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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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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부의 동심원문 암각화는 대부분 소백산맥이동의 영남지역에 분포하고 있다(그림1). 동심원문 및 동심원문과 유사하게 원을 여러 겹처서 시문한 암각화가 있고, 변형 사다리꼴(검파형) 혹은 석검이 그려진 암각화와 함께 시문된 것이 있다(그림 7,8). 그런데 고령의 인화리 암각화에는 동심원문 위에 검파형암각화가 그려져서 두 문양이 시기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그림 8-6). 또한 고령 양전동 암각화에서는 SW2면에서는 검파형 문양에서 뻗어나온 방사선의 위쪽에 동심원문이 그려졌는데(그림8-1), 동심원문이 먼저 그려진 것이다. 즉 동심원문과 검파형암각화는 그려진 시간차가 있을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한반도 동심원문 암각화는 무산 지초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석묘와 관련되어 있어 청동기시대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환동해문화권과 비교하면 연대는 다르다. 문제제기한 바와 같이 유적의 성격에 따른 연대추정은 상황에 따라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발굴된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수 있다.


 또한 사카치알리안에서 얼굴모양 마스크 이외에 전신상이 출토된 예가 있다(그림9-1,2). 머리는 원형이고, 몸통은 삼각형으로 표현되고 두팔이 표현되었다. 유사한 예가 포항 대련리에서도 확인되었는데(그림 9-3,4), 사카치알리안 유적의 동심원문 암각화와 얼굴모양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같은 시점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세레미체보 유적(그림 3-8)에서 동심원문과 약간 다른 회오리문양이 확인되는데 양전동(그림 8-4)에서도 확인된다. 즉 동심원문, 전신상암각화, 회오리 문양 등은 소백산맥 이동의 영남에서 확인되며 환동해문화권이 관련성이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

그림 9. 전신상인면문(1,2: 사카치알리안, 3,4: 포항 대련리)




 백성 쌍탑 1기와 사카치알리안, 세레미체보 유적 등의 예로 보아서 동심원문양은 이미 신석기시대 9000년 전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고, 두만강 유역도 세레미체보 유적이 위치한 두만강 유역과 멀지 않다. 그러나 두만강 유역에는 9000년 전 까지 올라가는 유적이 확인된 바 없고, 한반도 남부의 소백산맥 이동의 남부지역 신석기시대 유적도 9000년 전 까지 올라가는 유적이 현재까지는 없다(2,3). 또한 연해주 자이사노프카문화가 시작되는 시점인 5000B.P.부터는 강원도지역에서는 첨저토기가 출토됨으로 이 시간대는 환동해문화권이 축소되었다고 강원도는 문화권에 포함되지 않는다(3, 김재윤 2017).

  

 따라서 현재로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동심원문 암각화는 아무르강 하류~우수리강 일대 및 송눈평원 일대에서 많이 확인되던 문양이고, 얼굴모양으로 활용되어 그려져서 9000년 전이다. 뿐만 아니라 우수리강과 가까운 두만강 유역에도 확인되는데, 같은 문화지역임으로 유사하거나 약간 느린 시점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또한 한반도의 동심원문 암각화도 태백산맥에서 분기된 소백산맥 이동에서만 확인되었는데, 이는 두만강유역에서도 확인됨으로 환동해문화권과 교류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좀 더 뚜렷한 것은 토기 및 석기 등으로 연구된 아무르강 및 연해주와 교류가 있었던 6500년 전 이후부터 일 수 있고, 연해주와 동해안의 관련성이 6000~5800년 전임으로 이 기간과 관련성이 높다(김재윤 2015, 2017, 3).

  하지만 암각화의 제작연대와 이기간이 반드시 일치할 수는 없다. 정신적인 행위를 토기와 석기 등 일상적인 유물과 같은 시간적인 잣대로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환동해문화권과 영남의 신석기시대사람들이 교류했다고 해도 동심원문암각화를 그린 주체는 영남의 신석기시대 사람이다. 동심원문암각화가 대부분 내륙에 존재하는데, 이곳에서 유적이 생기는 시점은 대부분 5000년 전 이후이며, 동심원문 암각화도 이 때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category=772722(그림1)

https://eastsearoad.tistory.com/274?category=772722(그림3)

https://eastsearoad.tistory.com/272?category=772722(그림 7,8)


*본문에 제시된 표 2와 3은 다음포스팅에 올리겠습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9. 12:0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백성 쌍탑 유적에서는 토기문양에 동심원문양이 새겨진 것이 확인되었다. 백성 쌍탑 1기의 토기가운데, 융기문 및 구순각목문, 승선문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아무르강 중류의 신석기시대 노보페트로프카문화(그림 6-16~19)와 관련이 있고,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다.

 

 침선기법으로 동심원 사람얼굴문양이 남아 있는 토기편과, 융기문양으로 얼굴이 표현된 것도 있다(그림 6-10,11,14). 백성 쌍탑 1기의 절대연대가 9550±45, 10162±630, 9445±710, 10400±600, 10202±1000, 9679±750B.P.로 알려졌다(吉林大學邊疆考古硏究中心·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13).

사카치 알리안의 얼굴모양 마스크는 얼굴형을 기준으로 분류되었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그런데 필자는 사카치알리안의 여러 지점들에 2, 3중 등 동심원문양이 남아 있고, 코와 입까지 그려진 암각화(그림 3-1~4)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얼굴을 그릴 때 눈을 먼저 그리고 얼굴형을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눈의 모양에 따라서 얼굴모양을 구분할 수 있는데 크게 동심원의 눈(그림4)과 타원형으로 찢어진 눈’(그림5)에 가까운 형태이다.

동심원의 눈이 있는 얼굴은 이마, , , 얼굴형 등에 따라서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특히 눈에 동심원문이 2개 혹은 3개 그렸고, 얼굴형은 타원형, 원형, 하트형, 등이 있다.

동심원문이 2개 혹은 3개 그려지며 이마의 표현도 3줄 이상의 호선을 두 번 연달아 표현했고, 코는 삼각형, 입은 장타원형 혹은 원형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원형 가운데는 얼굴에서 방사선 선이 그려진 것이 있는데, 이는 단순한 원형과는 차이가 있다(그림 4-7~16).

동심원문이 2개 그려지며 이마 주름이 1~2개 그려진 것은 표주박형 얼굴 혹은 하트형 얼굴이 그려졌는데, 코는 원 두 개로 표현되었고, 입은 타원형 2개를 겹치거나 원형으로 그려졌다(그림4-1~6). 그 외 동심원으로 눈을 표현하고 하트형 얼굴이 있고(그림 4-21~23), 원 세 개로 표현된 것(그림 4-17~20)도 있다.


세레미체보의 얼굴모양 암각화 역시 눈이 동심원문인 것(그림 4-4~6, 10,13,15,16)과 장타원형인 것(그림 5-4,7,8)으로 구분된다. 동심원으로 그려진 얼굴형은 원형인 것과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것이 있다. 눈이 2~3중 동심원문으로 표현된 것은 이마에 주름이 3줄 표현된 것은 얼굴형은 원형 혹은 타원형에 가깝다. 코는 삼각형, 입은 타원형으로 표현된 것(그림 4-10), 코까지만 그려진 미완성형(그림 6-10,11)도 남아 있다. 또한 이와는 달리 눈, , 입은 유사하지만 얼굴에 채워진 문양이 세로방향으로 그려진 것도 있다(그림 4-13,15). 2중 동심원문이며, 얼굴형이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것 중에 1점은 머리위로 짧은 직선이 12줄 그려져 있다(그림 4-13, 15). 이는 사카치 알리안의 얼굴형 가운데 방사선이 있는 것(그림5-9,10)과는 방향과 길이 등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이 얼굴은 코가 2개의 원, 장타원형 입이 그려졌다.


이중에서 백성 쌍탑1(그림 6-10,11)와 유사한 것은 사카치알리안과 세레미체보 유적에서 확인된 3중 동심원 눈, 이마표현 등도 유사하다(그림 4-9~11,16).


사카치알리안은 오시포프카 문화 단계부터 그려졌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백성 쌍탑1기와 비교한다면 9000년 전 정도이다. 특히 오시포프카 문화 늦은 단계에 속하는 8820~9810B.P 야미흐타 유적의 토기가 노보페트로프카 문화와의 관련성이 제기된 바 있다(셰프코무드·후쿠다 외 2017). 이 시점에 아무르강 하류와 중류의 교류가 있었고, 눈강 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관점이다.


 그렇다면 사카치알리안의 암각화와 세레미체보 암각화에서 알 수 있는 점은 동심원문을 사람얼굴표현으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동심원문 및 그와 유사한 회오리 문양, 동심원을 바탕으로 한 얼굴모양 및 동심원문 암각화도 9000년 전 정도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점은 오클라드니코프가 타래문토기와 비교한 6000~5000년 전, 하트형 얼굴모양과 보즈네세노프카 문화의 토기와의 비교한 연대(1)보다 올라간다.


따라서 사카치알리안과 세레미체보 유적이 여러 시기에 걸쳐서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 중에 9000년 전께 동심원문을 바탕으로 한 얼굴모양과 여러 동심원문이 그려졌다.


*그림 4~6, 표1은 링크 참고하세요.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표1)

https://eastsearoad.tistory.com/275(그림 4,5)

https://eastsearoad.tistory.com/276(그림 6)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8. 19:3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백성 쌍탑 유적은 1, 2, 3기로 구분되며, 그 중 신석기시대는 1기와 2기이다. 1기에서는 회괭과 묘광, 회구 및 기둥구멍 등이 확인되었다. 1기의 주요한 유물은 융기문토기이다. 2기는 무덤 4기가 발굴되었다.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 (유적의 위치는 링크참고)


토기의 기형은 다양한데, 발형토기(그림 6-1,5,6,8), 잔발형토기, 고배형토기(그림 6-4) 등이 확인된다. 토기의 문양은 주로 융기문과 무문양이 주요하고, 구연단에 구순각목이 확인되며, 일부 토기에는 침선으로 그린 것도 있다.

토기의 문양은 구연부근에 융기띠가 횡방향으로 부착된 것이 주를 이룬다. 주로 여러 줄 부착되었거나 혹은 종방향과 함께 시문되었다. 융기띠에 각목이 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구연단에 각목된 토기도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무문양토기도 출토되는데, 저부의 바닥이 오목하게 들어간 것이다.문양토기(그림 6-5,6) 가운데는 점토를 접한 한 흔적이 단을 이루는 것이 남아 있는 토기도 있고, 단순한 무문양도 있다.

 

그림 6. 눈강 유역의 백성 쌍탑 1기 출토품과 아무르강 중류의 토기(1~15: 백성 쌍탑1, 16,17,18: 그로마투하 출토, 19: 노보페트로프카-3출토)


사진1. 쌍탑 유적의 얼굴모양토기

사진2. 노보페트로프카 유적(아무르강 중류)의 융기문토기


이외 침선기법으로 동심원 사람얼굴문양이 남아 있는 토기는 2(그림 6-10,11)있는데, 동심원문이 눈을 표현하고, 수염 밑 코구멍, 입이 있다. 융기띠를 부착한 토기도 침선얼굴문 토기와 유사한 형태가 있는데, , , 수염을 표현했다(그림 6-4). 얼굴문양토기는 내몽고와 통요 등지의 암각화와 비교되기도 했으나(吉林大學邊疆考古硏究中心·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13), 이 유적은 융기문토기가 새롭게 조사된 후투목알(後套木嘎) 유적의 2기와 같은 성격이고, 아무르강 중류의 노보페트로프카 문화와 같은 것으로 평가되었다(왕립신 2016).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아무르강 중류의 노보페트로프카문화와 오시포프카문화가 관련성이 있다는 연구(셰프코무드·얀쉬나 2012)로 보아서 백성 쌍탑 1기의 성격은 내몽골보다는 아무르강 중류 및 하류역과 관련성이 더 깊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8. 17:3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19세기 말에 처음 확인되었고, 19681970, 1978년도에 오클라드니코프가 조사했다. 암각화는 아무르강의 지류인 우수리강의 강가에 세레미체보 마을 보다 약간 하류에 위치한 절벽에 원래 살던 주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3개의 지점으로 나누어져 암각화가 그려져 있는데, 각 지점은 6, 20, 7개의 표현이 그려져 있다. 표현물은 0.3~1cm가량 깊이로 쪼기 기법으로 표현된 것이다. 몇 개는 음각한 것도 있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사진1. 우수리강의 세레미체보 유적(위치는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의 지도 참고)


세레미체보 유적의 1지점(오클라드니코프 1971)

세레미체보 유적의 2지점(오클라드니코프 1971)




세레미체보 유적의 3지점(오클라드니코프 1971)


대부분은 사람과 동물과 관련된 주제이다. 가장 많은 것은 얼굴만 표현된 것인데, 단독으로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고, 쌍을 이루는 것은 1개소(그림 4-5,6) 확인된다.

 

그림 4.  사카치알리안(1~3, 7~9,11,12,14,17~23)과 세레미체보 유적(4~6, 10, 13, 15, 16)의 동심원문눈 얼굴모양


타원형, 달갈형, 하트형, 상단은 타원형, 하단은 사각형이니 것, 원숭이 혹은 거북이 모양의 것도 있다. 눈은 둥글거나 끝이 뾰족한 째진 눈을 표현한 것(그림 5-4,7,8)이 있다


사진2. 세레미체보 유적의 째진 눈 얼굴모양마스크


그림 5. 사카치알리안과 세레미체보 유적의 째진 눈얼굴모양마스크(1~3, 5,6,9~13: 사카치알리안, 4,7,8-세레미체보 유적)


얼굴내부를 충진했는데, 이마의 주름, 눈 등은 사카치알리안과 유사하다. 일부 표현에서는 얼굴의 외곽선에 방사선의 모양으로 그려놓아서 을 형상화 하였지만(그림 4-4,5), 사카치알리안과 달리 머리 위쪽으로만 표현되었다. 목이 길고 발가락이 세 개 인 것은 백조 혹은 거위인데, 이는 사카치알리안과 다른 시기의 것이다.



오클라드니코프는 사카치 알리안과 마찬가지로 얼굴형 암각화 중 동심원문(그림 4-4~6, 10, 13, 15,16)을 기반으로 한 것은 6000~5000년 전으로 보았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8. 10:0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암각화가 그려진 바위는 바로 강가에 위치하며 화산암에 암각화가 새겨졌다(그림2). 이 유적이 발견된 것은 19세기 말에 발견되었다. 최초의 학술조사는 1950~60년대 오클라드니코프가 조사했고, 2000년대에 새로이 조사되었다. 6지점에서 103개의 돌에서 각 돌에 1~12개의 표현물이 확인되었다



  사진1. 사카치알리안을 조사하는 오클라드니코프

 

그림 2. 사카치알리안암각화의 위치변화도(라스킨 2007)(사카치알리안은 아무르강의 범람으로 인해서 보고될 당시와 현재의 암각화가 그려진 돌의 위치가 다르다. 화살표 방향은 보고당시와 2000년대 들어선 위치의 변화도이다)


암각화는 선사시대의 것은 대부분 쪼기 기법으로 표현되었는데, 외곽선을 돌리고 내부에 표현을 한 것도 확인된다. 홈의 깊이는 0.3~1cm가량이다. 전반적으로 사실적인 표현이 대부분 많고 기하학적인 표현은 드물다. 경우에 따라서 몇 개의 표현물이 그룹을 이루는 경우도 있는데, 그 중에는 얼굴과 새가 그러하다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 의 표 1


암각화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인물을 표현한 것인데, 그 중에서도 얼굴이다. 전신상(그림 9-1,2)3곳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나, 도면은 2개만 확인가능하다. 사람의 얼굴은 타원형, 달걀형 타원형, 하트형, 사다리꼴형, 삼각형이 있고 원숭이 혹은 거북이 등도 일부 확인된다. 얼굴은 다른 문양에 비해서 대부분 불룩한 돌을 선택해서 시문해서 윤곽을 드러나게 하였다. 그 외 짐승, , , (), 태양상징, 성혈과 동심원문양 등이 있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얼굴의 내부는 비교적 간단한 문양으로 충진되는데, 가장 기본적으로 눈을 동심원으로 표현한 후 얼굴을 그렸다. 유적 곳곳에서 동심원이 확인되며, 동심원문과 코, 입만 그려진 미완성품도 확인된다(그림 3-1~4). 즉 동심원문을 기반으로 얼굴모양 마스크를 그린 것이 많다. 그 외에 단독의 동심원문, 회오리 문양(그림3-5~7)도 확인된다


사진1. 사카치알리안 유적 전경도(바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음)


사진2. 동심원문을 기반으로 한 얼굴모양 마스크

 

사진3. 얼굴모양마스크2

 


사진4. 얼굴모양마스크3



그림 3. 동심원문과 회오리 문양(1~7: 사카치알리안, 8: 세레메체보 유적)


동물문양은 두 가지 표현법이 있다. 사슴의 내부는 동심원이나 나선으로 채워진다. 오클라드니코프는 이것은 동물의 내장을 그대로 표현한 것으로 보았다. 창자, 심장, 신장, 간 등이다. 이러한 표현법을 렌트겐 기법 혹은 해골기법이라고 한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여기서 고식의 동물문양은 기하학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그대로 표현되는데, 특히 사슴이 그러하다. 맹수의 동체부를 표현하는 방법과는 차이가 있다. 맹수는 등이 둥글게 굽은 것으로 표현되는데, 머리가 매우 크다. 다리선은 동체부에서 연장되는데, 가로 방향의 선이 두 부분을 구분한다 (오클라드니코프 1971). 한편, 맹수는 반구대암각화의 표현법과 유사하다는 의견이 있다(김재윤 2017b).

 

사카치알리안 연대는 인접한 곳의 발굴에서 출토된 유물과 암각화의 비교로 알려졌고, 여러 시기에 걸쳐서 제작된 것으로 보았다(1). 사카치알리안 유적의 12000~10000년 전 당시 후기구석기시대의 플라이스토세 유적에서는 새모양으로 추정된 석제품이 출토되었는데, 새그림이 가장 이른 시기로 생각되었다(1, 오클라드니코프 1971). 또한 6000~5000년 전 신석기시대 토기 가운데 콘돈포취타유적에서 타래문토기가 확인되며 이 토기의 문양과 유사한 방법으로 그려진 동심원문암각화의 얼굴모양마스크도 이때 그려진 것으로 보았다. 또한 하트모양의 얼굴문양은 보즈네세노프카 문화 토기와 비교해서 이 시기의 것으로 보았다(1).

최근 연구에서는 12000~10000년 전은 오시포프카문화에 해당한다고 정정했고, 얼굴문양은 신석기시대 발달단계(4000~3000년 전)로 보아서 오클라드니코프와 연대차이를 보인다(1).

신석기시대 이외의 중세시대 그림은 음각으로 그린 것으로 보았고, 전쟁에 참가한 말, 사냥하는

 장면 등이 그려진 것으로 대략 8세기 가량 그려진 것으로 보았고, 라스킨은 철제도구로 그어진 것으로 철기시대부터 중세시대(4~13세기)까지 내려갈 가능성도 상정했다(라스킨 2015)


* 표1은 위의 링크 참고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7. 21:0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아무르강 하류에 위치한 사카치알리안은 강변의 화산암에 그려졌다. 주제는 동심원문양 뿐만 아니라 새, 사슴, 호랑이, 전쟁에 참가한 말, 사냥하는 장면 등 아주 다양하다. 그 중 동심원문을 기반으로 한 얼굴형마스크 등 여러 모양의 얼굴주제는 연대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아무르강 하류의 나나이족 얼굴로 소개되면서 집중적으로 조명받았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그림 1 유적의 위치. 사카치알리안, 2. 세레미체보, 3. 쌍탑, 4. 지초리, 5. 영천보성리, 6. 포항 대련리, 7. 대구 진천동, 8. 대구 천내리, 9.고령 앙전동, 10. 고령 안화리, 11. 밀양 안인리, 12, 함안 도항리, 13. 동래 복천동(김재윤 2018)


사카치알리안의 연대는 주변에서 발굴된 유적출토 유물과 암각화 주제를 비교하면서 이루어졌다. 최초의 조사자인 오클라드니코프(1971)는 대략 네 시기정도에 걸쳐서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했는데, 최근에는 신석기시대 연대 조종으로 세 시기 정도에 걸친 것(라스킨 2015)으로 보기도 한다(1).

 



사카치알리안의 주제와 유사한 암각화가 우수리강에 위치한 세레미체보 유적에서도 확인되며, 사카치알리안과 동시기의 것으로 판단되었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두만강 유역에서는 동심원문만 집중된 유적이 지초리에서 확인되었는데(서국태 2004), 동심원 및 회오리문양, 뇌문 등은 과일군 청룡리유적, 염주군 반궁리 등지에는 뇌문과 타래문이 함께 출토되고, 서포항 유적에서는 타래문이 번개문 보다 이른 시기에 출토됨으로 지초리의 암각화는 신석기시대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중간 정도에 위치하면 기원전 5000년 전반기의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서국태 2010).

 

종합하면 동심원문 암각화는 유사한 문양주제이지만 러시아의 사카치 알리안, 세레미체보 유적, 지초리 등은 신석기시대,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본다. 또한 동심원문과 다른 문양이 복합된 양전동 암각화는 삼국시대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암각화 제작시기의 직접적인 증거는 발굴을 통한 유물에서 나온 문양과 암각화의 문양을 비교 한 방법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사카치알리안, 세레미체보 유적 등도 연대추정되었다(1, 오클르다니코프 1971). 반구대암각화가 신석기시대부터 제작되었다는 주장(하인수 2012)도 동삼동 유적에서 출토된 사슴문양토기 와 비교에 의한 것인데, 비슷한 추정법이다. 이러한 연구법은 암각화가 밀집된 알타이 및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많이 사용된다(블라지미르 D. 쿠바레프 2003)

 

필자는 사키치알리안의 동심원문 및 얼굴모양마스크가 이미 앞서서 연구한 오클라드니코프나 라스킨 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그려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일까? 그리고, 이렇게 생각하게 된 근거는 무엇일까?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7. 13:45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한반도 영남에 위치한 순수한 동심원문만 그려진 고령 안화리, 진천동 입석, 밀양 안인리, 함안 도항리 등지에서 확인되고 있다(그림 7). 뿐만 아니라 검파형 암각화와 함께 그려진 고령 양전도, 영천 보성리, 고령 안화리 등도 확인된다(그림 8). 동심원문 암각화는 대부분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는데 지석묘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울산반구대암각화박물관 2011,2012).

동심원문암각화가 대부분 지석묘관련 시설에서 확인된다 하더라도 이를 암각화의 제작시기로 단정할 수 없다. 밀양 안인리 4호는 묘역식지석묘로 암각화는 중앙상석이 아닌 가장 자리의 돌에서 확인되었다. 석검과 함께 그려져서 청동기시대로 추정되었지만(그림8-7) 두 그림이 겹쳐져서 그려진 것이 아니라 각각 그려져서 다른 시기 일 가능성도 있다.




그림 7. 1. 무산 지초리, 2. 함안 도항리, 3. 대구 진천동, 4. 복천동, 5.6대구 천내리, 7. 밀양 안인리(신안)4호(김재윤 2018에서)


지석묘와 관련된 동심원문 암각화는 축조될 당시에 이미 암각화가 그려져 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지석묘 시기를 암각화가 그려진 시기로 단정할 수 없다. 복천동(그림 7-4)에서도 이미 그려진 돌을 석곽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청동기시대로 추정된 것은 수영천변에서 청동기시대 유물이 채집되었기 때문인데, 만약 신석기시대 유물이 채집된다면 그 연대는 또 변동의 가능성이 있다.

동심원문 암각화 및 일명 검파형암각화가 그려진 고령 양전동 유적은 청동기시대 설과 삼국시대 설로 나눌 수 있다. 청동기시대는 양전동암각화가 보고된 당시에 유적 주변에서 무문토기와 마제석부 등이 발견됨으로 청동기시대~초기철기시대로 편년되었다(이은창 1971). 영일 인비리 유적의 마제석검이 그려진 손잡이 부분을 양전동형암각화의 조형으로 보는 의견은 청동기시대 설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송화섭 1994). 그 이후에도 경주 안심리에서 확인된 유사한 주제로 그려진 암각화가 지석묘의 상석에서 확인됨으로 청동기시대 설이 더 확고해졌다(이상길 1996). 석장동 암각화가 발견되면서 마제석검과 양전동형암각화의 사다리꼴 모티브의 중간모습, 사다리꼴 모티브 등이 확인되면서 인비리 보다는 석장동 유적이 가장 이른 양식으로도 꼽히기도 한다(장명수 1995·2001). 분류기준을 달리한 연구자는 인비리가 석장동 보다는 이르다고 보았지만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다는 설은 변함이 없다(이하우 2011). 


그림 8. 1~4: 고령 양전동, 5. 고령 안화리, 6. 영천 보성리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5a1161a


반면에 양전동형암각화가 삼국시대에 해당될 것이라는 의견을 낸 것은 三上次男(1977)이다. 일본 구주 고분문양와 비슷한 점이 그 근거이다. 고령지산동고분30호분의 개석에서 양전동형암각화의 사다리꼴 모티브 일부가 확인되면서 이 유적의 연대를 양전동형암각화의 하한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전호태 2013, 강봉원 2017). 이를 확대해서 양전동형암각화 가운데 양전동암각화를 영남의 다른 유적과 구분해서 고령이라는 특성과 연결시켜 가야 건국신화와 연결시키고 국가제의가 이루어진 장소로 보는 관점(전호태 2017)은 그간 양전동형암각화가 청동기시대의 것이라는데 대부분의 연구자와는 차이가 있다. 강봉원은 전호태의 의견과는 차이가 있는데 5세기까지 내려올 수 있는 유적은 지산동고분군30호분의 개석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다른 유적들은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강봉원 2017).


 만약 양전동암각화가 삼국시대의 것이라면, 일명 검파형암각화가 그려진 암각화 유적 뿐만 아니라 동심원문이 같이 그려진 유적도 여기에 포함 될 수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동심원문 암각화는 이곳에서만 확인될까? 그리고 언제 그려졌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풀기위해서 다른 지역의 암각화와 비교고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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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1. 17:08 책소개

제가 처음으로 번역한 책이 출판되었음을 자랑한 적?이 있습니다.


https://eastsearoad.tistory.com/82





이 책이 올해 2018년 세종도서 학술부문우수도서(구 문화관광부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내용도 포스팅해야 하는데,,,,워낙 전문적인 글이어서,, 어떻게 풀어야 할지 생각하다가...

제대로 시작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냥 옮기면, 하나도 모르실 듯해서 그와 관련된 배경의 이야기를 많이 해야 논문이 이해가 될 듯해서요.


그래도 곧 방학이니 힘내서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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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서포항 청동기시대로 보고된 것은 6기와 7기이지만 5기는 유물의 특성상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다. 5~6기를 인접한 연해주 청동기문화와 비교한 결과 크게 4단계로 나눠진다. 시니가이 문화 서부 1유형의 성격으로 보이는 서포항 5기는 서포항 청동기1단계, 시니가이 문화의 동부 1유형과 서부2유형이 공존하는 서포항 청동기 2단계, 동부2유형과 서부 2유형이 공존하는 서포항 청동기 3단계, 리도프카 문화단계의 성격인 서포항 청동기 4단계가 확인되었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서포항 청동기시대 연대는 3300년 전부터 리도프카 문화가 존재한 시기 2300년 전까지이다(3).


http://eastsearoad.tistory.com/268


 그렇다면 서포항 유적은 신석기시대는 5000년 전부터 3800년 전(김재윤 2009b), 청동기시대는 3300년 전~2300년 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 연해주에서 청동기시대 가장 이른 마르가리토프카 문화인데, 이와 관련성이 보이는 동북한 유적은 범의구석1호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적색마연대부토기와 보이스만-2유적의 최상층에서 출토되는 적색마연토기이다. 이 기형은 마르가리토프카 문화의 토기로 이어지며 이 문화 보다 이른 3800~3600년에 해당된다.

서포항 유적에서 빠지는 기간은 있지만 동북한 청동기시대의 시작은 범의구석 1호주거지가 존재하기 때문에 두만강 유역 및 연해주 해안가에서는 단절 기간 없이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자연스럽게 변화한다.

 또한 서포항 청동기 3단계에 해당하는 6-27-1가 존재한 시간은 시니가이 문화의 서부 2유형과 동부 2유형이 공존하는 특징이다. 그 존속시간은 시니가이 문화 동부1유형과 서부2유형이 공존하는 시간보다 늦고 리도프카 문화가 시작되기 전으로 자리매김 되었으나, 하한의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단순히 리도프카문화 보다 이른 시기에 끝났음으로 추정되었다. 이는 시니가이 문화의 연대가 세밀하지 못한데, 발굴된 유적이 적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본고에서 거론되지 못한 범의구석, 오동, 송평등 자료로 좀 더 세분해 하면 서포항 3단계 뿐 만 아니라 이 보다 앞 선 좀 더 확실하게 설명될 수 있다. 두만강 내륙에 위치한 흥성유적과의 관련성도 있음으로 종합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필자는 연해주의 시니가이문화의 연대가 더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연해주 및 북한의 새로운 자료가 앞으로 증가한다면 이 부분은 충분히 보완될 수 있다고 본다.


*본고는 올해청동기학보에 출간되었습니다.


[청동기학보23호] 01 김재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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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서포항 청동기시대는 크게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서포항 청동기 1단계는 서포항 5기의 주거지로, 발형의 돌대문토기 및 이중구연토기가 출토되는 16호와 파수가 한쪽에 부착된 토기가 출토되는 5호가 해당된다. 이와 유사한 유물은 시니가이 서1유형으로 출토된다. 파수가 한쪽으로 만 달린 토기 등이 유적에서 확인되며, 아직 횡주어골문 등 신석기시대 문양이 남아 있다.

서포항 청동기 2단계는 시니가이 문화의 동부1유형과 서부 2유형이 공존하는 단계이다. 6-a로 구분된 토기와 석기 및 5호 주거지인데, 강원도에서 확인되는 현상이 이미 두만강 유역에서도 확인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또한 6기에서 2호 주거지는 앞서 서포항 청동기 2단계와는 다른 유물이 출토된다. 2호주거지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서 저면이 편평하다가 기벽이 올라가는 부분이 둥글게 처리된 제작 방법의 토기(그림6-32)와 원통형에 가까운 굽이 달린 발형토기(그림 6-31)6-2로 구분되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토기가 7a(그림 6-33, 38)로 구분된 바 있는데, 양 자는 같은 시기로 볼 수 있다(3).

따라서 서포항 청동기 2단계를 잇는 서포항 3단계는 6기의 2호 주거지를 참고할 때 시니가이 문화의 동부2유형과 서부 2유형이 공존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7-1로 구분된 토기도 같은 성격이다(3).


3. 서포항 유적의 단계



서포항 청동기 4단계는 리도프카 문화의 성격을 띤다. 7기에서 4(그림7-8,10,12,14,15), 10(그림7-9,11,16), 7b(그림 7-17)로 분류된 유물은 모두 리도프카 문화에 속하는 것이다. 6기에서도 6b로 구분된 석촉(그림 7-5~7), 옥제품(그림 7-4) 등은 리도프카 문화와 관련이 있다. 토우는 6(그림 7-13)7(그림7-17)로 층위를 달리해서 출토되었으나 특별하게 리도프카 문화의 내부에서 시간상 뚜렷하게 구분되지 못한다.

7기에서 류정동 유형으로 볼 수 있는 고배는 류정동 유형에 속하지만 현실적으로 서포항 7기에서 유물 한 점 만으로 류정동 유형의 존재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리도프카 문화와 비슷한 시기정도로 살피고자 한다(3).

전고(김재윤 2018)에서 시니가이 서부 1유형은 레티호프카 유적을 기준으로 3400~3200년 년 사이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서포항 청동기 1기단계도 이를 참고할 수 있다. 다만, 서포항 유적은 연해주 내륙과 거리차이가 있고, 카라숙문화의 동진을 생각할 때 연해주 내륙보다 약간 늦을 가능성이 있어서 대략 3300년 전부터 시작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자 한다.

서포항 2단계는 시니가이 문화의 동부1유형과 서부 2유형이 존재하는 강원도 철정리, 아우라지, 천동리, 연하리, 현암리의 연대를 참고로 할 수 있다. 이들 유적의 절대연대는 대체로 3100~2900년 사이에 해당된다(김권중 2012). 그렇다면 서포항 청동기는 2단계는 1단계가 끝나는 3200 년 전부터 강원도에서 서부2유형과 동부1유형이 공존되는 시간대인 3100~2900년 전 보다 늦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2단계는 3200~2900년 전 사이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3,4).

3단계는 시니가이 문화 서부 2유형과 동부 2유형이 공존하는 단계이다. 이와 같은 유적은 연해주 내륙에서는 아직 확인된 바가 없고, 두만강 유역에서민 확인된다. 4단계의 리도프카 문화가 2500년 전(3)부터 시작됨으로 3단계는 2단계가 끝나는 2900년 전부터 2500년 전 사이에 위치할 수 있다(3).

그런데 필자는 두만강 유역 및 연해주 신석기시대 후기를 고찰하면서 두만강의 4유형을 전환기로 보고 범의구석1(그림 8-3), 서포항 5(그림 6-1~3, 6,7), 보이스만-2유적의 자이사노프카 문화층의 무문 적색마연토기(그림 8-2)를 포함한바 있다. 이 유형의 연대는 3800~3500년 사이로 추정했다(김재윤 2009b).

이중에서 범의구석 1(그림 8-3)와 보이스만 자이사노프카 문화층의 유물(그림 8-2)은 무문의 적색마연토기로 전자는 대각이 있고, 후자는 편평하다. 그러나 서포항 5기에서는 발형의 돌대각목문토기(그림 6-6)와 파수가 달린 토기(그림 6-3)가 출토되는 시니가이문화의 서부 1유형의 특징이 확연하다. 양자를 같은 유형으로 파악한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레티호프카 유적에 연동된 것이었다.

그러나 레티호프카 유적을 시니가이 문화로 재편성함으로써 서포항 5기도 범의구석 1호와는 구분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전고에서 청동기시대 전환기로 본 두만강 4유형은 범의구석 1(그림 8-3)와 보이스만 문화의 자이사노프카 문화층 유물(그림 8-2)을 포함하는 단계만 해당된다. 이들 기형은 마르가리토프카 문화의 기형으로 이어지고(그림 8-6,7), 이 문화도 3600년 전에 시작됨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4). 범의구석 출토의 적색마연대부토기와 보이스만 2유적의 적색마연토기는 마르가리토프카 문화의 시기보다 약간 앞서서 시작했으며 3800~3600년 전 정도에 해당된다.



4. 서포항 유적의 편년




*그림 6, 7은 앞의 포스팅 참고

http://eastsearoad.tistory.com/267


그림 8. 두만강 신석기뇌문토기~청동기시대 적색마연토기로의 변화(김재윤 2011재인용)(1,자이사노프카 1;2, 보이스만- 2 자이사노프카 늦은 유형; 4·5, 아누치노-14; 6·7, 프레오브라줴니예-1, (3번 외 필자실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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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