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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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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서 환단고기역주본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중국신강성의 신석기문화에 대해서 설명한바 있다.

 

(앞선 포스팅 참고)

2017/12/20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환국과 신강고고학 자료] - 환국과 신강

 

환국과 신강

신강에서는 신석기시대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아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묶어서 석기시대라고 한다. 앞서 포스팅한 바 있지만 흔히들 구석기시대 유물로 생각되는 세석기가 이 지역에서는 늦은 시기 까지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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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환국과 신강고고학 자료] - 신강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4000~3000 부터.

 

신강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4000~3000 부터.

현재 조사된 신강의 석기시대 유적은 모두 33개소로 전해진다. 그런데 유적은 대부분 지표조사된 유적이고, 일부만이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되더라도 주로 청동기시대 하층에서 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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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문화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인접하고 있는 지역과의 비교가 필수적이다. 카자흐스탄 동부의 우스티-나림문화 뿐만 아니라 이와 인접한 켈테미나르문화의 유물도 중국 신강, 몽골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이 지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문화가 위치한 곳은 천산산맥에서 발원해서 아랄해로 들어가는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니야강의 하류이다.

 

2019/07/03 - [교과서 밖의 역사:유라시아선사시대/신석기시대] -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의 신석기문화비교1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의 신석기문화비교1

필자가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로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인접한 카자흐스탄과 몽골의 신석기시대와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강성의 천산산맥은 동서방향 보다는 약간 틀어져서 비스듬하게 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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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테미나르문화

기원전 4000년기 후반~2000년 기 전반까지 아랄해의 서부 및 남부와 북부에 켈테미나르문화가 존재했다. 대표적인 유적은 잔바스-4, 대형주거지가 확인된 톨스토프, 카바트-7 유적 등이 발굴되었다.

카바트-7유적에서 발굴된 주거지는 타원형주거지(그림-5,6)로 크기가 30~31×18~19m정도이다. 유사한 주거지가 확인된 잔바스-4 유적(그림5-1)을 참고하면 이 집터는 수혈의 흔적이 거의 없는 텐트형주거지인데, 집의 건축재인 사슴의 가죽(360~380㎡)과 목채가 실제로 남아있었다. 집의 중앙에는 돌을 두른 노지 및 그 주변에서 저장구덩이 내부에서 대량 토기가 확인되었다.

토기는 저부가 약간 둥글며, 한쪽 끝이 주구처럼 형성되어는 소형토기(그림5-32) 및 구연부가 외반하는 옹형토기(그림5-33, 34)가 기본적이다. 문양은 침선하거나 찍은 방법으로 시문되었고, 대체적으로 횡방향으로 구연부 부근까지만 시문되는 토기가 많다. 토기 문양 중에서 기하학적인 삼각집선문(그림5-37) 혹은 지그재그(그림5-34), 방형문양(그림5-36) 등이 시문되었다.

석기는 규조암제를 이용한 눌러떼기기법을 이용해서 제작한 세석인석기(그림5-7~30)가 많은데, 특히 비대칭으로 가장자리를 잔손질 한 경우가 많다. 석촉은 양 가장자리를 비대칭으로 떼어내는데, 한쪽은 짧게 다른 한쪽은 길게 떼어내어 한쪽만 슴베(그림5-24~27)가 생기게 했다. 이 문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석인석기를 이용한 유물가운데 여러 형식의 뚜르개(그림5-18, 21~23)가 확인되는데, 한쪽변 만 잔손질한 뚜르개(그림5-22), 끝이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다듬은 뚜르개(그림5-23) 등이 확인된다.

긁개 가운데는 한쪽 변을 부채꼴 모양으로 들어가게 손질한 것(그림5-28)도 석촉(그림5-24~27)과 함께 이 문화의 특징으로 알려졌다. 이외에 평면형태 방형에 가까우며, 끝을 약간 둥글게 잔손질한 긁개(그림5-13~15)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문화에서는 평면형태가 사다리꼴인 양인 마제석부(그림5-31)가 출토되었다.

 

그림5. 아랄해 주변의 켈테미나르문화(Ошибкина С.В.(ред) 1996 재편집, 김재윤 2019)(1~4: 잔바스 4유적, 5·6: 카바트-7, 7~39: 톨스토프 출토품(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필자가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로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인접한 카자흐스탄과 몽골의 신석기시대와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강성의 천산산맥은 동서방향 보다는 약간 틀어져서 비스듬하게 흐르고, 몽골지역과도 접하고 있으며, 카자흐스탄과도 접하고 있다. 특히 천산산맥은 고기산지로 산맥사이로 강이 흐리고 있는 지형이어서, 산맥이 문화의 경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산맥 사이로 흐르는 강을 따라서 문화가 이동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유물 때문이다.(아래 포스팅의 그림 참고)

 

2019/07/03 - [교과서 밖의 역사:유라시아선사시대/신석기시대] - ‘신석기혁명’과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

 

 

카자흐스탄은 매우 넓은 나라이다. 현재의 수도인 누루술탄이 있는 카자흐스탄의 북부지역은 원래는 남부시베리아로 명명했던 곳이다. 러시아는 영국과는 ‘The Great Game’이라고 불리는 전쟁에서 이 지역에 떠돌던 ‘카자흐’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모아서 국가를 만들었다. 원래 중앙아시아의 맹주는 제국이라고도 하는 ‘돌궐’사람들의 나라인 우주베키스탄이다. 이들을 견제하고, 인도를 차지한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카자흐인들을 불러모아서 카자흐스탄을 만들어줬다고들 한다.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이다. 러시아인들이 매우 잘 쓰는 방법이다.

카자흐스탄을 설명하다가 약간 딴 곳으로 셌는데, 그만큼 그들의 영토는 넓고 자연환경도 매우 다양하다. 천산산맥과 접한 동부, 시베리아 바로 남쪽의 북쪽, 아랄해 등 다양한 자연환경에 따라서 이 지역의 신석기문화도 다양하다.

본고에서는 중국 신강성의 소위‘석기시대’문화를 파악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영역을 소분할 필요가 있다.

 

 카자흐스탄의 신석기문화는 신강성과 인접한 동부지역 뿐만 아니라 북부, 아무다리야 강의 상류, 하류 등에서 알려졌다(그림 4). 북부지역에는 우랄산맥의 동쪽지역 신석기토기와 비슷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최근에 새롭게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시베리아 및 카자흐스탄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토기가 존재하며 그 문화는 마흐안다르스카야 문화로 밝혀졌으며 카자흐스탄의 다른 지역에서 출토되지 않는 토기이다. 첨저토기이지만 우랄산맥이동에서 보이는 것과는 달리 구연부가 외반하는 기형으로 바닥의 끝이 매우 뾰족하며 전면이 마연되었다. 뿐만 아니라, 천산산맥의 산지에서 발원한 아무다리야강의 상류에는 8000년 전의 기사르문화와 제이툰문화가 알려졌으나, 토기, 토벽을 세운 지상식주거지 등이 확인되어 문화적 양상 차이가 뚜렷하다. 즉 카자흐스탄 북부 및 천산산맥의 산지이자,아무다리야강 상류의 카자흐스탄의 문화는 본고와는 관련성이 많지 않아서 제외할 수 있다.

 중국 신강성과 비교할 수 있는 지역은 카자흐스탄에서는 천산산맥과 인접한 동부지역이고, 이 지역의 문화는 우스티-나림이라고 하는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로 대표된다. 또한 이 지역은 아무다리야강의 하류에 위치한 켈테미나르문화라고 하는 문화의 특징도 보임으로 이도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림 4.카자흐스탄의 신석기문화(김재윤 2019)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참고문헌

Ошибкина С.В.(ред)., 1996, Неолит Северной Евразии, Москва, НАУКА, pp.130-132

Шевнина,И.В. 2012, “Гончарство Маханджарско культуры”, Вестник археологии, антропологии и этнографии, 2(17), pp.26.

 

posted by 김재윤23

 

최근에 홍콩에서는 반중국정부에 대한 시위가 한참이다. 거기에서 중국의 신강성에 사는 위구르인들도 함께 동참한다는 보도를 보았다. 나는 위구르인들이 꼭 원래대로 돌아갔으면 한다. 그 땅이 중국에 들어간건 청나라 때 건륭제때이다.

 

작년에 중국신강성을 처음 가보았는데, 정말 무시무시한 시골동네였다. 대낮에 장총을 들고다니는 공안들이 거리에 가득차 있었고, 현과 현을 넘어 갈때는 반드시 신분증 검사를 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기사를 보다가 작년에 썼던 아직 공개되지 않는 글이 생각나서 공개하려고 한다.

 

그림 . 신강지역의 신석기유적(1. 삼도령유적, 2. 칠각정유적, 3. 시와보유적, 4.아사탑나유적, 5. 곽가힐나륵유적, 소륵당파아유적)(김재윤 2019)

우연한 기회에 작년에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게 되었고 아이러니 하지만, 그 계기로 필자가 살고 있는 동북아시아 신석기문화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흔히들 이야기하는 ‘신석기혁명’에 대한 개념이다.

신석기혁명은 고든 차일드(V. Gordon Childe)라고 하는 사람의 논의로 알려져 있다. 신석기시대는 농경의 시작과 토기 발생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된 생각이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신석기시대’라는 개념은 러복(J.Lubbok)(1865)이 작물재배, 동물길들이기, 토기발명을 시대개념으로 규정했다. 어찌되었던, 두 사람은 유럽과 인접한 근동지역을 근거로 해서 신석기시대 혹은 신석기혁명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북아시아는 특히 중국동북지방 흔히들 만주, 연해주 및 아무르강, 한반도, 일본에는 ‘토기’를 근거로 신석기시대를 정의한다. 즉 토기가 출토되어야만 신석기시대라고 부를수 있다는 것이다.

 

.  앞서 필자가 학생들에게 신석기혁명에 대한 과제를 내주었다고 했는데(아래 포스팅 참고), 그 그림의 반원모양 지도는 가장 최근의 탄소연대로 살펴본 토기발생지를 묶은 것이다. 유럽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토기는 동북아시아에서 먼저 제작되었다. 그 그림이 실린 논문에는 좀 더 파격적인 제안이 있었다. 토기의 발생시기는 후기 구석기시대이고 동아시아에서부터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자료로서 13000년 이상 올라가는 유적이 있는 곳은 아무르강 하류, 일본, 중국 등이고(그림15), 17000년 전 홀로세 이전부터 동아시아유적에서 출토된 예도 있다. 기원지는 새로운 발굴로 바뀔 수 있지만, 신석기시대의 기준이 된 홀로세(전신세)이후에 토기가 발명된 것이 아니라 이미 플라이스토세의 사냥채집민(후기구석기인)들에 의한 것이다( P.Jordan, M. Zvelebil, 2010)

 

2019/06/04 - [미래의 인디아나존스를 위해서../고고학] - 신석기혁명과 과제

 

가장 빠른 토기의 발생지가 어디일지는 시간의 문제이다. 어떻게 되었든 만주지역 혹은 아무르강 하류, 중국 황하강일 수도 있다. 필자는 이점은 시간이 지나야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토기가 모든 지역에서 균일한 시점에 발생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농경은 이미 동아시아에서는 농경을 신석기시대 구분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즉 신석기시대의 개념으로 토기와 농경을 적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좀 더 이야기 하면 신석기시대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 예를 들어낼 수 있는 지역이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이다.

 

중국 신강성에서는 형체를 알 수 있는 토기가 확인되는 것이 청동기시대부터이기 때문에 그 이전 시기를 석기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특히 세석인이라고 하는 동북아시아의 후기구석기시대 유물이 청동기시대 직전까지 유적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물론 석기시대 내에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와 가까운 시기를 구분하기는 하지만 역사서술에서 신석기시대는 없고, 그냥 석기시대라고 한다.

이는 철저하게 동아시아적 관점 좀 더 구체적으로는 중국인학자들이 중국 신강성을 바라본 관점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지역의 유물을 인접한 지역과 비교했는데, 단순히 석기시대라는 용어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더욱이 너무나 편협하게 이 지역이 연구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에게도 그들의 신석기시대만의 특징이 있다고 하거나, 아니면 신석기시대 개념 자체가 틀렸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도 있을 수 있다.

'신석기시대 특징에는 간석기도 있던데요?, 국사책에요'

하지만 간석기(마제석기)는 이미 오래 전 부터 후기구석기시대에 나오기 시작한다는 걸 다 알고 논문에도 많이 있다.

그 문제는 국사교과서 쓰는 사람의 문제라고 해 두고 싶다. 혹은 틀렸지만 그냥 고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석기시대 개념에 대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참고문헌

 

P.Jordan, M. Zvelebil, 2010, “Ex Oriente Lux: The Prehistory of Hunter-Gather Ceramic Dispersals.” Ceramic before farming: the dispersal of pottery among prehistoric Eurasian hunter-gathers. P.Jordan, M. Zvelebil ed. London: Publications of the Institute of Archaeology University College London, pp.31-89.

posted by 김재윤23

금번 답사에서 유적 위에 지어진 유적박물관을 소개하는 중인데, 이도정자유적박물관을 끝으로 마지막으로 하고자 한다.

답사의 더 심도깊은 내용은 논문으로 쓸 것이고, 완성되면 소개할 예정이다.

 

이도정자유적박물관은 이도정자라고 하는 유적(그림1)을 발굴한 채로 두고 덮은 박물관이다. 앞서 소개한 박물관과는 달리 유물전시관을 따로 짖지 않았고, 유적박물관의 가장자리에 유물을 약간 전시해 둔 정도이다.

 

그림 1. 중국에는 유적에는 꼭 비석을 세워둔다.. 찾기 쉽다..
그림 2. 이도정자유적박물관 입구

 

그림 3. 이도정자유적박물관 입구

 

그림 4. 이도정자 유적 박물관 내부

 

이도정자 유적은 적봉(赤峰)시(그림 5)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그림 6). 적봉시는 한자 그대로, 적봉시에 위치한 봉우리가 붉은 색이었고, 그 곳에서 홍산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인 홍산유적이 발굴되었다. 홍산유적보다 더 먼저 알려진 것은 홍산후라고 하는 유적인데, 그건 일인학자들이 발굴한 것으로 처음에는 신석기시대 유적이라고 생각을 못했다.

 

그림 5. 치펑이라고 적힌 곳이 적봉시이다. 라오닝이라고 적힌 곳은 요녕.
그림 6. 이도정자 유적의 위치
그림 7. 2011년에 찍은 적봉시의 홍산
그림 8. 홍산에서 내려 다 본 적봉시(2011년 촬영)
그림 9. 홍산유적지가 있는 산림공원. 위의 두 사진은 이 공원 안에서 찍었다. 암튼 적봉시는 그런 연유가 있는 도시이다. 이번이 세 번째 인데, 숙소를 두고 묶은 것은 처음이었다.

 

필자는 이 유적을 사실 2011년에 가 본 적이 있다. 도로를 내기 위해서 발굴하다가,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서 컨테이너로 보존했을 때 가 보았다(그림 10~12). 그 때도 장관이었다.

 

그림 10. 2011년에 찍은 이도정자 유적과 도로. 그림 6에서 알수 있지만 도로와 유적의 위치가 일치한다.
그림 11. 이도정자 유적을 덮은 모습(2011년)
그림 12. 이도정자 유적의 컨테이너 시설 내부 모습. 2011년 필자 촬영

이 유적은 중국 요서지역에서 신석기시대 이후에 청동기시대인 하가점하층문화의 마을유적이다. 한국과는 달리 토벽이나 석벽을 쌓아서 집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잘 남아 있다(그림 4, 그림 12, 그림 13).

물론 하가점하층문화에서는 구덩이를 파서 만드는 움집이 있는 유적도 있고, 이런 지상식 구조물이 남아 있는 마을 유적도 있다.

하가점하층문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 등은 차차 소개하기로 한다.

 

그림 13. 2019년 현재 이도정자유적박물과 내부
그림 14. 이도정자 유적의 발굴당시 항공사진. 이도정자유적박물관의 패널을 필자가 찍음.

 

암튼 중국의 국가차원에서 역사를 공작하는 중이니,,, 그 우연한 파생물인 유적박물관은 아이러니하게도 고고학도인 나에게는 무지 탐나는 아이템이다.

 

우리도 좀 괜찮은 유적은 신라, 가야 이런 역사시대 것 뿐만 아니라 선사시대의 유적도 좀 보존했으면 좋겠다..물론 그런 유적이 발굴이 제대로 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올해의 첫 번째 답사를 다녀오고, 두 번째 답사를 준비하면서, 일주일도 안된 기억이 가물해진다.

첫 번째 답사는 주로 중국의 몽골지역인 내몽골지역이었다. 꼭 보고 싶은 유적의 유물이 오늘 소개할 곳이다.

왜냐하면, 이 유적에서 확인된 토기와 조합식석인검은 시베리아의 특징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유적은 혹자는 홍산문화의 유적이라고 하고, 혹자는 홍산문화와는 다른 문화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후자 쪽이고, 후자 가운데서도 중국사람들과는 생각이 좀 다르다...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은데,,시간은 없다....

 

통요시(그림 1)에서 대략 60km 떨어진 곳에 합민망합(哈民忙哈)유적(그림 2)이라는 곳이다.

 

통요시의 위치
그림 2. 합민망합 유적의 위치

통요시는 내몽골에서도 작은 도시이지만, 중국 고속철의 경유지(그림 3)이기도 하다.

그런 작은 도시에서도 생전 누가 찾을 까 싶은 곳에 박물관(그림4~6) 이 있다.

유적을 그대로 남겨둔 유적박물관과 유물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3. 통요역. 고속철의 경유지
그림 4. 유적지의 입구.
그림 5. 유적 박물관

 

그림 6. 유물전시관 입구

 

 

이곳은 2011년 전국십대고고발굴로 뽑히기도 했고, 중국 학계에서 엄청나게 소개된 유적이다.

 

그림 7. 유적 박물관 내부. 발굴된 집터. 목채는 집의 구조물이다. 화재난 집으로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유적에서 이러한 집터가 여러 채 있고, 특히 세간의 관심을 받은 집터는 40호이다. 집을 무덤으로 사용했는데, 집 안에 인골이 98기가 접혀서 확인되었다. 하지만 40호 집은 이 사진의 앞에서 두 번째 위치한 곳이다. 이 집에는 접근하기 어려웠다. 이 집에 대해서는 이미 출간된 책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소개해 드리겠다. 

 

그림 8. 나는 참 싫어하는 유리로 만든 바닥이다. 이렇게 해서 발굴된 집터 위에 설치해서 좀 더 잘 볼 수 있게 한 것 같은데, 나는 이런 바닥이 너무 싫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래서 사진도 흔들렸다. 중국박물관에는 이런 곳이 많다. 유리바닥으로 된 전시관.

 

앞서서 이곳을 홍산문화 유적이라고 생각하는 연구자가 있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옥기 때문이다. 이 유적의 집 내부에서 우하량유적에서 출토된 옥기와 비슷한 것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기와 석기 등은 홍산문화와 차이가 크기 때문에 단순히 홍산문화 유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림 9. 합민망합 유적의 토기

 

그림 10. 합민망합 유적의 토기 2

 

이 토기의 문양을 중국에서는 ‘망점문’이라고 하던데, 일종의 타날문이다.

타날문은 앞서 시베리아 신석기문화를 소개하면서 설명한 바 있다.

방형의 나무판에 노끈을 감아서 만든 도구를 박자라고 하는데, 이 박자를 두드려서 만든 것이다.

 

앞서, 홍산문화의 토기를 설명한 바 있는데, 홍산문화의 토기 특징은 압인之문양으로, 도구를 눌러서 之문양으로 찍은 것이다(그림 11). 

 

그림 11. 적봉박물관에서 소개한 지자문양새기는방법

 

그림 9,10에 소개한 합민망합 유적의 토기와 아래 홍산문화의 토기(우하량 유적)와는 매우 차이가 있다.

 

 

그림 12. 우하량 유적에서 출토된 압인지자문양토기

 

필자는 이 유적의 토기를 직접 보고 싶었고, 조합식석인검(그림 13,14)도 직접 보고 싶었으나, 이 유적의 출토품은 보지 못했고, 대신 이 이전부터 매우 오랫동안 이 조합식석인검이 이 지역에서 확인된다는 것을 여러 보고서를 통해서 알았으나, 눈으로 확인했다. 기뻤다. 

 

그림 13. 7000년 전 조조합식석인검
그림 14. 그림 13의 유물을 다른 각도에서 찍음.

그리고 할 일이 너무 많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앞서 중국의 최근 박물관에 대해서 간략하게 포스팅을 했다.

 

장춘에서 길림대학교박물관을 한 곳 더 보았으니,

총 7개의 박물관을 보고, 그 중에서 3곳은 유적위에 세워진 박물관으로 유적과 유물전시관이 세트가 된 곳이다.

 

우하량국가고고유지공원은 중국의 고속철 역이 드러설 정도로 정성?을 들인곳이다.

심양에서 출발해서 우하량까지 대략 2시간 정도 걸린다.

그림 1. 우하량역
우하량유적의 위치
우하량역에서 국가고고유지까지

 

 

우하량 역에서 우하량 유적의 국가고고유지공원까지는 대략 30km 떨어진 곳이다.

이곳은 박물관이라기 보다는 유적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4개의 전시관을 만든 공원이다. 전시관과 전시관은  차를 타고 이동해야만 한다. 전시관 사이에는 화단도 가꾸어져 있다.

 

필자가 갔을 때는 9시 반 정도였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런 곳에 그렇게 꾸며 놓았다.

홍산문화를 얼마나 철저하게 국가차원에서 다루고 있는지를 느끼게 한 공간이다.

예전 포스팅에서 왜 여신묘가 여신묘가 되었는지를 비판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나온 인물이 소병기이다. 이곳의 1관은 그를 철저하게 우상화하고 있었다.

1관의 입구, 소병기 동상

 

 

 

2관은 유물전시관이다. 아쉽게도 이곳은 아직 유물로 채워지지 않은 빈 전시장도 있었지만, 옥기, 중요토기들은 대부분 복제품이 많았고,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토기와 석기만 전시되어 있었다. 우하량에서 C자형 동물모양 옥기가 3점이 출토되었는데, 복제품 1점이 있었고, 1지점에서 출토된 여신상의 마스크 토제품도 복제된 것이었다.

2관입구

심양에 있는 요녕성박물관에 우하량 출토 C자형 동물모양옥기가 1점 있었고, 그곳에도 여신상마스크는 복제품이었다. 아마도 베이징 국가박물관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

 

3관은 우하량 1지점인 여신묘라고 추정되는 건축물의 상부를 덮어서 대략적인 모양을 표시해놓았다. 그곳은 발굴된 적이 없고, 토제마스크와 가슴으로 추정되는 토제품, 동물모양의 토제품 등이 몇몇 출토되었을 뿐이다.

 

3관 내부, 여신묘의 표시

 

3관 내부에 전시된 유물은 모두 복제품이다. 3관 자체가 여신묘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만, 정식발굴은 이뤄지지 않았다. 문제가 많은 곳이다.

 

4관은 우하량2지점의 무덤을 발굴해서 노출한 채로 그대로 살려두고, 전시하는 유적전시관이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장과 같은 성격이 강한듯 했다 여기저기 애들을 위한 패널이 보인다. 

 

4관 내부

 

필자가 부러워하는 부분은 이런 전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적을 살려서 전시하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문화재연구소와 같은 국가차원에서 하는 발굴은 보존하려고 애는 쓰지만, 대부분 도로나 아파트 공사를 위한 곳에서 이뤄진 발굴은 그런 사치?는 우리에게는 거의 없다.

 

우하량유적은 중국국가차원에서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홍산문화를 문명화 한다든지, 중국동북지방의 역사를 선사시대부터 철저하게 자신의 역사로 관리하는 모습은 씁쓸하고도 우리나라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최근의 중국 박물관은 유적과 유물을 함께 전시하도록 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유적은 유구의 상태를 되도록 살리고 거기서 출토된 유물도 함께 전시한다.

그래서 유지(유적)박물관과 유물전시관을 세트로 지어서 박물관이 구성되어 있다.

금번에 돌아본 박물관은 총6개인데, 3개는 요령성박물관, 적봉박물관, 내몽고박물관으로 각 성의 중요한 박물관이고, 나머지 3개는 유적에 박물관이 있어서 도시와 꽤 떨어져 있는 곳이다.

우선 홍산문화의 유적으로 유명한 우하량유적은 이름 하여 ‘우하량국가고고유지공원’전시관이 지어져 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개관되지 않았다고 한다. 심양에서 우하량유적으로 가는 ktx가 있다. 우하량유적은 물론 역에서 대략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전시관은 총 4개의 관이 있는데, 1관은 중국고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소병기의 일생에 대한 전시관이다. 특정한 인물에 대한 전시관을 지었을 정도로 그는 중국고고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홍산문화의 연구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제2전시관은 유물전시관인데, 지난달에도 개관이 되지 않았다는 말을 실감하듯이 아직 빈 전시장도 있었다. 제3전시관은 우하량 1지점인 일명 여신묘가 있는 곳을 덮어서 유적을 보여주는 곳이다. 제4전시관은 우하량 2지점에서 발굴된 무덤을 그대로 살려두었다.

사실 홍산문화의 유물은 우하량유적전시관에는 복제품이 많고, 중국국가박물관(베이징), 적봉박물관, 내몽골박물관, 요령성박물관 등에서 나눠져서 전시되고 있었다. 아마도 중국내에서도 정치적으로 관심이 많은 유적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우하량 유적 전시관이 있는 우하량촌은 정말 작은 소재지이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우하량역과도 접근성이 전혀 좋지 않았지만 그런 곳에 어마어마한 유적 전시관이 있었고, 4개의 전시관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맞이 하기 위한 것처럼....

워낙 중국내에서도 관심이 많은 유적이어서 그런지 유물은 대부분 복제품이 많았다.

우하량국가고고유지공원(2019년 6월 개관)

 

두 번째로 간 유적 박물관은 합민망합이라고 하는 유적의 박물관이다. 통요시에서 60km떨어진 곳에 유지전시관과 유물전시관이 두 개가 각각 지어져 있었다. 이 유적은 마을 유적이고, 집 내부에 화재난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는 집, 무덤으로 이용된 집 등 상당히 주목할 만한 유적이다. 필자는 이 유적의 출토 토기와 조합식석인검이 홍산문화의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홍산문화의 유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 유적의 유물을 보는 것이 금번의 중요한 목적이기도 했다.

합민망합사전취락유지 2016년 개관

통요시에서 60km떨어짐

 

세 번째로 간 유적은 적봉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도정자유지박물관이다. 이곳은 신석기시대가 아닌 이 지역의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인데, 도로공사를 위해서 우연히 발견해서 발굴했는데, 정말 장관이었다. 사실 유적이 발굴된지 얼마되지 않은 2011년에 본 적이 있는데, 그 때는 가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그 때 정말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였다.

한국과는 다른 청동기시대 마을의 모습과 유적 때문에 도로의 방향을 돌렸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이번에 본 박물관은 모두 동북3성 중에서 가장 발달이 덜 된 지역 중에 한 곳이다.

난 중국이 주도적으로 독재체재를 완성하기 위한 교육장으로 박물관을 이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지만 유적박물관은 매우 부러웠다.

 

우리나라에는 역사사랑? 역사관심? 역사투자?에도 매우 편식이 심하다. 고구려나 발해, 신라 등 국가 단게의 유적은 그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선사시대 유적에는 그렇지 못하다. 정말 한심하게 어떻게 선사시대 없이 갑자기 고구려 발해역사가 생겼다고 생각하는지....

 

우라나라에서 학술발굴이 매우 드물고 대부분 건물이나 도로를 짓기 위해서 시작한 곳에서 발굴된 용역발굴이 많기 때문에 건물지을 때 그런 곳이 나오면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고, 특히 중요한 유적을 사적으로 지정하는 것도 너무 힘들다.

사적으로 지정된다 해도 유적을 발굴한 채로 그대로 살려서 유적을 알리는 경우도 드물다. 강원도 중도에도 청동기시대 마을과 무덤이 꽤 발굴되었으나,,,무슨 놀이 공원으로 꾸민다 만다 논란이 많다.

물론 발굴하는 사람들도 문제가 많은 것은 더 이야기 하지 않겠다.

 

 

도시와 그렇게 떨어진 곳에서 누가 갈까 싶기는 하지만, 유적과 유물을 그대로 살린 박물관은 너무 부러웠다....물론 우하량유적은 문제가 있었지만.

 

중국은 역사를 선사시대 것부터 정쟁화하고, 우리는 편식이 심하고, 역사를 돌보지 않는다.

 

장춘가는 기차안에서...

사진은 다음포스팅에서...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필자가 블로그를 시작한지도 어느 덧 2년 가까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렇게 누군가 많이 보지는 않지만

필자의 포스팅에 관심을 가지는 중학생도 있었고,

이미 성년이 된 사람도 있다. 고고학에 관심이 있어 하면서,..여러 가지 필자에게 물어본다.

답이 10일정도 늦어서 많이 미안했다... 네이버 블로그를 안하게 되면서 네이버에 접속조차 잘 안하게 되니 그랬다. 다시 한번 미안하고 그 분이 꼭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했으면 한다.

 

지금도 생소한 이 학문을

필자는 예전 포스팅에 적었지만 영화를 보고 알게되었다.

그 떨리던, 함몰되던 기분, 그 짜릿한 기분.

보자마자 내꺼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어린애의 생각은 진짜 비현실적인데..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러시아유학결심할 때랑 꼭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는 그 비현실적인 것이 내꺼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엄마 아빠도 공부잘하는 딸이기를 바랬지만, 내가 무엇할 것인가에 반대하지 않으셨다.

고고학과..재밌어보인다. 그런데 가면 꼭 제일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를 바라셨다..

내 전공을 두고 크게 다툰적이 없다.나는 늘 커서도 그 점에 감사해한다.

아마 내가 성실하기도 했고, 믿음도 주었을 것이다..꼭 먼가 하겠다 하면 했으니깐.

 

물론 한때 원하던 곳을 못가게 되어서 못 마땅해도 했지만,,,

그때 마침 아빠와 관계도 많이 않좋아서....그게 더 좋게 작용한 것이지

그 때만 해도 지금만큼 취업 운운하던 사회적 분위기도 아니었다.

 

요즘 학생들은 이명박박근혜정부의 교육부를 거친 학생들이다.

그때 특히 교육부는 취업안되는 과는 없애야 한다는 분위기였고

대학생이 되어도, 생각을 못하는 애들이 많다.

강의 중에 내어준 과제물 피드백을 했는데, 한 학생은 말도 안되게 나의 피드백에 반감을 비친다.. 자기가 최고인데, 니가 먼데 피드백을 하냐는 식의....

걔는 나보다 거의 20살이 어린 학생인데 생각하는 수준은.... 

그 애는 동화책 읽기부터 해야. 글짓기도 안된다.

그러나 그래도 내가 잘못했다고 우기고, 자기는 자기가 받은 피드백이 이해가 안된다고 한다.......

 

과제물은 한 장정도만 '자기생각'을 적어오라는 거였다.

난 과제물을 거창한 걸 내지 않고, 자신생각을 적는걸 좋아한다. 거창한 거 내봐야....그냥 결국 남의 연구 편집이 대부분이어서, 시간이 갈수록 필자는 도면 한장 주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걸 과제로 준다.

또 그런 과제 보고 탄복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도면 한 장을 보고도 여러 생각이 다르구나 하는...

정말 사람은 다 너무 나 다르구나.

학생에 대한 불평을 적기는 했지만,, 대부분 원만한 사람의 사람머리속은 비슷한데 다 다르다.

민주주의 그 자체다.

그래서 애들을 존중해주려고 하고 그들이 하는 얘기를 맞다고 하고 또 첨삭해준다.

그러나 위에 적은 학생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너무 머릿속에 남는다.스트레스 잘받는 필자에게 학생의 이런 피드백은.....

 

그 과제에 제시된 그림은 아래의 것이다.

아래 그림은 각 지역에서 토기가 발생되는 지역을 최근 자료로 표시한 것이다.

이것과 고든 차일드가 설명한 ‘신석기혁명(1951년)’이라는 개념과 비교해서 자신의 생각을 한 장에 적어오라는 거였다. 물론 한장 보다 많아도 된다. 

신석기혁명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개념이다. 그걸 처음 입에서 말한 사람이 고든차일드라는 고고학자이다.

토기발생지역비교(P.Jordan, M. Zvelebil 2010)

참고문헌

P.Jordan, M. Zvelebil. “Ex Oriente Lux: The Prehistory of Hunter-Gather Ceramic Dispersals.” Ceramic before farming: the dispersal of pottery among prehistoric Eurasian hunter-gathers. P.Jordan, M. Zvelebil ed. London: Publications of the Institute of Archaeology University College London, 2010. pp.31-89.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바이칼 유역의 키토이문화 이후의 문화로 알려진 문화이다. 주로 무덤유적이 알려져 있고, 앙가라 강에서 이 문화의 유적이 확인된다.

이사코보문화에서 확인된 유물은 바닥이 뾰족한 첨저토기로 망상문토기로 알려졌다.

러시아에서는 망상문(그물문)토기라고 하지만, 필자는 타날문이라고 본다(사진1,2).

 

타날문은 나무판자 같은 박자에 끈을 감아서 만든 도구를 토기표면에 두드려서 생긴 것이다.

사실은 토기제작기술과 관련되어 있지만, 문양으로도 보기도 한다.

 

사진 1. 이사코보문화의 토기

 

사진 2. 이사코보문화의 토기: 박자흔 표시

 

사진(1)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타날문을 남기게 한 박자의 흔적이 보인다.

사진(2)는 필자가 대략 그 모양을 표시한 것이다.

 

 

박자의 너비가 비슷한 걸로 봐서 아마도 하나의 박자를 사용했다.

토기의 구연부(입술부의)끝까지 박자로 두드렸다.

구멍은? 

박자로 두드린 후에 구멍을 뚫은 것이다.

박자를 두드린 이유는 토기를 좀 더 단단하게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구멍은 일종의 문양이다. 기능과는 관련 없는 개인 혹은 집단의 표식 같은 걸로 볼 수 있다.

 

다른 유적에서도 구멍문양이 확인되면 집단표상으로 이해될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개인적인 취향일 것이다. 이름하여...개취.

 

그에 대한 나의 입장은 잘 모르겠다이다.

왜냐하면 집단표상으로 볼 만큼 많이 토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집단표상 즉 문화특징으로 볼 수 있는 것 좀 더 확대해서 바이칼 유역 전체의 토기는 바닥이 뾰족한 토기이며, 타날문 혹은 망상문양이 지속적이다.

이 특징은 시베리아 신석기문화의 토기 특징으로 뒤에서 이야기 하게 될 알타이산맥과 천산산맥을 따라서 경계에 있는 몽골, 카자흐스탄 등에서도 나타나는데, 시베리아 신석기문화가 전해진 일종의 코드?로 파악하고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가르칠 때 줌앤아웃 기법?을 자주 사용한다. 토기하나를 요리저리 뜯어보고 학생들에게 물어보고 한다. 그러고 나면 그 문화에 어떤 토기를 사용했는지는 그냥 저절로 알아질 수 있게 하기 위한 나의 방법이다. 내 의도가 얼마나 먹힐 지는 또 다른 문제이지만....꽤먹힌다고 생각된다. 수업만 집중하면...문제는 집중하지 않는 애들....

필자가 강의하는 내용이 상당히 많고 넓은 지역이어서, 문화 하나만을 놓고 보면 별꺼 아니지만, 배운거 다 모아서 물어보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런걸 방지하려고 매우 자세하게 부터 그 자세하게를 모아서 넓은지역을 아우르는 공통점 까지를 설명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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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토이문화의 토기  (0) 2019.02.21
posted by 김재윤23

 

오늘 수업은 매우 힘들었다. 아침부터 세월호가 '의도적' 이라는 것 말고는 설명이 안된다는 갑자기 든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침몰도, 구출하지 않은 것도, 오늘의 막말도.

 

수업하다가 문득 한달 전 본 영화생각이 나서 애들한테 해줬다.

 

‘나는 부정한다’라는 영화이다.

주인공은 유대인이며 미국대학의 여성교수인데, 히틀러 학살을 연구하는 현대사전공자이다. 영화는 이 여성학자가 히틀러가 학살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늙은 학자와 벌이는 재판과정을 그렸다.

히틀러가 학살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세계2차대전이후 이제 70년을 넘었지만, 존재한다.

물론 우리가 일제 한테 당한 것을 정리못하고 흐릿해지는 것을 방관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명백하게 정리되고 세상이 다 아는 히틀러 학살이지만.

그래도 그런 말도 안되는 사건이 있고, 영화화 되는 것이다.

이 이야기도 해주고, 한번 볼 것을 권유했다. 취향에 따라서 재미없을 수도 있다고도 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그래서 역사는 교육되어야 한다.

다시는 그런 잘못이 인간세상에 없기 위해서.

 

곧 잊혀지고, 흐려진 기억에 의해서

혹은 의도된 계획에 의해 날조되어

마치 그것이 진실 인 것 처럼 떠돌아다닐것이기 때문에.

5년 밖에 지나지 않은 세월호도 이렇게 날조되어 가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세월호의 진위는 반드시 규명되어야 하고, 더 이상 늦기 전에 일제식민청산도 반드시 해야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얼마나 많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날조되었을까?

 

역사교육은 교육의 시작이자 끝이 되어야 한다.

................

 

김 재 윤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