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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윤23
보이는 유물로 밝혀지지 않은 역사의 조각을 맞추고 있습니다.유라시아선사고고학전공.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역사학박사.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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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동북지역에 위치한 성곽은 산지성, 평지성, 곶 성으로 크게 분류된다.


3) 곶 성



설상으로 뻗은 곶 위에 위치하는데, 청동기시대(리도프카 문화와 다른 문화) 20곳과 말갈과 발해문화에 해당하는 것이 있다


평면형태에 따라서 궁형성, ‘자형 성, 부정형 폐쇄형 성곽으로 구분된다.

  

그림. 우스티-벨렘베 3중 토석성(곶 성중 궁형성에 해당된다)



(1) 궁형 성

이 형식의 성지는 자연의 입지에 따라서 성벽의 평면형태가 궁형모양이다.

이 형식은 곶 성 가운데서 가장 단순한 형태로 모두 16개의 성지가 해당된다. 고르노레첸스코예-1, 고르노레첸스코예-2, 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켐스코예-스칼리스토예, 미스 알렉산드라, 우툐스노예, 쿠댜, 데두시킨 클류치, 미스 테플리이, 쿠즈네프스코예, 오아시스, 미스 스트라시느이, 우스티-페야, 에딘킨스코예, 우스티-벨렘베 성곽 등이다.

. 평면형태. 성은 장대, 보루와 내성이 없는 매우 단순한 형태이다. 미스 스트라시느이, 우스티-제르칼노예와 같이 자연적 단구대 위에 취락을 경계 짓기 위해서 축조되었다. 성의 평면형태는 개방형으로 궁형인데 모두 가 다르다. 성지 가운데 가장 큰 곳은 미스 스트라시느이(28,000)이고 가장 작은 곳은 우스티 제르칼노예(15,000) 유적이다.

. 성벽의 축조방법. 이 형식의 성은 매우 단순한데 성벽은 다음과 같이 축조된다.


토성벽(쿠즈네쵸프스코예 성벽)

토석혼축벽(미스 스트라시느이, 미스 테플리이, 쿠댜, 우툐스노예, 케므코예-스칼리스토예, 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돌로 비스듬히 쌓고 흙으로 채우는 성벽(고르노레첸스코예-1)

토석 혼축벽이 기본이고, 돌을 깔아 놓은 곳이 있는 성(우스티-벨림베)

석성(데두스킨 클류치)

성벽의 높이는 0.3~1.5~2m가량이다.

성벽에는 해자가 있는데, 성벽을 쌓을 때 이 해자로부터 흙을 퍼 올렸다. 해자의 깊이는 1m를 넘지 않는다.

 

곶 성의 문지는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단순 절개면(미스 스트라시노예)

부가성에 설치된 문지(미스 테플리이, 쿠즈네쵸프스코예)

문지가 없는 것

 

. 용도. 모든 성은 취락용이고 취락을 경계하며 방어하는 역할이다.

. 특징과 연대. 평면형태 궁형의 곶 성은 최소한 세 개의 고고문화와 관련이 있고 청동기시대 및 중세시대와 관련이 있다.

A. 청동기시대의 성. 모두 9개가 해당된다(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켐스코예-스칼리스토예, 미스 알렉산드라, 우툐스노예, 쿠댜. 데두시킨 클류치, 스트라시노예, 우스티-벨렘베 등이다).

강의 하류와 해안가에 위치한다. 시굴이나 지표조사에서 출토된 고고유물은 대부분 리도프카 문화의 것으로 생각되며, 탄소연대에 따라서 기원전 10세기 후반으로 생각된다(미스 스트라시느이, 우스티-제르칼노예, 두브로빈스코예, 쿠댜, 우스티-벨림베 유적).

우툐스노예 성터에서는

지두문이 찍힌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아무르 강 하류의 초기 철기시대 문화인 우릴 문화의 특징을 보이는 것도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아서 청동기시대 말기에는 아주 복잡한 상황이었다. 리도프카 인은 내륙이 주요 거주지인이다. 하지만 이들이 강 하류와 바다의 항구 등에 성곽을 지은 것은 적으로부터 막기 위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해안가에 살던 사람은 얀콥스키 인인데, 많은 리도프카 문화에서 그들의 흔적이 확인된다(블라가다트노예-3,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의 5~7번 유형 등)

또한 아무르강 하류의 우릴문화가 확인되는 것은 이 지역까지 아무르 내륙인이 왔다는 것이 흥미롭다. 이 이주민들은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되면서 그들의 고향인들은 짓지 않았던 성지를 축조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아무르강에서 우릴문화의 성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B. 중세시대의 성지.

연해주 동북지역에서 곶 성에 해당하는 유적으로 말갈과 발해문화의 것이 있다.

말갈문화의 성곽 평면형태 궁형으로 강과 바다의 곶에 설치되는 된다(미스 테플리이, 쿠즈네쵸프스코예, 오아시스, 에딘킨스코예 성지).

유적의 입지는 강의 중류(쿠즈네쵸프스코예), 해안가 단구대(미스 테플리이, 오아시스, 예딘킨스코예 성지)인데, 이 곳은 방어나 보호가 필요한 교통로의 문지역할을 하던 곳이다.

대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말갈성곽으로 확인되었고, 성벽은 다른 어떤 돌을 섞지 않은 순수한 토성(쿠즈네쵸프스코예 성곽)과 이러한 성벽에 문지를 설치하는 성(미스 테프리이 미스, 쿠즈네쵸프스코예 성곽)이 있다.

성 내부에서 시굴조사 되거나 지표조사 된 말갈유물은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 중국 동북지방에서 확인되는 말갈문화의 것과 같다. 그 중에는 북한의 동북지역에서 확인되는 것도 있고 사할린과 일본의 홋카이도에서 출토되는 유물도 있다. 발해는 말갈족을 밑바탕으로 세운 국가로 9세기 까지 오랭캐를 현과 주로 편입시킴으로써 스스로의 땅으로 편입시켰다. 당연히 이러한 발해의 정치는 말갈족과 고아시아족 등의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미스 테플르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블라고스로베노예-2(Благословенное-2, Blagoslovennoye-2), 쿠르쿠니하(Куркуниха, Kurkuniha), 툰젠(Тунжэнь,Tunjeni) 등에서 출토된 토기와 비슷하다. 이들 유적의 절대연대 측정 결과 4~5세기에 해당된다. 이는 말갈문화의 것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황은 말갈인과 고아시아인 모두 이 유적을 이용했던 미스 테플리이 유적만이 유일하다.

제르칼나야 강 유역의 고르노레첸스코예-1과 고르노레첸스코예-2 유적은 발해시기의 곶 성에 해당된다. 고르노첸스코예-2 유적은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분소에서 연속발굴을 하고 있고, 발해의 것으로 규명하였다. 이 두 성지는 소형(25004000)이고 장대, 보루와 내성 등이 없는 성지로 취락용으로 취락을 방어하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곶 성은 원주민(말갈인)의 축조기법을 따르고 있다. 여기에 말갈 성지의 존재는 그들이 9세기 어느 때 쯤 발해국가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을 판명할 수 있다.

중국 사서에 따르면 이러한 성곽은 축조시 지역 기술자나 혹은 군인 들이 지휘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 중에서 가장 큰 주민 집단 마을이나 성을 주 혹은 현으로 불렀을 것이다(보로비요프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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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동북지역에 위치한 성곽은 산지성, 평지성, 곶 성으로 크게 분류된다. 그중에서 평지성은 방형, 다각형, 개방형으로 평면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3) 개방형 성곽



이 형식에 해당하는 유적은 소볼레프카 강 하류의 해안 단구대 위에 위치한 우스티-소볼레프스코예 유적(http://소볼레프카 강 유역의 성곽)만이 해당된다.

이러한 형식의 성은 주변이 절벽이어서 성벽을 모든 면에 돌릴 필요가 없어 직립평행하는 성벽이 몇 개 있는 모양이다.


. 평면형태. 내성과 보루, 장대 등이 없는 단순하다.

. 성벽의 축조방법-치와 문지가 없는 석성이다.

. 용도-취락의 방어용.

. 문화적 특징과 연대. 출토되는 유물은 말갈 트로이츠코예 그룹에 속하는 것으로 7~8세기 보다 이르지 않다.


. 기원. 원래의 지역적인 특징과 혼합된 양상을 보인다. 성곽의 지형학적인 면은 중국과 발해의 전통으로 보인다. 성벽의 모양이 곶의 모양에 따라서 축조되었기 때문인데, 이와 같은 경우에 발해와 말갈 중에서 트로이키코예 유형과의 혼합된 양상으로 판단된다. 발해가 국가영역을 넓혀 갈 때 소볼레프카 강 유역의 일부지역에서 연해주 동북지역의 새로운 영역에서 지역민과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평지성은 성곽의 자체적인 발달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고고학적 사실을 함께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가장 전통적인 형식은 방형성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발해의 것으로 8세기 초를 올라가지 않는다. 그래서 이 방형성에서 자체적으로 발달한 다각형 평지성은 방형성에서 두 모서리를 잘라낸 형태로 지형학적 입지와 방어기능 때문에 이런 모양으로 발전한 것으로 생각된다.


유적의 지형과 고고유물로 보아서 발해의 초기에는 아주 평화로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민들은 농경과 목축, 사냥, 어업 등을 행하였다. 연해주 북동지역의 방형 평지성의 존재는 이곳까지 아주 빠른 속도로 발해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주로 강의 중 하류역에 분포한다. 유물로 판단컨대, 연해주 북동지역에 존재하던 행정관청은 현정도 였을 것이다. 성의 크기나 내성의 존재 등으로 보아서 드지기토프스코예 성이 현의 행정관청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현의 경계는 방형 평지성과 산성가운데서 고개에 위치한 성의 위치 등으로 가늠할 수 있다. 제르칼나야, 루드나야, 드지기토프카, 브루실로프카, 말라야 케마 강 가에 위치하고 있다. 남서와 서쪽의 경계는 베누코보 고개로 들어가는 베뉴코프스코예 성지와 포드네베스노예 고개로 들어가는 포드네베스노예 성지가 있다.


동쪽의 경계는 동해로 바시코프스코예와 클류치 성지가 동해를 지키고 있다. 이 현의 남쪽 경계는 2개의 석성인 스미르코프 클류치와 자볼로트나야 성지가 있고, 평지성으로는 세레브랸카 강 유역 말라야 케마 성곽이 있다.

그러나 북쪽에서는 발해인과 트로이츠키 말갈인과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는데, 곶 성이 이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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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주 동북지역에 위치한 성곽은 산지성, 평지성, 곶 성으로 크게 분류된다. 그중에서 평지성은 방형, 다각형, 개방형으로 평면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2) 다각형 성곽



평지성 가운데 이 형식에 해당하는 유적은 켐스코예 성곽이 해당되는데, 동해로 들어가는 켐스코예 강 하류에 위치한다. 평면형태가 다각형인데, 좀 더 정확하게 하면, 방형 성지에서 두 모서리를 잘라낸 형태를 하고 있다.




 

. 내부형식- 단순한데 내성, 보루와 장대는 없다. 평면크기는 17,000이다.

. 축조방법- 치가 없는 단순한 구조인데, 성벽은 자갈돌로 높이 1~1.5m가량 세웠다. 문지는 2곳으로 성벽을 절개해서 만들었는데, 서로 마주보고 있다.

 

. 용도-다각형 성곽은 취락을 위해서 축조되었다.

 

. 기원과 연대- 유적에서 연대를 판단할 수 있는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연대와 문화적 특징 혹은 소속 등을 이야기하기 힘들다. 단지 평면형태로 볼 때 발해의 평지성 일종으로 연해주 남부 지역에서도 확인된다. 아마도 다각형 평면형태는 중국 전통인 방형 평지성에서 기원했을 것인데, 이 성곽보다는 좀 더 늦은 시기에 나타난 것으로 9세기 보다 올라가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각형 평지성은 발해의 특징으로 생각되는데, 발해가 중국과는 다른 스스로를 나타내기 위해서 내부법을 만들었을 때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기간에는 신생한 퉁구 만주국가가 영역을 확장하고 있을 때인데, 말갈족의 후손들도 포함된다. 이 때는 평화로운 시기는 아니었고, 중국 사서에 남아 있듯이 발해가 중국에 사신을 몇 번에 걸쳐서 사신을 파견하기도 했다. 발해는 또한 거란족과 충돌이 있었을 때로 성지가 방형보다는 좀 더 넓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 결과로 이런 평면형태 다각형의 성지가 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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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델레예프 편년법에 따라서 연해주 북동지역의 여러 성지에 대한 유형화를 하고자 한다. 고고문화의 기원, 편년과 계통문제와 관련된 기본적인 문제와 국가적 통일 문제 뿐만 극동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과 고고물질간의 해석과도 관계가 있다.

앞서 제 2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연해주의 동북지역에는 12개의 강이 존재하고, 58개의 성지가 조사되었다.

먼저 유적이 입지한 지형에 따라서 유형화 하고, 좀 더 구체적인 입지에 따라서 형식으로 나누었다. 그래서 전체 입지에 따른 유형은 1) 산지성, 2) 평지성), 3) 으로 나누어 진다.

 

1)1유형. 산지성

이 유형은 15개의 유적(베뉴코보, 시바이고우, 바시코프스코예, 클류치. 쿠날레이스코예, 포드네베스노예, 고르부샤, 시미르코프 클류치, 자볼로첸노예, 세셀레프스코예, 야슈, 소프카 류브비, 소욘스코예, 카라민스키 흐베르트, 말라야 카르마) 이 모두 포함된다.

산지성은 아주 높은 곳으로 주변과 성쪽으로 다가오는 길을 모두 관찰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한다. 특히 전쟁에 관련된 것이 많은데, 입지의 성격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1형식-구릉성곽, 2형식-고개성곽, 3형식-봉우리 성곽, 4형식-절벽성곽


(1) 1형식- 구릉성 산성

이 형식은 시바이고우, 쿠날레이스코예, 소프카 류브비 성지가 해당된다(그림 131, 14).

구릉성 산지성은 성벽이 모든 방면을 다 두르는 것이 아닌 개방형 성벽이다. 한 형식의 온돌이 설치되어 있고, 크지 않은 다양한 형태의 방어시설로 군사행정용 관청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형식의 성곽은 이 지역에서는 발전적인 형태는 보이지 않는데, 아주 짧은 기간 동안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성벽, 주거지, 궁전지, 보루 등을 고쳐서 쓴 흔적은 보이지 않는점도 이 형식의 성이 아주 짧은 기간만 이용되었다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그림 131. 구릉성 산성(7-시바이고우, 25-쿠날레이스코예, 44-소프카 류브비 성)



 

. 입지. 이 형식의 성지는 항상 산에서 내려오는 깨끗하고 차가운 시내물이 집수되는 곳과 가까운 곳에 축조된다. 각 성지는 큰 강의 지류 하류에 입지하는데, 시바이고우 성지는 제르칼나야 강의 지류인 우스티노프카 강 하류 보다 약간 위쪽에, 쿠날레에스코예 성지는 드지기토프카 강의 지류인 쿠날레이카 강의 하류, 소프카 류브비는 암구 강 지류인 세르바토프카 강의 하류에 축조되었다.

시바이고우 성지와 쿠날레이스코예 성지는 강의 하류에 위치하는데, 연해주의 북동 지역 산지성의 특징이 아니라 연해주 전체에서 확인된다. 비슷한 예가 샤이긴스코예(Шайгинское), 스칼리스토예(Скалистое), 예카테리노프스코예(Екатериновское), 아나네프스코예(Ананьевское) 성곽 등이 그러하다. 이러한 산지성은 성벽이 모두 둘러지지 않은 개방형 성벽인데, 그 용도는 대체적으로 전쟁이나 군사용 행정관청 혹은 가축 등을 기르기도 하였다. 그래서 당연히 대량의 말이 필요하기 때문에 물과 가까운 곳에 입지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소프카 류브비는 약간 예외인데, 동해에서 0.5km 떨어진 곳에 입지하는데, 이는 방어나 보초 시설과 같은 기능을 한다.

성벽은 구릉의 산마루를 따라서 주로 축조되는데, 구릉 사면에서부터 시작해서 밑으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문은 아래쪽에 설치된다. 소프카 류브비는 예외적으로 강과 접한 절벽위에 지어져서 따로 방어시설이 필요하지 않았다. 방어시설이 필요한 곳은 높은 곳 보다는 아래쪽에 필요한데, 그곳에 성벽이 축조되었다.


. 성곽내부구조. 산지성의 내부구조는 그 곳의 지형에 따라서 결정된다. 성곽은 성벽으로 보통 구획되고, 내부에는 보루, 내성, 생활구역으로 나눠진다.

생활구역은 항상 경사면에 특별하게 평탄면을 다듬는다. 시바이고우 성지 내에서는 3~5~8m높이의 상당히 높은 곳이고, 쿠날레이스코예 성지 내에서는 2~4m높이의 성지, 소프카 류브비에서는 1~3m 높은 곳에 설치되는데, 가장 단단한 구릉사면에 설치된다. 테라스 축조는 어떠한 경우든지 모두 같은데 1) 구릉을 가로 질러서 편평하게 다듬고 2) 소토로 기초를 다지고 3) 무거운 흙으로 번갈라 가면서 층층이 쌓아서 만드는 방법을 따르고 있다. 테라스의 크기는 각기 다르기 때문에 주거지가 1기 확인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여러 기 확인되는 경우도 있다. 주거지에서는 고래나 고래 온돌이 설치되었다.

16세기 사서에 따르면, 여진족은 이 단구대 위의 숨겨진 도시안에 귀족이나 그의 친척들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2003).

 

내성은 시바이고우와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에서 확인된다.

내성은 산쪽으로 가까운 곳에 축조되는 특징이 있다.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은 북쪽 성벽, 시바이고우 성벽은 서쪽 성벽에 가까운 곳에 축조된다.

내성의 평면형태는 장방형에 가까운데 쿠날레이스코예, 시바이고우 성곽도 몇 개의 장방형 내성이 모여서 큰 성벽으로 둘러 쌓인 것이다.

) 내성벽과 단구대는 축조되는 것이 정형화되어 있다. 그 장소를 편평하게 다지고, 흙을 채워서 기저부를 만들고, 그 위에 건축물의 계측하고 그 곳에 내성의 모서리부터 성벽을 쌓아 올렸다.

내성에는 중심지가 되는 큰 건물지가 있는데, 그 건물지의 모서리가 동서남북방향과 일치하고 있다.

16세기 사서에 의하면 내성 안에는 만주족의 귀족과 그 친인척 들이 살았다고 기록되었는데, 이에 동의한다. 그 이유는 연해주의 경우도 내성이 행정관청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프카 류브비에서는 이러한 건물지가 없는 데, 내성이 있는 성곽과는 용도가 다를 것으로 추정된다.

 

보루는 시바이고우와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에서 확인되고, 소프카 류브비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성벽과 멀지 않은 곳에 설치되었는데,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에서는 동쪽, 시바이고우 성지에서는 북쪽과 가까운 곳에서 확인된다. 특징은 다음과 같다.

평면형태-방형

장축길이-19~20m

성벽의 모서리는 동서남북의 방향과 일치

보루 내에는 자형 혹은 자형 온돌이 설치된 주거지가 2~3기 확인됨.

문지는 2~3m성벽을 절개한 것으로 현존하는데, 나무로 시설물을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

성벽은 판축기법을 이용해서 흙으로 쌓아서 만든 것.

평면크기 400.

용도는 군사용이다.

 

방어시설은 세 성곽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된다.

성벽은 모두 한 가지 방법으로 제작되었는데, 판축기법으로 축조되었다. 이 판축기법으로 인해서 높이가 8m까지 성벽을 축조할 수 있었다.

좀 더 낮은 성벽의 경우(쿠날레이스코예 성지)도 판축기법을 이용했는데, 시바이고우 성지에서는 문에 옹성시설을 한 곳도 있다.

집석시설

성벽에 보초와 관련된 시설

성벽에 투석을 할 수 있는 시설물(시바이고우, 쿠날레이스코예 성지)

각 형식은 다시 하부 형식을 내포한다.

 

구릉성 산지에서 소프캌 류브비 성곽은 아래와 같은 특징이 있어서 1형식의 하부형식으로 구분한다.


A. 하부형식 1

성벽은 산마루에 설치되지 않고, 범람원을 따라서 설치되었다.

치와 집석시설이 확인되지 않는다.

내성이 없다.

보루가 없다.

성의 평면크기가 4500로 작다.

소프카 류보비 성곽은 방어와 보초용으로 동하국의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통제하는 용도로 축조되었다.

 

. 용도. 산성의 평면크기와 위치가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고 있는데, 이는 연해주의 남쪽과 중부지역을 통제하기 위함이 명확하게 보인다. 연해주에서 산성 중에서 24개의 유적이 구릉에 위치하는데, 북동 지역에서는 3개만이 확인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유적은 시바이고우 성지로, 가장 큰데 평면적이 20,000가량이다. 성 내부에는 보루, 내성, 생활구역 등이 설치되어 있고, 성벽에는 치, 투석시설, 방어시설 등이 확인된다. 하지만 아주 두터운 성벽과 사용되지 않은 많은 투석기 등은 이곳에서 실제로 전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화재의 흔적이나 주거지가 파손 혹은 불에 탄 흔적 등도 없고 유물에서도 이런 전쟁의 흔적이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성곽내부가 파괴 된 채 남아 있었다면, 거의 붕괴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지만 이 성에서는 그런 점이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쿠날레이스코예 성곽은 연해주 동북지역에서 두 번째로 큰 성지로 12,000를 차지한다. 가장 높은 성벽은 동쪽벽으로 높이가 8m에 달하는데, 적으로부터 침략을 막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이나 충돌의 상황에 직면한 흔적은 소프카 류브비 성곽에서만 관찰된다. 이 성곽은 동하국의 해안 동북경계 중에서 동해 바다쪽을 지키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푸른 관옥과 철제 화살촉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성곽에 갑작스런 침입으로 인해서 버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동하국의 동북경계를 표시하는 직접적인 유적은 말라야 카리마 성지이다. 이곳은 지지보프스나야 강의 지류인 암구 강으로부터 들어오는 길목과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서 세워졌다.

구릉 상 위의 산성은 동하국의 군사행정관청용으로써 성벽이 사방을 모두 다 둘러싸고 있지는 않은 개방형이다. 이 성곽은 동해 바다를 통제하기 위해서 축조된 것으로, 10세기 중반부터 퉁구스- 만주족의 조상격인 말갈족이 이러한 지형에 성을 짓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말갈족은 교통로에 아주 두터운 방어시설을 축조하는 것에 능했다. 동하국은 여진족의 국가로 말갈족이 아닌 몽골족으로, 전쟁과 관련된 무기(旋風五砲)와 같은 전쟁용 화차, 불화살촉, 투석기, 기병 등)를 모두 가지고 있었고, 전쟁의 기술도 상당했다.

쿠날레이스코예 성지에서 알 수 있듯이 성곽에서는 스스로 자급자족한다. 쿠날레이스코예 동북쪽은 구릉과 가까운데, 이 곳에서 중국에서 농사를 지을 때와 비슷하게 이용된 경작지가 확인되었다. 이곳에서는 현재까지도 현지민이 농사를 짓고 있다. 평면형태와 다시 개축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성곽은 20~25년 정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축조되어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성벽을 축조하는 방법은 아주 정형화 된 것으로서, 원주민인 퉁구스-만주족이나 고아시아족의 전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당연히 이러한 성곽을 축조하기 위해서 중국에서 기술자를 데리고 왔을 것이고, 지형에 맞게 축조하고, 직접 짓는 것은 군인과 지역민 들이 했을 것이다. 성을 계획하고 축조하는 시간은 아주 빨리 행해졌지만 이는 모두 전쟁을 위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 기원. 개방형의 성벽인 산성의 축조방법은 혼합적인 요소가 있다.


성곽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축조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현재 고구려 성곽의 특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이유는 연해주와 한국의 지형이 거의 유사하다는 점과 연결시켜 볼 수 있고, 그 용도 또한 방어나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 등 같다. 성곽의 평면형태에서 내성, 보루, 생활 구역, 성의 모서리가 동서남북 방향, 흙으로 기단을 설치하는 것 등은 중국의 축조기술이다.

그런데 건축물은 각기 다른 전통을 따르고 있다. 성벽을 흙으로 판판히 축조하는 판축 기법과 성벽의 모서리 부분부터 축조하는 방법 등은 모두 중국의 특징이다. 그 외의 성벽을 자연지형에 따라서 모두 돌리지 않는 점, 언덕의 산마루에 축조하는 점 혹은 강의 범람원에 축조하는 것과, 산이 아닌 곶 등에 축조하는 것은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부터 있어왔으며, 말갈문화의 전통이다.

그리고 성벽 위의 투석기와 관련된 집석유구와 치의 축조 방법 등은 이블리예프에 따르면 거란족의 전통이라고 한다(이블리예프 1983).

 따라서 개방형 성벽이 특징인 산성은 여러 가지 문화를 받아들인 혼합된 특징을 보인다. 아마도 전쟁과 정치적 목적으로 고구려, 중국, 퉁구-만주족의 여러 기술자들을 데리고 성곽을 축조했던 것이 가장 안전하고 믿을 만 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 성곽에서는 고고유물이 확인되었는데 금속과 토기가 대부분인데, 1217~1234년에 존재했던 동하국의 것이다. 역사적 시간과 유적에서 얻어진 방사성탄소연대(745±45, COAH 4182)와 출토된 동전으로 보아서 그 연대는 서로 상응한다. 이러한 유형의 성지가 여러 전통이 혼합된 양상을 보이는 것은 신생국가로써 자신의 영토를 지치기 위해서 그 당시 존재했던 가장 낳은 성 축조기술들을 모아서 새로운 유형의 성을 축조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김재윤의 고고학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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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르가 강은 연해주에서 큰 강 중에 하나이다. 이 강의 수원지는 시호테알린 산맥에서 발원하는데 거의 호르 강과 우수리 강 유역과 접하고 있다. 이 강 수계의 길이는 515km이고, 강의 흐름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타타르만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강의 집수지 너비는 7,760,000이고, 강의 길이는 212km이다. 수원지에서 하류까지 길이는 1080m에 달한다. 이 강의 좌안 지류는 다그디(Дагды,Dagdy) (길이 70km), 모이(Мои,Moi)(길이 45km), 이시미(Исими,Isimi)(길이 45km), 아그주(Агзу, Agzu) (길이 30km), 우안의 지류는 호타게(Хотаге, Khotage), 푸히(Пухи,Pukhi) (길이 60km), 쿠크시(Кукси,Kuksi) (길이 30km), 볼샤야 소하트카(Большая Сохатка, Bol'shaya Sokhatka(길이 36km), 부르리바야 강이다. 사마르가 강 유역에서 가장 넓은 부분의 너비는 105km, 길이는 140km 이다.

사마르가 강의 집수지는 예딘카, 코피 강, 안뉴이(Анюй,Anyuy) , 보트치(Ботчи,Botchi ), 넬마(Нельма,Nel'ma ), 브토라야 사마르가(Вторая Самарга,Vtoraya Samarga ), 호르, 아디미(Адими, Adimi), 루드자(Лудза, Ludza) 강과 접한다.

사마르가 강 유역은 시호테 알린 산맥의 동쪽과 서쪽을 연결시켜주는 것과 관련이 있으며, 북쪽과 남쪽도 연결시켜 주고 있다.

사마르가 강 유역에서는 사마르가-6으로 명명된 자연방어적인 성격이 강한 유적과, 고라 쿠르굴나야 성곽이 알려져 있다(그림 127, 30페이지).

 

그림 127. 사마르가 강 유역의 성곽 위치도(57, 사마르가-6, 58-고라 쿠르글라야 성곽)

 

1) 사마라-6 토성(루체이 죨타야)

사마르가 강의 지류인 죨타야(Желтая, Zheltaya) 냇가에서 700~800m 아래로 떨어진 곳으로, 사마르가 마을에서 9km 떨어진 곳으로 사마르가 강 좌안의 절벽 가장 끝에 위치한다. 토성은 아주 높은 곳으로 사마르가 강의 계곡과 하류가 모두 보이는 곳에 입지하고 있다. 절벽의 오른쪽으로 가장 끝에는 그 꼭대기의 끝으로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하게 돌로 덮여 있다. 이 절벽은 돌머리 산으로 불리는데, 사마르가 강을 기준으로 높이 60m정도이다. 이 절벽의 북쪽으로 서에서 동쪽으로 성벽이 축조되어 있다(그림 128).

이 절벽의 시작지점에서부터 성벽까지는 70~77m이고, 성벽의 전체길이는 97m, 높이는 0.5~0.5~1m이다. 기저부의 너비는 3~4~4.5m이다. 성벽은 부채꼴 모양으로 휘어진 것인데, 돌을 섞은 흙으로 축조되었다. 최소 0.5m부터 다양한 크기의 돌을 사용하였다. 흙은 해자로부터 퍼 올린 것이다. 해자는 성벽을 따라서 안쪽에 있으며, 깊이는 0.5~0.7m,너비는 1~1.5m~2m이다. 성벽은 매우 단순하며 문이 없다.

 

그림128, 사마르가-6 성곽



성벽에는 치나 다른 집석 시설은 확인되지 않는다(사진 65, 그림 128)

환호의 내부는 단순한 편인데, 너비 3~4m, 깊이 0.4~0.5m의 수혈이 4기 확인된다. 동쪽의 2번 수혈은 방형으로 4벽은 동서남북 방향과 일치한다. 동쪽벽면의 토층은 다음과 같다.

 

표토-0.07~0.10m

노란색 간층과 숯과 돌이 혼입된 베이지색 사양토층(문화층)-0.35m

시굴 구덩이에서 북동과 남동쪽 모서리의 깊이는 부식토층을 기준으로 0.20~0.25m이다. 청동기시대 리도프카 문화의 토기와 석제의 자귀 등이 확인되었다(그림 129).



  

그림 129. 사마르가-6유적의 출토품


  

사마라-6번 토성은 산성으로 성벽의 평면형태는 궁형이고 크기는 소형이다. 성벽은 돌과 흙을 혼합했는데, 평면형태는 매우 단순하고 내부는 편평하다. 치와 보루, 내성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리도프카 문화의 것으로 기원전 10세기 정도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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