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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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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재 시베리아 남부의 알타이 산에 위치한 파지릭 계곡의 2500년 전 무덤을 들여다 보고 있다. 계곡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이다. 필자가 어제 공개한 유물은 2017년에 영국박물관에서 있었던 특별전에 소개된 파지릭 2호분의 유물이었고, 예전 루덴코가 펴낸 책에는 거기 없는 유물도 더 있다. 물론 꼼꼼히 보시는 분이라면 눈치 채셨겠지만...최근에 있었던 스키타이 문화 특별전 가운데서 가장 많은 유물이 공개되었다고 한다.

 

흑백사진이지만 이미 세상에 알려진 유물은 좀 더 많고, 어제 유물에 대한 설명도 점차 덧붙여 가도록 하겠다.

 

파지릭 2호분은 평면형태가 약간 이상하다. 정확하게 동쪽 단벽의 무덤방 길이가 짧아져서 북쪽의 긴벽을 약간 들여서 축조했다. 이 무덤방의 바닥에도 펠트 및 카페트 가 깔려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펠트는 무덤바닥 뿐만 아니라 벽에도 걸려있었는데, 북벽을 제외한 나머지 벽에도 달려 있었다.

기억하시겠지만, 아크 알라하-3 유적의 얼음공주 무덤에서도 벽에 펠트(펠트는 양모를 고열에서 응모해서 만든 천이다. 일종의 양모로 만든 부직포이다. 양모로 짠 천과는 다르다)를 걸어 두었다. 그리고 알타이의 원주민들도 집에서 벽에도 펠트를 걸어둔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한 적이 있다.

 

벽에 걸어둔 펠트는 나무못으로 고정되었다. 길이는 8~15cm로 못대가리의 윗 부분이 볼록튀어나온 것과 거의 편평하지만 턱이 있어서 예리하게 칼로 잘라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벽에 달았던 펠트장식은 청동 못으로도 고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동못은 납작한 못대가리아래에 막대기 모양으로 한쪽 끝이 뾰족하다. 길이는 9.5~11.6cm가량이다.

 

그림 1. 파지릭 2호분, 나무못

 

그림 2. 파지릭 2호분, 청동못

 

벽에는 꽃과 연봉오리 모양의 문양의 아플리케 장식을 덧붙여서 만든 펠트제 장식이 확인되었다. 러시아 학계에서는 연꽃 모티브는 페르시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림 3. 파지릭 2호분의 벽걸이 장식. 펠트제. 길이 47cm, 너비 14cm

 

그림 4. 그림 3을 좀 더 가까이 찍은 사진

 

펠트제 벽걸이 장식 외에도 날실과 씨실을 교차시켜서 잔 양모천으로 된 유적의 2호분에서는 양모로 짠 천으로 깔개가 확인되었다. 양모의 단위는 너비 42cm가 되도록 짠 것이다. 센티미터 당 30실의 비율로 짰다. 무덤방의 가장 바닥에는 펠트를 깔고 그 위를 이 카펫으로 덮었으며 시신도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파지릭 유적의 3호분에서도 비슷한 유물이 확인되었고, 바샤다르 2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있다.

 

그림 5. 파지릭 2호분, 높이 120cm, 너비 228cm

 

우코크 고원의 얼음공주 무덤인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는 그냥 검은색 펠트를 걸어두었다고 했는데, 파지릭 유적에서는 벽의 가장 상단에는 이런 장식까지 덧붙였다. 화려한 무덤이다....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 위치한 2500년 전 무덤에서는 나무로 된 무덤방 안에서 통나무관 1개가 확인되었다. 통나무관은 나무를 파서 만들었는데, 뚜껑까지 잘 제작된 것이었다. 무덤방은 나무방이다. 대부분 낙엽수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무덤방(그림 3)의 모양이 약간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사각형이 정확하게 아니다.

북쪽벽이 미세하게 조정되었다. 6cm정도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모서리에는 위에서부터 4번째와 5섯번째의 나무에 납작한 나무패드(그림1)를 덧대어서 무덤방의 벽을 고정(그림 2)한 것이 확인되었다. 나무패드는 못대가리가 없는 나무와 구리못으로 고정되었다.

 

그림 1. 파지릭 유적의 2호분에서 무덤방의 북쪽벽을 고정했던 나무패드

 

그림 2. 파지릭 2호분의 북과 동벽의 모서리에 나무패드(그림1)을 덧댄 모습.

 

파지릭 유적에서 큰 고분은 모두 도굴구덩이가 있다. 루덴코는 처음에 도굴이 크게 영향을 못미쳤다고 했지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나마 유물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 2호분인데, 얼음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도굴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얼음을 걷어내고 나서 무덤방에서 많은 유물이 확인되었고, 이를 수습한 후 그 아래의 무덤바닥에서도 유물의 위치가 그대로인 것이 나타났다. 무덤방바닥의 유물이 제자리라는 사실은 후대에 발굴에서도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유물이 확인됨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림 3. 파지릭 유적의 2호분에서 무덤방바닥에서 확인된 유물, 1. 통나무관, 2-석제 그릇(조명과 관련됨), 3-연기흡입용 텐트부속품, 4-두번째 연기 흡입용 텐트부속품, 5-다리가 달린 된 향로, 6-받침이 달린 청동향로, 7-가죽, 8-남성용 의복일부, 9-호랑이 다리가 달린 목제 상, 10-다른 모양의 목제 상에 달렸던 다리, 11,12- 목제 상 다리, 13-목기, 14-토제 항아리 모양의 액체용기, 15-토제 액체용기(14번과 모양이 다름), 16-용기 받침대.

 

그러나 필자가 먼저 공개한 얼음을 걷어낸 후의 무덤방의 유물은 제자리가 아닌 유물이 많은 것을 루덴코도 시인했고, 무덤방 바닥의 유물만 제자리였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통나무관에는

 

그래도 이렇게 남겨진 유물 덕분에 파지릭문화의 장례식에 어떤 물건이 사용되었는지, 혹은 살아았을 때 사용했는지를 알 수 있다.

무덤방 바닥에서는 다리가 4개 달린 목제 상이 발견되었다. 통나무관의 동쪽에 놓여 있었는데, 양고기와 말고기를 놓았을 것이다. 북쪽벽에 가까운 테이블 근처에는 액체를 담는 토기(가 확인되었다. 목제 상과 토기사이에는 목제 그릇이 나무방바닥에 서 있었다. 토기와 목제그릇은 유목민들이 마시는 우유와 우유를 발효한 음식을 담았을 것이다. 매장당시에 일종의 치즈를 공양했던 것이 5호분에서 확인되었는데, 2호분에서는 무덤방안은 아니지만 치즈가 확인되었다. 2호분에서는 연기 흡입용 청동솥과 이를 넣는 텐트가 확인되었다. 텐트는 6개의 막대기로 만들어진 골격이다. 두 세트가 확인되었다(한 세트는 이미 공개한 바 있다). 그 주변에서 가죽주머니안에 대마씨가 가득 든 채로 확인되었다. 2호분에서만 출토된 석제 그릇도 통나무관의 남쪽에서 확인되었다. 하프와 같은 현악기가 담긴 가죽주머니가 팽계진 채 확인되었다.

 

그림 4. 파지릭 2호분 남성미라의 머리

 

그림 5. 파지릭 2호분 남성미라의 일부

 

그림 6. 파지릭 2호분 남성미라의 일부 2

 

그림 7. 파지릭 2호분 출토 목제 목걸이

 

그림 8. 파지릭 2호분 출토, 머리카락

 

그림9. 파지릭 2호분 출토 모자장식

 

그림 10. 파지릭 2호분 출토 남성용부츠 일부

 

그림 11. 파지릭 2호분 출토 여성용 타이즈  일부

 

그림12. 파지릭 2호분 출토 머리장식

 

그림 13. 파지릭 2호분 출토 여성용 머리장식

 

그림 14. 파지릭 2호분 출토, 머리꼭대기 장식

 

그림 15. 파지릭 2호분 출토 모피가죽(위), 가죽지갑(하)

 

그림 16. 파지릭 2호분 출토 귀걸이

 

그림 17. 파지릭 2호분 출토 은제 거울

 

그림 18. 파지릭 2호분 출토 대마씨(위)와 대마씨가 담긴 가죽주머니(아래) 

 

그림 19. 파지릭 2호분, 연기흡입용 텐트의 골대와 청동용기

 

그림 20. 파지릭 2호분, 목침

 

그림 21. 파지릭 2호분, 목제 상(위), 상다리 일부(하)

 

그림 22. 파지릭 2호분, 용기받침

 

그림 23. 파지릭 2호분, 용기받침과 목제그릇

 

그림 24. 파지릭 2호분, 항아리모양의 액체용기, 토제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의 알타이 산에서 파지릭계곡에 위치한 파지릭유적의 무덤 중에서 2호를 집중살피고 있다. 이 유적은 스키타이문화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데, 좀 더 좁은 개념으로는 스키타이문화가운데서도 알타이에 위치한 파지릭문화의 유적이다. 2500년 전 유적인데, 이때 동아시아에서 알려진 문화는 중국에서는 춘추시대 막바지, 한국도 현재 연구된 바로는 청동기시대이다.

 

어제 2호분에서 얼음을 처음 걷어낸 무덤방의 내부를 잠시 공개했다. 그런데 우리는 알고 있다. 무덤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항상 말의 매장된 모습을 보았다는 것을 우코크 고원의 유적을 예로 들어서...

 

2호분은 다른 유적 혹은 이 유적의 다른 무덤과는 달리 말이 매장된 위치가 무덤 구덩이에서 매우 높은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포스팅에서 무덤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2020/03/12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 2500년 전 알타이 산 무덤 속의 이것은 무엇일까?

 

2500년 전 알타이 산 무덤 속의 이것은 무엇일까?

그림 1. 그림 2. 2500년 전 알타이 산에서도 파지릭 계곡에는 파지릭문화로 불리던 유적이 확인되었다. 파지릭문화는 좀 더 넓은 개념으로는 스키타이 문화(권)‘으로도 불린다. 유적에서는 대형무덤 5개가..

eastsearoad.tistory.com

 

말 무덤이 확인된 곳은 무덤의 표토층에서 0.7m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말은 세 마리가 매장되었고 향나무와 낙엽송의 가지로 덮은 채로 확인되었다. 말을 묻은 후, 무덤의 가장 윗부분은 적은 양의 흙과 함께 대량의 통나무와 큰 돌로 채워졌다.

 

특히 2호분은 1호분과 함께 무덤방의 위쪽으로 통나무가 9층이 높여 있었고, 말을 매장한 후에 2층을 더 쌓아 올렸다. 통나무의 수는 모두 240개였다. 통나무의 길이는 6.5~6.9m로 무덤구덩이의 크기보다 작아서 8개의 통나무를 동서방향으로 2층 놓아서 마무리 했다.

 

무덤구덩이를 채운 흙은 구덩이를 파낼 때 사용했던 토양으로 채워져 있으며 모든 것은 계획된 것이었다. 흙 위에는 돌을 쌓았다. 붉은 석회암 사암으로 계곡 경사면에서 확인되는 돌이다. 화강암도 파지릭계곡의 경사면에서 수집되는 것이다.

무덤구덩이는 보통 무덤 봉분의 중앙에 위치하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파지릭 유적에서도 확인되는데, 3호분과 4호분이 그렇다.

 

통나무로 만든 무덤방에는 대형 통나무를 파서 만든 통나무관이 있다. 2호분에는 길이가 4.2m, 너비가 87~95cm, 두께는 72cm가량의 통나무관이 1개 확인되었다.(남녀 미라가 확인되지만, 관은 1개이다)

통나무 관의 외부는 매끈하지만, 내부는 다듬은 흔적이 남아 있다. 배닥은 편평하고, 양쪽 끝에는 한 쌍의 구멍이 있다. 이 구멍은 통나무관을 옮길 때 두꺼운 밧줄을 끼워서 옮겼을 가능성이 있고, 운반할 때도 사용했을 것이다.  통나무 관의 측벽 두께는 3~4cm, 바닥은 9~13cm, 양쪽 끝벽은 25~30cm인데, 두향쪽이 넓다.

 

관의 두껑은 낙엽송의 줄기로 제작되었는데, 2호분은 거의 파손되어서 잘 알 수 없다(그림 4). 1호분의 것을 참고로 하면(그림 1),  높이는 22~30cm이고, 두께는 3~4cm에 불과하며 좀 더 크다. 관보다 훨씬 가벼우며 전체적으로 아치형모양이다. 덮개의 크기는 관 보다는 약간 커서 하부의 관을 완전히 덮도록 만들어졌다.

 

그림 1. 2호분의 통나무관 상태는 좋지 않아서, 현재 남아 있는 통나무관은 1호관이다. 에르미타주에 보관 중이다. 길이 3.71 m, 너비 65-78cm, 높이 58-60cm이다. 

 

2호분에서 확인된 통나무관의 가장자리 측면에는 사슴모양의 아플리케 장식이 부착되어 있다. 좀 더 정확하게 화려한 뿔로 보아서 북쪽 사슴, 즉 순록이다. 관의 양쪽 측면에 아주 작은 못으로 시계방향으로 고정되어 있다. 재밌는 점은 다리가 시작되는 부분에 삼격형 구멍이 뚫려 있다. 무덤방의 바닥은 두꺼운 검은색 펠트로 덮여 있었다.

 

그림 2. 2호분의 통나무관 측면에 부착되었던 사슴(순록)모양 아플리케장식(흑백과 같은 유물)

 

그림 3. 야외에서 유물 수습해서 보존처리 하는 장면(1), 하단의 그림은 5호분에서 확인된 펠트를 복원하는 중이다. 1948년.

 

 

그림 4는 무덤방의 내부를 공개한 것이다. 통나무관의 위치 뿐만 아니라 각종 유물의 위치도 확인할 수 있다. 번호는 유물의 위치이고, 유물의 종류는 아래에 표시해놓았다.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란다.

 

 

그림4. 파지릭 2호분의 무덤내부. 얼음층 아래를 걷어낸 후 처음 모습.

 

1.통나무관 및 그 의 부자제, 2-사슴가죽조각, 3-첫 번째 연기흡입용텐트 막대기, 4-두번째 연기흡입용 텐트의 막대기, 5-남성미라의 시신 일부, 6-여성시신의 일부, 7-여성신발, 8-여성 머리장식 일부, 9-수닭장식의 붙은 여성머리장식, 10-9번 머리장신에 붙어 있던 검은색 모피의 일부, 11-목걸이 일부, 12-금제, 귀걸이에 달던 펜던트, 13-허리띠 일부, 14-은제 허리띠 버클, 15-은제, 말모양 치레걸이, 16-말모양 치레걸이로 벨트, 17-은제 거울이 담긴 가죽주머니, 18-청동거울이 담긴 모피주머니, 19-고양이장식이 있는 모피 주머니, 20-대마씨가 담긴 가죽 주머니, 21-그리핀 부리모양의 사슴머리장식, 22-같은 장식인데, 약간 모양이 다른 것, 23,24-목제로 제작된 그리핀 머리, 25-목제 사슴머리, 26-계단모양의 목제뚜껑, 27-목침, 28-목침을 담는 통, 29-액체용기를 담는 토기편, 30-나무잔에 달렸던 뿔 손잡이, 31-양의 뿔, 32-하프(악기)일부, 33-철제 칼, 34-목제 칼, 35-뿔로 만든 화살촉, 36-뿔 망치, 37-수술이 달린 양모로 짠 수건, 38-여성용 타이즈, 39-남성용 타이즈, 40-남성용 옷(일종의 가운), 41-여성용 옷, 42-구리제 도장모양의 장신구, 43-소매가 있는 여성용 의복, 44-담비제 모피, 45-검은색 말(종마) 모피코트, 46- 붉은색 모피 옷, 47-갈색 모피 가죽에 붙었던 구슬장식, 48-붉고 갈색인 천으로 만든 옷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그림 1.

 

 

 

그림 2.

 

2500년 전 알타이 산에서도 파지릭 계곡에는 파지릭문화로 불리던 유적이 확인되었다. 파지릭문화는 좀 더 넓은 개념으로는 스키타이 문화(권)‘으로도 불린다. 유적에서는 대형무덤 5개가 1940년대에 발굴되었다.

 

무덤을 발굴하면서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무덤을 흙과 돌로 채운 공간에서는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물론 의례와 관련된 부서진 토기 등은 종종 다른 문화에서도 출토된다.

하지만 스키타이 문화에서는 무덤구덩이를 발굴하는 동안 내내 뭔가를 기대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 무덤방 바깥에는 주로 말이 매장된 것이 확인되기도 했던 것을 우리는 파지릭 유적 보다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우코크 고원에서 보았다.

 

그런데 파지릭 유적에서는 흥미로운 것이 당시에 무덤을 축조할 때 사용했던 도구 들이 무덤속에 그대로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모든 것은 아니었겠지만, 무덤방 위에서 나무로 만든 삽도 있었다.

2호분에서는 나무로 만든 무덤방 부근만 아니라 무덤구덩이 여러 곳에서 목제 쐐기(그림 1)와 망치(그림 2)가 발견되었다. 나무쐐기(그림1)는 길이가 30~73cm가량으로, 머리부분은 타원형이었을 테지만 도끼로 내려쳐서 끝은 변형되었고, 끝의 뾰족한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2호에서는 나무망치(그림2)는 낙엽수림의 줄기로 제작되었는데, 나무의 뿌리부분이 이용되기도 했다. 전체길이는 46~70cm이고, 손잡이의 직경은 12cm, 손잡이 길이는 25cm가량이다. 매우 무겁다. 오랫동안 사용했던 흔적이 타격흔으로 남아 있다.

 

이 두 유물은 특히 2호분에서 대량의 나무쇄기와 망치가 발견되었다. 2호분에는 자갈과 흙을 섞어서 무덤구덩이를 충전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3. 4호분과 무덤을 채운 흙이 모래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이 부분은 차후에 다시 설명하겠다.)

 

 

그림3.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의 자작나무 무덤방, 왼쪽은 발굴되었을 당시를 설명하고, 오른쪽은 원래 무덤이 축조되었을 당시를 복원한 모습이다.

 

2호의 무덤구조 중에 다른 호수의 무덤과 다른 점은 가장 아래 바닥이다.

나무로 만든 무덤방 아래에 돌을 깨서 두께 10cm정도로 깔고 그 위에 검은 흙으로 덮고(5cm) 무덤방을 만들었다.

 

무덤방은 2중으로 되어 있는데, 2호는 이중 나무방 사이의 공간이 비어 있다. 무덤방의 상부는 가장 위 무덤방 위에는 많은 자작나무로 채웠고, 외부 무덤방 천장은 두터운 자작나무로 덮은 다음 그 안에는 자작나무껍질을 깔고, 마지막으로 관목(Potentilla dasiphora fruticosa L. Rybd.)으로 덮었다.

 

안의 무덤방은 높이 1.53m, 평면형태는 3.65×4.92m이다. 외부의 무덤방은 높이 2.1m, 평면형태는 4.15×5.7m이다. 내부무덤방의 바닥은 나무판으로 제작되었는데 두께 5~6cm가량 너비 12~24cm의 17개로 구성되었다. 무덤방의 가장자리에는 가로 8개(북과 남쪽), 세로 7개(동과 서쪽)로 짜여있고, 천장은 20개로 구성되었다. 외부 무덤방에는 천장은 28개의 통나무이고, 벽은 남쪽과 북쪽은 10개의 통나무로 짜여있다. 동과 서쪽의 개수는 표시되지 않았다.

 

그림 4. 파지릭 유적의 2호분 천장을 열고 본 무덤내부. 유물을 아직 수습하지 않은 상태.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파지릭유적은 2500년 전 혹은 보다 약간 더 오래된 시간에 만들어진 무덤이 주요한 장소이다. 이 유적은 좁게는 파지릭문화에 속하고, 넓게는 스키타이 문화이다. 파지릭문화는 스키타이문화(권)에서 알타이 지역에 있던 무덤을 중심으로  밝혀졌다. 앞서 살펴보았던 얼음공주로 유명한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3유적과 아크 알라하 1유적도 이 문화의 유적이다.

 

파지릭 유적은 1929년 1호를 그랴즈노프가 발굴하기 시작해서, 1947~1949년에 발굴되었다. 그래서 그때는 지금과는 달리 각 유적에 대한 리포트가 나온 후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논문 및 저서가 나오지 않고, 유적발굴이 곧 자신의 저작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후자의 형태는 중국과 러시아 등 광대한 범위의 국가에서는 약간의 변명처럼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하다. 가령 예를 들면 5000~4500년 전 사이에 유적이 발견되지 않다가, 발견되었다면 그 자체로 연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루덴코가 발굴한 2~5호의 파지릭 유적은 대부분 1953년에 발표된 책에 기술된 내용이다. 그래서 각 유적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있지만, 루덴코는 파지릭 유적에 대한 종합적인 결론을 내어서, ‘파지릭문화’를 규정하려 했다.

 

예를 들면 파지릭 유적의 무덤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루덴코는 전체적으로 남들과 다른 고분을 ‘콕’ 찝어서 특히 설명을 많이 한다.

무덤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본 평면형태는 1~4호의 대형 고분에는 동쪽으로 돌이 길게 배치되어 이어지지만 5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 대신 앞의 4개 고분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5호 무덤 주변에는 평면형태가 고리모양인 적석구조물이 확인된다(그림 1). 5호분의 적석 범위는 재는 곳의 위치에 따라서 5~7m이다. 남쪽에는 봉분에 붙어서 직경 3.5~3.7m의 것이 2개 확인되었고, 북쪽에는 2.5~3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림1. 파지릭 유적의 5호분 평면형태. 다른 무덤의 평면 모습은 1953년 책에는 없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 2호와 5호를 중심으로 책에 기술되어 있다.

 

2호분을 비롯해서 가장 크기가 작은 4호분을 제외하고는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51~55㎡이다. 4호무덤구덩이는 30㎡이다. 깊이는 표토층에서부터 4m정도이다.

2호의 무덤구덩이의 평면형태는 긴 네모꼴이다. 무덤구덩이의 입구가 바닥보다는 약간 크다.

 

그림 2.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발굴모습, 1-무덤의 최상부를 절개해서 파내려가는 장면, 2-무덤구덩이의 입구모습. 1947년 발굴당시의 모습.

 

파지릭 유적에서는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3유적과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보이지 않던 유물이 발견되는데, 바로 무덤구덩이를 발굴해 내려가면서 확인되는 삽, 말뚝과 망치들이다. 이는 그 때 당시에 스키타이 인들이 무덤을 파는 도구로 생각된다.

특히 2호분에서는 무덤구덩이의 북쪽에 있는 무덤방 위에서 발견되었다. 2호분에서 출토된 목제 삽은 두 점의 손잡이 길이가 다르다. 115cm(그림 3-b), 127cm(그림 3-c)이고, 삽의 작업면은 길이 35~38cm, 너비는 약 12cm이다.

 

 

 

 

그림 3. a-3분에서 출토된 나무망치, b,c-2호분에서 출토된 나무 삽. 축척1/9

 

혹시 이 유물을 보고 삽이 아닐꺼라고 의심하는 분이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삽은 삼각형의 손잡이 끝에 고리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삽이 맞다.

손잡이에 아무런 고리가 없지만, 이런 모양의 삽은 현재 러시아에서 사용된다.

물론 삽의 앞부분은 다르다.

삽의 크기는 신체에 비례한다. 러시아 삽은 자루가 매우 길고 단면이 두꺼워서 한국사람들이 사용하기에 불편하다. 신체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가 유학당시 한국의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러시아와 공동발굴을 했었는데 첫 해가 지나자 한국사람들은 한국삽을 들고 오기 시작했다.

 

2호분의 삽의 자루가 다른 것도 사용하다가 부러졌을 가능성도 있고, 신체조건이 다른 두 사람의 삽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보통 고고학자는 부러진 것을 표기할 때 사용하다가 부러졌는지, 아니면 원래 그 길이었는지를 관찰해서 적어둔다. 루덴코도 나름 예리한 사람으로 생각되는데 그런 말은 없는 것으로 보아서 원래 길이였을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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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알타이 산의 파지릭계곡에는 크고 작은 고분(봉분이 있는 무덤)이 40여기 정도 존재한다. 무덤의 최상부에 해당하는 봉분은 가장 위는 돌로 마무리되었는데, 그 하부에는 흙과 돌로 채워졌다. 가장 높은 부분은 발굴하면 가장 먼저 확인되는데, 단순히 돌을 쌓은 것이 아니라 무덤의 가장자리를 돌로 두른 후 그 안을 다시 돌로 채운 형태이다.

어제 살펴본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은 무덤 하부에 형성된 영구동토층이라고 부르는 렌즈모양의 얼음창고와 상부에 쌓인 돌의 범위가 거의 일치했다.

 

40여기의 무덤 가운데서 1~5호가 가장 대형으로 계곡의 입구(남쪽) 쪽에는 5호가 위치했고. 가장 북쪽에는 3호와 4호, 가장 남쪽에는 5호가 위치했다.

1호는 그랴즈노프가 1929년에 발굴을 처음 시작했고, 2호는 루덴코가 1947~1948년, 3호와 4호는 1948년, 5호는 1949년에 발굴했다. 소형고분 6~8호는 같은 해에 발굴되었다. 봉분이 있는 구조물이 모두 무덤은 아니고, 그 아래가 비어 있는 경우도 있다.

 

아드리아노프(А.В. Адрианов)는 여러해 동안 알타이에서 6~8개의 둥근돌이 돌아가고 흙을 덮은 흔적이 있는 고리모양의 구조물을 발굴했으나, 어떤 유물도 없어서 어떤 문화인지, 연대 등 알 수 없었다고 한다.

파지릭 유적에서 대형고분은 봉분이 있는데, 그 단면은 가장 상부가 편평하게 된 반구형의 모습이다. 봉분의 높이와 직경의 비율은 1:10정도이다.

대형무덤의 경우 중간에 꺼짐 현상이 있는데, 이는 무덤방 속에 비어 있는 공간으로 봉분 위의 흙이 쓸려 들어갔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도굴이 상당히 광범위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무덤방에는 빈공간이 있을까?

앞서서 살펴보았고, 또 앞으로도 살펴보겠지만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방은 유물로 꽉 채우지 않는다(그림1).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얼음공주 무덤과 같이 얼음으로 꽉 차지 않는 경우 빈 공간이 생기고, 그 공간으로 가장 높은 곳의 흙이 쓸려 들어간 것이다.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유적이 파지릭 계곡의 무덤이다. 

 

그림 1.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단면도 가운데 무덤방 가장 중앙, 왼쪽-단면도, 오른쪽-상층의 흙이 쓸려 내려오지 않았을 경우를 복원한 모습

 

 

필자가 어제 ‘영구동토층’이라고 무덤아래에 형성된 얼음층에 대해서 설명한 바 있다(그림 2). 파지릭 유적을 발굴한 루덴코의 설명이었다. 영구동토층의 생성원인은 이해가 가는데, 무덤빈 공간으로 최상부의 흙이 바닥까지 쓸려들어가는 현상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전에는 나무방과 나무관이 썩으면서 무덤의 봉분 위의 흙이 쓸려 내려갔을 꺼라 생각했는데, 루덴코의 단행본을 읽다보니 약간 모순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영구동토층'이라면 나무방과 나무관은 썩지 않아야 한다. 만약에 오랜 시간으로 인해서 썩었다고 한다면 나무방은 전체적으로 썩어야지 어떻게 가장 중앙에만 썩을까?

 

그림 2.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단면도

 

루덴코의 설명처럼 영구동토층이 무덤의 반을 채운 돌이 열 전도율을 막아서 영구동토층이 생긴건 맞을 수 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틀림없이 그 조건이 바뀌어서 무덤방을 둘러싼 얼음이 녹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 때 봉분의 붕괴현상이 있었을 수도 있다. 17세기 이후에는 소빙기때 이미 예전에 형성된 얼음동토층 모양대로 다시 돌아갔을 수 있다.

 

그럼 파지릭계곡의 도굴도 그때? 그런데 루덴코의 설명에는 도굴은 무덤방까지 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굴로 판 구덩이 덕분에 무덤속에 많은 물이 흘러들어가 무덤방이 다시 얼어붙었다고 루덴코는 설명한다. 결과론 적으로 도굴로 인해서 들어간 외부의 물이 다시 얼어 붙으면서 다시 무덤을 감춘 것이다.

 

단순해 보이지만 아주 복잡하게 설계된 무덤은 다행히도 우리가 살펴볼 부분은 많다. 필자가 자꾸 무덤의 빈 공간을 이야기 했는데, 무덤의 내부를 보면 알 수 있다(그림 1).

파지릭 유적에서 가장 먼저 살펴보고 싶은 무덤은 2호분이다. 비슷한 시기의 여성무덤, 남성무덤, 아이무덤까지 살펴보았는데, 남녀가 함께 묻힌 무덤은 아직 살펴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무덤의 남성은 문신이 있는 미라로 발견되었다.

파지릭 2호분의 남성의 미라와 우코크 고원의 얼음공주 그리고 또 다른 유적인 베르흐 칼쥔 2 유적의 남성미라에서 확인되는 문신은 같은 사람이 새겼을 것이라고 학계에서는 이야기 한다. 세 유적은 동 시대로 생각된다. 물론 파지릭 유적이 약간 더 이르다는 의견도 있지만...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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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 산맥은 지형이 아주 복잡하고 높아서 이 지역에서 발원한 강과 강의 지류가 많이 있다. 파지릭 유적이 있는 파지릭 계곡은 연평균 기온이 낮고, 겨울이 길다. 영구동토대가 형성될 수 있다. 그런데 영구동토대가 알타이 전 지역에서 확인되는 것은 아니고 산과 계곡의 지형조건이 맞을 때만 만들어진다. 그런데 영구동토대가 자연적으로 형성되기도 하지만 인간의 건축물로 인해서 영구동토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파지릭 유적의 위치)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ll=50.47243177143555%2C89.10164035214848&z=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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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1호분은 영구동토대의 가장자리에 축조되었고, 2호분은 영구동토대의 정 중앙에 위치한다. 그러나 남쪽에 위치한 파지릭계곡의 입구에는 영구동토대가 형성되지 않았다. 여름에 매우 덮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덴코는 파지릭 유적의 무덤 아래에 있는 영구동토층은 자연조건만이 아닌 일종의 '계산된 행위'로 생각했다. (계산된 행위는 필자의 표현이다. 루덴코는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앞에서 우코크 고원에서 이 문화 사람들의 무덤구조를 알아보았다. 무덤방을 크게 파고 그 아래에 나무로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는 흙으로 무덤을 채운 후 무덤의 반 이상은 돌로 채웠다는 사실을 알았다. 파지릭 유적도 비슷한데 무덤구덩이의 크기가 대체적으로 50㎡이고, 깊이는 4m이다.(4호는 30㎡) 무덤방은 무덤구덩이 보다 작으며(1호-17㎡, 2호-13㎡, 5호-8㎡)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 무덤방은 반 이상이 자작나무와 큰 돌로 채워져 있다. 무덤구덩이의 중심높이에서 0.9~2m는 흙으로 덮여 있고 그 위에 1.3~1.7m까지 돌로 덮인 구조이다.

 

러시아 전역에서 발굴은 주로 여름에 한다. 극동은 늦봄부터 시작하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6월이고, 대부분 7~8월에 집중되고, 늦으면 9월까지이다. 파지릭 유적도 여름 하반기에 발굴했다고 한다.

 

영구동토층을 가장 잘 관찰할 수 있는 무덤이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이다. 동토층의 가장 중앙에 그리고 무덤구덩이의 위치가 동토층이 시작하는 부분과 딱 맞닿아서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영구동토층은 렌즈형태로  범위는 무덤 가장 위층의 적석(쌓은 돌)범위와 일치한다. 그리고 가장자리의 돌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무덤의 상층 가장 중심부는 무너져 내려서 고분을 채운 돌과 무덤방 아래까지 그 돌이 떨어져 내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때 영구동토층 가장 상층 부에 있는 토양도 무덤바닥에 떨어졌다.

 

 

그림1.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무덤 하부구조, 1947년에 발굴한 탓에 유구 사진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영구동토층'이라고 하지만 일종의 얼음층이다

 

이러한 현상이 생긴 이유는 무덤을 반 이상 채운 '돌' 때문이고, 부수적으로 자연조건이 맞아서 영구동토층이 생기게 된 것이다. 돌은 열 전도율이 매우 낮고 습기를 냉각시킨다. 우리는 지난 포스팅에서 알타이에서 무덤은 주로 늦 봄과 늦 가을에 만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무덤을 만든 후 첫 번째 겨울에 무덤을 채운 돌과 무덤방은 얼어 붙는다. 그 다음해 여름까지는 4m나 되는 깊은 무덤 구조 덕분에 봉분 아래의 흙은 온도가 그렇게 올라가지 않는다. 돌은 열 전도율이 낮기 때문이다. 매서운 겨울이 되면 다시 더 얼어 붙고, 이런 과정의 반복하게 되면 여름이 되어도 영하로 유지된다.

 

즉 무덤 아래에 거대한 냉동고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 영구동토층 덕분에 파지릭 계곡의 무덤에는 나무, 펠트, 가죽, 모피, 비단과 사자의 미라도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2호분이다. 

인간의 염원이 만든 얼음층이라고 해야하나?

우리는 인간의 염원으로 인해서 온 세상을 전염병으로 뒤덮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따위의 얼음층 정도야, 기후조건이 맞으면 충분히 가능하고 놀랍다.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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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터는 우코크 고원을 떠나서 파지릭 계곡의 스키타이 무덤 유적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스키타이 문화 가운데서 알타이 산맥에 위치한 문화를 ‘파지릭’이라고 붙인다. ‘파지릭문화’라고 한다.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된 이유가 파지릭 유적의 무덤 덕분이다.

 

알타이 산맥에는 특히 우슬라Урсула, Ursula 강의 왼쪽 지류인 카툰Катуни, Katun 강 유역과 아르구트Аргут, Argut, 추이Чуи, Chui 강 유역에는 강을 따라서 산악초원지대가 형성되어 있는데, 아주 많은 고분이 존재한다. 파지릭 지역은 투바 자치구와 접해 있는 알타이 동부의 추리시만Чулышман, Chulyshman 강을 끼고 있는 계곡이다.

 

파지릭 유적은 우코크 고원에서 북서쪽으로 직선거리 110km 가량 떨어진 곳에 파지릭계곡이 위치한다(그림2). 해발고도 1400m가량이다. 2500m 였던 우코크 고원보다는 훨씬 낮다. 파지릭 계곡에는 영구동토층이 연속분포하는 구역의 외부에 대형 고분이 있다.

 

무덤을 만드는 데 사용된 수백그루의 나무는 낙엽종(자작나무)이 주를 이루었고 가문비나무도 약간 있었다. 그런데 해발 1500m에서는 자작나무가 자라지 않고, 인접한 바시카우스(Башкаус)강과 추리시만(Чулышман)강에서 자작나무가 자란다(그림2).

자작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에 무덤이 발견될 당시에 봉분의 상부가 내려 앉아서 봉분의 가장 꼭대기는 움푹들어가거나 편평하다. 현재 파지릭 고분의 주변에 자라는 나무는 대부분 가문비 나무이다. 

 

 

 

그림 1. 위의 사진은  파지릭 계곡의 무덤 전경(발굴당시 찍은 사진), 아래 사진은 1호를 발굴하는 장면이다.  위의 사진은 정확하게 몇 호를 찍은 사진인지는 표기되지 않았다. 루덴코가 발굴하기 시작한 것은 1947년 2호부터이다. 1호는 1929년 그랴즈노프가 발굴했는데, 이 사진은 루덴코가 찍은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래 사진이 1929년에 찍힌 것인지 1947년에 2호 발굴당시에 그랴즈노프가 발굴한 1호를 찍은 것인지는 정확치 않다. 하지만 1호라고 표시되어 있다. 요즘같으면 무덤의 돌을 다 걷어내었겠으나, 어쨋든 무덤 최상부에서 무덤방으로 곧장 들어가서 발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시베리아, 알타이라고 하면 아주 춥다. 인간이 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알타이 산을 이루는 굽이굽이 계곡에는 초원지역이 형성되어 있는데, 산악초원(그림 1-1)이라고 한다. 일종의 높은 곳에 있는 분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특히 알타이 산맥의 초목에는 많은 양의 염분이 함유되어 방목해서 키우는 동물의 성장과 발달에 유리하다.

동물은 염분이 없으면 살이 찌지 않는다. 

 

 

 

 

그림 2. 파지릭 고분의 위치(×). 나뭇잎 그림은 파지릭 유적에 사용된 자작나무를 구해온 바시카우스 강과 추리시만 강의 위치이다. 붉은색 점은 우코크 고원의 위치이다. 아래 구글 지도를 보시면 파지릭 고분이 있는 곳에 사진이 있는데, 해발 2300m이상에서 자라는 가문비나무이다.

 

 

이 계곡의 고분은 모두 40여기 정도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 대형 고분 5기에는 1~5호의 번호를 붙였다. 북쪽의 2기는 3호와 4호, 가장 남쪽에는 5호, 중앙에는 1호와 2호가 위치한다. 그 외에 번호가 붙은 것은 9기로 6~14호까지 번호 있는 무덤이 있다. 번호를 매기지 않은 고분은 외형은 고분이지만 제일 상층에 돌이 돌아가는 것 외에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미 1924년에 알려졌기 때문에 더 이상 파지 않았다. 이 외에도 알타이 산맥에는 봉분(표토층 위로 올라온 무덤상부구조)는 있으나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림 2. 파지릭계곡의 무덤분포도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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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포스팅을 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앞에서 소개 해 드린 2개의 무덤과는 달리 소년의 무덤에는 약간 다른 점이 있다. 미세하게 따지고 들면 다 다르다고 말씀드릴 수 있지만, 그래도 의미가 있는 차이점을 추려보도록 하자.

 

우선 앞의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일명 얼음공주),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남성 2인)무덤에서는 나무로 짠 무덤방에 시신을 바로 안치하지 않고, 그 안에 관을 따로 두었다. 관은 큰 통나무를 파서 만든 통나무관이다. 그런데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소년의 무덤에는 무덤방에 바로 소년이 안치되었다. 이 무덤에는 통나무관은 없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는 말이 9마리나 들어가 있고, 그 말을 장식하던 굴레가 7벌 확인되었다. 굴레를 장식하던 주요 동물문양장식이 그리핀이었기 때문에 그리핀은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설명하는 소년의 무덤에는 그리핀은 있었을까?

(뭔가 있으니깐 물어 보는 거 겠지요?)

 

소년의 무덤에는 완전하게 남은 그리핀은 없고, 이미 망가졌지만 있었다.

말이 한 마리 있었지만, 굴레장식은 없었고 입에 물린 재갈만 있었다.

 

그렇다면 어디에?

한점은 소개한 소년의 고깔모자 장식 중에서 정수리 위에 달던 동물문양장식 말고 소년의 머리 바로 위에서 확인된 그리핀 날개이다. 머리부근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고깔모자에서도 낮은 부분에 부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8세 소년, 2번이 고깔모자 장식, 금제품(그림 2), 6번-투부(그림 3)의 위치,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8세 소년의 머리장식 중 그리핀 날개, 금제

 

 

한 점이 더 있다. 그 한점은 소년의 무릎 주변에서 모피의 조각 아래서 나온 투부(전쟁용 도끼)에 부착되었다. 투부의 전체 길이는 12.5cm가량이다. 앞서서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 출토품이 65cm였기 때문에 이 유물도 소년의 체격에 맞게 작게 만든 것이다.

투부는 허리띠에 달아서 착용했을 것이다. 나무 손잡이와 청동제 날부분은 T자 모양으로 결합되어 있는데, 가죽끈으로 단단하게 고정했다. 그 가죽의 끝에는 고리를 만들었고, 고리 끝에 그리핀 머리, 좀 더 정확하게 부리가 달려 있다. 멧돼지 송곳니로 제작되었다.

 

 

 

 

그림 3. 아크 알라하 1 유적의 2호분 8세 소년의 투부

 

 

 

그림 4.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 소년의 부장품, 번호 없는 유물이 멧돼지 송곳니로 제작된 그리핀의 부리. 앞에 포스팅에서 번호 없는 유물에 대한 설명이 없다고 했는데, 투부를 설명하는 부분에 있었다. 정정한다.

 

 

 

소년도 그리핀을 고깔모자와 투부에 달고 무덤속에서 영원한 잠을 청했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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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 가운데서 우코크 고원 속에 있는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을 살펴보았다. 이미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 대해서는 설명했는데, 2구의 남성이 확인되었다. 1명은 45~50세 정도의 남성이었고, 다른 한명은 15세 정도의 소년으로 2호분의 8세 소년 보다는 나이가 많은 남성의 무덤이었다.

 

지금 설명하고 있는 2호분이 먼저 설명한 1호분 좀 더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다. 어디서 그럴 정황이 드러날까? 그냥 2호분 소년의 나이가 어려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요구된다.

 

앞에서 2호분 적석(돌을 쌓은 모습)이 처음 드러난 모습을 공개한 적이 있다. (앞선 포스팅에서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ㅋㅋ)

거기에 힌트가 있다.

포스팅을 보시면 오른쪽 아래에 1호분의 무덤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적석이 놓인 모양이 2호분이 1호분을 덮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재 설명하는 2호분이 더 나중에 생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소년은 1호분과 친족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비교적 높은 계급의 소년이었을 것이다.

8세 소년이었지만, 어른 무덤에 부장되는 것은 대부분 있었다. 말은 1마리만 부장되었으나 어찌되었던 있었고, 동검, 투부, 화살촉 등 소년의 크기로 축소 시켜서 부장한 점도 이를 반증한다. 1호분의 남성무덤과의 관련성은 비슷하게 생긴 고깔모자, 목걸이, 귀걸이 뿐만 아니라 동물문양버클장식도 이를 대변한다. 동물문양버클장식은 부서져서 반만 남아 있지만 꼬리가 긴 동물이다.

 

 

 

그림 1. 파지릭 유적 4호분에서 출토된 말의 굴레에 매달던 호랑이 장식품(4,5,6), 1,7-말의 재갈멈치, 2,3-말머리 장식(당호). 목제품.

 

 

그림 2. 에르미타주 소장, 시베리아 콜렉션, 표범. 펜던트의 버클, 금제품

 

 

 

그림 3. 영국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문화의 청동제 버클, 그리핀(우)과 호랑이(좌)의 싸우는 장면.

 

 

현재 설명하고 있는 유적의 유물은 아니지만 스키타이 문화에서 형상화 된 꼬리가 긴 동물은 호랑이(그림1) 혹은 표범(그림 2), 그리핀이 있다. 꼬리가 긴 그리핀(그림 3)은 몸이 새가 아닌 육식동물의 몸통에 새 날개가 부착된 것이 있다. 그렇다면 소년의 허리띠 버클 장식도 그 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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