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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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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단계-전문적인 연구 단계가 시작된 시점이다.


1953년부터 고고학자인 오클라드니코프 아. 페(1908~1981)(그림 11)가 극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극동고고학 발굴대가 편성되고, 연해주와 아무르 지역의 학문적인 연구가 체계적으로 시작될 때이다. 그는 문서국에 보관된 모든 자료들을 자세하게 분석하였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마아카와 베뉴코프의 탐험으로 찾은 유적들, 파랄라디 신부의 발견, 부세와 크로포트킨의 유적 연구, 표드로프의 발굴, 아르세네프의 업적, 시테른베르그와 쉬로크고로프의 고고학 유적 등은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지역 주민이 알려주는 정보 등도 유용하였다. 이러한 모든 연구들의 총체가 1959년 『Далекое прошлое Приморья(연해주의 지난 먼 과거)』가 출간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인용되는 책이다. 특히 이 책에서 오클라드니코프는 러시아 동방학자 들이 남긴 역사 기록을 바탕으로 고고학 유적과 유물을 역사적 사건에 대입하려고 했던 것이 큰 업적이다. 그 결과 극동의 중세시대(역자 주. 말해 및 발해~여진) 유적은 중국의 역사적 기록과 왕조의 연대와 상응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클라드니코프는 문헌에서 확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고고학적인 연대와 비교해서 발굴조사를 하였고, 고고문화로서 말갈, 발해, 여진의 문화를 구분하였으며, 이 문화는 현재까지도 이를 바탕으로 연구되고 있다. 고대와 중세시대의 퉁구-만주족의 민족학적 특징 등 여러 가지 그가 논의한 문제들이 아직까지도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중이다.

그림 11. 알렉세이 파블로비치 오클라드니코프 


 오클라드니코프는 아주 드문 인물이다. 그는 유라시아의 고고학과 민속학적 유물들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거대 담론으로 역사를 연구하고자 한 인물이다. 그리고 학문적 사실을 분석해서 재빨리 결과물로 내어놓았으며, 엄청난 직관력으로 고고학 유적을 찾아내었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극동 고고학에 있어서 고대에 대한 새로운 논점을 이끌어 낼 수 있었고, 유능한 젊은 학자로 러시아 전역에 등극 되었다.
 그리고 연해주 중세시대 연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 비타리 예피하노비치 라리체프 이다. 그는 오클라드니코프와 함께 파랄라디 신부의 일기장에 따라서 고고학 유적 조사를 함께 하였다. 그는 유능한 학자로써 연해주 중세시대사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이어나가는 거장이었다(라리체프 1961).
 오클라드니코프가 이끄는 극동 고고학 발굴대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한반도의 동북부 해안과 블라드보스톡 사이의 지역들을 연구하였다. 그 지역은 포시에트 항구에서부터 수분하 강의 하류까지, 마이헤 강과 테튜헤 만, 나호드카 시, 아르툠 시 부근 등이었다(라리체프 1960). 이미 알려진 성곽 뿐 만 아니라 새로운 것도 발견하였다.
 오클라드니코프는 현장에서 30년간을 연구했는데, 연해주의 성곽들도 많이 포함된다. 크라스노야르스코예, 유즈노-우수리스코예, 자파드노-우수리스코예, 보구슬라프스코예, 루다노프스코예, 프르세발스키 언덕위의 성지, 콕샤로프카-1,2,3, 추구예프카, 고르니 후토르, 이즈베스토프카, 스몰리노프스코예, 고르바트카, 고르노레첸스코예-1,2, 노보러시야 등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유적들의 지리학적 입지나 국가나 문화적인 편년, 그 성곽이 존재한 시기, 역사적 맥락 등을 연구하였다 .  


  오클라드니코프는 특히 우수리스크 지역의 성곽들을 심도 깊게 연구하였는데, 1953년부터 자파드노-우수리스코예, 유즈노-우수리스코예 성곽, 크라스노야르소코예 성곽 등을 보로비요프 엠.베. 자벨리나 엔.엔, 라리체프,베.예,, 샤프쿠노프.예.베.(1930~2001)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그림 12). 1960년에 보로비예프는 크라스코야르스코예 소프카의 사원의 금당지(6번 건물지)를 조사하여서, 유적은 단층위 유적으로 11~12세기 여진 문화와 관련된 것으로 보았다 (보로비요프 1975). 나중에 그는 러시아동방학자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학자로 추앙받았는데, 극동 중세사 연구의 기초를 만든 학자로 업적을 평가 받았다. 그는 고고학적 사실과 기록에 남아 있던 역사적 사실을 대입했을 뿐만 아니라 아르세네프의 연구에 기초해서 산지성과 평지성에 대해서도 많이 연구하였다(보로비요프 1975).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