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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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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남쪽의 우라루투는 기원전 844년부터 시루두리 1세때부터 현재 터키에 있는 반 호수 부근을 수도로 삼았다. 투쉬파라고 부른다. 아르기쉬티 I세때부터 반 호수 절벽 위에 요새를 파기 시작하면서 앗시리아를 막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투쉬파는 시비니 신의 숭배지로 알려진 곳이다. 시비니 신은 태양의 신으로 그의 심볼은 날개 달린 둥근 접시로 종종 나타나지만, 사실 접시가 의미하는 바는 태양이다. 태양의 일식때 태양은 검은 점으로 보이고 주변으로 흩어지는 빛만 환하게 보이는 현상을 사물화 한 것이다. ‘winged sun’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윙드 선을 심볼로 하는 신앙은 메소포타미아, 고대 이집트, 히타이트 지역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그런데 우라루투에서는 이 ‘날개 달린 접시’가 단독으로 나타나지 않고 여러 다른 형상들과 함께 나타난다. 카미르 블루르 언덕의 예레부니 성곽에서 출토된 허리띠 장식에는 시비니 신으로 추정되는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고(그림1). 같은 유적에서 나온 석제 함에는 날개달린 접시 아래에 생명의 나무가 함께 표현되었다.

 

그림 1. 카미르 블루르(예레부니 성곽) 출토, 허리띠 장식, 아르메니아 역사박물관 소장

 

그림 2. 카미르 블루르(예레부니 성곽) 출토, 석제 함의 바닥 장식

 

그림 3. 카미르 블루르(예레부니 성곽) 출토, 은제 원판장식, 아르메니아 역사박물관 소장

 

또 다른 시비니 신은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방패에 남아 있는 이미지(그림 4)에도 있다. 이곳에서는 소를 타고 활을 쏘고 있으며, 방패의 모습이 흡사 날개처럼 표현했다. 방패는 터키의 안자프 우라루트 성곽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림 4. 시비니 신, 영국박물관 소장 우라루투 안자프 성곽(터키)에서 발견된 방패

 

날개 달린 접시의 이미지는 히타이트와 가까운데, 사용처는 앗시리아에서 발견되는 것과 유사하다. 앗시리아의 왕인 아슈르나시팔 2세와 함께 윙드 선(winged sun)이 발견된 예도 있고, 다리우스 1세와도 함께 표현된 바 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된 청동으로 된 날개 달린 반인반수상은 토파크-칼레 라고 하는 또 다른 우라루투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그림 5. 토프크-칼레 출토, 청동,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의 기원전 9세기부터 등장하는 우라루투에서 남긴 많은 유물은 앗시리아의 것과 구분이 안되는 것이 많은 점이 문제이다. 도굴로 자행된 유물이 그냥 사고 팔고 한 상태였고, 후대의 학자들도 이를 정리하지 못한 것 같다. 그 나마 테이시바이니 성곽이나 예레부니 성곽은 유적이 잘 남아 있기 때문에 현재 그루지아의 상징과 같은 곳이 되었다.

 

터키 국경에 있는 반 절벽의 세워진 성곽은 수도 투쉬파가 있던 곳으로 알려졌고, 이곳에는 ‘므헤르의 문’이라고 하는 곳이 발견되었다. 이곳에는 신의 이름과 의식을 치를 때 제물로 받친 동물의 종류와 양이 적혀 있어서 이를 토대로 우라루투의 신(神)에 대한 연구가 약간 진행되었다. 필자가 이 부분을 추적하는 이유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코카서스 북쪽에서 나오는 우라루트 유물들 때문이다. 대부분 의례용품이고 문양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우라루투의 3신은 칼디 신, 테이시바 신, 시비니 신이다. 칼디 신의 역할은 불분명하고, 테이시바 신은 전쟁의 신이자 폭풍의 신이라고 알려졌다. 시비니 신은 태양의 신이다.

 

칼디 신은 사자 위에 선 모습으로 인간 형태로 묘사되어 있는데, 앞서 예레부니 성곽의 칼디 신의 사원에서 벽에 남아 있는채 발견되었다. 칼디의 상징이 날개 달린 태양 원반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다시 이는 시비니 신으로 의인화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칼디 신의 아내는 아루바니이고,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청동상으로 의인화되어서 출토된 바 있다(그림 1).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칼디 신의 아내, 아루바니

 

전쟁의 신 테이시바는 카미르-블루르 언덕의 테이시바이니 성곽을 발굴하는 동안 긴 옷을 입고 수염이 없는 모습의 남성 청동상이 발견되었다. 머리에 특징적인 뿔 장식이 있고, 양 손에 투부(전투용 도끼)와 곤봉을 가지고 있는데, 테이시바 신으로 간주된다. 그의 아내는 ‘후바’라고 불리는데, 손을 공중에 든 모습을 하고 있다. 오른쪽에는 아이, 왼쪽에는 나무가 있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그림 2.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테이시바 신, 청동 남성

 

태양신 시비니는 날개 달린 둥근 접시를 상징한다. 우라루투의 물개 혹은 새 문양, 동물 머리에서 종종 날개 달린 접시 모양이 발견되는데, 시비니를 상징했을 수 있다. 그리고 시비니의 아내는 청동솥에 자주 표현되는 날개 달린 여성이 아내인 투시푸에아 Tushpuea일 수 있다.

 

지난번에 시비니 신으로 소개한 청동솥에 붙은 날개 달린 인물은 여성이며, 그의 아내인 투시푸에아이다. 잘못 소개했는데, 정정한다.

 

그림 3. 시비니 신의 아내 투시푸에아, 앙카라 박물관 소장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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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9~8세기의 우라루투는 앗시리아와 적대적인 관계 였다. 여러 곳에 남아 있는 우라루투 전사들의 이미지로 보아서 가죽이나 나무로 된 갑옷과 투구를 착용했고, 히타이트와 거의 비슷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앗시리아의 Shalmaneser III는 우라르투의 사르두리 I세때 우라루투를 침약해서 약탈적인 전쟁을 벌였다. 이로 인해서 우라루투는 군대를 앗시리아와 비슷하게 개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앗시리아가 더 강했기 때문에 군대를 비슷하게 개혁한 것으로 알려짐)

 

우라루투 기원전 VIII세기부터 보병은 철검, 활로 무장했고 청동헬멧과 찰갑을 착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유물은 앗시리아의 후기 유물과 유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라루투의 왕이 전투 최고 사령관이며,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경쟁과 토너먼트가 열렸고 개인적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투쉬파 수도에 동굴의 요새를 건설하에는 늘 앗시리아에 당했고, 그 후에는 막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앗시리아를 먼저 쳐들어간 것은 아니고 방어전쟁을 벌였다. 우라루투의 Ishpuini 왕 군대는 100개의 전차병, 10,000명의 기병, 3000명의 보병이 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그림 1. 우라루투의 전차기병(우라루투의 아르기쉬티 I세의 헬멧에 남아 있는 모습)

 

그림 2. 우라루투의 아르기쉬티 I세의 갑옷(찰갑)

 

그림 3. 카미르 블루르 언덕의 테시이바이니 유적 출토, 사르두우리 II세의 헬멧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의 기원전 8세기 문화는 사실 다 비슷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 같다. 앗시리아나 우라루투나...쐐기 문자를 쓰고, 남겨진 물질문화도 서로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우라루투의 종교도 역시나 메소포타미아와 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Ishpuini와 Menua왕의 통치 기간 동안 반 절벽 위에는 신의 사원이 지어졌고 메소포타미아에서 전해지는 것과 비슷한 의식이 전해진다.

신에 대한 숭배 의식은 대부분 비슷하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지구라트 꼭대기는 움푹 들어간 방이 있었고 그곳에서 의식이 전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우라루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반 절벽의 요새 중에 한 곳(그림 1)에는 우라루투의 신 79명이 적혀 있고 그들에게 희생되어야 하는 동물의 수가 적힌 점토판이 발견되었다.

 

 

그림 1. 므헤르의 문. 반 절벽 부근의 능선 절벽에서 발견됨. 이곳에서 79명의 이름이 있는 쐐기문자가 발견됨. 1910년 아르메니아 역사가가 발견.

 

그 중에서 칼디, 테이시바(전쟁의 신), 시비니(태양의 신)신이 제일 먼저 적혀져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각각 17마리의 황소, 34마리 양, 6마리 황소, 12마리 양, 4마리 황소 8마리 양을 그들의 희생물로 받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림 2. 칼디 신(왼)과 테이시바 신(우)의 모습, 칼디 신은 사자, 테이시바 신은 황소를 타고 있다. 카미르 블루르 언덕에서 발굴된 청동 버클장식, 아르메니아 국립박물관 소장

 

그림 3. 시비니 신(왼)과 그리핀의 모습, 카미르 불루르 언덕에서 발굴된 청동버클 장식, 아르메니아 국립박물관 소장

 

아르딘(무사시르) 도시는 반 호수 남동쪽에 위치했고 칼디 신의 본당은 이곳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앗시리아의 북쪽 도시와 접하고 있다. 이 도시는 앗시리아의 왕 사르곤 II세에 의해서 파괴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에 칼디 신의 숭배는 점차 희미해졌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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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의 우라르투는 기원전 8세기 중반에 가장 강성했었다고 알려졌다. 현재 터키의 반 호수 부근에 위치한 반 절벽 위에 요새를 지었고, 코카서스 남쪽까지 영역에 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르기쉬티 I세, 메뉴아와 그의 아들 사르두리 II세 때가 가장 강성했다(그림 1). 그리고 그때 문화적으로 가장 강성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문제는 여기서 생긴다.

 

 

그림 1. 기원전 8세기 중반 우라루투의 영역

 

많은 유물이 발굴로 인해서가 아니라 무덤에서 약탈해서 재판매 되고 세계의 박물관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출처를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리고 이들은 앗시리아의 것과 너무 유사하다. 브리티시 뮤지엄과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각각 일부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림 2. 우라루투 왕좌의 왼쪽 장식, 날개달린청동황소, 에르미타주 박물관, 같은 유물로 왕좌의 오른쪽을 장식한 유물은 브리티시 뮤지엄에 보관되어 있다.

 

전해지는 쐐기문자는 우라루투의 것과 앗시리아 문자가 매우 흡사하고 하다. 테이시바이니 성곽이 있는 카미르 블루르 언덕 위에서 발굴된 유적에서 나온 청동화살통에는 사루두우리 II 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전차를 타고 있는 모습인데, 앗시리아의 궁전벽화에서 보이는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그림 3. 카미르 블루르 유적 출토 청동 화살통

 

 

그림 4. 그림 3의 세부

 

뿐만 아니라 테이시바이니 성곽 유적에서 발견된 벽화는 흔히들 오리엔트의 문양으로 알려진 식물그림(그림 5)이 그려져 있다.

 

그림 5. 테이시바이니 성곽에서 발견된 식물그림

 

 

 

참고문헌

Дьяконов И.М. Урартские письма и документы. — Москва — Ленинград: Издательство АН СССР, 1963.(댜코노프, 1963, 우라루투의 글자와 문서)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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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루투는 코카서스 북쪽에 있던 스키타이 세계와 앗시리아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그루지아 국경인 예레반의 수도에는 예레부니와 테이시바이니 성곽이 남아 있고, 터키에는 반 호수 부근에 사르두리 II세의 비문이 발견된 성곽이 남아 있다. 우라르투의 수도였던 투쉬파 혹은 시비니 신의 사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투쉬파는 사르두리 II세 이전부터 중심지로 사용되었는데, 사르두르 I세(기원전 844-828년)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가 반 절벽의 서쪽기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아들인 Ishpuini(기원전 828-810년) 왕이 통치할때까지는 늘 앗시리아에 공격을 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철제품의 수준이 올라가면서 암벽을 파서 동굴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생기게 되었고, 요새를 만들 수 있었다. 앗시리아는 우라르투의 수도를 쉽게 공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곳에 우라루투가 수도를 삶은 이유를 환경적인 요인으로 삶는데, 아르메니아 고원은 대륙성기후로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데, 이곳은 겨울에도 그렇게 춥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천연요새의 역할을 했고, 시비니 신의 숭배가 반 암벽과 관련되어 있다는 추측도 있다.

 

사르두르 I세의 아들 Ishpuini 통치 이후 그의 아들 Menua(기원전 810~786년) 아래에서 집중적으로 개발되었다. Ishpuini는 우라르투의 신 칼디를 포함한 사원지를 건설했다. 당시에 동굴을 파고 왕실의 방도 만들어졌다. 여러 층의 건물이 지어진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를 모형화 한 청동유물이 발견되었다. 현재는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 알려졌다(그림 1).

 

 

그림 1. 건물과 탑의 모형물, 청동제품, 탑의 높이는 16.5cm, 건물의 높이는 30.5cm

 

메뉴아는 투시파 주변에 물을 제공하기 위해서 수로를 70km 가량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 호수의 물은 염분이 많았기에 관개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수로는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메뉴아 이후에 Argishti I(기원전 786~764년)과 Sarduri II세가 통치하면서 우라루투는 전성기에 이르렀다. 아르기쉬티 I세와 사루두리 II세는 반 절벽의 다른 면에 자신의 연대기를 비문에 남겼다. 이 비문은 우라루투 설형문자가 남아 있는 가장 큰 것이다.

 

현재 터키 국경에 있는 투쉬파는 기원전 9세기부터 우라루투의 수도로 사용되었으나 요새를 짓기전에는 강력하지 못했고, 요새를 짓고 난 이후 아르기쉬티 I세 지배기 기원전 8세기 경부터 앗시리아를 막아내었다.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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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남쪽에 스키타이 세계와 교류하던 우라르투는 기원전 764~735년에 현재의 터키 국경에 있는 반 호수에 인접한 절벽 위에 성을 만들었고 그 곳이 당시의 수도로 알려졌다. 투쉬파 라고 하는 곳인데, 여러 국가에서 이 곳을 발굴했지만 가장 운 좋은 것은 1915~1916년의 러시아제국고고학위원회였다. 사르두리 II세의 비문을 발견해서 여기가 그의 도시라는 것을 밝혀 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도 왕실 포도원이 인접한 곳에 있었다고 한다. 20세기 초까지 이 곳의 주요 산업 중에 하나가 와인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코카서스 북쪽의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은제 각배(여성이 새겨져 있는)가 그냥 출토된 것은 아닌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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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뿐만 아니라 액체로 된 음료는 어울리는 그릇이 있다. 커피도 잔이 따로 있고, 차도 찻잔이 있고, 맥주도 회사 마다 자신의 로고가 있는 잔이 있다.

 

반 절벽은 높이 80m로 바위가 자연적으로 가파른 상승을 했기 때문에 천혜의 자연 요새이다. 동쪽에서 서쪽 방향으로 뻗어 있으며 서쪽 끝은 반 호수와 접하고 있다.

 

왕실로 추정되는 공간은 남쪽 절벽에 입구가 있는 곳이다(그림 1). 계단을 통해서 올라가면(그림 2) 큰 홀이 있고, 옆에는 작은 방 3개가 붙은 구조이다. 절벽을 동굴처럼 파서 공간을 마련했다.

 

그림 1. 남쪽 절벽에 입구가 있는 큰 방과 작은 방의 평면도(가장 위)와 단면도

 

우라루투 석공들이 다양한 목적을 위해서 내부 공간을 인공적으로 조각해서 만든 것이다. 일부는 슐츠가 발견한 공간도 있다. 모든 인공 동굴의 용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왕실의 매장을 위해서 사용되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남쪽 경사면의 위쪽에 위치한 방은 천장이 매우 높은 곳인데(그림 1), 궁전의 특징이고, 벽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 중세 아르메니아 역사가 Movses Khorenatsi가 이 건물을 앗시리아 건물로 생각했으나, 러시아 연구자들이 찾아낸 바와 같이 우라루투 왕 사루두이 II세의 비문이 발견되었다.

 

그림 2. 왕의 계단

 

그림 3. 남쪽 절벽 위의 입구, 왕의 방이라고 불리는 곳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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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르투 사르두리(Sarduri) II세 때의 수도는 투쉬파였다. 현재 터키 국경내에 있으며 반 호수에 있는 절벽 위에 사원(그림 1)을 만들고 그곳에 왕이 머물렀다고 한다. 시비니 신의 사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반(Van) 절벽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프랑스 연구자인 슐츠로 19세기 초에 발견했다. 슐츠는 처음에 중세시대 아르메니아 역사가 Movses Khorenatsi가 남긴 연구를 밝히기 위해서 이곳을 찾았다. 반 호수 기슭에 건설된 도시가 아시리아 여왕의 명령이라는 내용이었고, 슐츠는 반 호수 기숡에 세워진 사원지가 앗시리아의 건축물이라고 생각했다. 발견한 암석과 설형문자가 새겨진 비문을 스케치 했다. 그러나 그는 1829년 쿠르드족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작업은 1840년에 출판되었다.

 그러나 후에 슐츠가 스케치 한 비문은 앗시리아어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중세 아르메니아어 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영국박물관의 원정대와 독일 원정대가 투쉬파를 발굴하고 그 때 가져간 유물은 현재 영국과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독일에서 그 내용이 출판되었다.

 

1915~1916년 동안 반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군대에 점령되는 동안 러시아 제국고고학회(그림 1)가 투슈파에서 발굴을 했는데 그 때 동쪽 경사면의 틈새에 있는 사르두리(Sarduri) II세의 비문(그림 2)을 발굴하게 되었다. 그는 우라르투의 왕으로 기원전 764~735년 동안 제위했다.

 

그림 1. 러시아 제국고고학 위원회의 발굴, 군인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짐

 

그림 2. 사르두리 II세의 비문

 

러시아 제국고고학회의 발굴 이후에는 대규모 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8년 영국 탐험대가 소규모 작업을 했지만 큰 성과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은 불법적인 도굴이 만행되던 곳이었다.

 

* 유적의 위치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음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에 있었던 기원전 9세기부터 존재했던 우라르투는 기원전 8세기경에 세워진 에레부니 성곽과 기원전 7세기에 세워진 테이시바이니 성곽을 남겨둔채 멸망했다. 테이시바이니 성곽을 무너뜨린 것은 스키타이 사람들로 알려졌지만, 우라르뜨가 완전히 망한 것은 기원전 585년 메디아 인들의 침략에 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흑해 북안에 살던 스키타이 사람과 키메르치 사람들도 한 몫을 했다고 한다.

 

복잡한 지형만큼이나 민족도 다양하고 역사도 그랬던 것 같다. 우라르트가 있었던 지역은 기원전 6세기 이후에 아케메니드 왕조의 영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에레부니 유적에는 기원전 5~4세기 문화층에서 아케메니드 왕조의 은제 각배 등도 발견되고, 칼디 신의 사원도 방형으로 개축되어서 사용되었다.

 

우라르트는 3신을 믿었는데, 칼디 신, 테이시바 신, 시비니 신이다. 칼디 신은 믿음의 신이고, 테이시바 신은 전쟁의 신이며, 시비니 신은 태양의 신이다. 그의 다른 이름은 아르티니스 이다. 아리티니스는 현대 아르메니아 언어에 떠오르는 태양을 의미한다고 한다.

 

칼디 신은 사자를 타고 있고, 테이시바 신은 소를 탄 모습이지만, 시비니 신은 머리에 청동으로 된 솥을 얻고 있다(그림 1). 유물에서 청동 솥(그림 2, 3)에 붙은 날개 달린 인간의 모습을 한 사람들은 시비니 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우라르트 종교의 대부분 요소는 메소포타미아에서 차용되었다. 시비니 신은 앗시리아 신 샤마쉬와 같은 존재로 알려져 있다. 투실라는 시비니 신의 사원지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투실라는 우라르투의 기원전 735~675년의 수도였는데, 반 호수를 마주보는 반 절벽에 세워진 도시이다.

 

그림 1. 시비니 신의 모습

 

그림 2. 청동솥에 표현된 시비니 신

 

그림 3. 청동솥

 

그림 4.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사르두리 2세의 헬멧에 표현된 사람들

 

사실 필자가 이렇게 우라르투를 파고 있는 이유는, 코카서스 산맥 북쪽에 있는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거울과 철검의 검집에 새겨진 문양 때문이다.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신(神)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찾는 과정 중에 와이너리, 맥주 양조장, 참기름 제조공장 등 어마어마 한 곳을 발견하기는 했다.

세상에는 신이 너무 많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신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1. 11. 28. 09:22 세계의 박물관

오늘은 필자가 발견한 박물관 가운데 가장 가보고 싶은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직 가보지 않았지만, 이곳저곳 많은 박물관을 본 경험에 의하면 굉장한 느낌 곳일 꺼라고 생각한다.

 

코카서스 남쪽 국가인 아르메니아의 기원전 8세기 유적인 예레부니 성곽 바로 앞에 위치한 예레부니 박물관이다. 앞에서 필자가 예레부니 유적의 위치를 잘못 표시했는데, 아래 링크로 가면 바로 볼 수 있다. 예레부니 유적 보다 늦게 만들어진 테이시바이니 유적은 점토벽돌로 만들어진 성곽이라서 지금은 녹아내려서 상대적으로 잘 남아 있지 않지만, 예레부니 유적은 잘 남아 있고, 구글 위성으로도 뚜렷하게 보인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그림 1. 예레부니 성곽과 박물관

 

그림 2. 예레부니 성곽(오른쪽 보라색)과 테이시바이니 성곽(왼쪽 표시), 구글지도에 표시

 

그림 3. 아라라트 분지와 두 성곽의 위치

 

예레부니 박물관은 1968년에 소비에트 시절에 설립되었으니, 당시에는 소비에트 박물관 중에 한 곳이었다. 예레반(그루지아의 수도)이라는 도시가 만들어진 2750주년 기념으로 10월 19일 건립되었다고 한다. 이 박물관을 만든 근거는 예레반 시에서 발견된 고대 유적지인 아린 베르드(예레부니 성곽의 언덕 명칭), 카미르 블루르(테이시바이니 성곽의 언덕 명칭), Shengavit의 발견을 기념하고 만들어진 것이다. 건축물은 1970년 소련 건축가 연맹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림 4.1968년 박물관 개관 당시의 인민, 사진 앞의 사람들은 유적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박물관은 칼디 신의 사원을 그대로 모방한 디자인이다.

 

그림 5. 1968년 박물관 개관 당시의 예레부니 성곽

 

그림 5. 예레부니 박물관의 입구, 칼디 신을 묘사

 

사실 필자가 깜짝 놀란 것은 유적 앞에 박물관을 세우고, 유적을 그대로 교육의 장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물론 유적이 벽돌로 된 성곽이라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졌기도 하지만, 이를 활용할 생각을 했다는 점이다. 예레부니 유적 자체에서 유물이 많이 나오지는 않아서 박물관에는 유물이 많이 없을 수도 있지만, 유적을 그대로 이용한다는 점은...

 

1968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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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새벽부터 일어나 난리를 치렀더니 너무 피곤해서 자료를 찾다가 엉뚱하게 박물관 표지를 보고 여기에 꽂혔다. 역사인식이 없는 나라에 살다보니, 별 것이 다 부럽다. 

 

김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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