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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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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보이스만 문화의 1단계토기)

(그림2. 보이스만 문화의 토기 2단계)

보이스만 문화에서는 그림과 같은 토기가 출토된다.
시문구로 연속해서 찍은 토기이다.
각 층마다 시문방법(문양을 찍는 방법),  문양 범위 등이 다르다.
 특히 1단계와 2단계 토기의 구연부(그림1, 그림2)는 문양을 빽빽하게 시문하면서 마치 계단처럼 만들어졌다.

그러나 3단계가 되면서는 이러한 현상은 없어진다. 문양 시문방법에 변화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앞의 포스팅을 참고하면, 각 층의 연대를 알 수 있는데, 크게 단절 없이 연속적으로 문화층이 쌓였다고 볼 수 있다. http://eastsearoad.tistory.com/118?category=732912


그러나 1단계, 2단계와  3단계 사이에는 연대의 공백이 200년 정도 있으며 구연부의 모양차이 때문에 보이스만 문화 내에서도 구분할 필요도 제기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3단계와 4단계 사이가 문양이 가장 크게 변화하는데,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반 독자가 볼 때는 그게 무슨 의미? 할지도 있지만 동아시아고고학에서 토기의 변화는 가장 큰 변화 중에 하나이다. 계통의 변화, 다른 지역으로 부터의 영향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 될 수 있다.


앞서 포스팅한 루드나야 문화와의 토기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http://eastsearoad.tistory.com/110?category=732912

http://eastsearoad.tistory.com/111?category=732912


고고학적으로는 다른 문화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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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그림1. 보이스만-2 유적의 가장 하층토기, 원보이스만 문화의 토기)


보이스만-2유적에서는 모두 6개 문화층에서 출토된 순서대로 토기의 연대가 지정되었다.
토기는 시문구(문양을 시문하는 도구)를 찍은 토기이다.

층마다 토기의 문양이 다르다. 시문범위, 시문방법, 문양형태.
한 층은 어떤 연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남겨 놓은 토기가 모여 있다.
보이스만 2 유적의 가장 하층(1층)은 그 상층과는 토기의 그릇형태가 다르다. 바닥이 뾰족하다.
그 상층은 모두 바닥이 편평하다. 뿐만 아니라 토기 문양형태도 차이가 있는데, 구연단에만 토기문양을 시문하고, 시문구도 단순하다. 상층의 토기에 빗살같은 도구로 찍은 토기라면, 가장 하층의 토기는 단치구로 찍은 토기이다. 그래서 가장 하층 토기를 보이스만 문화와는 다른 원(原)보이스만 문화라고 한다.


1층 보다 상층에 위치한 2층~7층 토기는 보이스만 문화라고 한다.
표의 가장 윗단에서 출토된 토기가 가장 하층이다. 토층을 거꾸로 표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면된다.


표의 가장 윗단에서 출토된 토기가 가장 하층이다. 토층을 거꾸로 표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하면된다.
표의 가로 방향토기는 같은 층에서 출토된 토기이다. 가장 끝에 있는 숫자는 그 토기가 출토된 층에서 검출된 탄소의 반감기로 측정한 탄소연대측정치이다. 지금으로 부터 몇 년 전으로 생각하면 된다.
표의 단이 바뀔 때 마다 즉, 층 마다
토기의 시문방법, 시문범위, 입술모양 등이 차이가 있다.


사실 토기연구는 고고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연구이다. 적어도 동아시아고고학에서는.
그런데 아마 대중이 가장 재미없는 부분은 이 토기와 관련된 것일 것이다.
적어도 블로그에는 좀 쉽게 적고 싶은데.....

다음 포스팅에는 좀 더 보이스만문화토기를 소개코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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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보이스만-2 유적에서는 무덤이 확인되었다.

2점으로 나누어져서 확인되었는데, 단독으로 뭍인 경우도 있고, 집단으로 매장된 경우도 있다.

(그림1. 보이스만 문화의 집단매장묘)

주로 양 다리와 양 발을 모두 굽히거나 혹은 다리만 굽힌 경우도 있으며, 옆으로 뉘운 자세인데, 측와굴신장(側臥屈身)(그림2)이라고 한다.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죽으면 사후강직이 일어나기 때문에, 굴신장은 의도적으로 묶어서 매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여성으로 판명된 인골 옆에는 토기를 두고, 남성 인골 옆에는 활자루와 작살을 둔 흔적이 확인된다.


(그림2. 여성인골)

(그림3. 보이스만 문화의 남성인골)

앞서 무덤을 살펴보면, 무덤을 판 흔적이 없다. 무덤의 깊이가 아주 얇았거나 거의 파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보이스만 문화에는 두개골을 변형시킨 인골도 확인되었다. 이른바 편두(偏頭)의 습속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4. 보이스만2 유적 출토, 변형된 두개골)

(그림5. 극동대학교 박물관에 전시된 편두)

신석기문화에서는 장신구가 많이 확인되는데, 편두도 일종의 성형이라는 점에서 신석기인들이 미를 추구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의 의미는 사회적 위치이다. 

 편두 된 두개골의 모양은 정수리가 상당히 올라가게 변형되어 있다(그림 4). 두개골을 변형시킴으로써 자연적으로 머리변형으로 자신의 위치를 높이고자 했을 수도 있다. 모자를 쓴 효과를 내는 것처럼... 이것은 두개골의 정수리 부가 상당히 올라가 있는 것을 보고 내린 추측이다.


주지하다시피 편두는 삼국지위서동이전에 가야인의 편두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실제로 김해예안리고분에서 출토되기도 해서 흥미로운 연구주제이기도 했다. 가야의 편두 습속이 일종의 DNA처럼 전해진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보이스만 문화의 편두와 가야의 편두를 연결시킬 고리는 충분하지 않다. 한반도 남부지방 신석기 유적에서 혹시 편두가 나온다면 또 모를까.....애매한 이야기이다.

고고학자료는 역사서 처럼 미주알고주알 적어 놓지 않아서 상상을 자극하기 좋다. 그러나 상상과 팩트의 경계는 어딜까? 하는 생각이 든다.

보이스만-2 유적은 패총 위에 무덤이 형성되어서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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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보이스만 2유적의 전경, 지도상으로는 유적은 바다와 인접하는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떨어져 있다)


연해주에서는 신석기시대에 무덤과 패총이 확인되었다. 앞서 설명한 바 있는 루드나야 문화와는 다른 토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남긴 유적이어서 다른 문화로 구분되었다. 이 문화의 이름은 보이스만 문화이다.

 보이스만-2유적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보이스만-2유적에서는 7000년 전부터 5000년 전 까지 6개의 층으로 문화가 변화해 온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 고고학 변화는 토기에서 관찰되는 것이 기본이다.
 
보이스만-2 유적은 연해주에서도 핫산지구 즉 제일 남쪽에 위치한 곳으로서 두만강 유역과의 거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 유적은 패총위에 형성된 무덤 유적이다. 현재의 위치는 앞의 지도와 같다. 패총은 주로 바다와 접한 곳에 생기는데, 현재의 위치는 바다와는 약간 거리가 있다. 패총이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동해의 기온이 계속 올라가서 유적이 바다와 접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가장 바다와 가까운 시점이 6000년 전이다(그림 1,2,3,4).

그림 2. 6000년 전 보이스만 만의 해수면(코로트키 외 1996)(그림은 현재 극동대학교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사진찍은 것임)(64번이 보이스만 2 유적)

(그림 3. 현재의 해수면, (코로트키 외 1996)(그림은 현재 극동대학교박물관에 전시된 것을 사진찍은 것임)(64번이 보이스만 2 유적)

그림 4. 동해의 기온변화(코르트키 1996, 김재윤 2017 재편집


패총유적이어서 뼈로 만든 골각기가 특히 많이 남아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연해주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토양에 산성성분이 많아서 유기물질이 잘 남아 있지 않는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유적에 화재가 나거나, 패총 위에 유적이 형성될 경우는 뼈와 가죽과 같은 유기물질이 남아 있게 된다.

앞으로 몇 번에 걸쳐서 이 문화의 토기와 유물들을 설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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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루드나야 문화의 쵸르토브이 보로타 유적의 장신구, 완벽한 옥기는 아닌 옥석, 사진외에도 장신구는 여러 점 출토되었음)

지난 포스팅에서 루드나야 문화의 박편석기 중 끝이 뾰족한 도구가 장신구(그림1)의 구멍을 뚫는 도구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어떻게 뚫었을까?


러시아에서 60년대부터 소비에트 시절부터 고고학에 자연과학의 방법을 많이 도입하였다. 대표적인 연구자가 세르게이 세묘노프이다. 그 가 연구한 것은 현미경을 이용해서 석기의 날을 치밀하게 분석해서 사용흔적을 찾아내고, 그 대상물을 찾는 것이다. 미세사용흔적분석이라고 한다(세묘노프 1968). 이 방법은 미국에서 더 발전된 듯 보인다((T. 더글라스 프라이스, 2013).


 그 사람은 바이칼 유역의 베르흐냐 부레티 유적에서 출토된 부채꼴 모양으로 구부러진 골각기의 1/3지점에 세석인을 끼워 넣은 유물에 주목하였다(그림2). 이것이 일종의 콤파스로 보았고 옥에 구멍을 뚫는 도구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았다(세묘노프 1968, 그림2). 이 세석인은 끝이 예리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 유적에서는 함께 둥근 옥제품이 출토되었다. 옥제품은 완벽하게  둥글게 잘려진 것이 아니라 조잡해 보인다.

(그림 2. 1~3: 베르흐냐 부레티 출토, 4~5: 시묘노프 제시(시묘노프 1968)

그림 3. 1·5: 글라스코보,2·3: 렌코바 1호, 4: 포노마레보, 6~8: 남보력고토 유적출토


 루드나야 문화의 장신구에 뚫려진 구멍도 완벽하게 둥글지는 않다(그림1). 특히 옥벽이라고 부를 수 있는 둥근 디스크 모양의 옥기는 옥귀걸이보다 만드는 방법이 어렵다. 원판으로 잘라내고 가운데만 동그랗게 잘라내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의 장신구는 완벽한 옥은 아님,)
 완벽하게 둥글게 잘라낸 옥기는 홍산문화에서 확인되는 옥제품으로 제작방법이 전혀 다르다.


필자는 루드나야 문화의 세석기는 석촉이 아니라 장신구 제작도구일 가능성에 큰 무게를 두고 있다. 석촉은 이미 타제 및 마제석촉이 유적에서도 확인됨으로 구지 세석인을 석촉으로 이용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루드나야 문화의 유적인 쵸르토브이 보로타 유적에서는 화재난 주거지여서 골각기가 많이 확인되지만 베르흐냐 부레티 유적과 같이 골제 콤파스가 출토되지는 않아서 아쉬운 점도 있다.


그런데, 루드나야 문화의 세석인 용도를 밝히는 것은 어떤 역사적 해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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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묘노프 1968, С. А. Семенов,1968, Развитие техники в каменном веке, НАУКА Ленинградскре отделение, Ленинград

T. 더글라스 프라이스(이희준 옮김), 2013, 고고학의 방법과 실제,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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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2은 루드나야 문화에서 사용되던 석기이다.

그림 1. 루드나야 문화의 박편석기로 제작된 도구(1/4)(김재윤 2016)


그림 1은 약간 석기에 대해서 아시는 분은 이게 왜? 할 수 있는 유물이다.
그림 1은 박편석기(박편석기는 작은 석기를 만들기 위해서 몸돌에서 떼어낸 석기를 말한다)를 다듬어서 만든 석기이다. 후기구석기시대 유물 아닌가?

 반은 맞고 반은 아니다. 사용은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이 석기가 신석기시대에도 계속 사용되는 지역이 있다. 연해주의 루드나야 문화에서도 계속 사용된다.

 그러나 후기구석기시대의 석촉인 슴베찌르게는 없다. 그림 1-1,2,7~12는 형태는 슴베찌르게처럼 생겼지만 용도는 슴베찌르게와 다르다. 제작방법도 뾰족한 끝부분과 자루에 연결되는 부분을 간접떼기로 가공하였는데, 필자는 이를 일종의 뚜르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유물은 쵸르토브이 보로타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장신구(사진1)가 다른 유적에 비해서 많이 출토되었다. 장신구는 사람을 치장하는 것으로 구멍을 내어야 하는데 구멍을 낼 때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김재윤 2016).




 왜냐하면 이 유적에서는 슴베찌르게의 역할을 한 석촉이 출토되기 때문이다. 이 석촉은 일반적인 신석기시대 석촉과 유사하다. 재질에 따라서 마제(갈아서 만든 것)(그림 2-1~8)와 타제(때려서 만든 것)(그림 2-12~18) 두 개로 나눠진다. 


그림 2. 루드나야 문화의 각종석기(1/4)


 즉 세석인으로 제작된 것들은 장신구 가공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 외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신석기시대에서 확인되는 마제나 타제의 석기는 수렵채집용 혹은 목제가공용일 가능성이 있다.

그럼 장신구의 구멍은 어떻게 뚫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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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토기 입술부위가 약간 벌어지며 토기의 몸이 둥글어 졌다. 입술주위에 점토를 붙인 문양이 있는데 이는 '융기문'이라고 한다. 쵸르토브이 보로타 출토)

(사진2. 사진1과 같은 집터에서 출토되었다. 문양은 마름모 모양의 문양새기는 도구를 찍어서 생긴 것이다. 쵸르토브이 보로타 출토.)


연해주의 루드나야 문화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 하나는 앞서 설명한 루드나야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세르게예프카 유형이다.


이것은 토기 특징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 다른 문화로 구분하지 않은 이유는 공통적인 토기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구연부에만 문양이 시문되며, 삼각형이나 능형 등의 문양을 새길 수 있는 문양 새기는 도구를 사용한다는 점이다. 만약에 차이점이 더 크다면 다른 문화로 구분이 되겠지만 아직까지는 하나의 문화 내부에 서로 다른 유형으로만 구분하고 있다.

루드나야 문화의 루드나야 유형 토기 모습은 앞서 설명하였다.

루드나야 문화의 세르게예프카 유형(사진 1, 사진2, 그림 1-12~34)은 루드나야 문화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우선 동체부가 둥그스럼해지면서 입술부위가 외반한다. 문양도 다양해지는데, 찍는 문양과 함께 점토띠를 붙이는 것들이 생기게 때문이다.

(그림1. 루드나야 문화의 루드나야 유형(1~11)과 세르게예프카 유형(12~34) 토기(김재윤 2014)


이 유형에는 유명한 유적이 있는데 쵸르토브이 보로타(Чёртовы варота, 악마의 문이라는 의미)의 동굴유적이다. 유적은 화재 난 집터 였는데, 인골도 확인되어 흥미로운 곳이다. 이미 포스팅한 바 있다.http://(http://eastsearoad.tistory.com/20?category=713320)

이 유형의 시기는 루드나야 유형 보다는 다소 느린 것으로 알려졌다. 대체적으로 7000년 전 ~6000 년 전에 유적이 많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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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사진1. 연해주 루드나야 문화의 토기)

 연해주의 신석기시대 연구는 루드나야 프리스탄, 마략 르발로프 등의 유적 발굴을 통해서 시작되었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를 살펴보면 마치 도장으로 찍은 듯한 문양(사진1)이 그려진 것이다. 혹은 점토를 덧붙여서 표현한 문양도 있다.
이 문화는 연해주에서 지금으로부터 7000년 전부터 6000년 사이에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몇 개의 유적(드보랸카-1, 루즈노바 소프카-2, 루드나야 프리스탄 유적)에서는 7000년 보다 500~600년 정도 이른 시기의 유적도 있다.)

유형

유적

연대(B.P.)

시료

참고문헌

루드나야유형

루자노바 소프카-2

7320±40

토기부착검댕이

파포프·바타르쉐프 2007

루드나야 프린스탄

7390±100.

7550±60

7690±80

댜코프 1992

세르게예프카 유형

드보랸카-1유적

7615±180

클류예프·가르코빅 2008

노보트로이츠코예-2유적

6920±50

클류예프·가르코빅2008

세르게예프카-1

6700±80

토기부착검댕이

파포프·바타르쉐프 2007

우스티노프카-8

6770±50

6830±50

6890±50

7020±90

토기부착검댕이

 

쵸르토비 보로타

5890±45

동물뼈

방사성탄소연대. 1998

6380±70

6575±45

6710±105

6825±45

7010±95

7110±95

사람뼈

쿠즈민 외 2002

쉐클라예보-7

6045±50

6120±45

6200±50

6280±50

6455±50

, 탄화된 밤

클류예프 외 2007

(표1. 루드나야 문화의 절대연대, 김재윤 2014)


 이 문화는 크게 두 개의 유형으로 나눠 진다. 루드나야 유형과 세르게예프카 유형으로 나눠지는데, 토기의 모습과 문양에서 차이가 있다.(유형은 쉽게 설명하면 비슷한 것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고고문화의 하위단위이다. 고고문화에 대한 포스팅한 바 있다. http://eastsearoad.tistory.com/category/고고학이란/고고학)


루드나야 유형의 토기 모습(그림 1-11)은 바닥이 편평한 저부에 구연부가 벌어진 옆에서 보면 마치 나팔과 같은 모습이다. 이 문화에서는 문양을 시문하는 도구를 하나만 써서 시문했을 가능성이 크다. 도구를 찍는 방법인데, 도장 모양에 따라서 찍히는 문양도 차이가 있다. 가장 많이 사용된 문양은 마름모 혹은 삼각형 문양이다. 

(그림 1. 루드나야 문화의 토기, 루드나야 유형(1~11)과 세르게예프카 유형(12~34)
 

이 문화의 토기 문양은 토기의 입술부 주위에만 찍힌다. 삼각형이나 마름모가 능형으로 연속해서 찍히면 마치 그물문양과 같다고 해서 아무르편목문 혹은 아무르그물문토기라는 별칭도 있다. 아무르편목문토기는 연해주의 루드나야 문화 토기 이외에도 아무르강 하류, 인접한 삼강평원의 신개류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사실 이 문화는 앞서 설명한 바 있는 연해주의 고토기 단계 다음에서 확인되는 문화이다. 고토기 단계의 연대가 만 년 후임으로 연해주의 신석기시대는 1000~7500년 전후로는 아직 유적이 찾아진 예가 없다.

대표적인 유적은 앞서 몇 개로 포스팅한 바 있다.

이 문화는 한반도 동해안의 문암리, 오산리 유적과 관련한 것으로 알려졌다(김재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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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리소보예-1유적에서 출토된 고토기. 4~7은 토기 표면을 가깝게 찍은 것이다. 무엇인가 빠진 흔적이 보이는데, 동물털로 추정되며, 사슴털일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

연해주의 신석기시대는 대략 만년 전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한반도의 제주도 고산리 유적과도 비슷한 시기이다. 연해주 보다 북쪽에 위치한 아무르강 하류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신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되는 곳인데, 만년 보다 이른 1만2~3천년 전의 유적들이 존재한다.

동아시아의 신석기시대는 유럽의 신석기시대 개념인 ‘신석기혁명’과는 차이가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신석기시대는 ‘신석기’라는 간석기를 사용했다기 보다는 ‘토기’사용을 기준으로 한다.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가장 큰 물질 변화가 토기라고 보는 것이다. 새로운 물질문화의 변화와 함께 지형변화가 심했던 시기이다. 왜냐하면 이때부터 후기 구석기시대의 최빙기를 벗어나서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한반도가 지금과 같은 삼면이 바다로 된 시기가 만년 전으로 알려졌다. 기온이 따뜻해 지기는 시기는 1만 3천년~1만2천년부터 시작해서 1만 년 전까지이다. 이때 동아시아 각 지역에 토기가 생겨났던 것으로 보인다.
 
연해주는 우스티노프카-3유적, 체르니고프카-알티노프카-5유적, 리소보예 -1유적(그림 1) 등이 알려져 있다. 이 유적의 토기도 앞서 포스팅한 바 있는 고토기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저화도의 소성에 태토에 짚이나 동물털을 섞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에는 태토에 유기물질을 혼입한 것이 아니라 덧바른 흔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림 2. 우스티노프카-3 유적에서 출토된 고토기)

(그림 3. 체르니고프카 알티노프카-3 유적의 고토기)

연해주는 아무르강 하류처럼 이 시기의 유적이 많이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주거지 등도 확인된 예가 없어서 그 시대의 사람 사는 모습을 잘 알 수 없는 점 등이 아쉬운 점이다. 그러나 아무르 강 하류에서는 많은 유적이 확인되며, 유적에서 주거지가 확인되는 등 좀 더 인간활동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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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인을 두고 ‘동양인의 사상을 한 유럽인’이라고들 한다.

필자는 그런 이야기와 꼭 맞는 예를 전공하고 있는 고고학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이제 000기념논총 이런 것이 거의 없어지다 시피 했다. 정년기념논총, 회갑기념논총 등 대학자 혹은 스승을 기리는 논문을 엮은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는 아직도 그런 것을 만든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더 보수적이다.
이런 인물 중에 한 명으로 오클라드니코프가 있다. 이 분은 돌아가신지가 30년이 넘었지만 필자가 유학할 당시 2008년에 탄생 백주년 기념논총을 보았다. 새삼 러시아에서 그 분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그림1. 오클라드니코프 선생 탄생 백주년 기념논총)

대략 러시아 고고학의 아버지? 정도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소련아카데미 아카데미 학술회원이고 연해주를 포함해서 시베리아 전역을 누비며 수많은 조사를 하였다.


*한국에서 연구자는 대학교수가 되기를 바라지만, 러시아에서는 아카데미 학술회원이 되길 바란다. 소련시절에는 3D업종이 대학교수,의사였다고 하니...(아이러니 하게도 공산주의 시절에도 돈 많이 못 버는 직업이 가장 비 인기직종이었다. 두 그룹이 가장 돈 못 버는 계층이라고 한다. 현재는 그 정도는 아님). 연구자는 아카데미의 연구원을 거쳐서 아카데미 학술회원이 되는 것이 가장 큰 명예이다. 대학교수는 아카데미 연구원이 되지 못하면 가는 곳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러시아도 교육체계를 대학 중심으로 많이 바꾸고 있긴 하지만 러시아과학아카데미는 대학의 상위기관이다(학부제도가 없고 전문가 양성기관으로 대학원만 존재한다). 중국(사회과학원), 북한(사회과학원) 등 기타 공산국가들도 모두 이 제도를 표방하였다.

그가 조사한 유적은 시베리아의 부레티 동굴 유적부터, 앙가라 강의 신석기시대 유적, 아무르 강 하류의 사카치 알리안, 콘돈 유적, 루드나야 프리스탄, 수추섬, 시미파트나야, 수추 섬 등 다양하다. 아직도 각종 논문에서 거의 첫 장에 그의 이름이 발견된다. ‘이 유적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조사한 사람은 오클라드니코프 다’

(그림 2. 사카치 알리안의 오클라드니코프)

(그림 3. 메드베쥐야 소프카 유적의 오클라드니코프)

(그림 4. 세레미테보 암각화유적의 오클라드니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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