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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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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시베리아의 베르흐 칼쥔 II 유적 3호분의 기마전사는 20~25세의 남성으로 추정된다. 미라로 제작되었으며 오른쪽 어깨에 우제류(머리없는)와 그리핀이 함께 표현된 문신(그림 1,2)이 새겨져 있었다.

 

문신은 파지릭 2호분의 남성미라,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에서도 확인되었다. 이 남서의 문신이 가장 간단한 편이다. 러시아학계에서는 이 세 명을 문신한 타투이스트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이테 연대측정법의 결과 이 세 유적을 매장한 시기는 거의 비슷하다. 특히 파지릭 2호분의 남성미라 오른쪽 어깨(그림 2-1)에 새겨진 문신 가운데 첫 번째 문신인 우제류(머리없는)와 그리핀이 결합된 그림은 동물의 자세와 구도가 거의 비슷하다.

 

 

얼음공주를 분석한 고병리학자들에 따르면 미라로 제작시 방부처리와 복원하는 부분은 주로 보이는 부분에 집중되었다고 한다.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젊은 전사는 배를 가른 부위를 아주 대충 말총꼬리로 마감했다(그림 3). 이 남성은 아주 큰 모피 코트를 입고 있어서 대부분이 가려져서 이기 때문이다. 물론 남성도 미라로 만들어지고 방부처리를 할 당시에 발삼처리를 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남성 전사를 보면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얼음공주를 얼마나 정성스럽게 미라로 만든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림 1. 베르흐 칼쥔 II 유적의 3호분 남성미라

 

그림 2. 베르흐 칼쥔 II 유적의 3호분 남성미라의 문신

 

 

그림 2-1. 파지릭 유적 2호분의 남성미라 오른쪽 어깨 문신

 

그림 3. 베르흐 칼쥔 II 유적의 3호분 남성미라의 복부 기운흔적

 

얼음공주는 옷 밖으로 드러난 머리, 목, 손 부위가 집중 방부처리 대상이 되었고, 가슴도 복원되었다. 반면에 가장 신경을 덜 쓴 부위가 배이다. 얼음공주는 복부를 절단하고 내장과 함께 연골 및 갈비뼈를 제거하고, 가슴과 골반에 식물섬유로 채워넣었다(이 부분은 앞선 포스팅 참고). 하지만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은 식물로 미라를 채우지 않았다.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전사는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어린아이와 유사한 유물이 많았다. 청동거울, 주머니, 칼과 투부, 화살, 목걸이, 모자 등이 그러한데, 필자가 찍은 사진도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전사의 것이지만 필자가 헤깔린 것도 있을 정도이다.

 

그림 4.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 어린아이(왼쪽)와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기마전사(오른쪽). 흐릿한 기억을 되살리면 아크 아라하 1유적의 어린아이는 성인의 무기를 어린아이 사이즈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림 4에서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기마전사는 모피코트를 입은 모습이지만, 벨트는 무문양이었는데, 호랑이 문양 장식이 그려져 있다. 그림5는 모피코트를 벗고 기마 탄 모습이다.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무 덤에서 하의는 출토되었지만, 모피만 입고 있었고, 그 안에 상의는 실제로 입고 있지 않았다. 남성의 상의가 발견된 경우는 파지릭 2호분인데 이를 참고로 복원한 것이다. 이 남성의 무덤에서 발견된 남성의 타이즈 끝에 가죽으로 덧댄 것을 참고로 해서 셔츠의 어깨도 복원한 것이다.

 

그림 5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기마전사 복원도

 

참고문헌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 Костюм и текстиль пазырыкцев Алтая (IV-III вв. до н.э.).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 2005. 232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2500년 전 시베리아 알타이의 해발 2500m 우코크고원의 기마전사는 칼쥔 강의 상류에 묻혔다. 꼬리달린 모피코트, 바지, 스타킹은 살아생전에 착용하던 것이었고, 새머리 고깔모자와 호랑이 모양의 목걸이는 부장용으로 제작되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필자는 약간 생각이 다른데, 어떤 의식이나 행사용으로 사용하다가 무덤에 그대로 넣어주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생전에 사용하던 물건 중에 하나가 그릇이다. 나무쟁반과 나무잔도 사용하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다. 스키타이 사람들의 무덤에는 나무로 된 그릇 외에도 뿔과 흙으로 만들어진 그릇이 들어갔다.

 

재밌는 점 중에 하나가 시베리아에는 토기가 주요한 유물이 아니다. 신석기시대부터 토기는 발견되지만 아주 드물다. 한반도와 그 인접한 지역에는 발굴하면 가장 많은 유물이 토기이지만 이 지역은 토기가 많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토기가 없어서 미개하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토기가 없는 것은 먹는 음식이 달라서 토기가 필요 없는 음식문화였을 가능성이 있다 목제나 뿔로 만든 냄비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주종이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유제품 종류들. 실제로 루덴코(1952)가 발굴한 파지릭 유적에서는 목제 그릇에 유제품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사진이나 도면은 없음)

 

뿔로 만든 그릇은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유물평면도 38)(그림1),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1호분(그림 2-2,3), 얼음공주(아크 알라하 3유적)(그림 2-1, 그림3)무덤 등에서 출토되었다.

 

그림 1.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출토(필자촬영)

 

그림 2. 우코크 고원에서 출토된 뿔 잔 1-아크 알라하 3유적(그림 3과 동일), 2,3,4-베르흐 칼쥔 II유적의 1호분

 

 

그림 3.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얼음공주의 뿔 잔 (필자촬영)

 

뿔제 잔은 몸통 부위와 바닥부분이 서로 나뉘져서 만들어진다. 재료도 다른데, 몸통은 야크(그림 2-1에 동물그림)의 뿔을 이용했고, 잔의 바닥은 야생염소(그림 5의 동물) 뿔로 만들어졌다. 그림 4와 그림 5에서 만드는 제작방법을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그림 4. 파지릭 문화의 뿔제 잔 만드는 방법 1, 몸통부위

 

 

그림 5. 파지릭 문화의 뿔제 바닥 만드는 방법 2, 바닥부위

 

몸통 재료인 야크 뿔도 야생야크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폴로시막은 파지릭 사람들이 지금처럼 야크 떼를 키우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야크가 발견 된 예는 뿔제 잔과 파지릭 유적의 2호분과 5호분 미라가 확인된 무덤에서 나온 야크 가죽이다.

 

흥미로운 유물이 한 점 더 있는데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에서 발견된 미니어쳐이다(그림 6-21). 금으로 제작된 것인데, 귀걸이나 치레걸이의 일부로 사용된 것이다. 그림 6-21의 미니어쳐는 그림 1과 매우 유사하다. 바닥이 편평하고, 몸통과 바닥부위가 연결되는 부분에 각이 져 있으며, 몸통의 중앙에 안으로 들어가도록 표현되어 있다. 손잡이도 한쪽에만 붙어 있다.

 

이미 아르잔-2호 에서도 미니어쳐로 된 금제 잔이 주인공 5호 무덤방에서 출토된 바 있다. 남성의 검집옆에서 출토되었다.

이를 참고로 하면, 이 미니어쳐 잔도 비슷하게 체인에 달려서 어딘가에 부적이나 혹은 정표 혹은 알수 없는 표식 등으로 사용되었을 것일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아르잔-2호(아래 포스팅 참고)에서도 출토된 위치가 매우 애매해서 여성의 것인지 남성의 것인지 애매하다고 했다. 아르잔-2에서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그런 의미였을 수도 있다.

 

 

그림 6. 에르미타주 소장,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유물 컬렉션, 21번 유물이 뿔제 잔과 비슷한 형태이다.

 

2020/06/0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르잔 유적 2호] - 시베리아 스키타이문화 여성의 검과 칼

 

시베리아 스키타이문화 여성의 검과 칼

스키타이 검은 짧은 단검으로 보통 허벅지에 착용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크 알라하-1유적의 남성전사도 목검이 있었는데, 허리가 아닌 바지주변, 허벅지 주변에서 출토되었다. 스키타이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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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에서 사용되는 동물은 그 당시 사회에서 인간 삶에 비중을 높이 차지하는 동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야생동물의 뿔이 잔으로 만들어져서 무덤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 자체가 특정 야생동물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고 폴로시막(얼음공주 무덤 발굴자)는 생각한다. 달리 이야기하면 야크를 대신해서 야크 뿔로 만든 잔을 넣었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문헌

А.П. Бородовский, 2000,Технология изготовления предметов из полого рога,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320 c.(보르도프스키이, 뿔로 만든 유물 제작 기법/ 알타이 미라 현상)

Руденко С.И. 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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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 년전 시베리아의 얼리 어답터인 기마전사(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는 새머리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고깔모자는 스키타이 사람들의 표식물과도 같다고 했다. 헤로도투스도 스키타이 사람들을 묘사할 때 머리에 쓴 모자를 이야기 했고, 페르시아의 궁전인 아파다나에서도 스키타이 인들은 전부 고깔모자를 씌웠다.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에서 출토된 새머리 고깔모자는 일상생활용인지는 약간 의심스럽지만, 다른 건 다 포기해도 그것만은 포기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말타고 달리는 사람 머리에 쓰는 것 치곤 너무 뭔가가 많기 때문이다.

영화에 보면 꼭 뭔가 하나씩 감춰뒀다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숙연해지곤 하는데, 그런거 였는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무덤속에 유물들은 사자의 의지보다는 무덤을 만든 사람의 생각이 더 많이 반영되는 공간이니 알 수 없는 부분이다.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 미라의 목에는 여느 스키타이 전사들처럼 목걸이가 있다. 나무로 된 목걸이 인데, 뒤에서 걸 수 있는 장치가 있으며, 앞에는 호랑이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는 형태이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에서 비슷한 스타일의 목걸이가 출토된 바 있다. 아크 알라하 1유적의 2호분은 나무에 청동을 연결시켜서 앞 부분에 호랑이 두 마리가 산양 머리를 물고 있는 조각이 달린 것이다.

 

 

그림 1.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전사의 목걸이

 

그림 2.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전사의 목걸이 앞 장식

 

파지릭 문화(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알타이에 위치한 지역문화)의 여러 유적을 발굴한 쿠바레프는 파지릭 사람들의 무덤에는 여성, 남성, 어린아이 모두 목걸이가 출토되는데 일상생활용이라기 보다는 덤부장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았다(쿠바레프 1991).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유물도 부장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몰로딘 외 2000 )

 

파지릭 문화 보다는 이르고, 알타이 보다 좀 더 동쪽에 위치한 아르잔-2 유적의 무덤방 5호분 남성은 목이 부러질 것 같은 무거운 목걸이(1kg이 넘는)를 착용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설마 그걸 맨날 착용하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목걸이에 계속 착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고 했는데, 무덤매납용으로 제작되었다기 보다는 축제와 같은 의식용이었다고 보는게 합리적이다.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전사와 같이 목걸이의 앞부분에 장식된 호랑이 두 마리는 귀와 코 끝이 동심원문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표현방법은 파지릭 유적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말의 굴레장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2020/05/05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파지릭 유적 1호분] - 2500년 전 시베리아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단상

 

2500년 전 시베리아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단상

시베리아 알타이의 2500년 전 무덤이 여러 곳에 남아 있는데, 1929년에 발굴된 파지릭 유적의 1호 무덤 주인공은 발굴 이전에 이미 도굴로 인해서 주인공에 대한 정보는 없다. 도굴은 교묘하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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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전사는 이미 알려드린 바와 같이 꼬리달린 모피코트를 입고 있었다.

2020/01/25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3 유적(여성미라,'얼음공주')] - 시베리아 얼음무덤에서 나온 꼬리달린 모피코트

 

시베리아 얼음무덤에서 나온 꼬리달린 모피코트

지금까지 계속 이야기 해 온 우리의 주인공 여성은 아직 설명드리지는 않았지만 긴 상의에 긴 치마를 입었다. 상의는 흰색이고, 하의는 붉은색 계통인데, 삼단으로 짠 펠트제품이다. 그런데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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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달리 모피코트 아래에는 남성용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말이 스타킹이지, 실은 스타킹과 부츠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다. 그래서, 어느 곳에는 부츠라고 적혀있고, 어느 곳에는 스타킹이라고 적혀 있다. ‘스타킹형 부츠’가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아닐까?

 

이 스타킹형 부츠 또한 모자, 목걸이와 함께 남녀모두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다. 펠트로 만든 스타킹아래에 부츠가 일체로 붙어 있는 것이다. 여성용은 허벅지 부근에 아플리케 장식이 붙어 있고, 남성용은 그런 장식은 없다.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은 대신 발 부분에 양가죽(그림 3-3)을 덧댄 것이다. 스타킹형 부츠가 발견된 파지릭 유적의 2호분에는 전체 길이(발끝에서 허벅지끝까지)가 남아 있는 길이가 62cm(남성)(그림 5), 82cm(여성)(그림 6),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는 89cm(여성),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남성)(그림 3)에서는 99cm이다.

 

 

그림 3.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 스타킹

 

그런데 남성의 스타킹에 발 부분이 가죽으로 다시 만들어서 입힌 것은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이 유일하다. 같은 유적의 1호분 남성 스타킹은 발바닥 부분만 붉은 펠트로 덧댄 것이다.

 

 

 

그림 4.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1호분 남성 스타킹

 

 

그림 5. 파지릭 유적 2호분의 남성 스타킹

 

그림 6. 파지릭 유적 2호분의 여성 스타킹

 

 

2020/01/2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3 유적(여성미라,'얼음공주')] - 시베리아 얼음공주 치마 아래의 타이즈

 

시베리아 얼음공주 치마 아래의 타이즈

알타이 산맥 스키타이문화의 한 일종인 파지릭문화에 해당하는 아크 알라하 3유적의 1호분 얼음공주는 실크제 상의와 양모로 직조한 천을 이용해서 만든 치마를 착용했다. 그림 1. 아크-알라하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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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Кубарев В.Д. 1991 : Курганы Юстыда. Новосибирск: 1991(쿠바레프 1991, 유스티드 고분)

Полосьмак Н.В., Баркова Л.Л. 2005 : Костюм и текстиль пазырыкцев Алтая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 2005. 232 с.(폴로스막, 바르코바 2005, 알타이 파지릭 사람들의 의복과 직조물

Scythians: warriors of ancient Siberia. [British Museum. The BP exhibition. Organized with the State Hermitage Museum, St Petersburg, Russia] Ed. by St John Simpson and Dr Svetlana Pankova.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7. 368 p.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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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은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요?

아마도 어떤 형태로든지 교육이 있었을 것이고, 이를 통해서 전통이나 문화가 전해지는 것이겠죠? 가장 최소단위의 교육은 가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운영되었기 때문에 공동의 교육은 있었을 것입니다만. 알수는 없네요....ㅋ

 

다시 돌아가서...

 

 

 

2500년 전 우리의 얼리어답터는 모피 코트 위에 허리에 가죽으로 된 벨트를 착용하고 있었다(그림1-1).

허리띠는 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몸에 닿는 벨트와 벨트에 물건을 달 수 있는 가죽끈이 따로 달려 있었다. 가죽끈 끝에는 고리형태의 매듭이 있어서 물건을 달 수 있게 되어 있다(그림 1, 그림 2).

 

 

 

 

그림 1.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가죽벨트(1), 청동거울(2), 가죽주머니(3)

 

 

 

 

그림 2.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출토 가죽벨트와  나무벨트장식

 

벨트 옆에는 가죽주머니(그림 1-3, 그림 3) 안에 청동거울(그림 1-2, 그림 3)이 확인되었다. 청동거울은 손잡이 부분이 결실된 것인데, 결실부위의 형태가 U자형으로 손잡이가 있었던 것이다. 무문양 거울이다.

청동 거울 옆에는 뿔로 만들어진 빗(그림 4)이 확인되었다. 빗은 아르잔-2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이미 시베리아 청동기시대의 문화에서도 자주 출토되는 유물이다. 아마도 현재의 빗과는 다른 기능 혹은 다른 의미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예를 들면 사냥도구의 일부였다던지....

 

 

 

 

그림 3.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출토 거울과 가죽주머니, 벨트장식 외

 

 

 

그림 4.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출토 뿔로 만든 빗

 

 

 

 

그림 5.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출토 목제 벨트장식

 

벨트에는 나무판 6개를 달아서 장식했다. 아무것도 없는 무문양이다(그림 5). 나무판으로 된 벨트 장식은 아크 알라하 I유적의 남성전사에게도 있었지만 호랑이문양이 장식되어 있었으나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남성은 그렇지 않다.

 

사실 그림 2와 그림 3은 아크 알라하 I유적의 2호분인 어린아이의 무덤 사진으로 소개해 드린바 있다. 너무 비슷해서인데, 약간 달랐지만 베르흐 칼쥔 II유적이 있다는 점을 상기하기 못했다. 정정합니다. 그 만큼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과 아크 알라하 I유적의 2호분 유물이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다. 아크 알라하 I유적의 2호분에서 출토된 무기류는 특히 어른의 것을 어린아이의 사이즈로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벨트와 무기는 남성의 필수품이다. 아르잔-2 유적에서 남성 주인공이 여성주인공과 달랐던 점 중에 하나가 허리에 벨트를 착용하고 있는 점이다.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예를 볼때 여성의 허리띠는 안으로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형태도 다르다. 남성은 허리띠를 밖으로 착용해서 물건(무기 및 부적종류)를 달고 다닌다. 아르잔-2 유적에서는 고리트와 연결 시키기도 했다. 이미 소개한 남성들도 전부 허리띠를 차고 그곳에 뭔가를 달고 다녔다. 특히 말타는 사람에게 허리띠는 필수품이었을 것 같다.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은 웬지 모르게 심플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빠르고, 심플하고, 군더더기는 싫어 할 것 같은 사람.

벨트장식에 아무런 문양이 없는 것과, 말의 굴레장식도 가장 심플 한 것을 단 것이 그렇게 느껴진다. 그 시대에 비슷한 직업의 사람들이 주렁주렁 달고 다녔으나, 정작 본인은 그것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느낌?

 

참고문헌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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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우코크 고원의 남성미라가 뭍힌 곳은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이다. 발굴된 여느 스키타이 문화(정확하게는 파지릭문화)의 무덤과 마찬가지로 무덤구덩이 안에는 나무 무덤방이 만들어지고, 그 밖에는 말이 매장되었다.

 

말이 매장되는 무덤은 대부분 한 마리 이상 매장되는데, 멀지 않은 곳에 묻힌 아크 알라하 3유적의 여성미라도 말6마리가 확인되었다. 미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나 남성전사 2명이 함께 묻힌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도 말이 9마리가 들어갔다.

 

그러나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에서는 말이 매장된 북쪽의 상태가 좋지않아서 말이 2마리 나란히 놓여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잘 알 수 없다. 스키타이 사람들은 매우 공간을 아껴서 사용한 것 같다. 말의 매장공간은 좁은데 많이 밀어 넣는다. 구덩이가 커지면 노동력도 들고 무덤방도 커져야 할 것이니, 아마도 이런 것들은 미리 계산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에서는 말이 매장된 북쪽이 상태가 좋지 않은 점을 고려한다면, 말의 두수는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말과 관련된 마구는 말에 착장한 것이 아니라 벗은 상태에서 1벌(그림 1)이 확인되었다. 무덤방의 북서쪽 모서리에서 전부 출토되었다. 굴레장식 가운데 몇 점은 말 부근에서 출토되기도 했다.

 

 

그림 1. 베르흐 칼쥔 II 유적 3호분, 남성미라 무덤에서 출토된 마구 세트

 

 

 

말의 재갈은 철제로 만들어진 것이고, 말의 굴레에 달았던 J자형 굴레장식은 멧돼지 송곳니처럼 보이지만 나무로 제작되었다. 말의 이마를 장식한 당호(그림 1에서 둥근 형태)는 만화에 나오는 UFO모양과 같은데(ㅋㅋ ), 재갈멈치와 함께 나무를 깍아서 만든 것이다. 당호는 납작한 원판 위에 약간 두툼한 원판을 붙인 형태로 얼음공주 무덤 , 아크 알라하 1 유적에서도 말이 착장한 예가 있다.

 

 

그림 2.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미라 무덤 속의 출토유물, 유물배치도에서 1~5번이 마구 및 굴레장식이다. 4번은 멧돼지 송곳니로 만든 펜던트라고 적혀 있었으나(먼저 설명한 것) 실제로는 나무로 제작된 것이다. 멧돼지 송곳니 모양이라고 한다. 원고를 적은 사람과 도면을 만든 사람이 달랐을 것이다.ㅠㅠ

 

 

재갈멈치는 한쪽 끝에 팔메트 문양으로 만든 것이다. 팔메트 문양의 재갈멈치는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 출토된 적이 있는데, 재갈멈치 양쪽 끝이 장식되었다. S자형으로 굽은 모양이었다.

 

2020/01/16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3 유적(여성미라,'얼음공주')] - 2500년 전, 여성 샤먼의 무덤 속 말 6마리과 장식

 

2500년 전, 여성 샤먼의 무덤 속 말 6마리과 장식

어제 보여 드린 무덤방이 머릿속에 떠오르시나요? 무덤방이 있던 무덤구덩이 가장 왼쪽에는 무덤방 안이 아니라 바깥에 이상한 뼈 들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나요? 앞에서 여성샤먼의 무덤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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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1유적] - 시베리아 스키타이 전사 9마리 말의 얼굴꾸미개

 

시베리아 스키타이 전사 9마리 말의 얼굴꾸미개

시베리아 알타이 산에서도 우코크 고원의 아크 알라하 1유적의 남성전사 2명이 묻힌 1호분의 관 내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 무덤에는 1차 무덤방에는 말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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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적에서 철제로 제작된 유일한 유물은 앞서 본 목제 쟁반 위의 칼과 재갈(그림 3)이다.

 

 

 

그림 3. 베르흐 칼쥔 II 유적 3호분, 남성미라 무덤에서 출토된 철제재갈

 

이 점은 앞서 살펴본 남성전사 무덤인 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 고리가 둥근 재갈이 청동으로 제작된 것과는 다르다. 쿠바레프는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출토되는 청동재갈이 고식이고, 베르흐 칼쥔 II유적에서 출토된 철제재갈은 새로운 스타일로서 새로운 문화요소라고 평가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철제 재갈은 청동재갈에서 형태를 가져온 것으로 볼 수 있다(쿠바레프 1992).

 

철제무기는 이미 아르잔-2유적에서 처음 출토되지만, 재갈은 전부 청동제였다. 얼음공주 무덤과 아크 알라하 1유적의 재갈도 청동제였다. 그렇다면 베르흐 칼쥔 II유적 기마전사는 자신의 말에 가장 혁신적인 재갈을 물렸을 것이다. 새로운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J자형 굴레장식은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 멧돼지 송곳니 모양 끝에 그리핀 얼굴이 그려진 채 출토된 적이 있다. 유물의 전체 평면형태가 매우 유사하다. 이 유적에서는 그리핀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지만, 같은 모양의 이마장식, 재갈멈치 등이 출토된다는 점으로 보아서 충분히 그리핀을 상징하는 유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Кубарев В.Д. 1992 : Курганы Сайлюгема. Новосибирск: 1992. 224 с.(쿠바레프, 1992, 사일류겜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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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0년 전 우코크 고원의 베르흐 칼쥔 II유적에서 3호분에 뭍인 남성미라는 살아생전에 직업군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근거는 고리트(화살과 활을 함께 넣는 스키타이 식 활통)라고 가 출토되기 때문이다. 러시아학계에서는 고리트는 기마전사의 복식으로 생각한다.

 

시위, 화살, 고리트 등은 모든 남성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울란드릭 유적에서는 42기의 고분에서 7기에서만 위의 무기가 출토되었고, 유스티드 유적에서는 44기의 고분에서 6기에서만 확인되었다. 아르잔-2 유적에서도 활과 화살, 투부, 검과 칼 등 무기가 완전히 출토된 것도 주인공 무덤 외에 2기의 무덤에서만 출토되었다.

 

그렇다면 남성미라도 화살, 고리트, 투부 등이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서 그는 기마전사였다. 앞에서 이 남성의 무덤 속에서 각 유물의 위치를 설명했다. 그 중에서 26, 27번은 머리장식일부라고 적혀있었으나, 사실은 26번은 고리트의 덮개(그림 1)이다. 고리트의 덮개가 고깔처럼 생겨서 그렇게 적었고(필자는 그대로 번역함),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고깔모자가 아닌 고리트의 덮개이다. 펠트로 만들어진 고리트 덮개에는 양털을 꼬아서 만든 끈이 6줄 달려 있었고, 그 끝에는 방울모양이 달려 있었다. 비슷한 끈이 확인된 유적은 바샤다르 2호분(루덴코 1960)에서도 확인되었고, 아크 알라하 1유적의 1호분에서도 매듭이 출토되었다.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과 같은 고리트 덮개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미라의 고리트(활통) 덮개, 펠트

 

 

 

그림 2.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미라의 고리트(활통) 아래부위, 모피+펠트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기마전사는 고리트의 덮개 뿐만 아니라 고리트의 아래 부위도 나왔다. 모피로 만들어진 것으로 왼쪽 허리부근(유물배치도 27)에 놓여 있던 유물이다. 이 모피 부분안쪽에서 활의 부속품(그림 3)이 출토되어서 고리트의 일부라고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유물의 아래쪽에는 화살이 5점 놓여 있었다. 모피의 끝에는 펠트조각이 붙어 있는데, 고리트 덮개와 연결부위이다.

 

그림 3.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남성 기마전사 활의 부속품, 1,4,5-나무, 2,3-뿔

 

이 유물은 전체길이가 85cm가량으로 고리트가 덮어지는 것까지 계산하면 전체 활의 길이는 110.6cm가량이다. 출토된 화살은 79cm가량으로, 화살촉의 단면은 삼각형이다.

 

 

그림 4.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의 남성 기마전사의 화살

 

 

 

 

그림 5.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의 남성 기마전사의 고리트 복원도

 

*위의 그림은 아래 참고문헌에 수록된 것이다.

 

참고문헌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Руденко С.И. 1960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Централь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60. 360 с.루덴코 1960, 스키타이 문화시기의 알타이 산맥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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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알타이에서는 2500년 전 무덤 속에 나무 무덤방이 설치된 유적들이 발견된다. 일부 유적에서는 ‘미라’가 발견되기도 한다. 스키타이 문화 중에서 알타이에서 발견된 문화로 파지릭 문화라고 한다. 스키타이 문화는 동물문양장식, 무기, 마구를 문화의 아이덴티티로 사용했는데, 스키타이 문화(권)으로 묶을 수 있는 지역은 흑해 북안부터 시베리아, 몽골 및 만주지역의 내몽골지역에서도 그 흔적이 확인된다. 파지릭문화는 그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가장 중심에 분포했던 알타이에서 위치한다.

 

이 시절 알타이에서 확인되는 무덤에서는 여러 경우가 있지만 공통적인 현상이 있는데, 무덤방 안에는 그릇을 놓아 둔다는 점이다. 토제, 목제, 뿔로 만든 그릇이다. 토기는 액체용기를 담기 위해서 항아리(호형)가 있고, 뿔로 만든 용기도 확인된다. 목제로 된 그릇은 두 종류의 그릇 중 쟁반 위에는 고기와 철제 칼이 놓여 있다. 양의 엉덩이 뼈가 확인되는 점으로 보아서 꼬리 부위를 잘라서 두었던 것 으로 생각된다.

얼음공주 미라가 발견된 아크 알라하-3유적, 남성 전사 2인의 무덤인 아크 알라하-1 유적 등에서도 모두 시신이 안치된 곳과 약간 떨어진 곳에서 확인되었다. 주로 시신이 보는 방향에 목제 쟁반이 놓인다.

 남성미라의 무덤인 베르흐 칼쥔-2 유적에서도 마찬가지로 목제 쟁반 위(그림 1)에 고기 덩어리와 철제 칼(그림 3-2)이 확인되었다. 다리가 낮은 쟁반으로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다. 목제 쟁반의 한쪽은 약간 부서진 상태이다. 한쪽에는 구멍이 두 개 있다.

 

그림 1. 베르흐 칼쥔 II 유적 3호분 출토 목제 쟁반(필자촬영)

 

파지릭 유적에서도 다리가 높은 목제 쟁반(그림 2)이 확인되었다.  다리에는 여러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도굴로 이미 무덤 속이 흐틀어졌으나, 비슷한 장례의식 가운데서 목제 쟁반 위에 고기 덩어리를 놓고 의식을 치뤘을 것이다.

 

그림 2. 파지릭 유적 2호분 출토 목제 쟁반 혹은 목제 상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에서 확인된 철제 칼은 손잡이가 둥글고 날이 한 쪽 방향으로 있는 것으로 얼음공주 무덤의 것과 거의 유사하다.  도면(그림 3)이 부실해서 안타깝다. 필자가 찍은 사진에도 없었다.

 

그림 3. 베르흐 칼쥔 II유적 출토 3호분 목제 쟁반(1:그림 1과 동일)과 칼(2)

 

목제로 된 또 하나의 그릇은 잔이다. 손잡이가 한쪽에만 붙어 있는 잔으로 손잡이는 둥글다. 손잡이가 한쪽에만 붙어 있는 잔은 2700년 전 유적인 아르잔-2호에서부터 출토되었다. 물론 손잡이 모양은 다르지만, 목기의 몸통이 ‘잔’인 점은 공통적이다.

아르잔-2호와 이 유적의 연대차이가 200년 이상 있지만 손잡이의 모양이 그대로 이어진 유물도 있고, 변화가 생긴 유물도 있다. 목제 잔을 사용하는 전통은 계속 이어진 것 같다. 아르잔-2호에서 출토된 목제 잔(그림 4)와 유사한 잔은 파지릭 유적의 2호분(그림 5)에서 출토된다.베르흐 칼쥔 II유적 남성의 잔은 손잡이가 심플한 둥근 것(그림 6)이다. 얼음공주의 잔(그림 7)은 손잡이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마주보게 장식되어 있지만 기본적으로 둥근 손잡이를 응용한 것이다. 파지릭 유적 2호분에서 출토된 펠트제 받침대(그림 5-2)는 남성미라(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와 여성미라(아크 알라하 3유적)에서도 출토된 유물이다.

쟁반이 아닌 목제용기는 유제품을 위한 그릇이다.

 

그림 4. 아르잔-2호분 무덤방 5호분의 목제 그릇(2700년 전)

 

그림 5. 파지릭 유적 2호분의 목제 잔(2500년 전)

 

 

그림 5-2. 그림 5와 세트, 펠트제 받침대

 

 

그림 6.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 출토(2500년 전), 남성미라의 목제 잔과 받침대(필자촬영)

 

그림 7. 아크 알라하 3유적, 얼음공주 미라의 목제 잔(2500년 전)

 

아크 알라하 3유적, 아크 알라하 1유적, 베르흐 칼쥔 II유적에서 출토된 목제 쟁반에는 모두 상단에 사용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죽음을 위해서 만든 부장품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했던 용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미 앞에서 포스팅 한 바 있지만 미라 혹은 사자 들이 입고 있는 옷도 전부 수선했던 흔적이 남아 있고, 사용했던 의복이었다. 죽음을 위해서 만들어 둔 것이 아니다.

 

참고문헌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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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알타이의 파지릭 문화(스키타이 문화에서 일종의 지역문화)에서 남성은 고깔모자 및 투구형 모자를 썼다는 점을 알려드린 바 있다.

 

2020/01/29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3 유적(여성미라,'얼음공주')] -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코로나(корона)'의 기원?

시베리아 알타이에서 '코로나(корона)'의 기원?

필자도 중국 상해, 남경 등 학과 답사로 같이 참여하기로 계획되었다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취소되었다. 비자피와 얼마간의 위약금을 물어야 했지만, 그래도 그냥 취소보다 병이 창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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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고깔모자에 대해서는 헤로도투스도 자신의 저서에서 스키타이 인들의 특징을 묘사할 때 적어 놓은 바 있고, 페르시아의 페르세폴리스의 아파다나 궁전벽에 새겨진 조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손에 스타킹을 들고 있는 사람, 말을 부리고 있는 사람, 고리트(스키타이 인들의 화살통)를 차고 있는 사람 등 여러 사람들이 단순한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흑해 북안의 쿨오바라고 하는 고분에서 출토된 황금 항아리에도 고깔모자를 쓴 사람이 확인된다. 그리스 장인이 만든 황금 빗(표트르 대제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중에서)에서도 스키타이 전사의 목 뒤에 고깔모자가 매달려 있었다.

 

2020/02/10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아크 알라하 1유적] -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2500년 전, 어느 그리스 장인의 스키타이 전사에 대한 기억

그림 1.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전체 모습은 앞의 포스팅 참고 그림 2. 솔로하 출토 황금빗, 에르미타주 소장, 말탄 스키타이 전사의 모습, 투구는 코린트 식 그림 3. 솔로하 출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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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제 얼음 속에서 확인되는 우코크 고원의 고깔모자는 좀 더 장식적인 요소가 가미되었다. 특히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에서 남성 미라가 쓴 고깔모자(펠트)는 정수리에 목제로 된 새 머리장식이 붙어 있고, 그 상단에 산염소 한 마리가 장식되어 있다. 고깔모자의 앞과 옆에는 목제로 된 산염소가 부착되어 있다. 발견 당시에 산염소의 뿔은 없어지고 구멍만 남아 있지만 뿔을 조각해서 삽입했던 것이다.

 

 

 

 

 

그림 1.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남성미라가 썼던 고깔모자

 

그런데 이 남성은 모자가 한 점 더 있었다.

어제 소개해 드린 유물 배치도에 보면 어깨와 허리부위에 모자장식이라고 설명된 부분이 있다. 목제로 된 사슴 혹은 산염소 조각 장식이다. 뿔이 없어져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같은 종류의 동물 3마리이다. 가장 큰 한 마리는 고깔모자의 왼쪽옆에 붙어 있었고, 한 머리는 이마 앞쪽에 다른 한 마리는 고깔모자의 머리 끝에 붙어 있었다(그림2). 이 고깔모자는 장식만 나무로 만들어졌고, 기본적인 모자는 펠트로 제작되었으며, 정수리 끝에는 새머리가 함께 재단되어서 제작된 것이다. 새는 부리가 표현되어 있고, 부리 뒤쪽에는 금박을 입혔다. 펠트제 모자는 모피코트 속에서 발견되었다. 모자는 귀를 덮는 스타일이다.

앞에서 포스팅한 여러 곳의 고깔모자가 약간 씩 전부 다르지만 공통적인 점은 귀를 덮는 긴 끈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페르시아 시절의 페르세폴리스 아파다나 궁전 벽화, 쿨 오바의 황금 항아리 속의 남성 등 모든 남성의 모자는 정수리 끝 장식은 다르지만 귀를 덮은 점이 공통적이다.

 

이미 포스팅에서 소개해 드린 그림은 폴로스막의 책에 있었던 것에는 목제 장식이 따로 구성되었지만 필자가 실제로 본 사진에서는 원래 자리로 생각되는 곳에 복원되어 있었다(그림 2).

 

위의 포스팅 참고

 

 

 

그림 2.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남성미라 모자(필자촬영)

 

 

 

그림 3. 그림2의 가장 상단에 부착된 동물장식 (필자촬영)

 

 

 

 

그림 4. 그림 2의 동물장식(필자촬영)

 

 

 

 그림 5. 그림 2의 동물장식(필자촬영)

 

그런데 이런 모자를 썻던 남성의 헤어스타일은 어땠을까?

 

이제까지 소개해 드린 얼음공주(아크 알라하 3 유적)와 파지릭 2호분의 여성미라는 모두 삭발을 했었다. 파지릭 5호분에서 확인된 캐노피의 의자 위에 앉아 있는 여성도 삭발했었다.

 

그러나 남성은 좀 더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파지릭 2호분에서 출토된 남성미라는 앞부분만 머리를 밀었고, 파지릭 5호분에서도 남성미라는 앞부분만 밀고 뒤는 그냥 둔 채였다. 파지릭 2호분의 남성의 뒷 머리 스타일은 정확하지 않은데, 머리가 벗겨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베르흐 칼쥔 II 유적의 3호분 남성은 머리는 좀 다르다. 이 남성은 머리의 정수리 부분의 머리는 길러서 땋았고, 그 주변은 밀었다.

 

 

 

 

그림 6.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 남성미라의 헤어스타일

 

그렇다면 고깔모자 아래로 땋은 머리가 2갈래로 내려왔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폴로스막 2001, Полосьмак Н.В. Всадники Укока. — Новосибирск: Инфолио-пресс, 2001. — 336 с.(우코크의 말타는 전사들) 이 책은 2016년에 한국어로 출판되었다. N.V.폴로스막 2016,『알타이 초원의 기마인』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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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알타이의 우코크 전사는 2500년 전 어느 날 미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얼음공주 미라(아크 알라하-3)와 매우 가까운 곳에 묻혔고, 다행히 완벽하게 미라의 모습이 남아 있었으나, 세간의 관심은 덜 했다. ‘얼음왕자’이런 별명도 없고, 그는 얼음공주에 비해서 주목을 받지 못한 것 같다.

 

유적은 1994년에 발견되었고 1995년에 발굴되었다. 1995년 얼음공주가 부산에 왔을 때 그는 이제 막 사람들이 무덤 속에서 끄집어 내었다.

 

 

앞에서 소개한 파지릭 유적과 아크 알라하 1, 3 유적과 마찬가지로 말은 무덤방 북쪽에 매장되었다. 무덤방의 크기는 그림 1에서 목제의 돌출부를 제외하고는 실제 무덤방은 164×113m가량이다. 나무는 통나무를 반으로 나누어서 사용한 것이다. 바닥의 나무는 4개만 깔렸고, 목기와 토기 등의 그릇이 놓은 부분에는 나무가 깔려 있지 않았다. 나무방의 벽은 통나무를 2층으로 올린 것이다.

 

나무방 덮개를 열자 나타난 것은 남성 미라가 무릎을 굽힌 채로 잠들어 있었다. 미라로 제작된 아크 알라하 3유적, 파지릭 유적 2호분, 파지릭 5호분과는 달리 통나무관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자세는 이제 까지 설명된 무덤에서 줄 곧 확인되는 자세이다. 쭉 뻗고 하늘을 쳐다보는 (앙신직지) 시신처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림 1. 시베리아 알타이의 우코크 고원의 남성미라 무덤,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

 

무덤방의 유물은 여느 스키타이 문화의 무덤처럼 많지 않았다. 더욱이 부장된 말의 수와 출토된 유물도 적은 편이어서 전체 적으로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림 2. 시베리아 알타이의 우코크 고원의 남성미라 무덤,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에서 출토된 유물

 

그림 2에서 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의 종류를 알 수 있다. 목제 쟁반 위의 양뼈(엉덩이뼈), 그 옆의 칼, 그곳에서 떨어진 곳에서 출토된 토기 1점, 목기 1점 등 실제로 사용했던 유물이다.

 

그런데 이 남성은 관이 없었지만 미라로 제작되었고, 문신이 있었으며, 모피코트를 입고, 고깔모자를 쓰고, 펠트로 된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특히 남성이 쓰고 있는 고깔모자는 먼저 발굴된 아크 알라하 1유적의 남성전사 무덤에서 발견된 동물문양장식이 어떤 용도로 씌인 것인지 알게 했다. 이 유적이 발굴되기 전에는 아크 알라하 1유적에서 발견된 남성전사 머리 위의 동물문양장식이 용도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말의 수는 적지만 출토된 마구는 아크 알라하 3유적과 비교되었다.

 

그림 3. 시베리아 알타이의 베르흐 칼쥔 II유적 3호분(1: 얼음속의 미라; 2: 미라를 발굴하는 장면)

 

참고문헌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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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흐 칼쥔(Верх Кальджин, Verkh Kal'dzhin) II 유적은 알타이의 우코크 고원(해발 2500m)에 위치한다. 앞서 설명했던 얼음공주 무덤인 아크-알라하 3유적에서 서쪽으로 4km 떨어진 곳(지도2)에 위치한다. 이 유적은 현재까지 발굴된 남성 미라 가운데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파지릭 유적에서 출토된 남성미라(2호분,5호분)는 해발 1500m인 파지릭 계곡에서 확인된 것이다.

 

지도 1. 스키타이 문화 중 파지릭문화의 유적

 

 

지도 2. 우코크 고원의 베르흐 칼쥔 II유적(푸른색)과 아크 알라하 3유적(오렌지색), 지도 1의 확대, 지도1은 아래 링크로 들어가면 확인가능하다.

 

https://www.google.com/maps/d/drive?state=%7B%22ids%22%3A%5B%221dttrgVvoA6XC9xHPaMjvGlmKOfYBEVLl%22%5D%2C%22action%22%3A%22open%22%2C%22userId%22%3A%22104839998633637810520%22%7D&usp=sharing

 

스키타이 문화의 유적 - Google 내 지도

원래 스키토-시베리아 문화권이라고 불리지만 용어가 어려워서 스키타이 문화권이라고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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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은 칼진(Кальджин, Kal'dzhin)강의 상류에 위치한다. 유적의 이름은 칼쥔 강의 베르흐(Верх: 상류)를 그대로 명명한 것이다. 러시아 지명은 이런 경우가 많은데, 이를 번역하는 경우도 있지만, 고유명사로 그대로 부르는 것이 나중에 혼돈이 적을 것이다. 일본에서 나온 책들은 이를 일일이 번역했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이 보면 그 유적이 어떤 유적인지 알 수 없다.

 

베르흐-칼쥔 II유적에는 4개의 고분이 일렬로 설치되었는데, 3개를 발굴했다. 그 중 남성미라가 확인된 곳은 3호분이다. 1호분에서 11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그림 1. 베르흐 칼쥔 II 유적의 무덤, 까맣게 칠한 것이 발굴된 무덤이다. 위의 화살표 옆에는 칼쥔 강 입구까지 50m. 가장 오른쪽 화살표C는 북쪽을 의미.

 

 

무덤은 앞에서 본 아크 알라하 3유적, 파지릭 유적의 1,2,5호분과 마찬가지로 지표상에서는 큰 돌을 쌓은 것이 확인되었다(그림 2). 돌을 들어내자 무덤 가장자리를 둘러싼 호석(6~7.6m)(그림 3)이 확인되었다.

 

그림 2. 베르흐 칼쥔 II 유적의 3호분, 표토를 벋겨내자 드러난 돌. 화산암이다.

 

 

 

그림 3.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적석을 들어내고 남은 호석

 

그런데 이 무덤의 단면도(그림 4)를 보면 앞서 본 아크 아라하 3유적과는 다르다는 점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나무 무덤방이 설치되는 가장 아래의 무덤구덩이를 한 번에 파지 않고 단을 만들어서 팠다는 점이다. 표토의 생토를 기준으로 50cm정도 들어가저 첫 번째 단인 확인되었다.

 

그림 4.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단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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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구덩이(2.6×2.2m)의 깊이는 2m이고, 구덩이 안에 나무방을 설치하고 시신을 안치했다. 위에서부터 121cm정도 들어가자 무덤방의 덮개가 확인되었다(그림 5).

 

 

그림 5. 베르흐 칼쥔 II유적의 3호분 무덤방 덮개

 

무덤구덩이에 나무 무덤방을 만들고 무덤 방 바깥에는 말을 부장하는 구조는 앞에서 본 2500년 전 파지릭문화(스키타이 문화권의 지역문화)에서 보았던 것이다.

무덤방은 통나무를 반으로 갈라서 결구한 무덤방인데, 내부에 관을 따로 설치하지 않았다. 무덤방이 관의 역할을 한 것이다. 무덤방 바깥에는 말을 매장했는데, 말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2 마리 이상이지만 정확하게 몇 마리를 매장했는지는 알 수 없다. 잘 남아 있는 목제 굴레장식과 철제 재갈은 한 벌이다.

 

참고문헌

 

Молодин В.И., Полосьмак Н.В., Чикишева Т.А 2000, Феномен алтайских мумий. Новосибирск: 2000. 320 c.(몰로딘, 폴로스막, 치키세바 2000, 알타이 미라 현상,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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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재윤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