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흑해지역의 코카서스 북쪽 스키타이 세계에서 가장 이른 유적인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코카서스 남쪽 우라루투에서 제작된 물건들이 발견되었다. 거울, 각배, 철제 검 등이 그곳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중에서 각배는 거울과 같은 인물이 그려져서 두 유물이 같은 곳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날개를 달고 있는 여성 외에도 온몸에 털이 나 있는 인물은 거울과 각배에서 모두 발견되었다. 각배의 인간은 하반신 부위에 맹수와 겹쳐그려져서 반인반수처럼 보이는데 각배가 잘 남아 있지 않아 분명하지 않다.

 

각배의 동체부는 둥글게 돌아가기 때문에 여러 방향으로 그림이 도안되어 있다. 가장 큰 중앙의 인간과 가지가 양쪽으로 벌어진 나무, 그 왼쪽에 그려진 사자와 싸우는 남성, 그 아래에는 기둥 2개가 방향이 달리 표현되어 있다. 2개의 기둥은 각배가 떨어져 나가면서 완전치 않지만 꼭대기가 불룩한 연꽃 형태인데, 우라루투의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발견된 식물 그림과 유사하다(그림 2).

 

그림 1. 스키타이 켈레르메스 유적 출토 각배의 상세

 

그림 2.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발견된 식물 그림

 

그림 3. 켈레르메스 유적의 거울

 

켈레르메스와 각배가 같은 곳에서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근거는 각배와 거울 각 조각의 가장자리를 연결하고 있는 눈김이 새겨진 띠이다. 거울의 문양판은 은제 거울 위에 붙인 금제풉인데, 각 조각은 중간에 눈김이 있는 띠를 매개로 붙인 것이다. 각배에서도 같은 띠가 새겨진 것이 발견되었다.

 

또 각배에서 반인반수가 발 밑에 두고 있는 꼬임문양은 거울에서도 반인반수 문양 아래서도 발견되었다.

 

그래서 두 유물은 같은 장소에서 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참고문헌

Максимова М.И. 1956 : Ритон из Келермеса. // СА. XXV. 1956. С. 215-235.(막시모바 1956, 켈레르메스에서 출토된 리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드네프르 강 유역의 기원전 6세기 경 유적에서는 청동용기의 손잡이가 발견되었다. 날개가 달린 여성으로 날개를 양쪽으로 펴고 한 쪽 무릎은 세우고 다른 쪽 무릎은 굽힌 자세를 취하고 있다.

 

날개를 달고 무릎을 굽힌 여성은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의 각배에서 표현된 바 있다. 동물을 잡고 있었지만 이 유적의 유물은 동물은 없고 허리를 잡고 있다.

 

그림 1. 드네프르강 유역 채집, 청동용기의 손잡이

 

 

그림 2. 켈레르메스 유적의 각배 그림

 

손잡이가 달린 청동용기는 흑해 북안에서 출토되는 그리스 유물로 추정되는 것 중에서 매우 드문형태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 청동손잡이가 과연 그리스 유물일까?

 

청동용기에 날개달린 인간형상은 우라루투에서 태양의 신인 시비니의 아내인 투시푸에바가 아닐까? 혹은 시비니신과 투세푸에바가 함께 표현된 것은 아닐까?

 

시비니 신은 무릎을 굽히고 날개 달린 접시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투시푸에바는 청동용기에 날개를 달고 표현되었다.

 

그림 3. 우라루투의 3신, 시비니신

 

그림 4. 시비니신의 아내 투시푸에바

 

 

참고문헌

 

Piotrovsky B., Galanina L., Grach N. 1986 : Scythian Art. The Legacy of the Scythian World: mid-7th to 3rd century B.C. Leningrad: Aurora Art Publishers. 1986. 184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흑해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중에 가장 이른 켈레르메스 유적에는 당시에 인접한 지역의 유물들이 다 있는 듯 하다. 코카서스 남쪽의 우라루투에서 제작한 철제 검, 앗시리아의 금제 그릇, 그리스의 디아뎀 등이다.

 

그런데 철제 검은 아키나케스라고 불리는 스키타이 단검으로 검날 멈추개가 나비 모양으로 생긴 것이다. 철제 검은 화려한 황금 검집 속에 들어가 있는데, 검집에는 우라루투의 칼디 신을 형상화 한 문양, 생명의 나무, 스키타이 사슴 등 복합적인 문양이 들어가 있다.

 

켈레르메스 유적과 같은 시기의 멜구노프 유적에서는 거의 유사한 철제 검(검집 포함)(그림 1,2)이 발견되었다.

 

그림 1. 멜구노프 유적의 철제 검

 

 

그림 2. 멜구노프 유적의 철제 검 입구

 

그림 3.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청동상, 테이시바 신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사슴의 표현방법과 철검의 동체부에 새겨진 반인반수, 검집의 입구에 표현된 신의 모습 등에서 차이가 있다. 특히 검집 입구에 있는 날개 달린 남성은 손에 무기를 들고 있는데(그림 2),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출토된 테이시바 신(그림 3)과 같은 물건이다. 또 검집의 입구에는 머리를 돌리고 있는 산염소(그림 2)는 켈레르메스 유적의 투부에 있는 염소와 많이 닮았다.

 

다시 켈레르메스 유적의 투부를 살펴보면 투부의 머리에는 염소 뿐만 아니라 도끼를 들고 있는 남성(그림 4의 왼쪽)도 발견된다. 또 염소가 하고 있는 자세도 중간에 나무를 두고 서로를 마주보는 장면(그림 5)은 우라루투에서 발견된 모습과 같다. 생명의 나무를 중앙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는 두 신의 모습으로 치환할 수 있다.

 

그림 4. 켈레르메스 유적의 투부 머리쪽

 

그림 5. 켈레르메스 유적의 투부 머리쪽(좌)과 끝 부분(우)

 

그림 6. 그림 4,5와 같은 유물, 투부의 손잡이 부분문양

 

 

그렇다면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투부가 앗시리아적인 특징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앗시리아와 우라루투는 비슷한 종교적 믿음을 가졌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투부에는 완전한 스키타이 사슴 장식은 없는데 이 점은 철제 검과 다르다.  투부의 머리부에 발견된 사슴장식(그림 4의 오른쪽)은 다리를 접고 있는데, 스키타이 사슴 자세이지만 이 사슴은 다리와 몸통 사이에 2줄의 침선이 있어서 표현법에서 스키타이 동물장식과는 다르다. 그래도  이 사슴은 투부의 손잡이에 새겨진 사슴(그림 6)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물론 이 투부가 앗시리아에서 제작되었을 수는 있지만 우라루투의 신(神), 스키타이 사슴의 자세를 취한 앗시리아 사슴장식, 염소와 나무의 배치 등 결국 앗시리아에서도 우라루투와 스키타이 동물장식을 염두해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Артамонов М.И. 1961 : К вопросу о происхождении скифского искусства. // Omagiu lui George Oprescu cu prilejul împlinirii a 80 de ani. Bucureşti: Editura Academiei Republicii Populare Romîne. 1961. P. 31-46.(아르타모노프 1961, 스키타이 예술 기원에 대한 질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7세기 흑해의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철제 검은 우라루투에서 수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철제 검의 끝에 그려진 마주보는 사자(그림 1)는 아르메니아의 카미르 블루르 유적에서 골제로 된 판에 표현된 유물이 출토된 적이 있다. 또 흑해의 스키타이 유적인 타만 유적에서도 출토되었다(그림 3). 2점은 사자라기 보다는 호랑이에 가깝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 철제 검의 검집 장식

 

그림 2. 켈레르메스 유적 철제 검의 검집 동체부

 

그림 3. 1, 카미르 블루르 유적 출토 골제 판, 2. 타만 유적 출토

 

켈레르메스 유적 출토 철제 검의 끝(그림 1)에 그려진 사자는 동체부(그림 2)에 그려진 사자와는 표현방법이 다르다. 검의 동체부의 사자는 앞발과 뒷발의 표현이 달라서 합성된 동물을 표현하고 있다. 목덜미의 표현방법도 상당히 다르다.

 

철제 검 끝의 사자는 어깨에 태양 표식이 있는데, 오히려 같은 유적(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투부의 동물표현법과 더 유사하다(그림 4). 동물의 가장자리 및 몸통과 다리선의 구분에 2줄 선을 넣는 방법이나, 별 혹은 태양을 표식하는 장식하는 방법이 그렇다. 투부는 앗시리아에서 수입한 유물로 알려진 것이다.

 

 

그림 4. 켈레르메스 유적 출토 투부의 동체부

 

하지만 사자의 표현방법은 앗시리아 방법을 선택했을 수 있지만 마주보는 사자의 자세는 스키타이 동물표현법이다.

 

따라서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철제 검은 스키타이 사슴장식과 맹수 자세가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스키타이 사람들의 주문으로 우라루투에서 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다만 앗시리아의 사자표현방법과 스키타이 맹수 동물자세가 함께 복합되었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투 반 왕조)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산맥을 기준으로 북쪽에 위치하던 스키타이 세계에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자신들이 만든 유물도 있지만 이웃한 세계에서 만들어진 유물도 많이 발견되었다.

 

특히 거울과 철제 검은 우라루트에서 제작되었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알렉세예프 2012). 필자는 이것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우라루트의 신과 관련된 유물들을 살폈는데, 한계가 많은 작업이다. 우라루투가 현재 기준으로 여러 국경에 걸쳐서 존재했던 나라이고, 19세기와 20세기에 여러 나라들이 호기심 혹은 욕심으로 발굴 아닌 발굴이 행해진 곳이 많기 때문에 정확한 맥락이 없는 유물이 많아서 아마도 영원히 제대로 된 역사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유물들을 약간 분석할 만한 자료는 있다. 특히 철제 검의 검집에 새겨진 문양은 우라루투의 신을 형상화 한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사르두우리 II세(기원전 764~735년)의 헬멧에는 생명의 나무를 중앙에 두고 양쪽에 날개 달린 신이 서 있는 모습이 발견되었다(그림 1).

 

우라루투에서 생명의 나무는 테이시바이니 유적 외에도 토파크 칼레(현재 터키)등에서 발견되었는데 신을 상징한다. 특히 사르두우리 II세의 헬멧에는 날개 달린 사람은 칼디 신을 의미할 수 있다.

 

그림 1. 사르두우리 II세의 헬멧에 표현된 생명의 수

 

터키 Kef Kalesi, Adilcevaz에서 발견된 칼디 신의 모습과 사르두우리 II세의 헬멧에 있는 날개 달린 사람은 중앙에 각각 기둥과 생명의 나무를 중심으로 숭배하는 모습을 형상화 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2021.12.0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켈레르메스 유적과 유물] - 우라루투의 칼디 신

 

우라루투의 칼디 신

기원전 7세기 스키타이 문화가 흑해 지역에 번성했을 때 코카서스 남쪽에는 우라르투가 존재했고, 앗시리아와 사이에 위치하면서 양 지역을 연결했던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라루투의

eastsearoad.tistory.com

 

 

그런데 이 모습은 스키타이 유적인 켈레르메스에서 발견된 칼집의 입구에 그려진 채 발견되었다(그림 2).

 

그림 2. 켈레르메스 유적의 철제 검(아키나케스)의 검집

 

켈레르메스 유적의 검집에 그려진 생명의 나무 꼭대기에는 날개달린 접시가 가장 상부에 달려 있다. 우라루투에서는 태양의 신 시비니를 날개 달린 접시에 비유해서 상징화 한 바 있다.

 

검집의 하단부에는 사자가 앞 뒤로 그려져 있다(그림 3). 칼디 신은 대부분 사자와 함께 등장한다.

 

그림 3. 켈레르메스 유적의 철제 검의 검집 하단부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유물은 스키타이 사람들의 요구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검집에서 가장 눈에 뛰는 부위에 스키타이 사슴문양이 부조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그림 4).

 

그림 4. 그림 3 검집의 연결부위, 스키타이 사슴 문양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투 반 왕조)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사실 필자는 우라루투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런데 흑해 지역의 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기원전 7세기경 유물을 이해하려고 하니, 도저히 우라루투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필자가 정말 궁금한 것은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은제 거울에 붙은 금판 속의 문양(그림 1) 들이다. 

 그 거울의 뒷면에는 반인반수 상들이 상들이 궁금했다. 우라루투 신의 모습은 동물(사자와 황소)을 밟고 서서 있는 모습도 있고, 반인반수 상도 발견되었다. 특히 토파크-칼레에서 출토된 청동 반인반수 상(그림 2)은 괴기스럽기는 한데, 눈길을 많이 끄는 유물이다. 칼디 신의 모습으로 여겨진다.

 

그림 1. 켈레르메스 유적의 은제 거울, 금판은 부착된 것임

 

우라루트의 도시였던 토파크 칼레 유적은 터키의 반 호수 동쪽 부근에 위치한 곳으로 투쉬파와 가까운 곳에 위치했다. 토파크 칼레 라고 알려진 명칭은 터키식이고, 우라루투에서는 루사히닐리(Rusahinili)라고 불렸다. 루사I세(기원전 735~714년)의 도시라고 알려진 곳이다. 이곳 이전의 도시는 투쉬파 인데, 루사의 아버지인 사르두리 II세때 앗시리아의 왕 Tiglath-Pileser III세가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 이후에 토파크 칼레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곳은 1879년에 영국에서 먼저 발굴을 했고 많은 유물들이 영국박물관에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898~1899년 독일의 고고학 탐험대에서도 발굴을 했고 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확실한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터키 고고학 박물관에서 나머지를 조사하고 반 박물관에 보관된 것으로 알려졌다.

 

청동으로 된 반인반수 상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비슷한 유물이 베를린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눈과 턱이 흰색 돌로 상감되어 있다.

 

그림 2.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토파크 칼레 유적 출토

 

청동으로 된 테이시바 신(우라루투, 전쟁과 천둥의 신)의 이름이 새겨진 형상물도 토파크 칼레에서 출토되었고,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그림 3.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테이시바 신의 이름이 새겨짐, 토파크 칼레 출토

 

토파크 칼레 유적은 여러 나라에서 발굴했고 공개된 자료도 매우 한정적이서 예레부니, 테이시바이니 유적, 투쉬파 유적 등에 비해서 알려진 바가 매우 적다...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투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9세기부터 코카서스 남쪽에는 우라루투라는 국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현재 아르메니아 국경에 있는 예레부니 성곽과 테이시바이니 성곽은 아직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 뿐만 아니라 터키 국경(동부) 내에도 우라루투의 유적 들이 남아 있는데, 반 호수 부근에 세워진 투쉬파 유적이나 터키와 이란 국경 근처에 있는 무사시르 도시 등이다.

 

무사시르는 우라루투 최고의 신인 칼디 사원이 있는 곳으로 알려졌다. 기원전 9세기 말 우라루투의 왕 Ishpuini(기원전 828~810년)는 앗시리아와 우라루투 완충지대인 곳에 깃발을 꽂고 우라루투의 영토로 했다. 이곳의 토착신이었던 칼디 신은 이 지역 민들의 믿음이 대단했다. 자신들이 잘 사는 것은 칼디 신의 힘에서 나온다고 믿었고, 이웃한 앗시리아에서도 칼디 신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영리한 Ishpuini 왕은 칼디 신을 우라루투 최고의 신으로 세웠다. 그 뒤로 우라루투는 무사시르를 100년간 자신의 영토로 컨트롤 했다.

 

하지만 기원전 714년에 앗시리아의 사르곤 II세가 우라루투의 무사시르를 공격했다. 앗시리아의 일부 지역에서도 칼디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한 지속되자 호전적인 사르곤 II세는 이를 문제거리로 생각했다. 100년 전만 해도 앗시리아인들은 무사시르를 공격할 생각하지 못했지만, 사르곤 II세는 무사시르를 공격했다.

 

그런데, 이 모습을 그린 궁전 벽화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티그리스 강변의 두루 샤루킨(앗시리아의 도시, 이라크의 코르사바드에 위치)에 있던 사르곤 II세의 궁전에 남아 있었는데, 1824년에 처음 발견되었고, 프랑스 인 화가가 이를 묘사해서 남겼다. 하지만 티그리스 강이 범람하면서 유적은 사라지고 이 묘사화만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르곤 II세의 궁전벽화에 묘사된 칼디 신의 사원은 수메르, 앗시리아, 바빌론 등 메소포타미아의 유명한 사원지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부조 속에 있는 칼디 신의 사원 벽기둥은 정사각형 또는 직사각형 기둥이다(그림 1). 고대 그리스 신전의 원형이 된 소아시아의 건축양식이 무사시르 사원의 건축양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림 1. 앗시리아 전사들이 무사시르 시의 칼디 신 사원을 침입하는 장면. 궁전 기둥이 사각형으로 묘사되어 있다. 1842년에 발견된 사르곤 II세 궁전의 부조 묘사. 사르곤 II세의 업적을 기리면서 묘사한 장면이다.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투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1. 12. 10. 09:22 책소개

필자의 책이 출간되었다. 좀 늦게 블로그에 공개하게 되었다.

 

필자가 박사졸업 후 10년간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선사문화와 관련해서 쓴 논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서로, 구석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각 시대별로 고고문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환동해문화권은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지만 본고에서는 구석기시대도 포함된다. 연해주의 구석기시대는 후기구석기시대 자료로 세석인 석기가 출토되는 유적이 있는데, 시베리아와 같은 성격이다. 환동해문화권으로 따로 분리할 만큼 근거가 없으며 연구도 매우 부실한 편인데, 시베리아와는 대조적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환동해문화권은 남한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물질자료의 단순한 기원지가 아니라 같은 문화권역이다. 다만 전 기간이 그랬던 것은 아니고 각 시대별로 시간적인 추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백두대간 북쪽으로 연결되는 시호테 알린 산맥과 동해를 공유하는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한 생업형태가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동해문화권의 남부지역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강원도 영동지역에 많이 위치한다.

 

  필자가 생각하는 환동해문화권은 남한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물질자료의 단순한 기원지가 아니라 같은 문화권역이다. 다만 전 기간이 그랬던 것은 아니고 각 시대별로 시간적인 추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백두대간 북쪽으로 연결되는 시호테 알린 산맥과 동해를 공유하는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한 생업형태가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동해문화권의 남부지역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강원도 영동지역에 많이 위치한다.

  반면에 청동기시대는 연해주 및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 문화가 남한에서 강원도 영서 및 한강 유역 일대에서 발견되고 특히 남강 유역에서도 발견된다. 이는 연해주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생업형태가 달랐기 때문이다. 연해주의 청동기시대는 본격적인 농경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고, 그 시작은 신석기시대 후기인 자이사노프카 문화부터이다. 각종 석기 및 곡물자료를 근거로 한다.

   

 그래서 환동해문화권 남부지역인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물질 자료는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강원도 영서 및 한강 유역 심지어 남강의 충적대지에서도 발견된다. 남강 대평유적의 곡옥형 청동기는 비파형동검 이전의 자료로 최초로 발견된 청동유물이지만 출토당시에는 의심스러운 자료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청동기시대 조기인 정선의 아우라지 유적에서 청동유물이 발견되면서, 비파형동검 보다 이른 단계에 청동유물이 존재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실이다. 남강 대평의 곡옥형 청동기와 유사한 유물이 환동해문화권 북부의 시니가이 문화에서 유사한 유물이 발견된다.

  따라서 필자는 강원도 영서 및 한강 유역, 남강 유역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청동기와 토기 중에 일부는 시니가이 문화 및 흥성문화의 물질요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한의 청동기시대 형성과정 중에는 많은 요소가 있었을 것이며, 연해주 및 두만강 유역의 청동기시대 사람들 때문에 한강 이남지역에서 농경문화가 주요하게 자리잡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환동해문화권의 철기시대는 얀콥스키 문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폴체문화가 알려졌는데 폴체문화는 본고에서는 제외하였다. 이미 단결 크로우노프카 문화의 III기(기원전 1~기원후 1세기)에 ‘옥저’라는 정치체가 있었다면, 이를 뒤이은 폴체문화는 이미 역사시대로 진입해서 철기시대에서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환동해문화권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대별로 권역의 차이가 있다. 주로 연해주 및 인접한 두만강과 목단강 유역은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이고, 우리나라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를 비롯한 중부지역은 환동해문화권 남부지역이다. 시간에 따라서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에는 아무르강 하류도 포함된다.

 

환동해문화권의 북부지역인 연해주에서는 청동기시대가 되면서 시베리아 카라숙문화의 청동유물과 같은 성분의 유물들이 발견된다. 또 철기시대 얀콥스키 문화에서는 카라숙 문화 및 타가르 문화의 동검을 모방한 석검 등이 발견되면서 시베리아 문화와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환동해문화권의 남부지역에서도 간접적인 시베리아 문화의 요소가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매우 일부이며, 연해주만이 주요한 길목이었던 것은 아니다. 남북분단이라는 정치적 상황 때문에 연구에 많은 한계가 있다.

 

‘기원 찾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지역범위에 대한 별 다른 고민 없이 현대의 『국경』을 전제로 해서, 국경에 속하지 않으면 전부 외부로만 인식해서 생겨났다. 문화의 원류, 기원, 계보 문제를 다루기 전에 최소한 문화의 지역적 위치가 지정학적인 위치가 아닌 『선사인의 생활권역』부터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필자가 연구했던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물질문화의 요소를 확인했던 과정은 기원찾기가 아니라 문화권역을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선사문화가 남부지역에서 확인되는 이유는 기후와 관련있다고 생각한다. 동해안의 기온이 상승하던 기간에 일어난 현상으로 신석기시대인 6500~6000B.P.과 청동기시대인 3400~2900 B.P.에 일어났다. 각각 루드나야 문화와 시니가이 문화 및 흥성문화로 기온 상승기에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기온하강기에 등장한 여러 문화는 그 지역에 머물렀다는데, 기온 하강기에 등장하면서 남쪽으로 이동했다고 볼 수 있는 유일한 문화는 철기시대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인데, 쪽구들(온돌)을 만들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책의 표지: 사카치 알리안과 키야 유적의 암각화 편집

 

 

 

참고문헌

김재윤 ,2021,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선사문화: 연해주 선사고고학 개론, 진인진

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7세기 스키타이 문화가 흑해 지역에 번성했을 때 코카서스 남쪽에는 우라르투가 존재했고, 앗시리아와 사이에 위치하면서 양 지역을 연결했던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라루투의 성곽 유적인 현재 아르메니아의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는 스키타이 화살촉과 앗시리아의 청동그릇 등이 함께 발견되어서 이를 증명하고 있다.

 

우라루투는 스키타이 문화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은제 거울의 뒷면에 새겨진 금판이 우라루투에서 제작되었다는 견해도 이를 따르고 있다.

우라루투에는 많은 신이 있고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3신 가운데, 최고의 신은 칼디 신이다. 우라루투의 종교는 메소포타미아의 우라루투 사람들에 의해서 차용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칼디 신은 토착 기원이다. 현재 가장 많이 통용되는 칼디 신에 대한 기원은 로완두즈Rowanduz(아제르바이잔의 서부지역, 현재는 이란영토)라고 하는 곳에서 아르메니아의 고원지대로 이주하면서 칼디 신이 퍼진 것으로 알려졌다. 처음에 이 지역에 칼디 신의 숭배가 있었고 나중에 이곳은 우라루투의 도시로 발전했다. ‘칼디’의 어원은 명확하지 않다.

 

칼디 신의 신성한 도시는 아제르바이잔 서부에 위치한 고대 도시 무사시르이다. 우라루투의 국교(Ishpuini 왕의 통치 기간 동안)로 칼디 신으로 정해진 뒤 칼디에 대한 숭배는 앗시리아 신 Ashur 숭배와 유사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칼디 신의 이름은 설형문자로 된 비문에서 ‘칼디의 힘으로 Ishpuini 왕의 아들 메뉴아가 말한다는’문구로 반복되어 사용되었고, 군대의 주요 영웅을 부를 때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칼디 신은 무기로 전쟁을 시작했고, Erikuahi 국가를 패배시켰고 Luhiuni 도시를 멸망시켰으며, 메뉴아 앞에서 그들은 무릎을 꿀었다. 칼디는 강력하고, 칼디 신의 무기는 강력하다.’‘는 문구이다. 우라루투의 신을 언급하기 위한 문구는 앗시리아의 아슈르 신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과 유사하다고 한다.

 

더보기

북한에서 나온 고고학보고서를 보면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어짜고로 시작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반 호수 부근에 세워진 투쉬파 수도에서 가까운 므헤르 문에서 발견된 비문에는 칼디 신에게 받친 동물은 17마리의 양과 34마리의 황소로 알려졌다. 의례는 칼디 신의 사원에서 행해진 것으로 알려졌다. 우라루투의 도시에는 대부분 칼디 신의 사원이 있었고, 일반적으로 성 내부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곳에 세워졌다. 칼디 신의 사원에는 지구라트를 닮은 탑이 늘 마련되어 있는데,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도 마찬가지 였다.

 

칼디 신은 수염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도 있고, 날개도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항상 프로필로 묘사되었다. 칼디 신의 손에는 목적이 명확하지 않은 물건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는 대부분 사자의 등에 올라타고 서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어서 사자가 칼디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간혹 테이시바 신도 사자와 함께 확인되기 때문이다.

앗시리아의 왕 사르곤 2세는 기원전 714년에 우라루투를 물리치고 칼디 신의 성지인 무사시르를 함락했다고 알려졌다.

 

그림 1. 터키 동부의 유적, Kef Kalesi, Adilcevaz에서 발견된 기둥의 초석에 그려진 칼디 신의 모습, 이곳은 루사II세(기원전 685~645)에 우라루투의 궁전. 칼디 신의 모습

 

터키 동부에서 발견된 칼디 신의 모습(그림 1)은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칼디 신의 사원 벽화에 남아 있는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포스팅 참고)

2021.11.25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켈레르메스 유적과 유물] - 기원전 8세기 칼디 신의 사원

 

기원전 8세기 칼디 신의 사원

코카서스 남쪽의 기원전 9세기부터 존재한 우라르트에는 최대 전성기 때 세워진 에레부니 성곽도시가 위치한다. 그 곳에는 2개의 사원이 존재하는데, 수시 사원은 에레부니 성곽을 세운 아르기

eastsearoad.tistory.com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북쪽에 스키타이 세계에서 켈레르메스 유적과 코스트롬스카야 유적이 만들어지는 시기인 기원전 7세기 경 남쪽에는 우라루투라는 강력한 국가가 있었다. 앗시리아와 대적할 정도로 강력했고, 그들의 역사는 앗시리아의 쐐기문자로 남아 있다. 우라루투에서도 쐐기문자를 사용했고, 앗시리아와 거의 비슷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라루투의 기원전 8세기 경 수도인 투쉬파는 현재 터키의 반 호수 부근 반 절벽위에 세워졌다. 그 부근에서 무헤르의 문(問)이라고 알려진 인공동굴에서 우라루투의 신 이름과 그들에게 받쳤던 동물의 양과 수가 적힌 것이 발견되었다. 가장 먼저 적힌 칼디 신, 테이시바 신, 시비니 신이 가장 중요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들은 우라루투의 물질문화 속에서 종종 발견되는데, 사실 이 부분에 의심이 (필자가) 많다.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의인화 된 신의 모습 외에도 신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발견되는데, 생명의 나무, 뱀, 그리핀, 날개 달린 접시 등이다. 어제 설명한 바와 같이 날개 달린 접시는 태양의 신 시비니를 상징한다. 우라루투의 상징화 된 신은 앗시리아의 상징화 된 도안 및 묘사방법이 유사하다. 그래서 우라루투와 앗시리아의 신앙은 매우 유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중에서 투쉬파 유적에서 발견된 인장에는 생명의 나무가 여기저기서 표현된다. 나무를 숭배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는데, 물이 담긴 주전자도 함께 표현된다. 사루두리 II세의 헬멧(그림 1)에도 생명의 나무를 두고 날개 달린 신이 숭배하는 장면(그림 2)이 그려져 있다.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사르두리 II세의 헬멧

 

그림 2. 그림 1의 상세

 

그림 3. 토파크 칼레 유적 출토, 골제판의 새김. 생명의 나무

 

그림 4.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실린더 모양의 인장에 표현된 뱀

 

 

많은 인장에는 별, 달과 같은 자연물과 함께 생명의 나무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생명의 나무는 벽화에 자주 등장한다.

 

생명의 나무 외에도 그리핀과 날개 달린 신의 이미지가 유물 속에 많이 표현되어 있다. 우라루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신의 의인화 과정과 생물의 결합하는 과정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동물형태의 신들이 점차 의인화 되는 모습으로 변형되는데, 그 중간과정에 있는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필자가 반인반수(그림 5, 6)라고 부르는 형태이다.

 

그림 5. 토파크-칼레 유적 출토, 우라루투 날개 달린 신,  골제품, 아나톨리 박물관

 

그림 6. 토파크 칼레 유적 출토, 우라루투 날개 달린 신, 왕좌를 장식, 에르메타주 박물관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