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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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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알타이의 투바공화국에는 직경 80m가량의 대형 무덤인 아르잔-2호가 발굴되었다. 무덤은 2700년 전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인데, 스키타이 문화도 지역의 범위와 시간대가 매우 넓어서 지역과 시간에 따라서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아르잔-2호 보다 먼저 발굴된 아르잔-1호를 묶어서 우육문화라고 한다. 이 지역이 위치한 곳이 해발 1050m의 우육고원이고, 이곳에 흐르는 강 이름도 우육이다.

 

아르잔-2호는 무덤 1기가 아니다. 무덤을 애워 싼 호석(무덤의 경계를 돌린 돌벽)안에는 26기의 무덤방이 있는데, 그 중에서 5호 무덤은 주인공 남녀의 무덤이다.

무덤방은 나무를 짜서 만든 2중의 무덤방이다. 외부의 무덤방을 1차(3.68 × 3.41m)라고 부르고 내부의 무덤방을 2차(2.58 × 2.42 m)이라고 하자. (물론 반대로 외부를 2차로 명명할 수도 있지만 발굴할 때 먼저 발견된 것이 빠른 숫자를 붙이는게 좋다. 안에 몇 개가 있는지 모르는게 아닌가? 이는 층위발굴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가장 위의 층이 1층이 되는 게 안 헤깔린다. 나중에 고치다가 얼마나 많은 오류가 생길지 모른다. 바깥의 것을 1차라고 하는 것이 헤깔림 방지차원에서 좋다).

 

 

내부의 2차 무덤방 바닥에는 12개의 통나무를 사용했는데, 가장자리는 큰 통나무를 이용했고 안쪽의 10개는 상대적으로 직경이 작은 통나무를 이용했다. 2차 무덤방의 벽은 바닥통나무를 제외하고 4개의 통나무를 쌓아 올렸다. 쌓아 올린 통나무를 해체하고 유물을 수습하고 난 가장 바닥모습이 그림 1이다.

 

 

 

 

그림 1. 아르잔-2호의 무덤방 5호의 바닥면. 동쪽의 통나무 안쪽면이 반대편에 비해서 곧지 않다. 끌같은 도구로 조심스럽게 긁어냈다. 그림3에서 확인.

 

그런데 그림 1에서 바닥면의 시작이자 벽면의 시작이 되는 2차 무덤방의 동쪽 통나무 안쪽면에 반대면과 달리 곧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답은 그림 2에 있다.

 

아르잔-2호의 무덤방 5호의 2차 무덤방은 통나무관 없이 관의 역할을 한다. 관 바닥에는 유물이 빼곡하게 들어가 있었는데, 동쪽벽에는 고리트(화살통)과 투부(전투용도끼)가 놓여 있다. 그것을 놓을 공간확보를 위해서 무덤방 벽을 휘어지게 잘라내었을 가능성(그림 3)이 있다.

 

 

 

그림 2. 아르잔-2호의 무덤방 5호, 주인공 남녀와 출토 유물, 번호는 표의 번호와 일치한다.

 

 

 

 

그림 3. 아르잔 –2호 무덤방 5호의 2차 통나무의 가장 아래면. 모서리에서부터 끌과 같은 것으로 다듬어서 잘라냈다.

 

그림 2에서 유물 외에도 재밌는 공간이 숨어 있다.

 

 

 

 

그림 4. 아르잔-2호 무덤방 5호의 바닥 구멍 중 1개.

 

이 구멍은 무덤벽을 지지하기 위해서 수직으로 나무기둥을 세우기 위해서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발굴당시에는 없어진 상태였다고 한다.

 

2차무덤방 안에는 40~45세의 남성(1호인골)과 30~35세의 여성(2호 인골)이 묻혔는데, 특히 여성인골은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출토된 유물의 목록은 아래 표와 같다. 표는 참고문헌에는 없었고, 필자가 정리한 것인데, 좀 더 자세한 것도 공개할 것이다.(별꺼 아니라고 생각하실수도 있으나 외국어는 늘 스트레스다. 한국어도 스트레스고, 외국어는 더 스트레스다. 맨날 보는 러시아어도 어느날은 도통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별꺼 아닌게 아니라고 돌려서 말씀드리는 중이다..ㅋㅋ 특히 러시아인들은 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남성(1호)

출토위치

유물

재료

 

1

모자장식

금, 아말감

 

2

모자장식

금, 아말감

 

3

모자장식

금박, 아말감

 

4

모자장식

 

5

목걸이

 

6

귀걸이

황금, 터키석

 

7

호랑이장식

 

8

비드(구슬)

 

9

부츠

 

10

펜던트

(금박, 에나멜)

 

11

구슬

(납, 황금, 목제, 터키석, 호박

 

12

(황금이 입힌 철제)

 

13

고리모양 손잡이가 달린 철제, 금이 감입되어 있음

 

14

고리모양 손잡이가 달린 철제, 금이 감입되어 있음

 

15

고리모양 손잡이, 금

 

16

검집의 손잡이장식

황금

 

17

검의 손잡이장식

황금

 

18

검초 옆의 장식

황금

 

19

검초 끝의 장식

황금

 

20

시금석

방해석과 금박

 

21

원뿔모양 끈 매듭장식

 

22

시금석 끝에 다는 클립

황금

 

23

시금석 끝에 다는 구슬

황금

 

24

거울

청동 및 금, 에말, 가죽

 

25

고리트

황금과 나무

 

26

고리트장식

황금

 

27

고리트장식

황금

 

28

고리트장식

황금

 

29

고리트장식

나무, 금박

 

30

고리트장식

 

31

고리트장식

금과 은을 상감, 뼈, 청동, 철

 

32

고리트장식

 

33

고리트장식

철제와 나무, 황금과 은으로 부분사용됨

 

34

고리트장식

 

35

고리트장식

 

36

고리트장식

 

37

고리트장식

 

38

고리트장식

 

39

고리트장식

 

40

고리트장식

 

41

고리트장식

 

42

고리트장식

 

43

고리트장식

 

44

고리트장식

 

45

양모양장식이 붙은 막대기

여성(2호)

46

모자장식

 

47

모자장식

 

48

모자장식

 

49

모자장식

 

50

모자장식

 

51

모자장식

 

52

모자장식

 

53

사슴모양모자장식

 

54

귀걸이

(황금, 터키석, 아말감

 

55

귀걸이

(황금, 터키석, 아말감

 

56

구슬류

터키석, 호박, 금박

 

57

옷에 달렸던 구슬류

금, 호석, 터키석,황철광, 유리조각

 

58

옷 장식

 

59

원추형 장식

 

60

펜던트

 

61

팔찌

 

62

링 모양 클립

 

63

금, 철제

 

64

철제

 

65

송곳과 막대

청동

 

66

검의 부속품

 

67

검의 부속품

 

68

검의 부속품

 

69

검의 부속품

 

70

주머니에 달린 구슬

금박,호박, 터키석, 유리조각

 

71

모형 솥

 

72

주머니

가죽

 

73

구슬

 

74

신발에 붙은 장식

금, 아말금

 

75

목걸이

금. 목제

 

76

클립

 

77

거울

청동, 금,

 

78

구슬장식

호박

 

79

가슴장식

 

80

가슴장식

금과 아말감

 

81

손잡이 붙은 그릇

청동

 

82

그릇

석제

 

83

그릇

석제

 

84

프리즘모양의 장식

목제

 

85

장신구

금박,호박, 터키석, 유리조각

 

86

덮개

목제

 

87

덮개

목제

 

88

그릇

목제, 손잡이는 금박으로 장식

 

89

납작한 형상물

금박,호박, 터키석, 유리조각

 

90

사다리꼴 판

금박

 

91

원추모양

 

92

목걸이

목제와 금박

 

93

원추모양

금박

표1. 아르잔-2호 무덤방5호출토 유물, 김재윤작성

 

참고문헌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의 2500년 전 무덤인 파지릭 유적은 1929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발굴은 1947년부터 이다. 하지만 발굴은 1850년에 아직 로마노프 왕조일 때 ‘제국고고학위원회’를 만들어서 흑해북쪽의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1929년은 러시아혁명 후로 레닌이 죽고 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고, 스탈린이 집권했던 시점이다. 스탈린 집권기간 동안에 파지릭 유적은 발굴되었다. 스탈린은 사람을 아주 많이 죽인 지도자이다. 레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했던 권력을 잡은 수단은 등 뒤에서 칼을 꼽는 것이다. 인간백정이라는 평가도 있다. 2차대전 당시 독일과 싸워서 이겼지만, 자국민이 너무 많이 죽어서 그게 이긴 것일까 하는 평가도 나온다.

 그럼에도 러시아인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러시아인 3인중에 한명이다(2008년 필자가 유학당시, 러시아 국영tv 방송인 ‘러시아(РОССИЯ)’에서 했던 조사였는데, 아침마다 위대한 러시아의 위대함을 알리는 역사적 유적과 인물을 꼽아서 보여주었다. 아침마다 보면서 처음에는 거북했지만, 나중에는 그러려니...하고 되는 걸 경험했다. 아직도 스탈린이라니..이러면서. 복잡한 감정이었다.) 독일과 싸워서 이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열리는 전승기념일은 2차대전 종전일이 아니라 독일과 승전일인 5월 9일이다. 스탈린은 현대한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이 부분이야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일 테니...(우리나라에서 알려진 소련 혹은 러시아에 대한 인물의 이미지는 전부 미국언론을 통해서 알려져서, 미국입장에서 알려진 이미지이다. 실제 그 나라 감정과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필자는 스탈린 집권기에 알타이의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이상한 감정이 문득 든다.

 

2500년 전 유적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현대사로 넘어 갔는데, 다시 돌아와서 1929년에 그랴즈노프가 발굴한 유적은 이미 도굴당해서 주인공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하지만 말 10마리에 대한 정보는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 있고 필자가 공개했다.

 

2020/04/2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1호분] -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서는 한 가족 혹은 친족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이 확인된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과 그 안에는 관을 두고, 무덤방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었다..

eastsearoad.tistory.com

 

그런데 스키타이  문화의 유물은 늘 앞에 붙는 수식어가 ‘황금’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하지만 필자가 보여드린 유물은 거의 대부분 나무장식이었다. 그렇다면 황금은 어디에?

드문드문 말씀드렸지만 금박은 쉽게 찢어져서 벗겨진채로 많이 발견된다. 특히 1호분에는 금박이 많이 발견되었던지, 그 부분에 대해서 벗겨진 금박종이가 많다는 내용도 별도로 적어 놓았다.

여러분의 의심을 약간이나마 덜어드리기 위해서 4호분에서 가장 금박이 많이 남은 유물을 보여드리고자 한다. 유물은 말의 얼굴에 달렸던 굴레장식이다. 파지릭유적의 1호분에서 4번째 말의 굴레장식이라고 분류된 말이다. 비교적 많은 금박이 남아 있다(그림 1). (알타이에도 황금덩어리로 만든 유물이 출토되는 유적이 있다. 앞으로 소개할 예정임...)

 

 

그림1. 파지릭 유적 1호에서 출토된 말의 굴레

 

굴레장식에 관통하는 가죽줄은 뺨으로 돌아가는 부분은 가죽띠 2줄이고, 코로 돌아가는 부분에도 굴레장식이 부착되었다. 굴레장식은 산양머리와 팔메트 문양이다. 산양머리에는 가죽뿔이 붙어 있다. (그런데 가죽뿔이 빠진 왼쪽(우리가 볼때)의 굴레장식은 필자가 보기에는 새모양으로도 보인다.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나 싶기도 하다.)

 뺨으로 돌아가는 굴레는 2줄로 재갈멈치로 연결된다. 재갈멈치는 끝 부분에만 동물문양이 붙어 있는 유물과는 달리 재갈멈치가 통째로 산양을 표현했다. 앞다리는 몸 아래로 당기고, 뒷다리는 뒤로 뻗어서 몸을 수평으로 표현해서 산양은 뛰는 모습인지, 나는 모습인지를 표현했다. 재갈멈치가 대체로 막대기모양인데, 이 부분에 동물을 통째로 표현한다고 산양의 무릎을 꿇은 모양으로 표현하면, 다시 말해서 산양 몸을 수평으로 만들지 않으면 기능적인 부분이 약해지기 때문에 모양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세의 굽동물의 표현은 사슴돌에 이미 있다. 있지만 그것을 재갈멈치에 사용하는 것은 다른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유물의 이마장식은 물방울 모양을 표현했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발굴된 무덤은 대부분 인간과 말이 함께 매장되었고 이를 일컬어 파지릭문화라고 한다. 파지릭문화는 스키타이문화의 지역적 명칭인데, 엄밀하게 학문적으로 이야기 하면 스키토-시베리아 문화라고 한다. 스키타이문화가 처음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말(아직 로마노프 왕조가 있을 때) 부터 흑해북안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이후(로마노프 왕조 멸망 후) 시베리아를 발굴하면서 시베리아에도 스키타이 문화가 있었고,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이 시베리아 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명칭도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 혹은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공동체 등 여러 명칭이 있다.

그러나 필자가 계속해서 스키타이 문화라고 한 것은 러시아어가 워낙 생경해서 쉽게 알리기 위해서이다. 짧고 간결하고 한눈에 알 수 있는 그런 것을 좋아한다.

 

스키타이 문화의 기원을 시베리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 아르잔 1유적을 발굴하면서다. 1971~1974년에 발굴된 유적인데, 나이테연대측정법으로 기원전 9세기 중반으로 밝혀졌다. 이 유적의 크기와 규모도 대단해서 세간의 관심을 많이 받았으나, 특히 몸을 말고 있는 호랑이 장식은 특히 세간의 눈길을 끌었다. 왜냐하면, 에르미타주에 소장되어 있는 황금의 동물문양장식과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림 1). 이 유물은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이름이 들어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가가린은 소련 아니 인류 역사상 처음 우주로 간 사람의 성도 가가린이다)이 1716년에 표트르  1세에게 보낸 유물로 알려졌다. 그는 시베리아의 토볼스크 라는 지역에서 근무했다. 그곳 농부에게서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림 1. 에르미타주 소장 황금 표범 혹은 호랑이 장식. 10.9×8.9cm

 

아르잔 1 유적의 몸을 말고 있는 호랑이 장식은 직경이 25cm가량이고, 말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청동으로 만든 호랑이 장식은 에르미타주 유물에 비해서 2배나 크다. 에르미타주 소장품은 허리 버클에 붙었던 장식이고, 아르잔 유물은 말의 가슴에 착장했던 것이다. 말과 마구와 함께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두 유물은 차이가 있다. 크기와 재질, 용도에서도 차이가 있지만 만드는 표현 기법에도 차이가 있다. 청동제 호랑이는 더 크기 때문에 좀 더 세밀한 표현을 할 수 있었다. 이빨과 입술, 발이 세밀하게 표현되었다. 눈,코,입이 과장된 것은 두 점의 공통점이다. 반면에 꼬리는 황금 유물이 좀 더 현실적이다. 황금 유물의 앞발과 뒷발, 꼬리 등의 빈 공간은 보석류를 상감한 것이다. 현재 보여지는 뒷 판은 상감 후 땜질로 마감했다고 한다. 또한 큰 차이점 중에 하나는 청동제 유물은 대체로 얼굴이나 몸통이 편평하지만, 황금제 유물은 불룩하게 솟아 있고, 특히 얼굴과 앞 다리, 엉덩이의 근육을 표현해서 매우 볼륨감 있는 느낌이다.

 

 

그림 2. 아르잔 1 출토 청동제 말 가슴 장식

 

아르잔 유적의 가장 중간에 주인공이 묻힌 방 바로 옆에 2번 무덤방(그림 3)은 말이 30마리 들어 있는 무덤이다. 이 무덤방은 8×7.5m이고 높이는 0.9m이다. 말 무덤의 크기가 이 정도이다. 전체 무덤의 크기는 직경이 120m이고, 높이는 3~4m이다. 무덤 전체에 사용된 통나무는 6000개가 넘는다.

무덤에서 시신을 안치하는 곳을 ‘매장주체부’라고 하는데, 이 유적은 매장주체부가 지하가 아닌 지상에 설치되었다. 다시말하면 무덤구덩이를 파지 않았다. 무덤방이 70개 정도 있었는데, 같은 봉분(무덤을 불룩하게 덮은 흙) 아래에 있었다.

 

 

그림 3. 아르잔 1 유적의 무덤방 2번, 말 무덤. 말 30마리

 

 

많은 사람의 희생으로 남겨진 화려한 무덤이다..누군가의 희생으로 알아가야 하는...장례식은 산 자의 잔치이다.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50,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는 얼음공주라고 별명이 붙은 아크 알라하 3유적과는 달리 말무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정보를 공유했다.

말은 9마리가 들어가 있었으며, 5벌은 마구와 말을 치장하는 굴레장식 등이 완벽하게 치장되어 있었지고, 2벌은 말 옆에 놓인 것으로 알려졌다.

말을 장식하는 굴레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된 것이 그리핀이었다.

그리핀은 상상의 동물이다. 두 마리 이상의 동물이 한 형상으로 합체된 것이다.

 

그림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출토

 

그림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출토

 

아크 알라하 1 유적에서 출토된 말을 장식하던 그리핀(그림 1,2)은 특징이 독수리 부리모양의 부리, 머리 정수리를 장식하는 상투, 목을 따라서 표현된 갈기이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과 가장 유사한 것은 루덴코가 발굴한 투엑타 1호분(그림3, 그림 4-5)에서 출토되었다. 얼굴과 갈기모양 등이 유사하다. 특히 그림 3-5,6 그림 4-5유물은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출토된 그리핀과 같이 입체적으로 설계된 것이다. 목의 하단에는  날개부분에 착장할 수 있게 자루가 만들어졌다. 날개는 따로 제작되었다. 

 

그림3. 투엑타 1호분의 그리핀 장식.

 

그림4. 투엑타 1호분의 그리핀 장식. 5번 유물이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과 유사하다. 4번은 재갈멈치이다.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은 폴로시막이 아크 알라하 1유적을 단행본으로 엮으면서 낸 책의 제목이다. 계속 저의 포스팅을 주시한 분은 아실 것이다. 필자가 해석을 해 놓았음으로..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의 이야기는 헤로도투스가 역사에서 4권 27장에서 언급한 내용이다. 폴로시막은 이 구절을 책의 제목으로 낸 것이다.

 

‘잇세도네스족 북쪽에 외눈박이 부족과 황금을 지키는 그륍스(그리핀)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잇세도네스족 자신들이며, 이것을 스키타이족이 잇세도네스족에게 듣고 우리에게 전했고, 우리는 또 스키타이족에게서 그것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13장에는 아리스테아스의 서사시를 인용해서 잇세도네스족 너머에 외눈박이 아리마스포이족 너머에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아리스테아스의 이야기와 스키타이족의 이야기가 다르다고 헤로도투스는 전한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잇세도네스 족은 대머리부족의 동쪽 땅에 사는 사람들이고, 대머리부족은 여러 스키타이 족 가운데서 가장 동쪽의 고산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다. 잇세도네스 족의 제사지내는 관습도 26장에 전해지는데, 헤로도투스는 스키타이족의 제사지내는 관습과 비슷하게 묘사했다.

 

고고학자료에서 나타나는 그리핀의 기원은 근동이라고 불리는 서아시아지역, 그리스, 스키타이 기원설이 있다. 스키타이 유형의 그리핀 머리는 짐승 귀가 붙은 맹금류인데, 특히 독수리머리와 비슷하게 형상화되었다는 것이 식별되었다(포그레보바 1948).

그러나 초원지역의 스키타이문화에서 출토된 그리핀은 즈로 산양과 독수리의 결합이 많은데, 산양머리와 부리는 독수리로, 스키타이문화의 초기부터 나타나는 형태이고, 동그리스와 페르시아에서 나타나는 그리핀은 독수리와 사자의 결합으로 기원전 6세기 말에서 기원전 5세기가 되어야 나타난다고 지적되었다(시크루코 1982).

 

즉 그리핀의 기원은 스키타이문화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스키타이문화의 그리핀은 독수리머리에 짐승의 귀가 붙고, 몸통은 표범 혹은 호랑이인 경우가 많다.

 

 

참고문헌

바르코바 1987 Баркова Л.Л. 1987 : Образ орлиноголового грифона в искусстве древнего Алтая (по материалам Больших Алтайских курганов). // АСГЭ. [Вып.] 28. Л.: 1987. С. 5-29. (바르코바, 1987, 알타이 고대 예술에서 독수리형 그리핀의 모양에 대해서: 알타이의 대형 무덤출토품을 중심으로)

루덴코 1960,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포그레보바 1948, Н.Н. Погребова 1948, Грифон в искусстве Северного Причерноморья в эпоху архаики. // КСИИМК. Вып. XXII. 1948. С. 62-65.(고대 흑해북안의 그리핀연구)

시쿠르코 1982, А.И. Шкурко, 1982, Фантастические существа в искусстве лесостепной Скифии.// Археологические исследования на юге Восточной Европы. Ч. 2. / Тр.ГИМ. Вып. 54. М.: 1982.(초원 스키타이의 예술에서 상상의 주제(동물)에 대해서)

역사 (헤로도토스)(천병희 역), 2009, 숲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 산의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 출토된 네모꼴 나무방패를 살펴보다가 우리는 ‘솔로하’라고 하는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빗에도 비슷한 유물이 새겨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유물이 소장된 곳은 표트르 1세라고 불리는, 러시아 사람들은 표트르 대제라고 하는 러시아 차르의 겨울궁전인 에르미타주(Эрмитаж, Hermitage ‘에르미타시’라고 쓰는게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데, 필자가 계속 에르미타주라고 하는 이유는 그 이름이 이미 한국에 잘 알려졌기 때문이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대로 번역하면 ‘표트르 대제 시베리아 수집품(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Великого, the Siberian collection of the Peter the Great )’ 이다. 현재 총 240점이 전해진다.

 

그는 1689년부터 재위했는데, 러시아 영토가 된 모든 곳의 민족 고대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1715년에 시베리아 총독이었던 가가린은 표트르에게 시베리아에서 수집한 황금 유물 10점을 바쳤다. 표트르는 이 유물의 중요성을 바로 알았고, 비슷한 유물을 수집하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1718년의 날짜가 적힌 포고령에는 시베리아의 유물을 수집하고 출토품을 모으라고 강요했다. 특별포고령에 의해서 고대 유물을 숨기거나 녹이는 것을 매우 금지시켰다. 17세기 말경부터는 도굴로 엄청난 양의 황금유물이 황금을 얻기 위해서 녹여졌기 때문에 이를 금지시킨 것이다.

 

1715년~1718년에 시베리아에서 가가린이 수집한 금제품 240개가 보내졌다. 가가린은 농민들로부터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농민들은 고분을 도굴해서 그에게 팔았다. 쿠르간이라고 불리는 봉분이 있는 무덤은 쉽게 눈에 띈다. 그리고 도굴되었다.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가 죽은 후 1727년에 이 수집품들은 러시아의 첫 번째 국립박물관인 쿤스트카메라(Кунсткамера, Kunstkamera)(그림1)에 기증되어 전시되었다. 그 뒤에 1859년에 제국 고고학 위원회에서 에르미타주 박물관으로 이송시켜 보관했다.

 

그림 1.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유물이 처음 보관된 쿤스트카메라, 1741년의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과학아카데미 건물이었던 쿤스트카메라의 모습을 동판화에 새겨서 찍은 것이다. 현재 에르미타주에 보관되어 있다. Christian-Alber Wortmann작품. 47cm, 62.6cm

쿤스트카메라는 처음에는 매우 작게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매우 커졌다. 1714년에는 수백마리 물고기, 새, 뱀이 항아리에 보존되었고, 1698년부터 해부학에 관심을 가져서 기괴한 해부학 작품도 많다. 1716년에는 인도에서 가져온 동물 등이 보관되었고, 1717년에는 동물 해부학표본, 식물과 나비 박제 등도 구입해서 전시했다. 식물동물표본 뿐만 아니라 각종 기계와 도구도 모았다. 쿤스트카메라는 에르미타주와 매우 가까운데, 한번 가보시길 바란다. 필자가 들렀을때는 한국관도 있었는데, 주로 민속품 등이 전시되었다.

 

시베리아 콜렉션이라는 명칭은 19세기 후반의 스피친이라는 고고학자가 표트르 1세의 유품들을 정리했는데, 그 때 시베리아에서 온 골동품이 담긴 소포, 여러 편지와 목록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스피친이 이 유물들을 시베리아 콜렉션이라고 했고, 표트르 대제의 이름을 함께 붙여서 그를 기념했다.

 

쿤스트카메라에 유물이 있는 동안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인 흑해북안의 쿠르간 발굴유물도 함께 보관되었는데, 표트르 1세가 수집한 유물과 함께 에르미타주에 보관되었다. 그래서 에르미타주에 시베리아 유물 뿐만 아니라 흑해 북안 고분의 유물도 함께 있게 되었다.

 

표트르 1세가 남긴 편지 등에서 알아낸 것은 시베리아 수집품의 출토지역은 가가린이 총독으로 있던 토볼스크와 톰스크 외에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에 발굴품을 토대로 시베리아 콜렉션은 오비강, 이르티스 강, 알타이의 서쪽 지대와 현재 카자흐스탄 북부(시베리아 남부)라는 주장이 강한데, 이에 대한 반론도 크다고 한다.

 

어쨌든 시베리아 콜렉션을 두고 이견이 없는 것은 스키타이 문화권 혹은 스키타이 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것은 동물문양장식이라는 점이다.

 

 

그림 2. 1730년대에 그려진 황금유물수채화, 에르미타주 소장.

 

그림 3. 1730년대에 그려진 황금유물수채화, 에르미타주 소장.

 

그림 4. 1730년대에 그려진 황금유물수채화, 에르미타주 소장.

 

그림 5. 1730년대에 그려진 황금유물수채화, 에르미타주 소장.

 

그림 6.1730년대에 그려진 황금유물수채화, 에르미타주 소장.

그림 7.1730년대에 그려진 황금유물수채화, 에르미타주 소장.

 

그림 8. 1730년대에 그려진 황금유물수채화, 에르미타주 소장.

 

참고문헌

알렉세예프 2012,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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