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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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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필자가 진짜 재밌게 본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나 빼고도 다 재밌게 보셨겠지만.

그런데 여주인공이 처음배웠다는 영어단어

Gun, Glory and sad endding이었다. 오늘 제목은 그걸 살짝 바꾼 것이다

얼굴 가리고 총들고 지붕 위에서 적을 정확하게 저격하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깊었다. 그리고 명예...

주인공이 들고 있던 총의 옛 모습이 검이었을 테니깐. 우리가 살고 있는 배경이 그 때 그 슬픈시절이 아니니, 새드엔딩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다. 

오늘 약간 풀어놓을 것은 인류사 최초의 무기이다.


 

사실 요즘 필자는 환단고기 때문에 홍산문화를 난도질하는 중이다. 첫걸음은 토기인데,,왜냐하면 고고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편년문제 때문이다. 편년은 그냥 시간 혹은 기간 쪼개기로 생각하면 된다. 이 부분은 논문은 두어편 있어야 할 듯한데,, 한편은 곧 공개될테고, 다른 한편은 시베리아 자료가 약간 부족해서 조금 시간이 걸릴 듯하다..좀 많이 안타깝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는 유물이 아래의 사진이다.


 사진1. 홍산문화에서 출토된 조합식석인검(적봉박물관에서 필자촬영)


조합식석인검, 석인창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석인골병도(石刃骨柄刀)라고 한다.

주로 나무나 뼈를 갈고 홈을 파서 석인(石刃)을 끼워넣은 것이다.

석인이라는 용어는 어려워 보이나, 영어로 하면 blade인데, blade는 그냥 쓸 수 없어서 어딘가에 끼워서 쓰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늘 설명한다. 석기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변화된 것은 컴퓨터가 방만한 크기에서 손바닥만한 크기로 변한 것과 같은 거라고 설명하면, 모두 잘 이해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석기를 제작하는 방법과 만들기 적합한 재료, 그리고 이 도구를 쓸 수 있는 환경은 후기구석기시대 부터라고..(이 부분은 논점에서 벗어남으로 다음에 설명한다.)


이 유물이 중국요서지역에서 보이는 것은 홍산문화부터이다.

그런데 이 유물은 시베리아의 것이다.

시베리아에서는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순동시대인 글라스코보문화까지, 청동검이 등장하기 직전까지 지속된다. 또 이 유물이 주로 분포하는 바이칼 유역의 아래 동네인 몽골, 중국신강, 카자흐스탄 까지 5000년 경에 출토된다. 아마도 알타이 산맥과 붙어 있는 천산산맥을 따라서 흘러들어가는 것 같다.




그림 2. 후기구석기시대(1~4)와 순동시대(5~7)의 조합식검과 창




그림 3. 시베리아 신석기시대 조합식 석인검


필자는 이 유물이 언제 어디서 없어지고, 생겼는지가 매우 궁금하다.

동쪽의 끝은 중국요서지역 홍산문화(6000~4500년 전) 및 그 이후의 소하연문화(4500~3500년 전)이다. 제대로 알려면 홍산문화의 언제적부터 이 유물이 나오는지도 살펴야 하고, 어떤 상황(유적)에서 출토되는지도 조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유물이 들어가는 서쪽과 남쪽도 궁금한데,,,..확실한건 시베리아에서 후기구석기시대부터 나온다는 점이다. 시베리아에서는 청동검 등장까지 사용된다. 그리고 정확하게 청동검과 이 유물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궁금하다.

 

인류사 최초의 무기라고 생각된다. 혹은 무기형태...무기에 사회적역할을 부여하면 후기구석기시대무기는 약간 어불성설이지만, 그런데 무기의 모습을 띤 것은 맞다.

 그래서 필자는 이미 구석기시대에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의 첫 모습은 다 있었다고 생각한다

 

중국요서지역에서 확인되는 이 유물의 기원 찾기 때문에 시베리아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영의 Great game 이전에 시베리아에 포함되었던 현재의 카자흐스탄에도 관심이 가게 된 것이다.(이는 카자흐스탄이라는 나라가 만들어진 배경과 관련 있는데,,,아마 다른분들이 많이 포스팅했을 가능성이 많다)


유라시아를 내가 통째로 다 할 수는 없으니, 지역도 한정시키고, 주제도 몇 개로 줄일려고 한다. 시베리아는 중앙유라시아에 포함된다. 서울대 김호동교수는 중앙유라시아의 가장 북쪽지역으로 보고 있다(김호동, 아틀라스 중앙 유라시아). 이 유물 때문에 시베리아 후기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를 포스팅하고,,,,원고도 적어야 한다.


필자의 수업자료에서..(중앙유라시아로 규정된 부분)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바이칼 유역에는 신석기시대 전 시기를 통틀어 토기가 많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토기는 확인된다.

 

바닥이 뾰족하거나 약간 둥그스럼한 토기가 출토된다.

토기 문양은 망상문(그물문양이라는)이라고 불린다.

망상문이라 불리는 문양이 찍힌 토기는 바이칼 유역의 신석기시대에 전 시기에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몽골, 카자흐스탄 등지에도 있다.

 

키토이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인 키토이 유적에서 출토된 사진이다.

모스크바 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그림1). 

  


그림 1. 키토이 유적 출토 토기


그림 2는 샤만카 2 라고 하는 바이칼 유역에 있는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다.


그림 2. 샤먄카 2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62호 출토, 

В.И. Базалийский 2012, ПОГРЕБАЛЬНЫЕ КОМПЛЕКСЫ ЭПОХИ ПОЗДНЕГО МЕЗОЛИТА – НЕОЛИТА БАЙКАЛЬСКОЙ СИБИРИ: ТРАДИЦИИ ПОГРЕБЕНИЙ, АБСОЛЮТНЫЙ ВОЗРАСТ

인용)


 역시 망상문이다. 그러나 그물문양을 찍었다기 보다는 나무판에 줄을 감아서 만든 도구로 두드렸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이런 문양을 타날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이칼 유역의 망상문은 그냥 그렇게 중앙아시아에도 알려져 있음으로 그 용어를 씌는 것이 혼돈을 막을 수 있다.

 

바이칼 유역에는 토기가 많지 않다. 동아시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토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역(바이칼 유역 이남, 몽골, 중국신강, 카자흐스탄)과 중간 정도의 특징일 수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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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코보 문화 1  (0) 2019.05.30
posted by 김재윤23

 

오늘 기사를 잠시 보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한국의 호미와 관련된 내용인데, 아마존에서 대박났다는 것이다.

관련해서 보자마자 완전 어이없었다.(기사의 수준이나 기사를 낸 신문사나....)


https://news.v.daum.net/v/20190217134610706

 

왜냐하면......

호미는 우리나라서는 밭을 갈지만,,,,,,,

고고학 유적 발굴할 때 가장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에서,,,중국은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발굴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한다.

발굴도 여러 과정이 있지만 한 층 한 층 내려가며 벗길 때 주로 사용된다.

 

호미는 어떻게 사용하나?

그렇다. 호미는 주로 쪼그려 앉아서 사용한다.

?

자루가 짧기 때문이다. 자루에 붙은 앞부분이 작아서 밭고랑과 같이 좁은 사이를 팔 때 요긴하게 쓰이지만, 자루를 길게 만들려면 앞이 커져야 하는데 그럼 호미와는 완전히 다른 도구다.

 

그런데 호미는 나에게 러시아발굴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유학당시에 한러 공동발굴에 종종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호미를 대거 들고 가서 발굴에 참여했다.

러시아사람들은 놀랬다


너무 편리하고,,,,빨리 일이 되고, 문화층도 반듯하게 닦여서...

그냥 그네들이 보기에는 발굴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에는 호미라는 존재가 없었고, 발굴할 때 사용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종종 중국인들이 밭에서 사용하는 건 봤다고 한다.


없을 까?

그들은 쪼그려 앉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서양인들 대부분이 그렇다.

왜냐하면 호미는 다른 도구에 비해서 자루가 짧기 때문에 조그려 앉아서만 사용할 수 있다.

쪼그려 앉는 것이 불편한 러시아사람들이 이용하기 불편하다.(물론 쪼그려 앉는 것이 되는 사람도 있다. 서양사람들도 사람마다 다르지만 대부분 매우 힘들어했다. )


러시아에는 중국산 호미가 팔지만 몇 번 쓰면 분리가 잘되어서

매번 한국에서 호미를 들고 오기를 희망했다.ㅋㅋ

 나이드신 러시아학자들은 사용하기 힘들어했지만 주로 어린학생들에게 쥐어주며 문화층을 닦도록 했다. 하지만 어린 학생들도 대부분 일어섰다 앉았다를 반복했다. 무릎이 아프다는 것이다.


다시 기사로 돌아가서,,, 아마존에서 대박났다고 하는 기사를 믿을 수가 없다.

아마존에서 호미가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서양인들의 신체구조상 쪼그려 앉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호미와 같은 땅을 가는 도구는 사용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싸게 판 것=구매양 으로 증명할 수 없다.(이것을 지적한 기사의 댓글도 있었다)


난 이 글을 쓰는 이유가 영주대장간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아직도 대장간이 운영된다는 사실에 놀랐고 좀 많이 팔렸으면 좋겠고 그리고 질좋은 국산호미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국산 호미는 국내에서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민족적인 자긍심을 아마존에서 찾으려 한 것 같은데....

한계이겠지만..

 

*카테고리 만들기도 싫어서 그냥 비판많이 한 카테고리에 걸어둡니다.


그리고 환단고기 문제도 계속포스팅할 예정입니다...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요즘이 아마도 입시철? 준비기간이다보니 고고학 전공 관련학과 문의가 많다.


그래서 지난번 포스팅에서는 구체적으로 적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전국에 고고학 관련학과 혹은 사학과내에서 고고학 전공이 있는 교수가 있는 곳을 직접 일일이 적어두겠다.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은 이제 아니실 듯.....)


https://eastsearoad.tistory.com/138?category=725433


이미 말씀드린대로 대부분 거점 국립대학교이며, 사립대학교에도 있다.

단 현재시점에서 몇 몇 대학교 사학과에서 고고학전공 교수가 1명이며, 그 분의 정년이 1~2년 안에 끝 인 경우와 1명의 결원이 생긴 몇몇 곳은 생략했다. 만약 새로운 교원이 생기면 고고학 관련 강의가 생길테니 다시 공지하겠다. 또한 고고학과 고대사를 드나드는 교수님이 계신 학과도 생략했다. 그리고 또 잘 찾아보면 고고학전공교수가 없더라도 강의는 개설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이 경우도 제외했다.(대부분 이 경우는 울며겨자먹기로 강의가 개설되는 경우여서 자라는 꿈나무에게는 .....)

 

<부산경남권>

경북대학교 인류학과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계명대학교 사학과

동국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동아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동양대학교 문화재발굴보존학과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인제대학교 인문문화융합학부

 

<서울경기강원권>

강릉원주대학교 사학과

강원대학교 사학과

경희대학교 사학과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연세대학교 사학과

용인대학교 문화재학과

숭실대학교 사학과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호서호남권>

고려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공주대학교 사학과

목포대학교 고고학과

전남대학교 인류학과

전북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조선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충남대학교 고고학과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융합고고학과

 

*위의 순서는 권역으로 묶은 후 지역, 학교 모두 가나다순이다.

 

단순히 사료를 공부하는 역사학과 혹은 사학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적은 수의 교원이다.

그래서 각 학과의 교과과정(교과목)을 살펴보면 자신이 받을 수 있는 고고학 관련 수업의 개수를 대략 알 수 있다.(물론 여러 변동사항도 있을 수 있다.)


또한 고고학 전공 교수가 적을수록 고고학 전공관련 수업이 적을 수 밖에 없다 고고학 전공 교수도 자신의 전공시대가 있기 때문에 그것에 집중된 수업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고고학전공교수가 많은 학과로 가는 것이 여러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그 기회로 인해서 고고학자로서 꿈을 키우는데 유리하다.



매화꽃 피는 것을 보니 이제 곧 새내기들로 교정이 꽉 찰 듯.......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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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연해주 고고학에 대해서 글을 여러번 올렸다.

철기시대에 대한 마무리가 올해 끝나면 마저올리겠다.

몇 개의 문화에 대해서 정리할 것이 있는데,,,,이번 방학에는 손이 안가지만. 그래도 올해 마무리하고,,,,연해주고고학개론서를 끝내고 싶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 연해주를 벗어난 지역을 강의하고 있다.

유라시아 중에서 시베리아중심이다.

생각해 보면 연해주연구한 것도 시베리아와 한국의 연결고리라고 어렴풋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년에 기회가 생겨서 시베리아 남쪽에 있는 지역도 연구할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동아시아를 벗어나니, 새로운 시각도 생기고, 또 동아시아를 좀 더 잘 알게 되었다.

 

이 지역은 무척 재밌는 지역이다. 할 수 있는 것도 무궁무진한데...

결국 몇 개의 주제를 필자가 선택하겠지만,, 머릿속에 뱅뱅 돌고 있는 무수한 생각을 어떻게 정리할지 나도 내가 궁금하다.

 

신석기시대...지금까지 해 온 시대구분으로는 두 번째 시대이다.

그런데,,,,지금까지 해온 세계적인 연구자들의 연구가 점점 희미해진다.

흔히들 알던 신석기시대 개념과는 맞지 않는 것이 여기서는 너무 확연하게 들어난다.

작년에 발표한 내용도 그런 주제였다.

 

결국, 인간은 아마 구석기시대에 만들 수 있는 건 이미 다 만들었던 것 같다.

신석기시대 라고 생각했던 것, 토기, 마제석기, 무기 등.

올해부터는 유라시아고고학에 대한 연구를 해야 할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강의를 하다가 생긴 궁금증 혹은 의심을 풀기 위한 연구이다.

그래서 유라시아고고학 중에 일부 지역인 시베리아에 대한 강의를 포스팅할 계획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답은 영남이 환동해문화권의 교류지역임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이미 필자가 연구한 바를 토대로 환동해문화권의 범위와 그 교류지역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선사시대 환동해문화권의 교류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중심으로 연해주와 우리나라 강원도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다(2,3). 


표2. 환동해문화권의 동심원문암각화와 극동전신상토우(김재윤 2018)



3. 시간에 따른 환동해문화권의 범위와 교류권(김재윤 2018)



연해주와 동해안의 교류는 신석기시대 루드나야 문화의 세르게예프카 유형과 오산리 유적의 A,B지구 및 오산리 C지구의 III~V층에서 확인되는 오산리식토기와 융기문토기를 근거로 논의 되었고, 그 시점은 6000~5800년 전이다[각주:1](김재윤 2015, 2017). 이후부터 강원도에는 첨저토기가 출토되는 5100년 전[각주:2] 동안은 동해안에 유적이 확인된 적이 없다. 만약 동해안에서 유적이 확인된다면, 연해주와의 문화권은연대가 좀 더 길어질 수 있다.

  즉 5800~5100년 전 환동해문화권의 범위는 불투명하며, 5100년 전께는 연해주와 강원도의 생업권은 끊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점은 자이사노프카문화가 시작되는 시점과도 비슷하다(3, 김재윤 2017a).


   다시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흥성문화(김재윤 2004, 강인욱 2017) 및 시니가이문화가 강원도 영서지역을 통해서 진주 남강의 평거동 유적까지 내려온 흔적이 청동유물, 토기, 석기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었는데, 시니가이문화가 내려온 연대는 3100~2900년 전께이다(김재윤 2018a).

  그런데 연해주와 강원도의 신석기시대 문화권이 형성되기 이전에 아무르강 하류의 문화가 동해안까지 확인된 정황도 있다. 오산리C지구의 신석기시대 최하층인 VI층 및 문암리, 망상동 유적에서 확인되는 적색마연토기가 아무르강 하류의 말리셰보문화에서 전해졌고 관련이 있는 연대는 6500~6000년 전을 확인한 바 있다. 오산리C지구의 VI층은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으로, 토기 제작이 없었던 동해안에서 갑자기 적색마연토기가 확인되는 것은 이미 토기문화가 있던 곳에서 전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해서 아무르강 하류의 말리셰보문화가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김재윤 2015, 2017).

  그런데 토기 뿐 만 아니라 아무르강 하류에서 출토되는 말리셰보 문화 및 보즈네세노프카 문화의 극동전신상토우를 근거로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아무르강 하류도 환동해문화권에 속할 가능성을 했는데 환동해문화권으로 생각했다(김재윤 2008).

 하지만 앞서 본고에서 고찰한 아무르강 하류의 동심원문암각화로 보아서 연해주와 아무르강 하류와의 문화권은 9000년 전 까지도 올라갈 수 있다. 이 때부터 6000년 전까지는 아무르강 하류가 환동해문화권에 포함될 수 있으며, 북부지역일 수 있다.

  또한 9000년 전께는 쌍탑1기와 노보페트로프카 문화가 유사하기 때문에 아무르강 중류 및 눈강 유역도 환동해문화권의 북부지역인 아무르강 하류와 관련성이 있다(3). 그러나 아무르강 중류 및 눈강 유역은 환동해문화권에 속한다기 보다는 환동해문화권의 북부와 교류한 간접적인 영향권으로 볼 수 있다.

  6000~5800년 전 환동해문화권은 앞서 보았듯이 연해주와 강원도 오산리 부근이다. 그러나 오산리 유적 이남인 태백산맥이 끝나는 죽변유적의 토기는 오산리 및 한반도 남부지역과의 관련성이 더 크다[각주:3].

 

 따라서 영남 동심원문암각화의 유적은 남해안 신석기문화가 자리잡은 가운데(6910B.P. 이후, 3) 환동해문화권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연해주 및 아무르강과 관련 있는 6000~5800년 전이다. 이 지역은 환동해문화권의 간접영향권으로 교류했을 가능성이 있다.

 환동해문화권의 신석기시대는 9000~6000년 전에 아무르강 하류가 환동해문화권의 가장 북부지역에 속하며, 그 이후 6000~5800년 전 연해주와 동해안만이 문화권일 가능성이 있다(3). 5800년 전 이후로 동해안에서 유적이 확인된다면 이 시점은 더 지속적일 가능성이 있다.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환동해문화권은 두만강 유역의 흥성문화 및 연해주 시니가이문화가 연해주와 강원도가 직접적인 관련성을 보이는데, 강원도 영서지역을 통해서 소백산맥이동의 진주 남강 유역에서 확인된다. 현재로서 확실한 연대는 시니가이문화의 이동성이 보이는 3100~2900년 전이다. 환동해문화권은 신석기시대와는 다른 경로인 강원도 영서지역으로 소백산맥 동쪽의 영남 남강 유역까지 환동해문화권과의 교류한 흔적이 남아 있다. 토기, 석기, 청동기 등 구체적인 양상이 확인되어서 신석기시대보다는 더 뚜렷한 관련성을 보인다. 하지만 진주 남강을 환동해문화권의 남부지역으로 결정하기에는 좀 더 확정적인 증거가 답보되어야 할 것이며, 현 상황에서는 간접적인 영향권으로 일단 두고자 한다[각주:4].

 따라서 3100~2900년 전 청동기시대에는 환동해문화권으로 한반도와 강원도 영서지역이 포함될 수 있다(3).

 

 신석기시대 환동해문화권의 형성배경은 태백산맥 및 시호테알린산맥과 태평양을 매개로 한 생업권이 문화권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필자가 생각하는 아무르강 하류 및 연해주와 강원도의 관련성은 생업권을 의미하며, 고고학적으로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이다(김재윤 2017). 전파론적인 해석과는 차이가 있다. 신석기시대 여러 기간에 걸쳐서 아무르강 하류 오시포프카문화 및 말리셰보문화의 모습이나 연해주의 세르게예프카 문화양상 이 동해안에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환경에 따른 생업권 때문이며, 동심원문 암각화가 태백산맥에서 분기된 소백산맥이동에서 주로 확인되는 것은 환동해문화권과의 교류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이 산맥과 바다를 매개로 한 생업권임을 알 수 있는 것은 5000km [각주:5]이상 떨어진 곳 추코트카의 페그티멜 암각화에서 신석기시대 그려진 사슴문양과 청동기시대에 그려진 고래그림이 반구대암각화와 같은 방법으로 그려지고, 사카치알리안의 호랑이 문양은 반구대암각화와 비슷하게 그려졌다는 것은 같은 생업권을 의미하며, 반구대암각화도 환동해문화권의 영향이 일정부분 있다(김재윤 2017b, 2-12,18, 19,22).

  

https://eastsearoad.tistory.com/272?category=772722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category=772722

https://eastsearoad.tistory.com/274?category=772722

https://eastsearoad.tistory.com/275?category=772722

https://eastsearoad.tistory.com/276

https://eastsearoad.tistory.com/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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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2018년 12월에 있었던 제 49회 한국상고사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1. 이 연대는 양 지역의 문화가 시작되는 시점이 아닌 서로 관련된 시점이다. [본문으로]
  2. 중동부지역 신석기문화는 오산리식토기 출토된 오산리C지구 3,4,5호 주거지(5750±15B.P.)(소상영 2016) 이후부터 첨저토기가 확인될 때까지 공백이 있다. 문암리의 중기유물층(5120±36B.P.)(소상영 2016의 표 13) [본문으로]
  3. 죽변 유적에서 확인되는 토기는 연해주 보다는 오산리와의 비교우위를 점한다(임상택 2012). [본문으로]
  4. 이는 청동기시대 형성배경은 신석기시대와는 다른 생업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별고로 고찰코자 한다. [본문으로]
  5. 이 경로는 야쿠티아지역을 통해서 아무르강 중류, 하류 및 동해안을 따라서 내려온 경로를 계산한 것이다. 만약 해안선만을 따라서 추정하면 10,500km가량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김재윤23

한반도 남부의 동심원문 암각화는 대부분 소백산맥이동의 영남지역에 분포하고 있다(그림1). 동심원문 및 동심원문과 유사하게 원을 여러 겹처서 시문한 암각화가 있고, 변형 사다리꼴(검파형) 혹은 석검이 그려진 암각화와 함께 시문된 것이 있다(그림 7,8). 그런데 고령의 인화리 암각화에는 동심원문 위에 검파형암각화가 그려져서 두 문양이 시기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그림 8-6). 또한 고령 양전동 암각화에서는 SW2면에서는 검파형 문양에서 뻗어나온 방사선의 위쪽에 동심원문이 그려졌는데(그림8-1), 동심원문이 먼저 그려진 것이다. 즉 동심원문과 검파형암각화는 그려진 시간차가 있을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한반도 동심원문 암각화는 무산 지초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지석묘와 관련되어 있어 청동기시대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환동해문화권과 비교하면 연대는 다르다. 문제제기한 바와 같이 유적의 성격에 따른 연대추정은 상황에 따라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발굴된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 비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수 있다.


 또한 사카치알리안에서 얼굴모양 마스크 이외에 전신상이 출토된 예가 있다(그림9-1,2). 머리는 원형이고, 몸통은 삼각형으로 표현되고 두팔이 표현되었다. 유사한 예가 포항 대련리에서도 확인되었는데(그림 9-3,4), 사카치알리안 유적의 동심원문 암각화와 얼굴모양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같은 시점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세레미체보 유적(그림 3-8)에서 동심원문과 약간 다른 회오리문양이 확인되는데 양전동(그림 8-4)에서도 확인된다. 즉 동심원문, 전신상암각화, 회오리 문양 등은 소백산맥 이동의 영남에서 확인되며 환동해문화권이 관련성이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

그림 9. 전신상인면문(1,2: 사카치알리안, 3,4: 포항 대련리)




 백성 쌍탑 1기와 사카치알리안, 세레미체보 유적 등의 예로 보아서 동심원문양은 이미 신석기시대 9000년 전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고, 두만강 유역도 세레미체보 유적이 위치한 두만강 유역과 멀지 않다. 그러나 두만강 유역에는 9000년 전 까지 올라가는 유적이 확인된 바 없고, 한반도 남부의 소백산맥 이동의 남부지역 신석기시대 유적도 9000년 전 까지 올라가는 유적이 현재까지는 없다(2,3). 또한 연해주 자이사노프카문화가 시작되는 시점인 5000B.P.부터는 강원도지역에서는 첨저토기가 출토됨으로 이 시간대는 환동해문화권이 축소되었다고 강원도는 문화권에 포함되지 않는다(3, 김재윤 2017).

  

 따라서 현재로서 가늠할 수 있는 것은 동심원문 암각화는 아무르강 하류~우수리강 일대 및 송눈평원 일대에서 많이 확인되던 문양이고, 얼굴모양으로 활용되어 그려져서 9000년 전이다. 뿐만 아니라 우수리강과 가까운 두만강 유역에도 확인되는데, 같은 문화지역임으로 유사하거나 약간 느린 시점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또한 한반도의 동심원문 암각화도 태백산맥에서 분기된 소백산맥 이동에서만 확인되었는데, 이는 두만강유역에서도 확인됨으로 환동해문화권과 교류로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좀 더 뚜렷한 것은 토기 및 석기 등으로 연구된 아무르강 및 연해주와 교류가 있었던 6500년 전 이후부터 일 수 있고, 연해주와 동해안의 관련성이 6000~5800년 전임으로 이 기간과 관련성이 높다(김재윤 2015, 2017, 3).

  하지만 암각화의 제작연대와 이기간이 반드시 일치할 수는 없다. 정신적인 행위를 토기와 석기 등 일상적인 유물과 같은 시간적인 잣대로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기간에 환동해문화권과 영남의 신석기시대사람들이 교류했다고 해도 동심원문암각화를 그린 주체는 영남의 신석기시대 사람이다. 동심원문암각화가 대부분 내륙에 존재하는데, 이곳에서 유적이 생기는 시점은 대부분 5000년 전 이후이며, 동심원문 암각화도 이 때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category=772722(그림1)

https://eastsearoad.tistory.com/274?category=772722(그림3)

https://eastsearoad.tistory.com/272?category=772722(그림 7,8)


*본문에 제시된 표 2와 3은 다음포스팅에 올리겠습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9. 12:0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백성 쌍탑 유적에서는 토기문양에 동심원문양이 새겨진 것이 확인되었다. 백성 쌍탑 1기의 토기가운데, 융기문 및 구순각목문, 승선문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아무르강 중류의 신석기시대 노보페트로프카문화(그림 6-16~19)와 관련이 있고,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고찰이 필요하다.

 

 침선기법으로 동심원 사람얼굴문양이 남아 있는 토기편과, 융기문양으로 얼굴이 표현된 것도 있다(그림 6-10,11,14). 백성 쌍탑 1기의 절대연대가 9550±45, 10162±630, 9445±710, 10400±600, 10202±1000, 9679±750B.P.로 알려졌다(吉林大學邊疆考古硏究中心·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13).

사카치 알리안의 얼굴모양 마스크는 얼굴형을 기준으로 분류되었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그런데 필자는 사카치알리안의 여러 지점들에 2, 3중 등 동심원문양이 남아 있고, 코와 입까지 그려진 암각화(그림 3-1~4)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 얼굴을 그릴 때 눈을 먼저 그리고 얼굴형을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눈의 모양에 따라서 얼굴모양을 구분할 수 있는데 크게 동심원의 눈(그림4)과 타원형으로 찢어진 눈’(그림5)에 가까운 형태이다.

동심원의 눈이 있는 얼굴은 이마, , , 얼굴형 등에 따라서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특히 눈에 동심원문이 2개 혹은 3개 그렸고, 얼굴형은 타원형, 원형, 하트형, 등이 있다.

동심원문이 2개 혹은 3개 그려지며 이마의 표현도 3줄 이상의 호선을 두 번 연달아 표현했고, 코는 삼각형, 입은 장타원형 혹은 원형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원형 가운데는 얼굴에서 방사선 선이 그려진 것이 있는데, 이는 단순한 원형과는 차이가 있다(그림 4-7~16).

동심원문이 2개 그려지며 이마 주름이 1~2개 그려진 것은 표주박형 얼굴 혹은 하트형 얼굴이 그려졌는데, 코는 원 두 개로 표현되었고, 입은 타원형 2개를 겹치거나 원형으로 그려졌다(그림4-1~6). 그 외 동심원으로 눈을 표현하고 하트형 얼굴이 있고(그림 4-21~23), 원 세 개로 표현된 것(그림 4-17~20)도 있다.


세레미체보의 얼굴모양 암각화 역시 눈이 동심원문인 것(그림 4-4~6, 10,13,15,16)과 장타원형인 것(그림 5-4,7,8)으로 구분된다. 동심원으로 그려진 얼굴형은 원형인 것과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것이 있다. 눈이 2~3중 동심원문으로 표현된 것은 이마에 주름이 3줄 표현된 것은 얼굴형은 원형 혹은 타원형에 가깝다. 코는 삼각형, 입은 타원형으로 표현된 것(그림 4-10), 코까지만 그려진 미완성형(그림 6-10,11)도 남아 있다. 또한 이와는 달리 눈, , 입은 유사하지만 얼굴에 채워진 문양이 세로방향으로 그려진 것도 있다(그림 4-13,15). 2중 동심원문이며, 얼굴형이 역사다리꼴에 가까운 것 중에 1점은 머리위로 짧은 직선이 12줄 그려져 있다(그림 4-13, 15). 이는 사카치 알리안의 얼굴형 가운데 방사선이 있는 것(그림5-9,10)과는 방향과 길이 등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 이 얼굴은 코가 2개의 원, 장타원형 입이 그려졌다.


이중에서 백성 쌍탑1(그림 6-10,11)와 유사한 것은 사카치알리안과 세레미체보 유적에서 확인된 3중 동심원 눈, 이마표현 등도 유사하다(그림 4-9~11,16).


사카치알리안은 오시포프카 문화 단계부터 그려졌을 것으로 여겨졌으나, 백성 쌍탑1기와 비교한다면 9000년 전 정도이다. 특히 오시포프카 문화 늦은 단계에 속하는 8820~9810B.P 야미흐타 유적의 토기가 노보페트로프카 문화와의 관련성이 제기된 바 있다(셰프코무드·후쿠다 외 2017). 이 시점에 아무르강 하류와 중류의 교류가 있었고, 눈강 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관점이다.


 그렇다면 사카치알리안의 암각화와 세레미체보 암각화에서 알 수 있는 점은 동심원문을 사람얼굴표현으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동심원문 및 그와 유사한 회오리 문양, 동심원을 바탕으로 한 얼굴모양 및 동심원문 암각화도 9000년 전 정도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이 시점은 오클라드니코프가 타래문토기와 비교한 6000~5000년 전, 하트형 얼굴모양과 보즈네세노프카 문화의 토기와의 비교한 연대(1)보다 올라간다.


따라서 사카치알리안과 세레미체보 유적이 여러 시기에 걸쳐서 그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 중에 9000년 전께 동심원문을 바탕으로 한 얼굴모양과 여러 동심원문이 그려졌다.


*그림 4~6, 표1은 링크 참고하세요.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표1)

https://eastsearoad.tistory.com/275(그림 4,5)

https://eastsearoad.tistory.com/276(그림 6)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8. 19:3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백성 쌍탑 유적은 1, 2, 3기로 구분되며, 그 중 신석기시대는 1기와 2기이다. 1기에서는 회괭과 묘광, 회구 및 기둥구멍 등이 확인되었다. 1기의 주요한 유물은 융기문토기이다. 2기는 무덤 4기가 발굴되었다.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 (유적의 위치는 링크참고)


토기의 기형은 다양한데, 발형토기(그림 6-1,5,6,8), 잔발형토기, 고배형토기(그림 6-4) 등이 확인된다. 토기의 문양은 주로 융기문과 무문양이 주요하고, 구연단에 구순각목이 확인되며, 일부 토기에는 침선으로 그린 것도 있다.

토기의 문양은 구연부근에 융기띠가 횡방향으로 부착된 것이 주를 이룬다. 주로 여러 줄 부착되었거나 혹은 종방향과 함께 시문되었다. 융기띠에 각목이 된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구연단에 각목된 토기도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무문양토기도 출토되는데, 저부의 바닥이 오목하게 들어간 것이다.문양토기(그림 6-5,6) 가운데는 점토를 접한 한 흔적이 단을 이루는 것이 남아 있는 토기도 있고, 단순한 무문양도 있다.

 

그림 6. 눈강 유역의 백성 쌍탑 1기 출토품과 아무르강 중류의 토기(1~15: 백성 쌍탑1, 16,17,18: 그로마투하 출토, 19: 노보페트로프카-3출토)


사진1. 쌍탑 유적의 얼굴모양토기

사진2. 노보페트로프카 유적(아무르강 중류)의 융기문토기


이외 침선기법으로 동심원 사람얼굴문양이 남아 있는 토기는 2(그림 6-10,11)있는데, 동심원문이 눈을 표현하고, 수염 밑 코구멍, 입이 있다. 융기띠를 부착한 토기도 침선얼굴문 토기와 유사한 형태가 있는데, , , 수염을 표현했다(그림 6-4). 얼굴문양토기는 내몽고와 통요 등지의 암각화와 비교되기도 했으나(吉林大學邊疆考古硏究中心·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13), 이 유적은 융기문토기가 새롭게 조사된 후투목알(後套木嘎) 유적의 2기와 같은 성격이고, 아무르강 중류의 노보페트로프카 문화와 같은 것으로 평가되었다(왕립신 2016).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아무르강 중류의 노보페트로프카문화와 오시포프카문화가 관련성이 있다는 연구(셰프코무드·얀쉬나 2012)로 보아서 백성 쌍탑 1기의 성격은 내몽골보다는 아무르강 중류 및 하류역과 관련성이 더 깊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18. 12. 28. 17:30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19세기 말에 처음 확인되었고, 19681970, 1978년도에 오클라드니코프가 조사했다. 암각화는 아무르강의 지류인 우수리강의 강가에 세레미체보 마을 보다 약간 하류에 위치한 절벽에 원래 살던 주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3개의 지점으로 나누어져 암각화가 그려져 있는데, 각 지점은 6, 20, 7개의 표현이 그려져 있다. 표현물은 0.3~1cm가량 깊이로 쪼기 기법으로 표현된 것이다. 몇 개는 음각한 것도 있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사진1. 우수리강의 세레미체보 유적(위치는 https://eastsearoad.tistory.com/273의 지도 참고)


세레미체보 유적의 1지점(오클라드니코프 1971)

세레미체보 유적의 2지점(오클라드니코프 1971)




세레미체보 유적의 3지점(오클라드니코프 1971)


대부분은 사람과 동물과 관련된 주제이다. 가장 많은 것은 얼굴만 표현된 것인데, 단독으로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고, 쌍을 이루는 것은 1개소(그림 4-5,6) 확인된다.

 

그림 4.  사카치알리안(1~3, 7~9,11,12,14,17~23)과 세레미체보 유적(4~6, 10, 13, 15, 16)의 동심원문눈 얼굴모양


타원형, 달갈형, 하트형, 상단은 타원형, 하단은 사각형이니 것, 원숭이 혹은 거북이 모양의 것도 있다. 눈은 둥글거나 끝이 뾰족한 째진 눈을 표현한 것(그림 5-4,7,8)이 있다


사진2. 세레미체보 유적의 째진 눈 얼굴모양마스크


그림 5. 사카치알리안과 세레미체보 유적의 째진 눈얼굴모양마스크(1~3, 5,6,9~13: 사카치알리안, 4,7,8-세레미체보 유적)


얼굴내부를 충진했는데, 이마의 주름, 눈 등은 사카치알리안과 유사하다. 일부 표현에서는 얼굴의 외곽선에 방사선의 모양으로 그려놓아서 을 형상화 하였지만(그림 4-4,5), 사카치알리안과 달리 머리 위쪽으로만 표현되었다. 목이 길고 발가락이 세 개 인 것은 백조 혹은 거위인데, 이는 사카치알리안과 다른 시기의 것이다.



오클라드니코프는 사카치 알리안과 마찬가지로 얼굴형 암각화 중 동심원문(그림 4-4~6, 10, 13, 15,16)을 기반으로 한 것은 6000~5000년 전으로 보았다(오클라드니코프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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