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스키타이 문화에는 사람이 죽으면 미라로 처리하는 장례풍습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필자가 나름 자세하게 공개했지만, 이미 한국에서도 서울과 부산에 다녀간 적인 있는 시베리아의 ‘얼음공주’가 대표적이다. 그녀는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에서 확인되었다.

거의 훼손되지 않은 완벽한 모습으로 발굴되었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지게 되었다.

 

알타이에 미라가 있는 무덤이 있다는 사실은 그 이전에도 알려졌다. 1920년대 발굴된 파지릭 유적에서도 알려졌을테고, 아마 그 전에 도굴한 사람도 알았을 것이다. 러시아가 시베리아의 유물을 수집했을 그 당시인 17세기에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성한 미라는 그 존재가 귀했기 때문에 ‘얼음공주’는 공주라는 호칭까지 얻을 수 있었다.

 

루덴코는 도굴에 의해서 무덤이 큰 손상이 없다고 했지만,,, 내가 발굴자라도 그런말을 했을 것 같다.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도굴된 무덤의 모습..그 고생을 하면서 팠는데, 도굴당했다니.

나도 읽는 내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얼음공주에서 얻지 못하는 정보도 얻을 수 있다....에 만족? 혹은 불만인 상태이다.

 

파지릭 유적의 2호분은 여성과 남성이 모두 미라로 처리되었고 통나무관은 1개 뿐인 무덤이었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얼음공주 미라를 설명할 때 언급했지만 미라를 처리할 때 가장 큰 과제 중에 하나가 관절을 끊지 않는 것이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에 비해서 파지릭 2호분의 남성은 온몸에 절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관절을 손상시키지 않고 방부처리용액을 삽입하기 위해서 다리와 팔 안쪽을 따라 길고 얕게 절단을 했다. 그런 다음 말총으로 그 상처들을 꿰맸다.

 

엉덩이, 다리, 팔, 어깨에는 1cm가량의 구멍이 있었는데, 근육조직에 보존액을 주입했던 것으로 보이며 칼로 예리하게 절단되었다. 남성의 머리와 피부는 소량의 오일과 왁스가 혼입된 소지를 발랐다(바르코바 고흐만 2001).

머리의 두피는 다른 피부를 연결해 놓았는데, 도굴로 인해서 시신이 훼손되면서 오른쪽에서 왼쪽 귀로 이어 지는 부분만 남은 상태이다.

 

형질인류학적인 분석에 의하면 몽골로이드의 특징이고 키는 176cm, 체형이 매우 견고하고 탄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몸은 문신으로 덮여 있었으나 1947년에 발굴된 미라의 몸은 완벽하게 복원은 되지 못했다. 머리외에 팔과 다리만이 남아 있고 문신을 한 부분의 피부만이 남아 있다.

 

미라가 남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피부에 방부처리를 한 엠버링 처리도 중요했지만 무덤 아래에 형성된 영구동토층이 아니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이 파지릭 유적의 2호분 남성은 얼음에서 남성의 신체가 드러나자 말자 분해되기 시작했다. 연구와 보존을 위해서 문신이 있는 피부를 보존하기 위해서 피부만을 벗겨내었다.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손목까지 문신으로 덮여 있고 일부는 등에도 남아 있다. 왼 팔은 오른팔과는 달리 손목 약간 위에 까지 문신이 새겨져 있다(그림 1-1). 오른쪽 무릎아래에도 문신이 남아 있었으나 왼쪽 무릎 아래에는 없었다. 문신의 그림은 주로 상상의 동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이브리드 형 동물이다.

 

그림 1. 파지릭 2호분 출토 남성 미라(김재윤 편집)

 

우선 눈에 띄는 동물은 왼쪽 등의 견갑골에서 확인되는 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간 짐승(그림 1-2,6)이다. 뒷다리 및 길게 말려 올라간 꼬리만이 남아 있고, 머리는 없지만, 꼬리 모양과 발톱 등으로 보아서 호랑이 혹은 표범 종류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 팔에는 미라처리를 위해서 근육과 지방을 추출하기 위해서 사후 절단을 한 다음 힘줄과 함께 꿰매고 문신처리를 한 흔적이 남아 있다(그림 1-3). 이러한 예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오른쪽 팔뚝에 새겨진 문신(그림 1-1~)3은 발굽이 있는 동물이 다른 동물과 결합된 모습이다. 독수리의 머리, 새의 부리가 있고 뿔이 있는 환상의 동물이 그려져 있다. 발굽이 달린 그리핀의 이미지는 표트르의 시베리아 황금 컬렉션 뿐만 아니라 흑해 북안부터 시베리아, 중국동북지방까지 널리 퍼져 있던 문양특징이다.

 그리핀은 여러 동물이 다양하게 합성된 것이 확인된다. 파지릭 2호분 남성미라 오른쪽 팔(그림 1-2의 네모안)에 그려진 그리핀 가운데서 호랑이 몸체에 날개가 달린 그리핀은 같은 무덤에서 나온 말의 덮개 장식(그림 2)과도 비슷하다. 세부적인 표현은 다르지만 꼬리를 하늘로 들고 있고 발 모양, 입을 벌리고 있는 모습등이 그렇다. 

 

그런데 어제 필자는 파지릭 2호분 남성이 매장 당시에 손을 겹치고 있었을 것이라는 루덴코(1953)의 설명을 그대로 전한바 있다. 그 근거는 파지릭 5호분의 남성이었다. 그러나 파지릭 2호분의 남성이 죽은 후에 미라 절개 후에 문신을 처리했다면 이는 불가능하다. 위의 그림대로 팔은 양팔을 뻗은 모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 루덴코는 이 부분을 놓친 듯 하다. 루덴코가 5호분 남성과 많은 연관을 시킨 이유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는데, 차차 설명하기로 한다.

 

그림 2. 파지릭 2호분 출토 안장덮개

 

 

그림 3.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얼음공주)

 

우코크 고원의 여성미라와 비교해 보면, 파지릭 2호분의 미라는 훨씬 넓은 범위에 그림이 그려졌다. 양쪽 가슴과 등에도 문양이 있으며, 무릎 아래에도 그림이 있다. 여성미라에는 가슴에는 그림이 없고, 이 남성처럼 온몸에 절개가 남지도 않다. 특히 파지릭 2호분의 남성미라는 복부에 절개가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피부 밑의 지방을 제거하기 위한 흔적으로 생각된다. 여성미라에게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남성의 등에는 가운데 척추를 따라서 작은 구멍이 2줄로 왼쪽에는 11개, 오른쪽에는 3개 있다(그림 1-8의 척추). 이 구멍은 남성이 살아생전에 의료 목적으로 치료를 한 흔적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바르코바, 고흐만 2001, Баркова Л.Л., Гохман И.И. 2001 : Ещё раз о мумиях человека из Пазырыкских курганов. // АСГЭ. [Вып.] 35. СПб: 2001. С. 78-90(바르코바, 고흐만 2001, 파지릭 유적의 미라인간에 대해서 다시 한번)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오늘 부터는 우코크 고원을 떠나서 파지릭 계곡의 스키타이 무덤 유적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스키타이 문화 가운데서 알타이 산맥에 위치한 문화를 ‘파지릭’이라고 붙인다. ‘파지릭문화’라고 한다. 이러한 이름을 얻게 된 이유가 파지릭 유적의 무덤 덕분이다.

 

알타이 산맥에는 특히 우슬라Урсула, Ursula 강의 왼쪽 지류인 카툰Катуни, Katun 강 유역과 아르구트Аргут, Argut, 추이Чуи, Chui 강 유역에는 강을 따라서 산악초원지대가 형성되어 있는데, 아주 많은 고분이 존재한다. 파지릭 지역은 투바 자치구와 접해 있는 알타이 동부의 추리시만Чулышман, Chulyshman 강을 끼고 있는 계곡이다.

 

파지릭 유적은 우코크 고원에서 북서쪽으로 직선거리 110km 가량 떨어진 곳에 파지릭계곡이 위치한다(그림2). 해발고도 1400m가량이다. 2500m 였던 우코크 고원보다는 훨씬 낮다. 파지릭 계곡에는 영구동토층이 연속분포하는 구역의 외부에 대형 고분이 있다.

 

무덤을 만드는 데 사용된 수백그루의 나무는 낙엽종(자작나무)이 주를 이루었고 가문비나무도 약간 있었다. 그런데 해발 1500m에서는 자작나무가 자라지 않고, 인접한 바시카우스(Башкаус)강과 추리시만(Чулышман)강에서 자작나무가 자란다(그림2).

자작나무를 사용했기 때문에 무덤이 발견될 당시에 봉분의 상부가 내려 앉아서 봉분의 가장 꼭대기는 움푹들어가거나 편평하다. 현재 파지릭 고분의 주변에 자라는 나무는 대부분 가문비 나무이다. 

 

 

 

그림 1. 위의 사진은  파지릭 계곡의 무덤 전경(발굴당시 찍은 사진), 아래 사진은 1호를 발굴하는 장면이다.  위의 사진은 정확하게 몇 호를 찍은 사진인지는 표기되지 않았다. 루덴코가 발굴하기 시작한 것은 1947년 2호부터이다. 1호는 1929년 그랴즈노프가 발굴했는데, 이 사진은 루덴코가 찍은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래 사진이 1929년에 찍힌 것인지 1947년에 2호 발굴당시에 그랴즈노프가 발굴한 1호를 찍은 것인지는 정확치 않다. 하지만 1호라고 표시되어 있다. 요즘같으면 무덤의 돌을 다 걷어내었겠으나, 어쨋든 무덤 최상부에서 무덤방으로 곧장 들어가서 발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시베리아, 알타이라고 하면 아주 춥다. 인간이 살기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알타이 산을 이루는 굽이굽이 계곡에는 초원지역이 형성되어 있는데, 산악초원(그림 1-1)이라고 한다. 일종의 높은 곳에 있는 분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된다. 특히 알타이 산맥의 초목에는 많은 양의 염분이 함유되어 방목해서 키우는 동물의 성장과 발달에 유리하다.

동물은 염분이 없으면 살이 찌지 않는다. 

 

 

 

 

그림 2. 파지릭 고분의 위치(×). 나뭇잎 그림은 파지릭 유적에 사용된 자작나무를 구해온 바시카우스 강과 추리시만 강의 위치이다. 붉은색 점은 우코크 고원의 위치이다. 아래 구글 지도를 보시면 파지릭 고분이 있는 곳에 사진이 있는데, 해발 2300m이상에서 자라는 가문비나무이다.

 

 

이 계곡의 고분은 모두 40여기 정도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 대형 고분 5기에는 1~5호의 번호를 붙였다. 북쪽의 2기는 3호와 4호, 가장 남쪽에는 5호, 중앙에는 1호와 2호가 위치한다. 그 외에 번호가 붙은 것은 9기로 6~14호까지 번호 있는 무덤이 있다. 번호를 매기지 않은 고분은 외형은 고분이지만 제일 상층에 돌이 돌아가는 것 외에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이미 1924년에 알려졌기 때문에 더 이상 파지 않았다. 이 외에도 알타이 산맥에는 봉분(표토층 위로 올라온 무덤상부구조)는 있으나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림 2. 파지릭계곡의 무덤분포도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 가운데서 우코크 고원 속에 있는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을 살펴보았다. 이미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 대해서는 설명했는데, 2구의 남성이 확인되었다. 1명은 45~50세 정도의 남성이었고, 다른 한명은 15세 정도의 소년으로 2호분의 8세 소년 보다는 나이가 많은 남성의 무덤이었다.

 

지금 설명하고 있는 2호분이 먼저 설명한 1호분 좀 더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다. 어디서 그럴 정황이 드러날까? 그냥 2호분 소년의 나이가 어려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요구된다.

 

앞에서 2호분 적석(돌을 쌓은 모습)이 처음 드러난 모습을 공개한 적이 있다. (앞선 포스팅에서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ㅋㅋ)

거기에 힌트가 있다.

포스팅을 보시면 오른쪽 아래에 1호분의 무덤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적석이 놓인 모양이 2호분이 1호분을 덮고 있는 것이다. 즉 현재 설명하는 2호분이 더 나중에 생겼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소년은 1호분과 친족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 비교적 높은 계급의 소년이었을 것이다.

8세 소년이었지만, 어른 무덤에 부장되는 것은 대부분 있었다. 말은 1마리만 부장되었으나 어찌되었던 있었고, 동검, 투부, 화살촉 등 소년의 크기로 축소 시켜서 부장한 점도 이를 반증한다. 1호분의 남성무덤과의 관련성은 비슷하게 생긴 고깔모자, 목걸이, 귀걸이 뿐만 아니라 동물문양버클장식도 이를 대변한다. 동물문양버클장식은 부서져서 반만 남아 있지만 꼬리가 긴 동물이다.

 

 

 

그림 1. 파지릭 유적 4호분에서 출토된 말의 굴레에 매달던 호랑이 장식품(4,5,6), 1,7-말의 재갈멈치, 2,3-말머리 장식(당호). 목제품.

 

 

그림 2. 에르미타주 소장, 시베리아 콜렉션, 표범. 펜던트의 버클, 금제품

 

 

 

그림 3. 영국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문화의 청동제 버클, 그리핀(우)과 호랑이(좌)의 싸우는 장면.

 

 

현재 설명하고 있는 유적의 유물은 아니지만 스키타이 문화에서 형상화 된 꼬리가 긴 동물은 호랑이(그림1) 혹은 표범(그림 2), 그리핀이 있다. 꼬리가 긴 그리핀(그림 3)은 몸이 새가 아닌 육식동물의 몸통에 새 날개가 부착된 것이 있다. 그렇다면 소년의 허리띠 버클 장식도 그 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있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 시베리아의 스키타이문화권에서도 알타이 지역에 위치한 파지릭문화의 한 유적인 아크 알라하 1유적 2호분은 8세 소년의 무덤이다. 고깔모자, 토기, 금제 귀걸이, 청동 목걸이, 투부(전투용도끼), 모피, 칼집과 청동칼, 화살촉, 목기등이 소년과 함께 묻혔다.

그 중 목기는 남아있지는 않지만 양뼈조각이 있었고, 다른 유적들의 예로 보아서 목기 위에 고기덩어리가 올려진 장면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여성미라, 일명 얼음공주의 무덤에서도 뿔, 나무, 흙으로 만든 그릇이 확인되었다.

 

2020/01/1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미라'의 무덤] - 2500년 전 여성미라 무덤의 뿔, 나무, 흙 그릇

 

2500년 전 여성미라 무덤의 뿔, 나무, 흙 그릇

투르크-몽골 계통의 민족들에게는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특별한 그릇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반적인 그릇에 특별한 음식과 음료를 담았다고 한다. 야쿠트인들은 신에게 거대한 가죽조끼, 목제 잔, 우유를 담..

eastsearoad.tistory.com

 

그런데 이 유적에는 없지만, 이 유적이 속한 파지릭 문화에는 금속으로 만든 그릇도 있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솥이다. 바닥에는 솥을 지지하기 위한 높임 다리가 있으며, 양 쪽에는 손잡이가 있고 자작나무 껍질이 감긴 채로 확인되었다. 안에는 돌이 들어 있었다. 함께 출토된 막대기가 6개(1.2m 가량) 있었다.

 

 

이 솥과 막대기는 같은 공간에서 출토되어서 세트이다. 무슨 용도로 사용되었을까?

솥은 금이 가 있고, 솥 안에는 탄화된 대마씨가 발견되었다. 금이 간 이유는 뜨거운 돌의 열기에 의했을 가능성이 많고, 대마씨가 탄화된 것도 돌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러시아 연구자들의 생각이 맞다면, 청동솥과 막대기는 대마씨에 나오는 연기 흡입용이다.

6개의 막대기를 묶고 그 위를 펠트로 씌우면 일종의 텐트가 된다. 그 텐트 안에서 청동솥에 달군 돌을 넣고, 대마씨앗을 뿌려서 그 향을 맡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탄화된 대마씨가 가득 들어간 가죽주머니도 같은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에 기록된 스키타이 부족에 대한 내용은 러시아학계에서는 아주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러다가 이 유물이 발굴된 후에 약간 시각이 바뀌었는데, 그가 설명한 스키타이 인의 정화의식에 대한 내용 중에 이 부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헤로도투스가 74~75절에 썼는데, 여기까지만 보면 위의 유물과 일치해서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대한 신빙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헤로도투스는 마지막에 스키타이 사람들의 정화의식을 그리스의 증기욕과 관련시켰다(그리스, 로마 사회의 목욕문화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무덤을 발굴한 루덴코(1953)는 직접 반박했다. 헤로도투스의 내용과 이 유물이 연기흡입과 관련된 건 가능성이 있지만, 그리스의 목욕문화와는 헤로도투스의 착각이라고.

청동솥 위에 뿌려진 대마씨 때문에 연기가 나는 건 사실이지만 그 의미가 그리스 증기욕과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유물은 알타이 산맥의 파지릭 유적 2호분에서 출토되었고, 루덴코는 그 유적의 2호분을 직접발굴한 사람이다.

파지릭 2호분에서 나온 청동솥과 막대기 6개는 용도는 명료해진 것도 있지만 문제가 복잡해지게 된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왜냐하면 헤로도투스가 본 스키타이 인이라는 사람이 그리스와 인접한 흑해 북안이라는 주장이 팽배했는데, 그가 설명한 부분이 알타이 산맥의 유적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청동솥과 막대기, 가죽주머니 안의 탄화된 대마씨는 의료용일지 모른다. 지금도 마약은 의료용으로 사용된다. 스키타이 인들은 죽은 사람의 내장을 걷어내고 미라를 만들던 기술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파지릭 유적 2호분에는 미라가 2구 확인되었다.

 

 

그림1. 파지릭 유적 2호분 출토(높이 13.8cm, 동최대경 9.8cm), 청동솥(2)과 막대기(3), 손잡이는 자작나무 껍질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의 시베리아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을 잊어버리신 건 아니지요?

 

이 무덤에는 무덤방 속에 2개의 관이 있었고 소년과 지금의 기준으로 하면 중년인 남성이 각각 묻혔다. 소년의 관에는 목제칼이 있다고는 했는데, 앞서 살펴본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무덤에서 출토된 금속제 칼은 확인되지 않았다. 중년 남성의 관에도 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앞에서 살펴본 2.5cm크기의 황금 장식판에도 칼을 차고 있는 전사를 표현할 정도인데...

그리고 스키타이문화권이라고 불리는 각 지역의 스키타이문화를 아우르는 공통적인 요소 중에 하나가 무기라고 했다.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출토 청동칼

 

그런데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바로 옆에는 2호분이 있다. 앞으로 설명하겠지만, 이 무덤속에는 철제칼이 아닌 청동제 칼이 확인되었다. 시신의 오른쪽 대퇴골 근처에는 17.5cm의 단검(짧은 검)이 칼집속에 든 채로 확인되었다(그림 1,2). 청동제 칼이다. 칼집은 한쪽면은 목제이고, 다른면은 가죽제였다. 목제로 남은 면이 바깥이었는데, 원형의 단추가 3점 달려 있었다. 칼집의 반대편은 두터운 가죽으로 제작되었고 동그란 목제 단추가 칼의 뾰족한 부분과 가까운 부분에 붙어 있다.

 

청동칼은 손잡이와 검신이 한몸으로 제작된 것으로, 손잡이 끝에는 아무런 장식이 붙어 있지 않고 손잡이 부분에만 홈이 있다. 칼의 중앙에는 칼의 끝부터 손잡이가 시작되는 부분까지 능이 서 있는 모습이다(그림 2-2).

 

그림 2.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출토 청동칼, 그림1과 같음

 

검집에 검이 들어가 있는 상태(그림 2-3)로 확인되었기 때문에 잘 알 수 있는 점이 있다.

검이 외부에 노출되는 부분은 날이 아니라 손잡이이다. 따라서 검에 어떤 장식적 요소를 더한다면 검의 손잡이에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이를 잘 알 수 있는 유물이 그림 3의 유물이다. 알타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그림3. 알타이에서 출토된 청동칼, 손잡이에 그리핀이 부착되었다. 검코에도 기하학적인 동물문양장식이 표현되었다.

 

그런데 동물문양장식이 부착된 청동칼은 알타이 지역 뿐만 아니라 타가르문화에서 많이 알려졌다. 타가르 문화는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알타이 산이 아닌 시베리아의 미누신스크 분지에 알려진 문화이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은 스키타이문화(권) 중에서도 알타이 산에서 확인되는 파지릭문화에 해당된다. 타가르 문화는 대체로 기원전 8~7세기 정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타이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비교적(상대적으로) 가깝다. 스키타이문화권에서 지역문화로 생각하시면 된다.

 

타가르 문화에서 청동검(그림4)은 전체적인 청동칼의 모습은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출토품과 유사하지만, 손잡이를 많이 꾸민 청동검이 확인된다.

검을 잡은 부분과 검의 코 및 그 끝을 동물문양장식으로 장식되었다.

 

그림4. 미누신스크 분지 출토, 타가르 문화의 청동칼, 기원전 6~5세기

 

그림4의 유물은 손잡이 끝이 그리핀이 서로 마주보도록 설계되었다. 그리핀의 부리가 휘어져서 특히 윗부분이 아래부분을 감싸고 있다. 손잡이가 시작되는 부분인 검 코에는 늑대가 표현되었다. 두 마리가 서로 대칭으로 있다. 다리 사이에 꼬리를 감춘 채 이마를 맞대고 있다. 손잡이 부분에는 중앙에 홈이 손잡이 방향으로 깊게 파져 있다. 길이는 26cm이다. 검날의 중앙에 능이 확실하게 서 있다.

 

동물문양장식에는 마구, 장신구, 무기 등 이곳저곳에 모두 응용되었다.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