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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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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남성전사 무덤에서는 뼈로 제작된 화살촉이 출토되었다. 두 명이 묻혔는데, 화살통과 활까지 부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전사의 왼쪽 옆에는 활과 화살을 동시에 넣은 통(고리투스)까지 확인되었다. 화살은 스스로 날아가지 못한다. 날려보낼 장치인 활이 필요하다. 소년관에서는 동물장식이 조각된 고리투스(활과 화살을 동시에 넣은 통)의 장식이 출토되었다. 그들의 활은 그리스인의 눈에도 매우 독특했던 것으로 보인다.

 

헤로도투스는 역사에서 7권의 64장에 박트리아인과 비교해서 스키타이인을 묘사했다.

‘박트리아인은 메디아 인과 아주 비슷한 모자를 머리에 쓰고 행군했으나 갈대로 만든 박트리안 산 활과 단창을 들었다. 스퀴타이(스키타이)족인 사카이(사카)족은 끝이 뾰족하고 빳빳한 모자를 머리에 쓰고 있었고, 고유의 활과 단검 말고도 사가레이스라고 불리는 투부(전투용 도끼)를 들고 있었다.’ 페르시아인들은 스키타이족을 사카이(사카)족이라고 부른다.

 

7권은 페르시아전쟁을 묘사했기 때문에 참가한 각 민족을 묘사해 놓은 것인데, 스키타이인에 대한 묘사는 고깔모자, 활, 단검, 전투용도끼로 박트리아인과 구분했다.

 

페르세폴리스의 아파다나 궁의 북쪽 면에는 스키타이인이 조각되어 있는데, 단검을 들고 있는 사람(그림 1의 왼쪽), 왼쪽 허리에 활집을 차고 있는 사람(그림 1의 중앙), 그 뒤에는 활집을 허리에 차고 전투용도끼를 들고 있는 사람(그림 1의 오른쪽)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기원전 4세기에 해당된다.

 

그림1. 페르세폴리스의 아파다나 궁전 북쪽면

 

스키타이 인들의 활은 비교적 짧은데 75~100cm가량이고, 활은 단순하게 만들어지지 않았고 나무와 심이 들어 있는 복합적인 구조로 만들어지는데 이를 스키타이 활이라고 부른다. 나무 한 겹으로 만들어진 단순한 활 보다는 훨씬 더 튼튼했다(G Rausing 1967).

 

아크 알라하 1유적 보다 200년이나 앞선 아르잔-2 유적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이 유적은 투바라고 지역인데, 알타이 산 보다 북쪽이며, 상대적으로 바이칼 호수와 가깝다. 이 유적은 스키타이 문화중에서도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데, 초기 스키타이문화를 이야기 하게 되면 반드시 이야기 될 유적이다.

 

가장 유명한 활과 화살을 동시에 넣는 통(고리투스) 장식은 그림 2의 유물이다. 흑해 북쪽의 켈레르메스 라고 하는 유적에서 출토되었는데, 길이 40.5cm, 폭은 22.2cm로 384.08g가량이다.

 원래는 원통형이었겠지만 1904년에 발굴되어서 당시에 그냥 핀 채로 보관되어서 여러분이 현재 보시면 그냥 장방형의 금제품이다. 지금이라면 하지 않았겠지만....그래서 이 유물을 그냥 휙 보면 활집의 '밖'을 장식하는 유물인지 모르실 것이다.

 

 

그림 2. 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흑해 북쪽, 켈레르메스 4호, 기원전 5세기, 이 유물은 원래는 활집이었기 때문에 둥글게 말렸다.

 

겉은 화려한 황금으로 꾸미고 그 안에는 가죽 혹은 나무 또는 나무껍데기로 만들었다. 사슴은 무릎을 꿇고 있고 사슴뒤에는 표범이 표현되었다. 이 유물의 원래 모습을 생각한다면 표범장식은 두 줄이 되고, 사슴문양은 3줄이 투조된 모습으로 설계한 것이 된다.

 

만드는 사람은 어디에 포인트를 둔 것일까?

표범일까? 사슴일까? 아니면 금딱지 보다는 안의 내용물에 더 신경을 썼을까? 하는..

보이는 것은 사슴이 눈에 들어오지만, 사실 큰 것 보다는 작은 것에 더 손이 많이 갔을 것이다. 사슴만 그리면 끝날 텐데 구지 금박을 접어서 연결하는 부위의 작은 공간에 2줄의 표범을 촘촘히 새긴 것이다.

 

그리고 원래 중요한 것은 숨기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금딱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헤로도투스도 적어 놓았다. 아무도 별로 아직까지 신경쓰지 않았지만.. 헛소리로만 여겼을 수도 있다....그리고 너무 머리가 아프다..어떻게 하지?.....

 

 

참고문헌

G Rausing, The Bow, Some notes Its Origin and Development.Acta Archaeological Lundesia 6. 1967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역사 (헤로도토스)(천병희 역), 2009, 숲

알렉세예프 2012,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중국에서는 신강의 청동기시대 이전을 「석기시대」라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이 지역의 세석기문화는 중국 세석기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한다. 특히 감숙성과 녕하 지역의 신석기문화는 토기가 상당히 발달한 문화인데, 만약 신강지역의 세석기가 그 지역에서 기원했다면, 그 지역 토기양상이 신강지역에서 파악되지 않는 점은 그들 연구의 모순이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자국중심의 연구관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지역에서 세석기가 늦게까지 존재한다는 이유로 단순히 석기시대개념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스티- 나림 유적에서는 160,000여점의 골각기와 석기가 출토되었다. 이를 「석기시대」로 단순화 할 수 있을까? 중국 신강성과 같은 문화권을 이룬 카자흐스탄, 몽골, 시베리아 학계에서는 신석기시대 개념을 사용한다. 즉 이 지역은 4500년 전부터 석기양상이나 유사한 것으로 파악되나 국가 별로로 연구되면서 시대개념에 차이가 있다. 문화권별로 연구되었다면 좀 더 적합한 개념에 접근했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가 동아시아 신석기시대의 개념을 토기사용이 빈번하지 않는 중앙아시아와 비교하면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한국 및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의 신석기시대는 토기 등장을 기준으로 한다. 신석기시대는 러복(J.Lubbok)(1865)이 작물재배, 동물길들이기, 토기발명을 시대개념으로 규정하고, 이를 고든 차일드(V. Gordon Childe)는 농경을 기본으로 한 ‘신석기혁명’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시베리아 및 극동의 신석기시대를 조사한 오클라드니코프는 고든 차일드의 신석기혁명이라는 개념이 동아시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바 있다.

 

 최근 전통적인 신석기시대 개념을 반박하는 주장이 좀 더 구체적으로 제기되었다. 토기의 발생시기는 후기 구석기시대이고 동아시아에서부터 발명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자료로서 13000년 이상 올라가는 유적이 있는 곳은 아무르강 하류, 일본, 중국(그림15)등이고, 17000년 전 홀로세 이전부터 동아시아유적에서 출토된 예도 있다. 기원지는 새로운 발굴로 바뀔 수 있지만, 신석기시대의 기준이 된 홀로세(전신세)이후에 토기가 발명된 것이 아니라 이미 플라이스토세의 사냥채집민(후기구석기인)들에 의한 것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토기가 모든 지역에서 균일한 시점에 발생되지 않았으며, 신석기시대 개념의 기준이 된 유럽 및 근동 보다 오히려 동아시아에서 빨리 토기가 발명되었다는 점이다(그림15).

 

그림15. 토기발생지역비교(P.Jordan, M. Zvelebil 2010재인용)(김재윤 2019)

 

 따라서 토기등장을 기준으로 한 신석기시대 개념은 유럽, 근동, 중앙아시아 등과도 다른 동아시아 특유의 개념이다.

그렇다면 카자흐스탄 동부, 중국신강, 몽골의 4500년 전 지역은 토기 발생 혹은 토기사용을 근거로 한 동아시아의 신석기시대개념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중국 신강지역이 동북아시아와는 다른 선사문화권임을 증명한다.

우스티-나림유적에서 보이는 유물의 양상은 토기사용이 그렇게 빈번하지 않았거나 토기를 대신하는 다른 저장도구 혹은 조리도구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동아시아 선사시대 연구에서 토기는 시대 및 시기구분, 지역성 등 모든 연구의 기준이 되고 있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이 점이 통하지 않고, 오히려 석기양상이 이 지역의 특징을 대변할 수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은 본고의 연구대상 시대 이후에는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에도 주요한 유적의 성격은 무덤이라는 점에서 의례중심의 사회이다. 또한 동아시아보다 일찍 금속기를 사용하게 되면서 청동기시대 카라숙문화에서 본격적으로 청동검이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세 번에 걸쳐 제국을 형성하지만 근대 중국의 대포에 의해서 제국이 굴복되었다는 점은 곧 무기로 인해서 사회가 변화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조합식석인검과 조합식검은 이 사회를 대변하는 유물 중에 하나는 무기로 볼 수 있다. 이후의 청동기시대, 초기철기시대 스키타이 문화권 등으로 이어지는 문화에서 청동검이 등장하기 이전에 특징적인 유물로서 유목사회의 연속성이 무기에서도 관찰된다고 볼 수 있다.

조합식석인검과 조합식석검의 분포범위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하게 연구된 바가 없다. 시베리아의 세로보문화 및 글라스코보문화에서 확인되는 조합식검은 가장 동쪽 분포범위가 요서지역의 소하연문화까지 확인된다(김재윤 2018b). 이 문화의 조합식검도 양면떼기 한 석기를 끼워 넣었다.

 

 따라서 중국 신강의 석기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는 4500년 전께 동아시아보다는 검의 형태를 갖춘 유물이 일찍 확인되고, 석기와 골각기가 주된 유물이며, 토기가 주요하게 사용되지 않는 특징이 있다. 동북아시아 신석기시대 개념과 맞지 않고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중국 내의 문화보다는 오히려 인접한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유라시아 초원사회의 개념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김재윤(2019)에서...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앞서서 중국 신강성의 4500년 전 석기시대문화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중국 신강성과 바로 인접한 카자흐스탄의 동부지역과 그에 인접한 문화를 살펴보았다.

2019/07/03 - [교과서 밖의 역사:유라시아선사시대/신석기시대] -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의 신석기문화비교1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의 신석기문화비교1

필자가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로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인접한 카자흐스탄과 몽골의 신석기시대와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강성의 천산산맥은 동서방향 보다는 약간 틀어져서 비스듬하게 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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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7 - [교과서 밖의 역사:유라시아선사시대/신석기시대] -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 신석기문화비교2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 신석기문화비교2

앞서서 환단고기역주본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중국신강성의 신석기문화에 대해서 설명한바 있다. (앞선 포스팅 참고) 2017/12/20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환국과 신강고고학 자료] - 환국과 신강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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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2 - [교과서 밖의 역사:유라시아선사시대/신석기시대] - 카자흐스탄 동부의 신석기문화

 

카자흐스탄 동부의 신석기문화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문화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 인접한 지역의 자료를 비교하고 있다. 우선 살핀 것은 바로 인접했지는 않았지만, 오늘 살펴볼 카자흐스탄 동부지역과 바로 인접한 지역의 문화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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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신강성의 오른쪽은 몽골과도 접하고 있다.

 

몽골은 지리적으로 바이칼 유역과 가까워 이 지역의 신석기문화와 관련성이 많다(Окладников А.П., 1964,.)

몽골의 신석기시대는 대체로 2~3단계로 구분되는데, 1단계는 기원전 4천년기(6000~5000년 전), 2단계는 기원전 3천년기(5000~4000년 전), 3단계를 기원전 2천년기(4000~3000년 전)로 구분하는 의견(도르지)과 2단계의 문화가 순동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계속된다는 의견(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으로 구분된다.

1단계는 석기제작소와 주거지가 확인된 쏠론케르 쏘몬 유적이 있다. 원추형의 석인석핵(그림7-2,3), 석핵형 긁개(그림7-1), 조합식검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적에서는 첨저의 토기도 확인되었다.

2단계는 탐차그-불락유적은 주거유적(그림7-5~9)으로 원뿔형태의 석인석핵(그림7-15), 뚜르개(그림7-26,27), 긁개, 한쪽변만 잔손질 된 세석인석기(그림7-20), 조합식석인검 (그림7-25)등이 확인되었다. 뿐만 아니라 골각제인 화살촉과 송곳니로 제작된 장신구 등도 주거지 바닥에서 여러 점이 함께 출토되었다. 주거지 바닥에서는 무덤 4기(그림7-6~7)가 확인되었는데, 피장자가 앉은 자세로 다리를 묶은 채로 매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 유적을 기준으로 탐차그-불락 문화가 설정되었다. 듀나-2 유적에서도 유사한 유물양상이 확인되었다. 타제석도(그림7-34,36), 타제석부(그림7-37), 마제석부(그림7-38)등이 있다.

3단계는 사라바크-우스 유적의 상층이 대표적인데, 탐차그-불락문화의 유물과 거의 유사하다. 이 유적은 두 층위로 나눠지는데, 아래층은 원추형(그림7-40~42)과 원통형 석인석핵, 뚜르개, 끝이 둥글게 처리된 긁개(그림7-43~45), ㄱ자형으로 처리된 타제석도(그림7-52) 등이 확인되었다. 또한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기하학적인 무늬가 침선된 그물문양(그림7-59, 50), 압인(그림7-63~65) 등이 확인되었다. 당시 아래층은 바이칼 유역의 이사코보문화(5000~4700B.P.)와 비교되어서(Окладников А.П., 1964), 2단계에 해당한다.

그림7 . 몽골의 신석기문화유물((1~4: 쏠론케르 쏘몬, 5~9,15~20,23, 25~30: 탐차크-불락유적 ,11,12,21,24,31,33,34,37~39: 듀나-II, 40~52: 사바라크-우수, 53~62: 투그르인-쉬레트, 63~65: 케룰렌강) (노보고르도바 1989 재편집)

상층에서는 석기는 하층과 유사한 바이칼 유역의 토기 뿐만 아니라 채색토기(그림7-54~58)가 확인되면서 3단계로 보았다. 뚜그르기인-쉬레트 유적에서도 비슷한 석기양상(그림7-53)과 채색토기가 확인되었다.

그런데 2,3 단계 유물은 3단계의 채색토기를 제외하고는 석기 및 토기양상이 거의 유사하다(그림7-54~58). 뚜그르기인-쉬레트 유적에서 채색토기가 출토되면서 사바라크-우스 유적의 상층과 같은 3단계로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쉬레트 지역의 듀나-II유적의 출토품이 우스티-나림유적과 비슷하다고 연구되었다(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김재윤 2019).

그림8 . 바이칼유역과 몽골의 신석기시대 유적 위치(1: 브랏스키 카멘, 2: 라스푸티노, 3:세로보유적, 4: 베르홀렌스크, 5: 포노마레보, 6: 키토이, 7: 치콜로드롬, 8 뚜그레인-쉬레트, 9: 사바라크-우수, 10: 듀나-II, 11: 쏠로케르-소몬, 12: 탐차크-불락유적(김재윤 2019)

 

 

 

 

참고문헌

Окладников А.П., 1964, Первоытная Монглия-К впросы древнейшеи история Монголя, УБ. pp.39-40

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осква:НАУКА, pp.63.

Окладников А.П., 1964, Первоытная Монглия-К впросы древнейшеи история Монголя, УБ.

Новгородова Э.А.,1989,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осква:НАУКА, pp.60.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앞서서 환단고기역주본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중국신강성의 신석기문화에 대해서 설명한바 있다.

 

(앞선 포스팅 참고)

2017/12/20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환국과 신강고고학 자료] - 환국과 신강

 

환국과 신강

신강에서는 신석기시대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아서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묶어서 석기시대라고 한다. 앞서 포스팅한 바 있지만 흔히들 구석기시대 유물로 생각되는 세석기가 이 지역에서는 늦은 시기 까지 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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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 [환단고기비판: 환단고기와 고고학/환국과 신강고고학 자료] - 신강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4000~3000 부터.

 

신강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4000~3000 부터.

현재 조사된 신강의 석기시대 유적은 모두 33개소로 전해진다. 그런데 유적은 대부분 지표조사된 유적이고, 일부만이 발굴 조사되었다. 발굴 조사되더라도 주로 청동기시대 하층에서 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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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문화를 좀 더 잘 알기 위해서는 인접하고 있는 지역과의 비교가 필수적이다. 카자흐스탄 동부의 우스티-나림문화 뿐만 아니라 이와 인접한 켈테미나르문화의 유물도 중국 신강, 몽골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이 지역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문화가 위치한 곳은 천산산맥에서 발원해서 아랄해로 들어가는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니야강의 하류이다.

 

2019/07/03 - [교과서 밖의 역사:유라시아선사시대/신석기시대] -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의 신석기문화비교1

 

중국 신강성과 카자흐스탄의 신석기문화비교1

필자가 중국 신강성의 석기시대로 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인접한 카자흐스탄과 몽골의 신석기시대와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강성의 천산산맥은 동서방향 보다는 약간 틀어져서 비스듬하게 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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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테미나르문화

기원전 4000년기 후반~2000년 기 전반까지 아랄해의 서부 및 남부와 북부에 켈테미나르문화가 존재했다. 대표적인 유적은 잔바스-4, 대형주거지가 확인된 톨스토프, 카바트-7 유적 등이 발굴되었다.

카바트-7유적에서 발굴된 주거지는 타원형주거지(그림-5,6)로 크기가 30~31×18~19m정도이다. 유사한 주거지가 확인된 잔바스-4 유적(그림5-1)을 참고하면 이 집터는 수혈의 흔적이 거의 없는 텐트형주거지인데, 집의 건축재인 사슴의 가죽(360~380㎡)과 목채가 실제로 남아있었다. 집의 중앙에는 돌을 두른 노지 및 그 주변에서 저장구덩이 내부에서 대량 토기가 확인되었다.

토기는 저부가 약간 둥글며, 한쪽 끝이 주구처럼 형성되어는 소형토기(그림5-32) 및 구연부가 외반하는 옹형토기(그림5-33, 34)가 기본적이다. 문양은 침선하거나 찍은 방법으로 시문되었고, 대체적으로 횡방향으로 구연부 부근까지만 시문되는 토기가 많다. 토기 문양 중에서 기하학적인 삼각집선문(그림5-37) 혹은 지그재그(그림5-34), 방형문양(그림5-36) 등이 시문되었다.

석기는 규조암제를 이용한 눌러떼기기법을 이용해서 제작한 세석인석기(그림5-7~30)가 많은데, 특히 비대칭으로 가장자리를 잔손질 한 경우가 많다. 석촉은 양 가장자리를 비대칭으로 떼어내는데, 한쪽은 짧게 다른 한쪽은 길게 떼어내어 한쪽만 슴베(그림5-24~27)가 생기게 했다. 이 문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세석인석기를 이용한 유물가운데 여러 형식의 뚜르개(그림5-18, 21~23)가 확인되는데, 한쪽변 만 잔손질한 뚜르개(그림5-22), 끝이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다듬은 뚜르개(그림5-23) 등이 확인된다.

긁개 가운데는 한쪽 변을 부채꼴 모양으로 들어가게 손질한 것(그림5-28)도 석촉(그림5-24~27)과 함께 이 문화의 특징으로 알려졌다. 이외에 평면형태 방형에 가까우며, 끝을 약간 둥글게 잔손질한 긁개(그림5-13~15)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문화에서는 평면형태가 사다리꼴인 양인 마제석부(그림5-31)가 출토되었다.

 

그림5. 아랄해 주변의 켈테미나르문화(Ошибкина С.В.(ред) 1996 재편집, 김재윤 2019)(1~4: 잔바스 4유적, 5·6: 카바트-7, 7~39: 톨스토프 출토품(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바이칼 유역에는 신석기시대 전 시기를 통틀어 토기가 많이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토기는 확인된다.

 

바닥이 뾰족하거나 약간 둥그스럼한 토기가 출토된다.

토기 문양은 망상문(그물문양이라는)이라고 불린다.

망상문이라 불리는 문양이 찍힌 토기는 바이칼 유역의 신석기시대에 전 시기에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몽골, 카자흐스탄 등지에도 있다.

 

키토이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인 키토이 유적에서 출토된 사진이다.

모스크바 국립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그림1). 

  


그림 1. 키토이 유적 출토 토기


그림 2는 샤만카 2 라고 하는 바이칼 유역에 있는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다.


그림 2. 샤먄카 2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62호 출토, 

В.И. Базалийский 2012, ПОГРЕБАЛЬНЫЕ КОМПЛЕКСЫ ЭПОХИ ПОЗДНЕГО МЕЗОЛИТА – НЕОЛИТА БАЙКАЛЬСКОЙ СИБИРИ: ТРАДИЦИИ ПОГРЕБЕНИЙ, АБСОЛЮТНЫЙ ВОЗРАСТ

인용)


 역시 망상문이다. 그러나 그물문양을 찍었다기 보다는 나무판에 줄을 감아서 만든 도구로 두드렸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이런 문양을 타날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이칼 유역의 망상문은 그냥 그렇게 중앙아시아에도 알려져 있음으로 그 용어를 씌는 것이 혼돈을 막을 수 있다.

 

바이칼 유역에는 토기가 많지 않다. 동아시아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이다.

토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지역(바이칼 유역 이남, 몽골, 중국신강, 카자흐스탄)과 중간 정도의 특징일 수 있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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