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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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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발해의 교통로


 발해시기에 축조된 성곽은 그 형태가 아주 다양한데, 이 지역에 복잡한 시기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발해는 698년에 건국되어서 퉁구스-만주족인 말갈족을 영입하고 연해주의 일부와 북한, 중국 동북지방까지 넓은 영토를 거느린 국가이다(발해국가와 러시아 극동의 종족1994).

발해를 구성하는 민족은 고구려인, 말갈인, 중국인 등이다. 발해의 마지막 시기에 평지성이 축조되었으며 연해주 동북지역에서 연질의 말갈토기와 함께 녹로를 돌렸고 인화문이 찍힌 회색조의 발해토기가 함께 출토된따. 인화문은 발해토기의 특징이자 아무르 여진 문화(브로실로프스코예 성지, 사도비이 클류치, 드지기토프스코예 성곽)에서도 특징적으로 나타난다(그림 137). 대략 9~10세기 정도이다(댜코바 1993). 아마도 발해가 존재했던 시기 가운데서도 가장 성한 시기로 생각된다


현재 연구된 바로는 발해영토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경제활동은 농업이다. 아주 평화로웠을 것인데, 처음 성곽을 축조하면서 원주민들은 직업군인들에 대해서 알았을 것이다. 또한 연해주 동북지역 해안가에 위치한 중국식 성곽과 함께 고구려식 석성도 함께 이용되었다. 고구려식 석성은 항구로 들어오는 문이나 강의 하류 등에 위치해서 감시와 방어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석성에서도 말갈토기가 함께 출토된다.


발해의 마지막 시기에는 평화롭지 못하였는데, 동북아시아와 동아시아 국가와 민족 간의 치열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가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에서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종족이 뒤섞이게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발해 멸망 이후인 10세기 이후에 평지성의 특징인 평면형태가 방형인 성이 곶 위(모노마호프스코예, 우스티-일모 성지)에 설치되는 현상도 이때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방어하기가 용이한 성곽은 10~12세기에 나타난 다각형 성곽이다.

그런데 이 기간은 현재까지도 연해주 동북지역 뿐만 아니라 전체 연해주에서영토 등 잘 연구되지 않은 역사이다. 현재 고고학자들은 여진의 유적이 연해주 북동지역에서는 아직까지 확인되고 있지 않고, 그 국가의 경계도 이곳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정도만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림 137. 연해주 동북지역의 발해 성 분포도(1-브루실로프카, 3-데르수 자연방어시설, 4~6-고르노레첸스코예 1~3, 8-사도비이 클류치 성곽, 14-달네고르스키 성자연절벽 성곽, 15-모노마호보, 16-에스톤카, 17-바시코프스코예, 25-드지기토프카, 27-크라스노예 오제로, 28-클류치 성곽, 29-자볼레체나야, 31-스미르코프 클류치, 34-말라야 케마, 35-우스티 일모, 37-켐스코예-돌리노예, 38-켐스코예-모르스코예, 40-야수, 48-세셀로프스코예, 49-소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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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철기시대 폴체 문화


폴체 문화의 사람들도 곶 위에 성을 축조하였다. 극동에서 폴체 문화의 유적 입지에 관한 것은 확실히 규명된 바는 없다. 폴체 문화의 유적은 아무르 강의 중부와 하류에 퍼져 있고, 연해주의 서쪽, 남쪽과 동쪽에 퍼져 있다. 폴체 문화의 상한은 리도프카 문화가 마지막 존재 존재했던 시기까지로 올라가며, 폴체문화의 마지막 시기는 말갈문화가 시작된다. 폴체 문화의 성곽 유적으로 알려진 곳은 콘드라티예프스코예(Кондратьевское, Kondrat'yevskoye), 케드로프스코예(Кедровское,Kedrovskoe) 성곽들이 알려져 있는데, 평면형태가 오각형에 가깝다. 메드베제프 박사는 이 문화의 마지막 단계가 8~10세기정도로 보고 있다. 폴체문화의 곶 성도 그 발달단계는 아직까지 연구된 바가 없다. 폴체문화 유적의 지형적인 특징으로 보았을 때 기본적인 교통로는 아무르 강이고, 그 중에서도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에서 기원해서 동쪽으로 가는데, 아무르 강의 지류인 우수리 강이 그 교통로의 제일 처음 단계였을 것이다.

 

3. 철기시대 크로우노프카 문화

크로우노프카 문화는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가 끝나는 시점부터 시작해서 폴체문화가 시작될 시기에 존재했던 문화로, 연해주 중세시대의 시작인 말갈문화의 시작과도 관련이 있다는 견해가 있다. 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성곽은 페트로프 섬의 곶 위에 자갈로 벽을 쌓은 성지가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유일하다(브로댠스키 1965).

 

4. 말갈문화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말갈이라는 종족은 고고학적인 유적으로 볼 때 아주 넓은 지역에 퍼져 살았다. 북한의 동북지역, 중국 동북지방, 러시아의 극동과 홋카이도와 사할린에도 일부가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적으로 보아서 말갈문화는 10세기부터 13~14세기까지 이다. 연해주 중세시대의 퉁구스-만주족(그 중 일부는 말갈족)이 이 지역에 나타나게 된 것은 중국의 역사서와 여러 책에 기록되어 있다. 이상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나타났고, 곧 모든 곳에서 보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샤프쿠노프 1959). 당연히 극동에서도 이런 사건은 획기적인 사건이었고, 세 국가-발해(698~926), 여진(1115~1234), 동하국(1217~1234)가 탄생하게 된 것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말갈문화의 유적은 극동에서 현재까지 확인된 유적 중에서도 가장 많다. 연해주만 해도 모두 70여개의 유적이 알려졌는데, 대부분 성터와 무덤이다. 아무르 지역에서도 이 보다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곶 성(사카치-알리안, 우툐스노예, 타로프스코예 등)이 아주 많이 공간되거나 문서 기록소에 보관되어 있다(노빅코프-다우르스키 1961, 댜코바·샤프쿠노프 1975, 댜코바 1998). 연해주의 동북지역 타이가 산지에는 말갈의 곶 성은 5개가 알려져 있다. 미스 테플리이,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쿠즈네초프스코예, 오아시스, 에딘킨스코예 등이다(그림 136).


 

그림 136. 45-미스 테플리이, 50-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51-쿠즈네초프스코예, 52-오아시스, 54-예딘킨스코예 성곽의 위치

 

말갈인은 어느 시기까지는 자신의 고유한 성지를 축조했다.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말갈인은 중국-돌궐 족-고구려인의 전쟁에 수천 기마병으로 참가하면서 그들은 다양한 방어물을 축조하게 되었다. 말갈 곶 성은 고대의 성벽 축조기술과는 차이가 있다. 어떤 성에서는 아주 복잡한 구조의 문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곶 성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계기는 발해와의 접촉이었을 것이다. 발해의 영역 확장에 대한 반발로 그럴 필요가 생겼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는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성곽이 이를 보여준다. 즉 트로이치코예 말갈인은 곶 성이라는 기본적인 특징은 유지 했지만, 이 성의 평면형태는 중국의 것을 모방한 발해 방형평지성의 것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유적에서 출토되는 말갈 토기의 형식으로 보아서 이 유적은 9세기 이상은 올라가지 못한다. 말갈인에게 아주 강한 기마병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도 극동 전체에서 교통로가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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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동북지역 성곽유적과 고고학적 함의: 교통로


연해주 동북의 타이가 지역에는 20개의 강이 흐르고 있고, 지형적인 입지에 따라서 산, 평지, 56기의 성곽유적이 현존한다.

러시아 극동에서 가장 오래된 모습의 성은 곶 위에 설치된 성지이다. 평면형태상으로나 그 내부의 구조상이나 가장 단순하며, 성벽의 위치나 크기도 지형적인 입지에 따랐는데, 불룩하게 튀어나온 곶의 가장 좁은 부분에 성벽을 쌓았고, 2~3면은 절벽을 그대로 이용해서 별도의 성벽이 축조될 필요가 없었다.

연해주와 아무르강 유역의 청동기시대와 발해~여진시대 성곽 유적은 이 지역 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많이 퍼져 있다. 러시아 극동은 한국의 동북지방 및 중국 동북지방과 맞닿아 접경을 이루고 있다. 이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항상 많은 종족, 제국과 국가들 간의 충돌이 있어왔고, 이곳으로 구 종족을 몰아내고 새로운 종족이 들어오려고 했었다. 전체 지역에서 민족적이나 정치적인 변화가 조금씩 있어왔던 지역이다. 당연히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에도 평화롭던 그렇지 못하든 간에 이주가 있었던 건 확실하다. 원주민은 적으로 로부터 대응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경계를 세우고, 보호하고 방어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조용한 곳으로 피신을 하곤 했는데, 역사적으로 보아서 우데기족, 나나이족 등은 그렇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제외하고도 지역 주민들 간에도 항상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과정이나 사건들로 하여금 각 지역에 고고학적인 방어건축물이 남게 되었다.

  


1.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

 

연해주 청동기시대의 리도프카 문화는 연해주 전체에서 우수리 강 유역에서 파르티잔 강 까지 북쪽에서 남쪽으로 약 800km 퍼져 있다(댜코프 1998). 연해주와 아무르강 하류의 곶 성은 고고학적으로 청동기시대에 해당되는데, 대략 기원전 일 천 년기 후반으로, 리도프카 문화인들은 직접적으로 고아시아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연해주와 인접한 중국의 성곽은 이보다 이른 시기부터 축조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서는 두 개 형태의 성곽이 존재했는데 평면형태가 바둑판형으로 행정관청이 있는 도성과 교통로를 따라서 축조된 상업의 중심으로 이용되는 성지이다. 리도프카 문화는 러시아 극동에서 볼 때 연해주의 남쪽에서 기원한 문화인데, 그 문화는 확실하게 이주되어 온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어디에 분포했던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고, 연해주와 아무르 원주민들에게 곶 성만을 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리도프카 문화 사람들은 중국의 복잡한 성 축조 기술은 없었다. 아마도 새로운 땅에서 적응하던 초기에 너무나 평화로웠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필요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와 같은 성곽 축조기술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리도프카 문화는 주로 내륙에 분포했는데, 강 주변에서 확인되기도 하지만, 바닷가의 곶 위에서도 확인된다. 리도프카 문화의 중심 분포지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지역의 북동이나 동쪽의 어디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된다. 연해주에서 리도프카 문화는 동북지역의 이주결과로 보인다. 이 문화의 중간시기에는 동쪽으로 이동 하는 가운데 한 무리가 일본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토기가 이를 증명한다. 아마도 이런 움직임은 한반도와도 관계가 있을 것인데, 여기에 관해서는 좀 더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그런데, 리도프카 문화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이 지역이 평화롭지 못한 상태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강이 바다로 흐르는 해안가를 따라서 방어시설들이 이를 증명하는데, 이러한 유적이 축조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재는 곶 위에 설치된 청동기시대 토성이나 석성이 11기 있다. 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미스 스트라시느이, 우스테-벨림베, 켐스코예-스칼리스토예, 우툐스노예, 미스 알렉산드라, 데듀쉬킨 클류치, 쿠다, 사마르가-6, 케드로프카 유적 등이다. 이 지역에서 기원전 일 천년기 후반에 아주 급박한 상황이 있었는데 그것은 동해안의 북동지역 뿐만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그림 135http://연해주의 바닷길-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의 곶 성은 연해주의 내륙에서도 확인되는데, 체르냐치노-3 유적이 대표적이다.

동북지역에서 리도프카문화의 성은 그 지형적인 특징으로 보아서 해안가를 방어해주고 있다. 누구로부터?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얀콥프스키 문화인인데, 연해주에 현존하는 유일한 바다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다. 즉 그들의 주요 생계형태는 어로와 해산물을 채집하는 것인데, 브로댠스키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동해안의 많은 패총도 그들이 남겨 놓은 것으로 생각된다. 해안가를 따라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얀콥스키 문화인들이 리도프카 문화인과 접촉했을 것이고 동북지역에 남겨진 리도프카 문화의 여러 유적은 이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데, 고고학유물에 의하면 그들의 접촉은 항상 마찰이 있었던 건 아니다. 블라고스로벤노예-3, 쿠날레이스코예 성지, 파얀느이 클류치, 노보고르드제프스코예 등 유적에서는 리도프카 문화와 얀콥스키 문화의 토기 특징이 모두 나타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댜코프 1998, 볼딘·댜코바·시도렌코 2002, 댜코바·시도렌코 2002).

아직까지는 리도프카 문화의 곶 성을 발달단계별로 구분하지는 못한다. 오직 성벽은 흙에 작은 돌을 섞어서 축조한 토성벽이 주를 이루며, 아주 단순한 문을 만들었다는 것이 성곽 축조기법이 전부이다. 그러나 동북지역의 곶에 입지한 토성 및 석성은 청동기시대에도 해안가를 따라서 교통로가 있었다는 점을 증명해 준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그 흔적은 제르칼나야 항구에서 북쪽의 사마르가 강 까지고, 그 중 일부 구간은(예를 들면 우스티-벨림베에서 암구 까지)현재까지도 이용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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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발해~여진시대의 교통로 



시호테-알린 산맥의 영동지역 중부지방에서 청동기시대 바닷길과 발해~여진시대 바닷길이 다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첫 번째는 지형학적인 특성상 길이 달라졌을 리도 없고, 두 번째 이 바닷가에 위치하는 이유는 바로 항구 때문이다. 당연히 주민들은 이웃한 지역과 접근성이 좋은 곳을 택했을 것인데, 비단 교통로 뿐 만 아니라 상업적 교류, 외교적인 교류, 적의 침입 방지 등에서도 이러한 곳에 반드시 길이 있었을 것이다


북위시대(386~534)에 말갈인의 길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강을 이용한 수로이다. 477년에 乌鸡의 외교관은 담판을 쉽게 짓기 위해서 말 500필을 선사하였는데, 그는 먼저 길이 얼마나 복잡한가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다. ‘먼저 강의 상류를 배를 타고 건넜는데, 배안에 물이 차서, 다시 육지에 내려서, 무렌강을 건너서, 호란 까지 걸어서 왔다(보로비요프 1994)’라는 기사가 있다. 퉁구스-만주족 국가 발해는 바다의 해상활동을 아주 활발하게 하였는데, 배와 큰 합선도 있었다. 장슈안(1960)이 쓴 『Мореходство в древнем Китае(고대 중국의 해상활동)에서 발해는 무역배와 군함 등이 많았다고 기록되었다. 중국에서 발해로 가는 길은 登州 西港에서 출발해서 동북방향으로 大謝道(현재: 장산열도)龜歆島 (현재 砣磯島)를 지나서 북쪽의 烏湖海(오호해에서 북쪽으로 있는 바다)를 건너서 都里鎭(여순과 가까운 곳)馬石山(현재 老鐵山)까지 간다. 여기서부터 동쪽으로 배를 타고 남쪽으로 靑泥浦 항구(현재의 대련만 부근)), 桃花浦, 杏花浦(대련만에서 동쪽으로 류리하의 하류까지로)까지 건넜다. 그리고 石人汪(현재 石城道에서 북쪽에 있는 해협)에서 藁駝灣(현대의 鹿島에서 북쪽으로 大洋河의 하류), 烏滑江(현대의 丹東부근)을 걸쳐 남쪽으로 압록강 하류까지 간다. 다음 방향은 압록강 강의 상류와 발해 王城(현대 흑룡강성의 녕안현에서 남서쪽으로 70km 떨어진 곳)에서 육로를 따라서 가는 것이 발해의 길이고, 다른 길은 신라로 가는 것이다(쟝슈안 1960). 



발해인이 바닷길을 이용한 것은 항상 평화적인 목적만이 아니었다. 732년에 발해의 무왕은 당나라의 큰 항구 등주를 공격하기를 명했고, 수군이 배를 타고 가서 그 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발해의 배는 노를 저어서 가는 것인데, 이를 이용해서 정기적으로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727년에 발해의 무왕은 일본에서 보낸 외교 사절단을 받아 들였고 이 관계는 920년까지 지속되었다. ‘발해는 29명의 사신을 파견하고, 일본은 6명을 파견하였다. 796년에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 홋카이도에서 발해 사절단이 거의 모두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보통은 발해의 동경성에서부터 일본으로 사절단을 보냈다(보로비요프 1994). 동경성은 바다와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샤프크노프에 의하면 일본도는 러시아 연해주의 남부로 현재의 엑스페드치야 만과 가까운 크라스키노 항구와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곳에는 발해의 항구이자 염주의 중심부이다. 이곳에서부터 출발해서 한반도 동해을 따라서 가다가 남동쪽으로 돌면 쓰시마 섬과 이끼 섬으로 발해의 배가 갈 수 있다(발해와 러시아 극동의 종족 1994).

연해주 중부 영동지역의 바닷가 길의 존재는 그간 지역학계에서는 외면되어 온 주제이다. 이 문제는 이 교통로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주제와 관련해서 아르세네프 연구 외에는 거의 연구되지 못하다가, 필자가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발해 및 여진시대의 성곽은 동해바다의 강의 하류 혹은 바다의 만에 위치하고 있는데 연해주 영동지역과 북쪽 타타르 해협까지 바닷가 길이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제르칼나야 계곡에는 발해와 멸망 이후의 성곽(보고폴, 고르노레첸스코예-1~3) 등이 있고, 마을 유적(시네고르예-1,2, 우스티노프스키예 폴예 등)도 있지만 강 하류에는 방어하는 성곽은 없다. 활발한 해상 활동은 루드나야 만의 북쪽에서도 확인되는데, 이 만을 지키는 바시코프스코예 성곽으로 알 수 있다. 평지성인 프리스탄스코예 성곽은 바다와 가까운 강의 하류에 위치하면서 항구의 역할을 했다. 그 보다 북쪽의 드지기토프카 강의 하류에 위치한 클류치 성곽은 교통로를 통제하는 역할을 하며, 남쪽과 연장되는 바닷길을 연장하는 역할이다. 바다에서 2km 가량 떨어진 곳에 발해 시기의 크라스코예 오제로 성곽이 위치한다. 시호테알렌 산맥의 포드네베스노이 고개를 넘어서 그 곳을 지나서 드지기트토프카 만 까지 오는 육로가 있다. 이 크라스노예 오제로 성곽은 항구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주변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뻘인데 발해시기에는 해수면이 이곳까지 상승해서 바다가 성 가까이 위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보다 북쪽 발해의 바닷길은 말라야 케마, 켐스코예-모르스코예, 켐스코예-돌리노예로 이어진다. 이 성들은 말라야 케마 강과 케마 강 하류에 축조된 것이다. 방어용 보다는 부두와 같은 역할이었다. 탈니코바야 강의 하류에 위치한 우스티 일모 성지에서부터 출발해서 말라야 케마 성곽으로 향하는 해안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 바닷가 길을 지켰을 것이다


이곳 보다 더 북쪽의 켐스코예-모르스코예와 켐스코예-돌리노예 성곽이 있는데, 스토르모바야 만과 케마 강 하류의 입구를 지키고 있으며 또한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경사면에서부터 내려오는 육로를 지키고 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바닷가 길은 북쪽의 야수 성지를 지나서 암구 강의 하류에서 방어적 기능을 한다. 암구 만에는 중세시대 성지가 없는데, 가장 이른 시기의 중세시대 성지는 미스 테플르이로 이는 말갈문화의 것이다. 이 성지는 바다의 곶 위에 위치하는데, 이는 해상로를 통제하고 있고 직접적으로는 바닷가 길을 살피는 것이 확실하다. 암구 강에서 발해시대 성곽으로 알려진 것은 없다. 대신 동하국시기의 것이 있는데, 여진족은 주변 전체지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소프카 류브비 성곽이다. 해안로와 바닷가 길을 지키는 역할이며 국경을 지키는 곳이다. 이곳에는 시호테 알린 산맥으로부터 넘어 오는 육로가 없지만 여진족들은 이 지역을 연해주 남쪽에서부터 올라와서 바닷가 길을 이용했거나 혹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에서부터 포드네세브느이 고개와 드지기토프까 유역까지 넘어 갔을 가능성도 있다. 북쪽 해안로로도 이어진다. 이동을 위해서는 말이 필요했는데, 그들은 우수리스크 주에서 풀을 베어가면서 길을 만들었다. 세레브랸카 강 유역, 말라야 케마와 케마 강 유역에는 여진의 유적이 없고 암구 강 하류에서 보인다. 이곳에 위치한 말라야 카르마 성곽과 카르민스크 흐베르트 성곽도 동하국의 북쪽 경계에 있는 성곽으로 해안로와 바닷길을 방어한다. 아마도 암구 강 북쪽의 여진 유적이 앞으로 확인될 가능성은 있지만, 지보피스나야 강 유역, 쿠즈네쵸바 강 유역, 에딘카 강 유역, 사마르가 강 유역 등에서 현재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암구강 이후에는 지보피스나야 강 하류까지는 바닷길이 있고, 소욘스코예 성곽이 이를 증명한다. 이것과 연결되는 중세시대 바닷길의 지점은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성곽으로 말갈의 것이다


발해이후의 바닷길은 연해주 동북지역에서부터 타타르 해안가까지 아주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강 하류에는 배가 닿는 항구로 추정되는 말갈의 성곽(미스 테플르이, 우스티-소볼레프카)도 축조되었다. 해안가를 스스로 통제하고 누군가 이 곳으로 들어오려고 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한 기능도 있다. 아마도 일 천 년 기 즈음에는 고구려인, 일본인 그 다음은 발해인이었을 것이다. 이곳 말갈영토에는 상업적 목적 뿐 만 아니라 영토 확장을 위해서 발해인이 들어왔을 것이고, 해상활동에 아주 활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 영동지역에 입지한 청동기시대부터 발해, 말갈, 여진시대의 고고유적들로 보아서 교통로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거리 재는 방법은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낮 기간 동안의 갈 수 있는 거리를 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요양에서 말갈의 땅까지 기록에 의하면 대략 2700km이다. 요녕 천산산맥을 따라서 이 길의 거리는 53일 정도 걸린다. 이 거리는 대략 4단계 정도로 나누어서 계산 된 것인데 13+7+15+18일을 합한 것이다(보로비요프 1994)

연해주 영동지역 동해부터 타타르 해협까지 영동과 영서를 넘는 육로가 강을 따라서 형성되어 있다. 제르칼나야 계곡, 드지기토프카, 세레브랸카, 타요즈나야, 케마, 에단카, 사무르가강 계곡 등을 통해서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길이 나 있다. 청동기시대부터 발해를 걸쳐 여진시기까지 바닷길은 동해 중부지역부터 타타르해협까지 있는 길로, 제르칼나야 만에서 사마르가 강 하구까지이다. 이 구간에서 배를 데기 쉬운 곳으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는 항구시설이 있었다. 강의 하류에는 해안과 주변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한 방어와 감찰 시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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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닷길



필자는 고대의 바닷길은 바다와 만나는 강 하류에 항구로 사용하기 좋은 곳에 축조된 성곽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판단한다.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지역에서 확인된 고대 성곽을 지도에 표시하면 제르칼나야 강에서부터 사마르강 강의 하류까지 600~650km에 가까운 바닷가 길을 복원할 수 있다. 물론 이런 바닷길은 바다에서 해안으로 이동할 수 있는 길을 이야기 한다. 극동의 동해 바다를 따라서 교통로를 복원한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지만 앞으로도 해결할 것이 매우 많다(그림 135).

  

그림 135. 연해주 청동기시대 해안로와 

 

 

1). 청동기시대의 교통로


 동해의 제르칼나야 강에서 타타르 해협의 사마르가 강까지 모두 15기의 토성 및 석성(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클류치, 미스 스타라시느이, 우스티-벨렘베, 켐스코예-스칼리스토예, 우툐스노예, 미스 알렉산드라, 소프카 류브비이, 쿠댜, 데두시킨 클루치, 미스 테플리이(중간층), 소욘스코예(아래층), 지보피스노예, 사마르가-6(댜코바 2005) 유적이 확인된다


 모두 강의 하류에 축조되는데, 이는 리도프카 문화 가운데서 쿠날레이스코예 그룹으로 드물게 확인되는 것이다. 가장 남쪽은 제르칼나야 강 하류의 우스티-제르칼노예 성곽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80~90km 떨어진 곳에 두브로빈스코예 성곽이 위치한다. 여기서 다시 북쪽으로 80~90km 떨어진 곳에 디지기토프강 하류에 클류치 성곽이 축조되어 있는데, 상층은 발해시기, 아래층은 청동기시대이다. 클류치 성에서 북쪽으로 55~60km 떨어진 곳에 세레브랸카 강의 하류에 미스 스타라시니이 토성이 있는데, 항구 역할을 했던 곳이다. 여기서 북쪽으로 30~40km 더 가면 타요시나야 강의 하류의 우스티-벨렘베 성곽이 있다. 20~30km 떨어진 곳에 켐스코예-스탈리스토예 석성, 20~25km 떨어진 곳에 페르바야 우툐스나야 강과 페세라 강의 하류에 우툐스코예 토성과 미스 알렉산드라 2중벽이 있다. 북쪽으로 70~80km떨어진 암구강 하류의 소프카 류브비(아래층), 쿠댜 토성, 데두시킨 클류치 성벽이 축조되었다. 미스 테플리이 토성은 암구 강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아주 작은 만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 10~15km 떨어진 곳에 소욘스코예 토성(아래층)이 있다. 해안으로부터 얼마간 떨어져 있지만, 육로로부터 강의 하류로 들어오는 길목을 지키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북쪽으로 6~7km 떨어진 곳 타타르 해협 방향으로 사마르가-6 토성이 위치한다. 바다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만 성곽에서는 사마르가 강의 하구와 해안교통로를 잘 지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보피스나야 강과 사마르가 강 사이에는 새로운 성곽이 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현재까지 조사된 바는 없다.


 위의 성곽유적은 곶 위에 위치하면서 해안로와 강의 하류를 모두 통제하는 기능을 한다. 대체적으로 단일 문화층이다. 우스티-제르칼노예 성곽과 가까운 곳에 제르칼노예-4 유적이 있는데, 두브로빈스코예 성곽으로 리도프카-1 유적을 방어한다. 미스 스트라시느이 토성 뒤에는 세레브랸카 평지성이 있고, 암구 강 유역에는 리도프카 문화 유적이 있으며, 사마르가-6 토성은 사마르가-5 마을 유적을 조망하기 위에 높은 곳에 축조되었다(그림 135).

 가장 중요한 것은 방어와 감시 기능으로 해안로와 항구를 감시하는 것이다. 대치상황은 적 뿐 만 아니라 해적의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해적 활동을 한 종족에 관해서 역사 기록이 남아 있다. 그들은 바다에서만 활동하지 않고 육지에서도 해적질을 하였다. 우스티-제르칼노예, 클류치, 미스 스트라시느이, 켐스코예-스칼리스토예, 소프카 류브비, 미스 테플리이, 지보피스노예, 사마르가-6 유적은 해안로와 해로 모두를 감시한다. 당연히 상업적 항구에는 지역생산물과 지역 주민들이 이용하는 수입물품 등이 있었을 것이고, 이는 고고학적 유물로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이 지역에서 유명한 녹색 마노의 석재를 사고 팔았을 것이다. 항구 역할을 하는 성은 앞서 방어역할을 하는 성곽 중 클류치 토성을 제외하고 모두 해당된다.

 특히 연해주의 남부 바다가를 얀콥스키 문화인등이 장악했을 것인데, 내륙에 리도프카 문화인들과는 차이가 있는데, 고고학 유적에서 이러한 정황이 발견된다. 얀콥스키인은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데 아주 능하였다. 시호테 알린 중부의 영동지역 해안가에는 리도프카 문화인들이 거주하고, 얀콥스키 문화인들은 살지 않았다.

하지만 쿠날레이코예 그룹의 유적들은 기원전 10세기 가량에 양 문화의 접촉이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발굴된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에 얀콥스키 문화 중기와 리도프카 문화 특징이 함께 발현되기 때문이다.

 리도프카 문화인들이 해안로를 자신의 교통로로 이용했다는 것은 이 시기의 토성이나 석성으로 입증되지만, 직접 건조한 배는 확인된 바 없다. 하지만 아마도 얀콥스키 인들의 배를 이용했으며, 혹은 다른 문화도 배를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리도프카 문화 중에는 일본 구주 지방에 리도프카 문화 토기 특징이 나타나는데, 그들이 건너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거주한지는 알 수 없다.

따라서 기원전 10세기 가량 연해주의 동해와 타타르 해협에서는 정확하게는 제르칼나야 강의 하류에서 사마르 강 하류까지 교통로 역할을 하는 해안로가 있었다. 강으로부터 들어가고 나가기 쉬운 항구시설이 있어서 편지한 장소에 위치한 토성과 석성이 이를 입증하며 그 곳과 주변 지역을 모두 통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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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소볼레프카 강 유역

시호테 알린 산맥의 영동지역과 걸쳐있지만 고개 역할을 하는 곳이 없다. 유일하게 말갈 성지가 있는데, 강의 하류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고 해안가의 교통로를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12) 쿠즈네쵸바 강 유역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사면에 걸쳐 있다. 서쪽은 비킨 강의 지류인-제바(Зева,Zeva)와 볼샤야 스베트로보드나야(Большая Светловодная, Bol'shaya Svetlovodnaya) 강과 통한다. 그러나 서쪽으로 넘어가는 고개길은 없다. 이 강의 하류에는 강 하류에서 바다까지 약 3km 떨어졌는데, 리도프카 문화층과 발해문화층이 발견된 성이 1기 존재한다.

이곳에도 북쪽으로 에딘카 하류까지 연결된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이 길은 부르릴바야 강 하류에서는 오아시스 성곽이 표지가 되고, 더 북쪽에 있는 페야 강 하류에는 우스티-페야 성곽으로 통한다


아르세네프는 쿠즈네쵸바 곶에서 북쪽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오로치 족은 그 곳으로 걸어다니지 않고 말을 타고 다녔다는 기록을 남겼다.



오로치 족은 전통적으로 겨울에는 스키를 타고 다녔다. 퉁구-만주족은 여름에는 강을 건널 때는 배를 타고 다니고, 겨울에는 스키를 타고 다녔다.

아래 링크를 참고하면 각 강유역의 성곽 위치와 성곽에 대한 설명을 참고할 수 있다

  

http://소볼레프카 강 유역의 성곽

http://예딘카 강 유역의 성곽

http://사마르가 강 유역의 성곽



13) 예딘카 강 유역

강의 상류는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사면에 걸쳐있고, 서쪽 사면과도 가까워서 비킨 강의 지류로 통하기 쉽다. 서쪽으로 흐르는 작은 시내가 있는데 그 곳이 영서로 넘어가는 고갯길이다. 사마르가 강과 비킨 강에는 우데기 족이 이용한 길이 알려져 있다.

예딘카 강의 하류에는 말갈 문화와 관련된 성곽이 한 곳 알려져 있다. 이곳의 교통로를 이용하면 시호테 알린 산맥에서부터 아무르강 하류의 타타르 해협까지 다다를 수 있다.

 

14) 사마르가 강 유역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과 동쪽 경사면을 연결하며, 고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다. 강의 하류에 청동기시대 사마르가-6 토성이 발견되었다. 또한 타타르 해협으로부터 들어오는 길을 방어하는 고르 크루글라야라고 하는 자연방어시설이 있다. 사마르가 강은 지류가 많은 강으로 길이 어디로 통하는 지 알기 어렵다. 육로인 해안로와 수로가 서로 엉켜져 있다. 배로 어디까지 이동하고 그 다음은 육로를 따라서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다. 아직까지 연구가 많지 않다.

시호테 알린 산맥의 영서지역에서 출발 한다면 온 장소로부터 배를 타고 이동했다면 어떤 장소까지 해안로로 가야만 한다. 만약에 해안을 따라서 북쪽으로 이동한다면 사마르가 강 하류에서부터 해안로를 이용해야 할 것이다. 남쪽 예딘카 강 하류로 간다면 나자로프카(Назаровска, Nazarovska) 강 하류까지 배를 타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 영동지역에서 선사시대 부터 교통로는 고고학적으로나 민족학적으로 보아서 각기 다른 교통로가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해안로는 동해안을 따라서 타타르 해협까지 이어진다. 또한 시호테 알린 산맥의 고개를 이용해서 제르칼나야 강, 드지기토프카 강, 세레브랸카 강, 타요시나야 강, 케마 강, 예딘카 강, 사마르가 강 유역의 교통로가 각기 지나가는데, 이는 산맥의 서쪽과 동쪽을 연결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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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페세르나야 강과 페르바야 우툐스나야 강 유역

케마 강에서부터 이 강의 하류까지 북쪽으로 13~15km 떨어져 있다. 청동기시대 교통로에는 우툐스노예 토성과 미스 알렉산드라 2중벽이 남아있다. 발해시기의 유적은 야수 성곽이다. 이 지역 교통로를 처음 연구한 사람은 아르세네프다. 고대의 교통로가 있는데, 강을 넘을 수 있는 여울 근처에 성곽을 지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성곽은 주로 교통로의 바로 옆이나 그곳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당연히 이곳에는 육로와 해안가로 이어지는 교통로가 있었을 것인데, 성곽이 도로가 있던 시기의 것인지 아니면 도로가 다른 성곽과 관련된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암구 강의 하류까지는 70~80km 떨어졌는데, 이 도로는 해안가와 거의 붙어 있고 편평하다. 지금까지도 해안가 언덕은 매우 습한 흙으로 전부 풀로 뒤덮여 있는데, 힘들 길이다. 이곳으로 지나는 바다길은 20세기 말까지 이용되었다.


각 강유역의 좀 더 정확한 성의 위치는 아래의 링크를 참고하기 바란다.


http://지보피스나야 강 유역의 성곽 1

 http://암구강 유역의 성곽 1



9) 암구 강 유역

암구 강 유역은 다른 강 유역과는 달리 시호테 알린 산맥의 영동과 연결되지 않고, 서쪽으로 가는 고개도 없다. 마시모프카 강 상류에서 끝난다. 암구 강의 지형적 특징에 따라서 언덕을 넘어서 해안가를 따라서 올라가는 교통로가 있었다. 청동기시대에는 이 도로에 있던 유적이 소프카 류브비(리도프카 문화층), 쿠댜, 데두시킨 클류치, 미스 테플리이(리도프카 문화층)가 있고, 중세시대에는 소프카 류브비(여진 층), 미스 테플리이(말갈 층), 말라야 카르마, 카라민스키 흐레베트 유적 등이 있다. 이 길은 지보피스나야 강 하류까지 가장 짧은 길인데, 9km를 넘지 않는데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이다.

아르세네프는 여행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암구 강에서 쿠수누Кусуну 강까지 길에서 절벽이 바다를 볼 수 있다. 이곳에는 고대의 도로가 있다. 수혈이 있는데 그 크기가 큰 걸음으로 300걸음 정도 되고 깊이는 약 4.3m 정도 된다. 또 다른 길은 산으로 올라가는 것이다..확실히 고대의 도로는 소욘(지보피스나야 강)강으로 이어진다. 성곽이 있는 곳은 교통로가 항상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케마 강 하류에서 암구 강 까지의 청동기시대부터 발해시기 교통로는 바다를 따라서 이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바다와 인접한 강의 하류에 성곽이 축조되었다. 성곽 간의 거리는 일정하지 않은데, 바다로 들어가는 강의 하류에 입지 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성지 사이의 거리가 9~15km도 있고, 휠 씬 더 벌어진 것도 있다. 산지성은 먼 곳을 감시하거나 관찰하는 방어시설용이고, 해안가 평지성은 항구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암구 강 유역에는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으로 들어가는 문이 없고 교통로는 해안가 길뿐이다



 

10) 지보피스나야 강 유역

세셀레프카 강, 세바스노프카(Севастьяновкa, Sevast'yanovka) 강과 지보피스나야 강을 포함하는데, 시호테 알린 산맥과는 관계되지 않는다. 암구 강과 마시모프카 강은 서로 연결된다. 아르세네프는 현대의 지보피스나야 강의 하구는 고대 항구로 그곳에 소욘스코예, 세셀레프스코예, 지보피스노예 성곽이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암구 강에서부터 시작된 해안가 교통로는 이 강 유역까지는 청동기시대부터 발해 및 여진시대까지 모두 이용되었다. 이 성곽은 강의 하류를 통제하면서 보호-방어하는 역할이고, 바다로 들어가는 문지역할이다. 해안가 길은 계속해서 북쪽으로 마시모프카 강와 소볼레프카 강 까지 이어진다. 지보피스나야 강 유역에는 동해안을 따라서 올라가는 교통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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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타요시나야 강 유역


아르세네프는 이 곳에 고대의 길이 있다고 했다. 벨렘베 강 하류에서 대략 11km떨어진 곳에 지류인 자비타야(Забытaя, zabytay) 강이 있고, 그곳에는 18세기의 도로가 지나는데, 바닷가인 유즈노-우수리스키 지역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길은 탸요시나야 강을 따라서 키예프(Киев, Kiev)고개까지 이어지고 콜룸베 강의 상류로 나간다. 이 강의 중류역타요시카(Таежкa, Taejka) 1~5과 하류우스티-벨림베 유적이 있는데 기원전 10세기의 리도프카 문화(댜코프 2000)의 것으로, 유적이 존재하는 것은 강을 따라서 교통로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따라서 타요시나야 강 유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시호테 알린 산맥의 영서와 영동을 연결해서 바다까지 이르는 교통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키예프 고개에서부터 동해 바다로 향한다.

  


6) 말라야 케마 강 유역


지형학적 특징으로 시호테 알린 산맥이 영서지역과 연결되는 곳이 없다. 이 곳에는 타요시나야 강 하류에서 말라야 케마 강 하류까지 해안을 따라서 있는 교통로가 있다는 것을 성곽이 증명한다. 발해의 성곽으로 보호감시 뿐만 아니라 항구의 역할도 한다. 이 길은 현재까지도 이용되지만, 고대의 교통로가 현대의 도로보다도 더 짧고 빠르다.

말라야 케마 성지로 난 길은 끊어지지 않고 이 강의 북쪽에 위치한 케마 강 하류와 시토르모바야 항구까지 이어져서 북쪽으로 계속된다.


 

7) 케마 강 유역


지형학적 특징으로 인해서 시호테 알린 산맥의 영동지역에서 고립된 곳이다. 서쪽으로는 접근하는 길이 없으며, 케마 강의 상류로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아르세네프는 紅鬍子과 싸울 때 그는 시호테 알린 산맥의 수계 중에서 우데기 족이 이용하던 케마 강의 서쪽을 통해서 아르무 강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케마 강의 수계에서는 시호테 알린 산맥을 넘어가면 말라야 스베트로보드나야(Малая Светловодая, Malaya Svetlovodaya)강으로 연결되고, 거기서 비킨 강 상류로 이어진다. 발해시기에 케마 강의 지류인 탈니코바야 강에서 방어역할을 하는 곳이 우스티-일모 성곽이다. 이곳에서 나오는 길은 스토르모바야(Штормовая, Shtormovaya) 항구가 있는 바다까지 이어진다. 항구에서는 해변을 따라서 북쪽으로 갈 수 있는 해안로가 있다. 항구와 해안가에는 켐스코예-돌리노예 성곽과 켐스코예-모르스코예 성곽이 2기가 있다. 매해 강을 건널 수 있는 장소가 바뀌기 때문에 케마 강을 건너는 것은 힘들다. 이곳은 강의 가장 하류 보다 약간 위쪽이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배나 말이 필요한데, 발해인과 여진족은 배로 운반하는 것에 아주 능했다.

따라서 케마 강 유역에는 2개의 길을 설정할 수 있다. 하나는 시호테 알린 산맥을 넘어서 아르무 강과 비킨 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해안길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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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드지기토프카 강 유역.


드지기토프카 강 유역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과 서를 연결하는 해서 동해로 들어가는 길목이 있는 중요한 집수구역이다. 이곳에는 2개의 길이 있고, 체레무호바야 집수지에서 하나로 연결된다. 첫 번째 길은 루드나야 강 유역에서부터 고루부샤 고개를 넘어서 체레무호바야 집수지로 들어오는 길이다. 이 강의 중류역에는 체렘샤니 발해 성곽이 위치하고 있다. 또 다른 길은 아무르 강 유역과 관련되었는데,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과 연결되고, 연해주의 대륙과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산의 문지 역할을 하는 곳은 포드네베스느이 성곽이다. 이 길은 볼쇼야 우수르카 강과 이르티스 강과도 관련되어 있으며, 거의 드지기토프카 강의 상류와도 연결된다. 체레무호바야 강 하류는 루드나야 강의 지류와 합쳐져서 드지기트 만의 바다로 들어간다. 이 강 유역의 전체 길이는 70km 정도이다. 이 강의 길에는 발해 성곽과 동하국 성곽이 (포드네베스나야, 드지기토프스코예, 쿠날레이스코예, 크라스노예 오제로, 클류치 성곽) 지키고 있다


왜 드지기토프카 강의 좌안으로 길이 지나갔을까? 고개성 산지성인 포드네베스느이 성곽에서 출발한 도로는 지금도 이 강의 좌안을 따라 나있기 때문이다. 이 곳에는 드지기토프스코예 성곽과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이 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에서 출발한 길은 드지기토프카 강 하류에 위치한 크라스노예 오제로와 일종의 등대 역할을 한 클류치 성곽까지 강을 따라서 갈 수 있었는데, 가장 짧은 길이다. 그 길이가 8km를 넘지 않는다. 그 길은 지금도 일부구간이 남아 있다. 클류치 성곽은 드지기토프카 강의 좌안에 위치하는데, 드지기트 항구를 지키는 역할을 하며, 강의 하류를 통제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발해시기 까지 바다와 가까운 언덕의 아래쪽에 성지를 축조하기도 했는데, 현재는 석호가 확인되는 곳이다.

따라서, 드지기토프카 강 유역의 교통로는 선사시대 부터 확인된다. 남쪽의 루드나야 강은 체레무호바야 고개를 통해서 연결되었고, 서쪽은 포드네베스카야 고개를 넘어서 아무르 강 쪽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림. 드지기토프카강과 세레브랸카강 유역의 위치



 http://세레브랸카 강 유역의 석성 1.

위를 참고하면 세레브랸카 강 유역의 성곽 위치를 좀 더 자세히 알수 있다.


4)세레브랸카 강 유역


아르세네프는 하룻밤에 테르네이 항구에서 시호테 알린 산맥을 넘어 아무르강 유역의 이만 강 까지 갈 수는 있지만 매우 힘들었다고 기록했다. 세레브랸카 강은 세 곳의 고개에서부터 출발한 강이 하나로 합쳐진다. 시호테 알린 산맥의 콜룸베 수원지는 볼샤야 우수르카 강의 우안 지류로서, 이곳도 교통로라고 하는데,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첫째로 고개에는 성곽이 없고, 두 번째 주변의 대부분 고고학 유적과 성곽은 세레브랸카 강 유역의 중류와 하류역이나 좌안 지류인 자볼로첸나야 강 유역에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2개의 석성 유적(자볼레첸나야 성곽과 스미리코프 클류치 성곽), 세레브랸카 강 하류에는 청동기시대의 취락마을 유적인 미스-스트라시느이 유적이 있다. 고고학 유적을 바탕으로 교통로를 복원해 본다면 세레브란캬 강의 하류에서 출발해서 자볼레체나야 강 하류쪽을 돌아서 북쪽으로 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사할린 고개를 넘으면 콜룸베 강에 다다르고, 그 다음 볼쇼야 우수르카 강과 아무르강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르세네프는 세레브란캬 강의 하류에서 타요시나야 강의 하류까지 가는 길이 있다고 했다. 이 길은 산을 넘어가는 것으로 현재에도 바다로 통하는 길이 있다. 이 길의 흔적은 아마도 터널, 보초시설, 표식 등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세레브랸카 강 유역에는 2개의 육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데, 하나는 세레브랸카 강의 하류에서 자볼레첸나야 강을 지나 사할린 고개를 통해 아무르 강까지 연결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세레브란캬 강 하류에서 타요시나야 강까지 연결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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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d)...번쩍거리는 것.

필자는 반짝이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필자가 첫 논문을 쓴지 14~16여년 고고학을 연구하고 있지만 황금과는 전혀 관련 없는 시대를 쓸고 닦아써 지금까지도 쓰고 있다. 그리고 계속 쓸 것이다.

 

그런데 머릿속에 맴돌던 주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에르미타쥬 박물관과 시베리아 연구소에서 본 황금유물이다.

 (한국에서 황금이 출토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이후의 일이다.이에 대해서는 동아시아는 옥을 귀하게 여겼다고 하는 일각의 의견과 동이위지전의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명분없는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

 

 시베리아에서는 이미 기원전 9세기부터 철기시대 였으며, 기원전 5세기가 되면 황금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한다. 이름 하여 스키타이문화 혹은 스키타이 세계라고도 한다.

이 문화를 상징하는 세 가지 아이덴티티가 확인 되는 유물이 유라시아 각 지역에서 확인된다. 이를 엮어서 스키타이 세계라고 한다. 그 범위는 어마어마하게 넓은데 흑해부터, 중국 요서지역까지 포함됨다.


박물관의 건물칭찬만 하다보니 그리고 블로그가 너무 재미없는 것도 같아서

새로운 주제를 좋아하는 필자는 황금유물을 하나씩 소개해 보고자 한다.(아마도 어느날 이걸로 논문을 쓰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아련히..)

 

사진의 그림은 흑해북연안의 쿨오바Куль-Оба, Kul'-Oba라고 하는 무덤에서 출토된 동물장식이다.



보시면 알겠지만 사슴이다.

사슴의 뿔이 멋있는 걸로 보아서 숫사슴이다.

그런데 더 자세하게 보면 눈에는 칼을 그렸고, 몸통에도 여러 동물을 표현했다.


왼쪽부터 살펴보면


가장 왼쪽은 상상의 동물 그리핀 이고, 중간에 놀란 표정의 동물, 그 옆에는 사자가 있다.


사자는 시베리아에 서식하는 동물이 아니다. 즉 시베리아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동물장식인데, 그런데 스키타이 문화에 간혹 있기도 하다. 흑해연안에. 그리스와 페르시아와 가까운 곳에.

 즉 사자는 흑해 혹은 코카서스 산맥의 남쪽 지역과 관련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핀은 스키타이 문화의 대표적인 동물문양이지만, 이 그리핀은 페르시아의 것과 가깝다. 시베리아에서 나오는 그리핀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중에 유물로 설명하겠다.


사자와 그리핀 사이 중앙에 있는 동물은 확실하진 않지만 유제류인건 확실하다. 굽이 있다.


그리고 숫사슴의 목 아래에는 표범이 표현되어 있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표범문양은 주요장식중에 하나이다.

뿐만 아니라 숫사슴이 다리를 웅크리고 있는 것도 특징중에 하나이다.

 

이 유물은 31cm가량 크기이다. 화살통 장식판이다. 아마 뒤를 돌려보면 매달 수 있는 꼭지가 있을 것이다.

출토된 무덤은 기원전 5~4세기로 파악되고 있다.

 

황금사슴장식은 스키타이 문화의 세가지 아이덴티티 가운데 하나인 동물문양장식이다. 동물문양장식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되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슴문양이다. 동물문양장식은 단독유물이라기 보다는 말 그대로 어딘가를 장식해서 아주 다양하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유물은 흑해연안에 위치한 무덤출토품이다. 그러나 이 유물이 출토되는 스키타이 문화의 시작점은 시베리아 정중앙에 위치한 곳이다. 기원전9세기!!!!



  이곳에서 쿨오바 유적을 찾아보기 바란다...표시하기 보단 찾아보는 재미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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