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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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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루드나야 강 유역


루드나야 강 유역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영동지역인데, 이 강 유역의 서쪽은 볼샤야 우수르카 강의 지류와 맞닿은 곳이다. 강 상류 지점에서 이곳으로 통하는 길이 있지만 산이 높고 험준하기 때문에 이곳에는 고고학적 유적이 없다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의 유적모나스트르카-1~4, 루드나야 프린스탄(Рудная Пристань, Rudnaya Pristan'), 므라모르나야(Мраморная, Mramornaya), 미스 브린네라(Мыс Бриннера,Mys Brinnera), 루체이 페르보마이스키(Ручей Первомайский, Ruchey Pervomayskiy), 달네고르스크-투르바자(Дальнегорск-турбаза, Dal'negorsk-turbaza), 보엔느이 고로독(Военный городок, Voyennyy gorodok), 도조르나야(Дозорная, Dozornaya), 프리모르스카야(Приморская, Primorskaya)-1, 2, 보도라즈젤나야(Водораздельная, Vodorazdel'naya)유적)은 이 강의 중류와 하류 역에 위치한다


루드나야 강 유역. 왼쪽 지도와 비교하면 대략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루드나야강 유역의 성곽 유적은 다음을 참고하면 된다. http://루드나야 강 유역: 모노마호보스코예 성곽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접근하기가 쉬운 곳은 남쪽에서 오는 곳이다. 테튜힌 고개를 통해서 이 곳으로 들어오면 모나스트르카 강으로 갈 수 있는데, 바다로 가는 아주 적합한 길이다.

루드나야 강의 하류에서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면 높지 않은 리도프카 고개가 있는데, 이곳으로 내려가면 리도프카 강의 하류가 있고, 그 곳에 청동기시대 유적인 리도프카-1 유적과 두브로빈스코예 토성이 있다. 이 시기의 교통로는 리도프카 문화의 마을 유적인 카멘카 유적이 있는 리포보이(Рифовой, Rifovoy) 곶 까지 이어지고, 오프리츠닌카(Опричнинка, Oprichninka)강까지 이어진다. 이곳에 방어기능을 하는 토성이 있는데 이를 증명한다.


 발해시기 및 그 이후가 되면 이곳의 교통로는 좀 더 복잡해진다. 모나스트르카야 도로는 발해시대와 발해 후 시기의 4에스톤카, 모노마호프스코예, 바시코프스코예, 프리스탄스코예 성곽성곽이 표식으로 남아 있다


http://루드나야 강 유역: 에스톤카 발해성곽

http://루드나야강유역: 바시코프스코예 발해성곽

http://2 장. 루드나야 강 유역의 발해성곽 특징


이 도로망의 길이는 60km를 넘지 않는다. 모든 성지는 각기 지점마다의 성격이 있다. 바시코프스코예 성지는 루드나야 하류와 루드나야 항구를 통제하고 지킨다. 프리스탄스코예 성지는 강의 좌안에서 하류부근과 항구를 지킨다. 이 곳에는 여진족의 유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루드나야 강 유역은 북쪽지류인 모나스트르카 강의 교통로를 통해서 드지기토프카 강 유역으로 통한다. 길은 고르부샤 강을 따라서 나지막한 고루부샤 고개를 넘어서 체레무호바야 강(드지기토프카 강의 오른쪽 지류)의 수원까지 갈 수 있다. 체레무호바야 길은 체렘샤니 발해 성지까지 내려갈 수 있다. 아르세네프에 의하면 루드나야 강 유역과 드지기토프카 강 유역을 모두 방어하는 고르부샤 고개에 성이 있었다고 한다. 이 성에서 바다까지의 거리는 대략 64km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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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안로

앞 서 설명한 고고학 유적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지역에서 강을 따라서 움직이는 육로와 바다로 가는 해로 즉 2개의 교통로가 있다는 것으로 설명가능하다. 육로를 복원할 수 있는 강은 모두 20개로 남쪽의 제르칼나야 강에서부터 700~800km 떨어진 가장 북쪽의 사마르가 강이다. 필자는 지난 35년간 이 지역을 선사시대에서 고대 교통로와 관련된 유적을 연구했다



 

1) 제르칼나야 강 유역


 지형학적 특징으로 인해서  연해주에서 아무르 강 유역으로 넘어가는 것은 고개를 통하는 것이 편했는데, 이 강은 바다의 만으로 흘러들어간다. 바다와는 직선거리로 약 80km가량이다. 베뉴코바 고개는 청동기시대 남서쪽과 서쪽을 동쪽과 연결하는 길목이었지만 이 시기의 성곽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발해시기에 축조된다. 고개는 아무르 강 유역으로부터 들어오는 길로서 우수리 강과 지류인 파블로프카(Павловкa, Pavlovka) 강도 이곳과 통한다. 서쪽에서부터 들어오는 도로는 우수리 강 유역의 절벽성인 미스-우보르카(Мыс-Уборка, Mys-Uborka), 시부차르(Сибучар, Sibuchar), 벨쵸프스코예(Бельцовское, Bel'tsovskoye)성곽 등으로 알 수 있다. 이곳은 아무르 강에서 바다로 가는 길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한다.

베뉴코프가 이곳을 잘 이용했다. 그는 길 원주민이 지나다니는 길 뿐만 아니라 중국 사냥꾼 등이 이용하는 길도 잘 알았다. 제르칼나야 강 유역에서 고개에서부터 바다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지점에서 확인되는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의 마을 유적인 오를노예 그네즈도(Орлиное гнездо, Orlinoye gnezdo) 제르칼나야-카리에르(Зеркальная-Карьер, Zerkal'naya-Kar'yer), 우스티노프카(Устиновка, Ustinovka)-4, 수보로보(Суворово, Suvorovo)-3, 4, 6, 8, 퍄느이 클류치(Пьяный Ключ, P'yanyy Klyuch), 우스티-제르칼노예(Усть-Зеркальное, Ust'-Zerkal'noye)-4, 우스티-제르칼노예 성곽(댜코프 1989) 등으로 보아서 선사시대부터 길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지도. 노란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제르칼나야 강 유역.(4~6: 고르노레첸스코예 1-3성곽, 7, 시바이고우 성곽, 8, 사도브이 클류치, 9-보고폴예, 10제르칼나야 토성, 11 우스티 제르칼나야 , 12-파디 시로카야 성곽)

 좀 더 자세한 지도는 http://2장. 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성곽 을 참고. 각 성에 대한 설명도 앞선 포스팅 참고



 그리고 제르칼나야 도로의 표식이 되는 곳은 절벽산 성인 스칼라 데르수 성곽이다. 이 곳은 청동기시대 부터 마을이 있어왔던 것이고 주변 지역을 감시하고 마을을 보호하는 기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자연적인 입지 탓에 성벽은 따로 설치되지 않았다. 제르칼나야 강의 하류는 지류로 인해서 북쪽, 동쪽, 남동쪽으로 나눠진다. 동쪽은 제르칼나야 강의 본류로 동해로 흘러가는데 우스티-제르칼노예 성곽이 문지 역할을 한다. 남동쪽은 사도비 클류치 강과 브루실로프카 강의 상류와 맞닿아 있다. 아르자마소프카(Арзамасовка, Arzamasovka)강은 동해의 올가(Ольга, Ol'ga) 만으로 흘러간다. 북쪽의 지류는 제르칼나야 강에서 테튜힌(Тетюхин, Tetyukhin)고개로 남아가가서 루드나야 강의 지류인 모나스트르카 강 계곡까지 이어진다. 이 길은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도 이용되었던 것인데 지역주민들은 Богопольская тропа(역자 주. 신의 풀밭길)’이라고 명명하였다. 현재는 걸어 다니거나, 수레 , 스키 혹은 말을 타고 갈 수 있을 정도이다.

말갈인들의 길에 대한 존재에 대해서 발해와 여진은 역사적 기록을 남겨 놓았다. ‘수서에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7세기 후반의 흑수말갈족에게는 李謹行 이라는 군인이 있었다. 그의 아들과 함께 중국과의 물자교류를 위해서 석도(石道)를 만들었는데, 시기는 발해건국이전이라고 되어 있다(보로비요프 1975, 샤프쿠노프 1968). 퉁구스-만주 국가인 발해는 지방 행정구역을 포함해서 자신의 전체 영역에 육로를 만드는 것에 아주 능하였다. 길은 세금을 걷고, 각 지방 간의 상업활동, 국민과 국가의 경계를 통제하는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필요한데 즉 외교적 활동, 정치적 활동, 가까운 국가나 먼 국가 간의 상업 교류나 군사적 목적 등에도 필요하다.

발해의 영역은 북쪽에서 남쪽까지, 동쪽에서 서쪽까지 2500km로 거의 방형이다. 발해의 북동쪽은 바다, 남동쪽은 통일신라, 서쪽은 거란족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역사서에는 발해의 육상로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데, 신라도, 거란도, 영주도, 일본도가 있다고 한다(샤프쿠노프 1968). 


발해~동하국의 제르칼나야 도로는 베뉴코프스코예, 고르노레첸스코예-1~3, 시바이고우, 보고폴, 사도비 클류치, 브루실로프스코예, 제르칼느이 성벽, 파디 시로카야 성벽 등이 관련되었고, 전체가 하나의 도로망으로 연결되어 다른 지역과 고립되지 않았다. 서쪽과 남서쪽은 우수리 강과 그 지류인 볼샤야 우수르카 강, 파블로프카 강, 쥬라블레프카(Журавлевка, Zhuravlevka)강이 연결되어 베뉴코보 고개를 통과하면 커다란 교통로와 연결된다. 그곳에는 콕샤로프크코예(Кокшаровское, Koksharovskoye)-1~3, 사라토프스코예(Саратовское, Saratovskoye)-1,2, 우보르카-돌린나야(Уборка-долинная, Uborka-dolinnaya), 주라블레프스코예(Журавлевское, Zhuravlevskoye) 오크라인카(Окраинка,Okrainka), 플라호트뉴킨스코예-돌린노예(Плахотнюкинское-Долинное, Plakhotnyukinskoye-Dolinnoye), 플라호트뉴킨스코예-고르노예(Плахотнюкинское-Горное, Plakhotnyukinskoye-Gornoye)성곽 등이 자리 잡아서 대규모 교통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발해 및 동하국과 관련되어 있다.

발해는 대무예(719-737)와 대인수(818-830)가 새로운 영역을 확장하고 그 곳에 솔빈부를 세웠다. 그런데 각기 다른 지역의 주민들을 이주 시키고 정착시키기 위해서 그들을 통제해야만 한다. 다른 어떤 장소 보다도 베뉴코보 고개를 통해서 산으로 들어가는 문지 역할을 하는 곳을 통제해야만 했다. 산의 고개마루를 지키기 위해서 여러 성곽이이 들어서게 되었고, 군사적 목적 등 때문에 여러 장소에 성곽 뿐 만 아니라 사원도 축조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아르세네프는 이곳에 사원이 있었다고 기록한 바 있다.


 발해시기와 발해 멸망 후 시기에 이 지역에 고르노레첸스코예-1~3, 보고폴예, 사도브이 클류치 성지와 시네고르(Синегорье, Sinegor'ye)-1,2 유적, 우스티노프카 폴랴(Устиновка поля, Ustinovka polya)유적 등 대규모 취락 유적이 존재했다. 보고폴예 성곽에서 출발한 길은 두 갈래로 나눠지는데, 하나는 북쪽으로 테튜힌 고개로 넘어간다. 이 고개를 지나면 루드나야 강 유역의 모나스트르카 강 쪽으로 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동쪽 방향으로 바다쪽 제르칼나야 항구로 가는 길이다. 바다로 가는 길에는 경계벽이 있어서, 이 길을 보호하고 있다.

이 지역이 동하국에 편입되었을 때, 시호테 알린 산맥에서 가장 큰 성지 중에 하나인 시바이고우 성지를 축조되었다. 여진족이 베뉴코보 고개를 넘어서 이곳까지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여진족은 길을 만드는데 매우 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일종의 아스팔트를 도로에 깔아서 아주 단단하게 만들었다. 필자는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에서 이를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나 바 있다. 이 곳을 여러 해 동안 발굴했는데, 그 곳에서 궁정지 같은 큰 건물과 성벽 사이에 2~3cm 두께로 매우 단단하게 다진 흙을 자갈돌 위에 깐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여진족은 중국과의 전쟁 이후에 북쪽으로 통하는 육로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진족은 다른 퉁구-만주족(말갈, 만주족, 우데기족, 나나이족)과 마찬가지로 육로를 더 선호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한편으로 강을 따라서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것에도 아주 능했다. 예를 들면 우데기족은 1950년대 까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고, 발해인들은 육로와 수로 모두를 이용 하였다. 여진족은 여름에는 배를 타고 이동하고, 겨울에는 얼어 붙은 강위를 걸어서 이동하였다. 여진족에게는 두 수로 사이를 마차를 이용해서 육로로 이동하는 방법이 잘 알려 져 있다. 강 상류에서는 말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힘든 곳에서는 소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고학적 유물로 남아 있는데 마차 바퀴의 뚜껑 등이 그러하다. 수레 이용에 대한 흔적은 퉁구-만주족의 언어에도 남아 있는데, 몽골어와 여진어의 마차는 거의 유사하다. 두 수로를 이동하는 것은 큰 수레를 이용할 수 있고, 강을 빨리 건널 수 있다. 중국에서는 도로에 25km 사이마다 역참을 둔다. 하지만 동하국의 여진족은 새로운 영역에서 성곽 축조를 서둘러야 해서 이런 중국의 방법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곽 안의 큰 건물에서는 문에 이르기 까지 대로는 반드시 건설했다. 물론 지형적 특징으로 인해서 문의 위치는 바뀔 수 있는데,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따라서 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교통로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다 통하고 있다. 서쪽에서는 베뉴코바 고개를 통해서 우수리강 유역과 통하는 길이고, 북쪽에서는 테튜힌 고개를 통한 길, 남쪽은 브루실로프카 강의 상류를 통하는 것이다. 동쪽은 제르칼나야 항구를 통해서 바다로 가는 곳과 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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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호테 알린 산맥의 지형학적 특징.

 

시호테 알린 산맥은 해안가를 따라서 북--동 방향으로 1200km 가량 뻗고, 8개의 연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너비는 300km에 달한다. 가운데 높이는 800~1000m이고, 가장 높은 부분(2078m)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지역으로 토르도키-야니 산이다. 연해주의 중부지역은 시호테 알린 산맥으로 영동과 영서로 나뉠 수 있다. 아르세네프는 시호테 알린 산맥에 22개의 고개가 있다고 했지만, 현재 지도에서는 15개만 확인된다. 산맥의 서쪽 방향으로 흐르는 강(우수리, 이만, 비킨, 호르)은 길고 강류 량이 많은데, 산맥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무르 강으로 흘러간다. 산맥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제르칼나야, 루드나야, 드지기토프카, 세레브랸카, 타요지나야, 케마, 암구, 에딘카, 사마르가, 코피 강)은 짧고 유속이 빠른데 동해와 타타르 해협으로 흘러간다. 시호테 알린 산맥에는 작은 언덕은 없다.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은 아무르 강과 관련이 있고, 동쪽은 태평양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시호테 알린 산맥의 지형학적 특징은 러시아 극동지역의 산과 통하는 주요 교통로의 방향설정과 관련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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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시호테 알린산맥 중부 영동지역의 교통로

 

극동 고고학에 있어서 선사시대 및 고대의 교통로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 시호테 알린 산맥에 대한 교통로는 중국 사서에 언급되어 있고, 키차노프(1966), 보로비요프(1975), 타스킨(1968), 샤프쿠노프(1968) 등이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는 만주와 한국과 관련된 것이 더 많다.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까지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때문에 러시아 극동에 대한 여러 가지 도로망에 대한 정보는 러시아인으로 처음 이주한 러시아인이자 군인장교들에 의해서 연구되었다. 아무르 강에서 동해안으로 가는 길은 베뉴코프에 의해서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었다(베뉴코프 1970).

가장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아르세네프의 연구이다. 그는 시호테 알린 산맥을 여러번 조사했는데, 이를 토대로 기록하였다. 퉁구 만주족과 고아시아족의 길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와 중세시대의 보존된 도로에 관한 것이 망라되어 정리되었다. 그는 고개로 넘어가는 도로가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 성곽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정도로 많은 조사 및 경험을 통해서 기록을 남겼다(아르세네프 1950, 베뉴코프 1970). 그의 연구 및 기록은 100년이 지난 1970년대 소로비예프가 『Китайские отхотники и их географические названия в Примпрье(연해주의 중국 사냥꾼과 그 지형적 명칭)에서 사냥꾼 들이 물물교환을 하던 교통로(그림 134) 등으로 아르세네프가 시호테 알린 산맥을 조사하고 발견한 성곽을 소개하고 있다(솔로비예프 1973).



그림 134. 1914년 아르세네프가 작성한 중국인의 겨울 무역로

 


1. 고고학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교통로

 

선사시대 및 발해~여진 시기의 교통로에 대한 연구가 적은 것은 고고학적 유물이 거의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교통로는 가족, 종족, 국가 등 각기 다른 인간의 요소 등을 하나로 연결해 주는 가족혈통 시스템이 그대로 표현되는 것이다.


 행정, 군사, 생계경제 등 어떠한 목적이라도 그 영역은 길이 있어야 통할 수 있다. 당연히 도로에는 도로의 표시가 있어야 한다. 아마도 바위에 그림을 그릴 수도 있고, 도로의 역참이나 중요한 곳에 건물을 짓는 등이 표시가 된다. 도로 보통 마을 가까이 설치되고, 도시 및 상업의 중심지등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도로위에는 그들을 감시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들이 생겨나게 된다. 도로 자체에는 흔적이 남게 되는데, 돌로 세운 표시나 표식, 터널 등이 있다. 간접적으로는 수레의 부속품-마차 바퀴의 마개 등을 보고 판단할 수 있다. 또는 같은 혹은 다른 종족의 기마병 존재나 수입된 상품 등을 통해서도 길의 존재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판단가능하다.

  모두 선사시대 및 고대의 도로를 복원할 수 있는 흔적으로 도로와 관련된 고고학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도로망은 그 지역의 지형학적 특징과 관련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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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해주 동북지역에 위치한 성곽은 산지성, 평지성, 곶 성으로 크게 분류된다. 그 중 곶 성은 부채꼴 모양의 궁형성, ㄷ자형, 부정형으로 구분된다. 



(3) 폐쇄형 성곽

성벽이 사방으로 다 돌아가는 형태인데 고르노레첸스코예-3, 우스티-일모, 소욘스코예 성지등이 해당된다. 이 성지의 평면형태는 2개로 다시 나눌 수 있는데, 방형과 다각형 평면형태이다.

 

A. 방형 성곽

사각형 평면형태는 우스티-일모, 소욘스코예, 성곽이 해당되는데, 평면크기는 소형으로 단구대나 혹은 언덕의 가장자리에 위치하며, 대체적으로 성벽의 모서리가 4개인 사각형 평면형태다

(우스티 일모 성곽의 평면도 모습은 이미 포스팅 한 바 있다. http://케마 강 유역의 성곽 1)

평면형태는 단순하고, 내성, 보루와 장대 등이 없다. 성벽에는 치가 없으며 우스티 일모 성지에서는 좀 더 방어가 필요한 곳에는 부가성과 해자를 설치하였는데, 문지에는 특히 적대를 설치하였다. 토석 혼축성벽으로 부분적으로에는 돌을 비스듬하게 쌓았다. 취락을 방어하는 용도로 축조되었다. 지표조사된 유물로 판단컨대 폐쇄형 방형 성곽은 발해의 늦은 시기로 9세기를 올라가지 못하며, 발해이후의 가능성도 있다.

기원. 평지의 방형성을 새로운 입지조건 위에서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 생각된다.

  


B. 다각형 성곽.

고르노레첸스코예-3 성지로 문지가 없다.(http://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성곽: 고르노레첸스크-3 유적)

평면형태는 단순한데, 육안으로는 어떤 시설물도 확인되지 않는다. 평면형태는 오각형이다.

성벽의 축조방법. 치가 없는 석성으로 높이는 0.5m정도이다. 용도는 제르칼나야 강 유역을 통제하는 보호 감시용이다. 문화의 특징과 연대는 유물이 부재하기 때문에 평면형태로 밖에 판단할 수 없는데 발해의 평지성과 비교해 볼 수 있다.

 

곶 성은 모두 세 개의 형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궁형 성, ‘자형 성곽, 폐쇄형 성곽 등이다. 연해주 북동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성곽은 궁형성이다. 이곳에는 처음으로 기원전 10세기 쯤에 청동기시대의 리도프카 문화인이 살았는데, 그들을 원주민으로 부를 수 있다. 거의 변화하지 않은 형태로 중세시대 초기의 퉁구-만주족(말갈)도 유사한 성곽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곶 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성공적으로 발달시킨 것은 동하국의 여진족인데, 험준한 곳을 그대로 이용하는 입지선정에 중국 건축 기술을 받아들인 것이다.

따라서 곶 성 성곽의 형식에서 새로운 것으로 따로 분리했, 평지성이나 산지성과는 다른 입지에 세워진 성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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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동북지역에 위치한 성곽은 산지성, 평지성, 곶 성으로 크게 분류된다. 그 중 곶 성은 부채꼴 모양의 궁형성, ㄷ자형, 부정형으로 구분된다.



(2) ‘자형 성곽


자형 성곽은 방어시스템으로 축조되었는데, 현재는 모노마호프스코예 성지 하나만이 해당된다. 이 유적의 평면적은 7000이다.(http://루드나야 강 유역: 모노마호보스코예 성곽)

. 평면형태. 단순한데, 내성과 보루, 장대시설 등이 없다. 성안에서는 온돌이 설치된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 성벽의 축조방법. 치가 없는 성벽으로 지형적인 영향으로 성벽의 평면형태는 매우 복잡하다. 한쪽은 편평하고 다른 쪽은 지형에 따라서 울룩불룩하다. 절벽과 맞닿은 부분에는 성벽이 없다. 성벽에서 위험한 부분에는 부가성벽과 해자를 설치하였다. 성의 높이는 부분마다 다른데 최대 높이는 1.5m이다.

성지의 문은 적대시설이 있고 길로 바로 통하게 되어 있다.

성벽은 돌과 흙을 혼합해서 축조했는데, 어떤 부분에는 돌을 경사지게 쌓은 부분도 있는데, 특히 모서리가 그렇다.

. 연대. 모노마소프스코예 성지를 연속발굴 결과 이 유적이 발해문화의 마지막 시기로 9~10세기에 해당하거나 혹은 더 발해 이후까지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 기원. 성곽은 성은 곶 위에 위치하고 부가성과 그 곳에 문이 설치된 자형 평면형태 방어시스템으로 보아서 그 기원은 혼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평지의 방형성은 말갈인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자연적인 방어기능을 갖는 곶에 성을 축조한 입지로 선정 한 것은 원주민의 전통이다. 그러나 성벽의 모서리를 직각으로 설정하는 것,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 돌을 경사지게 쌓는 것, 문지에 적대(적대)를 설치하는 것은 발해 전통으로 이 지역에 새롭게 들어온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성지가 들어설 때는 국가가 평온하지 못하고 전운이 감 돌때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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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동북지역에 위치한 성곽은 산지성, 평지성, 곶 성으로 크게 분류된다.


3) 곶 성



설상으로 뻗은 곶 위에 위치하는데, 청동기시대(리도프카 문화와 다른 문화) 20곳과 말갈과 발해문화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평면형태에 따라서 궁형성, ‘자형 성, 부정형 폐쇄형 성곽으로 구분된다.

  

그림. 우스티-벨렘베 3중 토석성(곶 성중 궁형성에 해당된다)



(1) 궁형 성

이 형식의 성지는 자연의 입지에 따라서 성벽의 평면형태가 궁형모양이다.

이 형식은 곶 성 가운데서 가장 단순한 형태로 모두 16개의 성지가 해당된다. 고르노레첸스코예-1, 고르노레첸스코예-2, 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켐스코예-스칼리스토예, 미스 알렉산드라, 우툐스노예, 쿠댜, 데두시킨 클류치, 미스 테플리이, 쿠즈네프스코예, 오아시스, 미스 스트라시느이, 우스티-페야, 에딘킨스코예, 우스티-벨렘베 성곽 등이다.

. 평면형태. 성은 장대, 보루와 내성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이다. 미스 스트라시느이, 우스티-제르칼노예와 같이 자연적 단구대 위에 취락을 경계 짓기 위해서 축조되었다. 성의 평면형태는 개방형으로 궁형인데 모두 가 다르다. 성지 가운데 가장 큰 곳은 미스 스트라시느이(28,000)이고 가장 작은 곳은 우스티 제르칼노예(15,000) 유적이다.

. 성벽의 축조방법. 이 형식의 성은 매우 단순한데 성벽은 다음과 같이 축조된다.


토성벽(쿠즈네쵸프스코예 성벽)

토석혼축벽(미스 스트라시느이, 미스 테플리이, 쿠댜, 우툐스노예, 케므코예-스칼리스토예, 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돌로 비스듬히 쌓고 흙으로 채우는 성벽(고르노레첸스코예-1)

토석 혼축벽이 기본이고, 돌을 깔아 놓은 곳이 있는 성(우스티-벨림베)

석성(데두스킨 클류치)

성벽의 높이는 0.3~1.5~2m가량이다.

성벽에는 해자가 있는데, 성벽을 쌓을 때 이 해자로부터 흙을 퍼 올렸다. 해자의 깊이는 1m를 넘지 않는다.

 

곶 성의 문지는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단순 절개면(미스 스트라시노예)

부가성에 설치된 문지(미스 테플리이, 쿠즈네쵸프스코예)

문지가 없는 것

 

. 용도. 모든 성은 취락용이고 취락을 경계하며 방어하는 역할이다.

. 특징과 연대. 평면형태 궁형의 곶 성은 최소한 세 개의 고고문화와 관련이 있고 청동기시대 및 중세시대와 관련이 있다.

A. 청동기시대의 성. 모두 9개가 해당된다(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켐스코예-스칼리스토예, 미스 알렉산드라, 우툐스노예, 쿠댜. 데두시킨 클류치, 스트라시노예, 우스티-벨렘베 등이다).

강의 하류와 해안가에 위치한다. 시굴이나 지표조사에서 출토된 고고유물은 대부분 리도프카 문화의 것으로 생각되며, 탄소연대에 따라서 기원전 10세기 후반으로 생각된다(미스 스트라시느이, 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쿠댜, 우스티-벨림베 유적).

우툐스노예 성터에서는

지두문이 찍힌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아무르 강 하류의 초기 철기시대 문화인 우릴 문화의 특징을 보이는 것도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서 청동기시대 말기에는 아주 복잡한 상황이었다. 리도프카 인은 내륙이 주요 거주지인이다. 하지만 이들이 강 하류와 바다의 항구 등에 성곽을 지은 것은 적으로부터 막기 위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해안가에 살던 사람은 얀콥스키 인인데, 많은 리도프카 문화에서 그들의 흔적이 확인된다(블라가다트노예-3,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의 5~7번 유형 등)

또한 아무르강 하류의 우릴문화가 확인되는 것은 이 지역까지 아무르 내륙인이 왔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 이주민들은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면서 그들의 고향인들은 짓지 않았던 성지를 축조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아무르강에서 우릴문화의 성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B. 중세시대의 성지.

연해주 동북지역에서 곶 성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말갈과 발해문화의 것이 있다.

말갈문화의 성곽 평면형태 궁형으로 강과 바다의 곶에 설치되는 된다(미스 테플리이, 쿠즈네쵸프스코예, 오아시스, 에딘킨스코예 성지).

유적의 입지는 강의 중류(쿠즈네쵸프스코예), 해안가 단구대(미스 테플리이, 오아시스, 예딘킨스코예 성지)인데, 이 곳은 방어나 보호가 필요한 교통로의 문지역할을 하던 곳이다.

대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말갈성곽으로 확인되었고, 성벽은 다른 어떤 돌을 섞지 않은 순수한 토성(쿠즈네쵸프스코예 성곽)과 이러한 성벽에 문지를 설치하는 성(미스 테프리이 미스, 쿠즈네쵸프스코예 성곽)이 있다.

성 내부에서 시굴조사 되거나 지표조사 된 말갈유물은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 중국 동북지방에서 확인되는 말갈문화의 것과 같다. 그 중에는 북한의 동북지역에서 확인되는 것도 있고 사할린과 일본의 홋카이도에서 출토되는 유물도 있다. 발해는 말갈족을 밑바탕으로 세운 국가로 9세기 까지 오랭캐를 현과 주로 편입시킴으로써 스스로의 땅으로 편입시켰다. 당연히 이러한 발해의 정치는 말갈족과 고아시아족 등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미스 테플르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블라고스로베노예-2(Благословенное-2, Blagoslovennoye-2), 쿠르쿠니하(Куркуниха, Kurkuniha), 툰젠(Тунжэнь,Tunjeni) 등에서 출토된 토기와 비슷하다. 이들 유적의 절대연대 측정 결과 4~5세기에 해당된다. 이는 말갈문화의 것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황은 말갈인과 고아시아인 모두 이 유적을 이용했던 미스 테플리이 유적만이 유일하다.

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고르노레첸스코예-1과 고르노레첸스코예-2 유적은 발해시기의 곶 성에 해당된다. 고르노첸스코예-2 유적은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분소에서 연속발굴을 하고 있고, 발해의 것으로 규명하였다. 이 두 성지는 소형(25004000)이고 장대, 보루와 내성 등이 없는 성지로 취락용으로 취락을 방어하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곶 성은 원주민(말갈인)의 축조기법을 따르고 있다. 여기에 말갈 성지의 존재는 그들이 9세기 어느 때 쯤 발해국가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을 판명할 수 있다.

중국 사서에 따르면 이러한 성곽은 축조시 지역 기술자나 혹은 군인 들이 지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 중에서 가장 큰 주민 집단 마을이나 성을 주 혹은 현으로 불렀을 것이다(보로비요프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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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동북지역에 위치한 성곽은 산지성, 평지성, 곶 성으로 크게 분류된다. 그중에서 평지성은 방형, 다각형, 개방형으로 평면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3) 개방형 성곽



이 형식에 해당하는 유적은 소볼레프카 강 하류의 해안 단구대 위에 위치한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유적(http://소볼레프카 강 유역의 성곽)만이 해당된다.

이러한 형식의 성은 주변이 절벽이어서 성벽을 모든 면에 돌릴 필요가 없어 직립평행하는 성벽이 몇 개 있는 모양이다.


. 평면형태. 내성과 보루, 장대 등이 없는 단순하다.

. 성벽의 축조방법-치와 문지가 없는 석성이다.

. 용도-취락의 방어용.

. 문화적 특징과 연대. 출토되는 유물은 말갈 트로이츠코예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7~8세기 보다 이르지 않다.


. 기원. 원래의 지역적인 특징과 혼합된 양상을 보인다. 성곽의 지형학적인 면은 중국과 발해의 전통으로 보인다. 성벽의 모양이 곶의 모양에 따라서 축조되었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경우에 발해와 말갈 중에서 트로이키코예 유형과의 혼합된 양상으로 판단된다. 발해가 국가영역을 넓혀 갈 때 소볼레프카 강 유역의 일부지역에서 연해주 동북지역의 새로운 영역에서 지역민과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평지성은 성곽의 자체적인 발달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고고학적 사실을 함께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가장 전통적인 형식은 방형성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발해의 것으로 8세기 초를 올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방형성에서 자체적으로 발달한 다각형 평지성은 방형성에서 두 모서리를 잘라낸 형태로 지형학적 입지와 방어기능 때문에 이런 모양으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유적의 지형과 고고유물로 보아서 발해의 초기에는 아주 평화로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민들은 농경과 목축, 사냥, 어업 등을 행하였다. 연해주 북동지역의 방형 평지성의 존재는 이곳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발해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주로 강의 중 하류역에 분포한다. 유물로 판단컨대, 연해주 북동지역에 존재하던 행정관청은 현정도 였을 것이다. 성의 크기나 내성의 존재 등으로 보아서 드지기토프스코예 성이 현의 행정관청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의 경계는 방형 평지성과 산성가운데서 고개에 위치한 성의 위치 등으로 가늠할 수 있다. 제르칼나야, 루드나야, 드지기토프카, 브루실로프카, 말라야 케마 강 가에 위치하고 있다. 남서와 서쪽의 경계는 베누코보 고개로 들어가는 베뉴코프스코예 성지와 포드네베스노예 고개로 들어가는 포드네베스노예 성지가 있다.


동쪽의 경계는 동해로 바시코프스코예와 클류치 성지가 동해를 지키고 있다. 이 현의 남쪽 경계는 2개의 석성인 스미르코프 클류치와 자볼로트나야 성지가 있고, 평지성으로는 세레브랸카 강 유역 말라야 케마 성곽이 있다.

그러나 북쪽에서는 발해인과 트로이츠키 말갈인과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는데, 곶 성이 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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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동북지역에 위치한 성곽은 산지성, 평지성, 곶 성으로 크게 분류된다. 그중에서 평지성은 방형, 다각형, 개방형으로 평면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2) 다각형 성곽



평지성 가운데 이 형식에 해당하는 유적은 켐스코예 성곽이 해당되는데, 동해로 들어가는 켐스코예 강 하류에 위치한다. 평면형태가 다각형인데, 좀 더 정확하게 하면, 방형 성지에서 두 모서리를 잘라낸 형태를 하고 있다.




 

. 내부형식- 단순한데 내성, 보루와 장대는 없다. 평면크기는 17,000이다.

. 축조방법- 치가 없는 단순한 구조인데, 성벽은 자갈돌로 높이 1~1.5m가량 세웠다. 문지는 2곳으로 성벽을 절개해서 만들었는데, 서로 마주보고 있다.

 

. 용도-다각형 성곽은 취락을 위해서 축조되었다.

 

. 기원과 연대- 유적에서 연대를 판단할 수 있는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대와 문화적 특징 혹은 소속 등을 이야기하기 힘들다. 단지 평면형태로 볼 때 발해의 평지성 일종으로 연해주 남부 지역에서도 확인된다. 아마도 다각형 평면형태는 중국 전통인 방형 평지성에서 기원했을 것인데, 이 성곽보다는 좀 더 늦은 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9세기 보다 올라가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각형 평지성은 발해의 특징으로 생각되는데, 발해가 중국과는 다른 스스로를 나타내기 위해서 내부법을 만들었을 때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기간에는 신생한 퉁구 만주국가가 영역을 확장하고 있을 때인데, 말갈족의 후손들도 포함된다. 이 때는 평화로운 시기는 아니었고, 중국 사서에 남아 있듯이 발해가 중국에 사신을 몇 번에 걸쳐서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발해는 또한 거란족과 충돌이 있었을 때로 성지가 방형보다는 좀 더 넓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 결과로 이런 평면형태 다각형의 성지가 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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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유형. 평지성


이 성지는 강 주변에 설치되는데, 그 중에서도 높고 편평한 범람원으로 홍수의 영향이 받지 않는 곳이 선택된다. 연해주의 북동지역에서 평지성은 모두 12개로 브루실로프스코예, 사도비 클류치, 보고폴예, 에스톤카, 프리스탄스코예, 드지기토프스코예, 크라스노예 오제로, 체렘샤니, 말라야 케마, 켐스코예-돌리노예, 켐스코예-모르스코예,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성곽 등이다.

평지성은 농경에도 편한 지역으로 물과 접근성이 좋은 중류역이나 하류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 진다. 1) 방형(장방형), 2) 다각형, 3) 궁형(개방형)

 

(1) 1형식. 방형 성지

현존하는 평면형태 방형의 평지성은 브루실로프스코예 http://브루실로프카 성곽 유적 , 사도브이 클류치, 에스톤카http://루드나야 강 유역: 에스톤카 발해성곽, 드지기토프스코예, 프리스탄스코예, 크라스노예 오제로, 말라야 케마, 체렘샤니, 켐스코예-모르스코예 성지 등 모두 9기이다.



. 평면형태. 단순하고, 내성과 보루가 없다. 예외적으로 드지기토프스코예 성지에는 아주 작은 내성이 있다. 성지의 내부는 아주 편평하고, 장대가 없다. 성내부에서 소토가 확인되는 유적은 브루실로프스코예, 드지기토프스코예, 크라스노예 오제로, 에스톤카, 체렘샤니 유적 등이다. 성벽과 가까운 곳에서 구덩이가 확인되는데, 이 곳에는 성벽을 축조할 때 사용된 흙을 채취한 흔적으로 생각된다. 돌로 만들어진 우물도 확인되는데 이러한 유적은 에스톤카, 브루실로프스코예 유적 등이다. 성의 내부에서는 생활구역과 생산구역으로 나누어진다.

 

. 성벽의 축조방법. 성벽은 치가 없는 단순구조로, 성의 크기를 계측한 후 모서리부터 축조되기 시작한다. 성벽은 흙을 층층이 다져서 쌓아 올리는 판축기법을 이용하였는데, 성벽의 외벽은 돌을 경사지게 해서 쌓아올렸다. 이렇게 성벽을 경사지게 쌓아 올리는 것은 성의 다른 곳에서도 보인다.

. 평면특징. 방형의 성에서는 문지가 2~4기 확인되는 것이 보통인데, 드물지만 1개인 것도 있다. 문지는 대개 단순한데, 2~5m의 성벽을 절개해서 만든다. 여기에 다른 기술을 더한 것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벽의 높이는 산성과는 차이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높지 않고 1~2~2.5m에서 가량이다.

평면형태 방형의 성지는 성벽 외측에 해자가 있는 것이 보통인데, 보로비요프가 언급했듯이 2가지 기능이 있다. 하나는 성으로부터 물이 빠져나가게 하는 일종의 하수도 역할과 다른 하나는 방어적인 요소이다(보로비요프 1983).

가장 큰 방형 평지성은 디지기토프스코예 성으로 57,600, 다음은 브루실로프스코예 성곽으로 28,900이다. 나머지 성곽의 평면적은 10,000를 넘지 않는다.

 

. 용도. 평지에 위치한 성지는 높지 않은 성벽과, 단순한 성문, 치와 집석 시설의 부재, 화재나 다른 파손 흔적이 없는 점 등으로 보아서 평온한 시기에 평지의 방형성지가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강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성들은 사냥, 어업 등 퉁구스-만주족의 생업활동을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베뉴코프 1960). 성곽에서 생활구역을 발굴한 결과, 그 곳에서 오랜기간 동안 정주한 흔적이 있다. 이는 방형 성지가 취락을 위한 것임을 잘 알 수 있게 한다.

 

. 문화의 특징과 연대. 이 문제는 아주 복잡하고 현재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다. 현재는 방형 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는 대략 3가지로 구분되는데, 연질토기, 녹로제 토기, 손으로 만든 후 녹로위에서 완성되는 토기로 구분된다. 연질토기는 원래 원주민의 전통으로 모든 유적에서 말갈토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녹로제 토기는 발해형식의 토기로써, 방형 성지가 발해국가와 관계가 많음을 보여준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유적에서 발해토기가 출토하게 된 것은 발해와 말갈 간의 경제교류가 아주 깊었거나 혹은 이 지역에 발해인이 들어왔을 가능성이 많다. 녹로제 토기는 인화문이 시문되어 있다. 이러한 토기는 필자가 예전에 언급한 바와 같이 발해국의 남쪽인 연해주에서 보이는 이 토기가 아무르강 하류 여진족 문화의 일부와 유사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토기를 녹로에 놓고 성형하는 기술과 기형 등은 중국의 기술이다. 그래서 평지성 중에 방형 성지도 연해주 동북쪽에 위치한 성곽은 말갈문화의 것으로 생각된다. 말갈문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국가가 발해(698~9226), 여진(115~1234), 동하국(1217~1234)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 볼 수 있다. 방형 평지성에서 출토된 토기는 전체적 양상으로 보아서 8~10세기 발해 국가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적에서 출토된 말갈토기 옹형 토기의 기형은 9~10세기에 유행한 것이기 때문에 유적의 연대는 그에 따르는 것이 더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댜코바 1983).

 

. 기원. 방형 평지성은 아주 잘 지어진 방어시설로서 기원전 10세기부터 10세기 까지 이 지역에는 없었던 건축물이다. 방어시설이라도 단순히 곶 위에 짓는 정도이다. 바둑판 같이 반듯한 평지성은 고대부터 중국의 기술로 정확한 계측을 통해서 지을 수 있는 건축물이다. 주로 방형성은 궁정 등을 짓는데 이용되었다(이보츠키나 2003). 러시아 극동에서 방형성지는 발해(698~926)이후에야 볼 수 있는 건물지이다. 발해는 연해주로 바로 들어온 것은 아니다. 중국 사료에 기록되어 있듯이, 중국 당나라의 행정을 모방해서 국가의 기초를 9세기 초반에 만들었고, 방형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 오랑캐의 땅인 연해주도 하나의 현으로 들어가서 지역 주민들을 통제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치가 없는 방형의 평지성에서는 확인되는 고고유물 가운데 무기가 지표에서도 수습되지 않고, 토층에서도 거의 확인되지 않는데, 이러한 점은 연해주의 북동 지역에 발해는 처음에는 아주 평화로웠다는 점을 반증한다. 성은 그 지역과 주민의 관할하는 하나의 관청으로써 역할이었다. 성의 지위는 그 규모와도 일치하는데, 드지기토프스코예 성지는 동북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성곽은 인접한 포드네베스노예 성곽에서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 사면으로부터 들어오는 문지를 지키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곳은 동해까지 이어져서 드지기트 항구까지 다다르는 길을 통제한다. 또한 드지기토프스코예 성곽의 위상은 내성의 조재로도 알 수 있다. 고고학유물 중에서 확인되는 말갈토기의 존재는 이 평지성이 지역민인 말갈 군인들이 관장하던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는데, 아직까지 외래문화(발해문화)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가 존재하던 시기에 발해 토기가 나타난 것은 이 지역에 새로운 고고문화를 규명할 수 있다. 방형의 평지성과 녹로제 토기 등은 중국 전통인데, 중요한 것은 성벽의 축조방법이다. 현재까지 러시아의 연구자들은 판축 기법이 예외적으로 연해주에서는 여진족과 관련된 12~13세기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도 평지의 방형성이 발해의 것이라는 판단이었지만, 성벽축조에서는 위와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연해주의 북동지역에서 말갈족에게는 너무 이른 기술이었는데, 아마도 중국 기술자에 의해서 평지성이 계획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간접적으로 발해의 국가 영역에 들어간 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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