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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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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 28. 08:15 고깔모자와 코트

 

그리스 토기, 암포라(손잡이가 상하로 달린 물병)에 그려진 스키타이 궁수와 hoplites이다. 호플리트는 창과 방패를 주로 사용하는 그리스 시민 군인이고, 투구와 갑옷을 입고 등장한다. 머리에 쓰고 있는 투구가 이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에르미타주 소장, 암포라, Munich 1410의 그림, 기원전 530~520년. 그는 주로 붉은 바탕에 검은 문양을 그린 사람이다. 검은문양이 유행하던 마지막 시기에 활동했고, 그 이후로 점차 붉은 문양으로 바뀌어 간다.

 

스키타이 궁수가 쓴 모자는 사이악스가 그린 모자와 비슷하게 중앙 부분이 급격히 좁아지면서 뽕긋 솟은 모자이다.

얼핏보면 이 그림은 호플리트와 스키타이 궁수가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스키타이 궁수를 호위하는 장면이다. 창을 든 그리스 군인은 스키타이 궁수를 향해 창을 던지는 장면이 아니다.

 

그리스 토기에 스키타이 궁수들이 왜 등장할까? 그리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4세기에 스키타이 궁수들이 아테네의 경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대부분 그리스 토기의 스키타이 궁수들을 경찰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라고 그냥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암포라의 그림은 기원전 6세기의 것이다. 그리스 토기에 나타난 스키타이 궁수가 반드시 아테네의 경찰을 그린 것은 아니라는 연구자들도 있다. 또 스키타이 궁수가 아테네에 나타난 시점이 기록에 적힌 기원전 5세기 보다 빠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이들은 그리스 토기 화가들이 실제로 유라시아 초원 유적에서 발견되는 실제 스키타이 고리투스와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상상해서 그린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아뭏튼 왜 그리스 토기에 스키타이 궁수가 나오는지 궁금증이 완전히는 아니지만 약간 풀리기도 했다. 호플리트와 스키타이 궁수가 서로를 호위하는 장면도 어느정도 이해가 가지만..... 뭐 누가 알겠는가.

 

아뭏튼 필자의 관심은 그리스 토기 보다는 고깔모자이다. 이 외에도 그리스 토기에서 알 수 있는 스키타이 궁수의 모자가 더 있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했던 스키타이 물건은 뽕긋 솟은 고깔모자와 고리투스였던 것은 틀림없다.

 

참고문헌

Ivantchik, Askold (1 December 2006). "'Scythian' Archers on Archaic Attic Vases: Problems of Interpretation". Ancient Civilizations from Scythia to Siberia.

Vos, M. F. (1963). Scythian Archers in Archaic Attic Vase-painting. J. B. Wolters.

Яценко С.А. 2006 : Костюм древней Евразии (ираноязычные народы). М.: 2006. 664 с. («Культура народов Востока»)(야센코 2006, 유라시아의 고대 의복)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몽골 기원전 5~3세기 울란곰 유적에서는 9명까지 매장된 무덤이 발견되었다. 유적에서 가장 많은 인원이 들어간 무덤으로 부장품도 다른 유적에 비해서 풍부하다. 토기 9점 외에도 동물장식이 있는 거울, 무릎을 굽히고 있는 굽동물, 낙타가 있는 동물 장식 등이 출토되었다. 동물장식은 아니지만 나뭇잎 혹은 풀 잎이 4개 돌아가는 장신구도 나왔다(그림 1).

 그런데 이 유물은 금속만 남아 있으나 잎모양 안에는 돌이나 보석류를 끼워서 제작되었을 수 있다. 소형의 금속제품에 다른 재질을 끼워넣는 방법은 표트르 1세가 시베리아에서 수집한 유물로 보아서 널리 유행했던 제작기법이다.

 

그림 1. 울란곰 유적 47호 출토 풀잎 모양 장신구

 

그런데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를 닮은 금속제 이미테이션이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에서 발견된 바 있다. 목이 긴 항아리 모양(그림 2-11, 53,54), 손잡이가 한쪽에 달린 목기(그림 2-21)가 발견되었다.

 

손잡이가 한쪽에 달린 목기를 연상케 하는 유물은 필자가 이미 소개한 바 있고 새로운 정보는 아니다. 목이 긴 토기를 연상케 하는 유물 중 외형상으로 가까운 것은 그림 2-53.55이다. 금제품의 목이 길고 곧기 때문이다. 울란곰 유적 뿐만 아니라 파지리크 유적, 아크 알라하-3 유적 등에서 발견되는 항아리(쿱신)을 형상화 했다. 손잡이처럼 보이는(그림 2-55) 부분은 어딘가에 달기 위해서 만든 고리 일 수도 있기 때문에 금속제품의 동체부를 비교하는 것이 더 유효하다. 토기는 아니지만 아르잔-2호에서는 청동솥을 닮은 모형이 출토된 바 있어서 같은 의미 혹은 용도로 토기 모형을 만들었을 수 있다.

 

그림 2. 표트르 1세의 시베리아 황금 유물 컬렉션

 

표트르 1세가 모은 황금 유물이 시베리아에서 가져간 것이기 때문에 도굴된 어떤 무덤 중에 한 곳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투바의 아르잔-2호가 발굴되기 전에는 그림 2에서 보이는 누금기법(작은 구슬을 덧붙이는 방법)은 시베리아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이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지가 생겼다. 또 아르잔-2호에서 출토된 실제 청동솥은 무덤방 바깥에서 나왔고, 솥의 모형은 남성과 여성 인골 사이에서 위치했다.

수많은 유물 가운데서 금속 모형제품을 만드는 것은 토기, 목기, 청동솥 등 스키타이시대 그릇이 단순한 음식기의 용도이지 않고 어떤 특수한 의미 일 수 있다.

 

 

 

참고문헌

Руденко С.И.1962 : Сибирская коллекция Петра I. / САИ Д3-9. М.-Л.: 1962.(루덴코 1962, 표트르 1세 시베리아 콜렉션

Barbara Armbruster 2009 Gold technology of the ancient Scythians –gold from the kurgan Arzhan 2, Tuva, Archeo Sciences, 33, 2009, p. 187-193

Nowgorodowa E. 1980 : Alte Kunst der Mongolei. Leipzig: E.A. Seemann Verlag. 1980. 280 s.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기원전 5~3세기 몽골 울란곰 유적에서는 토기, 목기, 청동제 솥 등이 무덤속에 부장되었다. 동 시대의 인접한 알타이에 비해서 토기가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목이 긴 항아리모양(그림 1)의 토기는 주로 유제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는 내부에서 고기가 발견되었다. 액체류를 보관하기도 했지만 고기도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유적에서는 항아리 모양 외에도 목이 짧거나 없는 토기도 나오기 때문에(그림 2) 토기를 다양하게 사용했을 수 있다. 고기 덩어리가 발견된 33호의 청동솥은 그 용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그림 3).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토기, 유제품 보관 항아리(쿱신)

 

그림 2. 울람곰 유적의 토기

 

알타이 추야강 계곡의 여러 유적에서는 목기로 가운데 손잡이가 한쪽으로 만 붙은 목제 그릇이 나오는데 이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상태가 온전치 않은 목제 그릇이 있기는 하지만 손잡이가 한 쪽으로 붙은 목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대신에 목제 쟁반은 낮은 굽이 있는 유물이 있고, 붉은 색 락커(옷칠)를 칠한 목기가 나온다고 보고되었다. 울란곰 북쪽의 투바 지역에서도 비슷한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 목기의 사진이나 그림이 정확하지 않다.

 

그림 3. 울란곰 유적의 청동솥

 

스키타이시대 청동솥은 기원전 7세기 흑해 지역 뿐만 아니라 아르잔-2호에서도 나오지만 기원전 3세기 이후의 스키타이 문화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용되는 물건이다. 크기와 형태가 달라서 그에 따라서 용도가 달랐을 것이다. 예를 들면 파지리크 2호에서 나온 청동솥은 높이가 13.8cm정도로 매우 소형이고, 그 내부에 불에 달군 흔적이 있는 돌과 향료의 씨앗등이 나와서 일종의 향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르잔-2호의 청동솥 2점은 무덤방 바깥 무덤 구덩이 사이에 놓여 있었다. 아마도 무덤방 축조시 제사를 지냈던 흔적일 수 있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집자리에도 벽을 파서 토기를 묻어두는 행위가 있는데 의례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울란곰 유적에서는 고기를 직접 요리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볼가강 유역의 필리포프카 유적에서는 다양한 크기의 청동솥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림 4. 파지리크 유적 2호분 청동솥

 

 

그림 5. 아르잔-2호의 청동솥

 

그림 6. 필리포프카 유적의 청동솥

 

 

스키타이시대 이후의 고고학 자료로 기원전 3세기 부터 모습을 드러내는 흉노,  2세기선비 문화에서도 청동솥은 발견되고, 3세기 가야의 무덤인 대성동에서도 형태는 다르지만 청동솥(동복)이 출토된다(이미지 검색이 쉽다. 청동솥이라는 명칭 대신에 동복이라는 용어를 쓴다). 스키타이시대 이후의 청동솥은 매우 실제 사용되었다기 보다는 무덤부장용으로만 사용되었고 그 수도 빈번하지 않다.

 

 

참고문헌

Пшеничнюк А.Х. 2012 : Филипповка: Некрополь кочевой знати IV века до н.э. на Южном Урале. Уфа: ИИЯЛ УНЦ РАН. 2012. 280 с. (Документы и материалы по истории башкирского народа.)(피세니축 2012, 남부 우랄지역의 기원전 4세기 유목민의 네크로폴리스, 필리포프카 유적)

Руденко С.И. 1953 : Культура населения Горного Алтая в скифское время. М.-Л.: 1953. 402 с. (루덴코 1953, 스키타이 시대 알타이 산의 주민문화)

Чугунов К.В., Парцингер Г., Наглер А. 2017 : Царский курган скифского времени Аржан-2 в Туве. Новосибирск: ИАЭТ СО РАН. 2017. 500 с.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스키타이 문화권에서 몽골의 지역문화인 울란곰 문화는 기원전 5~3세기의 유적이다. 인접한 파지리크 문화와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또 차이점이 있다. 바로 그릇이다.

 

파지리크 문화에서 추야 강 계곡의 울란드리크 유적, 유스티드 XII유적, 유스티드 I유적 등에서는 무덤에서 대부분 발견되는 것은 목제 그릇이었다. 주로 쟁반형태와 손잡이가 한쪽으로 달린 잔이었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는 목제 쟁반이 출토되는 곳도 있지만 모든 무덤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고, 목제 잔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죽은 이들은 모두 토기와 함께 매장되었다. 심지어는 어린아이의 무덤에서도 보인다.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발견되었다(그림 1).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토기

 

아마도 생업과 관련되었거나, 그릇의 재료가 되는 소재 때문일 수 있다. 기원전 1천년기 중엽(기원전 6~5세기)의 몽골에서는 말, 소, 양, 염소, 낙타 등 5종류의 가축을 길렀고, 현재도 몽골에서 기른다.

몽골 소는 독자적인 유형으로 서몽고에서 가축화 된 것이다. 야쿠티야, 동시베리아, 자바이칼(바이칼 우편), 카자흐스탄, 몽골 등지에 분포하고 있으며, 아시아 소의 한 종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지만 기르는 동물 중 가장 선호된 것은 양인데, 투바, 알타이, 카자흐스탄 등 모두 비슷하다. 특히 양 꼬리를 선호하는데 기름기가 많은 종이 선호되었고, 그 중에서도 기름이 많은 꼬리는 유목민이 즐겨 먹는 부위이다. 그리고 양 꼬리가 무덤에서 종종 발견된다.

말은 유목민에게 부의 척도로 생각되는 동물이다. 주요 이동 수단이고, 젖도 이용할 수 있으며, 겨울에는 눈 밑에서 알아서 건초를 찾아 먹는다.

 

낙타는 건조한 지역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다. 매우 건조한 기후에 있는 유목민은 소는 사육할 수 없고 말, 양, 낙타가 우세하다. 현재 몽골 고비에서도 이 세 종류를 가장 많이 기르며, 투르크메니아 지역에서도 얼마전까지 가축 구성이 동일하다.

기원전 1천년기 몽골의 유목민들은 아주 건조한 반사막과 같은 기후에서 고산의 초원에 이르는 지역까지 이동하면서 목축했다. 그래서 노보고르도바는 그들의 생활은 매우 유동적이며 다양한 지리적 조건 속에서 동일한 목축은 없다고 일축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동물은 기원전기 1천년기 몽골의 일반적인 가축이고, 울람곰 유적에서 낙타는 기르지 않았을 수 있다. 울란곰 유적의 주변에는 큰 호수가 많은 지역으로 습기가 많은 지역에서 낙타는 기르지 않았을 것이다.

목이 긴 항아리 등 토기는 액체류 즉 동물의 젖이나 이를 가공한 유제품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쟁반류는 삶은 고기를 담는 그릇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두 유물의 빈번 정도는 아마도 기르는 동물에게서 주로 얻을 수 있는 음식의 공급원 차이일 수 있다.(정도의 차이지 이 집단에서 삶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유적에서는 청동솥에서 고기 삶은 흔적이 발견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대부분의 죽은 이 머리 위에서 토기를 두는 행위는 이웃한 주민들이 보았을 때 분명 다른 장법이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posted by 김재윤23

 

몽골의 기원전 5세기 울란곰 유적을 발굴한 노보고르도바는 동시대의 다른 유적보다 이 유적에서 토기가 많이 나왔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마도 토기 생산이 저조하면  ‘후진’적이라는 인식을 깨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동성이 강한 초원지역이 아닌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보면 유라시아 초원지역은 상대적으로 토기가 적게 출토된다. 신석기시대부터 토기가 유물의 많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리나라, 중국, 일본과는 대비된다(김재윤 2019). 그러나 이것은 식생활 문화의 차이 때문에 생긴 것(김재윤 2019)이지 토기가 많이 생산된다고 선진적이라고 할 수 없다.

 

단순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이 문제는 울란곰 유적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생업의 문제. 유목(遊牧, 놓아서 기르다)인가 목축(牧畜, 가두어서 기르다)인가 아니면 유목적 목축인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소비에트 시절부터 첨예하게 논쟁이 있었다. 인류학자 레빈과 체복사로프는 기원전 1천년기 계급사회가 막 만들어지기 직전에 유목적 목축사회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생각했다. 고고학적으로 나타난 근거로 보아 주로 말과 소, 양을 사육했고 특히 낙타 사육이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했다고 믿었다.

몽골과 자바이칼(바이칼 호수의 우측)지역에서 발견되는 판석묘(일종의 석관묘, 청동기시대 후기부터 초기철기시대까지 발견됨)에서는 말과 양 뼈가 많이 나오는데, 이미 사육을 했다는 증거가 있는 재갈과 재갈멈치이다. 말을 부리고 탔으며 작은 동물을 사냥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단순히 목축만 한 것이 아니라 정해진 방목지로 이동하면서 길렀다고 보아서 ‘유목적 목축’이 생업을 담당했다고 보았다.

동물에게서 고기와 우유를 얻었고 이를 가공해서 일종의 치즈와 빙과류 등을 만들었다. 이때 역할을 한 것이 동물의 가죽용기이고, 목기도 해당된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는 토기가 높은 비중으로 발견된다.

노보고르도바는 ‘유목적 목축’사회였다는 근거로 ‘토기’를 예로 들었다. 토기는 정주생활에서 유리해서, 소비에트 연구자(레빈과 체복사로프)들에게는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토기를 제작하지 않는다는 관념이 있었다. 하지만 울란곰 유적에서 나타난 토기는 반드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동했으나 일정기간 동안 정주하면서 토기를 제작했다고 본 것이다. 

 

 

필자는 유목적 목축의 개념이나 노보고르도바의 생각에 다 동의한다. 하지만 좀 이해가 안되는 것은 울란곰 유적이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의 비중이 높은 유적이고 매우 빠르게 형성되었다고 했다. 이는 어린아이의 비율이 동시대의 다른 유적에 비해서 높다는 인류학자 마모노바의 의견(아래 포스팅 참고)을 참고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사자의 머리 맡에 놓은 토기는 또 어떤 역할을 했는지 궁금하다.

기원전 5세기 경의 파지리크 문화(스키타이 문화 중 알타이 지역문화)와 울란곰 문화에서 발견되는 토기는 대부분 쿠미즈(유제품)를 담는 용도로 생각된다. 하지만 이 외에도 다른 의미도 있지 않을까? 특히 이 유적에서는 파지리크 문화와 다른 위치에서 토기가 발견된다.

 

그림 1. 울란곰 유적의 23호 무덤

 

2021.04.17 - [교과서 밖의 역사: 유라시아 스키타이문화 동쪽/울란곰 유적] - 기원전 5세기 울란곰 유적, 전쟁의 흔적

 

기원전 5세기 울란곰 유적, 전쟁의 흔적

스키타이 문화권 가운데 몽골의 지역문화인 울란곰 문화는 울란곰 유적으로 정의된 문화이다. 울란곰유적에는 나무로 만든 무덤과 돌로 만든 무덤이 공존한다. 각각 22기와 20기이다. 유적을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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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Новгородова Э.А. 1989 : Древняя Монголия (Некоторые проблемы хронологии и этнокультурной истории). М.: ГРВЛ. 1989. 384 с.(노보고르도바 1989, 몽골의 고대)

 

김재윤의 고고학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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