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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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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의 2500년 전 무덤인 파지릭 유적은 1929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했고 본격적인 발굴은 1947년부터 이다. 하지만 발굴은 1850년에 아직 로마노프 왕조일 때 ‘제국고고학위원회’를 만들어서 흑해북쪽의 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1929년은 러시아혁명 후로 레닌이 죽고 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고, 스탈린이 집권했던 시점이다. 스탈린 집권기간 동안에 파지릭 유적은 발굴되었다. 스탈린은 사람을 아주 많이 죽인 지도자이다. 레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약했던 권력을 잡은 수단은 등 뒤에서 칼을 꼽는 것이다. 인간백정이라는 평가도 있다. 2차대전 당시 독일과 싸워서 이겼지만, 자국민이 너무 많이 죽어서 그게 이긴 것일까 하는 평가도 나온다.

 그럼에도 러시아인에게 존경받는 위대한 러시아인 3인중에 한명이다(2008년 필자가 유학당시, 러시아 국영tv 방송인 ‘러시아(РОССИЯ)’에서 했던 조사였는데, 아침마다 위대한 러시아의 위대함을 알리는 역사적 유적과 인물을 꼽아서 보여주었다. 아침마다 보면서 처음에는 거북했지만, 나중에는 그러려니...하고 되는 걸 경험했다. 아직도 스탈린이라니..이러면서. 복잡한 감정이었다.) 독일과 싸워서 이겼기 때문이다. 지금도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열리는 전승기념일은 2차대전 종전일이 아니라 독일과 승전일인 5월 9일이다. 스탈린은 현대한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이 부분이야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일 테니...(우리나라에서 알려진 소련 혹은 러시아에 대한 인물의 이미지는 전부 미국언론을 통해서 알려져서, 미국입장에서 알려진 이미지이다. 실제 그 나라 감정과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필자는 스탈린 집권기에 알타이의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점에서 이상한 감정이 문득 든다.

 

2500년 전 유적을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현대사로 넘어 갔는데, 다시 돌아와서 1929년에 그랴즈노프가 발굴한 유적은 이미 도굴당해서 주인공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하지만 말 10마리에 대한 정보는 비교적 자세하게 남아 있고 필자가 공개했다.

 

2020/04/2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1호분] -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서는 한 가족 혹은 친족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이 확인된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과 그 안에는 관을 두고, 무덤방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었다..

eastsearoad.tistory.com

 

그런데 스키타이  문화의 유물은 늘 앞에 붙는 수식어가 ‘황금’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하지만 필자가 보여드린 유물은 거의 대부분 나무장식이었다. 그렇다면 황금은 어디에?

드문드문 말씀드렸지만 금박은 쉽게 찢어져서 벗겨진채로 많이 발견된다. 특히 1호분에는 금박이 많이 발견되었던지, 그 부분에 대해서 벗겨진 금박종이가 많다는 내용도 별도로 적어 놓았다.

여러분의 의심을 약간이나마 덜어드리기 위해서 4호분에서 가장 금박이 많이 남은 유물을 보여드리고자 한다. 유물은 말의 얼굴에 달렸던 굴레장식이다. 파지릭유적의 1호분에서 4번째 말의 굴레장식이라고 분류된 말이다. 비교적 많은 금박이 남아 있다(그림 1). (알타이에도 황금덩어리로 만든 유물이 출토되는 유적이 있다. 앞으로 소개할 예정임...)

 

 

그림1. 파지릭 유적 1호에서 출토된 말의 굴레

 

굴레장식에 관통하는 가죽줄은 뺨으로 돌아가는 부분은 가죽띠 2줄이고, 코로 돌아가는 부분에도 굴레장식이 부착되었다. 굴레장식은 산양머리와 팔메트 문양이다. 산양머리에는 가죽뿔이 붙어 있다. (그런데 가죽뿔이 빠진 왼쪽(우리가 볼때)의 굴레장식은 필자가 보기에는 새모양으로도 보인다.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나 싶기도 하다.)

 뺨으로 돌아가는 굴레는 2줄로 재갈멈치로 연결된다. 재갈멈치는 끝 부분에만 동물문양이 붙어 있는 유물과는 달리 재갈멈치가 통째로 산양을 표현했다. 앞다리는 몸 아래로 당기고, 뒷다리는 뒤로 뻗어서 몸을 수평으로 표현해서 산양은 뛰는 모습인지, 나는 모습인지를 표현했다. 재갈멈치가 대체로 막대기모양인데, 이 부분에 동물을 통째로 표현한다고 산양의 무릎을 꿇은 모양으로 표현하면, 다시 말해서 산양 몸을 수평으로 만들지 않으면 기능적인 부분이 약해지기 때문에 모양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세의 굽동물의 표현은 사슴돌에 이미 있다. 있지만 그것을 재갈멈치에 사용하는 것은 다른문제라고 생각한다. 이 유물의 이마장식은 물방울 모양을 표현했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1929년에 발굴된 파지릭 유적의 1호 무덤 주인공은 발굴 이전에 이미 도굴로 인해서 주인공에 대한 정보는 없다. 도굴은 교묘하게 이루어져서 나무로 된 무덤방의 안쪽과 무덤방의 천장에 구멍을 남겨놓아서 자신의 흔적을 남겼고 주인공도 통째로 무덤에서 꺼내갔다.

 

대신에 무덤방 밖의 말 10마리는 그대로 남겨 놓았다. 파지릭 1호의 말은 10마리 모두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말을 부리는데 필수요소인 재갈과 고삐 외에도 각 종 동물문양으로 장식된 굴레장식과 안장 뿐만 아니라 말의 가면까지 확인된다. 또한 나무목제장식을 덮었던 수많은 금박들이 출토되었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대형고분이 5기인데, 그 중에서 말 가면이 확인된 무덤은 2호, 5호 외에 1호가 있다. 2호와 5호에서는 1마리분만 확인되었으나, 1호에서는 2마리 분의 말 가면이 확인되었다(이미 포스팅 되었음). 두 무덤 모두 남녀가 한 통나무관에 들어가 있었고, 미라처리된 것이다. 말 마스크가 있다고 해서 1호무덤에도 미라가 들어있었다는 보장은 없지만, 대형고분이고 말의 마스크가 모든 무덤에서 확인되지 않다는 점에서 1호 무덤의 주인공도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정정도는 할 수 있다.

누가 알겠는가?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같은 결과가 도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파지릭 1호에서는 같은 유적의 다른 무덤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말의 굴레장식이 있다.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사람얼굴모양의 장식이 달린 것이다. 장식은 5개 달렸지만, 4인의 얼굴이다. 눈, 입, 코, 광대뼈모양이 다른 4명이 나무에 조각되었다. 아마도 1호무덤 주인공과 관련이 있을 듯 싶다(파지릭 1호에 제일 첫 번째 포스팅에서 찾아보시면 된다).

 

뿐만 아니라 가죽조각으로 사람얼굴이 표현된 유물도 출토되었다(그림 1-7). 이 사람의 머리 정수리에는 커다른 뿔 모양 혹은 나무모습의 장식이 연결되어 있다. 그 옆에는 동물의 귀인지, 나뭇잎인지 모를 장식도 붙어 있다. 이 유물의 용도 등은 확정할 수 없으나, 어딘가에 붙였을 것이다.

 

 

그림 1. 파지릭 1호출토 가죽아플리케, 사람얼굴모습(7)

 

파지릭 1호의 사람얼굴장식을 달고 있는 말을 상상해보면, 말 얼굴에 사람얼굴이 붙어 있는 모습인데, 반 대의 정황이 확인된 적이 있다.

 

파지릭 5호에서 얼굴은 사람인데, 머리에 사슴뿔이 달려 있고, 몸은 사슴인 표현이다(이미 포스팅했음). 이는 5호의 펠트로 제작된 벽걸이에서 확인되었다. 묘사된 동물이 말은 아니지만 사람과 동물이 같은 장면으로 묘사하고자 했다는 점이 유사하다는 것이다.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말(그림 2) 가운데 마스크가 있는 5번째 말을 탄 사람을 상상해 보자. 내가 말을 타지 않고, 그냥 아래에서 서 있고, 이 말을 탄 사람을 쳐다본다면, 나는 사람보다는 말에 더 눈길이 갔을 것 같다.

왜냐하면 말이 너무 화려해서 그 화려함을 찬찬히 쳐다봤을 것이다. 말은 이미 그리핀처럼 보였을 것(이 부분에 대한 포스팅은 이미 있음)이고 이게 말인가 상상의 그리핀이 실제로 살아왔나 하며 몇 번이나 쳐다보았을 것이기때문이다.

 

말을 화려하게 꾸민 이유는 이런 효과를 말 탄 이가 누리도록 한 게 아닐까?

되게 먼가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명품으로 몸을 휘감는 이유랑 비슷한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여기에 사람이 동물처럼 보이는 것도 동물이 사람처럼 보이는 그런 효과도 더해졌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보여주는 유물이 얼굴장식이 달린 말의 굴레와 파지릭 5호에서 출토되는 사람을 얼굴 빼고 동물로 표현한 펠트조각에서 엿볼 수 있다. ....... 신화?

 

 

그림 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말의 복원도, 1991년에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스키타이 황금 전 도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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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우리는 현재 시베리아 알타이에 위치한 2500년 전 아크 알라하 3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 파지릭 유적을 살펴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때때로 흑해 북안의 유적들의 유물도 간간히 필자가 설명하고 있다. 그들은 유목민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들이 남긴 유물인 동물문양 가운데 늘 사슴문양이 있다. 사슴은 양, 염소, 말과 같은 우제류이긴 하지만 기르지 않는다. 사냥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사슴은 신석기시대 이래로 가장 인간이 많이 잡은 동물일 것이다.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에도 가장 많은 그림 중에 하나이고, 패총에서도 사슴뼈가 많이 출토된다. 시베리아 알타이의 암각화에도 사슴은 가장 많은 주제 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오늘 주제는 사슴은 아니다.

 

왜 사슴과 같은 특정 동물이 금 혹은 목제로 만들어져서 정해진 자세로 표현되어서 여기저기 다 장식되었을까?

왜 호랑이 혹은 표범은 둥글게 몸을 말아서 표현했을까? 이 동물은 흑해 북안부터, 알타이, 투바, 미누신스크 지역에서 출토된다. 심지어는 이란의 지비예 유적에서도 출토된다(그림 2).

 

필자가 앞에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란 제외)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실제로 유적의 무덤구조나 토기 등은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공통적인 부분이 있어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는 명칭을 쓴다.

 

파지릭 1호분에서는 말 10마리가 매장되었는데, 그 중에서 3번 말의 안장 덮개(그림 1, 그림 2)는 펠트로 제작되었다. 가죽, 말꼬리, 금은 부속물로 사용되었다.

우선 안장덮개는 안장 위를 덮는 유물이다. 펠트 안장덮개 아래에는 가죽방석이 따로 만들어졌고 그 위를 덮은 유물인데, 가죽방석에 고정되었다. 가죽방석 안은 사슴털 혹은 풀로 채워졌다.

 

그림 1. 파지릭 유적 1호분의 3번 말 안장덮개, 길이 119cm, 너비 60cm, 펠트로 제작됨. 말안장 끝에 붙은 양머리 장식의 털은 말총을 이용, 양의 눈에는 금박장식, 펠트덮개 아래에 가죽방석이 있음. 고정됨. 가죽방석 안은 사슴털과 마른 풀로 채워짐.

 

 

 

파지릭1호의 안장덮개에는 그리핀이 영양을 공격하는 구조로 펠트 조각을 덧붙여서 표현했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리핀은 여러 동물이 합성된 동물이다. 두 동물이 공격하는 구도의 동물문양은 늘 갑과 을이 정해져있다. 공격자는 그리핀이나 맹수류이고, 공격당하는 쪽이 야생염소, 사슴, 양, 염소 등이다. 파지릭 1호분의 그리핀은 알타이에서 출토되는 독수리머리라기 보다는 사자의 얼굴이다. 공격당하는 야생염소는 뒷다리가 뒤집어진 상태라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매우 사실적이다. 붉은색 바탕에 검은색, 푸른색, 황색, 검은색 등을 배열해서 매우 화려하다.

 

스키타이 문화의 동물문양장식은 사실적이지만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이다. 사실적이라는 말은 동물의 종(種)구분이 가능하지만, 부분적인 표현- 눈과 입모양, 귀모양, 뿔모양 등은 매우 과장되었다.

추상적 표현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그리핀이다. 세상에 없는 동물이지만 그리핀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다. 왜냐하면 어떤 동물의 조합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파지릭 1호분 안장덮개의 사자머리 그리핀은 아케메니드의 페르시아에서 들어온 것이다(그러나 이 의미는 이 유물 자체가 들어왔다는 것은 아니다. 펠트조각을 이어서 만드는 기법은 알타이에 이미 있던 기법이다. 알타이의 파지릭 유적 사람들이 만들었다). 알타이에서는 주로 독수리머리 그리핀이 확인된다. 바깥의 표현과 내부의 표현이 함께 표현되었다. 매우 사실적이지만 매우 추상적이다.

그리핀은 페르시아에서 기원했다는 의견도 있지만 그와 만만치 않게 시베리아 기원설도 대두되어 있다. 알타이에서는 기원전 7세기부터 그리핀이 유물로 표현된다.

 

그리핀이란 동물문양장식은 각 지역마다 특색은 있지만 여러 동물을 합체해서 만든다는 기본 아이디어 혹은 아이덴티티는 같다. 그리핀을 예로 들었지만 몸을 말고 있는 표범장식도 마찬가지이다. 왜 이렇게 널리 퍼져있었을까?

 

그림 2. 여러 지역에서 출토되는 환상의 맹수. 1~5: 흑해북안의 유적, 6~10: 카자흐스탄(천산산맥의 유적), 12-이란 출토품, 이외에도 미누신스크 분지(타가르 문화)에서도 환상의 동물은 출토된다.

 

부족의 상징이었을까? 깃발과 같은 상징? 그러나 깃발은 하나이다. 스키타이 동물문양은 여러 개의 표현법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동물문양장식은 각 개개의 동물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시대의 어떤 기호와 같은 역할을 했다면, 그리고 사람들이 기호에 대한 의미를 알았다면 그렇게 널리 사용된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같은 동물의 종(種)이 같은 자세를 취하면서, 그러나 세부적 표현은 다른 유물이 널리 퍼져있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예를 들면 환상의 맹수는 ‘양 1000마리’. 혹은 환상의 맹수는 ‘오늘부터 전쟁 중..’ 머 그런...

 

현대의 인터넷 환경에서와 같이 모든 정보가 공유되는 사회가 이미  있었지 싶다...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참고문헌

페레보드치코바 1994,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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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계곡에서는 한 가족 혹은 친족의 무덤이 함께 만들어진 것이 확인된다.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과 그 안에는 관을 두고, 무덤방 밖에는 말을 여러 마리 묻었다. 계곡의 모든 무덤이 같은 크기는 아닌데, 파지릭 유적에서는 대형 고분은 5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1호는 가장 먼저 발굴된 것이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무덤 구덩이에서도 유물이 발견된다. 1호에서는 나무 삽 조각, 이미 깨진 말뚝 4점, 말뚝을 박는데 사용된 일종의 나무 망치와 마차의 부속품이 확인되었다. 이음쇠 2개, 쐐기, 끝이 뾰족한 막대기 2개 등이다.

 

무덤방 안에서는 통나무관과 통나무관을 장식한 수탉 아플리케 장식(가죽)(어제 포스팅 참고), 산양머리조각(가죽)(그림1-6,7), 무덤방 벽에 붙었던 사자머리 아플리케(그림2)이 있다.

뿐만 아니라 양모로 제작된 그릇 받침대로 둥근 고리모양이다. 숫양의 꼬리뼈도 출토되었는데, 고깃덩어리를 부장했을 것이다. 목제 상의 다리(그림3-1), 목침(그림4-a), 목제 손잡이 달린 망치(그림 5-1,2), 토기 파편, 나무와 금제 잎으로 장식된 가죽 끈 등이 출토되었다.

 

그림 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산양머리조각(6,7)

 

그림 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사자머리아플리케

 

그림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제 상다리(1)

 

그림 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침(1). 루덴코는 이를 나무의자로 보았으나 목침이다. 이것은 서양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그림 5.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목제망치(1,2)

 

무덤방의 바깥에는 말이 매장되었다. 모두 10마리이다. 말은 좁은 공간에 10마리가 부장되기 때문에 잘 정리되어 들어갔는데, 앞선 포스팅에서 말의 매장순서를 간략하게 모식화 한 것을 이미 공개했다.

말은 10마리 모두 재갈 뿐만 아니라 고삐를 연결하고 말 얼굴을 둘러싼 굴레와 안장이 모두 착장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가면장식을 쓴 말은 2개 확인되었다. 같은 유적이라도 파지릭 2호와 5호에서 출토된 말은 모든 말에 장식이 착장된 것은 아니었다.

그랴즈노프는 10마리를 모두 복원해 놓았다(그림 6~23).

 

그림 6.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번 말

 

그림 7.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6과 동일

 

 

그림 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2번 말

 

그림 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3번 말

 

그림 9.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3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8과 동일

 

그림 10.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4번 말

 

그림 1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4번 말의 굴레장식, 그림 10과 동일

 

그림 1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

 

그림 1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의 굴레

 

그림 1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5번 말의 굴레의 굴레장식, 그림 13과 동일

 

그림 15.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6번 말의 굴레

 

그림 16.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7번 말

 

그림 17.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7번 말의 굴레와 안장, 그림 16과 동일

 

그림 18.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말의 굴레, 그림 16과동일

 

 

그림 19.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8번 말, 이 말의 굴레장식은 이미 공개되었음

 

그림 20.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

 

그림 21.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의 굴레, 그림 20와 동일

 

그림 22.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9번 말의 굴레, 그림 20와 동일

 

그림 2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

 

그림 23.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의 굴레

 

그림 24. 파지릭 1호에서 출토된 10번 말의 굴레, 그림 23와 동일

 

 

참고문헌

그랴즈노프 1950, Грязнов М.П. 1950, Первый Пазырыкский курган. Ленинград.(그랴즈노프 1950, 파지릭 1호분, 레닌그라드)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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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남부의 파지릭 5호분에서는 펠트로 제작된 대형 캐노피가 확인되었다. 그 외에도 양모를 짠 카펫도 출토되었다. 200×185cm 이다(그림 1).

 

 가장 내부에는 긴네모꼴 안에 십자형 도형 24개(가로 4, 세로 6개)가 표현되었다(그림 2). 십자형 도형으로 보이지만, 연꽃봉우리가 4잎으로 도식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이 연꽃 봉우리 모양은 동물문양장식을 표현한 뒤에 다시 보인다.

 이 연꽃봉우리 밖에는 그리핀이 표현되어 있는데, 머리는 뒤로 젖히고, 날개 및 꼬리가 위로 올라가게 한 것이다. 그리핀 다음에는 큰 뿔이 달린 사슴(혹은 순록) 이 표현되었다. 그 다음에는 말탄 전사가 표현되었는데, 각 면에 7개씩 49개가 표현되었다. 말은 목을 구부리게 표현되었고, 머리에는 깃털을 장식하고, 코리는 활로 묶여 있다. 무늬가 있는 안장 덮개가 표현되었다. 가장 마지막에는 다시 그리핀 모양을 반복해서 그리고 있다. 이 카펫에는 3종류의 동물이 등장한다.

 

그림 1. 파지릭 5호 출토, 카펫

 

그림 2. 파지릭 5호 출토 카펫의 세부(그림 1과 동일)

 

고대 이란의 표현된다고 한다.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그리핀은 독수리의 머리와 목에 갈기를 표현하는 것이 인기가 있었는데, 그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 카펫에 표현된 그리핀은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제이말, 1979).

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이란에서는 안장이 없어서 유라시아 유목민에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한다.

 

말 장식, 전사의 모습과 의복, 목을 구부린 말의 표현등은 아무다리야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 봉헌 판에 있는 유목민의 인물 이미지와 유사하다(제이말 1979).

 

이 유물은 양모의 털로 씨실과 날씰을 교차해서 짠 것이다. 그런데 실을 만드는 털 가운데는 아주 소량으로 죽은 양의 털을 이용한 흔적을 코노노프(루덴코 1968)가 확인했고 후에 미콜라이축(1999)도 다시 확인했다.

 

이 유물에 대해서 그랴즈노프와 루덴코는 알타이에서 제작되었다고 생각했다(루덴코 1961). 온갖 종류를 다 응용하는 고대 이 지역의 전통은 유목민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알타이 유목민의 기술로 제작될 수 없었고, 이란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아르타모프(1973)도 있었다.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는 아마도 그 당시 세상 문화의 중심이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참고문헌

아르타모프 1973Артамонов М.И.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М.: Искусство, 1973. 279 с.(아르타모프 1973, 사카족의 부(富)

제이말 1979 Зеймаль Е.В.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Л.: Искусство, 1979. С. 39, 44, 51-52, 64.(제이말 1973, 아무다르 유적: 전시회도록)

미콜라이축 1999 Миколайчук Е.А. Исследование физико-химического состояния ворсового шерстяного ковра из пятого Пазырыкского кургана // Реставрационный сб. СПб.: АО «Славия», 1999. Вып. 2. С. 13-17. (미콜라이축 1999, 파지릭 유적의 5호에서 출토된 카펫의 화학적 분석

루덴코 1961, Руденко С.И. Искусство Алтая и Передней Азии (середина I тыс. до н.э.). М.: Издат. фирма РАН «Восточная литература», 1961. 66 с.(루덴코 1961, 알타이와 근동의 예술)

루덴코 1968 Руденко С.И. Древнейшие в мире художественные ковры и ткани. М.: Искусство, 1968. 121 с.(루덴코 1968, 고대 예술적인 양탄자와 직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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