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발해~여진시대의 교통로
시호테-알린 산맥의 영동지역 중부지방에서 청동기시대 바닷길과 발해~여진시대 바닷길이 다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첫 번째는 지형학적인 특성상 길이 달라졌을 리도 없고, 두 번째 이 바닷가에 위치하는 이유는 바로 항구 때문이다. 당연히 주민들은 이웃한 지역과 접근성이 좋은 곳을 택했을 것인데, 비단 교통로 뿐 만 아니라 상업적 교류, 외교적인 교류, 적의 침입 방지 등에서도 이러한 곳에 반드시 길이 있었을 것이다.
북위시대(386~534년)에 말갈인의 길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강을 이용한 수로이다. 477년에 乌鸡의 외교관은 담판을 쉽게 짓기 위해서 말 500필을 선사하였는데, 그는 먼저 길이 얼마나 복잡한가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다. ‘먼저 강의 상류를 배를 타고 건넜는데, 배안에 물이 차서, 다시 육지에 내려서, 무렌강을 건너서, 호란 까지 걸어서 왔다(보로비요프 1994)’라는 기사가 있다. 퉁구스-만주족 국가 발해는 바다의 해상활동을 아주 활발하게 하였는데, 배와 큰 합선도 있었다. 장슈안(1960)이 쓴 『Мореходство в древнем Китае(고대 중국의 해상활동)』에서 발해는 무역배와 군함 등이 많았다고 기록되었다. 중국에서 발해로 가는 길은 登州 西港에서 출발해서 동북방향으로 大謝道(현재: 장산열도)와 龜歆島 (현재 砣磯島)를 지나서 북쪽의 烏湖海(오호해에서 북쪽으로 있는 바다)를 건너서 都里鎭(여순과 가까운 곳)와 馬石山(현재 老鐵山)까지 간다.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배를 타고 남쪽으로 靑泥浦 항구(현재의 대련만 부근)), 桃花浦, 杏花浦(대련만에서 동쪽으로 류리하의 하류까지로)까지 건넜다. 그리고 石人汪(현재 石城道에서 북쪽에 있는 해협)에서 藁駝灣(현대의 鹿島에서 북쪽으로 大洋河의 하류), 烏滑江(현대의 丹東부근)을 걸쳐 남쪽으로 압록강 하류까지 간다. 다음 방향은 압록강 강의 상류와 발해 王城(현대 흑룡강성의 녕안현에서 남서쪽으로 70km 떨어진 곳)에서 육로를 따라서 가는 것이 발해의 길이고, 다른 길은 신라로 가는 것이다(쟝슈안 1960).
발해인이 바닷길을 이용한 것은 항상 평화적인 목적만이 아니었다. 732년에 발해의 무왕은 당나라의 큰 항구 등주를 공격하기를 명했고, 수군이 배를 타고 가서 그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발해의 배는 노를 저어서 가는 것인데, 이를 이용해서 정기적으로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727년에 발해의 무왕은 일본에서 보낸 외교 사절단을 받아 들였고 이 관계는 920년까지 지속되었다. ‘발해는 29명의 사신을 파견하고, 일본은 6명을 파견하였다. 796년에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홋카이도에서 발해 사절단이 거의 모두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보통은 발해의 동경성에서부터 일본으로 사절단을 보냈다(보로비요프 1994). 동경성은 바다와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샤프크노프에 의하면 ’일본도‘는 러시아 연해주의 남부로 현재의 엑스페드치야 만과 가까운 크라스키노 항구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곳에는 발해의 항구이자 염주현의 중심부이다. 이곳에서부터 출발해서 한반도 동해을 따라서 가다가 남동쪽으로 돌면 쓰시마 섬과 이끼 섬으로 발해의 배가 갈 수 있다(발해와 러시아 극동의 종족 1994).
연해주 중부 영동지역의 바닷가 길의 존재는 그간 지역학계에서는 외면되어 온 주제이다. 이 문제는 이 교통로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주제와 관련해서 아르세네프 연구 외에는 거의 연구되지 못하다가, 필자가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발해 및 여진시대의 성곽은 동해바다의 강의 하류 혹은 바다의 만에 위치하고 있는데 연해주 영동지역과 북쪽 타타르 해협까지 바닷가 길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제르칼나야 계곡에는 발해와 멸망 이후의 성곽(보고폴, 고르노레첸스코예-1~3) 등이 있고, 마을 유적(시네고르예-1,2, 우스티노프스키예 폴예 등)도 있지만 강 하류에는 방어하는 성곽은 없다. 활발한 해상 활동은 루드나야 만의 북쪽에서도 확인되는데, 이 만을 지키는 바시코프스코예 성곽으로 알 수 있다. 평지성인 프리스탄스코예 성곽은 바다와 가까운 강의 하류에 위치하면서 항구의 역할을 했다. 그 보다 북쪽의 드지기토프카 강의 하류에 위치한 클류치 성곽은 교통로를 통제하는 역할을 하며, 남쪽과 연장되는 바닷길을 연장하는 역할이다. 바다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발해 시기의 크라스코예 오제로 성곽이 위치한다. 시호테알렌 산맥의 포드네베스노이 고개를 넘어서 그 곳을 지나서 드지기트토프카 만 까지 오는 육로가 있다. 이 크라스노예 오제로 성곽은 항구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주변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뻘인데 발해시기에는 해수면이 이곳까지 상승해서 바다가 성 가까이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보다 북쪽 발해의 바닷길은 말라야 케마, 켐스코예-모르스코예, 켐스코예-돌리노예로 이어진다. 이 성들은 말라야 케마 강과 케마 강 하류에 축조된 것이다. 방어용 보다는 부두와 같은 역할이었다. 탈니코바야 강의 하류에 위치한 우스티 일모 성지에서부터 출발해서 말라야 케마 성곽으로 향하는 해안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바닷가 길을 지켰을 것이다.
이곳 보다 더 북쪽의 켐스코예-모르스코예와 켐스코예-돌리노예 성곽이 있는데, 스토르모바야 만과 케마 강 하류의 입구를 지키고 있으며 또한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경사면에서부터 내려오는 육로를 지키고 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바닷가 길은 북쪽의 야수 성지를 지나서 암구 강의 하류에서 방어적 기능을 한다. 암구 만에는 중세시대 성지가 없는데, 가장 이른 시기의 중세시대 성지는 미스 테플르이로 이는 말갈문화의 것이다. 이 성지는 바다의 곶 위에 위치하는데, 이는 해상로를 통제하고 있고 직접적으로는 바닷가 길을 살피는 것이 확실하다. 암구 강에서 발해시대 성곽으로 알려진 것은 없다. 대신 동하국시기의 것이 있는데, 여진족은 주변 전체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소프카 류브비 성곽이다. 해안로와 바닷가 길을 지키는 역할이며 국경을 지키는 곳이다. 이곳에는 시호테 알린 산맥으로부터 넘어 오는 육로가 없지만 여진족들은 이 지역을 연해주 남쪽에서부터 올라와서 바닷가 길을 이용했거나 혹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에서부터 포드네세브느이 고개와 드지기토프까 유역까지 넘어 갔을 가능성도 있다. 북쪽 해안로로도 이어진다. 이동을 위해서는 말이 필요했는데, 그들은 우수리스크 주에서 풀을 베어가면서 길을 만들었다. 세레브랸카 강 유역, 말라야 케마와 케마 강 유역에는 여진의 유적이 없고 암구 강 하류에서 보인다. 이곳에 위치한 말라야 카르마 성곽과 카르민스크 흐베르트 성곽도 동하국의 북쪽 경계에 있는 성곽으로 해안로와 바닷길을 방어한다. 아마도 암구 강 북쪽의 여진 유적이 앞으로 확인될 가능성은 있지만, 지보피스나야 강 유역, 쿠즈네쵸바 강 유역, 에딘카 강 유역, 사마르가 강 유역 등에서 현재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암구강 이후에는 지보피스나야 강 하류까지는 바닷길이 있고, 소욘스코예 성곽이 이를 증명한다. 이것과 연결되는 중세시대 바닷길의 지점은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성곽으로 말갈의 것이다.
발해이후의 바닷길은 연해주 동북지역에서부터 타타르 해안가까지 아주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강 하류에는 배가 닿는 항구로 추정되는 말갈의 성곽(미스 테플르이, 우스티-소볼레프카)도 축조되었다. 해안가를 스스로 통제하고 누군가 이 곳으로 들어오려고 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한 기능도 있다. 아마도 일 천 년 기 즈음에는 고구려인, 일본인 그 다음은 발해인이었을 것이다. 이곳 말갈영토에는 상업적 목적 뿐 만 아니라 영토 확장을 위해서 발해인이 들어왔을 것이고, 해상활동에 아주 활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 영동지역에 입지한 청동기시대부터 발해, 말갈, 여진시대의 고고유적들로 보아서 교통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거리 재는 방법은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낮 기간 동안의 갈 수 있는 거리를 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요양에서 말갈의 땅까지 기록에 의하면 대략 2700km이다. 요녕 천산산맥을 따라서 이 길의 거리는 53일 정도 걸린다. 이 거리는 대략 4단계 정도로 나누어서 계산 된 것인데 13+7+15+18일을 합한 것이다(보로비요프 1994)
연해주 영동지역 동해부터 타타르 해협까지 영동과 영서를 넘는 육로가 강을 따라서 형성되어 있다. 제르칼나야 계곡, 드지기토프카, 세레브랸카, 타요즈나야, 케마, 에단카, 사무르가강 계곡 등을 통해서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길이 나 있다. 청동기시대부터 발해를 걸쳐 여진시기까지 바닷길은 동해 중부지역부터 타타르해협까지 있는 길로, 제르칼나야 만에서 사마르가 강 하구까지이다. 이 구간에서 배를 데기 쉬운 곳으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는 항구시설이 있었다. 강의 하류에는 해안과 주변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방어와 감찰 시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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