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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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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7세기의 우라르트 마지막 도시인 테이시바이니에서는 스키타이 화살촉이 다량 발굴되면서 스키타이 사람들에 의해서 망했다고 보고 있다.

스키타이 유물은 화살촉 뿐만 아니라 재갈멈치 및 철제 무기와 구슬 등도 발견되었다.

 

하지만 우라르트 왕국의 특징적인 유물들도 전해지는데 청동으로 된 인물상 뿐만 아니라 우라르트 재갈멈치, 투부도 있다.

 

그림 1. 우라르트에서 제작된 청동인물상, 테이시바이니 유적출토

 

그림 2. 우라르트의 재갈멈치, 테이시바이니 유적

 

그림 3. 앗시리아의 청동그릇, 테이시바이니 유적

 

그런데 우라르트에는 역시 앗시라아 제품들도 많이 발견되었는데, 청동그릇, 실린더 모양의 도장과 같은 유물이다. 코카서스 산맥 북쪽의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출토된 앗시리아의 유물은 우라르트를 통해서 수입된 것이다.

 

우라르트에서 제작된 청동인물상(그림 1)은 스키타이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발견된 은제거울이나 투부가 그리스에서 제작되었다고 하는 논거의 반박자료로 충분하다.

 

그리스에서 제작되었다고 하는 설이 설득력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이유는, 서양의 고대근원이 그리스라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우라르트 보다는 그리스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먹혔?다고 할까?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성곽 주변에서는 무덤도 발견되었는데 카미르 블루르 유적에서는 골제로 된 동물장식이 발견되었는데, 굴레장식이다.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비슷한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그림 4. 카미르 블루르 유적

 

유적을 발굴한 피오트로프스키는 이 유물을 그리핀으로 보았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카미르 블루르 유적에서는 말이 매장된 무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코카서스 산맥 북쪽의 켈레르메스 유적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하다. 코카서스 산맥도 충분히 높기 때문에 문화적 구분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유적에서 나타나는 상황은 매우 흡사하다.

 

 

 

참고문헌

Б.Б. Пиотровский Скифы и древний Восток(Доклад на Конференции по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й археологии).// СА. 1954. XIX. С. 141-158(피오트로프스키 1954, 스키타이와 고대동방)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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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남부의 우라르트 성곽인 테이시바이니에서는 스키타이 화살촉이 발견된다. 이 성은 스키타이 화살촉 뿐만 아니라 철제 무기 및 구슬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성벽에서 발견된 엄청난 숫자의 스키타이 화살촉으로 보아서 스키타이 사람들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출토된 스키타이 화살촉


비슷한 화살촉이 앗시리아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기원전 7~6세기 스키타이 화살촉이다. 토파흐 칼레, 앗시리아의 수도 아수르 등지에서 발견되어서 스키타이 화살촉을 사용했다.

그림 2. 테에시바이니 유적 스키타이 청동화살촉, 앗시리아에서 발견됨. 1,2,3-하이카베르드, 4-토파흐-칼레, 5,6-아슈르, 7,8-바비론, 9,10-타르스, 11,12-데르아르



처음에 앗시리아에서 이런 유물이 발견되었을 때 화살촉의 경부에 구부러진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화범의 재료를 부착하는 장치로 설명했다. 하지만 보네트는 이러한 유형의 청동화살촉은 코카서스 부근에서 널리 사용된 것을 지적했다.

무구 중에는 왕의 이름이 있는 것도 발견되었는데 청동으로 된 찰갑이다. 아르기티치 I세라는 명칭이 씌여 있었다. 청동투구도 우라르트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림 3.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청동투구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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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남쪽의 우라르트 마지막 도시인 테이시바이니는 우라르트 최대의 유적으로 점토벽돌로 만들어진 성곽 유적이다. 벽의 두께가 3.5m에 달하는 지점도 있다. 계단식의 구조인 건축물은 한방의 창이 다른 방의 지붕으로 이어지는 구조이고, 벽돌의 1개의 크기 중에 가장 큰 것은 0.5m이상이다.

 

모든 창고(약 120개의 방)는 방별로 인감으로 밀봉되었다. 성곽에서는 라즈단 강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도관이 설치되었는데, 도관은 둥근 돌 파이프로 연결되었는데, 에레부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거주공간에서는 녹로, 빵을 굽던 화덕자리, 곡물 분쇄기 및 가정용품 등이 발견되었다.

 

성곽은 메소포타미아 건물스타일로 진흙 벽돌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현무암 기초위에 진흙 벽돌로 쌓은 것이다. 현재는 원시 벽돌은 벽동 세공의 선이 보이는 정도로 점토 덩어리로 변했다(그림 4)

 

그림 1. 1950년 사진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정리된 바닥

 

그림 2. 1950년 점토벽돌로 된 성벽, 6줄의 벽돌

 

 

그림 3. 테이스바이니 성곽의 중앙문 복원도

 

그림 4. 현재 남아 있는 성벽

 

그림 5. 구글 위성으로 본 테이시바이니 유적

 

유적에서는 금속가공소가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사진이나 그림은 구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철제품은 남아 있는데 처음에는 무기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노동도구를 제작했다고 알려졌다.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는 금속덩어리와 거푸집이 발견되었습니다. 장검, 단검, 창, 화살 등과 같은 무기가 많다.

 

그림 6.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삽날

 

그림 7.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철제품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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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라르트의 마지막 도시라고 알려진 테이시바이니 유적은 우라르트 전쟁의 신 테이세바의 명칭을 도시명에 붙인 것이다. 유적은 기원전 7세기 경에 세워졌고 적의 공격으로 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망하기 전까지 테이시바이니는 매우 풍족한 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적에서는 와인 저장고가 발견되었고, 성의 남쪽에는 포도 뿐만 아니라 살구, 사과 , 석류, 버찌, 호두, 복숭아 등을 길렀던 과수원도 발견되었다. 과일씨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다.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성곽의 평면도, 그리드는 50m간격


성곽내에는 창고들이 발견되었는데, 알곡 저장소, 참기름 제작소, 포도주 제조공간, 양조장 및 맥주 보관소 등이 확인되었다. 알곡보관소에서는 중앙에 구멍이 있는 부침개 모양의 커다란 빵도 발견되었다. 참기름을 제조하던 공간에는 기름을 짜고 남은 깻묵의 흔적과 돌통이 발견되었다. 포도주 제조공간에도 같은 통이 발견되었다.

그림 2. 테이시바이니 성곽의 창고, 노란색-알곡저장소, 녹색-양조장 및 맥주 보관소, 하늘색-참기름 제작 및 보관소, 자주색-와인저장고 , 1. 중앙문, 2. 서문, 3. 내성, 4. 지배자의 거주지, 5- 쐐기문자점토판이 발견된 곳 (그리드는 50m간격)

그림 3. 테이시바이니 성곽의 석주


과수원에서 가장 많이 발견된 것은 포도씨이고 포도주 저장공간이 가장 많이 발견되어서 포도주 제작이 주요한 생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포도주를 저장한 토기는 카라스 라고 부르는데 400개가 발견되었다. 카라스 한 개는 800~1200리터이다. 포도주를 따르는데는 쿱신(그림 4)(스키타이 문화에서는 유제품을 보관하거나 마시는 잔을 쿱신이라고 부른다)을 사용하는데, 문양이 새겨져 있다. 테이시바이니 유적외에는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쿱신은 1036개가 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림 4. 테이시바이니 성곽의 포도주 저장고(28번)

그림 5. 포도주 저장고 28번에서 나온 쿱신

 

 

 

그림 6. 25번과  28번 포도주 저장고의 바닥 평면도


아라르트 분지에서는 0.5~1톤의 알곡이 1헥타르에서 생산된다. 1500톤의 알곡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2000~3000헥타르의 경작지가 있어야만 가능한데, 테이시바이니 창고에 저장된 정도의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300헥타르의 땅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전체 농경의 면적은 4000~5000헥타르에 달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코카서스 산맥 남쪽에 위치한 그루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은 현재에도 포도주생산으로 유명하다. 소비에트 때도 꼬냑과 와인 생산을 담당했던 곳이다. 필자는 와인 맛을 잘 모르지만 이곳 와인을 좋아했다. 자주 마셨는데, 와인도 뒤끝이 있다. 나도....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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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르트의 도시로 잘 알려진 곳은 예레부니와 테이시바이니 유적이 있다. 모두 성곽 유적으로 특히 테이시바이니(Тейшебаини) 성곽에서는 코카서스 산맥의 북쪽 스키타이 기원전 7세기 유적인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청동화살촉과 같은 모습의 화살촉이 발견되었다(그림 1).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청동화살촉


테이시바이니 유적은 기원전 13세기부터 기원전 8세기 혹은 기원전 7세기까지 존재했던 도시이다. 유적은 1936년에 발견되었고 카르미르-부루르 언덕 위에 만들어졌는데, 유적의 면적은 4헥타르가 넘는다고 한다. 2차 대전이 시작된 1939년부터 발굴을 했으나 전쟁으로 발굴은 중단되었고 1958년부터 다시 피오트로프스키가 발굴을 했다. 이 때 우라르트(철기시대) 이전인 순동시대 및 청동기시대(기원전 13~기원전 8세기 어느시점)에도 문화층이 있던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우라르트 문화층을 발견했다.

도시의 명칭은 역시 우연하게 발견된 쐐기 문자에서 발견되었다. 우라르트의 왕인 루스이 II세가 세운 것인데 그는 아르기쉬치 II세의 아들로 기원전 685~639년에 통치했다. 우라르트 왕국의 쇠퇴기에 세워진 도시로 알려졌다. 기원전 714년 아시리아 사람들은 무사시르에 위치한 우라르트 신 칼디의 주요 종교 건물을 파괴한 것으로 알려졌다. 루스이 II세는 우라르트 신의 숭배를 강화해서 이를 군사력 강화로 이으려고 애쓴 왕으로 알려졌다. 종교를 미끼로 대중을 겁박했을 것이다. 루스이 II세 통치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반 호수 북쪽에 위치한 칼디 신을 숭배하는 도시를 건설하고, 전쟁의 신(神) 테이세바의 이름을 따서 테이세바이니 라고 하는 성을 건설한 것이다. 테이시바이니의 경제와 관련된 내용이 적힌 쐐기문자가 적힌 점토판이 남아 있다.

그림 2. 지질학자가 발견한 점토판


이 유적에는 1950년에 촬영한 항공사진이 남아 있다(그림3). 고대 성곽의 도로와 성벽 및 거주구역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림 3. 1950년 촬영, 불가코바가 찍은 항공촬영, 테이시바이니 고고유적발굴조사장면

 

그림 4. 1950년 촬영, 테이시바이니 성내에서 발견된 포도주 보관소(28번), 저장고 중에 한 곳으로 땅을 파고 큰 도가니를 묻은 방법으로 보관했다. 가장 상단에는 포도주의 종류와 보관 날짜를 표시했다.



발굴결과로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멸망은 여름이었다. 소가 고지대 목초지에 있었고 아직 포도가 익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리고 한밤에 공격이 시작되어 서둘러 도시주민들이 거주구역을 떠나 요새내부로 들어갔다고 판단했다. 발견된 화살촉의 방향이 적군은 언덕 경사면에서 공격했다. 거주구역에서는 여성와 아이들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적에게 벗어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성곽 안쪽의 내성에 임시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결과 화재가 발생해서 요새 지붕이나 천장등이 파괴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테이시바이니가 마지막에 불타면서 붉게 변한 벽돌로 인해서 이 유적이 위치한 곳의 이름이 카미르-브루르(붉은 언덕)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으로 전해진다. 공격으로 멸망한 이유는 요새로 통하는 물 공급시스템이 파괴되면서 더 이상 이 곳에서 생계를 이을 수 없었다고 알려졌다. 이 유적에서는 포도를 재배하는 과수원도 발견되었는데, 물 공급시스템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연구되었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Yk1k5FjnYe1OSn-yRxnY5IuDo9w9PMt&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복사본 복사본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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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 Б. Город бога Тейшебы // Совет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 Москва, 1959. — № 2.(피오트로프스키 1959, 테이세바 신의 도시)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Пиотровский Б. Б. Урартская крепость Тейшебаини (Кармир-Блур) (к 25-летию раскопок) // Краткие сообщения Института Археологии. — 1965. — Вып. 100. — С. 72—78.(피오트로프스키 1965, 우라르트 테이시바이니 요새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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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스키타이 세계의 가장 이른 유적인 켈레르메스는 코카서스 산맥의 북쪽에 위치한다. 코카서스 산맥의 남쪽은 자카프카스라고 부르는데 우라르트 라고 부르는 국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소비에트 시절, 가장 오래된 철제품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이 오리엔트 지역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9세기부터 이곳에는 우라르트가 들어섰는데, 기원전 8세기가 최대 절정기로 알려졌다.

기원전 8세기 초에 도시 에레부니를 세웠졌다고 알려졌는데 그 위치는 돌블록이 발견되기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아린 베르드 언덕의 발굴에서 돌블록에서 새겨진 글자를 통해서 그곳이 에레부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이 위치한 곳이다.

그림1. 에레부니 도시의 사원지 입구에서 발견된 비문

아바쉬사를 위해 메누아의 아들 수시 아르기쉬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에레부니라고 명명했다. 이곳은 황량했고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위대한 업적을 그곳에서 수행했다. 하테와 추바니나라의 6600명 병사들을 나는 그곳에서 살도록 했다.: 러시아어를 번역함.
.

그림 2. 에레부니 도시, 연두색 부분이 사원지이다.


예레부니에서 발견된 돌 비석은 아르기쉬치왕이 통치하기 시작한 5번째 해(기원전 782년)에 새겨졌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예레부니 도시는 기원전 782년 보다 이른 시기에 세워젔을 것이다. 성곽 유적이 하나 더 발견되었는데, 테이시바이니 성곽으로 이곳에서는 스키타이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에레부니가 위치한 곳은 높은 언덕 위로, 아라라트 분지와 요새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 아라라트는 성경에 나오는 그곳으로,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끝에 정착했다고 하는 그곳이다. 믿거나 말거나.

지도상에서는 아라라트 산은 에레부니와 근접한 곳에 위치한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아르메니아 꼬냑이 매우 유명하고, 지금도 러시아에서는 그렇지만, 진짜가 잘 없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꼬냑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아라라트 인데, 프랑스 보다 먼저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내가 마신 아라라트도 가짜 였을까? 꼬냑은 뒤탈이 심한 술이다.
에레부니 옆에 있는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는 와인제작소도 확인되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이르다고 한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Yk1k5FjnYe1OSn-yRxnY5IuDo9w9PMt&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복사본 복사본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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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Б.Б. Пиотровский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М.: 1959. 260 с.(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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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스키 고분에서는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보이는 표범문양 장식과 거의 유사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옷에 달았던 유물이다. 표범장식과 마찬가지로 스키타이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는 유물은 사슴장식이다.

 

그림 1. 울스키 유적에서 출토된 사슴장식과 표범장식

 

뿐만 아니라 말머리 모양 장식판도 나왔는데, 길이가 10cm가량으로 실제로 말머리를 장식했는지는 의문이다. 장식판의 눈부분에는 감입부가 있어서 그 안에 다른 색의 돌을 끼워 넣었을 수 있다. 콧 구멍자리에 토끼 2마리가 표현되었다.

 

그림 2. 울스키 유적 말머리장식

 

유적에서는 산염소 모양의 황금으로 만들어진 동물장식(단독)도 발견되었는데, 같은 동물장식이 청동으로 된 간두령 속에도 표현되었다. 스키타이 동물장식은 굽동물의 경우 대개 다리를 배 쪽으로 접어 넣은 모양이지만 이 유물은 머리를 뒤로 돌린 형태이다. 머리를 뒤로 돌린 야생염소 형태는 스키타이 사람들이 고대 오리엔트 전통에서 도입한 것이다.

 

 

그림 3. 울스키 유적에서 출토된 야생염소

 

그림 4. 울스키 유적에서 출토된 간두령장식

 

고대 오리엔트 전통의 특징은 토끼 장식도 해당된다. 쿨-오바 유적에서 발견된 토끼 장식은 다리우스 왕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2020.08.3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흑해의 전사] - 스키타이 문화 속의 토끼

 

스키타이 문화 속의 토끼

흑해의 크림반도 끝에 위치한 케르치 반도의 쿨-오바 유적에서는 사슴 장식판이 발견되었다. 이 장식판은 흑해의 동물문양을 대표하는 코스트롬스카야 사슴장식판과 비슷하다. 그런데 쿨-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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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세기 울스키 유적은 볼가 강 유역 기원전 5세기 필리포프카 유적의 무덤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울스키 유적의 연대가 이르고, 이미 기원전 7세기에 나무로 된 구조물을 봉분 속에서 넣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무덤구조는 흑해지역에서 발생해서 볼가 강 유역으로 번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울스키 유적에서 나오는 고대 오리엔트 특징의 동물장식은 기원전 7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앗시리아, 그리스의 수입품, 우라르트에서 제작된 유물 등이 나와서 무덤 속에 단순히 스키타이 유물만 넣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목을 돌린 산염소장식이 표현된 간두령은 간두령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간두령은 스키타이 재지의 유물로 그곳에 오리엔트 장식이 표현되었다고 해도 그 유물 자체는 스키타이 지역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А. И. Иванчик, А. М. Лесков. Ульские курганы. Культово- погребальный комплекс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на Северном Кавказе.//Corpus tumulorum scythicorum et sarmaticorum. Т. 2//Москва, Берлин, Бордо, 2015(이반치크, 레스코프 2015, 울스키 무덤, 카파카스 북쪽의 스키타이 시대 무덤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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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지역의 스키타이 문화는 기원전 7세기 유적인 켈레르메스 유적, 멜구노프 유적, 코스트롬스카야 유적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그 외는 기원전 5세기~4세기 이후의 유적이다. 그래서 알렉세예프는 기원전 6세기의 유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암흑의 시대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유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앞과 뒷 시기에 비해서 없다는 이야기로 기원전 6세기 유적으로 울스키 아울이 알려져 있다. 11기의 무덤이 있는데, 1898년 2기가 발굴되었고, 1908년에 3기가 다시 발굴되었다. 1898년 발굴된 유적에는 400여필의 말이 순장된 채 발견되었다. 대부분 도굴로 상당히 교란되었다. 1호는 나무로 된 구조물을 넣은 목실무덤으로 코스트롬스카야 유적과 유사하다고 알려졌다.

 

그림 1. 1898년에 조사된 1호, 왼쪽: 베셀로프스키의 야장, 오른쪽: 1898년 1호의 단면도

 

1982년에 조사된 무덤에서는 좀 더 자세한 구조를 알 수 있다. 나무로 된 무덤방이 지상으로 된 구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림 2. 1982년 조사된 1호의 평면도(우), 1호의 복원도

 

2007년에도 무덤 1기가 조사되었는데, 역시 지상위에 나무 무덤방이 있는 구조이고, 말의 매장이 발견되었다.

 

그림 3. 2007년 조사된 1호 평면도

 

기원전 7세기 유적인 켈레르메스 유적, 코스트롬스카야 유적 등은 나무로 된 무덤의 구조물이 지상으로 세운 것이 발견되었다. 기원전 6세기의 유적에서도 비슷한 구조이다. 하지만 기원전 7세기의 유적에서 구덩이를 파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나무로된 구조물만 지상으로 만든 것이다. 기원전 6세기 경에는 지상식으로만 만들어진 무덤방이 확인된다.

이는 볼가 강 유역의 필리포프카 유적이나 탁사이 I유적의 무덤 구조와 비슷하다.

 

2020.11.1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우랄 남부/필리포프카 유적] - 남부 우랄 스키타이의 무덤 속...

 

남부 우랄 스키타이의 무덤 속...

남부 우랄의 필리포프카 유적에는 25기의 무덤이 약간은 동에서 서로 무질서하게 배치되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V’자형이지만, 이를 벗어난 무덤도 여러 기 존재하기 때문에 단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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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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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Ульские курганы. Культово- погребальный комплекс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на Северном Кавказе.//Corpus tumulorum scythicorum et sarmaticorum. Т. 2//Москва, Берлин, Бордо, 2015(울스키 무덤, 카파카스 북쪽의 스키타이 시대 무덤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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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1. 11. 7. 09:22 환동해문화권의 암각화

 

울산 대곡천변에 위치한 반구대 암각화에서는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배 그림은 아마도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서 낚시를 했던 증거로 볼 수 있다.

다만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에서는 마스크형 그림과 함께 발견되고, 울산에서는 고래와 함께 그려진다는 점은 차이가 있다.

 

그런데 같은 강에 위치하지만 천전리 암각화에는 많이 다른 양상이다. 선사시대만 국한되지 않고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의 글 까지 남아 있어서 제작연대도 차이가 있다. 왜 천전리에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겼는지 모르겠다.

 

또 수수께끼 같은 것은 이해하지 못할 동물문양이나 사람도 아닌 동물도 아닌 반인반수의 표현등 괴기한 문양 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같은 주제이지만 반구대암각화에서는 볼 수 없는 형상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림 1. 동일주제이지만 반구대 암각화와 다른 표현의 천전리 암각화

 

필자는 천전리 암각화 중에 몸통이 선처럼 표현된 동물문양과 손을 말고 있는 사람은 시베리아 카라숙문화의 사슴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시베리아 카라숙 문화는 기원전 14~10세기에 존재했던 문화로 그 문화의 청동 유물은 연해주에서 발견된다. 연해주의 그 문화(시니가이 문화)는 한반도에서 발견된다. 한반도에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카라숙문화의 흔적이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오쿠네보 문화의 그림도 있지만(그림 2) 오쿠네보 문화가 존재했던 시기는 카라숙 문화 보다 더 오래된 기원전 25~19세기로 이때 우리나라에는 신석기시대이다. 시대성을 떠나서도 우리나라에서는 오쿠네보 문화의 존재가 발견된 바 없다. 그래서 천전리 암각화에서 오쿠네보 문화의 그림은 어떻게 남는지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카라숙문화와의 직접적인 관련성도 좀 더 근거가 필요하다.

 

 

그림2. 천전리 암각화에서 발견된 시베리아 암각화의 요소

 

 

 

그럼 천전리의 그림은 누가 그린 것일까?

 

천전리 암각화를 그린 사람들은 대부분 영남에 살던 청동기시대 사람이었을 것이지만 어떻게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분지에서 발견된 그림이 천전리에 남아 있는지 아직은 확언하기 힘들다. 누군가 보고 와서 머릿속에 남은 기억으로 그린 것인지, 그 누군가가 시베리아에서 온 사람인지 아니면, 영남에 살던 청동기시대 사람이 보고 들은 바를 그린 것인지 불분명하다. 앞으로의 연구성과를 기다려 볼 수 밖에 없다. 아직까지는.

 

필자는 울산 대곡천의 반구대와 천전리 암각화는 같은 강변으로 근거리에 위치하지만 매우 성격이 다르다 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참고문헌

김재윤, 2021, 「반구대암각화와 환동해문화권 북부지역의 배 문양 암각화 비교검토」, 『인문사회과학연구』,제 22권 제 2호.

김재윤, 2021, 「시베리아 청동기시대와 천전리 암각화의 비교고찰-오쿠네보 문화와 카라숙문화 암각화를 중심으로」,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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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1. 11. 6. 09:22 책소개

 

다시 돌아가서 스키토 시베리아 문화권의 동물장식처럼 인간형상물은 이 문화의 상징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앞서 보셨듯이 인간형상물의 전통은 스키토 시베리아 문화권의 이전부터 지속되어 왔고 철기시대에 극대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동부지역 여신상인 미라는 부활을 기원하면서 제작되었다. 반면에 서부지역의 여신상은 기원전 7세기는 조상숭배의 개념에서 기원전 5세기 이후는 실용적인 벽사의 개념으로 바뀌는 차이점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념들이 갑자기 생겨났을까?

 

스키토 시베리아 문화권 이전에도 시베리아에서는 무덤 속에 뼈로 제작된 인간형상물을 무덤속에서 지속적으로  부장해 와서 매우 정신적인 영역의 유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고, 부활의 의미가 미라 이전부터 있었을 수 있다.

반면에 흑해지역에서는 특정기간에 제작되며 주거지와 무덤에서 모두 발견된다. 조상숭배의 개념에서 부적이나 벽사의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인간형상물은 일상생활용품과 달리 그 변화는 천편일률적이 아닐 수도 있다. 후기구석기시대부터 무덤 혹은 주거지에 부장되는 그 행위가 지속적으로 보존된다는 것으로 보아서 동물문양 처럼, 유라시아 초원 선사문화의 상징물로써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림. 유라시아 초원 선사시대 인간형상물의 동서비교

 

*위의 글은 11월 5일에 개최된 제 45회 한국고고학대회의 필자 발표문을 발췌한 것입니다.

한국고고학회 (kras.or.kr)

 

참고문헌

김재윤, 2021, 유라시아 초원 선사시대 인간형상물, 45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발표문

김재윤 2021, 『유라시아 초원 스키타이 문화의 미라와 여신상: 교과서 밖의 역사, 진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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