덤보다 마구관련 유물이 적은 편이었다. [도굴꾼은 어떻게 알았을까? ]

 

 

 

 

그림 3. 바샤다르 유적 1호분 발굴모습,1-봉분제거 과정, 2-무덤구덩이가 드러난 모습

 

 

 

그림 4. 바샤다르 유적 1호분 발굴과정, 1-무덤구덩이, 2-통나무관 안의 인골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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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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