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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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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시베리아에서는 무덤속에 사람 뿐만 아니라 말도 함께 매장했다. 이런 무덤이 확인되는 곳은 해발 1500m의 파지릭 계곡, 2500m의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다. 전자에는 파지릭 유적, 후자에는 이미 설명드린 바 있는 아크 알라하 3유적과 아크 알라하 1유적이 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은 남자아이의 무덤인데도 말이 부장되었다. 유목을 기본으로 하는 생업환경에서 동물은 그들의 재산이자, 문화 전반에 동물에 대한 표식이 남아 있다.

 

파지릭 5호분의 무덤구덩이 북쪽에는 말은 9마리 매장되었다. 9마리 가운데서 1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재갈을 비롯한 굴레, 안장, 머리장식을 착장했다. 말은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가장 아래에서 확인된 IX번 말이 머리장식까지 있어서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무덤안에 4륜 마차가 함께 매장되었고 이를 끌던 말이라고 생각하면, IX번 말은 가장 선두였을 가능성이 크다.

 

무덤구덩이는 기본적으로 무덤방을 설치한 후 남는 공간을 이용해서 매우 좁다. 말 9마리와 마차를 부장하기 위해서 층층이 쌓아서 넣었다. 무덤방의 바깥에 무덤위의 돌을 지지하기 위해서 수직으로 세운 세 개의 기둥이 기준이 된다. 무덤구덩이의 북쪽에서 동쪽 절반은 세 마리 말이 머리 방향이 동과 서로 교차되게 해서 묻혔다. 가장 아래의 말은 IX번 말로 머리방향이 서쪽을 향하고 배는 바닥에 깔고 있고, 그 위에는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등을 아래말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다시 그 위의 말은 머리가 서쪽으로 향하고 등을 아래로 향하도록 배치되었다. 기둥 뒤에는 동쪽을 향하고 있는 IV번 말만 넣었다. 기둥을 넘어선 서쪽에는 말 3마리가 쌓였는데, 가장 아래의 VIII번 말은 배를 바닥에 깔고 서쪽으로 향하고 있으며, 그 위의 말은 등을 바닥쪽으로 향하고, 머리는 동향이다. 말 위에는 마차가 분해한 채로 부장했고, 그 남은 공간인 가장 서쪽에 말 2마리가 서로 머리를 다른 방향으로 해서 부장되었다. 위에 있는 말은 말 머리가 무덤구덩이의 입구로 향하고 등이 하늘로 보도록 하는 자세이다.

 

말은 매장할 때 관의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매장된다(그림 1, 그림2). 관의 방향이 동서방향이면, 말도 동서방향이다. 파지릭 유적에서 통나무관은 모두 동서방향이고, 사람의 두향은 동향이다. 5호를 제외하고는 말의 머리장식이 있는 다른 무덤의 말은 모두 동향을 향하고 있다. 1~3호분에서는 말 머리 장식이 2개체분 출토되었고, 4호와 5호는 하나씩만 출토되었다. 그러나 5호는 앞에서 설명했듯이 말 머리 장식이 있는 IX번 말의 두향은 서향이다.

 

파지릭 유적에서는 말과 인간의 두향에서 규칙성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루덴코의 설명은 관이 동서방향인데, 말이 남북방향으로 매장되지 않는 것이다(그림 1, 2).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말의 두향이 모두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루덴코가 상트페테르부르그 출신이고 유럽인이어서, 동양인과는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과학적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필자는 자는 방향을 바꾸거나 스트레스가 심한 날은 꿈을 심하게 꾼다. 모든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만 특히 자는 방향을 바꾸면 더 심해진다.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른다. 그런데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그 옛날에도 있었을 테고, 두향에 대한 관념도 정해져 있었을 텐데....이런 부분은 알 수 없다.

 

 

     말 번호->

말 장식

I

II

III

IV

V

VI

VII

VIII

IX

재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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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레

 

 

 

 

 

안장

 

 

 

 

 

머리장식

 

 

 

 

 

 

 

 

표1. 파지릭 5호분의 말 장식(김재윤 편집)

 

위의 표는 루덴코의 서술에 따라서 말과 관련된 마구를 표로 만들었다. 의문점은 말을 부릴 때 가장 핵심인 재갈에 대한 설명이 애매하다. 애매한 부분은 물음표로 표현했다.

 

그림1. 파지릭 5호분의 무덤구덩이 내부

 

 

그림2. 파지릭 5호분의 무덤 구덩이 단면도

 

그런데 우리나라의 고고학 환경에서는 무덤의 두향방향은 거의 연구되지 않는다. 전 시대는 아니고 선사시대가 특히 그렇다. 왜냐하면 토양특성상 인골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몇 몇 특수한 환경을 제외하고는...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그림 1.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안장, 안장덮개와 크루퍼

 

그림 2.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안장머리 부분. 그림1의 상세사진.

 

2500년 전 시베리아 파지릭 유적 5호분에는 말이 9마리 사람 2인과 함께 매장되었다. 2인 중에서 누구의 안장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장과 안장덮개이다(안장은 4개 출토되었다). 가죽으로 제작되었으며 사슴털을 이용해서 꿰매었다. 안장의 앉는 부분에는 중간에 건초를 넣어서 푹신하게 했다. 앞면인 안장머리 부분과 뒷면에 2개의 타원형 지지대(그림2)가 있고, 무릎 혹은 엉덩이쪽으로 패널이 붙어져 있다.

지지대에는 사슴이 몸을 뒤튀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그 중앙에 패널도 부착되었다. 패널에는 그리핀 혹은 맹수의 머리가 새겨져 있다(그림 3-3~5).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새겨졌는데, 맹수인지, 새의 얼굴에 맹수가 조합된 것인지는 구분이 힘들다. 패널은 4개(그림1) 모두 맹수 혹은 그리핀머리가 새겨져 있고, 엉덩이의 크루퍼와 연결된 패널에도 끝 부분의 장식(그림 3-7)도 같은 장식이다. 안장의 지지대 위에도 호랑이의 머리조각이 각각 5마리씩 안장머리에 10마리(그림 3-6)부착되었다. 안장뒷부분에는 정확하지 않지만 머리조각을 그림 1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림 3.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안장의 부속품

 

스키타이 문화의 안장은 단단한 프레임과 포멜은 없었지만 오늘날 안장의 모든 요소가 이미 다 있다. 땀을 흡수하는 역할을 하는 안장덮개, 고삐끈, 복대, 등자쇠, 가슴밴드, 크루퍼까지 모두 다 있다. 크루퍼는 안장 뒷부분과 말 꼬리를 연결하는 스트랩이다.

크루퍼는 한국어로는 번역이 되지 않는다. 아래의 위키페디아에서 현대 크루퍼를 보시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림 1에서 안장의 뒷 부분에서 패널과 연결된 U자모양의 끈이 크루퍼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Crupper

 

이 안장은 지지대가 낮은 편이다. 그림 1을 자세히 보시면 안장을 덮은 붉은색 가죽이 있다. 가죽에는 아플리케 장식이 붙어 있다. 이 부분은 안장덮개로 땀을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사슴가죽이고, 말총을 이용해서 덧 붙인 것이다. 이 안장덮개는 얇은 끈으로 안장과 연결되어 있다.

안장덮개에 덧 붙인 정사각형의 패널은 사슴가죽을 말총으로 이어 붙인 것이다. 땀을 흡수하기 위한 천은 안장의 안쪽에 부착되었다. 그 위에는 파란색털과 광택이 나는 붉은색 삼각형, 긴 네모꼴의 가죽 아플리케를 덧붙인 것이다. 원형의 금빛 나는 못이 아플리케를 고정시키는 역할도 한다. 붉은 정사각형에는 4개의 꽃잎과 1개의 원형 못이 박혀서 꽃모양으로 덮고 있다.

 

이 유적은 기원전 5세기 가량이지만, 스키타이문화에서 말안장은 기원전 7세기 가량부터 확인된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사진은 좀 그렇습니다..내용상.....

 

 

2500년 전 알타이의 파지릭 유적 5호분에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하나의 통나무관에 매장되었다. 2호분에서도 같은 현상이 확인되었다. 2호분은 40대 가량의 여성과 55~60세 가량의 남성이었다. 골격의 특징으로 보아서 몽골로이드로 판명되었다. 요즘 같으면 DNA분석법을 썻겠지만, 1947년에 발굴하고, 1953년에 나온 단행본에서는 형질인류학적인 분석에 의존했다.

 

5호분의 남성은 대략 55세 가량이다. 그런데 2호분의 남성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고 한다. 머리크기는 중간정도인데(두개골 계측치 78), 이마는 높고 길고 턱이 돌출되었다. 광대뼈는 넓은 편인데, 그렇게 돌출되지는 않았다.(광대뼈 사이의 직경은 146mm)이다. 코는 길고 좁으며(32×54mm) 강하게 돌출되었다. 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니아 강 사이가 민족의 기원지로 밝혀진 오늘날 카자흐인과 키르기즈스탄 인의 얼굴 가운데서 비슷한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이 남성의 키는 175~176cm이다. 이 남성의 머리색은 검고 약간 곱슬기가 있는 편이다.

5호분의 여성에 대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고, 미라처리에 관한 부분만 남아 있다.

 

그림 1. 파지릭 5호분에서 통나무관에서 확인된 남성의 모습

 

 

5호분의 남성은 미라처리를 했으나, 2호분의 미라와는 다르다고 했다. 어떤 점이 다를까?

 

미라처리를 했다는 말은 두개골의 뇌를 제거했고, 신체에서도 근육과 장기등을 제거한 흔적이 남아 있다.

남성의 두개골 뒤쪽에는 정수리에서 약간 왼쪽을 통해서 뼈를 잘라내었다. 11cm가량으로 꿰맨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남성의 뒷면은 목 아래 3cm 척추까지 세로 절개선이 남아 있다. 이 절개면은 어깨를 가로지르는 절개면과 교차된다. 어깨부위의 절개면은 5cm간격으로 꿰매었다. 목 부위의 절개면은 어깨면을 묶은 끈 보다 가는 끈을 이용했다(그림 2).

몸에는 겨드랑이에서 갈비뼈까지 절개한 흔적이 있는데, 말총으로 꿰맨 흔적이 선명하다. 남성과 여성 모두의 신체에 절개흔적이 남아 있고 말총으로 꿰매었다. 가슴의 피부는 겨드랑이 부분에서부터 여섯 번째 갈비뼈까지 찢어진 상태이다. 흉부의 절개면 9cm아래에서부터 복부 절개가 시작되는데, 배꼽 오른쪽에서부터 시작해서 사타구니까지 남아 있다. 배꼽 옆에는 2~3cm가량의 작은 절개면이 있다(그림3).

팔의 절개면은 겨드랑이 안쪽에서부터 팔꿈치 안쪽까지 있다. 손과 손가락 바깥쪽에도 절개면이 남아 있다. 손근처와 팔뚝 바깥쪽에 길이 4~5cm가량의 절개면이 남아 있다. 남성의 오른손의 중지와 남성의 성기를 관통해서 실로 묶였다.

하반부의 천골 안쪽 가장자리로부터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까지 절개면이 연결된다. 무릎 뒤에만 3~4cm 간격이 남아 있다. 발목뼈에서 둘째 발가락까지 이어지는 절개면이 있다.

남성의 몸에 있는 절개면은 모두 말총꼬리를 사용했는데, 손가락을 고정시키는 부분에만 양털을 이용했다.

 

그림 2. 파지릭 5호분의 남성 두개골 뒷모습

 

그림 3. 파지릭 5호분 남성의 전신

 

 

여성은 엠블링하는 방법이 약간 달랐는데, 두개골은 측두골과 두정골 사이의 왼쪽에 남아 있는데, 절개면은 꿰매져 있었다(그림 4). 후두부에는 오래전에 만들어진 2개의 절개면(4cm, 10cm)이 남아 있다. 오른쪽 관자놀이의 귀 앞과 왼쪽 뺨에도 절개면이 남아 있었다. 오른쪽 목과 쇄골에는 반원형으로 절개되었다.

몸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가슴 양쪽 겨드랑이에서 유두부위까지 절개면이 남아 있다. 흉부의 가장 아래쪽에는 오른쪽 배꼽과 장골 뼈를 통과하는 절개면이 있는데, 치골과 대퇴골 사이의 허벅지 안쪽에서 마무리 되었다. 팔에는 남성과 마찬가지로 겨드랑이에서 손까지 절개면이 잇는데, 팔꿈치 뒤에서만 남아 있지 않았다. 손에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절개면이 남아 있다. 왼손과 오른손을 교차한 모습이다(그림 5). 

여성의 등에는 남자와 마찬가지로 양쪽 어깨에 절개면이 있고, 목과 척추에 세로의 절개가 있다. 목에는 절개면이 10cm, 척추에는 6~7cm가량이다. 왼쪽과 오른쪽 천 골 아래에서 다리까지 무릎 부위 4~5cm정도만 제외하고는 절개되었다. 왼쪽 다리에는 절개면이 하나 더 있다.

 

그림 4. 파지릭 5호분의 여성 뒷모습

 

 

그림5 . 파지릭 5호분의 여성미라

 

파지릭 2호분의 미라와 다른 점은 파지릭 5호분의 남성은 근육을 모두 제거 했지만, 2호분은 그렇지 않았다. 여성과 남성 모두 절개면을 말총으로 꿰매었다. 남성의 손을 묶는 부분만 양모를 사용했다. 미라의 처리를 할 때 꿰맨 흔적을 말총으로 하는 것은 같은 시기의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일명 얼음공주)도 마찬가지였다.

 

루덴코는 절개를 하고 근육을 제거한 것은 방부제를 바르기 위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바르코바의 연구에 따르면 파지릭의 미라 피부와 머리에는 송진과 밀랍을 사용했는데, 송진은 특히 열대지역에서 자라는 다마르(dammar)와 셀라크(shellac) 라는 것이 밝혀졌다(바르코바,  고흐만 2001). 미라 처리할 때 쓴 발삼 물질이 밝힘으로써 교류지역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폴로스막은 더 낮은 계급의 사람들로 중국과 접하면서 살던 사람들은 발삼을 대신 다른 물질을 이용했다고 한다.

 

파지릭 5호분에서 확인되는 남성와 여성미라의 몸의 수많은 절개면은 근육제거를 위한 것도 있지만 피하지방을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클 수도 있다. 가장먼저 부패가 시작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루덴코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바르코바, 고흐만 2001 Баркова Л.Л., Гохман И.И. 2001 : Ещё раз о мумиях человека из Пазырыкских курганов. // АСГЭ. [Вып.] 35. СПб: 2001. С. 78-90.(바르코바, 고흐만 2001, 파지릭 고분의 미라에 대해서 다시 한번 더)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의 알타이 산 중에서도 해발 높이 1500m가량의 파지릭 고원에는 2500년 전 스키타이 시대에 살던 사람이 묻힌 무덤이 있다. 유라시아를 횡단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을 공통적으로 묶는 일종의 상징 같은 것이 있는데 무기, 마구, 동물문양장식이다. 스키타이 3요소라고 한다. 그런데 동물문양장식은 깍두기 같다. 단독으로도 확인되기도 하지만 주로 무기나 마구에 장식물로 달리기도 하고, 옷, 안장덮개, 방울, 거울, 목걸이 등 다양한 곳에 표현된다. 스키타이 문화권은 흑해북안, 쿠반 지역(코카스서 산맥, 지금의 그루지아), 카자흐스탄, 알타이, 미누신스크 분지 등에서 나타난다. 이 지역을 아울러서 스키타이문화권이라고 한다.

 

2020/02/1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1유적] -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그림 1.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전체 모습은 앞의 포스팅 참고 그림 2.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말탄 스키타이 전사의 모습, 투구는 코린트 식 그림 3.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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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포스팅에서 스키타이 문화권의 표를 소개한 바 있다.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불리는 부분은 포스팅에 표시해 두었고, 아래표는 혹시나 제공해 드린다..

 

 

지도. 스키타이 문화권의 분포범위, 위 포스팅의 표와 비교해 보시면 재미있으실 것이다. 필자는 표를 지도로 인식한다.

 

물론 모든 지역의 문화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그들 문화에서 공통적인 요소가 있어서 문화권이라고 한 것이다. 비슷한 요소가 나타나는 이유는 서로 ‘contact’ 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SNS가 없으니 비대면 접촉이 아닌 대면 접촉이었다. 혹은 실제로 만난적은 없지만 전해 들은 사람들이 또 비슷한 유물을 생산하기도 했을 것이다. 생각보다 인간의 활동영역은 매우 넓었다.(우리는 남북이 끊겨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섬으로 여기면서 생각이 닫히는 경우가 많다.)

 

파지릭 고원의 파지릭 유적에는 5호 무덤에서는 4바퀴 마차가 함께 부장되었다. 아마도? 유라시아를 돌아다녔겠지? 알타이 산에서 어떻게?

알타이 산맥은 높지만 바위산 마다 교통로가 있다. 그 곳에서 암각화가 많이 발견된다.

 

 

아뭏튼 파지릭 5호분에는 마차가 매장되었으니 그 규모가 상당히 크다.

 

 

그림 1. 파지릭 5호분의 평면도

 

무덤의 상부 직경이 42m, 높이가 3.75m가량 된다. 5호에는 무덤의 상부를 덮은 돌에서 연접한 남쪽에 둥근 원형으로 돌이 둘러있는 것이 확인된다.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돌 무지의 직경은 3.5m~5.7m이고 간격이다. 이러한 현상은 투엑타 유적에서 확인된다.

 

무덤방의 크기는 8.25×6.65m이고, 무덤바닥은 땅의 표면 기준으로 4m가량이다(그림1).

 

그림 2. 파지릭 5호분에서 출토된 양탄자의 아플리케 장식.

 

 

 

 

참고문헌

 

Золотые олени Евразии.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в Гос. Эрмитаже, СПб, 18 октября 2001 года — 20 января 2002 года. СПб: «Славия». 2001. 248 с. (에르미타주 국가박물관 특별전 도록, 유라시아의 황금 사슴, 2001)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러시아의 상트페트르부르그 시에 위치한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근현대 유명화가의 그림부터 시베리아의 구석기시대 유물까지 없는게 없어서 ‘박물관’이라는 뜻이 딱 맞는 곳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건물 자체가 표트르 때부터 사용되었던 겨울 궁전이다. 건물부터 내부에 든 유물까지 전부 인간이 남겨놓은 그 모든 것이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유명한 그림들이 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지하까지 내려가면 고고유물이 있다. 지하에는 주로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의 유물이 많다..‘많다’라는 말로 전달이 안된다. 너무 피곤하다. 너무 많아서...

 

그중에서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차르로 여겨지는 표트르 1세가 수집한 시베리아의 황금 유물 컬렉션은 가장 화려한 방에 배치되어 있다...(그래서 사진이 잘 안나온다..벽에다가 붉은색 카펫을 달아서 유물을 매달아 놓았는데....사진이 죄다 흔들린다..일부러 그런것일까 싶기도 하고...)

 

이 유물들이 시베리아의 어떤 곳에서 수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풀려고 노력을 했고 하고 있으나, 모두가 동의하는 답은 없을 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재밌기도 하다.

그 중에서 필자가 나무 아래서 세 사람이 쉬고 있는 장면을 소개한 주제가 있는 버클 장식을 소개한 바 있다. 바로 파지릭 유적 2호분에서 나온 머리장식과 이 버클에 표현된 여성의 머리장식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버클에는 잘 이해가 안되는 유물이 한 점 걸려 있다(그림 1).

바로 나무 아래에 걸려 있는 네모꼴? 혹은 타원형의 유물 때문이다. 필자가 여러 책을 뒤적거려도 여기에 대해서 해석을 해 놓은 사람은 아직 없었다.

 

그림1. 에르미타주 소장, 표트르 1세 황금유물 컬렉션, 황금 버클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어쩌면 나무 밑에 걸려 있는 이 물건은 파지릭 2호분에서 출토된 일종의 악기인 하프 일 수도 있다.

 

 

 

그림 2. 파지릭 유적 2호분의 유물배치도

 

 

앞에서 파지릭 2호분 무덤 배치를 유심히 보신 분은 이미 이 유구에서 악기가 출토된다는 사살을 눈치 챈 분이 있었을 것이다. 2017년 영국박물관에서 열린 특별전에는 이 유물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런데 루덴코가 파지릭 유적에 대한 단행본을 펴낼 때 이 유물은 이미 공개되었다.(그림 2)

나무로 만들어진 것인데 전체 길이는 83cm이고, 가장 자리는 11~12cm가량 넓고, 중간 부분은 너비가 3~4cm가량으로 좁아지는 형태로 길고 단단 나무 조각으로 중간에는 비어 있어 공진기 역할을 한다. 하프 바디의 아랫면은 거의 수평이지만 가운데는 오목하다. 가장 가운데 높이는 5cm밖에 되지 않는다. 몸의 중간 부분에는 길이 26cm로 된 소리판으로 덮여 있다. X모양의 공명 조리개가 가운데 길게 나 있다. 바디에서 뚫린 부분은 소리를 확장하기 위한 부분으로 얇은 가죽을 씌웠을 것이고, 그 부분은 바디에 붉은색으로 염색한 흔적이 남아 있다. 가죽막에는 3개의 원형 공명구멍이 있었고, 하나는 끝 부분에 다른 하나는 중간에 있었다. 얇은 나무 못으로 막을 악기의 바디에 고정시켰다. 바다의 한쪽에는 끈을 매기 위한 홀더가 있었는데 길이가 24cm가량이다. 몸통의 넓은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에 부착된 돌출된 부위에 묶어서 사용했던 것이다. 남아 있는 줄의 수는 4개 이상이다.

 

 

그림 3. 파지릭 유적 2호분 출토, 현악기, 일종의 하프, 가죽막은 그림이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다시 그림 1의 나무 밑에 걸려 있는 물건을 보면, 앉아 있는 여성 방향으로 튀어 나온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어쩌면 악기의 스트링 홀더가 아닐까? 이런 악기를 그냥 들고 다녔을 리는 없고, 아마 가죽 주머니 같은 곳에 넣고 다녔을 가능성이 많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나무 밑에 걸려 있는 물건에는 세로 방향으로 긴 줄이 4~5줄 표현되어 있다.

 

황금벨트에 표현된 나무 아래의 물건은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는데, 화살과 활이 들어간 스키타이 고리트라고 불리는 유물이다. 고리트는 전사들의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무기이다. 쉬기 위해서 허리춤에 있던 무기를 풀러서 나무밑에 걸었다는 설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우코크 고원의 전사 무덤(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이 유물에 대해서 살핀 바 있다. 하지만 고리트라고 하기에는 고리트에 씌운 고깔모자도 없다. 그리고 이 유물이 만약 고리트라면 벨트에 표현된 이 유물에서 여신방향으로 불룩 튀어나온 부분이 해석이 되지 않는다.

 

2020/02/12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1유적] - 알타이 산의 스키타이 전사 2인의 활집과 평화

 

알타이 산의 스키타이 전사 2인의 활집과 평화

알타이 산의 우코크 고원에서도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는 16세 가량의 소년과 45~50세 가량의 남성이 함께 확인되었는데, 우리는 이미 소년과 장년기의 남성이 어떤 물건과 함께 부장되었는지 살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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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이 황금벨트를 디자인 한 사람이었더라도, 가장 중요한 소재인 나무 아래에 무기보다는 악기를 매달았을 것 같다. 휴식을 위한 주제를 선택했다면...

 

참고문헌

루덴코 1953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