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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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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연해주 루드나야 문화의 토기)

 연해주의 신석기시대 연구는 루드나야 프리스탄, 마략 르발로프 등의 유적 발굴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를 살펴보면 마치 도장으로 찍은 듯한 문양(사진1)이 그려진 것이다. 혹은 점토를 덧붙여서 표현한 문양도 있다.
이 문화는 연해주에서 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부터 6000년 사이에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몇 개의 유적(드보랸카-1, 루즈노바 소프카-2, 루드나야 프리스탄 유적)에서는 7000년 보다 500~600년 정도 이른 시기의 유적도 있다.)

유형

유적

연대(B.P.)

시료

참고문헌

루드나야유형

루자노바 소프카-2

7320±40

토기부착검댕이

파포프·바타르쉐프 2007

루드나야 프린스탄

7390±100.

7550±60

7690±80

댜코프 1992

세르게예프카 유형

드보랸카-1유적

7615±180

클류예프·가르코빅 2008

노보트로이츠코예-2유적

6920±50

클류예프·가르코빅2008

세르게예프카-1

6700±80

토기부착검댕이

파포프·바타르쉐프 2007

우스티노프카-8

6770±50

6830±50

6890±50

7020±90

토기부착검댕이

 

쵸르토비 보로타

5890±45

동물뼈

방사성탄소연대. 1998

6380±70

6575±45

6710±105

6825±45

7010±95

7110±95

사람뼈

쿠즈민 외 2002

쉐클라예보-7

6045±50

6120±45

6200±50

6280±50

6455±50

, 탄화된 밤

클류예프 외 2007

(표1. 루드나야 문화의 절대연대, 김재윤 2014)


 이 문화는 크게 두 개의 유형으로 나눠 진다. 루드나야 유형과 세르게예프카 유형으로 나눠지는데, 토기의 모습과 문양에서 차이가 있다.(유형은 쉽게 설명하면 비슷한 것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고고문화의 하위단위이다. 고고문화에 대한 포스팅한 바 있다. http://eastsearoad.tistory.com/category/고고학이란/고고학)


루드나야 유형의 토기 모습(그림 1-11)은 바닥이 편평한 저부에 구연부가 벌어진 옆에서 보면 마치 나팔과 같은 모습이다. 이 문화에서는 문양을 시문하는 도구를 하나만 써서 시문했을 가능성이 크다. 도구를 찍는 방법인데, 도장 모양에 따라서 찍히는 문양도 차이가 있다. 가장 많이 사용된 문양은 마름모 혹은 삼각형 문양이다. 

(그림 1. 루드나야 문화의 토기, 루드나야 유형(1~11)과 세르게예프카 유형(12~34)
 

이 문화의 토기 문양은 토기의 입술부 주위에만 찍힌다. 삼각형이나 마름모가 능형으로 연속해서 찍히면 마치 그물문양과 같다고 해서 아무르편목문 혹은 아무르그물문토기라는 별칭도 있다. 아무르편목문토기는 연해주의 루드나야 문화 토기 이외에도 아무르강 하류, 인접한 삼강평원의 신개류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사실 이 문화는 앞서 설명한 바 있는 연해주의 고토기 단계 다음에서 확인되는 문화이다. 고토기 단계의 연대가 만 년 후임으로 연해주의 신석기시대는 1000~7500년 전후로는 아직 유적이 찾아진 예가 없다.

대표적인 유적은 앞서 몇 개로 포스팅한 바 있다.

이 문화는 한반도 동해안의 문암리, 오산리 유적과 관련한 것으로 알려졌다(김재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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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그림1. 리소보예-1유적에서 출토된 고토기. 4~7은 토기 표면을 가깝게 찍은 것이다. 무엇인가 빠진 흔적이 보이는데, 동물털로 추정되며, 사슴털일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

연해주의 신석기시대는 대략 만년 전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한반도의 제주도 고산리 유적과도 비슷한 시기이다. 연해주 보다 북쪽에 위치한 아무르강 하류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신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되는 곳인데, 만년 보다 이른 1만2~3천년 전의 유적들이 존재한다.

동아시아의 신석기시대는 유럽의 신석기시대 개념인 ‘신석기혁명’과는 차이가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신석기시대는 ‘신석기’라는 간석기를 사용했다기 보다는 ‘토기’사용을 기준으로 한다.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가장 큰 물질 변화가 토기라고 보는 것이다. 새로운 물질문화의 변화와 함께 지형변화가 심했던 시기이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후기 구석기시대의 최빙기를 벗어나서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한반도가 지금과 같은 삼면이 바다로 된 시기가 만년 전으로 알려졌다. 기온이 따뜻해 지기는 시기는 1만 3천년~1만2천년부터 시작해서 1만 년 전까지이다. 이때 동아시아 각 지역에 토기가 생겨났던 것으로 보인다.
 
연해주는 우스티노프카-3유적, 체르니고프카-알티노프카-5유적, 리소보예 -1유적(그림 1) 등이 알려져 있다. 이 유적의 토기도 앞서 포스팅한 바 있는 고토기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저화도의 소성에 태토에 짚이나 동물털을 섞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태토에 유기물질을 혼입한 것이 아니라 덧바른 흔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림 2. 우스티노프카-3 유적에서 출토된 고토기)

(그림 3. 체르니고프카 알티노프카-3 유적의 고토기)

연해주는 아무르강 하류처럼 이 시기의 유적이 많이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주거지 등도 확인된 예가 없어서 그 시대의 사람 사는 모습을 잘 알 수 없는 점 등이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아무르 강 하류에서는 많은 유적이 확인되며, 유적에서 주거지가 확인되는 등 좀 더 인간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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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인을 두고 ‘동양인의 사상을 한 유럽인’이라고들 한다.

필자는 그런 이야기와 꼭 맞는 예를 전공하고 있는 고고학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이제 000기념논총 이런 것이 거의 없어지다 시피 했다. 정년기념논총, 회갑기념논총 등 대학자 혹은 스승을 기리는 논문을 엮은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는 아직도 그런 것을 만든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더 보수적이다.
이런 인물 중에 한 명으로 오클라드니코프가 있다. 이 분은 돌아가신지가 30년이 넘었지만 필자가 유학할 당시 2008년에 탄생 백주년 기념논총을 보았다. 새삼 러시아에서 그 분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림1. 오클라드니코프 선생 탄생 백주년 기념논총)

대략 러시아 고고학의 아버지? 정도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소련아카데미 아카데미 학술회원이고 연해주를 포함해서 시베리아 전역을 누비며 수많은 조사를 하였다.


*한국에서 연구자는 대학교수가 되기를 바라지만, 러시아에서는 아카데미 학술회원이 되길 바란다. 소련시절에는 3D업종이 대학교수,의사였다고 하니...(아이러니 하게도 공산주의 시절에도 돈 많이 못 버는 직업이 가장 비 인기직종이었다. 두 그룹이 가장 돈 못 버는 계층이라고 한다. 현재는 그 정도는 아님). 연구자는 아카데미의 연구원을 거쳐서 아카데미 학술회원이 되는 것이 가장 큰 명예이다. 대학교수는 아카데미 연구원이 되지 못하면 가는 곳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러시아도 교육체계를 대학 중심으로 많이 바꾸고 있긴 하지만 러시아과학아카데미는 대학의 상위기관이다(학부제도가 없고 전문가 양성기관으로 대학원만 존재한다). 중국(사회과학원), 북한(사회과학원) 등 기타 공산국가들도 모두 이 제도를 표방하였다.

그가 조사한 유적은 시베리아의 부레티 동굴 유적부터, 앙가라 강의 신석기시대 유적, 아무르 강 하류의 사카치 알리안, 콘돈 유적, 루드나야 프리스탄, 수추섬, 시미파트나야, 수추 섬 등 다양하다. 아직도 각종 논문에서 거의 첫 장에 그의 이름이 발견된다. ‘이 유적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조사한 사람은 오클라드니코프 다’

(그림 2. 사카치 알리안의 오클라드니코프)

(그림 3. 메드베쥐야 소프카 유적의 오클라드니코프)

(그림 4. 세레미테보 암각화유적의 오클라드니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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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한반도의 신석기시대는 대략 만 년 전부터 시작된다. 만 년 전에는 자연환경에 큰 변화가 있었던 시점이고, 인간생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그 간 갱신세의 빙하기가 끝나고 후빙기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현재와 같은 한반도의 모습, 한반도의 지형도 이 때 형성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토기가 사용되었다고 보며, 이를 기점으로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 최초의 토기는 원시적인 토기라는 뜻으로 고토기(古土器)(그림 1, 2)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저화도에서 구웠으며, 태토(토기 만든 흙)에 유기물질을 섞어서 다는 의견이 있다. 유기물질은 짚이나 동물털이다. 최근에는 태토에 섞은 것이 아닌 바른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태토에 유기물질을 섞은 토기는 고토기에서만 확인된다.

(그림 1. 제주도 고산리에서 출토된 고토기)

(그림 2.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고토기 2. 토기 편에 보이는 홈은 유기물질이 빠져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유기물질은 짚이나 동물털이다.)

이런 신석기시대 고토기가 출토되는 곳은 한반도에서는 제주도의 고산리 유적이다. 그리고 청도 오진리에서도 가능성이 있기는 한데, 절대연대가 제주도 보다는 늦다. 한반도의 육지에서는 아직 확인된 정확한 예가 없는데, 욕지도의 신석기시대 석기를 보고 가능성을 예측한 학자도 있다. 한반도 육지에서 가장 오래된 토기는 강원도에서 확인되고 있다. 현재의 자료로는...

(그림 3. 제주도 고산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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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아르세네프는 상트페테르부르그 출신으로 1902년부터 1910년까지 연해주를 조사한 사람이다. 장교이자, 탐험가, 지리학자, 고고학자로 알려져 있다. 1880년에 시데미 패총을 발굴한 얀콥스키 다음 세대의 연해주에서 유적을 찾은 사람이다.

(그림 1. 아르세네프)

1880년 베이징 조약 이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는 극동으로 사람들을 대거 파견하였다. 서양제국들이 식민지를 찾은것 처럼....

러시아에서 극동은 신비의 땅이었고, 지도도 작성해야 했고, 사람들에 대해서 파악도 필요했다. 이를 담당한 사람 중에 한명이 아르세네프이다.


지도는 아르세네프가 직접 그린 것으로 붉은 선은 그가 탐험한 경로를 그려 놓은 것이다.
우수리강과 시호테 일란 산맥을 직접 다니면서 지질, 지리조사 및 연해주의 성곽 유적을 대거 확인하고 기록에 옮겨 놓았다. 뒤에 책도 저술했는데, 『우수르 지방 탐험기(1921)』, 『데르수 우잘라(1923)』 등이 있고, 그 중 데르수 우잘라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소련 자본으로 일인 감독이 제작했으며 소련 배우가 출현해서 소련영화이다. 필자는 이 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쉽게 구할 수 있음). 데르수 우잘라는 팩트 소설인데,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그림 2. 아르세네프의 탐험경로, 아르세네프 직접작성)

(그림 3. 영화 데르수 우잘라)

현재 러시아의 연해주 주립박물관 이름은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아르세네프 박물관’이다. 블라디보스톡에 가면 중앙광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https://www.google.co.kr/maps/dir/43.1161604,131.8820854/43.1161376,131.8820697/@43.1138917,131.8846935,16.46z

-->연해주 주립박물관 위치)

아르세네프카 조사한 연해주의 중세시대 즉 여진과 발해 성은 최근에 댜코바 박사가 다시 연구해서 저서가 출판되었다(필자가 번역했으나,,, 아직 출판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번역서는 스폰서가 없으면 출판사에서 꺼려한다고 직접들었다)
아르세네프가 확인한 유적은 발해와 여진의 성인데, 발굴을 직접한 것은 아니고, 성곽은 드러나 있는 유적이기 때문에 눈으로 확인해서 지도에 표시하는 정도이지만, 러시아 인들은 그의 연구에 대한 평가를 높이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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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한반도 두만강 북쪽은 러시아의 연해주로 이어진다. 언제부터 연해주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을까?
아편전쟁 이후 맺어진 베이징 조약(1860년)을 기점으로 연해주를 포함한 극동을 할양하였다.   그러나 그 이전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러시아와 청은 자기네 국경 관리를 시작하였다. 흑룡강의 좌안은 러시아령, 우수리강의 서쪽은 청, 동쪽은 러시아와 청이 공동관리 한다는 다소 애매한 조약을 맺은 적이 있다. 

(그림1. 베이징 조약 당시 러시아 총독으로 참가한 이그나티예프의 초상화와 오른쪽은 베이징 조약 당시를 그린 것이다)


(그림 2. 베이징 조약 이후 극동의 총독이었던 푸탸틴과 러시아의 극동지도이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서 러시아 연해주의 고고학 조사는 19세기 후반 부터 시작된다. 아마도 얀콥스키가 해안가의 패총을 발굴하게 되었는데 1880년이다. 그 후에도 20세기 초반에 들어서 모스크바에서 파견나온 지질학자이자 탐험가인 아르세네프가 연해주의 지질조사를 하면서 발견된 성을 기록에 남겨 놓았다. 이것이 연해주 고고학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얀콥스키의 패총발굴이야기와 아르세네프가 남긴 연해주의 발해와 여진 성 이야기는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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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사진 1. 고성 문암리 출토, 오산리식토기)

오산리식토기는 한반도 동해안의 오산리 유적에서 최초로 출토되어서 명명되었다.
바닥이 편평한 토기에 구연부(입술주의)에만 문양이 시문되었다. 문양을 그리는 방법은 주로 시문구(문양을 그리는 도구)로 ‘찍는 방법’이다. 시문구의 찍히는 모양이 원형, 삼각형(사진 1) 등인데, 간단하게 비유하면 도장같이 생각하면 된다. 문양이 다른 도구로 찍은 것(사진 2)도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문양 찍는 도구 중에서는 빗처럼 생긴 다치구를 위에서 설명한 도장시문구와 함께 시문한 것(사진 3)도 포함된다.
가장 큰 특징은 바닥이 편평한 토기에 구연부 주변에만 문양을 찍어서 표현한다는 점이다.

(그림 2. 고성문암리 출토, 오산리식 토기)

(그림 3. 양양 오산리 유적의 C지구 출토, 오산리식 토기)

오산리식 토기는 동해안에서 융기문토기(http://eastsearoad.tistory.com/97)와 함께 출토될 가능성이 있다. 현재는 오산리 유적의 c지구의 예로 보면 융기문토기보다 이르지만.

오산리식 토기는 앞서 포스팅한 바 있는 융기문토기와 함께 한반도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에서 기원했다는 식민주의사관을 깨는 확정적인 물증자료이다.
왜냐하면 시베리아 토기로 생각된 바닥이 뾰족한 토기 보다 아래층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아래층에서 출토된 것은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반도는 신석기시대 당시에 크게 바닥이 편평하지 않은 토기를 사용한 한반도 남부와 바닥이 편평한 토기를 사용한 한반도 북부가 있었다. 이 두 개가 시간차를 두고 나타나는 지역이 강원도 고성, 양양 정도이고, 좀 더 내려온 죽변부터 남해안과 훨씬 밀접하게 이어질 것이다. 물론 간접적인 강원도의 영향도 있다.
 물론 고고학개설서에는 5개의 지역구분이라지만, 1980년대 주장을 아직까지 이어오고 있다(이유는...알지만 밝히지 못하겠다. 한국 모든 학문의 근본적 병폐정도로 밝힐 수 있다). 어디서부터 굴비를 다시 엮어야 할지.. 얼마나 많은 논문이 필요할지...

그리고 한반도 남부 중에서도 남해안에서 유적도 많이 확인되며, 밀집되어 있고, 연대도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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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융기문(隆起文)토기는 한반도에서는 주로 남해안과 동해안에서 확인된다.

융기문이라고 다소 생소한 단어를 쓰고 있지만, 국사책에는 덧무늬토기, 영어로 하면  Bowl with Raised Pattern 이다. 당연히 한국어나 영어가 훨씬 더 일반인에게 익숙하고 이해하기도 쉽다. 한자어가 많은 고고학용어도 고고학이 대중화되지 못한데 큰 몫을 한다. 일본의 영향이 크다.
 왜냐하면 필자도 고고학땅꼬마 시절에는 박물관에서 한자어로 적힌 유물이름이해가 안가면 오히려 영어캡션이 도움이 되기도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가 그렇게 한자에 문외한은 아니다.....

융기문토기, 덧무늬토기는 말 그대로 토기의 벽면에 점토띠를 붙여서 장식을 한 것이다.
신석기시대토기 문양이 시간이 뒤로 갈수록 여러 방법으로 음각(negative)을 한데 비해서, 비교적 이른 신석기시대에는 문양을 긋거나 찍거나 하는 방법이 아닌 양각(possitive)효과를 낸 점토띠를 덧붙여서 문양효과를 내었다.(*하지만 이 보다 더 이른 시기에는 네가티브 효과를 낸 토기가 제주도에서 출토되고 있다)

남해안에서는 바닥이 둥근 토기(그림1)가 주로 나오고, 동해안에는 바닥이 편평한 토기(그림 2)에 덧띠가 부착된다.

(그림 1. 남해안의 융기문토기)

(그림 2. 동해안의 융기문토기)

이 토기는 주로 남해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6900~5800 년 전(기원전 6000~4500)에 확인되고, 동해안에서는 지금으로부터 6000~5700 년 전(기원전 5000~4100)에 출토된되는데 이 보다 더 오래된 융기문토기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한반도 중부지역의 동해안보다 북쪽인 동해안북부, 연해주에서도 출토된다. 그 연대는 한반도 보다 약간 이르다.
한때는 이 융기문토기가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신석기시대 토기 였지만, 제주도 고산리 유적에서 고토기가 출토되었다. 고토기(古土器)는 다음 포스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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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고고학이란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하였다. 역사학과는 달리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 연구한다.

고고학에서는 00문화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이에 대해서 앞서 포스팅 한 바 있는데,, 환단고기 비판과 같이 묶여서 여기서 다시 설명한다.)

고고문화를 최초로 정의한 것은 소련이다. 고고문화는 동일시대로, 같은 지구에 분포하며, 공동의 특징을 가지는 유적과 유물의 복합체를 가르킨다(몬가이트 1955). 중국고고학은 고든차일드와 소련고고학의 고고문화 개념을 받아들였다(崔種圭 2008, 大貫靜夫 2008).
  
 예를 들면 가라는 유적에서 A, B, C라고 하는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와 가장 유사한 조합의 유적이 모이면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몇 개의 유형이 모이면 문화가 될 수 있다.
즉 유형은 유사한 유적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쉽게 이야기 하면 그러하다.

그림을 잘 보면 왼쪽과 오른쪽에서 출토된 동그라미가 완전하게 같지는 않다. 하지만 유적은 모두 ABC문화이다. 둘을 같은 문화로 보는 것을 어느 정도까지 묶을 것인가 하는 것이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다.


 유형은 고고문화로 가기 이전의 소극적인 개념이다. 어떤 지역에 비슷한 유형이 모이면 지역적 유형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시간대에 비슷한 유형이 모이면 시간적인 유형이 될 수도 있다. 유형이 집합되면 비로소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는 유형을 곧바로 문화로 부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이야기 해보면, 남아 있는 고고학은 물증사실을 통해서 옛 날 일을 추론하는 것이다. 논리정연하게.

필자는 일종의 퍼즐 맞추기라고 생각한다.
현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X, Y축을 놓고 빠진 곳의 상태를 고려해서 어디에다가 가장 정확하게 그 유물과 유적을 가져다 놓는가 하는 것과 함께 이를 이야기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빠진 곳이란 현재 모든 유적이 발굴되지도 않았고, 앞으로 그럴 수도 없을 것이다. 이미 날라 가 버린 것도 상당할 것이다. X축은 지역이고 Y축은 시간이다.
그래서 모든 설에는 A가 있으면 그를 반대하는 B 의견이 있다. 인문학이니 다 맞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단, 논리적이라면.(2012년환단고기는 X,Y축에 대한 개념없음).

늘 생각한다. 모든 논거를 완벽하게 증명하는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다......



타임머신...을 만들어서 다 같이 가보는 것.
왜 같이 가서 봐야 하는가? 안봐서 모르겠다고 할 수 있으니 반드시 반대 의견자와 함께 가야 한다.
 그런데 아마도 가서도 싸울 것이다. 이건 단순히 이 순간만을 보아서 그렇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설에 대한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답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인문학인가 싶다. 고고학은.


그런데 만들어질까 타임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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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에는 유적에서 가장 많이 확인되는 유구는 주거지(집터)이다.

주거지...(住居地), 집터이다.
집이면 집이지 왜 집터? 집은 없고 집을 짓기 위해서 땅을 판 흔적만 남기 때문이다.
국사책에 보면 ‘움집터’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걸 수혈(修穴)주거라고 한다..
수혈은 땅을 판 구덩이라는 뜻이다.

즉 한반도의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집은 땅을 파서 그 위에 나무 등을 이용해서 집을 지었습니다.
한반도의 토양이 유기물질을 대부분 녹이는 성분이어서 특수한 경우(늪, 패총, 화재)등이 아니면 유기물질이 남아 있을 확률은 거의 제로이다.
그래서 현대에 발굴을 하고 나면 집터만 남아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방형(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장방형(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원형(청동기시대)이 있다. 방형과 장방형은 모서리를 줄인 말각인 경우가 많다.

(*주거지의 사진에서 하얀색 선은 발굴후에 사진에서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선을 그은 것이다. 원래 남아 있는 것은 아님)

그림1. 신석기시대 방형 집터. 연천삼거리 유적, 화재난 주거지여서 목재가 남아 있다. 중앙에 돌을 두른 위석식노지

그림2. 신석기시대 장방형집터, 송죽리 7호 주거지, 노지와 기둥구멍이 남아 있다. 그림1에 비해서 주거지 깊이가 얉은데 땅의 특성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림 3. 청동기시대  장방형 주거지. 남강 대평유적. 한반도 남부에서 청동기시대 가장 이른 주거지


그림 4. 청동기시대 송국리형 주거지. 원형주거지. 주거지 중앙의 돌이 쌓여 있는 곳은 노지로 보지 않는게 학계의 통설이다. 이 원형주거지의 중앙에는 노지가 아닌 집수시설 혹은 석기작업공과 같은 공간으로 보고 있다.



주거지에는 기본적으로 그 집의 정보를 제공하는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노지이다.
노지는 불땐자리, 즉 화덕자리이다.
노지는 종류가 다양한데, 아무런 시설이 없는 무시설식, 돌을 두른 위석식(그림 1~3), 돌로 만든 상자 같이 생긴 석상 위석식(그림 3) 등 다양하다.

그 외 주거지에서 확인되는 것은 기둥구멍이다.
기동구멍이 잘 남아 있는 경우 집의 구조 파악을 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 외에 주거지 주변을 둘러쌓고 있는 일종의 배수로가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주거지도 있다(그림5). 이 주거지는 위의 원형집자리인 송국리형 주거지가 한반도 남부에서 확인될 때, 포항, 울산 등지에서는 원형 주거지가 아닌 배수구가 설치된 주거지가 확인된다.

그림 5. 청동기시대 주거지 배수로 시설이 있는 주거지.


수혈 주거지 이외에 고상건물지(그림 6)가 있다. 건물지라고 하는 것은 사는 기능 보다는 어떤 특별한 기능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수혈주거지 보다 훨씬 큰 건축물이었을 가능성을 보는 것이다.
 고상건물지는 일종의 원두막을 생각하면 된다. 발굴 후 남은 흔적은 집터 구덩이는 남지 않고 기둥구멍만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 있는 경우를 말한다. 규모가 작은 경우는 일종의 창고 같은 역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마을에 있으며 규모가 큰 경우는 일종의 신전이나 회의장소로 추정한다. 예를 들면 사천 이금동 유적이 대표적이다. 

그림 6. 청동기시대 주거지. 사천 이금동(좌). 고상식 주거지 복원도(우)


이 외에도 동굴을 집터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