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는 ‘말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공간에서 말 9마리가 묻혔다. 7마리분의 마구가 확인되었는데 5마리는 착장된 채 였고, 2벌은 말 옆에서 확인되었다.

말을 부리는 데 기능과 관련된 마구 및 이를 뒷받침 하면서 장식을 하는데 담당한 굴레(말꾸미개는 이미 소개 했다. 그런데 말무덤 공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띈 유물은 방패 였는데, 이 방패는 안장에 묶인 채 부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안장이 있었다는 이야기 인데, 이 유적에서는 안장을 덮은 안장꾸미개가 앞서 설명한 별명 ‘얼음공주’에서도 출토되었는데, 훨씬 화려하다. 펠트에 동물문양 장식의 아플리케를 덧붙인 정도이지만, 이 유적의 유물은 ‘치렁치렁’하게 장식했다.

 

 

말은 부장될 당시에 등이 위로 가고, 다리는 굽히고, 머리는 내린 자세로 매장되었다. 말꼬리는 땋아서 말총으로 처리되었다. 말머리와 두 전사의 머리는 같았는데, 동쪽 방향이었다. 그러나 말 부장공간을 덮은 돌의 무게와 일시적으로 무덤 내부가 녹으면서, 말과 관련된 도구들의 위치는 뒤엉킨 상태였다.

이 무덤에는 가죽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마구와 관련된 유물을 연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안장덮개는 두 장의 펠트를 맞대어 꿰맨 후 그 안에 잡초를 넣어 쿠션처럼 만들었다. 4장이 출토되었다. 말 안장을 구성한 가죽은 이미 없어졌지만, 안장 덮개로 짐작할 수 있었다. 안장의 앞부분과 뒷부분은 두꺼운 펠트로 덮혔고, 그 위에는 ‘메달’이라고 불리는 마름모형태의 장식을 덧붙였다. 안장의 장식하는 부분으로 생각하시면 된다.

안장덮개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것은 62×56.5cm(그림 1-1)이고, 황색계통의 펠트로 제작되었다. 덮개의 상단은 꽃잎 4장이 있는 꽃으로 장식되었고, 사람 눈 모양의 안장장식 메달(그림 1-2)이 붙어 있다. 메달은 날개를 펼친 그리핀이 서로 대칭되는 방향(그림 1-2)으로 배치되었다.

물고기 모양의 펠트제 치레걸이는 여러 색의 펠트를 오려서 만들어 붙였다. 전체적인 모양은 물고기이지만, 여러 동물의 요소가 들어 있다. 눈은 둥글고 눈 안에 눈동자를 표현했다. 쉼표 모양의 코도 표현되었다. 눈 아래에는 4개의 부채꼴 모양의 아플리케 장식이 붙어 있는데, 아가미를 표현했다. 물고기의 지느러미는 양편에 각각 3개씩 표현되었으며 가장 중앙에는 도식화된 그리핀을 형상화 했을 가능성이 크다(그림 1-3).

 

 

왜냐하면 안장덮개는 모두 동물모양장식의 치레걸이가 붙어 있는데, 3점의 안장덮개는 물고기 모양이 붙어 있고, 1점은 늑대이다. 물고기모양의 치레걸이 중에 한 점에는 정확하게 중앙에 날개를 접고 있는 그리핀이 표현되어 있어서, 나머지 2점의 물고기모양 치레걸이는 중앙에 도식화 된 부분이 그리핀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이 안장덮개의 메달모양은 그리핀 2마리가 서로 대칭되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이를 좀 더 추상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출토, 안장덮개 복원도 1

 

두 번째 말 안장덮개는 꽃잎 모양 아플리케를 붙여서 제작한 펠트제 안장덮개(그림 2-1)이다. 안장덮개의 앞쪽 장식은 메달모양인데, ‘S’자모양으로 두 마리 그리핀이 대칭되게 서로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다(그림 2-3). 물고기 장식 4마리가 함께 부착되었다. 길이 80.5cm, 머리너비 17cm인데, 중앙에는 그리핀 아플리케 장식이 붙어 있다. 얼굴은 독수리이며, 귀가 달렸는데, 2마리가 한쌍이고, 4마리가 물고기 장식 중앙에 붙었고, 꼬리까지 표현되어 있다(그림 2-2).

 

그림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출토, 안장덮개 복원도 2

 

안장덮개 가운데 안장의 앞이나 뒤에 메달이 달리지 않고 덮개만 2조각이 남아 있는 유물도 있다. 그 위에는 산악염소 아플리케 장식이 붙어 있었는데(그림 3), 큰 뿔, 꼬리와 턱수염이 표현되고, 날개가 표현되었다. 염소와 날개장식의 조합은 파지릭 유적의 2호 남성미라의 오른손에서 확인된 것이다.

 

그림3.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출토, 산악염소 아플리케 장식, 안장덮개 자체는 그림이 없었다.

 

메달(그림 4-3,4)과 안장덮개의 물고기모양 치레걸이(그림 4-1,2)로, 그리핀 장식이 표현된 유물도 확인되었다. 중앙에 4마리 그리핀이 붙어 있는데, 머리를 뒤쪽으로 향해서 날개방향으로 표현하고, 깃털을 아래로 처지게 표현했고, 꼬리와 발톱이 표현되었다. 메달에도 똑같은 표현의 그리핀이 확인되었다.

 

모든 메달과 치레걸이의 가장자리는 감침질로 두가지 색 실로, 한 땀씩 돌려서 마감되었다(그림 4-4).

 

말에 표현된 그리핀, 물고기 모양은 도대체 어떤 학문으로 설명이 될까?

서로를 마주보는 타원형 안에 그려진 두 마리 그리핀은.......?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늑대모양 치레걸이가 붙은 안장은 다음에 소개하겠다..ㅋ )

그림 4.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출토, 안장 장식 치레걸이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폴로시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 산의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 출토된 45~50세 남성의 무덤을 다시 보자.

 

그림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통나무관, 오른쪽이 45~50세 남성전사이고, 오늘 설명하는 바지 입은 주인공이다.

 

남성의 무덤에는 바지와 신발이 신었다. 양모로 만든 붉은색 바지인데, 색은 많이 바랬다. 옆에 있는 소년 전사의 무덤에서도 바지의 흔적은 있으나 상태가 매우 불량했다. 역시 붉은 색이었다고 전한다.

 

바지는 모두 6조각의 천을 기워서 만든 것이다(그림2).

4조각은 긴네모꼴인데,  발목 가까이는 사다리꼴로 접혔으며, 다리의 앞판과 뒷판을 구성한다. 1조각은 삼각형에 가깝고, 나머지 한 조각도 긴네모꼴이지만, 다리를 구성하는 판이 아니라 삼각형은 허리의 앞쪽(그림 2-a, 4, 그림 3-b)을 대었고, 긴 네모꼴(그림 2-5)은 접어서 다리 사이에 부착되었다. 바지의 다리를 이루는 긴 네모판은 너비 27~28cm, 길이는 102~104cm가량이다.

바지의 다리를 구성하는 부분은 긴 네모꼴이지만, 발목으로 갈수록 줄어드는 스타일이다. 안쪽으로 접은 부분의 길이는 0.7~0.8cm로, 아랫단의 너비가 20.5~21.5cm가량이다. 바지의 입구(허리부분)은 바깥으로 접어서 감침질 되었다.

 

앞판의 허리부위에 삼각형을 덧댄 스타일(그림 3-b)은 또 다른 남성 무사의 무덤인 베르흐 칼쥔 2 유적의 1호와 3호 유적에서는 볼 수 없다. 삼각형 판을 댐으로써 낸 효과는?

허리 사이즈를 늘린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혹시 살이 쪄서 바지를 수선했던 건 아닐까? 어쨌든 이 바지는 허리를 늘인 흔적(그림 3-b)이 있다.

 

바지의 소재는 양모를 짠 것인데, 천을 바이어스 방향으로 이용했다.

천을 바이어스(사선) 방향으로 이용하면, 신축성이 좋아진다. 바지가 헐렁해서 신축성은 따로 필요 없을 것 같은데, 천을 좀 더 오랫동안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축성이 필요한 옷은 주로 몸에 달라 붙는 옷에 많이 필요하다. 허리를 늘린 이 바지와 수선흔 흔적, 다른 유적에서 출토된 바지들이 수선된 흔적 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의복은 경제적인 문제와 클 것으로 생각된다.

여러분이 입고 있는 옷도 자세히 살펴보면 씨실과 날실 방향으로 천을 재단해서 옷을 만든 것이 있고, 바이어스 방향으로 이용한 옷도 있다. 주로 여성의 스커트 중 플레어 스커트에서 많이 확인된다. 필자가 고등학교 때 입고 다니던 교복이 딱 플레어 스커트였는데, 바이어스 방향으로 재단된 것이었다..

(고등학교 과목 중 세상에 쓸모없는 과목이 가정이었다고 생각했는데...갑자기 미안해진다.)

 

허리 사이즈 조절은 끈으로 조절했는데, 소년관에서 바지의 흔적과 함께 끈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분 사진을 보시면 뭔가 어정쩡하지 않은가? 예전에 일명 ‘똥싼바지’가 유행 했었는데,...비슷한 느낌이다.

왜냐하면 품이 커서이기도 하지만 밑위보다 다리사이에서부터 발목까지의 길이가 짧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다리가 짧을까?

 

타이즈를 신었기 때문에 바지의 다리 길이가 길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 1에서도 바지의 흔적은 발목까지 그려져 있지 않다. 이 무덤에는 타이즈가 남아 있지 않지만, 또 다른 남성 무덤인 베르흐 칼쥔 2 유적의 전사는 바지를 입고 타이즈를 신었다.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45~50세 남성전사의 붉은 바지.

 

그림 3.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45~50세 남성전사의 붉은 바지 2, 그림 2와 같은 유물, b가 앞면으로, 삼각형 양모천을 덧대서 허리를 늘렸다는 것이 잘 보인다. 그림 2-a와 같은 방향.

 

참고문헌

폴로시막, 바르코바 2005, 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 Костюм и текстиль пазырыкцев Алтая (IV-III вв. до н.э.).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 2005. 232 с.(폴로시막, 바르코바, 2005, 기원전 4~3세기 알타이의 파지릭 문화 의복과 직조물)

폴로시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알타이 산의 우코크 고원에서도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는 16세 가량의 소년과 45~50세 가량의 남성이 함께 확인되었는데, 우리는 이미 소년과 장년기의 남성이 어떤 물건과 함께 부장되었는지 살펴 보았다.

이 유물은 매우 이데올로기적 유물이다. 활통 혹은 화살통집의 부속품인데, 거기에 꼭 동물문양장식을 그려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혹은 활통의 덮개가 필요했을까.

그래서인지, 러시아학자들은 이 유물을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활은 스키타이 인들에게 천상의 상징이라고 죽은 사람이 신의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활과 함께 그렸다고 한다(사보스티나 1983). 이런 활통에 화려한 장식을 새기거나 덮개를 씌운 것은 천상세계에서 신과 함께 있음을 표현한 것이나, 혹은 살아 있는 경우는 왕의 앞에 있는 경우를 표현한다고 한다(폴로시막 1994).

 스키타이 인들이 매우 용맹하고 싸움 잘하는 사람들이라고 헤로도투스는 묘사했지만, 사실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활통의 덮개를 열지 않는 시간을 기대한 건 아닐까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 1호분의 활통, 화살통 출토 위치

 

 

 

그림 2.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소년의 관에서 출토된 활집 혹은 화살통 장식

 

그런데 그 가운데 소년의 관에서 출토된 동문문양이 그려진 나무막대기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 하지 않았다. 소년의 왼쪽 엉덩이 쪽에는 길이가 64cm인 나무로 만든 장식(그림 2)이 출토되었다. 구멍이 뚫려 있음으로 어딘가에 달기 위한 장식성이 강한 유물이다. 멧돼지 2마리, 표범 2마리와 함께 가장 앞쪽에는 그리핀 머리(그림 2-1)만 조각되었다. 그리핀 머리 아래로 멧돼지 한 마리를 두 마리의 표범이 사냥하는 장면을 표현했다. 마지막의 표범 엉덩이에는 멧돼지가 머리를 반대방향으로 돌리고 있다(그림 2-2). 그리핀은 보고서에는 독수리라고 되어 있지만, 귀를 둥글게 표현했는데(그림 2-1), 표범의 귀와 같은 모양으로 표현되어서 독수리와 표범이 합체한 단순한 독수리가 아닌 그리핀이다. 표범과 멧돼지는 이빨까지 상세하게 표현되었다.

통에 부착되는 부분은 일직선(그림 2-3)인데, 거의 동일한 간격으로 26개의 구멍이 있고, 동물조각이 없는 하단에는 짧은 면에도 구멍이 있다. 동물문양 나무막대 옆에는 노끈이 달린 술 장식과 7개의 골제 화살촉, 활의 부속과 활대 등이 확인되었다.

 시베리아 무기를 오랫동안 연구한 솔로비예프(2003)는 나무판이 활집을 지지하는 판이 될 수도 있고, 화살통을 지지할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그림 3. 솔로비예프가 복원한 화살통집 1, 파지릭 유적 및 알타이 고원의 예로 무덤의 예를 참고로 복원

 

 

 

그림 4. 솔로비예프가 복원한 또 다른 활통과 화살통집, 오비강 유역의 유물을 참고로 복원

 

그런데 소년관 옆의 45~50세의 전사 관에서는 동물문양이 그려진 장식은 출토되지 않았으나 나무 목판 위로 왼쪽 어깨에서 두 조각(붉은색과 녹색) 고깔형태의 펠트조각이 출토되었다. 여러 유적에서는 이 고깔형태의 펠트조각과 노끈 등이 활통 뚜껑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출토되었다. 앞서서 소년관과 이 남성관에서 유일하게 같은 형태의 유물인 매듭도 화살통집에 달렸던 매듭인데, 활통도 고깔형태의 뚜껑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45~50세 중년 남성의 관에서 출토된 목판의 길이는 63.5cm, 활집의 길이는 66~67cm으로 추정되며, 활의 전체 길이는 90cm가량이다(그림 5).

 

 

 

그림 5. 아크 알라하 1 유적의 1호분, 장년 남성의 관에서 출토된 활집복원도, 매듭과 가죽끈이 달려 있다. 앞에서 설명한 동물문양이 그려진 네모판의 장식을 활집통의 부속품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벨트 장식에 동물문양장식은 많은 유적에서 확인된다. 이 복원도도 여러 정황으로 복원한 것임으로 반드시 옳다고는 할 수 없으나, 고깔모양의 덮개를 이해하는 용도로 이해하기 바란다. 

 

참고문헌

솔로비예프 2003, Соловьёв А.И. 2003 : Оружие и доспехи: Сибирское вооружение: от каменного века до средневековья.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3. 224 с.(솔로비예프 2003, 석기시대에서 중세시대까지 시베리아의 무기)

Савостина Е.А. К символике изображений лука на Босфоре // СА. 1983. №4. С. 45-56.(사보스티나 1983, 보스포레에 그려진 활 표현에 대한 상징성에 대한 연구)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황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 산맥의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 우리는 무덤방을 덮은 바닥과 천장에서 무덤의 구조와 관련 없이 통나무에 홈이 패진 흔적과 통나무를 끊은 것을 이어서 사용한 흔적을 보았다(그림1).

러시아 연구자들은 이를 살아 생전의 집을 뜯어서 통나무를 활용했다고 했다(폴로시막 1994). 무덤과 전혀 관련 없이 이유 없는 통나무의 홈이나 절개면 등은 충분히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헤로도투스도 스키타이 인의 집에 대한 를 적어 놓은 바 있다. 헤로도투스의 역사 4권은 스키타이 사람들에 관해서 적은 것이다. 그들의 기원, 나라의 영역, 하천, 북방과 동방의 여러 민족, 생활양식에 대한 기록이다. 헤로도투스의 역사는 한국어(참고문헌)로도 여러 번 번역되었다. 이를 참고했다. ‘스퀴타이’족이라고 그리스어로 적혀 있어 번역되었으나, ‘스키타이’ 민족을 의미한다.

 

4권 76장에는 스키타이 인이 얼마나 전투에 능했는가를 설명하면서 그들의 집에 대한 언급이 있다.

 

‘다레이오스가 군대를 진격 시켰던 흑해연안에는 스키타이 족을 제외하고는 세상에서 가장 무지한 부족들이 살고 있다. 흑해연안에 거주하는 부족들 가운데 스키타이족 외에는 지혜롭다고 할 만한 부족은 하나도 없다. 스키타이 족인 아나카르시스 외에는 현인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나(헤로도투스)는 다른 관점에서 스키타이족이 훌륭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 가지 가장 중대한 인간사에 있어서 그들은 우리가 아는 모든 부족을 능가한다. 그들이 해결한 중대사란 그들이 추격하는 자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잡히고 싶지 않으면 아무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시도 성벽도 없고, 집을 수레에 싣고 다니고, 말을 타고 활을 쏘기에 능하고, 농경이 아니라 목축으로 살아가는데 그런 그들이 어찌 다루기 어려운 불패의 부족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있는 아주 유사한 부분 등이 실제로 발굴되기도 했으나 전혀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어서 그대로 신뢰할 수 없다.

어쨌든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은 대부분 무덤으로 집의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다. 알타이 산의 또 다른 유적인 파지릭 유적 5호에서는 무덤 속에 실제로 마차가 출토되었는데, 헤로도투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집을 싣고 다닐 만큼 크지 않다.

 

아무튼 그리스인 학자의 눈에도 스키타이 인들은 집에 대해서 아주 그들과 아주 달랐다고 이해할 수 있다. 지금처럼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던 시대도 아니니, 실제로 보지 않고 전해들은 내용이 정확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시베리아의 집에 대해서는 비슷한 현상이 앞 시기에도 발견된다. 후기구석기시대부터 무덤이 확인되는데, 집안에 화덕자리 아래에 인골의 두개골과 함께 인간형상물을 함께 묻은 흔적이 앙가라강 유역의 말타 유적에서 발굴된 바 있다. 그리고 신석기시대, 순동시대, 청동기시대 그리고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스키타이문화에도 대부분 발굴되는 유적은 무덤이다. 신기할 정도이다.

신석기시대에는 무덤 아닌 유적이 발굴되기도 했는데, 집터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거의 화덕자리만 남아 있고, 문화층에서 유물만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시베리아 선사문화의 전반적인 특징일 가능성이 많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림 1.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 무덤방의 천장

 

 

알타이 산맥의 파지릭 유적 5호분 출토된 마차, 기원전 5~4세기.

 

 

참고문헌

폴로시막 1994, Полосьмак Н.В. 1994 : «Стерегущие золото грифы» (ак-алахинские курганы). Новосибирск: 1994. 125 с (폴로시막, 1994, 금을 지키는 그리핀(아크 알라하 무덤)

루덴코 1960,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역사 (헤로도토스)(천병희 역), 2009, 숲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그림 1.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전체 모습은 앞의 포스팅 참고 

 

그림 2.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말탄 스키타이 전사의 모습, 투구는 코린트 식

 

그림 3.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말탄 스키타이 전사의 모습, 그림 2의 다른 면

 

그림 4. 솔로하 유적 출토, 에르미타주 소장, 네모 꼴 방패를 든 스키타이 전사

 

그림 5. 솔로하 유적 출토, 에르미타주 소장, 그림 4의 다른 면

 

그림 6. 솔로하 유적 출토, 에르미타주 소장, 황금 빗의 일부, 말에서 떨어진 그리스 전사의 얼굴과 갑옷

 

그림7. 솔로하 유적 출토, 에르미타주 소장, 황금 빗의 일부, 그림 6의 다른 면, 말에서 떨어진 그리스 전사의 칼 집

 

그림8. 솔로하 유적 출토, 에르미타주 소장, 황금 빗의 일부, 그림 6의 다른 면 

 

아래 포스팅에서 솔로하 유적에서 출토된 황금빗의 전체 모습을 알 수 있다.

2020/02/05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시베리아/철기시대, 스키타이문화] - 2500년 전, 알타이 남성전사의 방패

 

 

2500년 전, 알타이 남성전사의 방패

2500년 전 시베리아의 알타이 산맥에서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을 살펴보고 있다. ‘스키타이문화’라고 불리는 초원의 철기시대문화로 스키타이문화에서도 알타이 산맥에 위치..

eastsearoad.tistory.com

 

시베리아 스키타이 문화 가운데서 알타이 산의 우코크 고원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 출토된 방패를 설명하면서 이 황금 빗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길이 12.6cm, 너비 10.2cm의 이 작그마한 황금빗에는 세 명의 전사가 전투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2명은 같은 방향으로 쳐다보고 있고, 한 명은 그 두 명과 마주보고 있다. 말탄 무사와 네모꼴 방패를 손에 쥔 무사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음으로 둘은 같은 편이고, 승자는 말 탄 무사이다. 얼굴 방향이 다른 한 명은 말에서 떨어졌다.

말탄 전사(그림 2,3)와 그와 얼굴 방향이 같은 보병(그림 4,5)은 스키타이의 전사다. 그러나 말탄 무사가 쓰고 있는 투구는 스키타이 투구가 아닌 코린트식 투구이고, 정강가리개도 그리스 식이다(그림 2,3). 그의 허리에는 활과 화살통(고리투스)와 검이 든 칼집을 차고 있다. 화살통은 비었다(그림 5). 그의 뒤에 서 있는 보병의 복장은 긴 소매의 윗도리와 헐렁한 바지, 뒤로 벗겨졌지만 고깔모자(그림 3), 네모 모양의 방패와 단검(짧은검)(그림 2)은 스키타이 무사의 것이다. 윗도리와 아랫도리에는 동그라미 장식이 빽빽이 장식되었다.

말에서 떨어진 사람은 그리스식 갑옷과 장검(긴 검)(그림 7, 8)의 집을 착용하고 있으며, 방패의 모양도 스키타이 보병 전사의 것과 다르다.

말탄 무사와 그의 뒤에 서 있는 얼굴 방향이 같은 사람이 스키타이 전사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알타이 산맥의 파지릭 유적과 아크 알라하 유적에서 출토된 같은 모양의 방패와 단검, 말에 묘사된 마구장식, 화살통 등이 그렇다.

 

그럼 그리스식?

이 유물은 솔로하라고 하는 흑해북쪽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스키타이 귀족이 그리스 어느 공방에 ‘order made’한 유물이다. 아르타모노프는 말을 탄 전사와 그 뒤에 있는 사람 그리고 말에서 떨어진 사람의 얼굴(그림 6)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턱수염의 모양이 차이가 있고 말탄 전사의 이마가 낮고 머리가 길며, 턱수염 위로 나온 입술(그림 2,3) 등은 그리스 장인에게는 낯선 이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무사들은 머리를 기른 무사의 미라도 확인되었다.

 

그래서 그리스 장인은 스키타이 주문자의 기호에 맞도록 스키타이적인 요소를 넣었지만,  스키타이의 말 탄 무사위에는 그리스식(코린트식) 모자(그림 3)와 무릎가리개를 착장시켰다. 그리고 세 사람의 아래에는 웅크리고 있는 사자 5(그림 2)마리를 표현했다. 스키타이 문화의 유물에서는 주로 맹수는 표범과 호랑이 등이 표현되었다.

재밌는 사실은 말에서 떨어진 무사는 그리스식 갑옷(그림 5,7)을 입었지만, 바지(그림 7,8)는 네모꼴 방패를 들고 있는 무사(그림 4,5)와 같다. 스키타이 전사의 바지를 입힌 것이다.

그 maestro는 다음의 주문을 위해서 여지를 남겨 둔 것으로...(황금빗을 주문한 스키타이 귀족이 아무리 기술이 훌륭하더라도 담긴 내용물이 맘에 들지 않는 다면 다시 주문할 이유가 없을 것임으로...)

 

솔로하 유적은 1912년과 1913년에 베셀로프스키가 발굴했고 기원전 5세기 늦은 시기부터 기원전 4세기 중반에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럼 도대체 스키타이 문화는 언제부터, 어느 지역의 문화인가?

필자는 시베리아 알타이에 있는 유적을 설명하다가 흑해북쪽에 있었던 현재 우크라이나 지역에 있는 유적의 유물을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필자가 이해하기 쉽게 ‘스키타이 문화’라고 설명했지만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스키타이 세계’ 혹은 한국에서는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알려져 있다. ‘문화권’은 문화의 복합체이다. 문화+문화+문화....으로 이해된다.

아니 그렇다면, 문화를 연결하는 공통성이 있지 않았겠는가?

스키타이 문화권 혹은 스키타이 세계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를 ‘스키타이 3요소’라고 하는데, 무구, 마구, 동물문양 장식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기원전 9세기 혹은 기원전 8세기부터 흑해북쪽(현재 우크라이나)부터 알타이, 시베리아, 카자흐스탄까지 확인된다. 카자흐스탄에서는 기원전 7세기 이후는 사카문화라고도 부른다. 다음 연대표를 보시면 된다.

 

그림9. 스키타이 문화권(유라시아의 황금 사슴 2001), 표의 제일 첫 번째 상단이 그 문화가 있던 지역이다. 필자편집

 

이제까지 우리는 코끼리 코의 끝을 잠시 보고 만졌던것이다..알타이 고원에 있던 얼음공주라고 하는 여성샤먼의 미라를 매개로...

 

 

참고문헌

아르타모노프 1966, Артамонов М.И. 1966 : Сокровища скифских курганов в собрании Государственного Эрмитажа. Прага — Л.: Артия, Советский художник. 1966. 120 с (아르타모노프 1966, 에르미타주 소장 스키타이 무덤의 보물)

Манцевич А.П. 1987 : Курган Солоха. Л.: «Искусство». 1987. 143 с.(만체비치 1987, 솔로하 무덤유적)

Золотые олени Евразии. Каталог выставки в Гос. Эрмитаже, СПб, 18 октября 2001 года — 20 января 2002 года. СПб: «Славия». 2001. 248 с. (에르미타주 국가박물관 특별전 도록, 유라시아의 황금 사슴, 2001)

알렉세예프 2012, Алексеев А.Ю. 2012 : Золото скифских царей в собрании Эрмитажа. СПб: Изд-во Гос. Эрмитажа. 2012. 272 с. (알렉세예프 2012, 에르미타주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차르의 황금유물 콜렉션)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posted by 김재윤23
prev 1 2 3 4 5 6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