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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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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21. 09:22 책소개

연해주 선사시대 문화의 이동이 있는 기간은 6500~6000B.P.과 3400~2900B.P.인데, 현재 보다 따뜻한 시점이며, 기온 상승기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카로트키의 그래프(표 1)에서 기온 상승기이면서 4500~3800B.P.(표 1의 E)에는 환동해문화권에서 문화이동의 정황이 확인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 시점에는 연해주에는 자이사노프카 문화가 번성하고 있었고, 동해안에는 환동해북부의 평저토기(바닥이 편평한 토기)가 아닌 중서부 지역의 첨저토기(바닥이 뾰족한 토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각 지역의 문화는 기온 하강기에 5000년 전 후(표 1의E)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두만강 유역 및 연해주 일대의 자이사노프카 문화는 추워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등장해서 홀로세 기간동안 가장 추운 시점을 찍고 다시 기온이 상승하는 기간 존재했다. 이 문화가 영위되는 동안 매우 극심한 기후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기온 상승기인 A와 G 기간에 새로운 문화가 각각 생기는 것과는 다른 현상이다. 그래서 4500~3800B.P.는 기온이 상승하기는 했지만, 남쪽으로는 이동하기 힘든 사회적 동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동해안의 신석기문화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문화적 변화는 5100B.P. 평저토기 대신해서 중서부지역의 첨저토기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 5100년 전 이전부터 평저토기인 오산리식 토기와 융기문토기가 마지막 발견된 5800년 전 사이 동안(표 1의 B)은 환동해문화권 남부 지역에 유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오산리 유적 C지구의 2호와 문암리 10호 야외노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 이전 시기와 같이 취락 유적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왜 동해안에서 유적이 없는 기간이 나타난 것일까?

 

연해주에서 강원도로 이동했던 루드나야 문화(세르게예프카 유형)가 사라지면서 이를 기억하던 루드나야 문화 사람들이 살던 사회적 배경이 바뀌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표 1). 이 문화는 5800년 전 무렵에 기후가 가장 따뜻했다가 이후로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이동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연해주 보이스만(Бойсман, Boisman) 문화의 3단계와 4단계가 펼쳐지고 있긴 하지만 이 문화의 토기가 강원도에서 출토되지는 않는다. 다만 보이스만 문화의 토기는 북한 라진 유적에서는 발견되기 때문에 두만강 유역 부근에서 그 문화가 확인되었다고 볼 수 있다.

 

루드나야 문화가 끝나면서 추워지기 시작한 5800B.P.이후부터 계속 기온이 떨어져서 5500B.P.무렵 추웠던 기간(표 1의 D)에는 남쪽으로 문화는 움직이지 않았고, 동해안에는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5100B.P. 무렵에 강원도 문암리 유적에서 평저토기 보다 상층에서 첨저토기가 발견되면서, 중서부 지역의 첨저토기를 쓰는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새로운 생계를 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연해주의 신석기 마지막 문화인 자이사노프카 문화는 기온 하강하는 시점인 5000년 전에 생겨나며, 기온하강기(D)와 기온상승기(E)를 모두 거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때 환동해문화권의 영역은 연해주~목단강 일대로 좁아졌다.

 

또 다른 기온하강기인 2900~1900년 전 동안은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 철기시대 얀콥스키 문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등이 생겨났다. 리도프카 문화와 얀콥스키 문화는 기후 하강기에 등장한 자이사노프카 문화와 마찬가지로 그 이전에 한반도 남부로 이동한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고 연해주 및 목단강 유역, 두만강 유역에만 머물렀다.

 

그러나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는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한반도 중서부지역과 중동부 지역에서 확인된다.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의 이동이 가능했던 것은 이 문화에서 고안되기 시작한 주거지의 구들 때문이었을 수 있다.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서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사람들이 발명품을 만들었기에 가능했을 수 있다.

 

 

그림 1. 카로트키 박사의 동해안 기온변화 그래프

 

참고문헌

 

김재윤, 2021, 『환동해북부지역의 선사문화: 연해주고고학개론』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부의 우라르트 성곽인 테이시바이니에서는 스키타이 화살촉이 발견된다. 이 성은 스키타이 화살촉 뿐만 아니라 철제 무기 및 구슬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성벽에서 발견된 엄청난 숫자의 스키타이 화살촉으로 보아서 스키타이 사람들에 의해서 파괴되었다고 추정한다.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출토된 스키타이 화살촉


비슷한 화살촉이 앗시리아의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 기원전 7~6세기 스키타이 화살촉이다. 토파흐 칼레, 앗시리아의 수도 아수르 등지에서 발견되어서 스키타이 화살촉을 사용했다.

그림 2. 테에시바이니 유적 스키타이 청동화살촉, 앗시리아에서 발견됨. 1,2,3-하이카베르드, 4-토파흐-칼레, 5,6-아슈르, 7,8-바비론, 9,10-타르스, 11,12-데르아르



처음에 앗시리아에서 이런 유물이 발견되었을 때 화살촉의 경부에 구부러진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화범의 재료를 부착하는 장치로 설명했다. 하지만 보네트는 이러한 유형의 청동화살촉은 코카서스 부근에서 널리 사용된 것을 지적했다.

무구 중에는 왕의 이름이 있는 것도 발견되었는데 청동으로 된 찰갑이다. 아르기티치 I세라는 명칭이 씌여 있었다. 청동투구도 우라르트 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림 3.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청동투구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의 우라르트 마지막 도시인 테이시바이니는 우라르트 최대의 유적으로 점토벽돌로 만들어진 성곽 유적이다. 벽의 두께가 3.5m에 달하는 지점도 있다. 계단식의 구조인 건축물은 한방의 창이 다른 방의 지붕으로 이어지는 구조이고, 벽돌의 1개의 크기 중에 가장 큰 것은 0.5m이상이다.

 

모든 창고(약 120개의 방)는 방별로 인감으로 밀봉되었다. 성곽에서는 라즈단 강의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도관이 설치되었는데, 도관은 둥근 돌 파이프로 연결되었는데, 에레부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거주공간에서는 녹로, 빵을 굽던 화덕자리, 곡물 분쇄기 및 가정용품 등이 발견되었다.

 

성곽은 메소포타미아 건물스타일로 진흙 벽돌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현무암 기초위에 진흙 벽돌로 쌓은 것이다. 현재는 원시 벽돌은 벽동 세공의 선이 보이는 정도로 점토 덩어리로 변했다(그림 4)

 

그림 1. 1950년 사진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정리된 바닥

 

그림 2. 1950년 점토벽돌로 된 성벽, 6줄의 벽돌

 

 

그림 3. 테이스바이니 성곽의 중앙문 복원도

 

그림 4. 현재 남아 있는 성벽

 

그림 5. 구글 위성으로 본 테이시바이니 유적

 

유적에서는 금속가공소가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사진이나 그림은 구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철제품은 남아 있는데 처음에는 무기를 사용했고 나중에는 노동도구를 제작했다고 알려졌다.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는 금속덩어리와 거푸집이 발견되었습니다. 장검, 단검, 창, 화살 등과 같은 무기가 많다.

 

그림 6. 테이시바이니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삽날

 

그림 7.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철제품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코카서스 남쪽에 위치한 우라르트의 도시로 잘 알려진 곳은 예레부니와 테이시바이니 유적이 있다. 모두 성곽 유적으로 특히 테이시바이니(Тейшебаини) 성곽에서는 코카서스 산맥의 북쪽 스키타이 기원전 7세기 유적인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나온 청동화살촉과 같은 모습의 화살촉이 발견되었다(그림 1).

그림 1. 테이시바이니 유적 출토 청동화살촉


테이시바이니 유적은 기원전 13세기부터 기원전 8세기 혹은 기원전 7세기까지 존재했던 도시이다. 유적은 1936년에 발견되었고 카르미르-부루르 언덕 위에 만들어졌는데, 유적의 면적은 4헥타르가 넘는다고 한다. 2차 대전이 시작된 1939년부터 발굴을 했으나 전쟁으로 발굴은 중단되었고 1958년부터 다시 피오트로프스키가 발굴을 했다. 이 때 우라르트(철기시대) 이전인 순동시대 및 청동기시대(기원전 13~기원전 8세기 어느시점)에도 문화층이 있던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우라르트 문화층을 발견했다.

도시의 명칭은 역시 우연하게 발견된 쐐기 문자에서 발견되었다. 우라르트의 왕인 루스이 II세가 세운 것인데 그는 아르기쉬치 II세의 아들로 기원전 685~639년에 통치했다. 우라르트 왕국의 쇠퇴기에 세워진 도시로 알려졌다. 기원전 714년 아시리아 사람들은 무사시르에 위치한 우라르트 신 칼디의 주요 종교 건물을 파괴한 것으로 알려졌다. 루스이 II세는 우라르트 신의 숭배를 강화해서 이를 군사력 강화로 이으려고 애쓴 왕으로 알려졌다. 종교를 미끼로 대중을 겁박했을 것이다. 루스이 II세 통치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반 호수 북쪽에 위치한 칼디 신을 숭배하는 도시를 건설하고, 전쟁의 신(神) 테이세바의 이름을 따서 테이세바이니 라고 하는 성을 건설한 것이다. 테이시바이니의 경제와 관련된 내용이 적힌 쐐기문자가 적힌 점토판이 남아 있다.

그림 2. 지질학자가 발견한 점토판


이 유적에는 1950년에 촬영한 항공사진이 남아 있다(그림3). 고대 성곽의 도로와 성벽 및 거주구역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림 3. 1950년 촬영, 불가코바가 찍은 항공촬영, 테이시바이니 고고유적발굴조사장면

 

그림 4. 1950년 촬영, 테이시바이니 성내에서 발견된 포도주 보관소(28번), 저장고 중에 한 곳으로 땅을 파고 큰 도가니를 묻은 방법으로 보관했다. 가장 상단에는 포도주의 종류와 보관 날짜를 표시했다.



발굴결과로 테이시바이니 유적의 멸망은 여름이었다. 소가 고지대 목초지에 있었고 아직 포도가 익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리고 한밤에 공격이 시작되어 서둘러 도시주민들이 거주구역을 떠나 요새내부로 들어갔다고 판단했다. 발견된 화살촉의 방향이 적군은 언덕 경사면에서 공격했다. 거주구역에서는 여성와 아이들의 인골이 발견되었는데 적에게 벗어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성곽 안쪽의 내성에 임시로 거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결과 화재가 발생해서 요새 지붕이나 천장등이 파괴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테이시바이니가 마지막에 불타면서 붉게 변한 벽돌로 인해서 이 유적이 위치한 곳의 이름이 카미르-브루르(붉은 언덕)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으로 전해진다. 공격으로 멸망한 이유는 요새로 통하는 물 공급시스템이 파괴되면서 더 이상 이 곳에서 생계를 이을 수 없었다고 알려졌다. 이 유적에서는 포도를 재배하는 과수원도 발견되었는데, 물 공급시스템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연구되었다.

 

https://www.google.com/maps/d/u/0/edit?mid=1dYk1k5FjnYe1OSn-yRxnY5IuDo9w9PMt&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복사본 복사본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참고문헌

Пиотровский Б. Б. Город бога Тейшебы // Советская археология. — Москва, 1959. — № 2.(피오트로프스키 1959, 테이세바 신의 도시)
Пиотровский Б.Б. Ванское царство (Урарту), Издательство Восточной литературы, Москва, 1959 (피오트로프스키 1959, 우라르트 반 왕조)
Пиотровский Б. Б. Урартская крепость Тейшебаини (Кармир-Блур) (к 25-летию раскопок) // Краткие сообщения Института Археологии. — 1965. — Вып. 100. — С. 72—78.(피오트로프스키 1965, 우라르트 테이시바이니 요새성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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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스키 고분에서는 기원전 7세기 켈레르메스 유적에서 보이는 표범문양 장식과 거의 유사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옷에 달았던 유물이다. 표범장식과 마찬가지로 스키타이 전통을 그대로 잇고 있는 유물은 사슴장식이다.

 

그림 1. 울스키 유적에서 출토된 사슴장식과 표범장식

 

뿐만 아니라 말머리 모양 장식판도 나왔는데, 길이가 10cm가량으로 실제로 말머리를 장식했는지는 의문이다. 장식판의 눈부분에는 감입부가 있어서 그 안에 다른 색의 돌을 끼워 넣었을 수 있다. 콧 구멍자리에 토끼 2마리가 표현되었다.

 

그림 2. 울스키 유적 말머리장식

 

유적에서는 산염소 모양의 황금으로 만들어진 동물장식(단독)도 발견되었는데, 같은 동물장식이 청동으로 된 간두령 속에도 표현되었다. 스키타이 동물장식은 굽동물의 경우 대개 다리를 배 쪽으로 접어 넣은 모양이지만 이 유물은 머리를 뒤로 돌린 형태이다. 머리를 뒤로 돌린 야생염소 형태는 스키타이 사람들이 고대 오리엔트 전통에서 도입한 것이다.

 

 

그림 3. 울스키 유적에서 출토된 야생염소

 

그림 4. 울스키 유적에서 출토된 간두령장식

 

고대 오리엔트 전통의 특징은 토끼 장식도 해당된다. 쿨-오바 유적에서 발견된 토끼 장식은 다리우스 왕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졌다.

2020.08.3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 문화 서쪽/흑해의 전사] - 스키타이 문화 속의 토끼

 

스키타이 문화 속의 토끼

흑해의 크림반도 끝에 위치한 케르치 반도의 쿨-오바 유적에서는 사슴 장식판이 발견되었다. 이 장식판은 흑해의 동물문양을 대표하는 코스트롬스카야 사슴장식판과 비슷하다. 그런데 쿨-오바

eastsearoad.tistory.com

 

 

기원전 6세기 울스키 유적은 볼가 강 유역 기원전 5세기 필리포프카 유적의 무덤구조와 매우 유사하다. 울스키 유적의 연대가 이르고, 이미 기원전 7세기에 나무로 된 구조물을 봉분 속에서 넣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무덤구조는 흑해지역에서 발생해서 볼가 강 유역으로 번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울스키 유적에서 나오는 고대 오리엔트 특징의 동물장식은 기원전 7세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켈레르메스 유적에서는 앗시리아, 그리스의 수입품, 우라르트에서 제작된 유물 등이 나와서 무덤 속에 단순히 스키타이 유물만 넣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목을 돌린 산염소장식이 표현된 간두령은 간두령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간두령은 스키타이 재지의 유물로 그곳에 오리엔트 장식이 표현되었다고 해도 그 유물 자체는 스키타이 지역에서 제작되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А. И. Иванчик, А. М. Лесков. Ульские курганы. Культово- погребальный комплекс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на Северном Кавказе.//Corpus tumulorum scythicorum et sarmaticorum. Т. 2//Москва, Берлин, Бордо, 2015(이반치크, 레스코프 2015, 울스키 무덤, 카파카스 북쪽의 스키타이 시대 무덤 유형)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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