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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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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에서는 무덤방 안과 관속에서 유물이 확인되었다.

관의 뚜껑을 열자 얼음속에서 가장 머저 드러난 것은 머리부분이다(그림1). 이 여성은 오른쪽으로 누웠으며, 무릎은 살짝 굽히고, 손가락은 팔꿈치 쪽으로 굽혀서 배쪽으로 손을 모은 채 누워있었다(그림 2,3).

 

그림1. 관의 뚜껑을 열고 내부를 정리하는 장면

 

그림 2. 관 속

 

그림 3. 주인공의 손 모습과 전체 모습, 목걸이

 

통나무관의 바닥과 시신의 바닥에는 펠트제 깔개가 깔려 있었다. 펠트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한다. 주인공은 가발을 쓰고 있었는데, 상반부와 통나무관의 상부 1/3지점에서 발견되었다. 주인공이 입고 있는 실크로 만든 여밈없는 긴 블라우스와 긴 치마(붉은 치마)를 입고 있었고, 타이즈도 신고 있었다. 펠트, 옷과 타이즈 등은 따로 설명한다.

 

 

주인공의 대퇴부 부근에는 펠트로 만든 주머니 속에서 청동거울이 있었다. 나무틀 안에 보는 경면이 청동으로 제작된 것이었다. 나무 손잡이의 끝에는 구멍이 남아 있었다. 손잡이 부근에는 다양한 색깔의 구슬이 남아 있었는데, 그 중에는 사람의 어금니도 있었다.

 

그림 4. 청동거울, 구슬과 화장품 출토장면
그림 5. 청동거울의 뒷면

 

목에는 목걸이(그림 3)가 있었는데, 표범장식(그림 6)이 붙어 있었다. 이 장식은 표범의 머리부분이 살짝 도드라지게 표현되었는데, 나무판으로 제작한 후, 금박으로 장식되었다. 금박은 얼음이 녹으면서 찢겨 나가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림6. 목걸이의 가장 중앙장식
그림 7. 아크-알라하 3유적 1호분 여성 주인공의 목걸이, 필자촬영

이 여성의 머리에는 높이 61cm의 말총가발이 있었고, 가발은 고깔모자(그림 9)가 씌어져 있었다. 모자에는 15개의 금박을 입힌 목제 장식(그림 10)이 붙어 있었다. 가발에는 금박을 입힌 배지처럼 앉아서 상체를 돌린 모습의 사슴모양 목제 장식을 붙였다. 머리의 정수리에는 머리를 모아서 꼬아 올려, 붉은 주머니로 쌓고 그 끝에는 사슴모양 장식이 붙어 있었다(그림 11). 나무로 다리를 굽힌 동물모양(그림 11의 가장 왼쪽)을 원형장식위에 올린 것이다. 금박되었다. 귀걸이도 착용했는데, 둥근 고리모양이다. 그 부근에 석제 그릇이 있었는데, 그 안에는 탄화된 고수의 씨앗(그림 8)이 있었다.

 

 

 

 

그림 8. 석제 그릇
그림 9. 꼬깔모자
그림 10. 꼬깔모자 장식, 목제, 새

그림 11. 가발을 여성 복원도, 가장 왼쪽이 정수리를 장식한 사슴장식이다. 다리를 굽히고 있다. 오른쪽은 미라의 머리를 근접해서 찍었는데, 미라제작은 따로 설명할 예정이다.

 

알타이 산맥의 우코크 고원 중 아크 알라하 3유적이라고 하는 유적의 1호분의 주인공인 이 여성은 일반인들에게는 얼음공주라고 알려졌고, 좀 더 자세하게는 샤먼의 지위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성샤먼인지, 가장 최상급의 신분이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이는 부장품 때문이다. 현재 가장 최상급 무덤은 알타이 산맥에서는 또 다른 유적인 파지릭 고분이 최상급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그 무덤의 크기 뿐만 아니라 부장품의 양과 질이 좋았기 때문이다. 파지릭 무덤에서는 마차가 통째로 확인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계속 이야기 하도록 하고, 오늘은 이번달의 주인공인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의 부장품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림은 7번을 빼고 아래 책을 참고했다.

 

참고문헌

https://scfh.ru/papers/put-k-nebesnym-pastbishcham/

https://scfh.ru/papers/dvadtsat-let-spustya/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문화는 유라시아 전역에 넓게 퍼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알타이 산맥의 고분문화를 파지릭문화라고 한다. 아크-알라하 3유적도 파지릭문화의 한 유적이다. 이 파지릭문화에서 목곽과 목관을 만든 것은 모두 낙엽송이다. 수레, 집도 낙엽송을 하용했다. 큰 나무는 통나무관을 만드는데 썼다.

 

아크-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 쓰인 목곽에는 집의 일부를 그대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다.

현대의 알타이 주민의 집인 아일라처럼 생긴 다각형 집의 일부를 나무방인 목관으로 쓴 것이다.

(그런데, 아크-알라하 유적 뒤에 갑자기 왜 번호가 달라질까? 러시아 유적명칭은 앞은 행정구역 혹은 가장 가까운 마을이름 이고, 뒤의 번호는 유적을 찾은 순으로 학자들이 우리로 치면 문화재청과 같은 곳에 등록을 한다. oo1, oo2, 003......등 그래서 아크-알라하 1유적과 아크-알라하 3유적은 그 성격이 다르다. 앞으로 계속 설명해드리겠지만, 파지릭문화의 사람들은 한 계곡에 한 가족의 무덤을 썼다. 열을 지어서...)

 

시베리아의 원주민들은 낙엽송을 ‘밝은 나무’라고 생각한다. 니브히 족은 자신들이 낙엽송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하고, 셀쿠프 족은 인생의 나무로 간주했다. 만시의 신화에는 신성한 대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파지릭유적의 4호분과 5호분에서는 일정한 간격으로 홈을 판 낙엽송 통나무 토막이 발견된 바 있다. 길이가 3.17m인 통나무에는 9개, 4.13m의 나무에는 8개의 홈이 파여져 있었다. 일정한 사다리였던 것으로 본다(루덴코 1953).

쿠로키친은 의례에 사용된 사다리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상징한다고 보았다(1994). 셀쿠프족은 하늘의 신께 가는 사다리라고 부르거나 나무에 올라가기 위한 것으로 부른다. 그리고 샤먼이 이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다(프로코피예바 1977).

 

 

그림 1. 파지릭 유적에서 출토된 사다리 중의 일부 (루덴코 1953)

 

 

 

파지릭문화에서 통나무관을 쓰는 것은 파지릭유적의 왕족급 고분 및 쿠투르군타스 1유적 1호분의 전사무덤,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의 샤먼 무덤, 아이무덤에도 사용되었다. 통나무관은 모든 무덤에서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고 일부 무덤에서만 사용되었다.

러시아학자들은 통나무관을 쓴 주인공은 일정한 계급이상일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로 시베리아 원주민들은 통나무관을 쓰고, 귀때기가 남아 있다고 한다.

시베리아의 투르크어족 설화에는 나무는 아이들을 낳으며, 인생을 상징하고 가족 개개인의 행복을 담보한다. 나무 그루터기나 몸통 안에 죽은 사람을 매장하거나, 통나무 안에 매장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생명의 원천으로 다시돌려보낸다. 셀쿠프 인에게는 통나무를 타고 강을 따라 죽은 자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간다는 믿음이 있다고 한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는 연기를 들어마시는 훈증법을 악령으로부터 보호하고 주변을 정화시키는 의식으로 생각한다. 헤로도투스도 스키타인이 대해서 남긴 기록에 정화의식에서 대마를 사용한 기록이 나온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이 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 동복, 6개의 나무막대로 이루어진 뼈대, 천막을 친 가죽덮개, 동복속의 돌, 대마씻앗이 그대로 담겨서 출토된 바 있다.

 

파지릭유적 설명할 때 사진을 공개하겠다.

파지릭문화의 사람들, 아크-알라하 3유적에서 발견된 여성을 포함한 사람들의 무덤은 사실 전부 나무와 풀로 덮혀 있다. 나무방과 목관, 미라 속을 채운 식물, 가발, 장신구등도 전부 나무로 제작되었다. 알타이 고원에서 확인되는 황금장식은 목제에 금박을 입히는 경우가 많다. 아크알라하 3유적의 여성무덤에서는 얼음이 녹으면서 금박이 찢겨나가서 금박은 거의 없었다.

 

처음에 이 문화의 유물을 볼때는 번쩍거리는 것만 눈에 들어왔는데, 지금 다시 보니깐,,,아크-알라하 3유적은 나무로 뒤덮혀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든 유적이 그런건 아니다. 이 문화는 황금유물로 유명해졌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앞에서 말했듯이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은 주인공의 무덤방 천장 위에 카라-코바 문화의 무덤이 하나 더 얻혀있었다. 이 무덤을 걷어내자, 그 아래에는 통나무 11개로 제작된 나무방(목곽)의 천장(2.3×3.6m)이 드러났다.

 

나무로 만들어진 무덤방은 통나무를 집처럼 설계해서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통나무를 파서 만든 나무관이 있었다. 이 무덤방의 천장을 드러내자 그 내부는 얼음으로 꽉 차 있었다고 한다.

 

무덤방과 관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는 유물이 50점 가량 확인되었다. 앞서서 포스팅한 비디오에서 나무로 만든 잔과 뿔로 만들어진 잔 등, 목제 쟁반 등이 드러난 곳도 그곳인데, 이에 대한 부분은 앞으로 설명드리겠다.

 

 

아쉽게도 이 글을 참고하고 있는 책에는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의 무덤방에 대한 기술이 부족했다. 통나무를 반으로 갈라서 안쪽을 편평하게 다듬은 나무를 사용했다. 사진으로 확인가능한 것은 무덤방의 짧은 길이에 4개의 나무판을 사용했고 다 같은 높이 인점을 본다면 대략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그림1).

 

 

얼음이 녹자 통나무관의 뚜껑이 드러났다. 통나무관(그림 245)은 통나무 안을 파서 만든 것이다. 끝에 귀때기가 붙은 것이다(그림 2~54). 이 부분은 못을 밖기 위한 것인데, 이 유적에서는 청동 못 2개가 밖혀 있었다. 다른 유적에는 나무정이 밖히기도 한다. 길이가 2.73m, 내부의 깊이는 0.3m, 밖에서 본 높이는 0.68m이다.

 

 

그림 2~4 아크-알라하 3유적 1호분, 2008년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에서 촬영. 현재는 고르노 알타이시의 박물관에서 볼 수 있음. 

 

얼음이 녹자 관의 뚜껑이 드러났고, 그 뒤에 관을 장식하던 길이가 38cm가량인 가죽으로 만들어진 사슴모양 아플리케가 보였다(그림 5). 아플리케 장식은 조각난 상태였고, 6~7개 개체로 생각된다(그림6 ). 아플리케는 유치원에서 하던 종이를 접어서 가위로 오려 문양을 만드는 것이다. 참고문헌에는 이 사슴모양 아플리케 그림이 없어서, 알타이 고원의 또 다른 무덤 유적인 파지릭무덤의 1,2호분 자료로 보여드린다. 1호는 수탁 모양(그림 7), 2호(그림8)는 사슴모양의 아플리케이다. 이 유적도 앞으로 설명드릴 여정이다.

 

그림 5. 얼음이 녹자 드러난 관의 장식, 가죽, 사슴모양의 아플리케
그림 6, 2008년 필자 촬영,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
그림 7. 파지릭고분1호
그림 8. 파지릭고분 2호

요즘은 샤먼 혹은 무속인들은 어떻게 장례를 치르는지 모르겠다.

필자가 설명하고 있는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해발 2500m의 우코크 고원에서 장례는 엄청나게 오랫동안 계획되었고, 기획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알타이 고원에 살던 2500년 전 여성의 수명은 29.6세, 남자는 38.5세였다. 그리고 나무 나이테를 분석한 결과 채벌기간은 3.5년에서 8년 사이에 이루어졌고 대부분 39년 이내에 준비되었다. 사람이 죽기 전부터 이미 준비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알탕타이 고원의 스키타이 시기 민족의 문화)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의 얼음이 녹자 드러난 무덤의 구조를 살펴보기로 하자.

여성샤먼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무덤을 발굴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구조를 알아야 한다. 

 

 

 

아크-알라하 3 유적은 3m(지표에 드러난 돌에서부터)로 네모 구덩이(3.6×4,4m)를 파고 가장 바닥에 나무로 무덤방(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나무관(목관)을 넣었다. 그리고 구덩이는 돌로 채워 넣었다. 구덩이 뿐만 아니라 지상에도 직경 10m 범위로 높이 50cm가량으로 둥글게 돌을 쌓았다.

 

 

 

 

 

무덤의 단면도(그림 2)에도 표시가 나지만 목곽의 주변에는 지표와 가까운 곳 보다 큰돌과 작은 돌을 사이사이에는 작은 돌을 섞었으며, 지표와 가까운 쪽은 작은 자갈을 채웠다. 지표의 흙을 제거하고 나자 무덤의 가장 상층 중앙부를 채운 돌이 반쯤만 남아 있다(그림 3). 왜 일까? 무슨 흔적일까?(답은 조금 있다가...)

 

그림 3. 

 

이 중앙의 돌을 제거하고 나자, 무덤의 경계로 볼 수 있는 호석이 드러났다.(그림4) 호석의 직경이 10m였다. 

 

그림 4. 무덤의 둘레를 표시하는 돌(호석), 그림1의 사진을 조감도로 그려놓은 모습이다.

 

무덤구덩이를 채운 돌을 드러내자 바닥에서 깊이 1m 가량에서 무덤구덩이의 동쪽에서 말 3필이 확인되기 시작했다. 말 2마리는 두향이 동쪽이었고, 완전히 옆으로 뉘웠으며, 말 한 마리는 이 말의 다리 부위에서 확인되었다. 이 말은 배를 바닥에 깔고 확인되었다(그림 5) 3필을 드러내자 그 아래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있었다(그림 6). 이 무덤은 뭘까? 여성샤먼은 그 보다 아래에 있다.

그림 5.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 가장 상층 말 3필

그림 6. 말 3필을 드러내자 확인된 카라-코바문화의 추가장(b,c). b-추가장의 덮개돌, c-추가장의 덮개돌을 드러낸 목관, d-추가장의 덮개돌을 들어낸 모습, 가장 아래쪽의 나무는 주인공 무덤의 천장이다.

 

말을 드러내자 이 무덤의 덮개인 납작한 판돌이 확인되었고(그림 6-b), 나무판자로 제작된 목관(2.2×1m)(그림 6-c)이 확인되었다. 이 무덤의 덮개돌과 목관은 원래 무덤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여성샤먼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무덤은 알타이 고원의 살던 카라-코바 문화의 것으로 밝혀졌다. 추가장의 흔적이다. 알타이에서 종종 확인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카라-코바 문화의 무덤에서는 시신이 흩어진채 확인되었고, 유물자체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그림 6-c).

왜? 그 당시에 이미 도굴되었다고 한다. 발굴자들은 시신의 살이 붙어 있을 때 이미 도굴되었다. 어떻게 인지는 모르겠지만, 위에서 설명한 추가장의 무덤이 목관이 네모반 듯 하지 않고, 마름모꼴에 가까우며, 인골의 뼈가 흩어진 흔적들은 무덤이 얼어 붙기전에 도굴되었을 꺼라고 생각한다.

 

카라-코바의 무덤 때문인지, 카라-코바의 무덤을 도굴할 때 생긴 것인지 모르지만, 표토를 벗겨내자 무덤의 경계선(호석)안을 채운 돌이 반쯤만 남아 있던 이유( 그림 3)도 그 때문이다.

 

그 덕분에 여성샤먼, 주인공의 무덤은 전혀 도굴당하지 않았다.

 

참고문헌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그림1.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 무덤에서 미라를 들어올리는 장면.

 

그림 2. 아크-알라하 3유적의 여성 샤먼 관 속 얼음

 

그림 3. 아크-알라하 3유적의 무덤방 속에서 들어난 목제 쟁반과 그 위의 동물뼈(고기덩어리)였음.

그림 4. 아크-알라하 3유적의 관에서 미라를 꺼낸 직후

 

*위의 사진은 우코크 고원의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주인공이 다시 땅위로 올라오는 장면부터 거꾸로 편집해 보았다. 그녀는 무덤속에 들어갈때 이와는 반대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사진은 참고문헌에서 발췌된 것이다. 

 

스키타이문화의 미라를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얼음공주라고 처음에는 제목을 붙이고, 어제는 여성 샤먼이라고 했다. 사실 얼음공주라는 별명은 무덤 속에서 얼음이 꽉 차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베리아 알타이라고 하면 ‘춥다’라는 이미지와 신비로움, 대중성 때문에 ‘얼음공주’라는 별명이 붙였다. 그러나 정작 발굴한 사람들은 가장 최상위 계급은 아니며, 여러 정황으로 보아서 그녀는 살아서 샤먼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보다 더 화려한 부장품이 들어간 무덤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들은 얼마나 잘 살았는지, 아니면 보이는 거와는 달리 일반인들은 못살았는지 모르지만, 화려하게 치장된 말 6필을 무덤 속에 그녀와 함께 묻었다. 필자는 이 부분을 설명할 때 학생들에게 벤츠 최상급 기종 6대를 무덤에 밀어넣은 거랑 같은 거라고 설명한다. 애들도 꺄르르 웃는다.

어느 문화에서나 장례식은 살아있는 자들의 잔치다. 보이기 위한. 레닌을 미라로 만든 이유도 스탈린의 권력기반이 약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 레닌 무덤을 만들고 보관하던 기술은 이 미라의 복원과 보관을 위해서 활용되었다. 또 김일성도...

 

스키타이 문화는 놀랍게도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누구일까? 어느 책일까?

 

그리스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남아 있다. 이 책은 기원전 450년에 쓴 책인데, 이 책의 4장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이 스키타이 원정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 때 스키타이 민족에 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스키타이 민족의 강역, 주변민족, 기원과 생활풍습, 전쟁풍슴, 종교 등에 대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논란이 있는 부분은 여러 곳이 있겠지만, 특히 헤로도투스가 본 스키타이 인이 어느 지역 사람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헤로도투스가 본 스키타이문화는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문화라는 주장과 시베리아 알타이의 스키타이 사람을 본 적이 있다고 주장하는 설이 있다. 스키타이 문화라고 일컬어지는 문화는 흑해북안부터 시베리아, 동쪽의 끝은 중국 오르도스 지역까지 그 분포범위가 광대하다. 헤로도투스가 시베리아까지 와서 스키타이족을 보았다는 설은 헤로도투스가 설명한 내용이 실제로 그대로 발굴된 예가 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설명드리기로 하고 여성 샤먼을 주변으로 해서 차차 설명하도록 하겠다.

 

 

 

헤로도토스는 스키타이 인들이 왕의 장례 치르는 모습을 다음과 설명했다.

‘왕이 죽으면 그 곳 땅에 큰 사각형 구덩이를 판다. 구덩이가 완성되면 전신에 발삼처리를 하고 마차에 시신을 싣는다. 그 전에 시신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전부 꺼낸 다음 그 안에 생강, 향료, 파슬리씨, 아니스를 넣고 다시 봉합한다. 그런 후에 시신을 마차에 실고 다른 부족에게 간다’

 

헤로도투스도 언급했듯이, 그리고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여성도 죽은 후 곧바로 매장하지 않았다. 최소 3개월이 지나서 매장되었다는 분석에서 보듯이 그들의 장례 치르는 기간은 매우 길다.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 같이 매장된 말이 먹은 건초가 6월 중순 쯤이었던 것으로 밝혀졌고, 꽃가루분석결과도 이 시기로 판명되었다.

 

아크-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가 거의 완벽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땅에 묻히자 말자 냉동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무덤은 관과 곽(관을 넣은 무덤방을 곽이라고 한다)이 얼음으로 꽉 차있었기 때문에 후대에 도굴이 불가능했다.(알타이 산맥의 여러 유적 고분은 쉽게 도굴당했다. 아이러니하게 무덤을 상징하는 봉분이 그대로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알타이라고 해도 무덤 내부가 완전히 냉동되어 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는 깊이 3m의 토광을 파자마자 지하수가 차올랐고 그대로 냉동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는 더운 여름이라도 3m정도를 파면 그곳은 얼음 덩어리처럼 단단하게 얼었다. 미라가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특수한 처리 때문 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얼음 때문에, 영구동토대였기 때문이다. 우코크 지역에 살던 2500년 전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고, 이를 이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일정한 계급이상의 사람이 죽으면 미라 처리를 하고 땅이 바로 얼 수 있는 기간 까지 기다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래서 죽은 지 3~6개월이 지나서 주로 봄과 가을에 매장했다(폴로스막 2001).

 

 

참고문헌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앞에서 설명 드린 2500년 전 알타이 산맥의 우코크 고원의 여성샤먼은 아크-알라하(Ак-Алаха-3,Ak-Alakh) 3유적의 1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알타이 주민들에게 이 여성을 두고 고고학자들이 ‘고고학자료’니 ‘출토되었다’느니 이런 말을 써서 엄청나게 분노했다고 한다. 박물관에 진열해 두고 사람들이 구경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두번 죽었다고 생각했겠지..그들에게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여성은 아크-알라하 3유적에서 확인된 최초의 여성이었다. 1993년에 발굴되었는데, 그 때 찍은 비디오 사진이 유투브에 공개되어 있어서 아래에 링크해 둔다. 1993년에 발굴한 연구소에서 직접 찍은 건데, 러시아말은 모르셔도 그 분위기나 이런 것 등은 한번 보시기 바란다. 인터뷰의 내용은 아래에 간략하게 적어두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yLwxIkmw9M#action=share

 

(1993년은 러시아가 정말 힘들 때이다.1991년에  페레스트로이카가 있었다. 배급도 끊기고 먹을 것이 거의 없었다고 들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그때 이야기를 하면 지금도 치를 떤다. 나의 지도교수님도 그때 부두에서 바나나를 옮기고 받은 돈으로 겨우 먹고 살았는데, 바나나로 배를 채웠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도 바나나를 보면 치를 떠신다. 러시아인들은 고르바초프를 저주한다. 마치 전두환처럼. 그래도 그 때 워낙 중요한 발굴이어서 러시아에서는 이를 지원했다.:필자의 해설

 

러시아에서는 기계로 발굴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고분의 돌도 사람들이 하나씩 다 들어냈다. 깊고 높은 산중(해발 평균 2500m)에 위치하기 때문에 그냥 차도 못간다. 러시아군용트럭을 이용해야 물건을 옮길 수 있었다. 낮에는 매우 덮고, 밤에는 영하로 떨어져서 발굴이 너무나 힘들었다고 한다. 비디오에 보면 저 텐트에서 영하로 떨어지는 밤을 보냈다고 한다.

인터뷰한 발굴책임자인 폴로시막은 그 때 정말 힘든 발굴의 여정을 설명했다. 이 분은 이 유적을 발굴하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두 번째 인터뷰인은 몰로딘인데, 이 발굴 과정에서 고분의 얼음속 사람을 꺼내기 위해서 뜨거운 물을 부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부위는 괜찮지만 이 여성의 얼굴은 그냥 사라졌다고 한다. 물론 과정이 사진과 비디오로 남아 있다고 하지만 본인도 아쉽다는 표정이다. 나중에 미라처리과정에서 다시 설명드리겠지만 가장 미라 처리과정에서 힘든 부분이 얼굴피부라고 한다. 특히 스키타이 문화의 특징상 죽으면 바로 매장하는 게 아니라 장례 치르는 기간이 3개월에서 6개월까지 있었기 때문에 그때 이미 얼굴피부는 없어진다.)

 

 

이 여성의 나이 아크-알라하 3유적의 1호 무덤에서 확인된 여성은 스위스 지리히대학의 의학연구소에서 그녀의 피부를 분석한 결과 그녀가 죽은 뒤 3~6개월 뒤에 무덤에 부장했고, 28~30세의 여성이었다는 점이 밝혀지게 되었다(Хаури, Блаттер, 2000).

 

이 여성의 무덤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말이 6마리 함께 부장되었는데, 그 말의 위를 살펴본 결과 남아 있는 풀의 분석한 결과 6월에 말이 죽었다고 한다.

 

이 여성의 오른쪽 어깨부터 팔목까지 그리핀과 사슴 등 동물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알타이 산맥의 여러 고분에서 미라가 확인되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문신이 확인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 알려진 것은 파지릭 유적의 2호(남성), 아크알라하-3유적의 1호(여성), 베르흐-칼쥔-2 유적의 남성에서 확인된다.

 

아크-알라하 3유적의 여성 샤먼은 61cm나 되는 높은 모자를 썼고, 가발도 썼다. 옷은 치마를 입었고, 그 위에 상의는 여밈이 없는 긴 셔츠를 입었다.

 

아래의 그림은 무덤에서 나온 의복과 가발, 장신구 등으로  그녀를 복원한 모습이다. (출토유물에 대해서도 계속 포스팅해드리겠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출토 여성샤먼 복원도(국립중앙박물관 1995) 1995년에 서울과 부산에서 개최되었던 알타이문명전 도록에 복원도가 소개되었다. 

최근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녀는 유방암에 걸렸고, 두개골과 관절에 심한 외상이 남았는데, 이것이 직접적인 사인을 가는성이 제기되었다(https://scfh.ru/papers/zhizn-i-smert-altayskoy-printsessy/)

 

두개골 뒤쪽의 큰 구멍은 미라 만들때 뇌를 빼낸 구멍이고, 왼쪽그림의 두개골 오른쪽에 심한 외상이 직접적인 사인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 그림은 위의 링크해 둔 잡지에서 본문을 볼 수 있다. 

앞으로 아크-알라하 3유적의 여성샤먼이 묻힌 무덤과 유물, 말 6마리, 말의 장식 등에 대해서 설명드리겠다.

 

 

그런데 비디오에 보면 무덤 속에는 왜 얼음이 차 있는지, 그리고 왜 죽은지 최소 3개월 이후가 되어서야 매장을 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셔야 한다.

 

참고문헌

국립중앙박물관 1995, 알타이문명전

폴로시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https://scfh.ru/papers/zhizn-i-smert-altayskoy-printsessy/)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갑자기 어제 오늘 이 키워드로 많이 찾아오셔서 ....

시베리아 카테고리의 신석기시대, 순동시대, 청동기시대가 다 채워져야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이 문화에 대해서 자세하게 포스팅 할 예정인데, 머 하나씩 해 두는 것도 괜찮을 듯 하다.

 

아시다시피 스키타이문화라고 불리는 시베리아의 철기시대문화에서는 미라가 확인된다.

필자가 대학교 입학하던 해인 1995년에 한국에 알타이 미라전을 국립중앙박물관과 부산에서도 순환전시를 한 적이 있다. 너무 전시가 어둡고 유물전시물 주변에 얼씬도 못하게 해 놓아서 미라의 얼굴은 생각이 안난다. 내가 그때는 러시아 유학갈꺼라고 생각도 안했다. 여담이지만.

 

먼저 알타이 미라의 복원문제를 접근 하기 위해서는 이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알타이 미라를 복원했는데, 유럽인이라더라...아니다 등....

(역사와 정치의 문제이다)

 

알타이는 산맥의 이름이다. 알타이의 굽이굽이 산맥은 사람이 안 살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이 살았던 흔적 즉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대부분 산 위가 아니라 산과 산 사이에 유적이 위치한다. 이런 지형을 러시아어로는 돌리나долина라고 하고, 우리나라 말로는 계곡이 가장 적당하다. 그런데 한국어로 계곡이라고 번역하면 그 뉘앙스가 아주 좁은 계곡에 물이 흘러내리는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알타이의 그 산 사이의 그 분지 같은 계곡을 단순히 계곡이라고 번역하기 힘들다.(초창기에는 그렇게 번역을 많이 했다.)

 

하여간 산과 산사이의 평탄지, 낮은 곳으로 완전한 분지는 아니지만 아늑한 곳에 유적이 많다. 알타이 산맥 사이에서는 특히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이 많이 남아 있는 돌리나 곳이 ‘우코크’이다.

 

https://www.google.co.kr/maps/place/Ploskogor'ye+Ukok/@47.2032452,86.9194223,5.46z/data=!4m5!3m4!1s0x42b77554a0669b95:0x2fcb81f24cd72647!8m2!3d49.3333333!4d87.5?hl=ko

 

Google 지도

Google 지도에서 지역정보를 검색하고 지도를 살펴보거나 운전경로 정보를 검색합니다.

www.google.co.kr

이 우코크(Укок, Ukok)고원의 무덤에서는 여성미라가 출토되었다. 우코크 고원의 무덤에 관해서는 너무 많은 내용이라서 올해 차차 해 보도록 하겠다. (사실 필자는 신석기시대부터 차례대로 하고 싶은데,)

 

그런데 이 여성은 살아서도 매우 인기가 많았겠지만, 죽어서도 인기가 너무 많아서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여성이 발견된 무덤이 있는 유적의 이름은 아크 알라하-3(Ак-Алаха-3,Ak-Alakh-3) 유적이다. 1993년 폴로시막(Наталья Викторовна Полосьмак)이라는 여성 고고학자가 책임을 맏아서 발굴을 하였다. 이 유적은 기원전 5~3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필자가 앞에서 포스팅한 사진은 직접 찍었는데, 그때가 2008년인가 였다. 이 미라는 그 때까지 폴로시막 박사가 연구하는 연구소의 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2012년에 알타이공화국의 고르노-알타이 시(г. Горно-Алтайск, Gorno-Altaysk)의 아노히나 박물관(музея имени Анохина, Anokhin National Museum)으로 옮겼다.

 

즉 필자가 사진을 찍은 연구소박물관은 노보시베리스크 시의 연구소 박물관에서 찍은 것이고 2012년은 알타이공화국의 박물관으로 옮겼다. 미라 입장에서는 알타이에 쭉 매장되었다가 연구소에서 발굴해서 노보시베리스크로 갔다가 다시 알타이로 돌아온 곳이다.

 

2018/05/02 - [북방항로 따라 역사기행] - 무덤과 집

 

무덤과 집

앞에서 과거의 무덤은 살아 생전의 집을 옮긴 것에 대해서 신석기시대의 사례를 예로 들고 살펴보았다. http://eastsearoad.tistory.com/122?category=714181 그런데 또 필자가 알고 있는 그런 사례를 설명하고자..

eastsearoad.tistory.com

 

알타이공화국은 중국으로 치면 소수민족자치구이다. 러시아는 소수민족을 인정해주기 때문에 각 지역에 공화국을 인정한다. 러시아연방소속이지만 자기네들의 자치법도 있도 자부심이 대단하다. 알타이 사람들 신화에는 땅 밑에 있는 공주를 건드리면 재앙이 닦친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20년간 알수 없는 지진과 홍수 등이 모두 알타이 미라를 꺼내면서 생긴 것이라고 생각해서, 알타이로 다시 돌아온 공주를 땅속에 뭍기로 결정했다.

알타이의 영적 센터에서 회장은 샤먼인데, 이 분과  몇몇 사람이 알타이 법원에 박물관을 상대로 소송까지 불사 했으나 졌으나, 국제법으로 소송할 수 있다고도 한다.

 

이상한건 예전에 필자가 본 미라의 얼굴복원 모습은 유럽인도 아니고 아시아인도 아니었다.

스키타이 문화의 사람들은 인도-유럽인종이라는 생각 혹은 연구가 팽배했었다. 그런데 위의 일이 있은 이후로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모든 알타이 미라의 복원된 얼굴은 유럽인에 가까웠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의 몰로딘 박사는 우코크 고원에서 발굴된의 미라는 공주도 아니고, 중간계급정도이고 어쨌든 이제 알타이에 있다......그리고 알타이의 모든 자연재해가 이 우코크 고원에서 발굴된 미라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이전에 알타이의 다른 유적인 파지릭 무덤에서 미라가 발굴이 첫 번째이고, 그가 계급적으로도 더 높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현재는 상트 페테르부르그의 에르미타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인터뷰가 신문에 실린적이 있다'.(«Эксперт Сибирь» №19(161)

https://web.archive.org/web/20070525114358/http://www.expert.ru/printissues/siberia/2007/19/interview_arheolog_molodin/

 

*참고로 인터뷰한 몰로딘 박사는 러시아과학아카데미의 대표적인 책임수석연구원의 자격으로 인터뷰 했지만 사실은 우코크 고원 발굴책임자인 폴로시막 박사의 남편이다^^

 

미라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계속 포스팅 해 드리겠다. 최근에 떠 돌아다니는 여성미라의 얼굴복원에 관한 내용도 정보를 좀 더 수집해서 말씀드리고자 한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0. 1. 2. 14:58 카테고리 없음

 

여러분은 최근에 재밌게 본 영화나 드라마가 있으신가요?

저는 영화를 매우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2018년 부터는 본 영화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이래저래 영화보러 가는 것도 귀찮기도 하고, 사실 그 만큼 맘에 여유가 없다는 설명이 가장 정확한거 같네요.

 

그래도 작년에는 영화는 아니지만 미드인 ‘체르노빌’을 재밌게? 봤습니다.

재밌게? 라는 표현은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지만, 실제 같은 실제로 일어난 일을 영화로 구상한다는 것, 제가 감독이라면 진짜 어려울 것도 같은데, 또 잘만 만들면 인기가 많을 수 밖에 없는 것이 팩트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재밌게 본 이유 중에 하나는 영화의 현실감입니다.

거기 나오는 도시의 분위기, 소비에트 도시의 분위기, 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의 연구소

연구소 내부의 인테리어, 중앙계단으로 올라가서, 중앙에는 2,3층으로 이어지는 높은 벽이 있고 거기에는 연구소를 상징하는 심볼이 걸려 있고, 건물 내부의 목제 인테리어, 바닥의 인테리어 등... 필자가 처음 유학갔을 때 많이 남아 있던 과학아카데미 건물의 모습과도 매우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습니다만. 소비에트 건물은 비슷하면서 서로 다른데, 그런 연구소 분위기가 너무나 생생했답니다.

 

그런데 어색했던것도 있는데 그건 사람의 이름입니다.

예를 들면, 핵발전소에서 마지막에 셧다운 키를 눌렀던 ‘아키모프’는 이름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입니다. 러시아 사람의 성.

그리고 거기 나온 모든 사람은 서로를 지칭할 때 성으로 지칭합니다.

예를 들면 저한테 ‘김!’이라고 하는 것처럼.

 

감독 혹은 작가가 왜 그렇게 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으니 모르겠지만 두 가지로 추측됩니다.

첫 번째는 러시아인의 이름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유명한 러시아인은 푸틴 대통령입니다.

그 분의  풀 네임은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Путин(러시아어), Vladimir Vladimirovich Putin(영문)입니다.

제일 앞 ‘블라디미르’는 이름이고, 그 다음 오는 ‘블라드미르비치Владимирович’는 아버지의 이름에 вич 혹은 ич를 붙인 것입니다. ‘부칭’이라고 합니다.

즉 블라디미르의 아들 블라디미르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성이 푸틴입니다.

 

그럼 여성은?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은 남성 이름이기 때문에 여성한테는 안 씁니다. 그래서 약간 예를 달리하면 올가Олга라는 이름의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아버지가 블라디미르 이면 그 여성의 이름은 ‘올가 블라디미로브나(Владимировна)’이고 아버지의 성에 ‘a’를 붙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성이 푸틴이면 그 딸은 ‘푸티나(Путинa)’가 됩니다.

 

여성 이름 ‘올가 블라디미로브나 푸티나’ (Олга Владимировна Путинa).

 

눈치가 빠르시군요.

이름 만 봐도 여성인줄 알수 있습니다. 부칭과 성의 끝이 ‘a’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 포스팅에서 이름만 봐도 여성인지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름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공으로 쓸일 이 있을 때, 논문, 기사, 글, 등에는 ‘올가 블라디미로브나 푸티나’ (Олга Владимировна Путинa)를 다 쓰지 않고, 성과 이름과 부칭의 앞 글자만 씁니다.

푸티나(Путинa О. В.)-->성은 앞에 쓸 수도 있고, 뒤에 쓸 수도 있습니다.

 

그럼 러시아에서 사람 이름을 부를 때는 어떻게 부를까요?

친구끼리는 매우 친밀하게 부릅니다. ‘올가’는 ‘올가’ 올랴, ‘올’ 등등..

‘이브게니’는 ‘이브게니부터, ‘제냐’ ‘젠칸’

‘세르게이’는 세르게이, 세료가, 세료자,

‘니콜라이’는 니콜라이 ‘꼴랴’ ‘꼴’

 

재밌죠? 러시아이름에는 애칭이 있습니다. 친할수록 짧게 축약해서 부릅니다.

아니 스트레스라구요.....^^

 

반대로, 손윗사람이나, 상사 혹은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부칭까지 붙이는 게 예의입니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르비치’ ‘올가 블라드미로브나’ 등.

 

그러나 상대를 성만 부르는 경우는 매우 드뭅니다...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전쟁과 평화나 죄와 벌, 등 러시아의 소설에는 등장 인물 이름만 엄청나서 이 사정을 잘 모르면, 독자가 혼란스럽습니다. 앞에 나온 사람 이름 ‘세르게이’가 뒤에서는 ‘세료자’라고 부를 수도 있고 부르는 사람이 그 사람 보다 낮거나 잘 모르는 사람이면 '세르게이 블라디미르비치'라고 부를 수도 있기 때문에... 러시아 사람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다른 나라사람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분명 ‘체르노빌’은 러시아 사정을 좀 아는 사람이라면,

‘어’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사람 이름입니다.

어짜피 다른 나라 사람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러시아권 사람들이 보면 뭐야?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앞 포스팅에서 필자가 러시아어 논문이름만 보고도 전혀 모르는 분임에도 여성인줄 안다고 했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2020년이 밝았는데, 필자도 결심한 것들도 많은데, 마음만큼 되는 것도 있고, 되지 않는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경험상). 저도 여러분도 좋은일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김재윤

posted by 김재윤23

별로 눈길끄는 이야기가 없는 이 공간에서 오늘은 약간 흥미로운 유적을 소개드리고자 한다.

필자가 지난 6월에 답사 다녀온 박물관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다.

 

2019/06/24 - [세계의 박물관/중국의 박물관] - 합민망합 유적(哈民忙哈) 박물관

 

합민망합 유적(哈民忙哈) 박물관

올해의 첫 번째 답사를 다녀오고, 두 번째 답사를 준비하면서, 일주일도 안된 기억이 가물해진다. 첫 번째 답사는 주로 중국의 몽골지역인 내몽골지역이었다. 꼭 보고 싶은 유적의 유물이 오늘 소개할 곳이다. 왜..

eastsearoad.tistory.com

 

사실 필자가 앞으로 홍산문화 옥기와 관련해서 많이 자료를 활용할 것인데,

중국 내몽골 통요부근에 있는 하민망합 유적이다.

 

(아래 구글 지도를 클릭하시면, 박물관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다. 유적 위에 박물관을 지었음으로 그 곳이 유적의 위치도 된다. 구글지도와 포토 기능 너무 좋다....ㅋㅋ, 아래에 붉은 워터마크 표시가 박물관의 입구이다.)

 

https://www.google.com/maps/place/43%C2%B058'45.7%22N+122%C2%B012'59.7%22E/@43.9805481,122.2100397,2115m/data=!3m1!1e3!4m5!3m4!1s0x0:0x0!8m2!3d43.9793694!4d122.2165833

 

 

43°58'45.7"N 122°12'59.7"E

102 Xiang Dao, Keerqinzuoyizhong Qi, Tongliao Shi, Neimenggu Zizhiqu, 중국

www.google.com

이 유적은 5년에 걸쳐서 주거지 78기와 무덤 14기를 발굴했다 한다.

필자가 이 유적에 대한 분석을 끝낸 건 아니지만, 아는 한에서 설명하면

 

유적 전체 분포도

 

 

이 유적은 ‘홍산문화의 주거지+홍산문화에서 볼 수 없었던 토기+홍산문화와 비슷한 옥기+그 외 홍산문화와 다른 석기’로 이해된다. 연대는 5500~5000년 전에 해당되며, 홍산문화의 가장 늦은 시기인 5기(5000~4400년 전, 김재윤 2019)보다 빠르다.

당연히 앞으로의 논점은 이 유적이 홍산문화의 것인지 아닌지. 혹은 홍산문화 자체에 대한 검토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이 유적에는 40호 주거지 안에 사람이 98기가 들어간 채로 발굴되었다.

98기는 시신이 완전히 사지가 굽어진 것이다. 사후강직이 일어나기 전에 누군가 98기의 시신을 굽혀서 한 주거지에 넣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우연히 이렇게 한 건 아닐 것이다. 집터를 무덤으로 사용한 것이다.

책에는 전염병이 가능성이 제기 되었다(아래참고문헌). 이 유적에는 여러 집터에 인골이 묻혀 있는데, 40호를 제외하고 6인, 17인, 22인 등이 묻힌 집터도 있다. 무덤에 인골을 집어 넣은 것도 의도적이었고, 집에 불낸 것도 의도적이다. 불난 집은 12채이다. 불난 집 모두가 무덤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보고서가 완간 된건 아닌데,, 하단에 소개해 둘 책으로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완전히 보고서 나오기 전에 이런 책이 나온 거 보면....이걸로 끝내려는 생각이 있는 것도 같다....)

 

40호 집터 안의 98인이 확인된 정황.
37호에는 22인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화재난 주거지인지 알 수 있는 것은 집터의 가장 하단에 남아 있는 것이 집을 지었던 목재의 흔적이다. 

 

32호는 불은 났는데, 인골을 뭍고 불을 낸건 아니다. 무덤으로 쓰지 않았다. 그러나 불나면서 죽은 사람은 확인되었다.

 

아마 여러방면에 학자들이 연구하면 재밌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나같이 유물과 유적중심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보면, 한 가지 더 떠오르는 생각.

 

신석기시대 늦은 시기로 갈수록 무덤과 집은 구분된다(김재윤 2017).

즉 이 단계는 이미 무덤이 마을유적과는 별도로 확인됨으로 이런 현상은 더욱 이래적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통요(通遼)는 그간 유적이 많지 않아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는데....

너무 좋은 유적이 중국에서 보고되고 있다.

너무 좋은? 연구하기에 좋은....슬슬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참고문헌

內蒙古文物考古硏究所, 香港中文大壑中國考古藝術硏究中心, 2018, 『哈民玉器研究』, 中國書房

김재윤 2016, 5000B.P.이후 평저토기문화권 동부지역의 무덤으로 전용된 주거지에 대한 이해, 한국신석기연구

김재윤 2019,  「홍산문화의 편년에 대한 검토-‘압인之자문토기’를 중심으로」, 『고고학』, 18-2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필자의 글에서 위와 같은 명칭을 자주 발견할 것이다.

도대체 무슨 뜻?

별로 어렵지 않다.

 

유적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살던 곳이다.

인간이 살다가 남긴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인간이 살던 곳은 얼마나 오랫동안 살았을까?

인간은 한 지역에 오래 머물고 싶다. 단, 안정적이라면, 살만하다면, 살기좋다면.

(물론 살기 좋더라도 어떤 이유에서 떠나고 싶은 사람도 있다.)

 

그래서?

유적 즉 인간이 살던 곳은 어떤 한 시간에만 인간이 산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크게 어렵지 않다. 조선시대 이후로 서울은 항상 서울이었다.를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서울과 현대의 서울은 다르다.

무엇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두.

 

하지만 조선시대 서울이 우리나라 서울이 아닌가?

구지 답은 않더라도....알 것이다.

 

서울은 크게는 조선시대 서울, 근대의 서울, 현대의 서울로도 구분할 수 있다.

물론, 조선시대 서울도 그 구분은 아주 세세할 수 있다.

 

즉 00하층문화와 00상층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시간적으로 다른 문화를 이야기 한다.

그럼 왜 명칭을 달리해도 되는데, 헷갈리게 부르냐?

 

아래 그림은 어떤 유적의 토층그림이다.

 

압록강 유역의 신암리 유적 3지점 토층도

 

쉽게 말해서 00 유적의 아래층(하층)(a층)과 00 유적의 윗층(상층)문화(b층)가 다르기 때문에 각각 달리해서 부른 것이다.

 

무엇이?

a층에서 확인된 문화내용 즉 토기, 석기, 이를 이용한 시간대

b층에서 확인된 문화내용 토기, 석기, 이를 이용한 시간대

(좀 더 세밀하게 이야기 하면, a와 b는 지역적 범위도 달라질 수 있는데, 헷갈릴 수 있음으로 좀 더 심도 깊은 내용은 다음으로 한다.)

 

대개의 경우 그 지역에서 그 시간대에 알려진 문화가 없는데, 어떤 특정한 유적이 발굴되었고, 그 유적의 층위 문화내용이 다른 경우에 그 특정한 유적의 명칭에 따라서 00하층문화와 00상층문화로 부른다.

그렇기 때문에 00유적의 하층=00하층문화가 되는 경우가 많다.

 

 오늘 포스팅 내용 가운데, ‘후와하층문화에 해당하는 유적은 후와유적의 하층과 북우둔 유적의 하층이 해당된다’라는 내용이 될 수 있다.

2019/09/04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요서지역 홍산문화토기 와 한반도비교] - 우하량 1지점과 여성형상물 2

 

우하량 1지점과 여성형상물 2

앞서서 우하량 1지점이 여신묘일 억측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 근거가 된 우하량에서 출토된 얼굴형마스크 및 5지점에서 출토된 여성형상물을 홍산문화와 인접한 지역의 문화와 검토하고 있다. 요서지역에서는 신석..

eastsearoad.tistory.com

 

물론 00문화는 대개의 경우 특정 성격의 유적 집합소를 이야기 한다.

집합체는 여러 유적의 합을 이야기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즉 하나의 유적이 특정 문화로 될 수도 있다.

 위에서 필자의 글을 잘 읽어보면, ‘그 시간대에 알려진 문화가 없는데’라는 말이 있다.

 

즉 그 시간대에 그 지역에서 알려진 문화가 없으면, 어떤 특정한 유적을 중심으로 '00유적에서 알려진 문화'라는 의미의 '00문화'를 쓰기도 한다.

별로 어렵지 않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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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