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고고학은 역사학의 한 분야인데, 그 대상물이 사람이 적어 놓은 사료가 아닌

사람이 남겨놓은 유적과 유물이다.

 

아시다시피 사람은 글을 쓸 때 이성과 감정이 같이 있는 존재여서

절대로 남겨놓은 글에 감정이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가치관, 관점, 등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대통령의 어떤 정책을 당시에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어떠한 이유(당리, 당략, 개인의 이익 등등)로 반대하는 집단이 있을 수 있다. 그들이 남겨 좋은 보고서 등에는 안좋은 이야기만 잔뜩 적어 놓겠지..

반면에 그 정책을 준비하는 집단은 그걸 함으로써 큰 역사의 부흥에 도움이 되는가 되지않는가, 시민들에게 필요한가를 판단해서 만들 것이다. 그 또한 기록될 것이다.

 

누가 옳은가는 분명 당대의 시민들도 판단하겠지만, 나중에 역사가들은 전체 역사의 흐름에 도움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를 판단하며, 그 정책을 실행하기 전과 후를 비교하며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내릴 것이다.

 

그 때 나중에 역사가들이 판단할 때는 정책만든자와 정책반대자의 글을 모두 참고로 할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그들이 적어 놓은 보고서.....이다.

 

이 상황을 조선시대, 고려시대, 남북국시대, 삼국시대로 되돌려 놓아서 생각해 보면

역사의 흐름에 방해가 된 요소와 역사의 흐름을 좋은 방향으로 이끈 요소를 찾아 내는 것이 역사가가 할 일이다. 역사가는 이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음으로 당연히 남겨진 보고서...사료를 참고로 할 것이다.

당연히 남겨진 사료는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오래된 사료는 삼국사기이다. 고려시대에 쓰여진.......아이러니하게도......당연히 한쪽으로 치우친 자료이고, 초기기사는 부정하는 사람이 만만치 않다.

 

 

반면에 고고학은 옛날 사람이 살고 남겨놓은 흔적이다.

필자가 대학 다닐 90년대 중반만 해도 고고학의 연구범위는 구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였다. 왜냐하면 그 때만 해도 한국에는 지금만큼 발굴이 빈번하지 않아서, 삼국시대 이후 발굴되는 경우가 많치 않았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오면서 발굴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발굴을 하는 회사들이 생기게 되었다.(이말은 이때 건설경기가 굉장히 좋았다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지금도 거의 용역발굴이어서, 건축물이나 국가기관 산업물이 생기기 전에 땅에 대한 조사를 하다가 문화재가 발견되면 조사를 시작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런 분위기가 계속 되니, 발굴자료가 삼국시대 이후 자료가 차곡차곡 쌓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고고학의 연구범위는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이다.

필자는 물론 선사시대 특히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가 전공이지만,,

고고학에서 또 다른 블루오션은 고려시대 자료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시대도 유물이 많지만,,아직 남들이 많이 하지 않지만...유물은 앞으로도 많이 나올 것이고,

연구가 많이 필요한 시대. 후배들한테도 많이 권해주는데....아직은 그쪽 분야는 무주공산이다.  

 

고고학이 역사학 만큼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가 교과서 때문이다.

첫페이지를 열면, 유적만 쫙 열거되어 있다.

그리고 간단한 설명.

사실 필자는 영화보다가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교과서 보면 진짜 재미없어 보이는 부분이 삼국시대 이전 내용이다.

 

왜 재미가 없을까?

그건 인간이 없어서다.

인간은 없고, 유물과 유적만 나열해서이다.

 

이거에 대한 나의 해법은?

 

민족의 형성에 관한부분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필자는 그 부분은 국경중심으로 설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선사시대에는 국경이 없었다. 자연환경에 따라서 인간의 생활권이 있었다.

이 부분이 반드시 교과서에 들어가야 되고,,,,, storytelling으로 이어져야 한다.

 

고고학과 역사학을 비교하다가 딴 소리를 적었다.

그러나 고고학은 사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보다는 어떤 면에서는 좀 더 객관적이다.

그리고 남겨놓은 사람의 감정은 들어가지 않는다.

 

나중에 만약에, 지구에서 핵을 누가 터트려서 사람들이 한동안 우주로 피신해서..지구에서 안살다가,,,,

우주에서 와서 다시 여기에 누가 뭐하고 살았는지 들여다본다는 가정을 해 본다면.

그 도자기 쪼가리를 보고 할 수 있는 생각은 무엇일까?

만약에 그 때 종이에 적힌 글을 보고 그들은 무엇을 알아낼까?

위의 예는 매우 극단적이지만.

현재상황에서 역사의 가장 극단적 단절을 예를 든거다.전혀 과거에 대한 information이 부재한 경우를.

(매우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앞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옛날에 금관가야사람들이 잘먹고 잘 살았지만, 김부식이 삼국사기라는 역사책으로  지 마음대로 그 때 상황을 적어서 후대들이 그렇게 믿고 지낼 지는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모르는 것 처럼. 그 상황이 또 벌어지지 않을까?ㅋ 물론 아주 멀 수도 있고,,,후쿠시마를 보면 그렇지 않을 듯도 하고....알 수 없다.)

 

이때 우주에서 온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감정이 뒤섞여 있는 사료보다는 남겨진 토기 쪼가리를 모아서 그 때 상황을 유추해 보는게 훨씬 객관적이라고 생각한다.

또 아이러니 하지만 그 상황이 적힌 글이 있다면 그 논리는 더 먹힐 것이다.

그래서 고고학은 남겨진 것 발굴만 해서도 될일은 아니다. 그걸로 복원을 해야 한다. 과거를.

(중국이 떵떵거리며 소리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역사 때문 아니겠는가. 물론 왜곡하고 또 왜곡하지만. 유목민이 그 화려한 문화를 두고도 찌그러진 이유는. 글자로 남겨진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또 현대'국가' 때문이라고도 생각한다)

빨리 북한이랑 통교되었으면 좋겠다 진심.

 

먼 소리를 썼나 싶은데..z

고고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이 검색해서 들어오는 것 같아서

그들을 위해서 포스팅 한 장 적다가 갑자기 교과서로....

나도 언젠가는 교과서 한페이지 내 마음대로 적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갈망하며

또 한편 적어야 겠다.....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중국에서는 신강의 청동기시대 이전을 「석기시대」라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이 지역의 세석기문화는 중국 세석기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감숙성과 녕하 지역의 신석기문화는 토기가 상당히 발달한 문화인데, 만약 신강지역의 세석기가 그 지역에서 기원했다면, 그 지역 토기양상이 신강지역에서 파악되지 않는 점은 그들 연구의 모순이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자국중심의 연구관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지역에서 세석기가 늦게까지 존재한다는 이유로 단순히 석기시대개념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스티- 나림 유적에서는 160,000여점의 골각기와 석기가 출토되었다. 이를 「석기시대」로 단순화 할 수 있을까? 중국 신강성과 같은 문화권을 이룬 카자흐스탄, 몽골, 시베리아 학계에서는 신석기시대 개념을 사용한다. 즉 이 지역은 4500년 전부터 석기양상이나 유사한 것으로 파악되나 국가 별로로 연구되면서 시대개념에 차이가 있다. 문화권별로 연구되었다면 좀 더 적합한 개념에 접근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가 동아시아 신석기시대의 개념을 토기사용이 빈번하지 않는 중앙아시아와 비교하면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한국 및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신석기시대는 토기 등장을 기준으로 한다. 신석기시대는 러복(J.Lubbok)(1865)이 작물재배, 동물길들이기, 토기발명을 시대개념으로 규정하고, 이를 고든 차일드(V. Gordon Childe)는 농경을 기본으로 한 ‘신석기혁명’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시베리아 및 극동의 신석기시대를 조사한 오클라드니코프는 고든 차일드의 신석기혁명이라는 개념이 동아시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최근 전통적인 신석기시대 개념을 반박하는 주장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토기의 발생시기는 후기 구석기시대이고 동아시아에서부터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자료로서 13000년 이상 올라가는 유적이 있는 곳은 아무르강 하류, 일본, 중국(그림15)등이고, 17000년 전 홀로세 이전부터 동아시아유적에서 출토된 예도 있다. 기원지는 새로운 발굴로 바뀔 수 있지만, 신석기시대의 기준이 된 홀로세(전신세)이후에 토기가 발명된 것이 아니라 이미 플라이스토세의 사냥채집민(후기구석기인)들에 의한 것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토기가 모든 지역에서 균일한 시점에 발생되지 않았으며, 신석기시대 개념의 기준이 된 유럽 및 근동 보다 오히려 동아시아에서 빨리 토기가 발명되었다는 점이다(그림15).

 

그림15. 토기발생지역비교(P.Jordan, M. Zvelebil 2010재인용)(김재윤 2019)

 

 따라서 토기등장을 기준으로 한 신석기시대 개념은 유럽, 근동, 중앙아시아 등과도 다른 동아시아 특유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카자흐스탄 동부, 중국신강, 몽골의 4500년 전 지역은 토기 발생 혹은 토기사용을 근거로 한 동아시아의 신석기시대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중국 신강지역이 동북아시아와는 다른 선사문화권임을 증명한다.

우스티-나림유적에서 보이는 유물의 양상은 토기사용이 그렇게 빈번하지 않았거나 토기를 대신하는 다른 저장도구 혹은 조리도구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선사시대 연구에서 토기는 시대 및 시기구분, 지역성 등 모든 연구의 기준이 되고 있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이 점이 통하지 않고, 오히려 석기양상이 이 지역의 특징을 대변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본고의 연구대상 시대 이후에는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도 주요한 유적의 성격은 무덤이라는 점에서 의례중심의 사회이다. 또한 동아시아보다 일찍 금속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청동기시대 카라숙문화에서 본격적으로 청동검이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세 번에 걸쳐 제국을 형성하지만 근대 중국의 대포에 의해서 제국이 굴복되었다는 점은 곧 무기로 인해서 사회가 변화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조합식석인검과 조합식검은 이 사회를 대변하는 유물 중에 하나는 무기로 볼 수 있다. 이후의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스키타이 문화권 등으로 이어지는 문화에서 청동검이 등장하기 이전에 특징적인 유물로서 유목사회의 연속성이 무기에서도 관찰된다고 볼 수 있다.

조합식석인검과 조합식석검의 분포범위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연구된 바가 없다. 시베리아의 세로보문화 및 글라스코보문화에서 확인되는 조합식검은 가장 동쪽 분포범위가 요서지역의 소하연문화까지 확인된다(김재윤 2018b). 이 문화의 조합식검도 양면떼기 한 석기를 끼워 넣었다.

 

 따라서 중국 신강의 석기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는 4500년 전께 동아시아보다는 검의 형태를 갖춘 유물이 일찍 확인되고, 석기와 골각기가 주된 유물이며, 토기가 주요하게 사용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 개념과 맞지 않고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중국 내의 문화보다는 오히려 인접한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유라시아 초원사회의 개념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김재윤(2019)에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홍산문화의 무덤을 필자는 6가지로 구분한다.(앞선 표에서는 숫자로 했으나, 여러생각 끝에 형식명칭을 바꾸었다. 1->가, 2->나, 3->다, 3`->다`, 4->라, 5->마, 6->바).

 

그림.우하량 유적의 무덤형식(김재윤 2019)

 

매장주체부

석관묘의 벽석

석관없음

묘역

형식

그림번호

지상

지하 토광(깊이)

여러 매

한매

토광묘

있음

없음

여러 단

한 단

가로

비스듬

수직

비스듬

 

 

 

 

 

 

 

 

 

1

 

 

 

 

 

 

 

 

 

2,3,4

 

 

 

 

 

 

 

 

 

5,6

 

 

 

 

 

 

 

 

 

7

 

 

 

 

 

 

 

 

 

8

 

 

 

 

 

 

 

9

 

 

 

 

 

 

 

10

표의 그림번호는 그림번호와 일치한다.

 

그 기준은 매장주체부(시신을 안치하는 곳)이 지상인가, 지하인가부터 시작한다

지상(그림1), 지하(그림2~10)를 살피는 경우는 선사시대에는 거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다 지하에 있으니깐.

그러나 우하량 유적에서는 딱 1곳(그림1)이 있다. 그래서 구분한다.

생각해보면, 매장주체부를 지하에 둘 것인거, 지상에 둘 것인가는 엄청난 차이이다.

 

엄청난 차이?

 

1. 축조방법의 차이

무덤의 구조와 관련되어 있고, 드는 비용도 어마하게 차이가 났을 것이다.

필자는 왜 이런무덤이 한 곳만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어쨌든 매장주체부를 지상에 두는 것과 지하에 두는 것은 차이가 크다. 그래서 당연히 둘은 구분되어야 하고, 무덤의 구조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1번 기준이다.

중국의 저명한 고고학자인 곽대순은 이를 무시하고 ‘중심대묘’라는 거창한 이름하에 그림 1,2,3,5를 모두 같은 형식(카테고리)안에 묶었다. 이런건 바로 까야 한다.

 

2. 묘광의 단수

매장주체부가 지하로 들어가 있는 건 공통이지만, 한단파는것과 여러 단 파는 것은 당연히 차이가 크다. 역시 노동력과 드는 비용이다.(나는 그런식으로 생각하며, 이런 구분 기준을 마련한다.)

주로 나형식으로 구분된 무덤이 여러 단 판 것이다. 곽대순은 중심대묘라 부르는 것은 그림 3과 같이 양단을 판 것과, 그림 4번과 같이 한쪽 만 판 것을 계단식묘라 하여 구분했다. 그러나 나는 같은 카테고리로 보았다. 그림 2는 한쪽만 깊이 팠지만, 곽대순은 중심대묘라고 부르는걸 보아서 본인도 구분 기준이 모호하다.

필자가 그림 3과 그림 2,4를 같이 묶는 이유는 드는비용과 노동력이 한 단파는 것 보단 많이 들지만, 구체적으로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까지 설명이 안되기 때문이다. 즉 구분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대로 잘라서 설명하면 모든 유물과 유구는 그냥 다 다르다고 결론이 난다. 그러면 모든 유물과 유물은 그냥 인간생긴대로 다 다르다는 결론은 좋은 유추법이 아니다.

 

3. 석관의 벽석

무덤을 만들 때 토광을 파고 그 다음은 석관을 넣는다.

석관도 납작한 돌을 쓰는 경우와 덩어리돌을 쓰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경우는 우하량 유적에서는 보이는 대로 구분은 되지만, 그 구분의 의미가 모호했다. 가령 그림1은 덩어리 돌을 사용했지만, 그림 2, 3과 4는 납작한 돌과 덩어리돌을 섞어서 썼다. 만약에 납작한 돌을 가령 좀 더 노동력이 더 투여된 무덤에서 주로 쓴다면 그림1~4번에 집중해서 썼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별꺼 없어보이는 그림 8과 같은 무덤에도 납작한 돌은 쓰인다. 또 이차장(뼈만 추려서 넣은 경우)무덤인 그림 7에도 납작한 돌은 사용된다. 그럼 덩어리 돌이 납작한 돌 보다 노동력이 더 투입되는 무덤에서 주로 쓰이는가?도 살펴보았으나, 답은 없었다.

그래서 이 유적에서는 납작한돌과 덩어리돌은 그렇게 좋은 구분의 기준은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벽석의 구분에는 여러 매를 쓰는 경우와 한 매를 쓰는 경우로 나누었다.

 

4. 석관묘없음

당연히 석관묘 없는 것은 따로 구분되어야 한다. 노동력과 석관제작에 드는 비용이 현저하게 적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 유적에서 무덤의 형식이 계급을 의미한다고 단정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이 토광묘 때문이다. 토광묘에서도 옥기가 출토되며, 사구통형기라고 했던 그 유물도 출토되기 때문이다. 만약 곽대순이 주장한바 대로 우하량유적에 묻힌 사람들이 홍산문화의 제사장무덤으로서 계급대로 묻혔다면, 토광묘에는 옥기가 없어야 한다. 반대로 석관묘에는 대부분 옥기가 있어야 하지만, 다 형식의 경우는 옥기가 없는 무덤이 허다하다. 가장 큰 그림 1에는 옥기가 하나도 없다.

 

5. 묘역

무덤의 가장자리를 묘역이라고 한다. 이것도 노동력과 축조비용이 듬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묘역도 단순한 석관묘와 토광묘에서 확인된다.

 

6. 일차장과 이차장

만약에 모든 무덤이 신체크기와 비슷한 크기였다면, 이 부분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적에는 이차장 무덤이 몇 기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이 부분도 고려되어야 함으로, 일차장과 이차장도 나눌 수 있다. 크기는 작지만 대부분 석관묘이다. 구체적으로 다형식으로 보이는 석관묘이다. 그래서 다`라고 명명했다. 일차장과 이차장이 아니라면 거의 무덤구조는 같다고 보기 때문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미래의 인디아나존스를 위해서.. > 고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oo하층문화와 oo상층문화  (0) 2019.09.04
고고학이란?  (0) 2019.08.14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의 무덤  (0) 2019.07.28
신석기혁명과 과제  (0) 2019.06.04
오늘 수업...  (0) 2019.04.16
posted by 김재윤23

1. 무덤의 가짓수

 

환단고기 역주본에서는 ‘사구통형기’라 불리는 옥기를 신과 소통을 위한 도구로 설명된다고 앞서서 포스팅한 바 있다.

이런 주장은 곽대순이라는 중국학자가 먼저 이야기했다.

먼저 포스팅에서는 유적에서 18개나 출토되는데, 신과 소통을 위한 도구가 그렇게 많은지 의심한 내용이다.

 

2018/02/04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요서지역 흥륭와 문화의 옥기 및 토기와 한반도비교] - 환단고기비판: 관(crown)인가?

 

환단고기비판: 관(crown)인가?

그림 1. 홍산문화의 사구통형(斜口筒形)옥기: 입구가 비스듬한 옥기 2012년 환단고기에서는 홍산문화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옥기에 주목하고 있다. 옥기에 관한 해석은 중국은 지극히 민족주의적 시각에 의해서 이..

eastsearoad.tistory.com

 

곽대순은 사구통형기 혹은 고(箍)라고 불리는 옥기는 구운형옥패, 동물형옥기와 함께 홍산문화를 대표하는 옥기라고 주장한 바 있다. 모두 중심대묘(곽대순의 주장에서 가장 급이 높은 무덤)에서 출토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필자는 이를 살피기 위해서 우하량유적의 옥기를 각 무덤 별로 조사했다.

가령 1호라는 무덤이 있으면, 무덤의 생긴형태+옥기의 종류+양을 살피는 것이다.

즉 A라고 생긴 무덤의 기준을 정하고, 이렇게 생긴 무덤에서 출토되는 옥기가 어떤 것인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 결과가 아래의 표1이다.

이 표를 바탕으로 필자가 파악한 우하량유적의 무덤을 설명할 예정이다.

 

표1. 우하량 유적의 무덤형식과 옥기의 상관관계(김재윤 2019)

사실 이 작업은 우하량유적을 해석할 때 최초로 했어야 할 작업이다. 곽대순은 우하량유적의 ‘계급’을 이야기 했기 때문이다. ‘우하량유적은 홍산문화 제사장의 무덤이며, 4등급으로 나누어진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

앞선 포스팅 참고

2019/03/06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환단고기와 고고학] - 우하량 유적의 1지점을 왜 여신묘라고 주장했을까?

 

물론 곽대순은 우하량 유적의 유물을 4등급으로 나누었지만, 그 기준이 모호하다.

(이에 대해서는 자세히 포스팅을 할 예정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무덤 그림이 필요하다.)

 

그래서 필자는 석관의 제작방법에 따라서 6가지 형식으로 구분했고, 표의 가장 마지막 칸을 설명할 수 있다. 석관을 파기 위한 토광의 단수, 석재의 가로쌓기와 세로쌓기, 묘역, 일차장과 이차장 여부 등이 그 기준이 된다.

먼저, 6개의 형식은 곽대순이 의미한 등급이라고 단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덤 짓는데 품이 많이 들게 생긴 무덤 안에는 옥기가 부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아이러니 같은 무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형식’은 설명을 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만든 표2이다.

표1을 만들기 전에 표 2부터 했고, 표2를 바탕으로 표1을 만들었다.

 

 

표2. 우하량유적의 무덤형식(가짓수)(김재윤 2019)

 

재미는 없으시겠지만,, 필자가 가장 잘하는 것 중에 하나가 표만들기이다. 유적별로 표만들고, 그런 표를 집합해서 필자는 지도를 위에 점을 그리고, 그걸 시대별로 정리해서...결국 또 표를 만든다. 오늘 포스팅은 그림없이, 표만 넣었는데, 쓰고 보니 역시 재미가 없다. 표는 그림과 세트가 되어야 하나보다.

그러나 오늘은 문장 한 구절을 쓰기 위해서 내가 하는 세밀한 작업을 보여드리고 싶은 날이었나 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미래의 인디아나존스를 위해서.. > 고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고학이란?  (0) 2019.08.14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의 무덤 2  (0) 2019.07.31
신석기혁명과 과제  (0) 2019.06.04
오늘 수업...  (0) 2019.04.16
러시아과학아카데미?  (0) 2019.03.27
posted by 김재윤23

앞서 살핀 지역에서 신석기시대의 시작연대는 각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표1). 그런데 중국 신강성과 인접한 지역에서 공통적인 문화양상을 보이는 시점은 4500년 전부터이다(그림12).

 

표1. 각 지역의 신석기문화(현재까지 알려진 이 지역의 신석기문화)

중국 신강 3유형과 몽골 1단계는 5500년 전 께 해당되는데, 원통형 및 원추형 석인석핵이 출토된다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내용이 빈약하며, 각 지역에서 뒤를 잇고 있는 신강 4유형, 몽골 2단계의 유물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5500년 전께는 뚜렷한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신강 4유형이 되면 카자흐스탄 동부의 우스티-나림 문화와 몽골의 신석기시대 2단계는 아주 유사한 유물조합을 보인다(그림12). 원통형(그림12-2,5)과 원뿔형 석인석핵(그림11-1,4), 석핵형 긁개(그림12-3,13)는 이들 지역에서 모두 확인된다.

시묘노프는 원통형과 원뿔형 석인석핵은 규조암을 눌러떼기 방법으로 석인을 잘라내는 가운데 생기는 것으로 구석기시대에는 부정형이다가 신석기시대가 되면서 고착되는 것으로 보았다Семенов С.А. 1968). 끝이 둥글게 처리된 긁개는 석인기법을 이용한 석기로서 신강의 4유형(그림12-11,12)과 우스티-나림(그림12-10) 문화, 몽골 2단계(그림12-13), 3단계에서 동일하게 확인된다. 그 외에 석도는 세 지역에서 확인되는데, 인부가 직인으로 ‘ㄱ자 형 석도(그림12-16,18,22) 및 반타원형에 가까운 석도(그림12-15,19)가 우스티-나림과 신강 4유형, 몽골 3단계에서 확인된다. 마연된 어망추(그림 11-23,24)와 장타원형의 석인 제작도구(그림12-25,28)는 우스티-나림문화과 신강 4유형에서 같은 형태의 것이 각 지역에 출토되었다. 우스티-나림문화와 몽골에서는 유사한 타제 석부(그림12-29,30)가 확인되며, 몽골과 신강에서는 마제 공이(그림12-40,42)도 출토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는 모두 켈테미나르문화의 흔적이 확인된다. 석인 가운데 한쪽변만 잔손질해서 다른 쪽 보다 길게 처리한 뚜르개(그림12-33)는 우스티-나림문화(그림12-36), 신강, 몽골(그림12-41) 모두에서 확인된다. 또한 켈테미나르문화의 석촉(그림12-33)도 신강 4유형(그림12-36)에서 보인다. 평면형태 사다리꼴인 켈테미나르문화와 유사한 형식의 마제석부가 신강(그림12-40), 몽골(그림12-42)에서 출토되었다.

한편 바이칼 유역의 석기는 타제석창(그림12-45)과 유경식 석촉(그림12-46,47)이 신강 유역(그림12-43,44)에서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우스티-나림문화에서는 시베리아에서 가져온 석재로 제작된 석인석핵 및 골각기 가운데 낚시바늘, 납작한 석기, 조합식검이 시베리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Ошибкина С.В.(ред)., 1996,)

또한 몽골에서는 바이칼 유역의 토기 및 조합식검이 바로 북쪽에 위치한 바이칼 지역에서 영향을 받았다(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

따라서 카자흐스탄 동부~신강~몽골은 석기양상으로 보아서 한 문화권을 이룬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시점은 4500년 전 부터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몽골, 카자흐스탄 동부, 신강 지역에서 좀 더 이른 시기의 유적이 확인된다면 그 시기는 더 빠를 수도 있다. 또한 이 지역은 바이칼 유역 및 카자흐스탄 동부보다 서쪽인 켈테미나르문화와의 관련성도 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림12).

그림12. 4500년 전 카자흐스탄 동부~신강~몽골 및 관련된 지역의 석기양상

필자가 이 지역을 고고문화보다 좀 더 큰 의미인 문화권으로 설정한 것은 주거양상 및 토기 때문이다. 토기가 많지는 않지만, 지역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우스티-나림문화에서는 시베리아 신석기토기와 인접한 켈테미나르문화의 토기가 확인된다(Ошибкина С.В.(ред)., 1996). 신강 지역은 시베리아 토기에 대한 언급은 없고 채색토기가 출토되며(伊第利斯·阿不都热苏勒,1993), 몽골 3단계에도 채색토기(그림7-54~58), 시베리아 토기(그림7-59~65)가 있다. 만약 신강 4유형에 망상문 토기, 첨저토기 등 시베리아토기가 확인되었다면 몽골 3단계와 이 지역이 켈테미나르문화의 영향을 받은 카자흐스탄 동부에 비해서는 더 유사한 지역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주거양상은 카자흐스탄의 켈테미나르문화(그림4) 및 우스티-나림문화가 텐트형주거식(Ошибкина С.В.(ред)., 1996)인 것에 비해서 주거지가 확인된 몽골은 수혈식(그림7-5)이다. 즉 석기양상은 같은 문화권으로 보이지만, 주거양상이나 토기양상에서는 신강지역과 몽골이 더 관련성이 깊다.

 

참고문헌

Семенов С.А. 1968, Развитие техники в каменном веке.(Ленинград:НАУКА, 1968). pp. 46~51.

Ошибкина С.В.(ред)., 1996, Неолит Северной Евразии, Москва, НАУКАIbid. pp.130.

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осква:НАУКА, pp. 70~73.

Ошибкина С.В.(ред)., 1996, Неолит Северной Евразии, Москва, НАУКА Ibid. pp.130.

伊第利斯·阿不都热苏勒,1993, 「新疆地区细石器遗存」.『新疆文物』, 4期, pp.15~59.,宋亦箫, 2010, 「新疆石器时代考古文化探論」, 『西部考古』, 第4輯,pp.4~9.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바이칼 유역의 신석기시대는 대체로 7000 년 전~6000년 전(Мамонова Н.Н., Сулержицкий Л.Д. 1986)의 키토이 문화부터, 5200~4700년 전(Горюнова О.И., 2002) 이사코보 문화, 5000~4500년 전(김재윤, 2018a) 세로보 문화로 변화된다. 각각 문화의 토기와 석기양상(그림 9)에 차이가 있지만, 연속적으로 확인되는 유물은 골제와 석제를 결합해서 제작한 조합식검(그림 10,11)이다.

 

그림9 . 바이칼유역의 신석기문화 유물(김재윤 2018b 재편집)(키토이문화의 유물(1:키토이 무덤 비트코프스키 1호, 2~7,14:키토이 무덤 비트코브스키 발굴 6호, 15, 22: 치클로드롬 1950년 10호;                                                                                                                                 이사코보문화의 유물(16: 포노모레보 11호, 17·18: 포노마레보 10호, 19: 포노마레보 12호, 29: 포노마레보 8호);                                                세로보문화의 유물(24~27: 포노마레보 7호, 28: 세레드키노 1호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중국 신강성에서 확인되는 석촉과 석창 가운데 세로보 문화와 관련성이 있는 유물도 보인다(그림12). 또한 몽골이나 카자흐스탄에서 확인되는 시베리아의 망상문 혹은 격자문이 남아 있는 토기는 키토이문화, 이사코보문화, 세로보 문화에서 모두 확인된다(김재윤, 2018b).

세로보 문화는 앞선 문화에 비해선 토기가 좀 더 많이 확인된다. 동체부가 둥글고, 구연부로 올라갈수록 축약되었다가 다시 외반되며, 저부는 원저이다. 파수가 수직으로 구연부와 저부 부근에 달리는 것도 있다. 토기 기면에는 타날문 혹은 그물흔적을 지우고 정면을 해서 매끈하게 처리하였다. 문양에도 다치구를 이용해서 눌러서 시문한 것(그림9-22), 침선문(그림9-21), 구순각목문(그림9-20) 등이 있다. 그 중 침선문 토기는 구연부가 외반하면서 횡주어골문이 시문되었다.

석창은 전면이 타제로 제작된 것이다. 좌우 대칭이며, 세장한 능형이나 삼각형의 형태를 띠고, 횡단면은 대체로 렌즈 모양이다(그림9-28). 인부는 가장자리에 형성되었는데, 잔손질되었다. 창의 용도 뿐만 아니라 칼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석촉은 경부의 모양에 따라서 오목하게 들어가 홈을 이루거나, 다른 하나는 일단경식(그림9-24,25)으로 구분된다. 이사코보 문화에 비해서 슴베가 있는 것이 양이 좀 더 많으며, 석촉의 무게가 크고 무겁다.

세로보문화는 시묘노보, 세로보 유적에서 연대측정 되었는데 대략 5000~4700 년 전에 존재했다(김재윤, 2018a).

조합식 검은 키토이문화(그림 10-1~8), 이사코보문화(그림10-9~16), 세로보문화(그림11)에서 모두 확인된다. 키토이문화의 조합식검은 양면을 떼어낸 석기를 골제와 조합된 조합식검(그림10-1~8)도 출토된다. 이사코보문화에서는 조합식검(그림10-9~12,16)뿐만 아니라 구부러진 뼈를 이용한 조합식도(그림10-13~15)도 확인되되는데, 앞선 키토이문화에서는 볼 수 없었다.

그림 10. 키토이문화와 이사코보문화의 조합식검(키토이문화(1~4: 라스푸티노 5,6: 우스티-벨라야 69-4호, 7·8: 치클로드롬 48-3호 ;                     이사코보문화(9: 브랏스키ㅣ 카멘, 10·12·15: 포노마레보 10호, 11: 샤먼 ,13: 샤먼 3, 14: 베르홀렌스크, 16: 베르홀렌스크 30-4호)(김재윤 2019)

 

참고문헌

 

Мамонова Н.Н., Сулержицкий Л.Д. 1986, “Возраст некоторых неолитических и ненеолитических погребений Прибайкалья по радиоуглеродным данным”,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и этнографические исследования в Восточной Сибири(итоги и перспективы), pp. 19-30.

Горюнова О.И., 2002, Древние погребения могильник Прибайкалья, Иркутск: Издательство Иркут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еного университета. pp.14.

김재윤, 2018a, 「요서지역 소하연문화의 재검토」, 『한국상고사학보』, 99호, pp.34~35.

김재윤, 2018b, 「제2장 신석기시대」, 『북방고고학개론』,(재)중앙문화재연구원, pp.62~88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앞서서 중국 신강성의 4500년 전 석기시대문화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중국 신강성과 바로 인접한 카자흐스탄의 동부지역과 그에 인접한 문화를 살펴보았다.

2019/07/03 - [교과서 밖의 역사:유라시아선사시대/신석기시대] -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의 신석기문화비교1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의 신석기문화비교1

필자가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로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인접한 카자흐스탄과 몽골의 신석기시대와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강성의 천산산맥은 동서방향 보다는 약간 틀어져서 비스듬하게 흐르..

eastsearoad.tistory.com

2019/07/07 - [교과서 밖의 역사:유라시아선사시대/신석기시대] -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 신석기문화비교2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 신석기문화비교2

앞서서 환단고기역주본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중국신강성의 신석기문화에 대해서 설명한바 있다. (앞선 포스팅 참고) 2017/12/20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환국과 신강고고학 자료] - 환국과 신강 환..

eastsearoad.tistory.com

2019/07/12 - [교과서 밖의 역사:유라시아선사시대/신석기시대] - 카자흐스탄 동부의 신석기문화

 

카자흐스탄 동부의 신석기문화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문화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인접한 지역의 자료를 비교하고 있다. 우선 살핀 것은 바로 인접했지는 않았지만, 오늘 살펴볼 카자흐스탄 동부지역과 바로 인접한 지역의 문화를 설명했다...

eastsearoad.tistory.com

 

 

중국신강성의 오른쪽은 몽골과도 접하고 있다.

 

몽골은 지리적으로 바이칼 유역과 가까워 이 지역의 신석기문화와 관련성이 많다(Окладников А.П., 1964,.)

몽골의 신석기시대는 대체로 2~3단계로 구분되는데, 1단계는 기원전 4천년기(6000~5000년 전), 2단계는 기원전 3천년기(5000~4000년 전), 3단계를 기원전 2천년기(4000~3000년 전)로 구분하는 의견(도르지)과 2단계의 문화가 순동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계속된다는 의견(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으로 구분된다.

1단계는 석기제작소와 주거지가 확인된 쏠론케르 쏘몬 유적이 있다. 원추형의 석인석핵(그림7-2,3), 석핵형 긁개(그림7-1), 조합식검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첨저의 토기도 확인되었다.

2단계는 탐차그-불락유적은 주거유적(그림7-5~9)으로 원뿔형태의 석인석핵(그림7-15), 뚜르개(그림7-26,27), 긁개, 한쪽변만 잔손질 된 세석인석기(그림7-20), 조합식석인검 (그림7-25)등이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골각제인 화살촉과 송곳니로 제작된 장신구 등도 주거지 바닥에서 여러 점이 함께 출토되었다. 주거지 바닥에서는 무덤 4기(그림7-6~7)가 확인되었는데, 피장자가 앉은 자세로 다리를 묶은 채로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 유적을 기준으로 탐차그-불락 문화가 설정되었다. 듀나-2 유적에서도 유사한 유물양상이 확인되었다. 타제석도(그림7-34,36), 타제석부(그림7-37), 마제석부(그림7-38)등이 있다.

3단계는 사라바크-우스 유적의 상층이 대표적인데, 탐차그-불락문화의 유물과 거의 유사하다. 이 유적은 두 층위로 나눠지는데, 아래층은 원추형(그림7-40~42)과 원통형 석인석핵, 뚜르개, 끝이 둥글게 처리된 긁개(그림7-43~45), ㄱ자형으로 처리된 타제석도(그림7-52)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기하학적인 무늬가 침선된 그물문양(그림7-59, 50), 압인(그림7-63~65) 등이 확인되었다. 당시 아래층은 바이칼 유역의 이사코보문화(5000~4700B.P.)와 비교되어서(Окладников А.П., 1964), 2단계에 해당한다.

그림7 . 몽골의 신석기문화유물((1~4: 쏠론케르 쏘몬, 5~9,15~20,23, 25~30: 탐차크-불락유적 ,11,12,21,24,31,33,34,37~39: 듀나-II, 40~52: 사바라크-우수, 53~62: 투그르인-쉬레트, 63~65: 케룰렌강) (노보고르도바 1989 재편집)

상층에서는 석기는 하층과 유사한 바이칼 유역의 토기 뿐만 아니라 채색토기(그림7-54~58)가 확인되면서 3단계로 보았다. 뚜그르기인-쉬레트 유적에서도 비슷한 석기양상(그림7-53)과 채색토기가 확인되었다.

그런데 2,3 단계 유물은 3단계의 채색토기를 제외하고는 석기 및 토기양상이 거의 유사하다(그림7-54~58). 뚜그르기인-쉬레트 유적에서 채색토기가 출토되면서 사바라크-우스 유적의 상층과 같은 3단계로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쉬레트 지역의 듀나-II유적의 출토품이 우스티-나림유적과 비슷하다고 연구되었다(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김재윤 2019).

그림8 . 바이칼유역과 몽골의 신석기시대 유적 위치(1: 브랏스키 카멘, 2: 라스푸티노, 3:세로보유적, 4: 베르홀렌스크, 5: 포노마레보, 6: 키토이, 7: 치콜로드롬, 8 뚜그레인-쉬레트, 9: 사바라크-우수, 10: 듀나-II, 11: 쏠로케르-소몬, 12: 탐차크-불락유적(김재윤 2019)

 

 

 

 

참고문헌

Окладников А.П., 1964, Первоытная Монглия-К впросы древнейшеи история Монголя, УБ. pp.39-40

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осква:НАУКА, pp.63.

Окладников А.П., 1964, Первоытная Монглия-К впросы древнейшеи история Монголя, УБ.

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осква:НАУКА, pp.60.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필자는 여간해서는 낮에 자지 않는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거의 혼자 있는 이 공간에서도 필자는 내 나름의 규칙이 있다.

재미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머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을 뿐이다.

 

지난주월요일에 답사,,,해외출장을 다녀오고 밤비행기타고 아침에 왔는데, (뱅기타는날은 천산산맥 중에 한 곳으로 해발 3000m 올라갔다왔다.)

부산오자마자 점심먹고 샤워하고 학교갔다. 줄줄이 소세지 같은 원고촉박타령때문에

그 뒤 거의 이틀을 꼬박 12시까지 일하고 나서...

그 뒤 부터는 체력이 못버티는지 토요일밤에는 10시간을 자고, 어제는 낮잠도 잤다.

 

며칠간 일본불매운동이 아주 들불처럼 번지고 있었지만,

난 댓글하나 달 시간도 없었다.

나도 고고학자이고, 고고학자가 역사학자이니,,한 마디 해야하긴 하는데...하며

소심하게 인스타에 표식을 걸었다.

 

항일감정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데,

그건 아마 오래동안 잠재된 일본에 대한 항일감정 때문일 것이다.

역사문제이다.

 

 

역사는 모든 사람의 것이기에 누구나 이야기 할 수 있다.

나의 하루하루가, 너의 하루하루가 모여서 역사가 되는게 아닌가.

나는 진짜 한반도의 울타리를 찾고 싶다.

중국의 민족주의 논리에 따른 환단고기역주본 같은 그런 거 말고.

 

나는 환단고기 원본에 대해서 한번도 언급한적 없다.

왜냐하면 환단고기의 실체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환단고기(한문본)는 불행하게도 일본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것이다.아다시피.

그 부분부터 섞연치 않다. 이유립, 1979년, 광오해이사,

그리고 가지모노보루라는 일인이 일본어로 역주했고 화제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한국어로 역주된 환단고기는 1985년 김은수가 처음으로 역주했고, 1986년 임승국의 역주본은 크게 유행했다. 그러나 임승국은 가지마노보루가 일역한 것을 한국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어쩌면 환단고기는 우리에게 아직 전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문화범위가 지금 국경과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각종 유적에서 나오는 유물은 한반도의 유적과 같은 성격의 것이 많기 때문이다.

국경은 생겨난지 얼마 되지 않는다. 선사시대 문화권이 지금의 국경과 다른 것은 환단고기를 거명하지 않더라도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선사시대문화권은 국경을 넘어선 ‘문화권’을 파악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것의 초점은 토기이다. 고고학에서 문화권을 설정하는 것은 비슷한 생활권을 구분하는 일인데, 그 생활의 가장 밑바탕에는 토기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북한에서도 한국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일본에서도 문화권의 구분은 토기의 구분에서부터 시작된다.

 

필자가 생각하는 한국고고학에서 기원 혹은 기원지 찾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역에 대한 별다른 고민없이 현대의 국경을 기본인식으 해서, 기원지로 여겨지는 지역을 외부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문화단위별로 연구되지 않는 한국고고학의 특성상 양 지역에 보이는 어떤 특정문화요소만을 비교하게 되면 맹목적인 기원지 찾기의 단순성이 야기된다.

그래서 필자는 원류나 계보 문제를 다루기 이전에 최소한 현재의 행정구역을 벗어난 선사인의 생활권역으로서 문화권의 구분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김재윤 2017, 11페이지)

 

김재윤 2017, 『접경의 아이덴티티: 동해와 신석기문화』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본고는 디야코바(Ольга Васильевна Дьякова) 박사가 작성한 글(О. В. Дьяква 2009)이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백두대간의 연장선상에 있는 시호테알린(Сихотэ-Алиня) 산맥의 영동(嶺東)지역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청동기시대부터 발해, 여진시대까지 존재한 56기의 성 유적을 소개하고, 고대의 해안로와 뱃길(수로)이 있던 교통로로서의 역할이 제시되었다.

청동기시대 성은 리도프카 문화의 토벽만 남은 것이 대부분이며, 기원전 1천년기 후반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매우 간단한 시설이며, 크기, 형태, 성벽의 축조방법이 각양각색이고 자연입지를 그대로 살려서 축조되었다. 마을을 방어하고 교통로의 가능성을 디야코바 박사는 상정하고 있다.

 

청동기시대 외의 45기 유적은 말갈문화 및 발해, 동하국 시기의 것으로 보고 있다. 유적은 입지에 따라서 산지성, 평지성, 곶 성으로 크게 분류하고 유적의 특징에 따라서 유적을 유형화해서 각 성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특히 발해의 유적 가운데 석성이 있는데, 시미리코프 클류치(Шмырков Ключ) 성, 자볼로첸나야(Заболоченная) 성, 클류치(Ключ), 바시코프스코예(Васьосвске), 세셀렙스코예(Сеселевское) 성, 야슈(Яшу)성 등 5기를 고구려 기술로 축조된 것으로 소개되었다. 특히 직접 디야코바 박사가 조사한 시미리코프 클류치 성, 자볼레첸나야 성, 클류치 성에는 산 정상부까지 비탈길을 따라서 꼬불꼬불한 길이 나 있고, 산의 정상부에 납작한 돌로 성벽을 들여 쌓은 는 점 등이 고구려 전통의 축성기술일 가능성이 있다고 강조되었다.

 

 하지만 유적의 시기 및 위치와 관련해서 복잡한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고구려 축성기술로 제작되었다는 성은 이 책에서 소개된 특징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문제인지도 해결되어야 한다. 해제에서 언급했듯이 연해주에는 고구려 성이 확인된 적이 없다. 그러나 연해주와 인접한 목단강 유역에서 발해시기의 고구려 전통의 산성 유적이 소개된 적은 있지만, 간략해서 쉽게 비교하기 어렵다. 반면에 동하국(1215~1234)으로 비정된 성은 과연 그때 지어진 것인지도 좀 더 꼼꼼한 조사가 필요하다. 동하국은 20여년간 존재한 국가인데, 쿠날레이스코예 성과 같은 거대한 성이 이 국가에서 처음 축조된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성의 초축연대를 알 기 위해서는 처음 축조된 구지표, 성벽의 기저부를 조사해야 만 알 수 있으나, 동하국으로 비정된 성 유적에서는 이에 대한 아쉬운 점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발해유적이 확인된다면 영역문제와도 관련이 있는데, 이는 그간 러시아 학자들이 생각한 발해의 영역문제와도 차이가 있다.

 

 

그러나 연해주의 동북지역 동해안가 성 유적을 통해서 발해, 여진시대는 물론 보 다 더 오래된 기원전 일천년기 중반 청동기시대부터 해안가를 따라서 인간의 이동 흔적인 교통로로 볼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연구성과이다. 뿐 만 아니라 연해주의 동북 해안가에서 발해성 및 고구려 축성기술로 지어진 석성의 존재가 러시아의 대표적인 말갈 및 발해 연구자를 통해서 발표되었다는 점에서 한국학계에 살펴보고, 비판하고 인지 할 필요가 있다.

 

 

지은이: 올가 바실레브나 디야코바(Ольга Васильевна Дьякова, Olga Vasilievna Dyakova)

1949년 알타이 주에서 태어났다. 1972년 노보시베리스크 대학의 고고학민속학 전공으로 졸업했고, 1980년에 『Раннесредневековая керамика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 СССР как исторический источник (IV-X вв.)(소련 극동의 4-10세기 중세시대 토기연구)』로 역사학박사, 1990년에는 『 Происхождение, формирование и развитие средневековых культур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 СССР (по материалам керамического производства)(소련 극동의 중세시대의 기원, 형성, 발달)』로 국가박사를 취득했다. 1972년부터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분소 고고역사민속학 연구소에서 근무했고, 1994년부터 동 연구소에서 아무르 고고연구소를 직접 운영했으며, 현재까지도 왕성하게 연구하고 있다.

 

역자: 김재윤 옮김.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문화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인접한 지역의 자료를 비교하고 있다. 우선 살핀 것은 바로 인접했지는 않았지만, 오늘 살펴볼 카자흐스탄 동부지역과 바로 인접한 지역의 문화를 설명했다. 이 지역은 천산산맥에서 발원한 아무다리야강의 하류로 아랄해 부근에 위치한 문화였다. 중국 신강성과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이 문화에서 조합식석인검과 조합식검이 출토된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만하다.

 

2019/07/07 - [교과서 밖의 역사:유라시아선사시대/신석기시대] -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 신석기문화비교2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 신석기문화비교2

앞서서 환단고기역주본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중국신강성의 신석기문화에 대해서 설명한바 있다. (앞선 포스팅 참고) 2017/12/20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환국과 신강고고학 자료] - 환국과 신강 환..

eastsearoad.tistory.com

 

 

오늘은 중국 신강성과 천산산맥을 두고 바로 인접한 카자흐스탄 동부의 우스티-나림문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카자흐스탄 동부의 신석기문화는 우스티-나림 유적을 지표로 한 문화에서는 석기 및 골각기가 60,000여점이 출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토기도 출토되지만 완형이 확인되지 않아서 토기 전모는 알 수 없다. 다만 토기는 기벽이 얇고, 문양은 남아 있는데, 망상문, 어골문, 격자문 등으로 시베리아 바이칼 유역 및 켈테미나르문화의 신석기토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스티-나림 유적에서는 규조암으로 제작된 원통형 석인석핵(그림6-4), 원추형 석인석핵(그림6-3), 베개형으로 양쪽에서 때어낸 석인석핵(그림6-6), 긁개형 석인석핵(그림6-1,5,9) 등 다양한 석핵석기와 석인박편으로 제작된 세석인석기(그림6-7,8)가 가장 많다. 그 중 세석인은 양 가장자리를 잔손질 한 것이 많은 양을 차지한다.

다양한 긁개류가 많이 확인되었는데, 양 가장자리가 타원형으로 들어가며 잔손질 된 것(그림6-14) 뿐만 아니라 끝부분만 부채꼴 모양으로 잔손질 된 것(그림6-10) 등도 확인되었다. 세석인석기를 이용한 유물 가운데, 끝을 뾰족하게 잔손질하고, 긴 장단의 한쪽면만 잔손질한 석촉과 긴 변의 한쪽만 잔손질 한 뚜르개(그림6-24,25)와 긁개(그림6-14)가 출토된다. 양면을 잔손질해서 떼어낸 타제 석도(그림6-15~17,21)도 있다. 평면형태는 장방형(그림6-21)과, ‘ㄱ자형으로 굽어지게 잔손질된 것(그림6-16,17), 타원형(그림6-15) 등이다. 그 외 타제석부(그림6-26,27) 등도 출토되었다. 마연된 석기로는 석제 어망추(그림6-13) 및 장타원형의 도구(그림6-12)가 있다. 어망추는 평면형태가 육면체에 가깝고 중앙에 홈을 낸 형태이다. 이 유적에서는 대량의 골각기가 출토되었고, 그 중 많은 양이 낚시바늘이 라고 보고되었다. 장타원형도구는 석기제작시에 사용된 누르는 도구로 알려졌다.

그림6. 카자흐스탄 동부의 우스티-나림 유적출토품(Коробкова Г.Ф. 1996b 재편집)(김재윤 2019)

 

 이 문화의 연대는 신석기 문화 가운데서도 가장 늦은 시기의 것으로 하한은 기원전 2000년 기 전반에 해당된다. 그런데 상한연대는 이 유적에서 켈테미나르문화의 토기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서 켈테미나르문화의 늦은 시기인 기원전 3000년 기 후반에는 시작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카자흐스탄 동부에서 이 보다 이른 신석기시대 유적은 아직 확인된 바가 없다.

카자흐스탄 아랄해 주변의 북부에 위치한 켈테미나르문화에서 확인되는 화살촉과 뚜르개(그림6-24,25)가 확인되는데, 우스티-나림 문화에서도 확인되어서 켈테미나르문화가 카자흐스탄의 동부지역까지 그 영향이 확대되었다. 석인석핵 가운데서는 알타이에서 채취된 원료로 제작된 것도 있고, 양쪽면을 떼어낸 석핵석기, 가장자리가 타원형으로 들어간 긁개, 조합식검, 낚시바늘 및 각종 골각기 등도 시베리아의 문화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