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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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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12. 13:36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중앙아시아의 아무다리야강은 타지기스탄과 아프카니스탄 국경지역에 위치하며, 죽어가고 있는 아랄해로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에는 전후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그리스인, 스키타이인, 페르시아 인들이 서로 만난 흔적이 남아 있다. 유적을 발견한 사람들은 아마도 상인?들이었을 가능성이 큰데, 도굴되어서, 정확하게 유적의 성격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온 유물들은 페르시아 아파다나 궁전의 벽 조각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물들이 많은데, 그리핀이 달려 있는 오메가 모양의 개방형 팔찌도 그 중 한 유물이다. 이 유물을 들고 있는 대표단은 시리아(Schmidt E. 1953) 혹은 리디아Barnett R. 1968 대표단이라고 한다.

 

그런데 팔찌 앞에 들고 가는 사람은 손잡이가 없는 그릇을 나르고 있다. 손잡이 없는 그릇으로 흔히들 bowl이라고 하는 기형이다. 아무다리야 유적에서는 3점이 발견되었는데, 금제품 2점과 은제품 1점이다.

금제품 중 1점은 매우 낮은 기형인데, 크기가 12.1cm밖에 되지 않는다. 바닥에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가장 중앙에는 원형 그 가장자리로는 6개의 물방울? 혹은 아몬드 모양으로 도드라지도록 눌러서 표현했다. 원형과 6개의 아몬드는 태양을 닮았다. 그 가장자리에는 좀 더 큰 아몬드 6개가 방향을 달리해서 양각되었고 그 사이에는 12개의 반인반수가 표현되었다. 뒷다리 2개로 서 있는데, 앞다리 중 오른쪽 앞발은 위로, 왼쪽은 아래로 내리고 있으며 2마리는 꼬리를 맞대고 있다. 얼굴은 인간인데, 몸통은 사자와 날개가 달려 있다.

반인반수는 앗시리아부터 전해진 문양으로 아케메니드 왕조에서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게 한 유물로 생각된다. 기원전 4세기의 유물이다(달턴 1905).

 

그림1.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금제 그릇의 바닥

 

은제 볼도 페르시아의 제품으로 생각된다. 바닥의 중앙에는 로제트 장식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그 가장자리로도 꽃 잎장식이 49개가 채워져 있다.

 

그림 2.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은제 그릇의 바닥, 직경 14.5cm

이 유물은 아무다리야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원전 5세기라고 생각한다. 페르시아의 대표적인 그릇문양이다. 이 문양이 표현된 그릇은 벽화 속의 그림과 같이 동체부가 한번 꺽어져서 구연부가 벌어지는 기형이다.그래서 그림 2의 그릇도 벽화와 같은 모양으로 생각된다. 

 

또 하나의 금제 볼은 아무 장식이 없는 그릇이다.

 

그림 3.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가장 앞의 금제 그릇,  직경 9.9cm

 

그런데 반인반수가 있는 금제 그릇(그림 1)과 꽃 잎이 표현된 은제 그릇(그림 2)은 기원전 7세기 스키타이 유적인 흑해의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발견된 그릇과 비슷한 문양이다. 두 그릇은 금제 그릇이었는데, 아몬드 문양과 비슷한 문양이 그릇의 표면이 양각으로 표현된 유물 1점과 그릇의 바닥에 꽃 문양이 음각된 그릇이다. 이 두 그릇은 앗시리아에서 제작되어 스키타이 유적에 남게 된 것이다.

 

2020/08/02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켈레르메스 유적과 유물] - 스키타이 왕의 무덤에 들어간 앗시리아의 황금 잔

 

스키타이 왕의 무덤에 들어간 앗시리아의 황금 잔

흑해 인근의 코카서스 산맥 북쪽에 위치한 스키타이 무덤 가운데 가장 이른 것 중에 하나는 켈레르메스 고분이다. 기원전 7세기 정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1903년과 1904년에 독일인 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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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혹은 리디아 대표단이 들고 있는 그릇은 바닥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기형(그릇의 형태)은 그림1, 그림2와 비슷하다. 그림 3의 기형은 구연부(입술)로 갈수록 벌어지는 형태로, 벽화에 묘사된 그릇과는 형태가 달라서 대표단이 들고 있는 그릇과는 다르다. 그림1과 그림2를 벽화 속의 그릇으로 생각해 본다면 페르시아 그릇이라고 생각했던 그릇을 시리아 혹은 리디아 대표단이 들고 페르시아 왕에게 선물 주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외국 왕에게 주는 선물을 그 나라의 물건으로 주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결국 로제트 문양의 실버 그릇, 반인반수와 아몬드 문양의 금제 그릇 모두 이미 소속감이 불명확해진다.

 

스마트폰이 한국에서 최초로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삼성스마트폰은 한국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안다. K-POP을 팝 음악의 본고장인 미국 혹은 영국 음악이라고 하지 않는다.

기원전 7세기에 스키타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앗시리아 유물은 수입품이었지만 이미 기원전 5~4세기에 스키타이 유물과 함께 발견되는 문양을 페르시아 문양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참고문헌

Barnett R. The Art of Bactria and the Treasure of the Oxus. — «Iranica Antiqua», Leiden, 1968, vol. 8, p. 34-53, pl. II-XIV.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Schmidt E. 193, Persepolis. Vol. 1.1: Structures, Reliefs, Inscriptions, Chicago vol.

Dalton O.M. The Treasure of the Oxus with Other Objects from Ancient Persia and India Bequeathed to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by Sir Augustus Wollaston Franks. London, 1905.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Oxus_Treasure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0. 12. 11. 12:53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아무다리야 퇴장 유적의 유물 가운데는 스키타이 스타일의 동물장식(7점은 동물장식 1점은 도깨비?)가운데 그리스의 쿠로스(kouros) 입상으로 추정되는 인간형상물(그림 1,2)도 발견되었다.

아시다시피 쿠로스는 그리스 Archaic period in Greece에 발견되는 입상으로 옷을 입지 않은 남성입상을 돌에 조각한 것이다.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발견된 입체의 인간형상물은 대부분 옷을 입고 있는데, 금으로 제작된 것이고, 옷을 입지 않은 채 발견된 1점은 그리스 쿠로스 상에 많이 비교한다. 이 유물은 은제품인데, 머리에 쓴 모자만 금으로 제작되었다.

 

그리스 쿠로스상은 손을 아래로 뻗었으나 아무다리야 소년상은 주목을 움켜 쥐고 90도 각도로 내 밀고 있다. 움켜쥔 손에는 물건을 위한 구멍이 있다. 또한 그리스 쿠로스 상에는 없는 모자를 머리에 쓰고 있다. 모자의 앞쪽이 앞으로 불룩(그림 1)하게 튀어나오도록 된 것으로 고깔모자와는 다르다. 그런데 모자는 쓰고 옷은 입지 않은 아이러니 한 유물이다.

 

그림 1.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출토된 남성상. 높이 29.2cm

 

그림 2. 그림 1과 동일 유물

 

이 유물을 처음 연구한 달턴은 그리스 거울의 손잡이에 장식된 인간형상물과 비교해서 기원전 5세기 유물로 생각했다. R. Barnett(1968)는 무엇보다 모자에 주목해서 아폴로 미트라(Apollo Mithra)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기원전 6세기 후반에서 기원전 5세기 초의 그리스 유물과 비슷하지만 늦게는 기원전 4~기원전 3세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쿠즈미나(1976)는 R. Barnett의 의견에 따라서 그리스 화된 미트라의 이미지 및 신으로 표현된 통치자의 초상화 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사카족(스키타이인들 가운데 중앙아시아 지역민)과 거리가 먼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알렉세예프도 이 사람이 쓴 모자는 미트라의 금을 상징하고 쿠로스 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소년이 손에 무엇을 들고 있었는지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른데 새 혹은 연꽃을 들고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제이말 1979)이 있다.

 

그런데 필자가 왜 이 유물을 소개했을까?

물론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스키타이 유물과 함께 발견되었다는 점 자체가 흥미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들 추측하셨겠지만 비슷한 유물이 시베리아 남부의 투바에서 2009년에 발견되었다. 부굴리 유적의 1호에서 발견되었는데 모두 3점이다. 인간형상물의 머리만 발견된 것이다(그림 3). 머리에 쓴 모자는 모자가 앞쪽으로 쏠린 형태이다. 이 유물은 청동으로 주조된 것이고 금으로 도금되었다. 부굴리 유적은 최소한 기원전 3세기(늦어도 기원전 3세기, 더 빨리 올라 갈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 사람이 쓰고 있는 모자는 아무다리야 유적에서 발견된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추구노프 2014). 모자가 앞으로 기울고, 이마는 가리고 귀는 내어놓는 스타일이다.

 

 

그림3. 시베리아 남부 투바의 부굴리 1호 출토품, 길이 1.7cm, 너비 1.3cm

 

필자가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 나온 모자 쓴 남성입체상(그림 1)은 아이러니 하다고 했다. 그리스의 쿠로스라 불리는 입상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옷도 입지 않았다.  유물 속의 그리스인은 항상 거의 반 이상 벗거나 몸을 많이 드러내고 있다. 반면에 스키타이 인들이 벌거 벗은 채로 등장한 예는 한 점도 없기 때문에 이 사람을 스키타이 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런데 남부 시베리아에서 왜 비슷한 모자(고깔모자와는 다른 앞이 무너진 모자)를 쓴 사람이 나오는지는 너무 궁금하다.

 

참고문헌

 

Dalton O.M. The Treasure of the Oxus with Other Objects from Ancient Persia and India Bequeathed to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by Sir Augustus Wollaston Franks. London, 1905.

Barnett R. The Art of Bactria and the Treasure of the Oxus. — «Iranica Antiqua», Leiden, 1968, vol. 8, p. 34-53, pl. II-XIV.

Чугунов К. В. Захоронения «золотых людей» в традиции номадов Евразии (новые материалы и некоторые аспекты исследований) //Диалог культур Евразии в археологии Казахстана. Астана, 2014. С. 714–725.(추구노프 2014, 유라시아 유목민 전통과 황금인간의 무덤)

Кузьмина E.E. Греческий курос в Бактрии. — Краткие сообщения Института археологии. М., 1976, вып. 147, с. 27-33.(쿠즈미나 1976, 박트리아의 그리스 쿠로스)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Oxus_Treasure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0. 12. 10. 13:08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물 가운데 스키타이 스타일과 제작기술로 만들어진 유물은 8점으로 파악된다. 광학현미경과 주사전사 현미경을 사용해서 분석한 결과이다(Scythians 2017).

www.google.com/maps/d/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동물장식이 있는 개방형 금팔찌, 그리핀 장식, 반지, 활 통 장식물, 원판형 유물 3점(동물문양, 동물의 얼굴, 도깨비? 얼굴이 그려짐)이다. 그 중에서 어제 소개한 개방형 금팔찌는 주조해서(거푸집이용) 제작되었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금판과 금으로 된 선(와이어)을 손으로 가공해서 만든 것이다. 금판은 원하는 모양과 두께로 망치질 되었고, 앞면과 뒷면 모두 잔 손질을 해서 납작한 금판을 입체적인 디자인으로 만든 것이다. 금속은 해머링(망치질)과 가열냉각(annealing)을 통해서 모양이 변형되었다. 망치질에 의해서 생성된 내부 응력을 제거하기 위해 금속을 수백도까지 가열했다가 다시 식히는 것을 반복한 것이다. 그러면 금속은 연화되고 균열없이 금속의 형태가 변형되어 다른 형태로 보일 수 있다.

 

사자그리핀의 꼬리도 따로 부친 것이 아니라 두드려서 만든 것이다. 금판을 뒤에서 망치로 두드리는 금속작업을 reposse(push)라고 하는데, 체이싱 기법과 함께 결합해서 많이 사용된다. 체이싱(chasing)기법은 금표면을 따라 무딘 날이 있는 송곳을 이용해서 부드럽게 두드려서 윤곽을 만들고 장식을 하기 위해서 금속을 아주 얇게 깍아내는 방법이다. 이 체이싱방법은 스키타이 금제 유물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 중에 하나이다.

 

그림 1. 아무다리야 유적의 사자 그리핀, 길이 6.16g, 금 77%, 은 20%, 구리 3%

 

 

 

또 하나의 기술은 유물을 더 세밀하게 보이도록 하는 펀칭방법이다. 펀칭 방법은 기원전 1천년 중반에 모든 금제 공인들이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스키타이 유물에는 좀 더 특수한 방법을 이용했다. 예를 들면 맹수장식 묘사된 반지이다. 이 유물은 금판 자체가 은의 함량이 높아서 다른 원판형 유물에 비해서 더 두꺼운 판으로 앞면은 체이싱기법을 이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서 금속을 절단해서 제작되었다. 이 유물은 뒷면에서 누르기 기법을 이용하지 않고 앞쪽에서 작업해서 동물모양을 입체감 있게 표현했다.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가장자리는 날카롭게 절단되어 있다. 호랑이는 몸을 말고 있지만 날개가 있는 모습으로 그리핀이다. 날개부위에 절단한 흔적이 잘 남아 있다.

 

 

그림 2. 아무다리야 유적에서 출토된 반지, 몸을 말고 있는 날개 달린 호랑이, 그리핀, 직경 2.5cm, 무게 10.5g, 

아래의 사진에서 잘라내고, 깍아낸 흔적이 그대로 보인다.

.

 

사자는 페르시아의 상징적인 동물이지만 이 유적에서 발견된 사자 그리핀은 스키타이 금속 기술로 제작된 유물이다. 사자 그리핀이 출토되었다고 모두 페르시아의 영향으로만 보기는 힘들다. 이 유물은 파지리크 유적 2호의 여성 미라의 목제 목걸이 장식 그리핀과 특히 유사해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2020/03/28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파지릭 유적 2호분] - 알타이의 2500년 전 뿔 달린 그리핀

 

알타이의 2500년 전 뿔 달린 그리핀

시베리아의 알타이 산의 2500년 전 파지릭 유적의 무덤에는 이미 누군가에 의해서 도굴당했지만 상당히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1940년대 후반에 발굴된 이 유적의 무덤은 1990년대 발굴된 아크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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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초창기 연구들은 사자는 페르시아의 영향으로 해석되기는 했으나 최근에는 유물 자체의 제작기술을 살펴보면서 좀 더 다양한 시각이 생겨나는 것 같다.

사자 그리핀의 용도는 뒷면에 2개의 길다란 핀으로 보아서 여성의 머리장식으로 보았으나, 뒤에 달린 핀이 납땜으로 아주 단단하게 고정된 점으로 보아서 펠트제 고깔모자장식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참고문헌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12~319 p.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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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
2020. 12. 9. 13:03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아무다리야 퇴장유적은 현재로는 타지기스탄과 아파카니스탄의 국경에 위치한 곳으로 이 강의 우안에 위치해서 타지기스탄 국경 내에 위치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는 발견된 황금유물은 그레코-박트리아, 페르시아, 스키타이 동물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스키타이 동물장식은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

아무다리야 퇴장 유적에서는 팔찌가 대량 출토된다. 여러 번 감을 수 있도록 코일모양으로 된 것과 한쪽이 떨어져 있는 스타일이 있는데 모두 동물문양으로 장식된 것이다.

그 중에서 한쪽이 떨어져 있는 스타일(개방형 팔찌)로 그리핀(사자얼굴+산염소뿔+날개)이 가장 유명하다.

 

그런데 왜 다른 이들은 페르세폴리스의 스키타이 대표단이 들고 있는 팔찌와 비슷한 유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유물은 개방형 팔찌 중에서도 차이가 있다. 대부분 몸통은 매끈하게 처리하고 끝에만 동물을 장식하는데, 이 유물은 전면에 문양이 표현되었다. 어떻게 제작되었을까?

 

그림 1. 아무다리야 퇴장유적의 스키타이 팔찌는 2점이 발견되었다. 크기는 동일하지만 무게는 미세하게 차이가 있다. 직경 7.9cm, 무게 128. 04g, 무게 129. 34g

 

그림 2. 아무다리야 퇴장유적의 스키타이 팔찌, 그림1과 동일

 

 

그림3. 아파다나 궁전에 묘사된 스키타이 대표단

 

팔찌 모양의 거푸집을 이용해서 금속물을 부어 주조해서 만들어졌다. 특히 복잡한 눈, 귀과 같은 곳은 먼저 만들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몸통에 미세한 표현을 위해서 표면을 누르는 과정을 통해서 제작되었다. 주조해서 만들었다는 사실은 두 개의 팔찌 크기가 같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무게는 1g 미만으로 차이가 있는데, 주조 한 뒤에 몸통에서 세밀하게 마연하면서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

아파다나 궁전 벽의 스키타이 대표단이 들고 있는 팔찌도 몸통에 음각이 있고 두 동물이 머리를 맞대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아무다리야 퇴장지의 유물을 가장 먼저 연구한 달턴(O.Dalton)(1905)은 이 유물은 스키타이 동물양식이라고 했다. 흑해 쿠반 지역에 있는 카진스코예 유적의 목걸이 장식에서 비슷한 동물장식이 있다는 점이 그 근거이다.

바르코바(1928)는 이 동물을 곰이라고 해석한 바 있으나, 늑대라는 의견(Scythians 2017)도 있다. 주로 동물의 주둥이가 튀어나온 맹수는 늑대로 보는 페레보드치코바의 의견을 참고로 한 것 같다.

20세기 초 달턴은 아무다리야 퇴장 유물이 대부분 기원전 4~3세기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르타모노프(1973)는 시베리아 황금유물 컬렉션의 코일모양과 개방형 팔찌과 비교해서 기원전 4세기로 생각했다. 2017년 영국박물관에서 열린 스키타이 유물 특별전에서는 기원전 5~4세기 유물로 소개되었다.

 

 

 

<참고문헌>

Dalton O.M. The Treasure of the Oxus with Other Objects from Ancient Persia and India Bequeathed to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by Sir Augustus Wollaston Franks. London, 1905.

Borovka G, 1928, Scythian art, London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Артамонов М.И. 1973 :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М.: 1973. 280 с.(아르타모노프 1973, 사카족의 보물)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0. 12. 8. 12:50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아무다리야 유적에서는 남성인물상이 표현된 유물이 많이 확인된다. 후기구석기시대 이래로 유적에서 출토되는 인간형상물은 여성이 많지만, 아무다리야 유적에서는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입체상과 평면상으로 구분할 수 있다. 평면상은 금판에 남성이 새겨진 것인데 모두 43점이 확인되었고 크기는 제각각이다. 모두 같은 스타일의 남성이 아니라 의상이 달라서 다양한 민족을 표상하고 있다. 제작된 기술의 수준도 같지 않고 어떤 유물은 세밀하고 어떤 유물은 대충 그린 것도 있다.

 

그 중에서 스키타이 남성전사도 포함되는데, 가장 잘 묘사되고 가장 큰 평면판에 새겨진 남성 이다(그림1, 그림 3). 고깔모자를 쓰고 있고, 통이 넓은 바지에 발목은 끈으로 조여 강조했으며 부드러운 부츠를 신고 있었다. 상의는 무릎까지 오는 긴 상의에 소매가 꽉 끼는 카파탄 종류와 키르바스(어깨 부위가 뒤로 젖혀짐) 스타일을 겹쳐 입은 듯 하다. 허리에 벨트를 하고 있었다. 이 남성은 턱수염을 길렀다. 오른쪽에는 스키타이 인의 단검인 아키나크를 차고 있었는데, 검집과 벨트로 연결되는 부위가 명확하게 표현되어 있다. 같은 형태의 검은 멜구노프와 켈레르메스 유적 등 흑해 스키타이 유적에서 확인되었고 이 유물이 확인된 아무다리야 퇴장지에서도 1점 발견되었다(그림 1). 스키타이 남성들은 대부분 턱수염을 기른채 여기저기서 확인된다. 쿨-오바에서 출토된 황금항아리 등에서 확인가능하다.  알타이의 파지리크 2호에서는 턱수염만 따로 발견되기도 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턱수염을 기르는 것이 일종의 스키타이 특징으로 보았다.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은 불을 피우기 위한 혹은 불을 옮기기 위한 장면으로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성직자 혹은 마술사일 것으로 추정한다(커닝햄 1881, 아르타모노프 1973). 43점의 평면판에 새겨진 남성들은 모두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데, 막대기를 들고 있는 경우가 가장 많다.

 

같은 형상(고깔모자, 아키나크 검)의 스키타이 인들이 페르세폴리스 아파다나 궁전의 동쪽벽에서도 확인된다(그림 2). 아파다나 궁전 외에도 다리우스 무덤의 비문에 스키타이 남성에 대한 그림과 설명이 있다. 페르세폴르스 근처의 다리우스 무덤의 비문에는 Saki-tigrahauda, Saki-haumavarka, Saki-taradaraya의 세 그룹의 사카족(스키타이 문화권에서 중앙아시아에 있던 민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무덤입구의 부조에 그림이 묘사되어 있고 비문설명에도 남아 있는데, 제일 처음의 그룹은 뾰족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르타모노프 1973).

 

그림 1.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평면판에 새겨진 스키타이 남성

 

그림 2. 페르세폴리스 아파다나 궁전의 동쪽벽, 스키타이 대표단

 

그림 3. 아무다리야 퇴장지 출토 평면 금판

 

이 유물은 길이가 15cm인데, 인간형상물이 그려진 평면금판은 크기가 각기 다르다(그림 3). Barnett(1968)은 구부러진 흔적(우측 하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건축물(사원)의 틈새나 용기 안에 넣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시만은 아무다리야 퇴장지가 일종의 신전 혹은 사원이며 신자들이 봉헌 제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제이말 1979).

 그런데 이 평면판들이 같은 수준에서 제작된 것이 아니어서 같은 시대에 제작되었는지에 대한 의심도 있다. 그러나 Barnett는 금이 풍부한 중앙아시아에서 충분히 제작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참고문헌

 

Barnett R. The Art of Bactria and the Treasure of the Oxus. — «Iranica Antiqua», Leiden, 1968, vol. 8, p. 34-53, pl. II-XIV.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Артамонов М.И. 1973 : Сокровища саков. М.: 1973. 280 с.(아르타모노프 1973, 사카족의 보물)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Oxus_Treas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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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7. 13:15 아무다리야 퇴장유적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적으로 알려진 유물의 대부분은 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인간형상물(입체), 팔찌와 목걸이, 반지, 원판형 장식판, 평면금판(인간형상). 토기, 동전 등 1300여점이 알려졌다. 주석 청동으로 제작된 것은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동전은 기원전 5~4세기 페르시아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유적의 연대가 이와 비슷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대부분 동전 때문에 유적의 연대가 여기에 고정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필자는 동전으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매우 불명확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적을 대표하는 그리핀이 달려 있는 팔찌는 쌍으로 존재한다. 크기가 미세하게 차이가 있다.

그리핀은 기본적으로 사자의 날개에 맹금류의 날개와 부리, 산염소 뿔과 귀를 합성한 것이다. 몸통, 날개, 목, 머리, 뿔의 표면에는 작은 홈이 있는데, 상감을 위한 것이다. 딱 한 곳에서 라피스라줄리(청금석)이 박힌 것이 확인되어서, 그리핀의 홈에는 청금석을 박아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 1 보다 약간 큰 팔찌(그림 2)는 British museum에 소장되어 있지 않고, Victoria and Albert Museum(그림 2)에 소장되었다.

 

 

그림 1.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적, 높이 12.3cm, 11.5cm, 무게 364.17g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Oxus_Treasure

 

그림 2.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적, 높이 12.6cm, 11.8cm, 무게 395.2g

 

그림 3. 페르세폴리스의 동쪽벽 그림

 

두 팔찌는  팔찌의 모양(오메가 모양), 제조기술 모두 페르시아의 아케메니드시대의 것으로 추정한다. 가장 큰 근거는 아파다나 궁전의 동쪽 계단에 거의 비슷한 모양의 팔찌를 들고 시리아(Schmidt 1953) 혹은 리디아(바르네트) 대표단이 왕에게 선물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제이말은 아파다나 동쪽 계단의 조각만으로 이 팔찌의 기원을 알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같은 대표단이 아파다나 북쪽 계단에는 다른형상의 팔찌를 들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작가인 Xenophon(기원전 430년 생)은 페르시아 궁정에서 명예의 선물로 간주되는 품목 가운데 팔찌가 있었다고 기록한 바 있다.

 

두 팔찌가 다른 곳에 소장된 이유는 처음 입수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1880년 5월에 Barton F.선장이 라와핀디로 운반하던 상인들로부터 유물 중에 일부를 획득했고 이를 1884년에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에 팔았다. 영국박물관의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물은 A. Cunningham과 O. Franks가 구매한 것이었지만 최초로 상인들과 접촉한 테진 계곡을 경비하던 영국선장 F. Barton이 몰래 판 것은 빅토리아 알버트 뮤지엄으로 팔려갔다. 커닝햄은 인도고고학 책임조사원이었고, 프랭크스는 골동품수집가이자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의 연구원이었다. 커닝햄이 죽고 그의 유언으로 프랭크스가 그들이 사 모은 컬렉션(아무다리야 퇴장지 유물)을 연구했다. 커닝햄이 죽고 나서 2년 뒤에 프랭크스가 죽으면서 브리티시 뮤지엄에 기부했다.

 

아무다리야 퇴장지 유물은 페르시아, 그레코-박트리아, 스키타이 동물스타일이 모두 확인된다. 특히 아케메니드 금제품의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2007년 부터 타지기스탄 정부에서는 이 유물의 반환요청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참고문헌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Oxus_Treasure

http://collections.vam.ac.uk/

J. Curtis, N. Tallis. Forgotten empire: the world of ancient Persia (неопр.). —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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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누신스크 분지의 스키타이 문화인 타가르 문화에서 그리핀도 원형의 맹수장식처럼 유사하지만 뚜렷하지 못하다. 주로 그리핀의 머리만 묘사된 것으로 청동검이나 청동칼의 끝장식으로도 사용되고, 청동투부(전투용도끼)에도 장식되었다.

 

타가르 문화의 그리핀은 독수리 머리에 귀가 달린 형태이다. 원형맹수장식과 마찬가지로 기원전 6세기에 주로 유행했다. 두 마리 그리핀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장면인데, 같은 구도로 산양이나 산염소로도 제작되었다. 알타이의 기원전 6세기 바샤다르 유적과 투엑타 유적에서 그리핀의 형상으로 나타난 구름문양(그림 1-32,33,34)이 이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그림 1. 타가르 문화의 그리핀 머리 장식

 

기원전 6세기 투엑타 유적 1호에서는 가죽으로 된 안장장식(그림 2-1)에 십자형 구도의 그리핀이 발견된 바 있다(바르코바 1987). 비슷한 유물이 타가르 문화(그림 2-3,4)에서도 확인되었는데, 구도만 비슷하지 묘사된 동물은 다르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타가르 문화보다 먼저 있었던 기원전 7세기 중반 아르잔-2 유적 모두 그리핀은 말의 굴레장식 혹은 말과 관련된 유물에서 발견되었다. 알타이의 기원전 6세기 투엑타 유적과 바샤다르 유적도 마찬가지로 말의 굴레장식 혹은 말의 안장장식으로 사용되었고, 기원전 5세기에도 마찬가지이다.

타가르 문화에서 그리핀은 무기의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무기 장식이 아닌 유물은 청동장식물이지만 그리핀의 표현이 검, 칼, 투부에 표현된 것보다는 훨씬 불분명하다.

결국 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저지대 타가르 문화에서는 그리핀도 대체품으로 사용되었을 수 있다.

 

그림 2. 십자형 구도의 그리핀과 동물문양장식(김재윤 편집)

 

십자형 구도의 그리핀은 투바의 주레르긴그-호부즈-1(그림 2-2)유적과 타지기스탄의 무가브 강 유역에서 확인된 곤쿠르 유적(그림 2-6)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바르코바 1987). 현재의 타지기스탄에는 타가르 문화에서 확인된 서로 마주보고 있는 그리핀이 팔찌에 감겨서 출토된 바 있는데(그림 3) 아무다리아 강의 상류에 위치한 아무다리아 퇴장지 유적이다. 아무다리아 강은 시르다니아 강과 함께 천산산맥에서 발원해서 아랄해로 흘러가는 큰 강이다.

 

그림 3. 아무다리아 퇴장유적의 특별전 전시도록 표지(제이말 1979)

 

유적은 1876년과 1880년 사이에 아무다리아 강 북쪽 기슭에서 발견된 것으로만 알려졌지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현재 이곳은 타지기스탄 국경 내에 있다. 이 유적은 도굴당했고, 캐러번 상인들이 당시 영국령의 인도(현재의 파키스탄)에서 팔았는데, 영국의 골동품 수집가 Augustus Wollston Franks가 구매해서 1897년 영국박물관에 자신의 컬렉션을 기증했다. 이 컬렉션은 ‘Oxus treasure’라고 불리는데, 아무다리아 강의 고대 그리스 이름‘Amu-Darya-Oxus’에서 딴 것이다.

 

 

참고문헌

Членова Н.Л. 1967, Происхождение и ранняя история племён тагарской культуры. М.;Л., 1967.(츨레노바 1967, 타가르 문화의 기원)

Баркова Л.Л. 1987 : Образ орлиноголового грифона в искусстве древнего Алтая (по материалам Больших Алтайских курганов). // АСГЭ. [Вып.] 28. Л.: 1987. С. 5-29.(바르코바, 1987, 고대 알타아의 독수리머리 그리핀의 형태분석)

Е.В. Зеймаль 1979, Амударьинский клад: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제이말 1979, 아무다르리아 퇴장지: 전시도록, 에르미타주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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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맹수장식의 또 다른 사용처

 

미누신스크 분지의 타가르 문화에서 몸을 말고 있는 맹수장식은 기원전 6세기에 나타난다.아시다시피 원형의 맹수장식은 투바의 아르잔-1호 출토품이 최초의 것이다.

그랴즈노프는 이 유물이 말의 가슴을 했던 장식판으로 보았다(그림 1-67).

 그런데 이 유물의 용도를 달리 생각하는 연구(스미로노프 2012)를 찾았다.

 

아르잔-1호 원형맹수장식(그림 2-9)의 뒷면에는 꼭지가 2개 달려 있는데, 구멍의 방향은 위 아래로 통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림 1-67)의 말 가슴장식처럼 사용하기 위해서는 꼭지의 방향이 옆으로 향하게 되어야만 한다. 따라서 원형맹수장식의 꼭지대로 끈을 끼우면 그림 1-67처럼 착장할 수 없고, 마구가 완전히 흩틀어지게 된다. 가슴장식일 수 없다.

 

 

 

 

 

 

 

그림1. 아르잔-1호의 출토품(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92)

 

 

그래서 스미로노프(2012)는 골제 멍에(그림 2-8)가 이 유적에서 출토되는 것을 보고 아르잔-1호의 주인공은 전차를 타고 다닌 것으로 생각했다. 같은 무덤방(2호)에서 출토된 원형 맹수장식도 전차를 끌던 말의 장신구인데, 가슴이 아닌 말의 옆에 달았던 것으로 생각했다. 꼭지의 방향대로 끈을 끼우면 끈의 방향은 위아래로 향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시리아 궁전벽화에서전차를 끄는 말을 장식했던 원형장식이 있다는 사실도 주목했다.

멍에(그림 2-8)는 말의 어깨에 씌워서 뒤의 운반대를 끌게 하는 부분으로 전차부속품 가운데 바퀴만큼 중요한 유물로 생각하는 것이다.

스미로노프는 알타이 유적에는 안장과 안장을 조이는 벨트가 없다는 사실을 밝힌 슐가(2008)의 연구를 참고로 했다. 거의 비슷한 마구세트 구성인 아르잔-1호에서도 마찬가지로 안장이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림 2. 아르잔-1호의 전차 관련 유물(1~9)과 아시리아의 왕 아슈르나시르팔 II세(10, 10a)의 궁전벽 및 사르곤 II세의 궁전벽(11, 11a) (스미르노프 2012)

 

사실 원형의 맹수장식은 끈을 위아래로 끼우도록 고안되었기 때문에 말의 가슴장식이 아닐 수는 있지만 반드시 앗시리아궁전벽화처럼 사용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멍에는 이 유적의 주인공이 전차를 소유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는 유물 중에 하나이다.

 

그럼 타가르 문화의 원형의 맹수장식이 모두 전차를 몰던 말을 장식한 것일까?

아니다. 아르잔-1호의 유물은 직경 25cm으로 알려진 고리모양 맹수장식 가운데 가장 크다. 하지만 타가르 문화의 원형 맹수장식은 10cm미만이다.

사실 앞에서 타가르 문화의 맹수장식이 맹수로서 불분명하다고 했지만 그럴 수 밖에 없던 이유는 매우 작기 때문이다.

또한 어제 몸을 말고 있는 형태 때문에 고양이과 맹수장식이라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동물장식의 주둥이가 너무 길다. 

1점이 아니라 대부분 그런 스타일이어서 디자인의 의도는 주둥이를 길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늑대와 가깝다. 

 

소형 원형의 맹수장식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참고문헌

Степная полоса Азиатской части СССР в скифо-сарматское время//Археология СССР / Археология с древнейших времён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М.: 1992. 494 с(러시아과학아카데미 1992, 스키타이-사르마트 시대의 소비에트 연방 내의 아시아 초원지역, 소비에크 고고학 시리즈 1992)

СМИРНОВ Н. Ю. На чем ездил аржанский «царь»? // Культуры степной Евразии и их взаимодействиес древними цивилизациями. Материалы международной научной конференции, посвящённой 110-летию со дня рождения выдающегося российского археолога М. П. Грязнова. – СПб., 2012. – Т. 2. – С. 424-431(스미르노프, 2012, 아르잔의 차르는 무엇을 타고 다녔나?)

ШУЛЬГА П. И. Снаряжение верховой лошади и воинские пояса на Алтае. – Ч I. Раннескифское время. –Барнаул, 2008. – 276 с.(슐가 2008, 알타이의 군사용과 승마용말의 마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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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가르 문화 원형의 동물문양장식

 

시베리아 미누신스크 분지의 타가르 문화에서 확인되는 동물문양장식은 입체적인 형상과 평면적인 형상으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 입체적인 유물에는 1. 서 있는 스타일, (멧돼지, 코젤, 양, 말, 맹수) 2. 발을 세우고 있는 서 있는 스타일(멧돼지, 말), 3. 다리를 배쪽으로 접어서 앉아 있는 동물(양, 코젤, 산염소) 등이 있다.

평면적인 형상에는 전신형과 머리형으로 구분된다. 그 중에서 동물 전신은 1.서 있는 형상(코젤, 맹수), 2. 발을 세우고 서 있는 형상(멧돼지), 3. 몸을 말고 있는 형상(맹수)이 있다. 머리만 있는 형상은 새의 머리이다.

서 있는 형상과 발을 세우고 서 있는 유물을 구분하는 이유는 굽으로 곧 선 자세를 확연하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입체 동물상이 평면 동물상 보다 훨씬 많이 출토된다. 평면동물상 가운데 가장 많은 흔한 유물은 맹수가 몸을 말고 있는 스타일이다. 기원전 6세기부터 미누신스크 분지에도 등장하며 가장 이른 형태는 그림 1-1~5이다.

 

그림 1. 몸을 말고 있는 타가르 맹수장식(1~11)과 유럽스타일로 분석된 맹수장식(23~41)(츨레노바 1967)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투바 기원전 9세기 중반의 아르잔-1호에서 출토된 원형 맹수장식이 이 유물의 기원이다. 하지만 기원전 7세기 이후로는 흑해지역부터 오르도스(중국) 지역까지 넓은 지역에서 출토된다. 흑해지역에서 출토된 가장 이른 유물은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그림 1-24)과 테미르-고라 유적(그림 1-23)에서 출토된 뼈로 제작된 것이다.

미누신스크 분지의 원형 동물장식(시간에 관계없이)이 지역적 차이를 보이는 것은 반원형의 귀 모양이다. 그 외는 비슷하다.

클래식한 반원모양의 맹수장식과 가장 대비되는 것은 그림 1-18, 19인데, 몸을 완전히 말지 않은 형태이다. 과장된 눈과 굽, 꼬리 등은 유사해서 그 형태가 유지되지만 몸이 원형이 되지 않아서 배와 뒷다리의 형태 등은 차이가 있다.

 

그림 1에서 23~41은 유럽스타일로 분석되었지만 사실 출토지는 흑해부터, 시베리아, 오르도스, 중국동북지방까지 다양하다(필자가 앞에서 동부지역이라고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타가르 문화의 동쪽이라는 뜻이다). 흑해에서 출토된 유물은 23-27이고, 우랄지역은 28~31, 카자흐스탄의 동부에 위치한 칠릭(그림 1-32)유적 출토품이다. 알타이 마이에미르 유적(그림 1-34,35)에서 출토된 바 있다. 중국의 화북지역(그림 1-37)과 오르도스(그림 1-39)에서도 출토되었다.

재질도 다양한데 청동제품(그림 1-20, 그림1-24-30, 그림1-36-41)이 가장 많고, 뼈(그림 1-21-23), 돌(그림 1-31), 금(그림 1-32-35)이다. 타가르 문화의 맹수는 대부분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림 1-38은 중국에서 출토되었다고만 알려졌으나 출처가 불분명하다.

 

아르잔-1호의 원형 맹수장식의 특징으로 살펴본다면 맹수장식은 얼굴의 각 특징 외에도 가운데 구멍이 있는 것이 각 지역에서 빠른 형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기원전 7세기 흑해 맹수장식(1-23, 24), 기원전 6세기 타가르 문화(그림 1-1~5)이다. 늦은 스타일일수록 가운데 구멍이 불분명해진다. 각 지역에서 빠른 형태의 속성으로 중앙의 구멍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기원전 7세기에 흑해 유물 가운데는 외형이 삼각형에 가까운 것도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과 맹수장식으로 볼 수 있는가?

사실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유물 컬렉션의 원형 맹수장식, 아르잔-1호의 유물을 제외하고는 고양이과의 맹수인지 명확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제 동물가운데 몸을 완전히 동그랗게 말 수 있는 동물은 스키타이 동물장식으로 등장하는 중에는 고양이과 맹수 밖에 없다.

 

참고문헌

Переводчикова Е.В.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Членова Н.Л. 1967, Происхождение и ранняя история племён тагарской культуры. М.;Л., 1967.(츨레노바 1967, 타가르 문화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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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미누신스크 분지의 지역에서는 타가르 문화가 기원전 7세기부터 번성했다. 가장 잘 알려진 유적으로 살브이크 쿠르간은 1955년, 1956년 발굴되었는데 이 무덤을 볼쇼이 살브이크 쿠르간이라고 부른다. 1955년과 1956년은 내부 조사작업이었고 1954년에 이미 외부의 덮힌 흙을 덜어내고 호석(울타리)를 찾아서 정리했다(그림3).

 

높이 18m의 대형 쿠르간 안에는 무덤구덩이 안에 목조구조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앞에서 설명한 이 무덤의 구조에 대해서 좀 고치고 부연설명을 해야겠다. 너무 단편적으로 여기저기에 있던 자료여서 정확하지 못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마르살돌로프의 저서에서 무덤구조가 가장 명확하게 나타났다.

볼쇼이 살브이크 쿠르간은 동쪽에 입구처럼 보이지만 사실 무덤의 입구는 서쪽에 지하로 나 만들어져 있었다. 봉분의 가장자리에는 호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나무구조물이 설치된 무덤방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미로와 같이 연결된 길인데, 통나무로 연결해서 만들었다.

 

 

 

 

그림 1.  마르살돌로프(2010)가 보완한 볼쇼이 살브이크 쿠르간의 구조, 1-돌, 2-나무, 3-자작나무껍질(발굴야장과 설명으로 복원함),4-그루터기, 5-화덕자리 흔적, 6-납작한 판돌, 생토층을 20cm로 덮음, 7-지하도로에 남겨진 사람들, 8-석판에 그려진 암각화,9-숫돌, 10-나무망치

 

그렇기 때문에 지난번에 그림 2의 평면도(6)에서 입구를 동쪽이라고 했는데 서쪽이다.

 

그림 2. 볼쇼이 살브이크 쿠르간의 외형(1,2) 내부 평면도(6)와 단면도(3,4,5, 7). 3,4,5는 남북방향의 단면도, 7은 동서방향의 단면도, 평면도(6)에서 왼쪽이 서쪽입구이다.

 

이 유적은 이미 18세기때 도굴당했다. 봉분의 서쪽에 도굴을 위한 입구(직경 19m, 깊이 5m)인 구덩이가 있었다. 이 유적을 처음 발굴한 키셀레프와 연구자들은 이곳을 먼저 조사했는데, 매우 큰 청동솥과 소형의 청동칼만 발견되었다. 그곳에서도 스키타이 피장자 중에 한 명이 발견되었는데 주인공의 하인?정도로 생각된다. 벨트에 청동칼과 원추형 장식판이 달려 있었다.

무덤내부에는 인골 외에는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중앙 매장주체부에는 7개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70세 1인과 35~40세 가량의 6인이었다. 세 명의 인골이 상태가 양호한 편이었는데, 게라시모프는 2인이 형제자매라고 추정했다. 이 무덤은 부족장 혹은 부족 연합 수장의 가족 무덤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봉분 안에는 메인 매장지를 제외하고 2개의 매장지가 남쪽 지하실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남성이 발견되었다. 하인 혹은 무덤을 지키는 사람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무덤의 호석(울타리) 아래에 북동부와 남서부모서리 아래에서는 4명의 사람인골이 발견되었다. 남서쪽에는 성인, 북동부에는 어린아이였다. 이들은 아마도 무덤을 건조하면서 생긴 피해자 혹은 봉양자?희생자?였을 가능성이 있다.

 

1955년과 1956년에 발굴된 살브이크 쿠르간은 확인된 유물은 거의 없지만 무덤을 건조하는데 사용된 기술을 알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비슷한 무덤 구조가 나중에 발굴된 카자스흐탄 동부의 세미레치예 유적에서 확인된 바 있다.  

 사실 무덤의 호석 아래에 사람을 묻는 행위는 투바 아르잔-2호에서도 22호묘와 24호묘에서 확인되었다... 

 

 

그림 3.  1954년 봉분 열기 전에 사전작업

 

 

참고문헌

Е.Г. Дэвлет 2019, саяно-алтайская экспедиция(Большой салбыкский курган)// Институт археологии РАН: 100 лет истории. — М.:РАН, 2019(데블레트, 2019, 샨-알타이 탐험대(볼쇼이 살브이크 쿠르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 100주년 기념논문집)

Марсадолов Л. С. Большой Салбыкский курган в Хакасии. Абакан, 2010.(마르사돌로프 2010, 하카시아의 볼쇼이 살브익 쿠르간)

Киселёв С. В. Исследование Большого Салбыкского кургана в 1954 и 1955 гг. // «Тезисы докладов на сессии Отд. Исторических наук и Пленуме ИИМК, посвященных итогам археологических исследований 1955 г.». M.-Л., 1956.(키셀레프 1956, 1954년과 1955년 볼쇼이 살브이크 쿠르간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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