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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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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단계-전문적인 연구 단계가 시작된 시점이다.


1953년부터 고고학자인 오클라드니코프 아. 페(1908~1981)(그림 11)가 극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극동고고학 발굴대가 편성되고,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의 학문적인 연구가 체계적으로 시작될 때이다. 그는 문서국에 보관된 모든 자료들을 자세하게 분석하였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마아카와 베뉴코프의 탐험으로 찾은 유적들, 파랄라디 신부의 발견, 부세와 크로포트킨의 유적 연구, 표드로프의 발굴, 아르세네프의 업적, 시테른베르그와 쉬로크고로프의 고고학 유적 등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이 알려주는 정보 등도 유용하였다. 이러한 모든 연구들의 총체가 1959년 『Далекое прошлое Приморья(연해주의 지난 먼 과거)』가 출간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인용되는 책이다. 특히 이 책에서 오클라드니코프는 러시아 동방학자 들이 남긴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고고학 유적과 유물을 역사적 사건에 대입하려고 했던 것이 큰 업적이다. 그 결과 극동의 중세시대(역자 주. 말해 및 발해~여진) 유적은 중국의 역사적 기록과 왕조의 연대와 상응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클라드니코프는 문헌에서 확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고고학적인 연대와 비교해서 발굴조사를 하였고, 고고문화로서 말갈, 발해, 여진의 문화를 구분하였으며, 이 문화는 현재까지도 이를 바탕으로 연구되고 있다. 고대와 중세시대의 퉁구-만주족의 민족학적 특징 등 여러 가지 그가 논의한 문제들이 아직까지도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중이다.

그림 11. 알렉세이 파블로비치 오클라드니코프 


 오클라드니코프는 아주 드문 인물이다. 그는 유라시아의 고고학과 민속학적 유물들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거대 담론으로 역사를 연구하고자 한 인물이다. 그리고 학문적 사실을 분석해서 재빨리 결과물로 내어놓았으며, 엄청난 직관력으로 고고학 유적을 찾아내었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극동 고고학에 있어서 고대에 대한 새로운 논점을 이끌어 낼 수 있었고, 유능한 젊은 학자로 러시아 전역에 등극 되었다.
 그리고 연해주 중세시대 연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 비타리 예피하노비치 라리체프 이다. 그는 오클라드니코프와 함께 파랄라디 신부의 일기장에 따라서 고고학 유적 조사를 함께 하였다. 그는 유능한 학자로써 연해주 중세시대사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어나가는 거장이었다(라리체프 1961).
 오클라드니코프가 이끄는 극동 고고학 발굴대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한반도의 동북부 해안과 블라드보스톡 사이의 지역들을 연구하였다. 그 지역은 포시에트 항구에서부터 수분하 강의 하류까지, 마이헤 강과 테튜헤 만, 나호드카 시, 아르툠 시 부근 등이었다(라리체프 1960). 이미 알려진 성곽 뿐 만 아니라 새로운 것도 발견하였다.
 오클라드니코프는 현장에서 30년간을 연구했는데, 연해주의 성곽들도 많이 포함된다. 크라스노야르스코예, 유즈노-우수리스코예, 자파드노-우수리스코예, 보구슬라프스코예, 루다노프스코예, 프르세발스키 언덕위의 성지, 콕샤로프카-1,2,3, 추구예프카, 고르니 후토르, 이즈베스토프카, 스몰리노프스코예, 고르바트카, 고르노레첸스코예-1,2, 노보러시야 등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유적들의 지리학적 입지나 국가나 문화적인 편년, 그 성곽이 존재한 시기, 역사적 맥락 등을 연구하였다 .  


  오클라드니코프는 특히 우수리스크 지역의 성곽들을 심도 깊게 연구하였는데, 1953년부터 자파드노-우수리스코예, 유즈노-우수리스코예 성곽, 크라스노야르소코예 성곽 등을 보로비요프 엠.베. 자벨리나 엔.엔, 라리체프,베.예,, 샤프쿠노프.예.베.(1930~2001)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그림 12). 1960년에 보로비예프는 크라스코야르스코예 소프카의 사원의 금당지(6번 건물지)를 조사하여서, 유적은 단층위 유적으로 11~12세기 여진 문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보로비요프 1975). 나중에 그는 러시아동방학자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학자로 추앙받았는데, 극동 중세사 연구의 기초를 만든 학자로 업적을 평가 받았다. 그는 고고학적 사실과 기록에 남아 있던 역사적 사실을 대입했을 뿐만 아니라 아르세네프의 연구에 기초해서 산지성과 평지성에 대해서도 많이 연구하였다(보로비요프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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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1916년까지 우수리스키 지역에 있는 고대 성곽들은 현대식 건축물이 들어서면서 아주 심하게 파손되기 시작하였는데, 학교 선생님인 페드로프가 이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그림 9).

그림9. 표도로프

그는 크라스노야르스코예 성지 뿐 만 아니라 수분하 강 유역의 고대 유적과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시의 일부분 등도 연구하였다. 그는 아주 정밀하게 발굴도 했는데 그 결과물이 잘 남아 있다. 건물의 초석, 고대 도로와 방어시설물에 대한 연구가 모두 공간되었고, 1916년에는 고고학 유적 지도도 발표하였다. 팜플렛은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시에서 확인한 유적과 그의 성곽들이라는 제목을 붙였다(페드로프 1916). 페드로프는 크라스노야르스코예 성지의 다층위 유적을 처음으로 연구하였고, 아래층은 발해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 성지는 우수리스크 시내의 것으로 현재는 완전히 파손되었지만, 수이빈 도시(발해 솔빈부의 중심부)로 여겨졌다. 상층은 여진의 것으로 발해성 위에 재건축한 것이다(그림 10).

그림10. 니콜라프스코예-우수리스크 성곽. 1885년 표드로프 작성


연해주 고대 성지 연구에 있어서 아주 큰 기여를 한 또 한 사람은 하르라모프이다. 그는 1928년 극동지역 유적 답사기를 작성하였는데, 모두 27개의 유적이 기술되었는데, 19기의 성지와 도로를 포함한다. 수술로바 반도에 위치한 해자가 있는 성벽은 토성으로 남색 기와가 깨어진 채로 확인되었고, 훈춘 강의 좌안 지류인 세디미 강을 따라서 고대 도로, 시코토보 지구의 노보네지노 성지, 유드존네 강의 성지, 드지기트 항구, 니콜라예프카 마을의 성지(수찬스키-파르티잔스크 지구), 올가만과 가까운 쵸르토비 절벽 위의 성지, 테튜헤 강에 있는 블리디미로-모노마호보 마을의 성지, 테튜헤 강의 하류에서 북서쪽으로 있는 성지, 해안에서 60 verst 떨어진 타케마 강의 성지, 암구 강의 성지, 토호베 강 하류의 해안가 성지, 추구예프카 마을에서 가까운 우란헤 강의 성지, 시마코프 지구의 마랴노프카 마을에서 가까운 성지, 시마코프 지구의 벨초보 마을의 성지, 이바노프 지구의 페트로 파블로프스크 마을에서 5verst(역자 주. 5.335km) 떨어진 성지, 스파스크 지구의 젠코프카 마을의 성지, 이만 강에서 3 verst(역자 주. 3.201km)떨어진 성지, 이만 강에서 60verst(역자 주. 64.02km) 떨어진 곳에 성지가 있다(하르라모프 1927).


연해주 중세시대 성곽연구의 두 번째 단계로 향토사학자들에 의한 연구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연구는 아르세니예프와 표드로프의 연구이다. 이 기간에는 대부분 연해주 유적에 대한 상세한 설명들을 작성했을 뿐만 아니라 이 유적들의 문화적 특징 및 민족학적 특징과 문제점 등도 지적되었다. 또한 각 성지들의 연대와 축조 목적, 건축의 전통, 유형 분류, 유적의 지리적 특징과 입지, 성지의 행정적인 용도, 도로 등 극동 고대사와 중세사의 성지들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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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동 고고학 연구에 있어서 블라디미르 크라브디예비치 아르세니예프 (1872~1930)가 남긴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는 1900년에 젊은 장교로 블라디보스톡에 처음으로 왔다. 그는 사냥단의 대장으로 그가 맡은 임무는 극동 영토에 대한 조사연구였다(그림 7), 당시 러시아는 새로운 자신의 영토의 지도가 필요하였다. 시호테 알린 산맥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교통로가 되는 고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 길을 낼 수 있는 곳, 원주민들이 사는 장소와 인구 수, 습관과 사상 등 모든 것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뿐만 아니라 식물상과 동물상, 방호참을 파기 쉬운 편한 장소 등도 조사에 포함되었다. 그는 연해주에서 수집한 정보로 평범한 군인장교가 아니라 만물박사로써 학자로 통하게 되었다.

그림 7. 아르세니예프


 아르세니예프는 우수리스크 지방에서 30년간 살면서 거의 모든 학문 분야의 정보를 수집하게 된다. 1906년에는 러시아 지질학회의 아무르 지역분소의 과업으로써 시호테-알린 산맥의 연구를 위해서 탐험대를 구성하게 된다. 시호테 알린 산맥과 해안선을 따라서 올가 만에서 우수리와 볼샤야 우수리 강의 상류까지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내용은 그의 첫 번째 탐험기에 잘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에는 ‘우수리스크 철도 시마코프카 역에서부터 출발해서, 우수리 강, 울라헤, 푸드진 강을 따라서 시호테 알린 산맥을 지나서 아브바쿠모프카 강까지 인데, 북쪽 올가 만 쪽이다. 그리고  북위 45〬 에 위치한 테르네이 항구에서 부터 다시 산호베 강을 따라서 시호테-알린 산맥을 넘어서, 이만 강을 따라 이 역까지 다시 오는 것이 그 계획이다(아르세네프 1906)’고 기술되었다.
 많은 성지 중에서 시호테-알린 산맥의 푸드진(파블로프카) 고개에서 타투수(제르칼나야 강)까지의 조사된 성지들은 지금까지도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확하게 조사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세 번째 탐험기의 내용은 아주 흥미롭다.  이오드지헤 강(드지기토프카 강)에서 아주 이상한 토성을 보았는데, 여기에서 뻗은 길은 산호베까지 이른다고 (아르세네프. 베. 케., 『세 번째 탐험기: 1906년 탐험』-1906년) 기록되었다.
 그 다음해 그는 시호테 알린 산맥의 중부지역과 연해주의 동해안가를 계속 조사하였다. 1907년 답사에서는 린드 만에서 해안가를 따라서 북쪽으로 나하타후 강까지, 그리고 투수쿠 강을 따라서 시호테 알린 산맥을 넘어서 비킨 강까지 조사하였다. 그 결과 아르세네프는 ‘유적은 아무르 강 하류의 계곡을 따라서 티르스키 절벽까지 유적들은 계속 발견되었다’고 밝혔다. 올가 해안가에는 고대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올가 해안을 기준으로 남쪽으로는 유적이 많고, 북쪽으로는 드문 편이다. 소수노 절벽 부근까지 유적이 끊어진다(아르세네프 1927).
 1908~1910년까지 아르세네프는 19개월 동안 가장 힘든 조사를 단행하게 되는데, 시호테 알린 산맥의 북쪽 지역을 조사하는 것이었다. 이 조사구역에는 테튜헤 강의 북쪽, 디오드지헤(드지기토프카 강), 시치(세레브랸카), 콜룸베(페쉐르나야), 암구(암구 강), 소요나(지보피스나야), 쿠즈네초바, 샤오 케마(말라야 케마), 타케마(벨리카야 케마), 사마르가 강 등이 포함되었다. 아르세네프는 강에서 몇 개의 성곽들을 발견하였고, 그 곳으로 가는 길과, 그곳으로 넘어가는 고개, 고대에서부터 이용되었던 길 등을 조사하였다(그림 8).

그림 8. 1908~1909년 사이에 아르세니예프가 조사한 연해주 영동지역의 성곽 위치도(지도의 점선표는 아르세니예프가 추정한 옛날도로)

 1911~1912년 아르세네프는 우수리스크 타이가 지역으로 가면서 고대 유적 연구를 완성하기로 결심하고 그 유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남기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러한 유적들이 곧 파손될 것이다. 빨리 서둘러야 한다. 비록 허술한 유적의 평면도라도,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고 썼다. 그리고 탐험기록에 많은 성의 입지와 그 특징들을 기록해 두었고, 이들 중 많은 것들이 그의 기록에만 남아 있다. 많은 수의 성곽들이 파괴되거나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오늘날 연해주 북동지역의 타이가 삼림지대에서 찾기 힘든 것이 많다.
 아르세니예프는 극동에서 12번의 조사를 한 유일한 학자로써 시호테 알린 산맥을 25번 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우수리 지역의 전체 영역을 거의 모두 조사했다. 매우 열악한 조사조건이었지만, 그는 사진을 찍고, 평면도를 작성하고, 유적의 크기를 재고 기록하였는데, 모두 128개의 유적이고, 그 중에서 수십 기의 성지가 포함되었다. 베뉴코바 고개의 성, 소프카 류보비, 예디킨스코예, 쿠즈네초프스코예, 드지기토프스코예, 쿠날레이스코예,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부르리보예, 소욘스코예, 리스벤노예, 말라야 케마, 켐스코예 평지성과 산지성, 페세르노예 성 등 모두 지도에 표시되었다.(러시아지리학회 연해주 분소의 기록, 『아르세네프 대장의 탐험 보고서(1900~1910년 우수리 지역에 대한 여행기)』  1927, 『아르세네프 도시에서 작성한 시의회 보고문에서』. )

 하지만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이 우스리스크 지역의 고대 유적의 겨우 10분의 일 정도라고 평가하였다.
 1916년 아르세니예프는 하얼빈에서 개최된 러시아 동방학자 학술대회에서 발표를 하였는데, 연해주의 고대유적에 대한 것이었다. 그 발표에서 연해주의 유적을 모두 10개 유형으로 분류하였는데, 거기서 4번째 유형이 본 연구와 관련된 것이다.
 1. 12~13세기의 성지로 만주인과 원주민의 전쟁 시 축조된 것
 2. 산지성과 평지성, 12~13세기
 3. 고대도로
 4. 경계를 표시하는 장성(아르세니예프 1947)

 물론 당연히 후대에 그의 유적 유형화에 대한 내용은 수정되었는데, 제일 첫 번째가 유적의 연대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유적에 대한 지형이나 위치적인 것은 거의 아직까지도 인용되고 있고, 장성이라 불리는 용어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아르세니예프는 연해주 지역 선사시대부터 여진시대까지 고고학 유적을 시대구분 하였다. 선사시대-8~12세기까지, 발해-14세기까지, 여진제국-19세기까지 문명의 쇠퇴기로 편년된다(아르세니예프 1922). 그는 ‘이러한 나의 짧은 이야기가 좋은 연구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아마도 전체 역사연구에서는 거의 없어질 지도 모른다. 이것은 미래의 역사-고고학자들의 연구를 위한 하나의 밑바탕 정도이다’(아르세니예프 1912)라고 자평하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아르세네니예프가 죽은 후에 그가 남긴 고고학 유물과 그림들은 그의 아내 마르가리토프카 니콜예프카가 동방학연구소(레닌그라드 소재)로 전달하였다. 아무르 지역 연구회의 재단 소속의 댜코프와 사크마로프는 우연하게 아르세니예프의 연구물을 받았다는 카자케비차의 메모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1937년 카자케비차는 남편을 죽이고 카자흐스탄에서 1940년에 죽었다고 그 뒤에 알려졌고, 업적물은 행방물명 되었다(댜코프˙사크마로프 1996).


역자주: 

아르세니예프(В. К. Арсеньев, 1872-1930)19세기 초반에 러시아가 극동을 개발하기 위해서 중앙에서 파견한 군인신분이지만 지리 및 지질학 조사를 하면서 고고학유적에 대하나 기록을 남겼는데, 극동의 고고학자 1세대로 여겨진다(클류예프 2003).

아르세네니예프가 시호테알린 산맥을 조사하면서 겪은 내용을 소설로 남겼다. ‘데르수 우잘라(Дерсу Узала)’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는데, 나중에 같은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이 영화는 나나이족의 사냥꾼으로 시호테 알린 산맥을 조사하면서 우연히 데르수 우잘라를 만나서 그의 도움 받은 이야기를 그의 일기장에 적어 두었다. 영화 데르수 우잘라는 이 내용을 일본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가 영화한 것이다. 당시 소련에서 자본을 지원하고 소련 배우가 출현했기에 소련영화로 알려져 있다

설 데르수우잘라는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영어책이 아닌 노역한 것이다.

*영화 데르수우잘라는 쉽게 구해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네**영화에서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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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에 아무르 지역연구회가 창설되면서, 연해주 성곽연구를 주독하게 된다. 이 연구회는 블라디보스톡과 아무르지역의 연구를 통합한 것으로 중요한 연구들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림 6. 부세


1862년 극동에서 아무르 주의 전시 주지사 탐험기록 담당 사무관으로 근무한 부세(1838~1896)의 연구가 괄목할 만하다. 오랫동안 이곳에서 근무하면서 우수리스크 까지 기차를 타고 여러 번 여행을 하였는데, 그는 이곳의 경제적인 생산 활동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의 문화와 역사적인 문제까지 깊이 있게 관심을 기울였다. 지역민에 대한 관심은 현존하는 고대 문화유산과 유적들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부세는 아무르지역연구회에서 처음으로 고고학 유적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였는데, 그 보고서에는 모두 20여기의 성지를 포함한 97개의 고고학 유적에 대한 것이었다. 부세는 고고학답사를 여러 번 했는데, 그 결과 연해주 남동쪽의 많은 성지를 발견하였다. 우수리스크 지역에서 자파드노-우스리스크 성, 유즈노-우수르스키 성, 아누치노 지역에서 아누치노 성과 노보고르데예프스키 성지, 이바노프카 마을에서 서쪽으로 5.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도로에 대한 것도 포함되었다. 그 외에도 헤니나야 소프카, 니콜라예프스코예, 콕샤로프크소예-1, 파블로프스코예 성지, 수호돌 항구의 크라스느이 곶의 성지 등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이 성지들에 남아 있는 방어시설-성벽, 해자, 문, 평면시설-들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그 기록을 남겼다. 부세는 대부분의 성지가 ‘만주, 한국, 중국 사이의 전쟁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이 성지가 668년-발해 건국 초 이상 올라가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는 파라라디 신부의 연구에 의하면 훨씬 오래된 고대성지는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유즈노-우수리스크 지역에서는 전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고 밝혔다(부세 1888).
부세의 연구는 고고학 유적과 유물들 직접 조사한 것으로 사후(1908년)에 출판되었다. 크라포트킨 공작이 부세가 조사한 연해주의 성지를 발표하였다. 아누치노 지역의 브라트 산의 성지, 크라스노야로프스코예 성지와 고대 도로, 보구슬라프스코예, 체르니고프스코예, 노보니신스코예, 노보로스신스코예, 스테큘뉴힌스코예-1, 이즈베스토프스코예 성지 등이다. 고고학 유적들의 분석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4단계로 편년하였다.


1. 선사시대
2. 668~1615년: 만주인과 중국인의 전성기로 이곳에서는 947년 동안이 문화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시대
3. 1615년~1861년까지는 문화의 황폐화시대
4. 러시아의 영토에 영입된 시기
 
부세가 연해주 성곽들의 다양한 형태를 지리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우수리 강을 중심으로 중세시대에는 하나의 커다란 정치체가 있었다고 설명하였다. 그것은 우수리 강과 아르세네프 강의 수계가 이 정치체의 서쪽 경계가 된다고 하였다(부세 1888: 크라포트킨 1908).
또 한명의 연해주 성지 연구자가 있었는데, 연해주의 산림원에서 근무하던 팔체프스키 엔. 아. 이다. 그는 여러 기의 성지들을 발견하고 아무르 지역연구회에 이를 통보하였다. 그가 발견한 성지는 연해주의 여러 지역에서 발견한 것으로 에스톤카 성, 루드나야 성, 바튜키 성, 곤차로프카 성, 라조프스코예 성, 예카테리노프스코예 성, 프르세발스코예 성 등이 있다(부세·크라포트킨)(역자 주. 이 책은 출판연도가 없음).


몇 몇의 성지(예를 들면 루드나야 성지)는 현재까지 팔체프스키의 보고만이 남아 있을 뿐 다른곳에는 전혀 보고되지 않은 곳도 있다. 왜냐하면 루드나야 성지는 그 뒤에 루드나야 프리스탄 항구를 건설하면서 완전히 성지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테튜헤 강의 하류에서 북서쪽으로 1verst(역자 주. 러시아의 옛 거리단위. 1verst=1.067km)만 가면 강의 좌안에 작은 장방형 성지(정면이 27×25 shazen)(역자 주17세기에 사용한 러시아 거리단위. 1 shazen=2.16m)가 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서 루드나야 성지는 평지성으로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크기는 58.2×54m정도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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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과에 들어가서 야외고고학 수업 외에도 ‘실측’과 관련된 수업이 있다.
실측은 유적을 발굴한 뒤 보고서 작성에 꼭 필요한 부분이다.
(이 수업이 있는 학교도 잘 없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박물관이나 발굴하는 기관에서 일하면서 배우게 되는 경우이다.)

명목 상 실측은 별 꺼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고고학자로서 가장 큰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유물을 관찰하는 방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학생들 마다 개개인의 차이로 그림을 잘그리는 사람과 잘 못 그리는 사람에 따라서 결과물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유물관찰하는 방법과는 그리 크게 관련이 있지 않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실측의 결과물이 좋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그 사람이 유물을 세밀하게 관찰했느냐의 문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그림을 어느 정도 잘 그릴 수는 있게 되었고, 그게 시간이 가면서 쇠퇴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그림을 잘 못 그릴 때도 유물을 세밀하게 관찰은 할 수 있었다. 이건 경험과 주변 동기들과의 비교로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그 결과물이 좋지 않아서 보고서 작업 당시에 좋지 않은 소리를 많이 듣고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노력이 들어갔다.

실측할 때는 여러 가지 도구가 사용된다(그림1).

그림 1. 실측도구

그림 2. 바디

그림 3. 바다의 실제 사용

사진의 도구(그림 1)는 모두 필자 개인의 것이고, 특히 ‘바디’(그림 2,3)라고 불리는 것은 만든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는 재사용해서 내가 만든 것이다. 옷감을 짤 때 만드는 바디를 사서, 유물 실측하는 바디로 만들었다. 필자가 대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다닌 학교에서는 대부분 중고시장가서 옷감을 짤 때 만드는 바디를 사서 다시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유물 실측용 바디는 구입가능하다.

(http://www.chf.or.kr/c2/sub1.jsp?thisPage=3&searchField=title&searchText=&brdType=R&bbIdx=100299 의 가장 첫번째 그림이 천을 짤때 사용하는 바디이다. )
 

이 도구는 토기 같은 입체적인 유물을 그릴 때 유물의 본(그림3)을 정확하게 뜰 때 필요하다.


캘리퍼스(그림 4)는 유물의 두께를 재는 데 매우 효율적이다.


그림 4. 캘리퍼스

그림 5. 캘리퍼스 실제 사용

그림 6. 캘리퍼스의 눈금

이 두 도구가 가장 핵심적인 실측도구이다.


하지만 토기의 색깔, 토기를 만드는 태토에 사용된 모래 안의 작은 알갱이 중 석영, 장석이 섞인 것인지, 조개 가루가 들어간 것인 지, 토기에 난 구멍을 소성 후에 낸 것인지, 소성 전에 낸 것인지는 이런 도구 없이 본인의 육안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실측은 보고서 작성을 위해서 필요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측 그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있다. 실제로 유물을 보면서 관찰한 많은 의문점이 쌓여서 논문작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필요한 수업이지만, 또 이것만 강조되어도 곤란하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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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도 파라랄디(카파로프) 신부(1817~1878)의 역사-민속학적 연구에 대해서 우리는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많다. 그는 1870~1872년에 연해주, 아무르, 만주 지역 지질학회 회원이었다(그림 4, 5). 그는 러시아 동방학자 가운데서 기록된 최초로 고고학 유적을 찾았던 학자이다(카파로프 1871, 파노프 1898). 우수리스크 지역에 처음으로 카파로프가 왔을 때, ‘어떤 중국 책’에 적힌대로 레푸 강(현재 일리스타야 강)과 다우비헤(현재 아르세네프카 강)의 수계를 따라서 잔존한 성벽을 찾았다. 이 성은 치키르-무둔이라는 중국 사람이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는 둔다스 만과 포시에트 만에서 고대 항구의 흔적을 찾았다고 적었다(카파로프 1871, 파노프 1898). 그 외에도 크레포치나야, 케드로프카, 라드돌라야 강, 페레보조치나야, 크라스노야르스크, 니콜라예프스코예 성의 성벽을 연구했다.


그림 4. 카파로프가 발견한 라즈돌나야 강(중국명: 수분하)의 토루

그림 5. 카파로프 신부


상트-페제부르그로 돌아가는 길에 신부는 죽고, 그의 연구 결과물은 일부는 도난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그의 출판물은 사후에 출판 되었는데, 고고학적 유적과 민속학적 문화적인 해석에 대한 것이다. 카파로프는 수분하의 북쪽 성지들을 관찰했는데, 이 성지들은 한국사의 프리즘과 같은 존재라고 언급하고 있다. 성의 일부분은 고려인이 축조한 것이고, 일부는 여진의 것이라고 하였다. 수분하의 우안에 남은 성벽은 트랙터에 의해서 많이 파괴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성의 대부분은 발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역사적인 사실과 지역적 위치 등으로 보아서 유즈노-우수리스크 지역에 남아 있는 고대의 유적들은 만주에 있던 발해의 중요한 행정관청 중에 하나로 생각된다. 그 뒤 이 지역에서 고려와 여진(중원에 금을 세우게 됨) 사이에 충돌이 있게 된다.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흔적은 전쟁과 관련된 유적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아르히만드르트 파랄랄디 1871).


이.페. 나다로프는 연해주 성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1882~1883년 동안 극동지역에서 이만 강 하류 부터 아르세네프카 강까지 조사하였는데, 노보포크로프스키의 2개 성지, 예카테리노프스크, 파브로프스키 성지, 바라바쉐프카 강의 고대 도로 등이다. 나다로프의 보고서(나도로프 1887)에는 ‘이만강가에는 고대 마을의 흔적이 남아 있다’고 기술되었다. 나파로프가 언급한 것은 고대석성으로 생각되는데, 부정형의 평면형태 이며, 성벽과 해자의 크기를 측량하였고, 성벽이 3중이었던 것으로 밝혔다. 그는 이 성지가 지금으로부터 1000년 이상 올라간 고려의 것으로 보았다. 지역주민들 사이에도 옛날 석성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흙으로 구운 기와와 전돌 등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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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단계는 향토사학자의 연구에 의한 연구이다. 제정 러시아 때 극동에 대한 정보가 필요해고, 19세기 중반부터 연해주의 중세시대 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아무르 주에 파견된 군인이나 기술자에 의해서 이러한 것들이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공식적으로 이 지역의 성곽 연구에서 제일 처음 시도한 사람은 젊은 러시아 장교 엠. 이. 베뉴코프(1832~1901)로, 그는 1858년에 정부의 명령에 따라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르 지역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그림 2).

그림 2. 베뉴코프


 26살의 청년은 아무르에서부터 우수리강을 따라서 해안지대인 동해안까지 가는 탐험을 책임감, 프로의식, 호기심 등으로 우수하게 마무리 하였다. 베뉴코프는 처음 탐험에서 어느 것도 쉽게 지나치지 않았지만 아쉽게도 연해주의 사람들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필요한 정보를 얻고 그것을 평가하기 위해서 올바른 질문을 할 필요가 있었다. 우수리스크 지역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성곽과 요새 등을 남긴 사람과의 교류가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었다. 1970년 하바로프스크에서 발간된 베뉴코프의 책 『아무르, 중국, 일본의 여행』에 대해서 스테파노프는 서평을 다음과 같이 했다. ‘러시아의 우수리 지역을 관찰하였다. 아주 육중한 시호테 알린 산맥을 지나서 바다에 이르는 고개를 찾았다’ 

마시모비치 학술위원은 베뉴코프의 책에 서평을 남겼는데, 과거에 자신이 갔던 길에 대해서 아주 정직하게 수정을 하였다. ‘도비하 강의 하류에서 남동쪽으로 우리는 내려왔는데 그곳에는 아주 드물게 고등교육기관이 있는 큰 취락지역이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22~45〬경도로 무너지고 오래된 성지에 대해서 이야기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성지는 아마도 금 혹은 청왕조의 처음 시기에 만들어진 12경이 중 한 곳이다’(베뉴코프 1970).

  베뉴코프가 왜 오래된 여진의 성을 보았다고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기억 속에 힘센 여진족에 대한 이야기나 전설 등이 항상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제외하고는 베뉴코프는 중국 역사서에 남아 있는 역사적인 사실들을 언급하곤 하였다.

 또 다른 연해주의 고대 성곽에 대해서 연구를 한 사람은 지질학자 이코켄틴 알렉산드로비치 로파틴이다. 극동 탐험 당시에 첫 보고서로‘ 고대 아무르 지역의 49개 수혈’을 쓰고, 고고학회 회원이 된다. 이 자료는 현재 상트 페체르부르그에 물질문화연구소에 남아 있다(로파틴 1869). 그는 현재 우수리스크 시에 남아 있는 성에 대해서 기술했는데, 그 성지의 이름은 「자파드노-우수리스크 성지(우수리스크 서쪽 성)」로 평면형태가 방형이고, 12세기~13세기 초반에 축조되었다. 「유즈노-우스리스크 성지(우수리스크 남쪽 성)」는 부정형 평면형태로 8~13세기 초반으로 비정된다. 크라스노야르스코예 성은 라즈돌나야 강(수분하)의 우안 높은 절벽위에 위치하는데, 평면적은 1,550,000~1,600,000㎡이고, 너비 3~5m, 길이 8m정도의 성벽이 현존한다. 노보고르디예프스코예 성지(별칭은 쿠루글나야 소프카: 역자 주둥근언덕)로 노보고르데예프카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단독 언덕 위에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다. 「베르흐네 -미하일로프스코예 성지」는 우수리강의 우안에 위치하는데, 베르흐네-미하일로프카 마을에서 남쪽으로 3~4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평면형태는 부정형이고, 삼중의 성벽과 해자가 돌아가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 외 이노케틴 알렉산드로비치는 처음으로 고고학 건축물의 그름과 특징 등을 자세하게 그렸다. 1858년부터 라파틴과 거의 동시에 우수리스크 지방의 성지를 전문 지도제작자인 프로렌스키가 지도에 표시하였다.

10년 뒤에 우수리스크 지방의 성지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계속 찾아왔는데 그 중 한명인 여행가 프리세발스키 (1839~1888)(그림 3)도 이곳에 들러서 니콜스크-우수리스코예마을의 성지를 보고 연해주의 고대 도시에 대한 베뉴코프의 이야기를 확인해 주었다(프리체발스키 1937).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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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0년 동안 연해주에서는 150개가 넘는 성곽 건축물을 발견 및 발굴 조사하였다. 건축물에는 성곽, 성벽, 해자 등을 다 포함하며 남쪽의 해안가부터 북쪽의 산악지대와 타이가 지역에 걸쳐 있다.

연해주의 성곽연구는 세 단계에 걸쳐서 발전한다. 첫 번째 중국문헌 분석, 두 번째 향토학자에 의한 연구, 세 번째 고고학자에 의한 본격적인 야외조사이다.

첫 단계- 당연히 연해주 성곽 조사의 첫걸음은 현대에 들어와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성은 당시에 주위의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 하기 위해서 축조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오랑캐를 무찌르는데 익숙한 중국문헌에서 정보를 얻어서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 연구의 첫 시발점이다. 이에 관해서는 역사서에 아주 많이 남아 있고, 실제 남아 있는 건축물과 허물어진 성지 등도 이를 방증한다.

실제로 직간접 적으로 획득한 인접한 주민들에 대한 일상생활, 전통, 민족의 수 나아가서 국가의 지형, 도로, 성지, 마을, 도시, 방어시설 등도 그 국가에 대한 정보이다. 획득된 정보는 지도, 보고서, 연대기 등을 작성할 수 있고, 이것들은 그 지역에 대한 정치적 상황 등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비추린(1777~1853)(그림 1), 바실레프, 고르키, 로조프, 쿠네르 등이 기술한 동방의 이방인에는 중세 퉁구-만주족의 다양한 성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있었다. 그래서 북서(북서)’94편에는 연해주, 아무르, 만주 등에서 사는 우쯔이 종족에게 성곽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에서 일 천 년기 전반(역자 주1~4세기)·에 각 도시와 마을은 특징적인 고유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비추린 1950). 


그림 1. 비추린(1777-1853). 17세기 부터 동방정책으로 인해서 러시아는 중국 및 만주를 연구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졌고, 18세기에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청나라와 수교하면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그림의 비추린은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북경교회사절단을 파견하게 되면서 중국에서 복무했고, 중국정사25사에 기록된 동아시아역사를 번역하였다. 그의 연구는 러시아 동방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그가 번역한 책은 러시아가 한국을 배우는 기본교재이다. 현재도 러시아에서 발해와 여진과 관련된 논문에서 그의 이름은 늘 거론된다. 


말갈족과 그 성지에 관해서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의 기록에는 ‘645년 당과 고구려가 전쟁을 했다. 고구려 쪽에는 말갈인이 참가하였고, 중국에서는 투르크 인이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곳은 안시성 부근이다. 고구려의 북부욕살 고연수 및 남부욕살 고혜진과 말갈인은 50,000군사를 이끌고 전쟁을 도왔다. 중국 황제는 만약에 그들이 안시에 들어간다면, 높은 산을 파고, 도시로부터 식료품을 조달받아야 한다. 그러나 말갈인이 우리의 소와 말을 훔치게 둔다면, 우리 쪽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비추린 1950).

여러 역사서에는 여진의 성 축조 기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강한 조상이 있는데, 안시라 불리고, 성지를 축조하였다. 후툰장에서 아무르 까지 북쪽으로 80m떨어져 있다(바실레프 1857). 좀 더 늦은 역사서 명나라(1368~1644) 집의 역사(러시아과학원 동양서체연구소 문서국)에도 성에 대한 기록이 있다. 행정관청 중 국가 수입담당기관, 인사기관, 사법기관 등은 성곽 안에 두도록 하고 도로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역사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성곽, 도시, 마을, 국경선, 국경의 항구 등이 구분되어 있을 때이다. 군사-정치-경제적 상황 등이 악화될 때는 국가 안이나 종족 내에서 성을 지어야 했다. 역사서에는 일본 유민이 해안가에 59개의 도시를 짓고 약 58000명 정도가 살고 있다‘. 거기에 성벽에 대해서 약간 기술되어 있는데, ’...군인들은 성벽위에 터널을 묻었고....’밤에 물을 길어서 도시성벽을 다듬었다. 밤에는 얼어붙어서 그곳에 올라가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러시아과학원 동양서체연구소 문서국).

10~20세기 극동 사람들은 성지축조와 마을 축조 뿐 만 아니라 방어적인 요새나 도로를 만드는 데 아주 능했다. 말갈, 발해, 여진, 고구려 인 들은 성을 축조하였는데, 중국의 역사서에는 아주 정확하게 그들의 입지 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고, 많은 세월이 흘러서도 러시아 연구자들은 이 역사서에 따라서 성지를 찾을 수 있다.

러시아 연구자들은 고대와 중세시대 성지의 입지는 생업과 방어가 용이한 곳을 택한 것으로 생각했다. 높은 입지는 넓은 영역을 관망할 수 있었고, 봉화대의 역할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댜코바 2009)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최근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all history is contemporary.

 

지난해 출간된 번역서를 쉽게 푸는 작업을 잠시 멈추고 있지만..이도 곧 다시 실행할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몇 년 전에 우연하게 번역한 러시아 책이 있는데,,,

 

연해주 동해안가에 위치한 청동기시대 토루와 고구려 석성에 관한 러시아 학자의 책이다.

번역서를 출판하는 것은 스폰서가 없이 힘들다. 출판사에서 저작권문제 때문에 쉽게 하려하지 않는다.

사실 작년의 것은 거의 오더 형식이었기에 가능하였지만, 필자가 출판하고 픈 것은 이번에 소개할 책이다.

  ..기왕에 내가 번역한 거 누군가에게 도움이나 되었으면 한다.

 

디야코바(Ольга Васильевна Дьякова) 박사의 연해주 동해안 시호테 알린 산맥의 영동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성곽에 대한 연구(Дьяква О.В. 2009)이다. 대상 시기는 대략 기원전 10세기 리도프카 문화의 토성 부터 발해와 여진의 동하국(1217~1234)까지이다. 이 가운데는 디야코바 박사가 생각한 발해와 관련된 유적도 포함되어 있는데 한국학계에 소개되어 관련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판단된다


이 연구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문제제기 할 수 있다. 먼저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Лидовкаская культура)의 토성(그림 1)이다. 이를 연접한 중국동북지방으로 넓혀서 살펴보면 요서지역의 하가점하층 문화(夏家店下層文化)과 비교할 수 있다. 이 문화에도 성이 있으며 이의 존재를 두고 고대국가를 언급하고 있다(궈다순장싱더 2008) 그러나 선사시대 성의 성격 및 용도가 리도프카 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가 서로 유사하다는 점은 하가점하층문화의 성이 고대국가단계를 언급할 만큼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역설할 수 있다.


그림 1. 리도프카 문화의 토루

그림 2. 연해주 해안가의 발해~여진시대 석성


 또한 시호테알린 (Сихотэ-Алиня)산맥의 영동지역은 발해 관련유적이 거의 국내에 소개되고 있지 않다(그림2). 디야코바 박사는 이 지역 유적 가운데서 몇 개의 유적은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발해의 성곽 축조기술로 이용해서 쌓은 성곽이라고 하고 그 시대는 발해 시기라고 주장하였다(그림2, 그림3). 또한 현재 러시아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로는 이 지역은 발해영역에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만약에 이 성이 디야코바 박사가 주장하는 대로라면 발해 영역문제와도 관련이 있어서 한국학계에서도 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림 3. 연해주 발해석성 1: 시미리코프 석성, 2~4: 자볼로첸나야 석성


디야코바 박사의 주요 발굴지인 연해주 동북산악지역은 그간 미조사지 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대부분 연해주 고고학의 종사자들이 한--중의 국경지역인 연해주 남부지역에 집중하는 데에 반해 디야꼬프 夫婦는 수 십 년간 리도프카 유적, 쿠날레이스코예(Куналейскоэ) , 사마르가(Самрга)성지 등 고립무원의 산악지역에서 꾸준히 연구를 해왔다.

이 책(Дьяква О.В. 2009)은 크게 기원전 10세기의 리도프카 문화의 토성과 중세시대의 석성을 중심으로 동해안가를 따라서 해안로를 상정했다. 필자는 해안로의 시작이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디야코바 박사는 1949년 러시아의 알타이 주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시베리아고고학의 산실인 시베리아과학원 소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대학을 졸업하고 남편인 디야코프(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Дьяков)와 함께 1972년부터 극동으로 이주해 블라디보스톡 소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분소 역사고고민속학연구소에 근무한다. 디야꼬바 박사는 특히 극동의 중세시대 토기에 대한 많은 연구업적이 있다. 1980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1991년에 소련 극동지역 중세시대문화의 기원형성과 발전으로 국가박사학위를 취득했다(Клюев И.А. 2003)


김재윤의 고고학 특강


posted by 김재윤23

 

독자를 위한 설명을 하나 하겠다.

 

이 블로그를 읽다가 보면 ‘A유적이면 A유적이지 하층은 뭐고 상층은 뭐야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알고보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고고학과 1학년 들에게 질문해도 이걸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설명하면...


유적을 발굴하다 보면.. 00 유적이라도 시대만 혹은 한 단계의 층만 확인되지 않는다.

위에서 아래로 주로 시대와 반대로 퇴적되어 있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층위가 역전되는 것이다. 어떤 한 문화가 퇴적 된 뒤에 뒤시기에 어떤 사건으로 인해서 파 뒤집어지고 그 뒤에 다시 퇴적이 되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와 패총과 같이 파도에 의해서 쓸려서 내려가서 한 유적에서도 높은 곳과 바다와 접하는 낮은 곳이 층이 뒤집어 지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퇴적 된 순서가 시간순이라고 생각한다. 지질학적인 용어기도 한데,,, ‘지층 퇴적의 법칙혹은 지층 누적의 법칙이라고 한다.

 

심한 경우에는 몇 시대가 계속 퇴적 된 경우가 있어서 그럴 경우에는 대부분 00유적 1, 2, 3.. 시대 순으로 이름을 붙인다.

 

미송리 유적은 하층과 상층으로 구분되는데, 하층은 신석기시대 층이고, 상층은 청동기시대 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상 유적명을 사용할 때는 대부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많이 생략을 하는 경우가 종종 보이는데, 학문적인 글일수록 구분되어야 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