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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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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알타이에서 2600년 전 가장 큰 무덤의 밑바닥은 그림 1과 같다.

 

아무리 큰 무덤이라고 비슷한 내부구조이다.

무덤방은 2중이다. 앞서 살펴본 파지릭 문화(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알타이 지역의 문화)의 무덤과는 다른 점은 마구장식의 위치이다. 말이 묻힌 곳에서도 마구가 보관되기도 했지만 바깥 무덤방과 안의 무덤방 사이에 마구를 따로 보관했다.

물론 무덤방 바닥에서 확인되는 마구조각들은 도둑놈이 흘리고 간 것이다.

 

 

그림 1. 1-통나무관; 2-가죽장식; 3-목침; 4-목제그릇(손잡이 달린); 5-밥상; 6-목제 쟁반; 7-목제 그리핀(마구장식) 8-깨진 목제 쟁반; 9-청동장식판; 10-말의 마스크의 일부인 목제 뿔; 11-토기; 12-막대기와 가죽; 13-6개의 막대기; 14-조각된 목제 다리; 15-나무 막대와 가죽으로 만든 방패

 

 

그림 2. 통나무관(그림 1-1)

 

 

그림 3. 통나무관에 부착되어 붙였던 사슴장식 가죽 아플리케(그림 1-2)

 

 

그림 4. 목침:(그림 1-3)

 

 

그림 5. 손잡이 달린 목제 그릇, 손잡이는 결실되었음.(그림 1-4)

 

 

그림 1에서 5,7,8번은 이미 소개했음

2020/07/26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투엑타 유적] - 시베리아 알타이 2600년 전 무덤 속의 밥상

 

시베리아 알타이 2600년 전 무덤 속의 밥상

시베리아 알타이의 투엑타 1호분은 40대 남성이 혼자 묻힌 무덤이다. 직경 68m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무덤이지만, 이 남성은 미라 처리되지 않았다. 무덤에 들어간 유물은 대부분 이 남성이 살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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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청동장식판(그림 1-9)

 

그림 1-10은 이미 소개했음

 

2020/07/22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투엑타 유적] - 나무로 된 동물 뿔 제작방법

 

나무로 된 동물 뿔 제작방법

시베리아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릭 유적에는 사람과 말이 함께 매장되었다. 사람도 인위적인 과정을 거쳐서 미라로 만들어졌고, 말도 화려하게 꾸민 상태로 함께 묻혔다. 특히 파지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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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팅

 

그림 7. 액체 보관용 토기, 쿱신이라고 부름

 

그림 8. 방패(그림 1-15)

 

위에 보여 드린 유물은 다른 유적에서 이미 여러 번 소개한 것이다.

 

그림 4의 목침은 앞에서 본 파지릭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과는 차이가 있는데, 중간에 있는 홈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 1에서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주인공은 부식이 심한 철제 검(그림 9)과 검집 장식(그림 10)도 출토되었다.

 

 

그림 9. 투엑타 1호분 출토 철제 검

 

그림 10. 투엑타 1호분 출토 철제 검집장식, 은제

 

무덤방 위를 채운 흙에서도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제 숟가락처럼 보이지만, 루덴코는 ‘목제 삽’이라고 보고했다. 아마도 무덤방 안에서 출토되지 않았고, 무덤을 채운 흙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발굴했던 파지릭 유적 무덤구덩이 안에서 무덤을 만들던 목제 말뚝과 일종의 사다리가 발견되어서, 그림 11의 유물도 무덤구덩이를 만들던 도구로 생각했다.

 

그림 11. 투엑타 1호분 출토, 목제 삽 혹은 숟가락

 

그림 11처럼 생긴 유물이 모두 7점 정도 확인되었고 부서진 상태였고, 이 유물의 크기는 22cm정도이다. 그 중에 몇 개는 앞부분의 가장자리에 턱이 있다. 루덴코는 이 턱 때문에 흙을 잘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

 

루덴코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흙 푸는 도구로 보기에는 작다. 물론 부장용으로 만든 이미테이션일 가능성일 수 있다. 또 세밀한 부분에 흙을 나르기 위한 삽일 수도 있다......결정적으로 무언가를 푸기에는 앞부분이 편평하다. 애매한 유물이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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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의 투엑타 1호분은 40대 남성이 혼자 묻힌 무덤이다. 직경 68m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무덤이지만, 이 남성은 미라 처리되지 않았다.

 

무덤에 들어간 유물은 대부분 이 남성이 살아생전에 사용했던 것이지만 이제까지 보여드렸던 유물과 다른 유물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알타이의 높은 산지에 위치한 파지릭 문화는 무덤방은 넓지만 유물을 가득 채우지 않았다. 이점은 도굴당하지 않은 아크 알라하-3유적, 아크 알라하-1 유적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투엑타 유적 1호분에서도 무덤방 안에는 통나무관과 몇몇 식생활 용기 외에는 빈공간이다. 말의 마구 장식이 무덤방 바닥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후대에 무덤을 훼손하면서 생긴 것으로 원래 말이 착장하고 있거나 말 옆이 원래의 위치이다.

식생활용기는 나무, 흙, 뿔로 만들어진 세 가지 종류가 이제까지 발견되었다.

특히 나무로 만든 것은 쟁반(그림2)으로 다리가 붙어 있는 형태로 거의 모든 파지릭 문화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나무쟁반은 통나무 옆의 바닥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그런데 투엑타 유적 1호분에서는 나무 테이블 위에 목제쟁반이 올려진 채 확인되었다(그림1).

평면형태가 긴 네모꼴이고 다리가 달린 모습이다. 길이는 220cm, 너비는 60cm, 다리높이는 90cm이다. 테이블의 뒷판에는 낙엽송 두 나무판을 이어 붙인 흔적이 남아 있다. 목제 테이블의 다리(단면 원형)는 다리 끝에 턱이 있는 형태로 나무판의 가장자리에 삽입해서 착장했고, 네 면 모두 상판에서 못 박은 흔적이 남아 있다.가장자리에는 나무판에 테두리를 덧붙였다. 이 유물 위에 다리가 붙은 목제 쟁반(그림 2-2)이 놓여 있었고, 또 한점의 목제 쟁반은 나무방 바닥에 깨진 채(그림 2-1)로 있었다.

 

 

 

그림 1. 투엑타 유적 1호분 출토, 나무 테이블, 보고서의 설명에는 없었으나 사진에서 보면 다리를 붙인 앞에 나무판이 덧댄 것이 보인다.

 

 

라돌로프가 설명한 카탄스키 무덤의 예를 들어서, 투엑타 1호분에서 발견된 목제 테이블은 식탁의 용도로써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죽은 후에 장례식을 치르는 준비기간 동안 아직 죽은 이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는 동안 시간이 필요 했고, 이 때 사용된 것이라는 내용이다. 특히 이 유적에서 발견된 목제 쟁반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주 큰 유물이다.

 

 

 

그림 2. 투엑타 유적 1호분 출토, 나무 쟁반(1-61×80cm, 다리높이: 10cm, 2-64×82cm, 다리높이: 20cm), 잣나무로 만들어짐

 

 

 

 

이 무덤이 도굴로 인해서 유물이 훼손되었다고 해도, 이 유물의 위치는 발견되었을 당시 그대로 였을 것이다. 목제 테이블은 서쪽 벽에 붙어서 발견되었다. 용도는 목제 쟁반이 그 위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서 식탁일 가능성이 가장 많다. 그 상황이야 라돌로프, 루덴코가 말한 것과 같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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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 무덤에서 발견된 그리핀은 다양하다. 그중에서 독수리머리 그리핀은 알타이 지역의 특성화된 유물이다. 독수리 머리에 귀, 갈기, 벼슬을 붙였다. 여기에 맹수몸을 착장하고 날개를 붙이면 전신형이 된다. 이와 같은 독수리머리 그리핀은 이제까지 살펴보았던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 무덤에서 전부 출토되지만, 투엑타 유적에서 가장 먼저 보인다고 할 수 있다.

 

2020/07/1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투엑타 유적] - 2600년 전 하이브리드 동물문양

 

2600년 전 하이브리드 동물문양

2600년 전 시베리아의 가장 큰 무덤인 투엑타 유적 2호분에서는 여러 가지 말을 꾸미는 장식판이 있다. 말의 굴레에 다는 것이다(굴레에 대한 이해는 앞 선 포스팅). 2020/07/10 - [교과서 밖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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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투엑타 유적 1호분에는 독수리머리 그리핀과는 약간 다른 그리핀도 있다. 얼핏 보면 독수리머리 그리핀 같지만, 갈기가 없고, 머리의 벼슬과 귀, 부리가 부채꼴 모양으로 강조된 것으로 전체 평면형태는 ‘S’자이다(그림 1).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똑같은 그리핀 4개가 십자방향 혹은 꽃잎모양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 유물은 가죽으로 만든 아플리케 장식으로 안장 장식으로 알려졌다.

 

 

그림 1. 투엑타 유적 1호에서 출토된 그리핀 장식, 안장장식, 가죽, 9.2×9cm

 

 

그리핀은 독수리머리를 형상화 한 것은 맞지만 갈기를 표현하지 않았다. 물론 별 꺼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유물을 학자들이 주목하는 이유는 알타이 외에도 다른 지역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같은 유물은 아니지만 같은 구도라는 점과 그리핀 자체에 주목한다.

 

바르코바(1987)는 갈기가 없고 뿔과 귀만 강조된 그리핀은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에서 많이 등장한다고 보았다(그림 2~4).

 

 

 

그림 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2

 

그림 3. 표트르 1세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3

 

그림 4. 표트르 1세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4

 

 

그러나 이 개별 유물의 그리핀은 전체평면형태가 ‘S’형이고, 갈기가 없다는 점은 그림 1의 그리핀과 비슷하지만 표트르 1세의 유물에는 뿔이 없다. 그래서 바르코바의 의견을 그대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리핀이 다른 동물 주제와 결합되는 점은 별개의 문제로 생각하더라도.

 

그림 1의 구도와 같은 유물은 시베리아 투바에 있는 주제르긴그-호부주-1(Дужерлиг-Ховузу-I, Duzherlig-Khovuzu-I)(기원전 6~3세기) 유적 1호분(그림5)에서 출토된 황금 원판에 찍힌 표현물,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발견된 타가르 문화(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존재하는 문화)의 기원전 6세기 유물(그림 6-35,36)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유물들은 구도는 비슷하지만 형상화 된 동물은 다르다.

 

그림 5. 시베리아 투바에 위치한 주레르긴그-호부즈-1 유적 출토 황금제, 원판형 유물(가장 왼쪽)

 

그림 6.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분지. 타가르 문화의 유물

 

시베리아와 떨어져 있지만 투르크메니스탄 남부에 있는 무르가브 강의 하류에 위치한 콘쿠르(Гонкур,Gonkur) 유적에서는 돌을 새긴 도장(일종의 부적)이 발견되었다(그림 7). 한쪽에는 날개를 편 그리핀, 반대편에는 그리핀 4마리가 십자형 구도(그림 8)로 새겨진 것이다.

사리아디니(1976)는 이 유적이 기원전 10세기 이상 올라가기 때문에 십자형 구도의 그리핀은 중앙아시아에서 알타이로 전혀 졌을 것으로 보았다.

 

그림 7. 곤쿠르 유적의 도장 앞면, 석제

 

그림 8. 곤쿠르 유적의 도장 뒷면, 석제, 그림 8의 다른 면

 

하지만 이 유적이 워낙 오래전에 발굴된 유적이고 잘 보고되지 않아서 의심할 여지가 많다. 뿐만 아니라 실제 그리핀의 표현법도 많이 달라서 동의할 수 없다.

 

다만 십자형 구도의 유물이 알타이 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전 지역에서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어떤 경로 혹은 방법으로든 100%로 같지는 않지만 표트르 1세의 유물에 표현된 그리핀은 알타이 투엑타 1유적의 그리핀과 닮았다. 차이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Баркова Л.Л. 1987 : Образ орлиноголового грифона в искусстве древнего Алтая (по материалам Больших Алтайских курганов). // АСГЭ. [Вып.] 28. Л.: 1987. С. 5-29.(바르코바, 1987, 고대 알타아의 독수리머리 그리핀의  형태분석)

Членова Н.Л. Происхождение и ранняя история племён тагарской культуры. М.;Л., 1967.(츨레노바 1967, 타가르 문화의 기원)

Cарианиди В.И. Печати-амулеты мургабского стиля. — СА, 1976, №1.(사리아디니 1976, 무르가브 스타일의 도장부적)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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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6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바샤다르 무덤 1호에서는 미라가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구덩이가 깊지 않고 얼음층이 완전하게 형성되지 않아서 미라가 잘 보존되지 않아서 미라의 피부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두개골 뒤를 잘라내고 뇌를 꺼낸 흔적이 남아 있고, 뼈의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일종의 방부제를 주입했을 것으로 본다. 바샤다르 무덤 2호는 여성미라는 도굴꾼이 갈기갈기 찢어서 무덤방 여러 곳곳에 널려 있었고, 남성은 통째로 꺼내간 상황이어서 어떤 미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바샤다르 유적 보다도 100년 가량 늦은 파지릭 유적의 2호분과 5호분에서도 통나무관 안에 남녀의 미라가 함께 매장되었다. 파지릭 1호분도 도굴로 인해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말 10마리나 매장된 것을 보면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같은 시기로 파지릭 유적 보다 1000mrfid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3유적과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에서도 미라가 발견되었다. 전자는 여성, 후자는 남성이 각각 단독으로 묻혔다.

  아시다시피 아크 알라하 3유적은 현대인들은 얼음공주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고, 살아서는 샤먼이었다고 생각되는 여성의 무덤이다. 여성단독 무덤이 잘 없는 파지릭 문화(스키타이 문화 중 알타이 지역문화)에서 매우 특이한 혹은 특별한 유적이다.

 

2600년 전 바샤다르 유적과 아주 가까운 투엑타 강(현재 카툰 강)의 계곡에 위치한 투엑타 유적 1호분은 직경이 68m인 초대형 무덤이다. 누구의 무덤일까?

 

40~45세의 남성 단독무덤이다. 키가 178cm나 되는데, 미라로 처리되지 않았다(그림 1).

 

그림 1. 투엑타 유적 1호분의 남성 두개골(미라 아님)

 

투엑타 유적 1호분의 북쪽에 붙어 있는 2호분은 35세 가량의 여성 무덤이다. 이 여성은 키가 144cm정도로 작은 키이다. 투엑타 유적의 1호분과 2호분의 두개골로 살펴보면 유로포이드이다.

 

루덴코가 발굴한 무덤(파지릭, 바샤다르, 투엑타 유적)에서 인종구분은 형질인류학적인 분석이다(1947년, 1950년, 1954년의 발굴해서 1953년과 1960년에 연구결과를 내어놓았다.). 두개골 뿐만 아니라 중요한 판단 기준 중에 하나가 머리카락 형태와 피부 색이다. 파지릭 유적에서 확인되는 3호분과 5호분 여성, 2호분 여성은 유로포이드의 머리카락 형태와 피부색이었다. 머리카락은 매우 가늘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으로 어두운 갈색이었다. 그런데 파지릭 2호분과 5호분의 남성은 몽골로이드이다.

루덴코는 파지릭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몽골로이드와 유로포이드의 혼합 매장은 결혼에 의한 것과 전쟁으로 인한 인구 유입의 가능성을 이야기 했다. 예를 들면 어떤 그룹의 리더가 그들을 도와줄 알타이의 리더를 찾아서 가족 및 친척이 알타이로 숨어들어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파지릭 유적은 현재 살펴보고 있는 투엑타 유적 보다 100년 정도 늦다.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미라로 시신을 처리했으나 동시대의 투엑타 유적은 미라 처리를 하지 않았다. 투엑타 1호분이 가장 알타이 전체에서 가장 큰 무덤 무덤인데도 불구하고.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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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0년 전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사슴이 가죽, 청동, 뿔로 제작된 것이 확인되었다. 이미 살펴본 아크 알라하 3유적이나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사슴과 같은 우제류는 말을 꾸미는 장식으로 사용되었으나, 이 유적은 유물이 거의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남겨진 사슴문양들도 모두 조각이다. 말의 굴레장식은 간단한 원판을 기본 모티브로 한 것이 주로 남았는데, 필자는 그리핀과 호랑이의 추상적인 표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샤다르 유적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투엑타 유적에서 사실적인 동물문양장식과 함께 추상적인 표현물이 함께 출토되기 때문이다.

 

투엑타 유적에서는 사슴을 모티브로 한 굴레장식이 출토된다. 눈이 둥글고 귀와 뿔이 표현되었다. 뿔은 크지 않다. 사슴 머리 3개가 달려서 삼각구도를 이루는 사슴문양장식(그림 1-6), 머리가 2개를 이루는 문양 장식(그림 1-4,5)은 같은유적(1호분)에서 함께 출토된 초본류를 형상화한 장식판(그림 2)과 전체적인 구도? 스타일이 유사하다.

 

그림 1. 투엑타 유적 출토 굴레장식, 사슴문양

 

그림 2. 투엑타 유적 출토 굴레장식, 초본문양

 

투엑타 유적은 투엑타 강(현재 카툰 강)의 왼쪽 지류인 우르술 강의 계곡부에 위치한다(그리 3, 4). 1950년대에는 이 계곡에 무덤이 197개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덤은 등고선의 수직방향으로 열을 이루어 군집되었다. 가장 큰 고분은 유적에서 동쪽에 위치한다. 1호-68m, 3호-62m, 4호-48m, 6호-52m이고, 대형 무덤 옆에는 작은 무덤이 있다. 1954년에 루덴코는 1호와 2호를 발굴했는데, 1호는 루덴코가 알타이에서 발굴한 무덤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었다(그림 5).

 

그림 3. 투엑타 유적 1, 구글지도

 

그림 4. 투엑타 유적과 바샤다르 유적

 

www.google.com/maps/d/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지도는 아래 링크로 들어가면 볼 수 있다.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그림 5. 투엑타 유적의 평면도

 

1호는 지름이 68m, 높이는 4m로 초대형 무덤이다. 무덤을 덮은 돌은 대략 6000평방미터 가량이었는데, 돌을 덜어내기 위해서 트럭을 이용해서 돌을 옮겼다. 그림 5의 하단에는 당시 투엑타 마을이 표시되었는데, 도로가 표시되어 있다.

 

그림 6. 투엑타 유적의 전경 (1-대형고분 가운데 가장 남쪽의 3개 4,5,6호분, 2-무덤덮은 돌을 제거하는 광경, 사람을 보면 무덤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림 7. 1954년 투엑타 유적 발굴광경.

 

그런데 1950년 이전에도 이 유적은 이미 1935년 세르게예프와 1937년에 키셀레프가 발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자료는 발표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고분들이 도굴한 흔적이 많이 남았다. 특히 앞서 이야기 한 대형고분에 바로 인접한 무덤에 도굴흔적이 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덴코는 가장 큰 고분인 1호와 바로 북쪽에 붙어 있는 2호분을 발굴하기로 결정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본 가장 큰 무덤의 구조와 그 내부가 궁금했을 것이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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