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Category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시베리아 알타이의 투엑타 강에 인접한 해발 1000m가량 높이에서 확인된 2600년 전 투엑타 유적은 무덤의 수도 많았고, 직경이 68m나 되는 초대형 무덤이 있는 유적이었다. 직경 68m의 무덤은 1호 무덤은 처음 시굴(발굴 전에 땅 밑에 문화층이 있는지 조사)조사한 것은 1949년 이었고, 발굴은 1954년에 무덤을 덮은 돌을 제거하고 1955년에 바닥조사까지 완료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무덤이어서 돌을 모두 들어내지 못하고 매장주체부(무덤방)과 무덤의 구조를 알 수 있을 만큼(약 30m) 만 조사했다(그림 1). 무덤을 덮은 돌의 무게는 개당 150kg이상이다.

 

그림 1. 투엑타 유적 1호분의 평면도와 단면도, 단면도는 남북방향이다. C-북. 단면도에서 먼저 것은 무덤방 바닥까지 그린 단면도, 단면도의 아래 것은 봉분의 자른 면을 그린 것이다.

 

 

그림 2. 투엑타 유적 1호분의 내부,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덤이다.

 

무덤구조는 앞서 설명한 파지릭 유적과 흡사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무덤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을 설치한다는 점은 같은 구조이다.

 

무덤구덩이는 너비가 7.53×7.88m, 깊이는 4.5m이다. 무덤방을 설치하고 상부는 돌로 채웠다(그림 4). 무덤방은 2중 무덤방이다.(바깥 1차-4.98×5.91m, 높이 2.12m, 안쪽 2차-4.15×4.90m, 높이 1.75~1.85m). 무덤방 안에는 통나무관 1기가 놓여 있다(그림 4).

 

무덤방 제작에 사용된 나무는 자작나무를 이용했고 길이가 4.9~6.9m에 달한다.

2중 무덤방은 각각의 덮개가 있고, 3번 통나무를 덮었다. 무덤방 바깥에 무덤구덩이의 가장자리에 수직으로 통나무 12개(길이 2.83m, 직경 42cm)를 세우고 그 위를 남북방향으로 덮었다(그림 3). 그 위는 작은 통나무로 동서방향으로 채운 후 가장 상부에는 다시 남북방향으로 통나무로 덮었다(그림 4, 이 지점은 무덤상부에서부터 2m 되는 지점). 루덴코는 무덤방을 5번 덮은 것으로 표현했다.

 

그림 3. 투엑타 유적 1호분의 외곽 무덤방 덮개, 도굴구멍의 크기는 1.58×1.87m.

 

그림 4. 투엑타 유적 1호분의 무덤방 단면도, 오른쪽 북쪽.

 

그림 5. 투엑타 유적 1호분의 통나무관, 가장 아래에서 찍은 사진이다.

 

말은 무덤구덩이 북쪽에서 8마리가 확인되었다. 머리에 체칸(전투용도끼)으로 내려 친 흔적이 남아 있었고, 수직으로 세운 통나무 사이에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돌이 20cm정도 깔려 있었고, 머리는 동쪽으로 다리는 굽힌채로 옆으로 뉘웠다. 그 위를 자작나무 16개로 덮었다(그림 4).

 

 

 

투엑타 2호분은 1호분의 북쪽에 위치한다. 1호분이 워낙 커서 상대적으로 작아보이지만 직경 32m이고, 높이는 2.6m이다(그림 6).

 

 

 

그림 6. 투엑타 유적 2호분의 평면도와 단면도, 단면도 위의 것은 남북방향, 아래 것은 동서방향이다. 각각 단면도의 왼쪽이 북쪽(C)과 서쪽(З)이다.

 

무덤구덩이(4.5×5.8m, 깊이 4.5m) 안에 무덤방(3,3×3.7m)을 만들고 그 안에 통나무관을 놓은 구조이다. 무덤구덩이 내부에서 북쪽은 말을 위한 공간이고 남쪽에 무덤방이 설치되었다(그림 8). 무덤방 외곽에는 남쪽과 북쪽에 수직으로 기둥(길이 1.48m, 직경 50cm)을 세워서 상부의 하중을 견디기 쉽게 했다. 이 위로 남북방향으로 통나무를 덮고 다시 동서방향으로 통나무 13개를 나란히 눕혀서 덮었다. 가장 상부에는 자작나무 껍질로 덮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무덤구덩이 북쪽에는 말 8마리 분이 있었다.

 

그림 7. 투엑타 유적 2호분의 무덤방 단면도

 

그림 8. 투엑타 유적 2호분 무덤방 평면도

 

투엑타 유적의 무덤구조가 앞서 살펴본 유적인 바샤다르 유적과 파지릭 유적과 다른 점은 무덤 상부를 덮은 재료이다. 물론 여러 번 무덤방을 덮은 점은 같지만,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무덤구덩이의 상단부분을 통나무로 채웠으나 투엑타 유적은 상부의 하중을 견디기 위해서 나무를 덮고 그 내부는 돌(1호)과 흙(2호)으로 채웠다.

 

2020/07/0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바샤다르 유적] - 2600년 전 알타이 유적의 없어진 미라

 

2600년 전 알타이 유적의 없어진 미라

바샤다르 유적은 앞서 살펴본 파지릭 유적 보다 대략 100년 정도 이른 유적으로 생각한다. 대체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를 일종의 지역문화로서 ‘파지릭 문화’라고 한다

eastsearoad.tistory.com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의 스키타이 문화인 파지릭 유적에는 사람과 말이 함께 매장되었다. 사람도 인위적인 과정을 거쳐서 미라로 만들어졌고, 말도 화려하게 꾸민 상태로 함께 묻혔다. 특히 파지릭 유적에는 말의 머리에 마스크를 씌웠다. 마스크에는 특히 화려한 뿔 장식이 달린 것이었다.

 

 

2020/03/21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2호분] - 2500년 전 시베리아의 말 마스크와 살아있는 그리핀

 

2500년 전 시베리아의 말 마스크와 살아있는 그리핀

2500년 전 시베리아의 무덤인 파지릭 2호분에는 말이 7마리 부장되어 있었고, 말 6마리는 말을 장식하는 굴레장식이 있었고, 1마리는 아무 장식이 없었다. 우리는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3유적

eastsearoad.tistory.com

 

투엑타 유적 1호분에서도 말의 마스크 장식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출토되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뿔 장식인데 말의 마스크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사슴 보다는 뿔이 뒤로 굽은 동물은 산염소 혹은 산양이다.

 

쌍으로 확인된 것은 3쌍(그림 1~3)이고, 목제 뿔의 부속품(그림 4)도 있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4쌍이지만 이 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이 유물과 같은 형태의 부속품 등이 많이 출토되기 때문이다.(이 무덤도 역시 도굴당했다. 바샤다르 만큼 심하지는 않지만).

 

 

그림 1. 투엑타 1호분 출토 목제 뿔 1

 

 

그림 2. 투엑타 1호분 출토 목제 뿔 2

 

그림 3. 투엑타 1호분 출토 목제 뿔 3

 

그림 4. 투엑타 1호분 출토 목제 뿔 4의 부속품, 뿔 모양은 가죽, 반원판은 목제

 

 

어떻게 곧은 나무를 휘어지도록 표현할 수 있었을까?

 

당연히 나무조각을 이어서 만들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밀리니코프(2018)가 투엑타 1호에서 발견된 목제 뿔의 제작과정에 대해서 적은 글을 며칠 전 발견했다.

 

목제 뿔은 나무 3 가지를 이어서 붙인 것이다. 곧은 나무를 부채꼴처럼 붙일 수 있었던 핵심 기술은 나무 조각을 길게 비스듬하게 잘라서 붙인 것(그림 5-1, 2)이다.

 

 

그림 5. 투엑타 1호분 출토 목제 뿔, 나무를 길게 비스듬하게 잘라서 이어 붙인 흔적이 남아 있다. 특히 2번 그림 중 가장 아래면은 뿔의 아래면인데, 비스듬하게 자른 면이 아래로 향하도록 붙였다.(밀리니코프 2018 인용)

 

 

목제 뿔의 상단에는 반타원형의 장식판이 붙어 있는데, 목제 뿔에 삽입하도록 제작된 것이다(그림 6). 나무를 파낸 흔적(그림 6-3)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래서 비스듬하게 자른 면을 잇는 방법도 뿔의 지점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그림 6-2, 4). 뿔이 마스크와 붙이는 부위(그림 6-4), 뿔의 상단 부위(그림 6-2)이다. 같은 쌍의 또 다른 유물에는 가죽(그림 6-1)으로 연결한 흔적도 남아 있다.

 

그림 6. 투엑타 1호분 출토 목제 뿔, 반원형의 장식판을 빼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 보고 찍은 사진.(밀리니코프 2018 인용)

 

 

삽입된 반원형 나무장식판은 두 판을 이어 붙인 것이다(그림 7). 옆 면에는 뿔에 삽입해서 고정할 때 필요한 구멍이 있다. 나무 못으로 고정시켰다. 상단에도 또 다른 장식을 삽입하게 위해서 사각형(그림 7-2 왼쪽) 으로 잘라내거나 구멍을 뚫는 경우(그림 8-1)도 있다.

 

그림 7. 투엑타 1호분 출토 목제 뿔의 장식판.(밀리니코프 2018 인용)

 

 

반원형 상단에는 그림8과 같이 뿔 모양으로 자른 가죽을 끼워 넣어서 장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 8. 투엑타 1호분 출토 목제 뿔의 장식판 2(밀리니코프 2018 인용)

 

 

 

목제뿔에 삽입되는 장식판은 반원형 이외에도 반원형의 하단이 확장되어 홈이 있는 형태(그림 9-2)도 있다. 호랑이(3.5~6cm)는 따로 조각되어서 구멍에 삽입된 것이다.

 

그림 9. 투엑타 1호분 출토 목제 뿔(그림 3과 동일유물). 1-제작자의 표시 ‘X’,

반원형 장식판 8~12cm. 전체 길이 62.5cm, 굽은상태높이 33.5cm(밀리니코프 2018 인용)

 

 

 

참고문헌

Мыльников В.П. Технология изготовления деревянных рогов для парадных погребальных масок коней на Алтае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АРХЕОЛОГИЯ, ЭТНОГРАФИЯ И АНТРОПОЛОГИЯ ЕВРАЗИИ// Новосибирск: 2018, 49-58C. (밀리니코프 2018,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무덤에서 출토된 목제 뿔의 제작방법)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6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바샤다르 무덤 1호에서는 미라가 발견되었다. 이 무덤은 구덩이가 깊지 않고 얼음층이 완전하게 형성되지 않아서 미라가 잘 보존되지 않아서 미라의 피부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두개골 뒤를 잘라내고 뇌를 꺼낸 흔적이 남아 있고, 뼈의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일종의 방부제를 주입했을 것으로 본다. 바샤다르 무덤 2호는 여성미라는 도굴꾼이 갈기갈기 찢어서 무덤방 여러 곳곳에 널려 있었고, 남성은 통째로 꺼내간 상황이어서 어떤 미라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바샤다르 유적 보다도 100년 가량 늦은 파지릭 유적의 2호분과 5호분에서도 통나무관 안에 남녀의 미라가 함께 매장되었다. 파지릭 1호분도 도굴로 인해서 상황은 알 수 없으나, 말 10마리나 매장된 것을 보면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같은 시기로 파지릭 유적 보다 1000mrfid 더 높은 곳에 위치한 아크 알라하 3유적과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에서도 미라가 발견되었다. 전자는 여성, 후자는 남성이 각각 단독으로 묻혔다.

  아시다시피 아크 알라하 3유적은 현대인들은 얼음공주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고, 살아서는 샤먼이었다고 생각되는 여성의 무덤이다. 여성단독 무덤이 잘 없는 파지릭 문화(스키타이 문화 중 알타이 지역문화)에서 매우 특이한 혹은 특별한 유적이다.

 

2600년 전 바샤다르 유적과 아주 가까운 투엑타 강(현재 카툰 강)의 계곡에 위치한 투엑타 유적 1호분은 직경이 68m인 초대형 무덤이다. 누구의 무덤일까?

 

40~45세의 남성 단독무덤이다. 키가 178cm나 되는데, 미라로 처리되지 않았다(그림 1).

 

그림 1. 투엑타 유적 1호분의 남성 두개골(미라 아님)

 

투엑타 유적 1호분의 북쪽에 붙어 있는 2호분은 35세 가량의 여성 무덤이다. 이 여성은 키가 144cm정도로 작은 키이다. 투엑타 유적의 1호분과 2호분의 두개골로 살펴보면 유로포이드이다.

 

루덴코가 발굴한 무덤(파지릭, 바샤다르, 투엑타 유적)에서 인종구분은 형질인류학적인 분석이다(1947년, 1950년, 1954년의 발굴해서 1953년과 1960년에 연구결과를 내어놓았다.). 두개골 뿐만 아니라 중요한 판단 기준 중에 하나가 머리카락 형태와 피부 색이다. 파지릭 유적에서 확인되는 3호분과 5호분 여성, 2호분 여성은 유로포이드의 머리카락 형태와 피부색이었다. 머리카락은 매우 가늘고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으로 어두운 갈색이었다. 그런데 파지릭 2호분과 5호분의 남성은 몽골로이드이다.

루덴코는 파지릭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몽골로이드와 유로포이드의 혼합 매장은 결혼에 의한 것과 전쟁으로 인한 인구 유입의 가능성을 이야기 했다. 예를 들면 어떤 그룹의 리더가 그들을 도와줄 알타이의 리더를 찾아서 가족 및 친척이 알타이로 숨어들어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파지릭 유적은 현재 살펴보고 있는 투엑타 유적 보다 100년 정도 늦다.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미라로 시신을 처리했으나 동시대의 투엑타 유적은 미라 처리를 하지 않았다. 투엑타 1호분이 가장 알타이 전체에서 가장 큰 무덤 무덤인데도 불구하고.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의 2600년 전 투엑타 무덤에는 사람과 함께 역시 말이 매장된다. 말의 굴레에 장식을 하는 스키타이 문화의 전통은 아마 이 시점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좀 더 정확하게는 나무로 만든 굴레장식을 말한다. 물론 이 보다 더 이르고 지역적으로도 약간 차이가 있지만 아르잔-2호에서도 굴레로 장식하기는 하지만 청동제 혹은 단순한 장식품이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이지만, 파지릭 문화의 유적이 입지한 곳은 알타이 지역이고, 아르잔-1호와 아르잔-2호가 위치한 곳은 알타이의 경계구역을 벗어난 샨-수벤스키 지역으로 구분한다.)

 

나무를 깎아서 만드는 제품의 특성상 좀 더 세밀한 표현이 가능하다. 루덴코는 그림 1의 그리핀을 투엑타 1호에서 가장 특별한 유물이라고 생각했다. 말의 머리 장식(당호)으로 원판형이다. 이제까지 보여드린 원판형 머리장식은 모두 문양이 없었으나  오늘 소개해 드리는 유물에는 그리핀 2마리가 원을 그리고 있다. 같은 구도로 그리핀 2마리가 원을 그리는 유물은 파지릭 유적 2호분에서 출토되었다. 대마씨가 보관된 가죽용기이다.

 

그림 1. 2600년 전 투엑타 유적 1호분의 말머리장식. 지름 12.7cm

 

얼핏 보면 독수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리핀이다. 맹수의 귀가 표현되었고, 갈기, 맹수의 발톱표현 등은 독수리에서는 볼 수 없다. 특히 투엑타 1호분의 그리핀은 목 부분에 반원모양으로 비늘 표현도 실제 독수리와는 거리가 있다.

그림 1은 독수리가 주체이고, 맹수의 부분이 가미된 것이다. 그리고 갈기는 다른 동물과 관련되어 있다. 어쨌든 그림 2의 독수리머리 그리핀 전신형과는 다르다.

 

 

독수리머리 그리핀 전신형은 독수리머리에 호랑이 몸통이 부착되었다(그림2). 여기에 맹금류의 날개를 가져왔다. 그림 1의 그리핀 발은 맹수의 발톱을 표현한 것이다. 물론 실제 독수리 발톱은 매우 날카롭지만 저렇게 크지 않다.

 

그림 2. 투엑타 유적 1호분의 독수리머리 그리핀 전신형.

 

그 옛날 그리핀 만들던 마스터는 그리핀을 표현할 때 귀와 갈기로서 독수리가 아닌 그리핀임을 나타냈다.

 

그림 3. 투엑타 유적 1호분의 독수리 머리 그리핀 머리형. 굴레장식

 

그림 4.투엑타 유적 1호분의 독수리 머리 그리핀 머리형. 굴레장식, 귀 부분에 구멍이 있는데 가죽으로 귀를 만들어 넣었을 것이다. 같은 표현법은 파지릭 유적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독수리머리 그리핀 중에서 머리형은 모두 귀와 갈기가 실제 독수리에는 없는 요소이다.

 

 

*위의 사진은 1991년 10월에 한국에서 열린 에르미타주 박물관 특별전 도록을 참고한 것이다(알타이 얼음공주 특별전은 1995년에 열린 것이다). 그해 고르바초프가 제주도를 4월에 방문했고, 한국과 수교했다. 루덴코의 저서(1960)에도 사진은 있으나 좀 더 좋은 사진을 보여드리고자 했다.

 

참고문헌

 

국립중앙박물관, 1991, 소련국립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스키타이 황금』 특별전 도록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posted by 김재윤23

2600년 전 시베리아의 가장 큰 무덤인 투엑타 유적 2호분에서는 여러 가지 말을 꾸미는 장식판이 있다. 말의 굴레에 다는 것이다(굴레에 대한 이해는 앞 선 포스팅). 

 

2020/07/1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바샤다르 유적] - 2600년 전 나무로 된 그리핀

 

2600년 전 나무로 된 그리핀

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가장 높은 곳인 알타이 지역에 입지한 파지릭 문화는 파지릭 유적을 발굴하면서 그 곳에서 나온 매장문화의 특징을 일컫는 것이다. 무덤구덩이에 나무로 된 방(목곽)을 설

eastsearoad.tistory.com

 

 

굴레장식은 나무로 깎아서 만들었고, 아주 얇은 금박으로 쌓을 것이다. 물론 금박은 거의 잘 남아 있지 않다. 바샤다르 유적은 매우 도굴이 심해서 잘 남아 있지 않지만 추상적인 장식판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추상적인 유물을 추적할 만한 유물이 남아 있는 것이 투엑타 유적이었다. 이 유적에서는 바샤다르 유적과 같은 추상적인 유물과 함께 이를 가늠할 수 있는 사실적 유물이 함께 출토되기 때문이다.

 

투엑타 유적에서는 여러 문양장식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재밌는 표현은 그리핀이다. 그리핀은 두 마리이상의 동물이 결합된 하이브리드이다.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 그렇다면 그리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재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선 투엑타 2호분에는 추상적인 굴레장식 외에도 사실적인 표현물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사슴문양을 장식한 굴레장식판이다. 머리를 표현한 것인데 사슴머리 2~3개(그림 1-2)를 붙여서 표현한 것으로 이를 추상적 혹은 간단하게 표현한 것은 초본류에 가깝다

 

 

사슴머리가 3개 붙은 장식판(그림 1-2)은 어떤 식물 세 장을 붙여서 표현한 것(그림 1-1)을 식물을 대신해서 사슴얼굴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사슴머리 3개 붙인 장식판도 사실적이지만 추상적인 표현이라는 점에서 풀장식에 사슴(그림 1-2)을 새겨 넣은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물론 사슴을 단독으로 표현한 유물도 있다. 그림 1-2도 사슴과 풀의 결합물이다.

 

투엑타 유적에는 특히 풀을 표현한 많은 장식판(그림 3)이 있는데 그 중에 가장 많은 장식판이 그림 1-3과 같은 판이다. 초본은 그림은 1-4의 모양으로도 확인되는데, 풀이라기 보다는 좀 더 다듬어졌다. 독수리 얼굴(그림 1-7)을 참고로 했을 수도 있다. 물론 동물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림 1-5는 독수리 얼굴이라기 보다는 사슴머리 장식판(그림 1-2)에 갈기를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맹금류 표현 가운데 가장 핵심은 부리인데, 독수리 부리가 아니다. 그림 1-5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갈기 표현과 관련된 유물이 필요하다. 변형 사슴머리에 독수리 부리를 (그림 1-6) 착장하면서 독수리머리그리핀이 되었다. 머리만 표현된 것으로, 하반신은 호랑이 하반신을 부착시키면 그림 2의 전신형 그리핀이 된다.

 

 

 

그림 1. 투엑타 유적 1호분 출토 굴레장식

 

 

 

 

그림 2. 투엑타 유적 1호분 출토 독수리머리 그리핀 전신형, 그림 1-6에 꼬리가 긴 맹수의 몸통을 붙인 것이다.

 

 

 

 

그림 3. 투에타 유적 1호분 풀 모양 굴레장식

 

그리핀도 너무 많은 표현이 존재하기 때문에 만드는 사람에 따라서 혹은 주문자의 취향에 따라서 많은 변형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어짜피 그리핀이라는 존재는 인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투엑타 유적에서는 풀장식이 추상화되어 가는 모습도 보여지고, 사슴의 변형이 눈에 띈다. 사슴의 변형된 모습은 파지릭 유적에서도 확인되지만 100년 전의 투엑타 유적에서 사실적으로 보여진다. 파지릭 유적이 존재한 100년 이후의 그리핀은 완전히 하이브리드형 동물문양로 보여지지만 , 그 전에는 풀장식과 동물이 결합된 모습을 띄었다는 것을 투엑타 유적에서 관찰할 수 있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600년 전 바샤다르 유적에서는 사슴이 가죽, 청동, 뿔로 제작된 것이 확인되었다. 이미 살펴본 아크 알라하 3유적이나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사슴과 같은 우제류는 말을 꾸미는 장식으로 사용되었으나, 이 유적은 유물이 거의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남겨진 사슴문양들도 모두 조각이다. 말의 굴레장식은 간단한 원판을 기본 모티브로 한 것이 주로 남았는데, 필자는 그리핀과 호랑이의 추상적인 표현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샤다르 유적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투엑타 유적에서 사실적인 동물문양장식과 함께 추상적인 표현물이 함께 출토되기 때문이다.

 

투엑타 유적에서는 사슴을 모티브로 한 굴레장식이 출토된다. 눈이 둥글고 귀와 뿔이 표현되었다. 뿔은 크지 않다. 사슴 머리 3개가 달려서 삼각구도를 이루는 사슴문양장식(그림 1-6), 머리가 2개를 이루는 문양 장식(그림 1-4,5)은 같은유적(1호분)에서 함께 출토된 초본류를 형상화한 장식판(그림 2)과 전체적인 구도? 스타일이 유사하다.

 

그림 1. 투엑타 유적 출토 굴레장식, 사슴문양

 

그림 2. 투엑타 유적 출토 굴레장식, 초본문양

 

투엑타 유적은 투엑타 강(현재 카툰 강)의 왼쪽 지류인 우르술 강의 계곡부에 위치한다(그리 3, 4). 1950년대에는 이 계곡에 무덤이 197개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덤은 등고선의 수직방향으로 열을 이루어 군집되었다. 가장 큰 고분은 유적에서 동쪽에 위치한다. 1호-68m, 3호-62m, 4호-48m, 6호-52m이고, 대형 무덤 옆에는 작은 무덤이 있다. 1954년에 루덴코는 1호와 2호를 발굴했는데, 1호는 루덴코가 알타이에서 발굴한 무덤 가운데 가장 큰 무덤이었다(그림 5).

 

그림 3. 투엑타 유적 1, 구글지도

 

그림 4. 투엑타 유적과 바샤다르 유적

 

www.google.com/maps/d/edit?mid=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usp=sharing지도는 아래 링크로 들어가면 볼 수 있다.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www.google.com

 

그림 5. 투엑타 유적의 평면도

 

1호는 지름이 68m, 높이는 4m로 초대형 무덤이다. 무덤을 덮은 돌은 대략 6000평방미터 가량이었는데, 돌을 덜어내기 위해서 트럭을 이용해서 돌을 옮겼다. 그림 5의 하단에는 당시 투엑타 마을이 표시되었는데, 도로가 표시되어 있다.

 

그림 6. 투엑타 유적의 전경 (1-대형고분 가운데 가장 남쪽의 3개 4,5,6호분, 2-무덤덮은 돌을 제거하는 광경, 사람을 보면 무덤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림 7. 1954년 투엑타 유적 발굴광경.

 

그런데 1950년 이전에도 이 유적은 이미 1935년 세르게예프와 1937년에 키셀레프가 발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자료는 발표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고분들이 도굴한 흔적이 많이 남았다. 특히 앞서 이야기 한 대형고분에 바로 인접한 무덤에 도굴흔적이 심했다. 이런 상황에서 루덴코는 가장 큰 고분인 1호와 바로 북쪽에 붙어 있는 2호분을 발굴하기로 결정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본 가장 큰 무덤의 구조와 그 내부가 궁금했을 것이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020. 7. 17. 12:15 세계의 박물관

 

유라시아 암각화 주제로 가장 많이 애용된 것은 사슴과 같이 뿔이 있고 굽달린 동물이다. 필자가 앞서 소개한 키르기스스탄의 촐폰아타(Чолпон-Ата, Cholpon-Ata 유적에서 사슴도 그려지지만 가장 많이 확인되는 것은 산염소(코젤, kozel)(그림1)으로 629개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총 그림의 숫자는 930여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림 1. 촐폰아타 암각화의 산염소 1(필자촬영)

 

그림 2. 촐폰아타 암각화, 그림 1의 왼쪽 위, 사냥하는 장면

 

그림 3. 촐폰아타 암각화의 산염소 2(필자촬영)

 

 

 

산염소는 뒤로 휘어진 뿔, 측면 몸통, 다리, 짧은 꼬리가 가장 기본적인 구성이다. 산양표현은 시간에 따라서 좀 더 통통하게 그려지거나 추상화되고 단순하게 선으로 처리되기도 한다. 다리가 네 개 또는 두 개, 뿔도 한 개에서 두 개로 바뀐다. 산양은 무리를 이루거나 맹수와 마주보는 장면, 사냥에서 쫒기는 장면, 서 있는 모습 등 다양한 장면에서 나타난다.

그림 1과 그림 3은 모두 코젤(산염소)를 그린 것이지만 표현법이 다르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에 차이가 있다.

 

 

산염소 다음으로 많이 그려지는 것은 사슴(이전 포스팅 그림)이다. 산염소와 전체적으로 비슷하지만 뿔이 차이가 있는데, 가지가 여러 개 그려진다. 주로 나무 모양과 가깝다.

 

 

암각화는 이식 쿨(Иссык-Куль, Issyk-Kul)호수 부근에 위치하는데, 쿠네이 알라-투(Кунгей Ала-Тоо, Kungei Ala-Too) 산의 남쪽 기슭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이 산의 협곡에서 흘러나온 화산암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흩어져 있는데 이 곳에 암각화가 그려져 있다. 그 구역은 서쪽으로는 4km, 폭은 0.6~2km에 달한다.

 

그림 3. 촐폰아타 유적의 범위(유적의 위치는 이전 포스팅 참고)

 

 

 

그림 4. 이식-쿨 호수(이곳은 소비에트 시절부터 유명한 관광지 중에 한 곳이다.)

 

키르기스스탄은 넓게 보면 천산산맥에 입지한 국가로 이식 쿨 분지의 암각화(촐폰아타)와 알타이의 암각화는 자연환경에서 차이가 있음으로 사는 식생도 차이가 있다.

 

촐폰아타 암각화의 주제는 산염소, 사슴, 황소, 말, 개, 늑대 등 동물만 그려진 것과 사람이 동물을 공격하는 장면, 말을 탄 무사와 낙타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돌 하나에는 2~3개부터 가장 많은 것은 20개의 주제까지 그려진다.

 

암각화의 모든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그림의 제작연대이다. 이 유적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동물문양은 스키타이 시대의 것으로 천산산맥 주변의 문화였던 사카문화와 관련이 있다. 이 연대는 암각화가 주로 그려졌던 시점이고, 그 이전인 청동기시대부터 기원후 까지(기원전 2천년기~기원후 8세기) 그림은 계속 그려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참고로 소비에트 연방에 속했던 나라는 모든 영역에서 소비에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역사 고고학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촐폰아타, 이식-쿨, 쿠네이 알라-투 등 지명은 키르기스스어이고 음차해서 러시아어로 쓴 것이다]

 

 

촐폰아타 암각화박물관은 야외박물관이다. (우리나라에 잘 없는 야외박물관...) 촐폰아타가 이식 쿨 호수와 인접하고 있어서 관공도시로 이 유적도 관광지이다. 그래서 그 주변에서는 가기가 쉬운 박물관이다. 한국에서 키르기스스탄으로 가는 직항은 없지만, 카자흐스탄의 구수도인 알마티로는 가면 이곳으로 갈 수 있다. 한마디로 가기 힘들다.ㅋ...그래도 꿋꿋한 한국인들은 탐방기를 남긴다..

 

 

 

참고문헌

 

Миклашевич Е.А. 1995 : Петроглифы Чолпон-Аты (Киргизия). // Древнее искусство Азии. Петроглифы. Кемерово: 1995. С. 63-68(미크라세비치 1995, 촐폰아타 암각화(키르기스스탄)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세계의 박물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르메니아의 예레부니 박물관  (0) 2021.11.28
posted by 김재윤23

26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에는 높은 곳에 깊은 무덤구덩이를 파고 나무로 된 무덤방을 만들고 말과 함께 매장하는 장례식이 행해졌다. 2600년 전 이전에도 장례식 이후에 축조된 결과물은 다르지만 성대한 장례식은 있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파지릭 유적, 바샤다르 유적, 투엑타 유적등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파지릭문화를 밝혀 낸 루덴코는 자신이 실제로 참석한 카자흐스탄 한 부족의 장례식 기념행사를 적어놓았다. 자신이 발굴한 유적에서 치러진 장례식이 비슷한 모습이었을 것이며, 발트해부터 알타이 북동부 지역까지 오래전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왔을 가능성을 비추었다(루덴코 1960).

 

1927년 루덴코는 카자흐스탄 흑해로 흘러가는 이르티시 강 주변에 있는 한 부족의 장례식을 경험했다. 3월 25일에 죽은 사람의 장례식은 같은해 9월 21일부터 23일까지 치러졌다.

장례식에는 30개의 펠트 마차(펠트마차로 번역이 되지만 문맥 상 일종의 텐트와 함께 겸비된 것으로 일종의 캠핑카?정도로 이해가 된다)가 줄을 있었고, 그 중 5개는 죽은 이의 아들을 위한 것이다. 손님을 위한 것도 15개나 준비되었고 그 중에는 여성을 위한 것도 있다. 손님을 위한 음식은 4마리의 말, 6마리의 황소, 25마리의 숫양이 준비되었고, 2~3개의 큰 용기에 쿠미즈(양 지방 유제품)로 가득채워서 준비했다. 쿠미즈는 선반에 담겨서 옮겼는데, 아주 비싼 카펫으로 장식된 낙타가 행렬을 이끌었다. 낙타뒤에는 여자, 그 뒤에 남자가 서 있었다.

 

손님들도 양과 말을 장례를 위해서 가져왔는데 손님들이 가져온 30마리의 숫양 중에 25마리를 죽여서 손님들을 대접했다. 낮에는 차와 쿠미즈가 간식으로 아침과 저녁에는 고기가 손님들에게 제공되었다. 음식은 특별히 지정된 노지(화덕자리)에서 만들어졌다. 고기는 신선하게 하기위해서 같은 장소에서 죽이고 같은 장소에서 음식을 했다. 음식은 2~4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에 실려서 손님이 끌고 온 마차로 배달되었다.

루덴코가 본 장례식에는 부족의 허락이 없어서 말 경주 대회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말 경주대회가 장례식에 있었던 것을 그는 나이만족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1896년에 사망한 나이만족이 경험한 장례식은 매우 성대한 것이었다. 3일 동안 장례식이 치러 졌는데, 아주 먼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모였는데, 심지어 해외에서도 왔다. 손님을 위한 텐트(마차)가 300개나 설치되었고, 손님을 위해서 각 마차에 한 사람, 말 한 마리가 배정되었다. 손님들은 쿠미즈(유제품)와 빵반죽을 직접가져왔다.

말 경주는 장례식 전날부터 첫 번째 경주가 시작되었다. 이날은 장례식 음식 준비를 위해서 음식하기 위한 구덩이를 판 날이고, 말 경주가 열린다.  말 경주는 첫 번째와 네번 째 날 열렸다.  네 번째 경주는 장례식 마지막 날 열리는 데 25마일을 달리는 것이었다. 최대 250여마리의 말이 참가했고 그 중에 20마리에게 상이 수여되었다. 1등 말은 말2마리, 낙타1마리와 은을 받았고 나머지 말은 말 1마리를 받았다.

세 번째 대회는 낙타경주이다. 50마리의 낙타가 경주해서 10개의 상이 수여되었다.

 

이러한 성대하고 체계적인 음식문화를 동반한 혼잡한 기념은 부자와 귀족 사이에서 가능했다. 다양한 대회와 음식 때문에 수천명의 사람들이 모일수 있었고 거대한 토루 등의 건설은 짧은 기간에 가능했다.

 

비슷한 광경이 19세기말~20세기 초 뿐만 아니라 2600년 전에도 있었을 것이라고 루덴코는 추정했다. 필자도 이에 동의한다. 6m의 구덩이를 파고 무덤방을 설치하는 작업은 많은 노동력이 동원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20세기 초에 루덴코가 목격한 장례식에서도 3월에 죽은 이를 9월에 묻었는데, 이는 2600년 전 파지릭 문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 했지만 장례식은 봄과 가을에 치러진다고 했다. 20세기 초에는 그 사이에 시신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2600년 전에는 죽고 나서 묻기 전의  몇 달동안 시신은 미라로 처리해서 보관했다.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에는 남성시신은 도둑맞았고 여성시신은 훼손이 심해서 죽은 이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

 

그러나 1호분에는 부패가 심해서 잘 남아 있지는 않지만 미라처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남아 있었다. 미라는 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지만 이 인골은 두개골과 여러 뼈에 미라처리 흔적만이 남아 있다. 두개골에 구멍을 파고 뇌를 제거한 흔적이 남아 있다(그림1). 아크 알라하-3 유적의 얼음공주 미라도 두개골에 그림 1과 같은 구멍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바샤다르 1호분의 남성미라는 좀 다른데, 경추(그림 2-1), 척추 등에 구멍이 뚫려 있다. 이곳으로 방부제를 투입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0~12번째 흉추(그림 2-2), 나머지 흉추(그림 2-3,4)에 청공되었다. 요추에도 뚫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구멍이 잘 남아 있지 않다. 흉추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복강(배)은 내장을 추출하기 위해서 개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림 1. 바샤다르 유적 1호분 남성미라의 뇌

 

 

 

그림 2. 바샤다르 유적 1호분 남성미라의 척추

 

미라처리의 관건은 뇌를 제거하고 피부는 남기고 그 밑의 지방과 근육을 제거하는 것인데, 뼈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던 것은 근육이 이미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샤다르 유적 1호분의 남성도 미라이다. 아시다시피, 바샤다르 유적의 1호분은 무덤구덩이가 깊지 않았고, 얼음층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아서 다른 유적에 비해서 유기물질이 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남성 미라의 피부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참고문헌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시베리아 알타이의 2600년 전 무덤에는 사람 뿐 만 아니라 말도 함께 매장되었다. 말의 숫자는 정확하게 어떤 원칙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덤 마다 다르다.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는 남녀가 말 14마리와 함께 매장되었다. 앞서 살펴본 무덤은 무덤구덩이가 깊고, 무덤방 아래에 얼음층이 두텁게 형성된 경우 말 뿐만 아니라 기타 유기물질이 잘 냉동?되어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었다. 무덤구덩이가 상대적으로 깊지 않고(2m), 얼음층이 덜 형성된 바샤다르 유적 1호분에서는 나무로 된 무덤방도 북쪽벽이 무너졌고, 유기물질로 된 유물도 잘 남아 있지 않은 편이었다.

 

바샤다르 유적의 2호분은 깊이가 6m나 되는 무덤구덩이 속에 무덤방이 설치되어서, 유기물질로 된 유물들은 남아 있다. 그러나 도굴로 인해서 유물은 많이 없어진 상태이다. 특히 말의 매장지에도 손을 대어서 말 장식 세트도 거의 흩어진 상태였다. 그래도 생생한 것이 한 벌 남아 있어서 앞서 소개한 바 있다.

 

이 유적에서 확인된 말의 굴레장식은 앞에서 본 파지릭 유적과 아크 알라하 1유적, 아크 알라하 3유적과는 달리 동물문양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말의 재갈멈치 장식판에 달린 구름?모양은 그리핀으로 볼 수 있다. 재갈멈치 가운데 그리핀이 남아 있는 유물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샤다르 유적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투엑타 유적의 유물을 살펴보면 구름처럼 장식판이 그리핀을 최소한으로 표현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림 1-1). 뿐만 아니라 바샤다르 유적 2호에서 굴레장식에 달았던 삼판 장식(그림 3)은 투엑타 유적에서 호랑이 얼굴(그림 1-2,3, 그림 2)과 함께 표현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말과 관련된 도구 각 부위 명칭은 앞서 바샤다르 유적 2호분의 마구를 소개한 글에서 알 수 있다.

 

 

그림 1. 투엑타 유적의 굴레장식판(1-재갈멈치, 2,3-굴레장식판)

 

그림 2. 투엑타 유적의 굴레장식판.투엑타 유적에서 표현된 호랑이는 파지릭 유적의 유물 보다 희화되었다(좀 우스꽝 스런 모습이다..귀엽기도 하다).

 

 

그림 3. 바샤다르 유적 2호분의 굴레장식판

 

그림 4. 바사댜르 유적 2호분의 굴레장식판

 

 

그림 3의 원판장식은 둥근 상단과 구름모양의 하단으로 구성되었는데, 투엑타 유적의 유물도 마찬가지이다. 투엑타 유적의 유물에서는 원판 대신에 호랑이 얼굴을 붙이고, 호랑이 얼굴과 어울리도록 하단에는 구름모양 판에 좀 더 세밀한 원판을 새긴 것이다.

 

투엑타 유적에서는 그림 1, 그림 2와 같은 호랑이 굴레장식판과 함께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간략한 장식판(그림 5)이 같은 무덤에서 출토된다. 바샤다르 유적이 도굴되지 않았고 좀 더 잘 남아 있었다면 투엑타 유적과 같은 호랑이 굴레장식판이 함께 출토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림 5. 투엑타 유적 1호분의 굴레장식 판

 

투엑타 유적에서는 날개 편 그리핀(그림 6)이 여러 점 확인된다. 크게 두 종류인데, 머리에 뿔이 달리고 귀 끝이 뾰족한 그리핀(그림 6-4, 6) 와 뿔이 없고 귀가 둥근 그리핀(그림 6-1~3)이다. 머리에 뿔 달린 그리핀은 100년 뒤의 아크 알라하 유적 1호분과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 많이 확인되어 계속된다. 머리에 뿔 없고 귀가 둥근 그리핀은 역시 100년 뒤에도 볼 수 있는데, 파지릭 유적이다.

 

그림 6.투엑타 유적 1호분의 그리핀

 

그리핀은 매우 다양한데, 바샤다르 유적과 같이 독수리를 메인 모티브로 해서 제작한 유물 외에도 여러 가지 가 있다.

 

맹수의 머리와 몸통에 우제류의 뿔과 날개가 붙는 스타일이 있다. 사자머리가 붙으면 페르시안 스타일(그림 7,8), 호랑이 머리가 붙는 스타일(그림 9)이 있다.

 

그림 7. 파지릭 유적 2호분, 구리판에 찍힌 그리핀, 관련된 앞선 포스팅 참고

 

그림 8, 파지릭 유적 2호분 여성 목걸이, 목제. 관련된 앞선 포스팅 참고

 

그림 9. 파지릭 유적 2호분의 안장덮개, 펠트, 관련된 앞선 포스팅 참고

 

 

그리핀은 맹수(호랑이 혹은 독수리)가 기본이라는 원칙에서는 벗어나서 일부 표현된 유물도 있다. 사슴몸통에 독수리 부리가 붙고 뿔이 화려한 환상의 동물이다(그림 10).

 

그림 10. 파지릭 유적 2호분의 남성 미라(왼손)의 타투 동물문양

 

알타이에서 주로 확인되는 것은 독수리를 기본으로 한 그리핀과 호랑이를 기본으로 한 스타일이다. 각각의 동물문양은 표현되는 부위에 따라서 더 분류가 가능하다. 전신이 보이는 경우, 머리만 표현되는 경우 등등...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투엑타 유적의 호랑이 장식판(그림 1, 그림 2)은 아래에 달린 장식판을 날개의 변형으로 본다면 이 또한 그리핀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함께 출토된 간략화된 장식판(그림 5)도? 바샤다르 유적의 것(그림 3,4)도?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Е.В. Переводчикова 1994, Язык звериных образов. Очерки искусства евразийских степей скифской эпохи(페레보드치코바 1994, 언어로서의 동물문양장식)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에서 동물문양은 단독으로 그려진 것도 있지만 여러 동물이 함께 한 장면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맹수류가 우제류를 공격하는 장면과 동물이 열을 이루고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이다.

먼저 설명한 문양을 ‘동물투쟁문양’이라고 하는데, 주로 호랑이, 독수리 혹은 그리핀이 사슴 혹은 염소 등을 공격하는 주제를 그린 것이다. 동물투쟁문양은 기원전 5세기 대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파지릭 유적(그림 1)에서 다양한 동물투쟁문양이 발견되었다. 대체로 2~3마리의 동물이 한 주제로 그려진다.

 

 

그림1. 맹수와 우제류가 싸우는 장면, 동물투쟁문양(마지막 유물 제외하고 파지릭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의 주제, k-카탄다 유적)

 

며 칠 전에 설명드린 파지릭 유적의 5호분 여성의 오른쪽 손목 위에서도 동물투쟁문양이 발견되었다. 그 문양은 동물투쟁문양이 5마리가 등장하는데, 상단과 하단으로 구분해서 보면 동물투쟁문양 2개가 그려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정된 카메라로 인해서 사지가 굳은 미라의 손목 안쪽은 찍기가 힘들어서 손목 그림 중에서 특히 위쪽의 팔목 안쪽 그림은 잘 분간이 가지 않는다. 대략 사슴이 호랑이에게 물어 뜯기는 장면이 그려졌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그림 1의 동물투쟁문양은 주로 우제류의 등을 물어 뜯는 장면이어서 판멸하기가 쉬운편이지만, 맹수의 입안에 동물머리가 들어있는 표현은 알기 힘들다.

 

여러 마리가 한 장면을 구성하는 동물문양장식 가운데 동물투쟁문양 외에도 여러 동물이 나란히 줄을 서는 주제도 있다. 동물투쟁문양에 비해서 평화롭다는 느낌이 든다.

현재 살펴보고 있는 바샤다르 유적 2호분에서 발견된 통나무관에는 호랑이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란히 서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호랑이는 평화롭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발밑에 사슴, 산양, 멧돼지 등을 밟고 있다는 점에서 나란히 서 있는 동물구도와 투쟁문양이 함께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물투쟁문양과 열상동물문양(별로 예쁜 이름은 아니지만)이 함께 그려진 것이 바샤다르 유적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두 동물문양장식은 100년 정도 늦은 파지릭 유적에서는 개별요소로 나타난다. 동물투쟁문양은 파지릭 유적에서 자주 확인되는 요소이다. 그런데 열상동물문양은 파지릭 유적에는 없는 요소처럼 보였으나, 5호분 남성 미라의 왼쪽 무릎 아래(그림 2)에 그려져서 확인된다. 즉 여성은 동물투쟁문양, 남성은 열상의 동물문양이 각각 팔과 다리에 그려져서 확인된 것이다.

 

*파지릭 유적 5호분 미라의 문신은 아래 포스팅참고

 

2020/07/0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5호분] - 2500년 전 미라에 그려진 동물문양문신

 

2500년 전 미라에 그려진 동물문양문신

현재까지 알타이의 큰 고분에서 발굴된 기원전 5세기 유적에서 미라가 남아 있는 곳은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일명 얼음공주), 파지릭 2호분의 남녀, 파지릭 5호분의 남녀, 베르흐 칼쥔 II유적�

eastsearoad.tistory.com

*알려드립니다. 위 포스팅의 그림 10~13에 캡션이 잘못되어서 고쳤습니다.  이전 포스팅에서는 그림 10~13을 파지릭 유적 2호분으로 적었는데, 5호분으로 정정했습니다. 지금의 것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아마 흥분해서 눈에 헛것이 보였나 봅니다. 

 

 

 

기원전 5세기경부터 동물투쟁문양이 생긴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지만, 사실 바샤다르 유적(기원전 6세기)의 예를 참고로 한다면 동물투쟁문양과 열상 동물문양은 이 유적에서부터 생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동물투쟁문양은 파지릭 유적에서는 주로 펠트로 안장덮개의 장식으로 많이 확인되지만, 표트르 1세가 시베리아에서 수집한 유물 중에는 금속제(그림 3)로도 많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시다시피, 유물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 중인데, 끈에 끼워서 사용하는 용도로 제작된 것이다.

 

그림 3.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표트르 1세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맹수가 약한 동물을 공격하는 동물투쟁문양은 알타이에서만 확인되는 것이다. 알타이 보다 아래에 위치한 카자흐스탄의 산에서도 ‘수수께끼 그림’으로 불리는 여러 마리 구도의 동물문양장식이 헴칙 봄, 타스몰라 유적 등에서 확인되지만 알타이의 것과는 다르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중부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