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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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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에스톤카 성곽


 달네고르스크 지역의 모노마호보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1.5km 떨어진 루드나야 강의 입구에 위치한다(그림34). 19세기 말부터 주민들에 의해 에스톤카 성곽으로 불리었다. 1989년 아무르 지역 연구회에서 테튜헤 강 계곡의 요새로써 팔체프스키의 정보에 의해서 알려졌다. 1980년대에는 타타르니코프에 의해 유적이 조사되었다. 1992년 댜코바에 의해서 성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정보와 평면도가 작성되었다. 1996년 아무르-연해주 고고학탐사대에 의해서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


 성벽은 아주 정확한 장방형으로 각 성벽은 동서남북 방향과 일치 하며, 장축방향은 남북이다(그림 34). 성벽은 돌과 흙을 이용해서 축조하였다. 성의 장축은 100m, 단축은 85m이고, 정의 평면적은 8500㎡이다. 동쪽 성벽은 높은 편인데, 외측면에서는 2~2.5m, 내측면에서는 1.2m정도이다. 서쪽과 동쪽 벽을 따라서 해자가 있다. 북쪽벽에 문지가 있다. 남쪽은 성벽을 따라서 이중 해자가 존재한다. 이 곳에는 문지가 있는데, 문지를 기준으로 해서 서쪽방향으로 남쪽 성벽이 2중으로 설치되어 있다. 성의 남쪽 바깥에는 강으로부터 들어오는 입구를 막는 방어용 성벽이 일자로 뻗어 있다. 성에는 돌로 만든 우물이 잔존한다.


그림34. 에스톤카 발해성곽 평면도


 성에서는 지표조사 및 시굴조사를 통해서 토층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그림 35). 상층은 부식토층으로 민속학적인 유물이 남아 있었는데, 19세기 성안에 살았던 농부의 것이다. 아래층은 사양토층으로 8~10세기경의 발해 토기편이 확인되었다(그림 36).


그림 35. 에스톤카 발해성곽의 시굴토층도


그림36. 에스톤카 성곽출토 발해 토기편


 * 에스톤카 성은 평지성으로 장방형 평면형태이고, 성 내부에는 내성과 보루 등의 별다른 시설이 없다. 크기로는 소형으로, 치가 확인되지 않는다. 성벽은 돌과 흙으로 축조되었는데, 용도는 취락의 방어용으로 생각된다. 발해국(7~10세기) 시기에 축조되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루드나야 강은 큰 강으로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서 동해로 떨어지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30페이지 지도, 사진 12). 길이는 73km, 전체 수계의 너비는 1140㎢이다. 강으로 떨어지는 전체 길이가 942m이고, 경사는 12.9도 이다. 이 강 유역에는 지류를 포함해서 942개의 강이 있고, 전체 길이는 939km에 달한다. 강 네트워크의 평균 밀도는 0.82㎢이다. 가장 큰 지류는 고르부샤(Горбуша, Gorbusha) (강의 좌안, 길이 16km), 크리바야(Кривая, Kribaya) (강의 우안, 길이 37km), 프라마야(Прямая, Pramaya)(강의 우안, 길이 24km), 모나스티르카( Монастырка, Monactyrka) (강의 우안, 길이 23km)이다.
 이 강의 유역은 시호테 알린 산백의 동쪽 산 기슭 부분부터 시작된다. 집수지는 고지대나 높이 1000~1200m 높이의 암벽사이이다. 산의 아래 부분에는 훨씬 매끈하고 높이도 300~500m정도로 낮아졌다. 산의 경사면에는 계곡성 지류와 폭포 등이 있다.
  강 유역에서는 많은 광물자원 들이 확인되는데, 대부분 모래와 실트암이 많고 드물게는 석회암이 판상으로 들어가 있는 종류석이 있다. 강의 계곡에서 생토층은 모래, 점토, 쇄석으로 성층된 실트암층이다. 집수지의 수풀 밀집도는 82%에 달한다.
 강의 입구는 매우 넓어서 살기에 적합한 곳으로 생각된다. 루드나야 강의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루드나야 강 유역에서 1906년 아르세네프는 그의 3번 일기장에서 ‘테튜헤 강과 리브나야 강에는 아주 넓은 평야 지역으로 사람이 살기에 아주 적합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림 31. 루드나야 강 유역의 성곽



 이 강 유역에는 모두 4개의 성곽 유적이 발견되었다(그림 31). 에스톤카, 모호마호프스코예, 바시코프스코예, 프리스탄스코예 성곽 유적과 자연방어시설인 달네고르스코예 유적, 단순 참호시설로 보이는 모나스트르스코예 유적이다. 다음은 성곽에 대한 설명인데, 강 상류에서부터 하류로 설명하고자 한다.


1. 모노마호보스코예 성곽 

 모노마호보스크 마을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진 곳으로 루드나야 강의 하류로 들어가는 프라마야강의 지류인 라즈드보예노예(Раздвоенны, Razdvoenny)샘과 볼로(Болотны, Bolotny)샘 사이의 단층 경사면의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언덕의 경사가 동서 방향과 일치한다. 언덕의 너비는 80m정도이다. 경사면에는 중앙이다. 성에 아주 조그마하게 불룩 솟아 있다. 북과 남쪽은 절벽과 맞닿아 있다.
 성벽은 삼면만 잔존해서 ‘ㄷ’자 모양이다. 북쪽벽은 절벽인  자연적 입지를 그대로 이용하였다. 동쪽벽은 높이 1.5m로 너비 3m의 문에 의해서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부채꼴 모양의 북쪽벽과 직선의 남쪽벽이다. 동쪽벽의 길이는 70m이다. 남쪽벽은 직선인데, 높이는 1m 길이는 108m 정도이다. 성벽의 남동쪽 모서리에서 40m 떨어진 부분에 너비 4m의 절개면이 있는데 문지로 보인다. 이 곳에는 남쪽 경사를 따라서 나 있는 길이 하나 지나간다. 서쪽면에는 이중 성벽인데, 외벽은 둥그스럼한데 길이가 90m정도이다.
 서벽은 남쪽벽과 연결되어서 북쪽부분의 돌출부로 연결되어 있다. 서벽의 길이는 70m이고 높이는 2~6m이다. 내성벽은 2중의 외성벽에 의해서 둘러쌓여 있고, 길이는 60m를 넘지 않는다. 성곽의 평면크기는 7000㎡이다. 성벽은 돌과 흙으로 축조되었다. 내성벽의 남서 모서리 안쪽에는 돌로 막음 되어 있다(그림 33).
 시굴 결과 다음과 같은 토층상황을 알 수 있었다.
 1. 부식토층의 두께: 0.03~0.05m
 2. 돌이 섞인 암갈색 사양토 두께: 0.01m
 3. 돌과 쇄석이 섞인 암갈색 사양토 생토

 문화층은 제 2층으로 암갈색 사양토인데, 횡방향의 차양형 파수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발해문화에서 아주 특징적인 유물이다.
 1953년에 오클라드니코프를 단장으로 한 극동 고고학탐사대가 처음으로 조사하였고(오클라드니코프 1959), 1973년에는 지표조사 및 평면도를 작성하였다. 1978~1979년에는 간단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림 32. 모노마호프스코예 성곽유적

*성곽은 산지성으로 평면형태가 ‘ㄷ’자형으로 개방형이다. 성벽이 여러 개로 복잡하다. 성의 구조물에는 치는 없고, 두 개의 문지만 확인된다. 성 내부는 아주 단순하며, 내성과 보루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성벽은 돌과 흙으로 축조되었다. 용도는 모나스트르카 강 계곡의 교통로를 통제하는 방어시설 및 마을로 생각된다. 발해국가 시기(7~10세기)에 축조되었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18. 6. 9. 18:00 책소개

책소개..

2년 전에 원고작성된 글이 공동저작으로 나왔습니다.

제목은 고고학이지만, 신화, 민속학, 고고학 등 여러분야를 전공하는 연구자가

북방과 제사라는 주제로 적은 글입니다.

https://www.kras.or.kr:6033/?c=user&mcd=ksc0002b&me=bbs_detail&idx=101007

(링크는 한국고고학회 홈페이지의 신간소개. 제목, 목차 등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의 주제에 암각화도 넣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2년 전만해도 거기까지 오지랖을 넓힐 여력이 안되었던 것 같습니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해야지...하면서도.


제의..제사...신..이런 것을 고고학으로 밝힌 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일입니다.

하지만 유물 가운데 그런 것들이 종종 있습니다. 정말 실용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물론 무덤과 거기서 나온 출토품도 실용적인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이를 제외하고도 그런것들이 나오거든요.

그런 것들은 종교적인 해석으로 밖에는 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토우(흙으로 만든 인형), 암각화...이런 것들이 해당될 것입니다.

신화학자와 민속학자가 같이 해서 더 좋은 것도 같네요.

(저의 글은 약간 이미 퇴색한 듯도 한 것이 원래 이 책이 2016년에 나와야 하고, 저의 단행본은 2017년에 나오는 것이 맞는데...이 책이 늦게 나오는 바람에. 하여간 나와서 다행입니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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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6. 시바이고우 성곽

 제르칼나야 강과 그 오른쪽 지류인 우스티노프카 강(시바이고우) 사이의 가장자리 산맥부에 위치하는 카발레로프 지구의 우스티노프카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1950년대 지질학자가 발견했고, 2000년에 타타르니코프(2001)가 조사했다. 2002년 아무르-연해주 고고학 탐사단에 의해서 조사되었는데, 그 때 정확한 평면도를 작성하고 치와 방어시설, 집(152㎡) 등을 발굴 조사하였다.
 우스티노프카 강 입구에는 강에 의해서 분수령이 두 개의 구릉으로 나누어진다. 북쪽 구릉은 동서 방향으로 쭉 뻗어 있고, 남쪽의 작은 구릉은 남동쪽으로, 부채꼴 모양으로 굽어져 있다. 강 반대 방향으로 떨어지는 구릉의 경사면은 그다지 가파르지 않다. 반면에 강 쪽의 경사면은 매우 가파르고 암반절벽이다. 구릉의 정상부에는 아래에 위치한 조그만 강으로 합쳐지는 작은 시냇물이 있다. 전체 북쪽 구릉의 경사는 북쪽의 언덕은 경사가 그렇게 크지 않고 점차적으로 작아지고 있다. 분수령이 나누어지는 지점의 너비는 100m이고, 동쪽방향에서 남쪽으로 튀어나온 부분은 15~20m이다.
 유적의 내외면적인 특징은 연해주의 동하국의 산지성과 아주 유사하다. 구릉의 정상부에 건축물이 위치하다. 행정관청, 주거구역과 생산경제와 관련된 건물은 구릉의 경사면에 인공적인 테라스를 만들어서 축조하였다(사진 8, 9, 그림 25).
 


그림 25. 시바이고우 성의 평면도

성의 특징


 성벽은 구릉의 정상부에 형성되어 있고 전체 길이는 1686m이다. 성벽은 북쪽(1005m), 남쪽(410m), 서쪽은(271m)이다. 성벽은 부슬거리는 흙에 작은 돌이 혼입되어 있다. 구릉의 정상부와 성벽을 따라서 유물이 채집되었다. 북쪽의 성벽 안쪽을 따라서 도로의 흔적이 있다. 도로에서부터 성벽의 높이가 1m정도이다. 성벽의 외벽은 높이가 3m에 달한다.

1)문지
문은 두 곳에서 확인되는데, 첫 번째 문은 성벽이 약 2m정도 절개되어 있다. 문은 구릉의 정상부에 북쪽과 남쪽 성벽이 갈라지는 부분에 문이 위치한다. 두 번째 문은 자연적인 문으로 남쪽 구릉으로 뻗어지는 그 부분을 이용하였다.
 성곽내의 방어를 위한 시설물은 서쪽, 북쪽, 남쪽 성벽에 설치해서 되어 있다.

2)서쪽방어시설
 가장 크고 두꺼운 방어시설로 자연적인 지형을 가장 잘 이용하였다. 서쪽성벽은 북쪽 성벽에 연결되는데, 서벽의 바깥쪽에 벽을 쌓아서 평면형태 삼각형 모양의 옹성을 만들었다. 이 곳의 북쪽길이는 270m, 서족의 길이는 271m이다. 이 서쪽방어시설에는 자체적으로 3개의 방어시설이 있다.

(1) 제1 방어구역
 성벽과 해자와 더불어 5개의 치가 확인된다.
 1번 치.-북벽과 서벽의 접하는 부분에 위치하며 성곽에서 가장 높은 지점(강을 기준 148m)이다. 치의 기본적인 평면형태는 타원형으로 20×25m이다. 치의 상부는 반타원형으로 상부의 크기는 7.5×6.5m이고, 치의 높이는 3.5m이다. 측면은 둥글다.
 치의 앞쪽에 궁형 모양의 치를 호위하는 성벽이 존재하는데, 길이는 40m, 높이는 0.3~0.5m이다. 성벽과 치 사이에는 해자가 돌아간다. 해자는 치를 따라서 돌아가는데 깊이가 1m에 달한다.
 이 치 밖의 이중성벽은 분수령의 산마루와 교차하는데, 이곳에서 10m 떨어진 곳에 해자가 길이 15m, 너비 4m, 깊이 0.4~0.5m로 설치되었다.
 치와 서벽사이에는 성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 곳에 2개의 투척기가 설치되었다. 투척기의 크기는 3×7m, 다른 한 개는 2×4m이다. 투석은 지름 0.12~0.2m의 바다 자갈로 만들어져 있는데, 좀 더 큰 것도(0.15~0.25m)있다. 대부분 돌은 2kg을 넘지 않는다.

●  1번 치를 발굴조사해서 축토양상을 살펴보았다. 상부는 4×5m의 반타원형으로 넓고 편평하다. 중앙에는 삼각형 형태로 돌로 쌓아진 곳이 확인되는데, 높이는 0.3~0.5m 정도이고 크기는 1.3×0.9m이다. 큰 쇄석으로 쌓여져 있는데, 이 석축의 주변은 비교적 편평한 돌로 쌓여져 있는데 특히 측면은 길쭉하고 큰 돌로 쌓여져 있다. 석축의 중앙에는 여러 크기의 돌이 쌓여 있다. 이 석축의 동쪽에는 연접해서 쇄석으로 둥글게 쌓아 놓은 석축이 있으며, 높이와 깊이가 0.3m 정도이다.
 치의 측면부 상측에는 넓고 편평한 강 바위가 놓여 있고, 남쪽에는 여러 크기의 돌이 길이 3m, 너비 1~1.9m가량 쌓여 있다. 이 돌 사이에서는 목탄과 소토, 금속제품등이 확인되며,  건축 부자재로 생각된다.
 치의 북쪽에는 아래로 떨어지는 계단모양의 4각형 석축이 쌓여져 있다. 상면의 길이는 3.5~3m, 하면의 길이는 2.5~1.5m, 너비는 0.2~0.3m 이다.
 성벽과 치가 접하는 부분은 돌로 연결되어 있다.
 
● 2번 치는 1번치로부터 54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평면크기 4×4.5m 반원형이고, 높이는 3.5m 정도이다. 치의 상단은 넓고 편평하며, 중앙은 지름 1.5m 너비로 둥글게 약간 파여 있다. 치의 서쪽에는 평면형태 타원형으로(5×2m) 높이 0.2~0.25m 정도로 돌이 축척되어 있다. 이 석축위로 성벽까지 단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 3번 치는 1번 치에서부터 148m, 2번 치에서부터 25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치의 평면형태는 반원형으로 평면크기는 12×15m이다. 치의 상단부는 다른 치와 마찬가지로 높이 0.12~0.15m의 석축이 쌓여있다. 너비는 3×3.2m이다. 치의 상단부는 편평하고 너비 2m가량, 깊이 0.18m가량으로 둥글게 파져 있다. 이 석축은 1번치 방향으로 향해있고, 치의 높이는 외면에서는 4.6m, 내면에서는 3.1m에 달한다. 이곳의 치에는 대부분 맞배지붕 구조의 주거지가 확인되는데, 3번에서도 확인된다. 평면형태 16㎡로 기둥구멍흔적과 온돌시설물이 설치되었던 것이 확인된다.
●  4번 치는 1번 치에서 33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평면크기 3×3m의 반원형이다. 중간에는 타원형의 구덩이가 1×1.5m로 파져 있다.
●  5번 치는 1번치에서부터 130m 떨어진 곳, 4번치로부터 97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치의 상부에는 평면크기 3×3m 반원형의 석축이 남서방향으로 불룩 튀어 나와 있다. 중앙에는 직경 0.5m 정도 크기의 원형수혈이 있다. 치의 모서리는 1번 치의 모서리쪽이 0.3m 정도 높여있다.

(2) 제2 방어구역

 1번치의 모서리에서부터 서쪽으로 65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삼각형 모양의 옹성과 치가 설치된 곳으로 평면적은 3000㎡이다. 이 곳은 성벽이 이중으로 설치된 곳으로 외벽의 길이는 115m, 원래의 성벽인 내벽은 75m이다. 중앙에는 너비 2m, 높이 20m 가량의 문이 설치되어 있다. 옹성의 내부에는 계단식의 공간이 있다.
 6번 치는 1번 치에서부터 82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이중 성벽이 설치되었다. 치의 상단부는 반타원형으로 크기가 4×5m이고, 외면에서 잰 높이는 6.5m이다.
 2번 방어구역은 옹성으로써 서쪽에서부터 성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절벽 쪽으로 문이 하나더 확인된다.

3) 제 3 방어구역
 1 번치에서부터 북벽을 따라서 220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지형적으로 분수령에서 약간 튀어나온 곳에 위치한다. 반타원형의 평면형태로 크기가 50×30m,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타원의 장축방향이 원래 성벽방향과 같이 일치하고 있다. 외성의 길이는 60m정도인데, 외벽은 높이가 4m에 달하지만 안쪽에서는 1.3m 정도이다. 이 옹성의 안쪽에는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면적이 45~150㎡이다.
 옹성의 안쪽에는 평면크기 4×3m의 4개 방형수혈이 있다. 옹성 내의 북쪽 구릉의 정상에 가까운 곳에는 3×2m의 작은 수혈이 확인된다. 
성벽의 안쪽 면에서부터 아래 방향으로 내려가는 도로가 확인되는데, 문지의 너비는 2.5m이다.
 이 곳에는 돌이 많이 쌓아져 있는 곳이 있는데, 타원형으로 쌓인 모양 으로 보아서 주거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3)북쪽 방어시설
 이곳에는 제4 방어구역과 함께 7번 치가 있는 곳이다. 이 곳은 구릉을 쭉 따라서 동쪽분수령이 끝나는 부분까지 성벽이 이어져 있다. 성의 안쪽에서 높이는 1m가량으로 바깥쪽도 비슷하다. 북벽의 길이는 735m에 달한다.

(1)제4 방어구역
 북쪽 벽의 가장 동쪽부분에 위치하는데, 성벽이 경사면 상부의 돌출부 산마루를 따라서 축조되었다. 산마루 부분을 반원형으로 돌아가면서 설치되었다. 평면적 10~30×130m가 해당되고 , 이곳에는 7~8번 치와 두 개의 작은 보루가 확인된다.
 
●  7번 치.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고, 분수령의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높이는 69m이고, 평면형태는 타원형으로 5×6m의 너비이다. 동향이다. 치의 높이는 대략 3m이고, 중앙에는 직경 3m 가량의 수혈이 있다.
●  8번 치. 평면형태 반원형으로 크기는 15×12m이고, 성벽과 평행하고 있다. 외면은 편평하나 서쪽방향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  1번 보루. 4번방어구역의 중간에 위치한다. 방형으로 평면크기는 7.5×7.5m, 4면이 동서남북과 일치하게 방향하고 있다. 벽의 내면 높이는 0.2~0.4m 가량 잔존하고, 외면의 높이는 0.7m이다. 벽의 북쪽은 돌출부의 경사와 맞닿아 있고, 해자가 돌아간다. 보루의 내부는 중앙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지고 있다.
●  2번 보루. 1번 보루에서 북서쪽으로 8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방형으로 너비는 7×7m이고, 4면이 동서남북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벽의 외면 높이는 0.3m가량이고, 내면의 높이는 0.5m이다.

4) 남쪽 방어시설
 남쪽면은 거의 절벽이어서 지형적인 이유로 특별한 시설물 없이도 방어가 가능하였다. 구릉정상부를 따라서 성벽이 축조되어 있고, 2개의 치가 있는데, 1개는 성벽이 끝나는 곳에 위치한다. 성벽의 일부가 성의 남동쪽 외벽에 위치한다.
 성벽은 우스티노프카 강의 계곡부 정상에 위치하는데, 성의 높이는 0.5m를 넘지 않고, 산마루의 일부분을 성벽으로 이용하고 있다. 길이는 410m이다.   

● 9번 치. 서쪽과 남쪽 성벽사이의 모서리 부분에 위치한다. 평면형태 반원형으로 크기는 3×3m이고, 성벽의 방향과 평행하고 있다.

● 10번 치. 남벽의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다. 치는 반원형의 공간이 두 부분 상하로 있는데, 상면의 평면크기는 9×6.5m, 하면의 크기는 6×5m정도이고 3.5m가량 떨어져 있다. 하단의 중앙에는 직경 1.5m, 깊이 0.3m가량의 수혈이 있다. 이 공간 옆에는 바다자갈이 무작위로 쌓여진 곳이 0.15~0.2m가량 쌓여져 있고, 평균 무게는 1.5kg이다.

5) 떨어져 있는 성벽
 
동쪽 산마루 끝의 경사면에서 우스티노프카 강 쪽으로 성벽이 잔존한다. 성의 남쪽면을 방어하는 부분으로 보이는데, 성벽은 직선이고 길이 30m, 높이 0.8m로 쌓여져 있고, 돌과 흙으로 축조되었다. 돌은 강에서 옮겨온 것으로 보이는데, 둥근 자갈돌이 대부분이다.

6) 성의 내부
 성의 내부에는 전통에 따라서 여러 시설물이 확인되는데, 성의 내성, 보루, 생활공간 등이 내성벽으로 분리되어 있다.

(1) 보루
 보루는 북쪽벽에서부터 남쪽으로 29km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평면형태 정방형으로 크기는 25×25m이고, 높이는 1.5∼2m이고, 보루의 안쪽에서 높이는 5m에 달한다. 보루 남쪽벽의 정중앙에는 문지로 보이는 곳이 2m정도 절개되어 있다. 보루문을 통해서 도로가 설치되어 있다.

(2)생활공간
 북쪽과 남쪽의 인공적으로 구축된 테라스위에 위치한다. 토층상에서 보면 이 인공적인 테라스는은 아주 엄격하게 판축기법에 따라서 축조되었다. 맨 아래에 구릉의 경사면을 다듬어서 그 위에 소토로 가장 하단부를 만들고 그 위에 무거운 흙을 한겹 더 덮었다. 인공 단층의 어떤 부위에는 높이 10~12m에 달하는 곳도 있다. 이 곳의 북쪽에는 319개의 장방형 주거지 수혈이 확인되는데 큰 것은 3×5m이다. 테라스의 크기에 따라서 주거지가 1개부터 5개까지 잔존한다. 당연히 주거지 주변에는 생업과 관련된 구역이 있는데 농사짓던 곳도 있었다.

 (3)생활공간
 성 내에서 주거지 1동을 포함해서 한 곳 확인되었다.
 주거지. 지상식 주거지로, 평면형태 장방형으로 6×4m로 그 크기는 24㎡이고, ‘ㄱ’자형 온돌시설과 기둥구멍 등이 주거지의 시설물로 확인되었다. 주거지 장축방향은 북쪽이다. 주거지 중앙에는 지름과 깊이가 0.4m인 기둥구멍이 있는데, 그 안에 돌이 있었다. 다른 기둥구멍은 직경이 0.3~0.4m이고, 온돌의 맞은편에는 벽체가 일부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주거지의 남쪽벽에는 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의 왼쪽에는 길이 1.4m의 돌로 만들어진 부뚜막이 설치되어 있다. 부뚜막의 높이는 0.4m 정도이다. 구들장은 바닥에서 높이 0.2m정도로 너비 1.5×4m가량이다. 연도는 편평한 돌로 놓여 있는데, 주거지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에 잔존한다. 온돌의 연기는 굴뚝을 통해서 외부로 빠져 나갔을 것이다. 연도의 단면은 직경 0.6m로 둥글고, 돌로 제작되어 있다.
 주거지의 바닥은 5cm정도 두께로 점토 다짐되어 있다. 주거지에서는 북송시대화폐인 崇寧重寶(1102~1106년에 사용)가 발견되었다.
 
 생업 시설물. 주거지의 동쪽에서 아주 심하게 교란된 채로 확인되는데, 테라스를 따라서 주거지 앞에 임시적인 노지가 몇 기 설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내성

유적의 북서쪽에 남벽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이 내성의 구조는 매우 복잡하다. 전체적으로 ‘ㄱ’자 평면으로 크게 3부분으로 나눠지는데, ‘ㄱ’자의 모서리 부분의 평면형태 5각형의 공간과 그 각각의 가장자리에 장방형의 공간이다. 성벽의 가장자리는 모두 흙을 덮어 처리하였다. 내성벽의 높이는 0.5m이다. 성벽을 따라서 도로가 지나가는데, 이 도로는 북쪽 산마루의 경사면을 따라서 나 있다. 
 산마루 정상부에 시설물이 위치하는데, 평면형태 장방형으로 30×35m이다. 테라스 위에는 5개의 편평한 곳이 있다. 서쪽벽에는 너비 1.5m의 문이 있고, 성의 위쪽으로 향하고 있다. 성의 동쪽 모서리 부분에는 내성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이 있다.
 경사면 아래에는 두 번째 시설물이 있는데, 그 내부에는 벽이 있고, 그 사이에 도로가 나 있다. 상기한 건축물은 장방형으로 크기가 95.7×40×35m이다. 내부는 7개로 나눠지는데 점차 지형에 따라서 낮아진다. 테라스의 높이는 17m에 달한다. 이 공간의 바로 아래쪽에는 이등변 삼각형 모양으로 공간의 모가 줄어지며 전체 내성 모양이 ‘ㄱ’자 모양이 되었다. 평면형태 삼각형모양의 벽의 길이는 각각 35, 30, 60m이다. 문은 남동쪽 방향으로 나 있는데 너비가 1.5m가량이다. 이 곳에 연접된 평면형태 5각형 모양의 공간에는 ‘ㄷ’자 모양으로 높이 30cm정도의 토벽이 있는데, 남서벽이 없다.
 이 내성은 행정관청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시바이고우 성은 산지성으로 그 평면형태는 자연적인 지형 탓에 부정형이다. 크기는 매우 대형이고, 성안에 내성과 보루 등이 존재한다. 성벽은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하였다. 성에는 치와 투석기 등이 확인되는데, 전쟁 시에 사용 되었던 행정적인 용도였을 것으로 보인다. 유물은 화병형 토기, 철제품, 숭녕중보 등이 확인되었다. 시바이고우 성은 동하국이 존재했던 1217년부터 1234년 사이에 축조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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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고르노레첸스크-3 성곽
 고르노레첸스크 마을의 동쪽부에 위치하는데, 사도바야 거리 11번지의 집 맞은편 다리에서 150m 덜어진 곳에 위치한다. 언덕은 동서로 길게 늘어진 타원형으로 곳곳에 말라버린 강줄기 등이 확인된다. 언덕의 남쪽부는 절벽으로 높이 17m이다. 언덕 가장자리에 석벽과 해자가 있다. 석벽은 많이 허물어져 있는데, 돌의 크기는 대략 5~45cm로 다양하다.성의 직경은 3~3.5m이고, 높이는 0.5m이다. 성의 평면형태는 모서리가 여러 곳인 부정형이다. 남북의 길이는 49.5m, 동서의 길이는 43m이다. 성의 평면적은 20,200㎡이다(그림 24, 표2).


그림 24. 고르노레첸스코예-3 유적의 성곽 평면도(댜코바 작성)


 1996년에 볼딘 붸.이. 니키틴 유.게. 에 의해서 조사되었다 . 2002년 러시아과학원 역사`고고학`민속학 연구소의 아무르-연해주 고고학탐사단에 의해서 조사되었는데, 성의 토층은 다음과 같다.

시굴1
1. 표토층
2. 인공적으로 부순 돌이 섞인 부엽토가 혼입된 녹색의 사양토
3. 작은 돌이 혼입된 편상 갈색 점토
 가장 밑바닥은 검은 사양성 사질토로 종종 흰색의 석회화로 제작된 석기박편 등이 확인되는데, 중석기시대층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석기박편은 제르칼나야 강 유역에서 아주 많이 확인되는 석기박편이다.
 유적에서는 문화층은 2개 확인되는데, 아래층은 녹색의 사양토층으로 중석기시대층, 상층은 표토층인데, 발해시대로 생각되며, 성곽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성곽을축조하는데 급급했던 것으로 보이고, 크게 이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성곽의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은 확인되지 못했다.


● 고르노레첸스크-3 성곽은 곶 성으로 평면형태는 부정형이다. 성벽은 돌로 만들어졌고, 크기는 작은 편이다. 성은 매우 단순한데, 성 내부에는 마을이나 방어시설 등이 확인되지 않았다. 육안으로 주거지의 흔적도 확인되지 않고, 치와 같은 시설이나 문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성은 방어시설로서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성의 평면형태로 보아서 발해의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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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 제르칼나야 강 유역(구지명: 타두시 강)


제르칼나야 강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서쪽 집수지에서부터 시작해서 타투시 합류점에서 합쳐져서 큰 강이 된다. 길이는 82km, 합류점의 너비는 420km이다. 이 강이 시작하는 산 계곡부 정상의 높이는 600~1300m이고, 하류의 높이는 250~400m이다. 강 계곡은 좁고 구불구불하고, 평균 너비는 1~2.3km이다. 합류지점에서는 곳에 따라서 3.6km까지 넓어지는 곳도 있다. 산의 경사가 아주 가파르고, 여러 곳에 낭떠러지가 있다. 제르칼나야 강의 왼쪽 지류는 높은 곳에서부터 기원하는 카바레로프카 강이다. 오른쪽 지류는 우스티노프카 강(시바이고우), 사도바야 강이 있고, 종착지는 동해의 제르칼나야 만이며, 강의 하류는 아주 넓다. 제르칼나야 강은 시호테알린 산맥에서 영서와 영동을 연결하는 동맥과 같은 곳이다. 이 강 유역의 전체가 인간이 거주하기 편했던 곳으로 생각된다.
제르칼나야 강 유역에서는 8개의 성, 2개의 환호, 1개의 자연 방어시설이 있다. 성지 유적에는 고르노레첸스코예 1~3 성, 시바이고우 성, 보고폴예 성, 우스티-제르칼닌스코예 성, 사도븨 클류치 성 등이다. 그 외에 제르칼나야 환호, 시로코예 계곡 환호 등이 있고, 데르수 바위 자연방어시설 등이 있다(그림 17). 

그림 17. 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성곽위치도, 2-베뉴코프스코예 성곽, 3- 데르수 바위 자연방어시설, 4~6-고르노레첸스코예 1~3, 7-시바이고우 성곽, 8-사도븨 클류치 성곽, 9-보고폴 성곽, 10-제르칼나야 환호, 11-우스티 제르칼노예 성곽, 12-쉬로코예 계곡의 환호


 
1, 베뉴코보 성곽
베뉴코보 고개에 위치하며, 카발레로프 마을의 북서쪽으로 12km 떨어진 곳에 유적이 위치한다(그림 17, 사진 2). 성벽은 현재 3면만이 남아 있는데, 장방형 평면형태로 추정된다. 성의 북쪽 벽은 블라디보스톡에서 달네고르스크 시로 가는 도로에 의해서 파손되었다.
성벽의 서면 길이는 344m, 동면은 198m, 남면은 244m이다. 성벽의 내면의 높이는 0.7~1.8m, 외면에서는 1.3~2m인데, 가장 높은 부분은 동벽이다. 성벽의 상부는 편평하며, 대략 1~1.4m 너비이다. 성벽의 기저부 너비는 10m이다. 성벽을 따라서 해자가 둘러져 있는데 해자의 너비는 3~7m이다. 동쪽 성벽의 중앙에 너비 5m의 절개면이 있는데, 해자가 이 곳을 따라서 성 밖에서 안쪽으로 흘러 들어오고 해 둔 것으로 생각된다.
성의 내부는 비교적 편평한데, 전체적으로 북동방향이다. 성의 내부 면적은 80000㎡이다. 이 성은 1907년 시호테 알린 산맥을 따라서 조사하던 아르세네프가 제일 처음 발견하였고, 평면도를 완성하였다.
그는 이 성곽에 대해서 ‘타투시 강의 푸진나 지류로부터 시호테 알린 산맥을 가는 곳에 요새가 하나 있다. 그 요새는 아주 크고, 남쪽길에는 사원지가 현재 남아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서 이 고개에는 사방에서 오는 적으로 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요새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아르세네프. 『1907년 여행기』)’.
 
아르세네프가 조사한 베뉴코보 성은 평면형태가 ‘ㄷ’자 모양이고 남쪽의 성벽이 없고, 문지도 표시 되지 않은 채 그려져 있다. 성의 북쪽은 제르칼나야 강이 위치하고, 언덕 위에는 절이 있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그림 18). 

처음으로 극동을 탐험한 러시아인(베뉴코프 1970)의 설명에 의하면, 이 암자는 장방형의 목제 가옥으로 맞배지붕 구조이며, 한쪽 벽면의 길이는 한 아르신으로 알려져 있다. 절은 높은 절벽위에 위치한다. 대체적으로 암자는 도로나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에 가까운 곳에 설치되었다. 잠시 들르는 길손들, 전쟁에 참가하거나 쫒기는 사람과 장사 하는 사람에게 숙식을 제공해야만 했다.
1983년 갈락티오노프가 새로 평면도를 작성하였다. 그 작성도에 의하면 아르세네예프가 그린 것과 달리 북벽이 결실 된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 평면도가 더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2002년에는 러시아과학원 극동분소 역사·고고학·민속학 연구소의 아무르-연해주 고고학 발굴대가 이곳을 새로 조사하였고, 보다 정확한 평면도를 작성하였다(그림 19).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성곽의 평면형태나 특징으로 보아서 발해 혹은 더 늦은 시기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림 18. 1907년에 아르세네프가 작성한 베뉴코보 성곽


그림 19. 베뉴코보 성곽 평면도


베뉴스코보 성곽은 산성으로 평면형태는 장방형으로 작은 성이다. 성벽은 토성이고, 치와 같은 시설물은 없다. 평면이 매우 단순한데 성의 내부에 마을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 성은 제르칼나야 강 계곡의 남과 서쪽의 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길을 통제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 곳에는 시호테 알린 산맥의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큰 도로가 있었을 것이고, 이곳에 암자가 위치해서 긴 길을 떠나는 여행객의 영혼의 안식처 같은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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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은 남쪽에서부터 북쪽 방향으로 가면서 유적을 설명하고, 강을 기준으로는 상류에서 하류로 가면서 설명하고자 한다.


 시호테 알린 산맥에 위치한 성은 유적의 입지에 따라서 산지성, 평지성과 그 중간형인 곶 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지형적 입지특징에 따라서 돌출부, 고개, 산마루에 위치한 곳인지 등을 세분할 수 있다. 그 하위분류로 성곽의 평면에 따라서 방형, 장방형, 다각형, 부채꼴형, 반원형, ㄷ 자형, 개방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평면크기에 따라서는 소형, 중형, 대형으로 나눈다. 성 내부 특징에 따라서는 단순형, 장대형으로 나누고, 좀 더 세분해서는 내성과 보루 등 성의 부속시설물의 유무도 설명코자 한다. 성벽의 부속 시설물은 아무것도 설치되지 않은 단순형, 집석 시설 및 투석기, 치, 문 등이 축조되었는지도 밝힌다. 성벽의 축조방법은 1) 단순한 흙, 2) 자갈돌, 3) 다듬지 않은 돌, 4) 토석혼축법, 5) 돌을 비스듬하게 들려 쌓는 것 등으로 나눈다. 성의 기능은 1) 군사적 행정관청 2) 방어-감시기능 3) 경계기능 4) 자연적 성 5) 취락 방어용 으로 구분할 수 있다.

I. 브루실로프카(Брусиловка, Brusilovka) 강 유역

브루시로프카 강은 작은 강으로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제르칼나야 강의 수계 남쪽에서부터 2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강의 길이는 총 30km이다. 강의 상류는 산맥과 일치되는 방향으로 동쪽으로 흐르지만 중류 부터는 동해쪽(강의 흐름에서는 남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강의 계곡너비는 약 2km가량으로 좁다. 강 상류에는 산맥에서 강이 떨어지며 폭포가 형성되었고, 계곡에는 늪이 많고, 강의 하구에 석호가 형성되었다. 산 정상부에서 시작된 강의 집수지 바닥은 움푹 들어갔으며 강 하류는 편평하다. 산의 높이는 200~500m.  브루실로프카 강은 연해주 북동지역의 남쪽 경계이며, 시호테 알린 산맥과 동해 사이를 가르고 있다.
 브루실로프카 강 유역(유적 분포도 1번)에서 성이 하나 확인되었다.
 

그림 15. 브루실로프카 강 유역과 성곽의 위치


1. 브루실로프카 성
 유적은 올가 지구의 브로실로프카 마을에서부터 북서쪽으로 1km 떨어진 곳이고, 동해로 부터 12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브루실로프카 강(토파우자)의 상류 우안에 위치한다(지도, 사진 1). 성은 이미 지역 주민들이 잘 알고 있었으며, 지도에도 마치 요새처럼 표시되어 있다. 1958년에 안드레예프를 단장으로 한 극동고고학발굴단(ДВАЭ)에서 처음으로 조사하였다. 그 뒤에 1983년 갈락티오노프가 처음으로 유적의 평면도를 작성하였다. 
 2003년에 아무르-연해주의 고고학탐험대에서 지표조사를 실시하면서 정확한 평면도를 재작성하였다.
 성은 평면 방형으로 한 면의 길이는 170m이고, 성의 네모서리가 정방향이다. 성벽의 일부에는 2중 해자로 인해서 성벽이 3개가 확인되는 곳도 있다. 기본적으로 가장 안쪽이 기본 성벽이고, 부분적으로 2줄의 성벽이 확인되는 곳은 해자가 2중으로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성벽의 절개면이 부분적으로 확인된다(그림 16)
 북서쪽과 북동쪽, 남서 성벽은 성벽의 가장 외벽을 돌로 쌓았다. 그러나 남동쪽 성벽은 높고 낮은 범람지대와 접하고 있다. 북서쪽 성벽은 물이 직접적으로 닿는 곳은 아니지만 늪지대와 접하고 있어서 기본적인 성벽만을 축조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곳에 2개의 문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함몰된 것처럼만 보인다. 너비는 5~7m, 깊이는 0.5m이다. 보벽은 이곳에서 확인된다.
 성벽의 남쪽과 동쪽 부분은 범람원 지대에 위치하고 있고, 아직도 작은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고대의 해자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남서쪽 성벽은 강과 직교하는 방향으로 접하고 있어서, 성벽과 보벽 사이에 물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성벽을 절개해야 만 했다. 이 물의 방향은 성의 남쪽 모서리에서 방향을 틀어서 남동쪽으로 흘러 들어간다. 성의 동쪽 모서리에도 성벽 사이에 절개면이 있는데, 브루실로프카 강의 물이 떨어지게 하기 위한 장치로 생각된다. 남동쪽 성벽의 중앙이 가장 낮다. 이것은 성의 물이 모이도록 인위적으로 낮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 내부에는 우물로 추측되는 구덩이가 2기 확인되었는데, 직경 1.5~2m, 깊이 1m 가량이다. 성의 북동성벽은 강의 늪지대를 따라서 형성되었는데, 자주 범람하는 곳인데, 성벽의 방향을 이곳에서 동쪽으로 틀음으로 해서 이러한 범람을 막으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의 내부는 남동 방향으로 편평하게 점차 내려가고 있다. 성의 남동쪽은 너비 20×10m, 25×15m의 타원형 둔덕이 확인된다. 이곳을 멧돼지가 파헤치고 것으로 보이는 구덩이에서 아주 붉고 두터운 토기편이 확인되었다. 기본 성벽의 내측 높이는 1~1.7m이고, 외측 높이는  1.8~2.4m가량, 하단부의 너비는 10m이고, 정상부의 너비는 1~1.5m이다. 성의 외벽인 보벽은 아주 낮은데, 0.4~0.9m로 울퉁불퉁하다. 기본 성벽의 중간부분은 낮은 곳이 일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높고 일정하다. 해자는 성벽을 따라서 설치되어 있는데, 바닥은 좁은 편이다. 깊이는 성벽의 높이와 관련되어 있다.
 


그림 1. 브루실로프카 성곽의 평면도와 단면도

● 브루실로프카 성은 평지성으로 방형이고, 평면적은 21,000㎡이다. 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평면이 매우 단순한데 성의 내부 마을이나 기타 방어시설 등이 확인되지 않고, 문지도 아주 단순하다. 또한 성벽과 해자도 물의 범람과 매우 관련 있어 보인다.
    성의 평면형태, 출토된 토기로 보아서 발해문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고 그 연대는 7~10세기로 생각된다. 이 성곽의 입지로 보아서 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발해 도시 혹은 취락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브루실로프카 강은 제르칼나야 강과 수원지가 같다. 사도바야 수원지에서 뻗어 나온 것으로 오른쪽 지류가 제르칼나야 강이고, 왼쪽이 브루실로프카 강이기 때문이다. 중세시대 이른 시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도로가 브루실로프카 강을 따라서 바다까지 나 있고, 루드나야 강의 오른쪽 지류인 모나스티르카 강의 테튜힌 고개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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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영동지역의 자연환경

 

연해주의 영동지역은  지리적인 특징으로 인해서 연해주 중세시대 발해(628~936), 여진(1115~1234) 및 동하국(1217~1234)을 구성하던 민족의 이동이 연해주의 다른 지역과 차이가 있는데, 영역문제 및 국가의 흥망과도 관련이 있다.
 연해주의 영동지역은 소비에트 시절에는 러시아 전체에서 극동의 남쪽지역에 해당하지만(소련 자연지리에 의한 지역구분』 1968), 현재의 러시아에서는 아무르-연해주 지역에 해당된다. 이는 소비에트 시절의 극동 개념에 포함했던 시베리아 남부와 시베리아 북동, 사할린(니콜스카야 1974) 등이 모두 개별지역으로 구분되었다. 본고에서 지리적 영향을 크게 미치는 시호테 알린 산맥은 극동의 남부의 동쪽에 뻗어 있는데, 이곳은 연해주에서는 북동쪽으로 여러 시대에 걸쳐서 흥미로운 성곽들이 현존하고 있다.
 시호테-알린 산맥은 동해바다를 따라서 1200km정도로 뻗어 있고, 가장 넓은 부분은 300km이고, 평균높이는 800~1000m에 달한다. 산맥 가운데서 가장 중앙부분은 타르도키-야니 산으로 높이가 2078m으로, 산맥에서 가장 높은 부분이다. 시호테 알린 산맥은 8개의 북북동 방향으로 병풍 같은 산이 서로 연결되었으며, 봉우리가 높다. 강의 많은 지류가 계곡을 따라서 흐르고, 협곡과 폭포도 많이 확인된다. 가장 북쪽분수령은 동북방향으로 흐르는 산맥에서 꺾어져, 동해바닷가와 교차고, 그 아래쪽으로 동해와 평행하게 산맥이 연결되어 있다. 아무르강의 서쪽 지류는 강이 가장 길고 수량도 풍부한데, 동쪽 지류의 강은 서쪽에 비해서 길이가 짧고 강수량도 적은편이다. 아무르강은 시호테알린 산맥과 부딪치면서 우수리, 이만, 비킨 강 등 지류가 되고, 그 일부는 산맥을 따라서 동해로 흘러가버리기 때문이다. 동해로 흘러가는 강(두만강, 코피강, 사마르강)은 길이가 짧지만 빨리 흐른다. 신생대 제3기에 화산활동에 의해서 많은 협곡이 형성되었다.
 시호테알린 산맥의 서쪽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며 열편퇴적층의 부드러운 저지대이고, 동쪽의 경사는 매우 가파르고 지질도 아주 단단한 암벽이다(다비도바 외 1960).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서 해안가에는 인간이 살기 힘든 환경이다. 대체적으로 유적은 인간이 살기 좋은 곳에만 발견된다.
 동쪽으로 흐르는 강은 짧고(100~200km) 빠르다. 강의 상류에서는 하나만 흐르다가 중류와 하류로 갈수록 점점 넓어지면서 500~700m에 달하고 가장 끝에는 거의 흔적만 있다.
 연해주 동북쪽 강의 너비는 10~40m에 달하고, 깊이는 2m가 넘지 않고, 평균 속도는 2~2.5m/s이다.
 연해주 동북쪽의 해안선 모양은 산맥과 거의 평행하고 있는데, 올가 만부터 시작해서 아무르강 하류 까지 이어지고 있다(다비도바 외 1960).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바다가 접하고 있는 부분은 신생대의 이른 시기에 형성되었고, 강의 하류인 삼각지 부분은 해진 현상에 의한 것이다(쿠랄코프 1972). 강의 체계에 대해서 최근에는 대륙의 융기활동과 관련해서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도 있다. 대륙의 융기활동 방향은 강을 두 쪽으로 나누어 지류를 형성하게도 하고, 강의 방향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서쪽 경사면에 흐르는 강은 중요한 수계(우수리강, 이만강, 비킨 강, 호르 강)와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동해로 흘러가는 강의 상류는 대체적으로 높이가 600~800m 되는 지점(산맥 중 낮은 편)에서 시호테 알린 산맥을 ’둘로 나눌 듯이‘ 힘차게 하류로 흐르고 있다. 강 상류의 집수지는 대체로 높이도 높지 않고 크기도 작은 편이다. 시호테 알린 산맥 중요한 수계의 단층과정은 서쪽 경사면이 더 우세한 것으로 베루후네-반친스카야, 타두시킨스카야 강 등이 이를 반증한다(후댜코프, 쿠알코프, 코로트키, 1972).

아무르-연해주 지역은 신생대 초기에 이미 육지화 된 곳으로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 경사면에 아주 좁게 갈라진 곳이 있었다. 신생대 제 3기에 갈탄층이 형성되어, 관입한 자원이 되었다. 이곳에 현재 광산의 입지(올가-테튜헤 지구에는 광산이 많음)와 관련이 있다(댜비도바 외 1960). 4기 초에 아무르-연해주 지역에 현재와 같은 자연환경이 완성되었다.

아무르-연해주의 지역과 연해주의 동북지역은 아시아대륙의 가장자리이고 계절풍의 영향을 받는 대륙기후이다(비트비치키이 게. , 1969). 동아시아 몬순풍의 영향을 받는데, 계절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4계가 뚜렷하다(다비도바 외 1960).

산의 계곡과 분지는 산의 경사면과 접하면서 공기가 찬데, 온도가 아주 많이 내려간다. 찬 온도의 결과로 겨울에는 아주 온도가 하강하고, 봄에는 천천히 따뜻해진다. 이는 식물의 생육의 변화에도 영향을 끼친다(다비도바 외 1960).

겨울의 강우량은 낮은데 10~40cm정도이며, 아주 추워진 이후에야 눈이 내린다. 봄은 날씨가 좋은데, 온도변화가 심하고, 이른 봄까지 눈이 날린다.

여름은 고온다습하다. 여름 몬순 비가 내리는데, 강이 심하게 불어나고 일년 중 강우량의 70%정도가 이때 발생한다. 바다와 가까운 지역의 북쪽에는 일 년에 700mm가량이 내리는데, 산에는 1000mm가량이 내린다. 연해주 동북지역에서 가장 좋은 시기는 가을로 따뜻하고 건조한 온도인데, 10월 중순까지 이런 날씨가 지속된다.

극동의 식물상은 거의 1800여 가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크게 4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동시베리아 식물군은 잎갈나무가 가장 대표적으로 오호츠크 혹은 얀 형이라고도 하며, 가문비나무, 자작나무 등도 포함한다. 만주 혹은 우수리 식물군은 신갈나무가 대표적이다. 들베나무, 서어나무, 단풍나무, 라임다우, 자작나무는 다우 식물군이고 시베리아 식물군은 나래새, 시베리아 이끼 등이 대표적이다.

시호테 알린 산맥에는 시베리아, 오호츠크, 만주, 다우르 식물상과 함께 동물상도 다양하다(보로빈스키 1967). 시호테 알린 산맥의 식물상은 신생대 제3기 초에 처음으로 갈라진 것이고 빙하의 지역적 분리와도 관련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1l_NdlG44

(링크 해둔 곳에는 시호테 알린 산맥을 약간 살펴 볼 수 있다. 러시아어이지만 충분히 감상가능함)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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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까지 극동고고학 발굴은 해안가 조사를 많이 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괄목할 만한 신진 연구자 가랄드 이바노비치 안드례예프(1926~1970)였다. 그는 위대한 고고학자 키셀료프의 제자로, 모스크바 대학 고고학 학교를 졸업하였다(그림 13).


그림 13. 안드레예프

 하지만 그의 운명은 비극적이었다. 그는 연해주 고고학과 시베리아 고고학을 연결하려고 했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서 완성시키지는 못했다. 그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극동고고학자들이 안타까워한다. 그는 연해주의 선사시대를 주로 연구하였지만 새로운 성곽을 발견하기도 하였고, 기존의 알려진 성곽도 재조사도 하였다. 소콜치 마을의 서쪽에 있는 성벽, 체르노루치야 마을에서 아래로 4km 떨어진 곳에 있는 성벽, 바튜킨 성벽, 키시네프카, 라조프카, 브루실로프카, 크라스키노 등을 조사하였다.
  오클라드니코프의 발굴대와 동시기에 안드레예바(역자 주. 안드레예프의 아내)는 연해주의 여러 유적을 조사하였다. 1961년에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그녀는 블라디보스톡에 위치한 소련 과학원 시베리아분소 역사분소(역자 주. 러시아과학원 극동분소 고고역사민속학연구소)로 왔다. 그 뒤 몇 번의 여름 발굴을 마치고 그녀는 연해주 남부와 동부의 지표조사를 사게 되었는데, 다층위 유적들을 많이 찾았다. 그 중에서는 제르칼나야 마을에서 조금 올라가면 있는 성벽과 카미쇼브이 마을에서 북서쪽으로 가면 있는 성벽, 우수리 강의 좌안에 있는 이즈비린카 마을에서 하류 쪽에 있는 성벽, 브레프카 상류 마을에서 아래쪽으로 2km 떨어진 곳에 있는 곳, 사마르카 마을에서 북동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있는 성벽, 플라호트뉴킨스카 성지 등도 조사하였다.  
 1960년대 말 가르코빅은 그녀의 스승인 안드레예프와 안드레예바와 함께 크라스노아르메이스키 지구의 두브로프카 마을에 있는 성지를 조사하였다.
 196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는 빅탈리이 드미트레비치 레니코프(1938~1995)는 아주 열정적으로 유적을 조사하였다(그림 14). 일찍이 안드레예프는 라조프카 지구와 키시네프카 지구의 성지를 발견하고, 이를 조사해서 유적의 절대연대와 문화적 특징들을 밝혔다. 레니코프도 프라호트뉴킨스카, 예카테리노프카, 스탈리스트카 성지 등을 조사했는데, 특히 중세고고학의 금속유물을 전공하던 유일한 전문가였다.

그림 14. 비탈리 드미트례비치 레니코프


 1970년대 초반 세메니첸코는 그의 스승 샤프쿠노프와 함께 발해의 유적들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노보고르데예프카 성지가 다층위유적임을 밝혔고 스타로레첸노프카 성곽들을 조사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볼딘과 이블리예프는 크라스키노 발해성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노보고르데예프카 성지, 니콜라예프카-1,2, 미하일로프카 지구의 성지 등 다층위 유적을 발굴하였는데, 유적에서 리도프카 문화, 말갈문화, 발해문화와 연해주 여진 문화 등을 구분하였다 .
 여진의 고고학적 연구에 있어서 호레프 연구도 빼 놓을 수 없다. 크라스노야르 성지와 아나나예프카 성지를 발굴 조사하였고 동료들과 함께 라조프카, 올가, 미하일로프카, 옥캬브르스키 지구의 크라프쵸프카, 구시예프카, 비소코예, 스테클뉴하-2 성지들을 연구하였다.
 1973년부터 연해주 북동지역의 연구는 1972년 노보시베르스크 국립대학을 졸업한 댜코프와 댜코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973년 달네고르스키 지구와 테르네이스키 지구의 많은 성지들을 조사하였는데, 그 대상은 체렘샤니, 클류치 성지, 쿠날레이스코예, 드지기토프카, 모노마호프카 성지 등이고, 또한 고금속기시대 층도 확인되는 케드로프카 토성도 포함된다. 그 이듬해 암구 마을 부근의 소프카 류브비 성곽을 조사하였다. 그 성지에서는 아래층은 고금속기시대의 리도프카 문화, 그 상층에서는 연해주의 여진시대 문화가 확인되었다. 또한 쿠댜 성지에서는 리도프카 문화가 확인되었다. 1990년대 댜코프는 연해주의 서쪽을 조사하게 되는데, 그 곳에서 노보러시야, 포그라니치노예-1, 보구슬라프카-1 유적 등 3개의 성지를 조사였다.
 1993년에는 아무르-연해주 고고학탐사단이 연해주 북동지역의 고대와 중세시대 성지를 연구할 목적으로 구성되었다. 댜코프와 댜코바는 고금속기시대의 토성 유적인 미스 스타라스느이, 두브로빈스코예, 우툐스노예, 켐스코예-스칼리스토예, 소욘스코예, 우스티-제르칼노예 등 기원전 10세기경의 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말갈의 유적으로 쿠즈네초프스코예, 미스 테플리이, 우스티-소보레프스코예 유적 등이 발견되었다. 발해 유적으로는 에스톤카, 크라스노예 오제로, 드지기토프카, 고르노레첸카-2, 예딘카 유적, 여진 유적으로는 쿠날레이스코예ㅡ 시바이고우, 소프카 류브비,포드네베스노예 유적 등이 있고, 석성 유적으로 자볼레첸나야, 시미르코프 클류치, 바시노프카, 클류치 석성 등이 있다. 자볼레첸나야 강의 석성 등도 발견하게 된다.
 이블리예프는 마이카 성지를 3년 여름동안 발굴 한 뒤에 그 성이 거란성으로 여진 보다 늦은 것으로 판단하였고, 노보셀리세 성지는 말갈문화의 것으로 보았다.
 1980년에는 시란티예프가 바실리프카, 베레조프카, 사도브이 클류치 성지와 시로코예 계곡위의 성벽 등을 조사하였고 평면도를 작성하였고, 그 중에 사도브이 클류치 성지는 발해의 성 유적으로 판단하였다.
 1983년과 1986년에는 샤프쿠노프가 연해주 성곽들을 조사하기 위해서 갈락티오노프와 함께 조사단을 구성하였다. 그 조사단에는 평면도를 전문적으로 작성하는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었고, 많은 성지의 평면도를 작성해서, 후대를 위해서 남겨두려고 했지만 그 때 작성된 것들은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갈락티오노프는 아누치노 성지, 아우로프카 성지, 오르로프카 성지, 루다노프카 성지, 스토고프카 성지, 티그로프카 성지, 로반노프카-1,2 성지, 고르노레첸노프카-2 성지, 베뉴코보 성지, 마리야노프카 성지, 크리로프카 성지, 유르코프카 성지, 사로프카 성지, 타보로프카 성지, 바튜킨 성지, 키신네프카 성지, 니콜라예프카-1,2 성지, 오트라인카 성지. 쿠날레이카 성지, 드지긴노토프카 성지, 콕샤로프카 성지, 사라토프카 성지, 두보바야 소프카 성지, 이지베스토프카 성지, 노보네진노프카 성지, 스몰니노프카 성지 등을 새롭게 조사하였다.
 1970~1990년대에는 타타르니코프에 의해서 아주 많은 성곽들이 새로이 발견되고 연구되었다. 1984년에 테르네이 지구의 북쪽을 답사하던 가운데 아르세네프는 예딘카, 쿠즈네쵸프카, 우스티-소볼레프카, 테프로예, 부릴로프카, 오아시스 성곽들을 발견했다. 1998년에는 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대형 성 유적인 시바이고우 성곽을 발견하고, 이 유적은 뒤에도 많은 연구자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다.
 향토사학자 크바신은 연해주 성곽 연구도 업적을 남겼다. 아르세네프의 기행로를 따라서 가족과 함께 답사하였다. 그는 연해주의 이미 알려진 고고학 유적들을 돌아보고 많은 성지의 평면도를 육안으로 관찰한 결과로 작성하고, 지표에서 유물들을 모았다. 그는 우스티-벨림베, 켐스코예-스칼리스트카, 셀셀레프카, 소욘노프카 , 우스티-페야 성곽들의 평면도를 작성하고, 새로운 취락도 몇 개 확인하였다.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니키틴은 여러 지역에서 성곽을 조사하였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분소 역사`고고학`민속학 연구소 중세시대 고고학전공실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조사하였는데, 그 중에는 청동기시대의 체르냐치노-3, 중세시대 성지인 콘스탄틴노프카-2, 다층위 유적인 노보-게오르기예프카-3, 오크라인카-2, 파브로프카-1,3, 추구예프카, 고르노레체노프카-1,3 유적들을 조사하였다. 파르티잔 지구의 니콜라예프카 다층위 유적도 여러 해 동안 조사하였는데, 철기시대인 크로우노프카 문화와 올가-폴체 문화 및 여진 문화층 등이 알려졌다.
 1980년대에는 극동대학교의 알렉산드로프가 시코토프카와 스테클뉴하 강가의 유적인 스테클뉴하-1성지, 스테늘뉴하-2~4 성지, 시로타 언덕의 성지 등을 여러 해 조사하였다. 
 1990년대 후반에는 아르데미예바가 성지 발굴조사를 아주 활발하게 하였다. 그녀는 오클라드니코프 이후에 크라스노야르 성지와 샤프쿠노프의 뒤를 따라서 샤이긴카 성지와 니콜라예프카 성지를 39년 동안 조사하였다.
 1995년부터 사크마로프는 연해주의 중세시대 성지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는데, 표드로프카 성지를 새롭게 발견하고 카파로프 이후에 처음으로 라즈돌라나야 강(수분하)에 남아 있는 여러 성벽들을 조사하였다.
 1994년에 바실레프가 이전에 오클라드니코프가 고르니 후토르 유적을 35년 동안 발굴했다. 이 유적의 총 면적 3000㎡를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이 성은 여진시기로 판단되었다. 1998년부터는 레니코프가 조사한 적 있는 동하국의 성으로 알려진 예카테리노프카 성곽 유적을 발굴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극동대학교의 고고학 발굴대에 의해서 아주 흥미로운 연해주의 성지 연구가 많이 알려졌는데, 그 중에 하나가 레소자보드 지구의 라조프카 성지이다. 이 탐험대는 주로 우수리 강 중류의 크라스니이 클류치 성지, 크릴로프카 성지, 카리노프카 성지 등을 조사하였다. 각 성지들이 고금속기시대-철기시대-중세시대 등 여러 시기에 걸쳐서 축조된 것을 알았고, 교통망과 관련되었다고 밝혔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의 극동분소 역사`고고학`민속학 연구소의 발굴대는 라즈돌나야 강 중류의 유적에는 성이 있는 마을과 없는 마을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
 1990년대 말 나다로프와 아르세네프, 메젠제프, 크라딘, 니키틴은 다시 노보포크로프카-2 성지를 발굴하고 동하국의 북쪽 성지로 보았다. 1996년에 크라딘은 크라스노아르미 지구에서 카메누시카-1, 베르흐니이 페레발 5~7 등 여러 시대의 유적을 조사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샤프쿠노프(B.Э.)(역자 주. 앞서 설명한 상트 페제르부르그 출신의 샤프쿠노프(Э.В,)의 아들)가 10~12세기의 스몰린카, 아우로프카 성지 등을 여러 해 동안 발굴하고 므시 막시모바, 이즈베스토프카, 사라토프카-1,2 유적 등을 지표 조사하였다.

 연해주 성곽 유적들이 거의 150년간 조사되었는데, 1950년대 중반 부터는 오클라드니코프가 책임을 맏은 고고학 발굴대의 연구를 시작으로 전문가에 의해서 이루어진 시기이다. 그 때 고고학유적이 학문적 목적으로 연구되는 기관이 있던 곳은 전 러시아에서 노보시비르스크,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톡 뿐 이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 연해주 전체에 산포해 있는 성지들의 위치 및, 그 유적의 입지, 문화적 특징 혹은 고대 국가의 소속이나 연대 등도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편년문제 혹은 교통망 뿐 만 아니라 성곽을 유형화 시킬 만큼 많은 유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 후세대 들이 연구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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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 레닌그라드 대학교(역자 주. 현재 상트페테르부르그 대학)의 동방학과를 졸업 후에 오클라드니코프 밑에서 고고학을 연구하고자 한 학자가 있는데, 그의 이름은 예.붸.샤프쿠노프로 후에 발해사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연구를 위해서 블라디보스톡으로 왔는데, 소련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분소의 극동지부의 역사연구실에서 연구를 시작하면서 짧은 기간 동안 후에 자신의 제자들이 된 극동대학교의 역사학과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림 12. 에른스트 블라비미로비치 샤프쿠노프 . 샤프쿠노프의 저작은 한국에도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이 젊은 역사학자는 특히 발해와 여진의 유적들에 관심을 많이 기우렸는데, 샤이긴스코예 성지를 30년 동안 연구하였다. 이 성지는 나중에 연해주 여진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특히 동하국(1217~1234) 연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유적이다. 부세, 표드로프, 오클라드니코프 등의 연구결과를 따라서 샤프쿠노프는 우수리스크 지역의 성지를 계속해서 조사했었다. 특히 1960~70년대 그와 함께 이러한 성지를 조사한 제자들-레니코프,베.데., 세메니첸코, 엘.예., 호레프 붸. 아., 볼딘, 붸.,갈락티오노프, 오.세. 등은 연해주 성지 연구사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들이 조사한 성지는 노보고르데예프카, 오를로프카, 스토고프카, 시클라예프카, 마리야노프카, 유르코프스카, 노보파크로프카-2, 라조프카, 예카테리노프카, 니콜라예프카, 마이스카, 크라스킨노, 콕샤노프카-1,3, 프라호트뉴킨스카, 두보바야 소프카, 노보네진스카, 스몰린노프카, 스테클뉴하-1 등인데, 이 유적들은 여진 고고학연구에 초석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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