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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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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 가운데서 우코크 고원 속에 있는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을 살펴보았다. 이미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 대해서는 설명했는데, 2구의 남성이 확인되었다. 1명은 45~50세 정도의 남성이었고, 다른 한명은 15세 정도의 소년으로 2호분의 8세 소년 보다는 나이가 많은 남성의 무덤이었다.

 

지금 설명하고 있는 2호분이 먼저 설명한 1호분 좀 더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다. 어디서 그럴 정황이 드러날까? 그냥 2호분 소년의 나이가 어려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요구된다.

 

앞에서 2호분 적석(돌을 쌓은 모습)이 처음 드러난 모습을 공개한 적이 있다. (앞선 포스팅에서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ㅋㅋ)

거기에 힌트가 있다.

포스팅을 보시면 오른쪽 아래에 1호분의 무덤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적석이 놓인 모양이 2호분이 1호분을 덮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재 설명하는 2호분이 더 나중에 생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소년은 1호분과 친족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비교적 높은 계급의 소년이었을 것이다.

8세 소년이었지만, 어른 무덤에 부장되는 것은 대부분 있었다. 말은 1마리만 부장되었으나 어찌되었던 있었고, 동검, 투부, 화살촉 등 소년의 크기로 축소 시켜서 부장한 점도 이를 반증한다. 1호분의 남성무덤과의 관련성은 비슷하게 생긴 고깔모자, 목걸이, 귀걸이 뿐만 아니라 동물문양버클장식도 이를 대변한다. 동물문양버클장식은 부서져서 반만 남아 있지만 꼬리가 긴 동물이다.

 

 

 

그림 1. 파지릭 유적 4호분에서 출토된 말의 굴레에 매달던 호랑이 장식품(4,5,6), 1,7-말의 재갈멈치, 2,3-말머리 장식(당호). 목제품.

 

 

그림 2. 에르미타주 소장, 시베리아 콜렉션, 표범. 펜던트의 버클, 금제품

 

 

 

그림 3. 영국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문화의 청동제 버클, 그리핀(우)과 호랑이(좌)의 싸우는 장면.

 

 

현재 설명하고 있는 유적의 유물은 아니지만 스키타이 문화에서 형상화 된 꼬리가 긴 동물은 호랑이(그림1) 혹은 표범(그림 2), 그리핀이 있다. 꼬리가 긴 그리핀(그림 3)은 몸이 새가 아닌 육식동물의 몸통에 새 날개가 부착된 것이 있다. 그렇다면 소년의 허리띠 버클 장식도 그 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 시베리아의 스키타이문화권에서도 알타이 지역에 위치한 파지릭문화의 한 유적인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은 8세 소년의 무덤이다. 고깔모자, 토기, 금제 귀걸이, 청동 목걸이, 투부(전투용도끼), 모피, 칼집과 청동칼, 화살촉, 목기등이 소년과 함께 묻혔다.

그 중 목기는 남아있지는 않지만 양뼈조각이 있었고, 다른 유적들의 예로 보아서 목기 위에 고기덩어리가 올려진 장면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여성미라, 일명 얼음공주의 무덤에서도 뿔, 나무, 흙으로 만든 그릇이 확인되었다.

 

2020/01/1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미라'의 무덤] - 2500년 전 여성미라 무덤의 뿔, 나무, 흙 그릇

 

2500년 전 여성미라 무덤의 뿔, 나무, 흙 그릇

투르크-몽골 계통의 민족들에게는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특별한 그릇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반적인 그릇에 특별한 음식과 음료를 담았다고 한다. 야쿠트인들은 신에게 거대한 가죽조끼, 목제 잔, 우유를 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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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유적에는 없지만, 이 유적이 속한 파지릭 문화에는 금속으로 만든 그릇도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솥이다. 바닥에는 솥을 지지하기 위한 높임 다리가 있으며, 양 쪽에는 손잡이가 있고 자작나무 껍질이 감긴 채로 확인되었다. 안에는 돌이 들어 있었다. 함께 출토된 막대기가 6개(1.2m 가량) 있었다.

 

 

이 솥과 막대기는 같은 공간에서 출토되어서 세트이다. 무슨 용도로 사용되었을까?

솥은 금이 가 있고, 솥 안에는 탄화된 대마씨가 발견되었다. 금이 간 이유는 뜨거운 돌의 열기에 의했을 가능성이 많고, 대마씨가 탄화된 것도 돌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연구자들의 생각이 맞다면, 청동솥과 막대기는 대마씨에 나오는 연기 흡입용이다.

6개의 막대기를 묶고 그 위를 펠트로 씌우면 일종의 텐트가 된다. 그 텐트 안에서 청동솥에 달군 돌을 넣고, 대마씨앗을 뿌려서 그 향을 맡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탄화된 대마씨가 가득 들어간 가죽주머니도 같은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기록된 스키타이 부족에 대한 내용은 러시아학계에서는 아주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다가 이 유물이 발굴된 후에 약간 시각이 바뀌었는데, 그가 설명한 스키타이 인의 정화의식에 대한 내용 중에 이 부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헤로도투스가 74~75절에 썼는데, 여기까지만 보면 위의 유물과 일치해서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대한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헤로도투스는 마지막에 스키타이 사람들의 정화의식을 그리스의 증기욕과 관련시켰다(그리스, 로마 사회의 목욕문화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무덤을 발굴한 루덴코(1953)는 직접 반박했다. 헤로도투스의 내용과 이 유물이 연기흡입과 관련된 건 가능성이 있지만, 그리스의 목욕문화와는 헤로도투스의 착각이라고.

청동솥 위에 뿌려진 대마씨 때문에 연기가 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의미가 그리스 증기욕과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유물은 알타이 산맥의 파지릭 유적 2호분에서 출토되었고, 루덴코는 그 유적의 2호분을 직접발굴한 사람이다.

파지릭 2호분에서 나온 청동솥과 막대기 6개는 용도는 명료해진 것도 있지만 문제가 복잡해지게 된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왜냐하면 헤로도투스가 본 스키타이 인이라는 사람이 그리스와 인접한 흑해 북안이라는 주장이 팽배했는데, 그가 설명한 부분이 알타이 산맥의 유적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청동솥과 막대기, 가죽주머니 안의 탄화된 대마씨는 의료용일지 모른다. 지금도 마약은 의료용으로 사용된다. 스키타이 인들은 죽은 사람의 내장을 걷어내고 미라를 만들던 기술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파지릭 유적 2호분에는 미라가 2구 확인되었다.

 

 

그림1. 파지릭 유적 2호분 출토(높이 13.8cm, 동최대경 9.8cm), 청동솥(2)과 막대기(3), 손잡이는 자작나무 껍질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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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스탄의 송쿨. 해발 3000m, 7월 모습

 

스키타이 문화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로 헤로도투스를 꼽는다. 하지만 그의 기록은 실제로 보거나 방문해서 알아낸 기록이라기 보다는 전해들은 내용이 많고, 설화적인 내용이 많다. 헤로도투스 자신도 00족에게 들었다고 많이 밝히고 있다. ‘외눈박이 부족’이라던지,....엄격한 기준으로 보자면 말도 안되는 내용이다. 오랫동안 남아서 신화화 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또한 현재의 역사기술이 서양을 중심이기 때문에 그나마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인 그 책이 아직까지 bible처럼 여겨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의 생각이다.

 

스키타이 문화에 대한 기록을 남긴 또 다른 이가 히포크라테스이다. 필자가 느끼기에 히포크라테스는 실제로 스키타이 인을 보았다. 그리고 아주 크게 충격을 받은 듯 했다. 그의 저서에서 스키타이 사람들이 춥고 건조한 기후에 따라서 외모와 출생률에 대한 기록을 서술했다.

 

이런 구절이 있는데 ‘저런 피지컬이면 출생력은 뛰어나지 않을 것 같다(공기, 물, 흙에 대해서 ,28장’) ‘말을 자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종양이나 관절염, 통풍 등으로 고생을 심하게 하기 때문에 성적인 즐거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성적 능력을 상실하는 문제 때문에 그들은 항상 바지를 착용했다.(공기, 물, 흙에 대해서, 30장).‘스키타이 인들은 상위로 올라갈수록 내시가 많다(공기, 물, 흙에 대해서, 29장)’

 

이 기록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점은 히포크라테스가 살던 그리스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스키타이 인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육체적 조건, 의복 및 고위 계급의 특징도 그리스와는 매우 달랐다. 히포크라테스가 스키타이 인들을 언급한 내용을 반대로 해석하면 그리스 사회일 수 있다.

특히 ‘스키타이 인들은 상위로 올라갈수록 내시가 많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히포크라테스)가 속한 사회와 달랐기 때문에 이런 구절을 쓸 수 있었다.

 

필자는 ‘내시가 많다’라는 말을 종교를 직업으로 한 사람을 일컬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한다. 종교관련인이 결혼하지 않은 사례는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여성을 들 수 있다. 단인장이 드문사회였으나 혼자 묻혔다면 그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직업이 샤먼이면서 고위층인사였다는 점은 상위층이 가질 수 있는 목걸이나 실크 블라우스, 높은 머리 장식등으로 알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가 언급한 스키타이 인들의 낮은 가임율은 환경에서 왔을 가능성이 크다.

고원지대의 환경은 생물학적 가임률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성관계 가능 기간을 포함한 모든 성장을 늦춘다고 한다(코마로바 1991).

 

필자가 해발 3000m의 송쿨이라는 곳에서 말을 작년에 한 시간 정도 타 본적이 있다. 재미는 있었는데, 점심 먹고 바로 뻗었다. 한 여름이었으나 낮에도 겨울옷을 입어야 했고, 밤에는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다. 확실히 사람이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지금 계속 이야기 해 드리고 있는 아크 알라하 3유적, 아크 아랄하 1유적이 있는 우코크 고원은 2500m정도 되는 곳이다. 거기도 비슷하다.

 

현재와 같이 모든 정보가 누구의 것이 아닌 사회에서도 서로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마당에 당시에 서로 다른 이들에 대한 충격은 아마 상당했을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도 그런 충격속에서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헤로도투스처럼 외눈박이 부족 등의 표현은 없다. 필자는 ‘외눈박이 부족’이라는 구절만 보아도 그의 진정성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코마로바 1991, Комарова О.Д. Демографические аспекты этнической экологии // Этническая экология. Теория и практика. М.: Наука, 1991. С. 44-77.(코마로바 1991, 민족생태학에서 본 인구학적인 측면)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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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부제: 새머리는 비었다-

 

2500년 전 소년의 모자는 펠트로 제작되었고 전체적인 모양은 고깔모양이고, 가장 위에는 동물문양장식을 나무로 제작해서 장식했다. 펠트는 앞에서 설명한 적이 있는데, 양모를 응축시켜서 만든 것이다. 자세히 쳐다보면 부직포 같다. 소년의 무덤은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이다. 바로 옆에 소년보다 나이가 많은 남성 2인이 묻힌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도 새머리 고깔모자가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 확인된 새머리 고깔모자는 그 이전에 발굴된 자료들의 궁금증을 말끔히 풀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머리 위에서 출토되는 동물문양장식이 도대체 무슨 용도였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펠트는 유기물질이어서 특정한 환경이 아니면 잘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다.

 

그런데 직접 모자가 출토되지는 않았지만, 알타이 지역에서 나오는 모자와 이를 벗어난 지역에서 나오는 유물간의 차이점은 귀 아래로 늘어지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했다. 그런데 눈여겨보셨다면, 아무다리야 퇴장유적의 황금장식판에 그려진 스키타이 인이 등장하는데, 그는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어제 포스팅 참고), 고깔이라는 것은 알겠지만 뭔가 다르다.

 

그렇다.

그 유물은 고깔모자가 곧추서지 않고, 뒤로 누워져서 힘이 없는 모습이다. 만약 모자를 펠트로만 만들었다면 이렇게 되는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알타이 산맥에서 출토되는 모자들은 모두 동물문양장식이 불룩 솟아서 그 부분이 드러난다.

 

왜 그럴까?

 

어제 소년의 고깔모자 위를 장식하던 동물문양장식 아래의 원통형 장치에 대해서 잠깐 언급했다. 소년의 고깔모자 위 동물문양장식 아래에 원통형 장치는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는 새머리모양이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새머리, 2호분의 원통형은 가장 꼭대기를 장식하기 위한 매개 같은 역할을 하지만 장식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기능도 함께 한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모자는 이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그 장치인 새머리 안은 비어 있고, 그 아래로 목심을 끼워서 동물문양장식을 뒷받치는 장치가 들어가 있다.

소년의 고깔모자도 비슷한 방법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그림.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의 새머리 고깔모자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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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에는 8세 소년의 무덤 바닥에는 소년이 착장했던 도구 및 장레식때 사용되었던 토기 및 목기도 부장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깔모자, 귀걸이, 허리띠, 투부, 고리트, 모피 등을 착장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1.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 출토 소년의 고깔모자

 

그 중에서 소년이 썼던 고깔모자(그림1)는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과 마찬가지로 고깔모자로 추정된다. 정수리 부분 장식은 소 장식품이 남아 있었는데, 소년의 두개골과 떨어진 부분에서 출토되었는데(그림 2-1), 고깔모자를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림2.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의 소년 두개골 정수리 위

 

아크 알라하 1유적은 고깔모자의 정수리에 새모양 조각이 붙어 있고 그 위를 산양 혹은 염소를 꼭대기에 장식한 것이다.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 소년의 소 모양 장식품도 바로 고깔에 부착되지 않고 중간 장치를 두고 부착했다고 볼 수 있다. 폴로시막은 소 장식품 아래는 정확한 모습은 알 수 없다고 여겨서 원통형을 붙였다(그림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과 비슷하게 생긴 고깔모자는 베르흐 칼쥔 2유적의 1호분(그림 3-a)과 3호분(그림 3-d)에서도 출토된다(그림3-a, d). 베르흐 칼쥔 2유적의 모자는 정수리 장식을 목제로 붙인 것이 아니라 펠트제로 모자의 원판과 함께 오려 붙인 것이다. 목제장식을 붙인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것과는 차이가 있다.

 

알타이 산맥에서 중부지역에 위치한 파지릭 유적의 2호분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고깔모자가 알려졌다(그림 3-e). 고깔은 새가 아닌 그리핀으로 생각된다. 2호분의 남성 고깔모자이다.

 

실물이 아닌 고깔모자도 궁전, 항아리 등에 새겨진 채 확인되는데, 페르세폴리스의 아파다나 궁전(그림 3-h), 쿨오바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항아리(그림 3-f)에 새겨진 스키타이 인의 모자이다. 아무다리야 퇴장 유적의 황금 장식판에 새겨진 스키타이 고깔모자(그림 3- g)는 앞서 살펴본 느낌과는 다른데, 뒤로 젖혀진 모양이다.

 

전체적인 모양은 고깔형태이지만, 차이가 있는데, 알타이 산맥에서는 고깔모자에 귀를 덮고 그 아래까지 길게 늘어지지만(그림 3-a~h), 알타이 산맥이 아닌 페르세폴리스와 흑해북안에서 확인되는 모자(그림 3-f~h)는 귀만 덮는 형태이다.

 

그림 3. 스키타이 사람들의 고깔모자. a~h:실제로 출토된 고깔모자, f~h: 유물과 유적에 새겨진 고깔모자.

 

현존하는 소수민족도 서로를 구분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의복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선사 및 고대사회는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를때 같은 옷이나 같은 상징성이 있는 표식은 큰 의미를 차지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예를 들지 않더라도 내가 한국인임을 표시하는 것 중에 하나도 한복을 입고 하는 세레모니다. 남미의 쿠바에서도 여러 세대가 흘렀고 거의 한국인의 모습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국인임을 자체하고 그들의  아이덴티티를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말을 배우고, 춤과 노래를 배운다. 한복을 입고 춤을 춘다.

문득 든 생각은 어디까지 한국인이라고 해야 할까? 고대사회를 연구하면 할수록 어디까지를 하나의 민족이라고 생각해야 하는지... 같은 맥락의 고민이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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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시베리아 아크 알라하 1 유적의 2호분은 8살 소년의 무덤이다.

8세이지만, 어른과 거의 같은 복장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아래 포스팅에는 소년을 복원한 그림을 알 수 있다. 스키타이 문화의 특징인 고깔모자, 바지 뿐만 아니라 허리띠도 착장 했다.)

 

2020/02/2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1유적] - 2500 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산맥 스키타이문화의 8세 소년무덤부장품

2500 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산맥 스키타이문화의 8세 소년무덤부장품

러시아 알타이 산맥 중에서 가장 높은 2500m가량의 우코크 고원에는 아크 알라하라고 불리는 강 줄기를 따라서 대략 2500년 전 스키타이 사람들이 묻혀있다. 러시아 학자들은 ‘아크 알라하’ 유적 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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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청동칼, 투부, 화살 등 무기류도 함께 부장되었다.

 

재밌는 점은 화살이 담기었던 고리트는 없어지고, 화살촉만 소년의 발끝에서 8점 확인되었다.

화살촉은 뼈로 만들어졌고 화살꼬리와 활은 이미 없어졌다.

화살은 크기가 3cm 가량이고, 단면은 삼각형이다.

 

그런데 이 화살촉은 소년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다.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어른무덤에서 출토된 화살촉과 어떻게 다른지?

 

앞에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 출토된 화살촉은 아래 포스팅에서 볼 수 있다.

 

2020/02/1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1유적] - 러시아 알타이 초기철기시대 스키타이문화의 골제 화살촉

러시아 알타이 초기철기시대 스키타이문화의 골제 화살촉

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산의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스키타이 문화의 한 유적인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는 15~16세의 남성과 45~50세 가량의 남성이 뭍힌 통나무관이 출토되었다. 소년의 관에는 동물문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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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은 거의 유사하고, 단면도 삼각형이다.

그런데 1호분에서 출토된 것은 길이가 6.5cm이다. 부장된 촉의 개수도 차이가 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소년의 화살촉은 성인용에 비해서 1/2크기인데, 체격에 맞게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년이 실제로 활과 화살촉을 들고 사용했는지는 모르겠고, 또 부장용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흥미로운 점은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과 2호분 화살촉은 모두 뼈로 제작되었다.

 

크기는 다르지만 모양과 소재가 같은 화살촉 외에도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과 2호분의 공통점은 귀걸이 한쪽이다. 1호분에는 15~16세 남성과 45~50세 남성, 2호분은 8세의 남성인데 모두 귀걸이를 한쪽 씩만 착용했으며 오른쪽 이다.

 

8세 소년의 귀걸이는 어디서 본적이 있는 것 같지 않으신지?

 

소년의 귀걸이와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의 15세 소년의 귀걸이가 거의 유사하다.

 

2020/02/08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1유적] - 2500 년 전, 시베리아 스키타이 문화의 45세 남성전사

2500 년 전, 시베리아 스키타이 문화의 45세 남성전사

2500년 전 유라시아 전 지역을 휩쓸고 다녔던 스키타이문화의 남성전사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는 알타이 산맥의 우코크 고원에 묻혔는데, ‘얼음공주’라고 별명이 붙은 여성과 동시대의 인물이었고,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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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링에 그 아래에 작은 링이 붙어 있고, 불꽃 모양을 거꾸로 한 듯한 모양의 펜던트가 붙어 있다. 펜던트의 중간은 소용돌이를 도려내었다. 금제품이다.

 

친자관계는 DNA 분석을 한다면 알 수 있겠지만, 자료를 찾았으나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면 스키타이 문화의 남성들만 귀걸이를 착용했을까?

 

사실 시베리아에서는 남성들이 귀걸이를 착용하는 예가 많다.

스키타이 문화 이전인 청동기시대 안드로노보문화, 카라숙문화에서는 청동유물이 많다. 그 중에 가장 많은 유물중에 하나가 청동으로 만들어진 귀걸이다. 단순하게 둥근 링만 있는 것, 그 아래에 펜던트가 달린 것 등 다양하다.

 

요즘 남성들은 자신을 꾸미는 도구가 시계, 넥타이 정도이고 커퍼스 단추, 팔찌, 목걸이 등도 착용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귀걸이 하는 남성을 욕하는 경우가 있었던 시기도 있는데, 생각보다 한쪽 귀걸이를 착장하는 습관?은 오래되었다.

 

금속제라는 소재로 한정하면 귀걸이 보다 더 오래된 금속제 장신구는 반지이다. 순동시대부터 있었다. 물론 남성 혹은 여성의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시베리아의 순동시대인 글라스코보 문화에서는 아주 작은 소형의 순동유물이 나오는데, 아무런 장식없는 둥근반지이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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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알타이 산맥 중에서 가장 높은 2500m가량의 우코크 고원에는 아크 알라하라고 불리는 강 줄기를 따라서 대략 2500년 전 스키타이 사람들이 묻혀있다. 러시아 학자들은 ‘아크 알라하’ 유적 시리즈를 발굴했는데, 얼음공주 무덤으로 유명한 아크 알라하 3유적보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을 먼저 발굴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은 1990년, 소년의 무덤인 2호분은 1992년에 발굴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바로 옆에 붙었다.

 

무덤구덩이를 파고 무덤바닥에 네모상자모양의 나무관은 있었다. 나무관 북쪽 옆에는 따로 단을 지게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말뼈를 매장했다. 말은 발을 굽히고 배 위에 놓인 상태로 매장되었고 입에는 철제 재갈이 채워졌다. 두개골에는 투부로 찍은 흔적이 남아 있다. 2차 무덤뚜껑은 말까지 덮은 것이다.

 

피장자는 8살 아이인데, 두개골 위편에서 머리장식과 금박이 발견되었다. 소년 고깔모자 끝에 장식된 것은 소(야크 일 가능성)와 아주 유사하다. 머리장식에는 두 마리 그리핀(그림 2)이 부착되기도 했다. 두개골 오른쪽에는 황금 귀걸이(그림 3-4), 목에는 청동제 목걸이를 착용했다. 손과 무릎 사이에는 모피가 남아 있고, 그 아래에는 동물패턴이 남아 있는 허리띠 버클 잔편이 확인되었다. 버클에 새겨진 동물은 남아 있는 상태가 좋지 않아서 머리부분은 없다(그림 3-1).

모피가죽 아래에 오른쪽 허리 부근에는 청동제 칼이 목제 칼집에 들어가서 있었고, 그 옆에는 청동제 투부(그림 1-9, 그림 5)도 확인되었다. 고리트(활,화살통)은 남아 있지 않지만 8개의 화살촉(그림 1-10, 그림 3-3)이 소년의 발톱부근에서 확인되었다. 고리트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소년 무덤관 내부

 

두개골 주변에는 항아리 모양의 토기(그림 1-3, 그림 4)가 깨진 채로 발견되었다. 그 보다 약간 아래에는 양의 엉치뼈(그림 1-7)가 확인되었는데, 다른 유적의 사례로 보아서 목제 쟁반 위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제 쟁반도 보이지는 않지만 있었을 것이다.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소년관 고깔모자 장식의 일부. 그리핀으로 추정된다.

 

그림 3.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소년의 무덤 부장품. 1: 버클장식일부, 2: 청동제 고리편, 3: 화살촉, 4: 금제 귀걸이, 그 외 번호가 없는 유물은 유물설명도 없었음.

 

그림 4.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 소년의 무덤부장품. 토기.

 

그림 5.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 소년의 무덤 부장품. 투부(전투용 도끼)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 스키타이문화의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은 8살 남자아이의 무덤이다.

스키타이 문화에서 확인된 평균수명은 지금보다는 현저하게 낮다. 여성은 29.6세, 남성은 38.5세 라는 점을 앞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우코크고원에서 발견된 사람들에게 특히 남성들에게는 전쟁의 상처가 남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이는 이 고원의 동남쪽에 위치한 울란곰 유적과는 매우 다르다(노브고르도바 1989). 우코크 고원의 주요사인은 질병, 부상, 노화도 있었을 것이고, 여성은 출산도 포함되었다.

 

같은 알타이 산맥이지만 우코크 고원보다는 해발고도가 낮아서 거주환경이 더 좋았으며 상위계급이 거주했다고 알려진 파지릭 유적의 무덤에서 확인된 사람들도 병이 있었다. 파지릭 2호분의 여성에게서 치조농루염, 5호분 남성에서는 척골 관절 변형, 오른손 뼈 끝에는 골다공증도 있었다.

 

특히 관절변형이 심해서 뼈 사이가 벌어지고, 관절은 석화가 진행되어서 움직이는데 상당한 제약이 따랐다. 이를 분석한 바르코바와 고흐만(2001)은 오랜기간 동안 말 위에서 생활한 결과로 보았다.

 

컴퓨터 단층촬영을 한 결과 얼음공주도 왼쪽과 오른쪽의 무릎에 이상이 있음이 밝혀졌다(레탸긴, 사벨로프, 2014, 그림1)

그림 1.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얼음공주의 무릎. 윗 줄은 왼쪽무릎관절이고 아랫줄은 오른쪽 무릎관절인데 현저하게 차이가 있다. 왼쪽무릎관절30A-좌골 경골에서 연골 아래에 경화증 및 부종발견. 30B-전방십대인자가 거의 들어남(화살표) 오른쪽무릎관절31A-많이 남은 반원상의 연골, 31B-전방십대인자 변형되고 두텁지만 모습은 어느정도 유지되고 있음(레탸긴, 사벨로프, 2014).

 

헤로도투스 외에도 스키타이 인들에 대해서 글을 남긴 사람이 있는데, 히포크라테스이다.

『공기,물,흙에 대하여』라는 그의 저서에서 스키타이 인들이 골반뼈가 벌어지고 다리를 절룩거리는 현상은 장기간 말을 타면서 생긴 병으로 보았다(히포크라테스의 원전은 찾아보지 않았고, 폴로시막 2001의 내용을 인용했음).

 

아시겠지만, 히포크라테스도 헤로도투스와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히포크라테스가 좀 더 일찍 (20여년)태어났으나 헤로도투스의 출생연대에 대한 논란도 있다.) 물론 히포크라테스는 스키타이 인들을 비하하는 부분도 있는데, 그 사실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스키타이 인들의 출생율에 대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스키타이 인들이 평균수명이 짧다는 생각도 현재 러시아학자의 관점이다. 그 당대의 다른 문화 사람들이 그 만큼 살았는지가 밝혀져야 그들의 수명이 짧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혹시 아는가? 그때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유라시아 초원의 스키타이 인들이 가장 오래 살았는지,

그래서 이 부분은 그냥 알게 된 사실로만 여겨야지 이를 두고 그들의 수명이 짧다 길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참고문헌

노브고르도바 1989 Новгородова Э.А.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М.: Наука, 1989. 383 с. (노브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문화)

바르코바, 고흐만 2001, Баркова Л.Л., Гохман И.И. 2001 : Ещё раз о мумиях человека из Пазырыкских курганов. // АСГЭ. [Вып.] 35. СПб: 2001. С. 78-90(바르코바 ,고흐만 2001, 파지릭유적의 무덤에서 나온 미라에 대해서 한 번 더)..제목은 그대로 번역해서, 재미를 느껴보시라고..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레탸긴, 사벨로프, 2014, А. Ю. Летягин, А. А. Савелов Жизнь и смерть «Алтайской принцессы>>(레탸긴, 사벨로프 2014 알타이 얼음공주의 삶과 죽음)// : 29 Сен 2014 , Мой НГУ , том 57/58, №3/4 https://scfh.ru/papers/zhizn-i-smert-altayskoy-printsessy/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 시베리아에서도 알타이 산맥 중에서 가장 높은 고원인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은 어린아이의 무덤이다.

 

무덤의 방향은 동북-남서방향이 긴 장축방향이다. 무덤구덩이는 위는 크고, 무덤바닥으로 갈수록 작아지는데, 지상에 드러난 무덤구덩이의 크기는 3.95×2.7m, 바닥은 3.16×1.9m이다(그림1).

 

그림1.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의 무덤 단면도

 

첫 번째 무덤방의 덮개가 드러났는데(그림 2),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이곳의 높이는 지상으로부터 170cm가량에서 확인되었다. 통나무 12개를 가지런히 놓았다. 그 크기는 168×270cm이다. 무덤방의 첫 번째 뚜껑을 열자 다시 무덤 뚜껑이 있었다. 무덤의 북쪽 빈공간에는 말이 한 마리 부장되었다.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의 무덤방 첫 번째 덮개(숫자는 높이를 의미함)

 

 

무덤바닥에는 크지 않는 무덤방이 확인되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과 얼음공주 무덤처럼 통나무관은 없었다. 무덤방의 크기는 2×0.95cm인데, 높이는 상층의 압력으로 인해서 무너져 내린 상태여서 정확하지 않다. 두 번째 덮개는 7개의 통나무를 가지런히 놓았다.

 

그림3.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의 무덤방 두 번째 덮개

 

 

무덤바닥은 5개의 납작한 나무판자를 놓은 것이다. 사자는 8살의 남자아이다. 오른쪽으로 누웠고, 무릎을 살짝 구부렸고, 머리는 동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림 4.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의 무덤방 덮개가 열린 모습

 

어린아이의 무덤이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고, 같은 시기의 다른 아이 무덤(아크 알라하 5유적의 2호분)과 비교해도 큰 편이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무덤방을 설치하고 위에 돌을 쌓아서 마감하는 방법으로 축조되었다. 크기는 어른 무덤에 비해서 작다. 어린 아이의 체격이 작으니 무덤 크기도 차이가 있다. 장례식을 경험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자의 체격에 따라서 관의 호수가 정해진다는 사실을.

 

계속 포스팅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앞의 어른관과 비교해서 어떤 차이가 있나요?

 

1호분 어른 무덤에는 통나무관이 있었지만 어린 아이 무덤에는 그런 관은 없다.

 

문득 든 생각은 이 사회에서 이들이 가장 값지다고 생각했던 것은 무엇일까? 하는 ....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이 있어서 황금일까?

영화인디어나존스의 몇 편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성배를 찾아서 헤매는 편이 있다. 가장 마지막에 그 성배는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도 잘마르고, 쭉바로 큰 나무는 무지 비싸다고 들었다. 가격은 모르지만.

남대문이 전소되고 복원할 때 나무 때문에 가장 애를 먹었다고 들었다......

러시아에도 그들의 크리스마스(유럽과는 다름)가 있는데, 집에 전나무를 들여서 꾸민다.

혹은 그렇지 못하면 전나무 나뭇가지라도 걸어두고 집안을 장식한다.

그런데 그게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주 크다. 그 상쾌함이란 말할 수 없다.

필자도 유학 당시에 러시아 할머니의 아파트에 방 한칸 렌트해서 살았는데, 할머니가 그 즈음에 어디서 구해오셔서 걸어두셨다. 그 나무 향이 온 집에 퍼지는 경험을 했는데, 정말 다른 세상이었다. 더우기 공기난방을 해서 매우 건조한데 가습기 역할도 일정 하는 것 같았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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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아크알라하 1유적의 2호분 남성아이의 무덤. 표토를 벗기고 난 후의 적석모습. 오른쪽의 점선이 있는 부분이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이 있던 곳이다.

 

러시아 알타이 산의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은 남성아이의 무덤이다. 어린아이의 무덤은 2500년 전 스키타이문화의 한 종류인 파지릭문화의 무덤이다.

 

무덤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발굴을 하는데, 발굴과정은 만드는 과정을 반대로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무덤 만들 때 가장 나중에 한 일은 무덤구덩이를 돌로 덮었다. 뒤에 시간이 흘러가면서 돌을 덮은 흙이 쌓여서 표토층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표토를 벗기고 나면, 무덤구덩이를 채운 돌이 드러난다. 그 돌은 ‘적석’이라는 용어를 쓴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제 알았다. 그 적석은 대개 둥글게 쌓기 때문에 직경으로 크기를 알 수 있는데 11m이다(그림1) . 표토에 드러난 무덤의 높이는 40cm이다.

 

 

적석을 다 드러낸 후에 알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상층은 큰 자갈돌을 넣었고, 그 이하에는 작은 돌들로 충전되어 있고, 무덤방과 가까운 곳에는 돌과 흙을 함께 섞어서 넣었다. 적석의 가장 중심부가 큰돌로 채워졌다. 중앙의 적석을 드러내고 난 후 무덤의 가장자리를 돌린 돌(호석)의 범위는 직경이 약 9.4m이다(그림2).

 

그런데 왜 무덤구덩이가 정확하게 중앙이 아닐까?

 

그것은 묘광을 판 흙을 한쪽에 모아두고 그 위에도 돌로 덮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무덤 내부에 흙도 돌과 함께 섞어서 무덤구덩이 안을 채웠다.

 

재밌는? 혹은 철학적 현상이다. 모든 것을 되돌려 놓는다는 의미인가도 싶다.

그리고 지난번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여성미라의 분석한 결과 가발을 부친 물질에서 내장을 구성한 성분이 추출되었다고 알려드린 바 있다. 이집트 미라가 내장을 따로 보관하는 것과는 다른 현상이라고도 했다.

똑같은 의미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림2. 아크알라하 1유적의 2호분 남성아이의 무덤. 중앙의 적석을 드러내고 난 후 무덤구덩이와 호석. 가운데 긴네모꼴이 무덤구덩이고 가장자리가 무덤을 두른 호석이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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